지도로 읽는 욕망의 세계사


사람은 읽는대로 만들어진다. 그러나 놀라운 발견, 칵테일효과에 의하면 사람은 들리는 것을 듣지, 들을 수 없는 것은 듣지 못한다. 우산 장수에게는 우산만 보이고, 신발 장수에게는 신발만 보인다는 것. 그러니 그동안 축적된 정보가 새로운 정보를 결정하게 된다. 이러한 논리에 의하면 사람은 읽는대로 만들어지지만, 읽는 것도 그동안 축적된 정보에 의해 읽혀지는 것이다. 과거는 미래를 여는 열쇠가 된다. 


음식도 편식이 있듯, 독서도 편독이 있다. 자신이 원하는 것만 읽고, 읽고 싶은 것만 읽는 것이다. 일종의 독서의 관성이랄까. 그러나 이 모든 것을 꺽는 하나의 힘이 존재한다. 그것은 '호기심'이란 것. 격이 없는 말로 한다면, 하구잽이가 될 것이다. 많은 일은 벌려 놓고 마무리되지 않는 그런 종류의 사람들이다. 특히 나!


8월 7일에 구매한 오지 도시아키의 <세계 지도의 탄생>이란 책이 있다. 얼마 전에 발견한 책이다. 웬

발결? 사 놓고 읽는 것을 망각한 책이다. 기억에서 배제된 책이라나 할까. 책의 입장에서 매우 억울할 것이다. 어쨌든 읽고 있다. 그런데 출판사가 '알마'다. 금시초문이다. 머리말에 이런 문구가 나온다.


비행기를 타고 해외에서 돌아오는 길에 일본열도에 이르러 창밖으로 해안선을 내려다보고 '지도와 똑같구나'하고 생각한 적이 있다. 5


지도와 똑같다. 누군가 말했든 꽃을 보고, 그림 같다고 했단다. 꽃을 보고 그린 그림인데 말이다. 실물과 대물이 바뀌었다. 지도는 지도를 만든 사람이나 나라의 정신세계를 볼 수 있다. 굳이 어느 나라를 지적하지 않아도 모든 나라는 지도를 그릴 때 자신의 나라를 중심에 넣는다. 중국이 그리면 중국이 중심에, 미국이 그리면 미국이 중심에 있을 것이다. 세계여러나라의 지도 변천 과정을 잘 보여주는 책이다. 저자가 일본인 이기에 일본 지도에 대한 이야기가 종종 나온다. 


저자는 여기서 지도의 4요소를 '과학성' '실용성' '사상성' '예술성'으로 본다. 과학성과 실용성은 최근에 지도에 부여된 것으로 불과 200년 전까지만 해도 지도가 정확하다는 말을 사용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사상성은 뭘까? 


"세계를 어떻게 볼 것인가?라는 세계를 바라보는 관점, 즉 세계관과 직결되어있었다. 세계관이라는 사상을 이야기하고 그것을 형태로 표현하는 일이 지도에 요구되었던 것이다. 이를 지도의 사상성이라고 하자. 6


조선을 표현한 최초의 지도인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이다. 중국 사대주의에 빠진 조선의 생각을 담은 이 지도는 조선이 아닌 중국을 중심에 두고 있다. 조선의 사상성을 지도에서 읽을 수 있다. 지도 한 장에 이리 많은 생각이 담겨있을 줄이야. 


고대 지도의 특징은 과학성보다 사상성이 도드라진다. 기원전 6세기의 것으로 추정되는 바빌로니아 지도는 이역, 즉 경험할 수 없는 관념과 신화의 세계까지 그리고 있다. 저자는 이것을 세계관을 표현한 것이라고 한다. 




지도에 관련된 책을 찾아보니 의외로 재미있을 만한 책이 몇 권 보인다. <세상을 담은 그림지도>와 <지도로 보는 세계지도의 비밀>과 <지도로 보는 세계사>도 좋고, 가장 두껍고 읽을 만한 책은 <욕망하는 지도>일 것이다. 


















지도의 역사를 보려면 <세계 지도의 역사>가 가장 정리가 잘 되있다. 















지도로 역사를 살피는 아틀라스 세계사 시리즈도 나와있다. 역사를 공부하는데 재미와 명쾌함도 더불어 선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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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에게 추천하는 책



분명 서평이다. 그런데 아주 특이하다. 서정적이고 낭만이 있다. 때론 흠칫 놀라게 한다. 길어야 서너 쪽에 불과한 한 책의 이야기가 단편극을 보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이런 서평 처음이다. 그리고 여성, 아니 엄마라는 단 하나의 주제로 50권의 책을 엮었다는 점도 참신하다. 부제는 이 책의 전체를 조망한다.

 

"대한민국에서 엄마로 살아가는 고단하고 외로운 당신을 위한 독서 처방전"

 

결국 힐링독서가 된다. 책을 통해 쉼을 얻고, 길을 찾고, 인생을 밝힌다. 프롤로그의 제목을 '엄마의 신화를 기다리며'로 정했는데 의외다. '엄마의 신화를 벗기며'가 아닐까. 역행하는 듯한 제목의 목적이 마지막 문장에서 드러난다.


"대한민국의 엄마들이여, 이 책을 읽으면 그대들만의 신화를 만들어가기를"


그랬다. 엄마의 반란이거나, 그들만의 도전의 신화를 만들라는 말이다. 그렇다면 제목이 정당하다.

 

엄마는 외롭고, 엄마는 힘들고, 엄마는 화가 난다. 엄마는 자유를 원한다. 엄마는 사람이다. 그래서 엄마는 행복할 권리도 있다. 남편과 가족에게 종속된 엄마가 아닌 한 인격체로서의 엄마를 바라보아야 한다. 이 책을 그렇게 되기를 원한다. 엄마를 벗어나지 말라는 당부도 있지만, 엄마로만 남기도 원하지 않는다.

 

"우리는 엄마가 행복해지는 지도를 만들고 싶었다. 나침반이 방향을 알려주는 지도보다 마음으로 느끼고 마음으로 공감하는 길, 두 팔을 활짝 벌리면 살짝 스쳐지나가는 바람이 있는 길을 알려주는 지도를 만들고 싶었다. 이 책은 그 길을 먼저 걸어간 여성들이 만든 지도다."(10)

 

내가 가지고 있는 책은 12쇄 본으로 20121010일 판이다. 그런데 알라딘에 들어가니 세일즈 포인트가 고작 196이다. 세일즈 포인트만으로 그 책을 가늠하기는 어렵지만 무시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만큼 관심이 적다는 뜻이기도 하다. 엄격한 의미에서 이 책은 서평이면서 일반 비평적 서평이 아니다. 공저자의 주장대로 '공감'을 위한 서평이다. 필자와 책의 내용이 모호한 경계를 이루고 있다. 책의 내용인지 서평자의 이야기인지 구분하기가 힘든 곳이 여러 곳이다.

 

"주님등록증 발급 신청을 위해 주민등록등본을 떼었을 때, 낯선 단어들이 그 안에 있는 것을 알았다. 지금까지 알지 못했지만, 결혼 이후부터 존재했던 단어들이다. 바로, 내 남편의 본적이었다. 그곳에는 나의 지난 흔적이 남아 있지 않았다. 그렇다면, ''는 도대체 어디 있는 것인가? 언제부터 내 이름 석 자는 작디작은 주민등록증 안에만 있고, 나는 누구의 엄마로, 누구의 아내로만 살고 있는 것일까?"(17)

 

이 글은 김형경의 [사람풍경] 김성리의 서평의 일부분이다. 김형경이 궁금해진다. 찾아보니 책이 여럿이다. 에세이를 유난히 좋아하는 나에게 멋진 읽을 거리를 줄 것 같다. 
















2부에서는 '인생이라는 강을 건너는 법'이란 거창한 제목을 달았다. 이곳에서는 에릭 와이너의 [행복의 지도]와 앤 타일어의 [우연한 여행자] 최호철의 [을지로 순환선] 등이 소개된다. 다시 김성리의 글로 돌아가 보자. 에릭 와이너의 [행복의지도]를 풀어내면서 이렇게 적고 있다.

 

"태생적으로 역마살을 타고난 남자가 행복 탐색을 위해 열개의 나라를 여행한 후 책을 냈다. 그 책, [행복의 지도]에서 이 남자는 말한다.


행복을 찾는 것이 불행의 중요 원인 중 하나이긴 하지만, 그건 괜찮다. 난 이미 불행하니까.

그래서 행복을 찾지 못한다 하더라도 밑져야 본전인 셈이다. 이 남자가 행복을 찾아가기 위해 보는 지도의 이름은 '남들 따라 하지 않기'. 그 지도대로 행복 탐험을 떠났고, 그의 지도에는 다음과 같은 지명이 첨가 되어 있다."

여행은 언제나 제자리다. 왜냐고? 돌아갈 집이 없다면 여행은 배회가 되고 저주이다. 결국 [행복의 지도]의 주인공은 집으로 돌아오고 아내와 아이들에게서 행복을 발견한다. 김성리는 이렇게 말한다.

 

"불행하게도 다수의 따라쟁이들은 오늘도 행복을 옆에 두고 먼 곳을 배회하고 있다."

 

우리의 모습이 아닌가. 행복을 곁에 두고 늘 불행하다고 생각하는 나의 모습이다. 그렇다면 행복의 원천인 아내, 즉 이 책의 주제인 엄마들이 아니던가. 그러니 엄마들이여 용기를 내시라. 그대들이 있기에 대한민국은 행복한 법이니!

 

이 책에서 알려주는 엄마들이 읽으면 좋은 책 몇 권을 담아 본다.

 

사람풍경, 엄마의 마흔 번째 생일, 행복의 지도, 아내와 함께한 마지막 열흘, 말더듬이 선생님, 책 읽는 뇌, 내 이름은 호프, 불량한 엄마, 가족의 재탄생, 그리고다른 세상의 아이과 빼앗긴 미래 들을 추천한다.

 

































제리미 시브록의 [다른 세상의 아이들]에 대한 구정은의 첫 문장이다.

"지금 이 순간, 지구촌 어디인가에서는 수천만 명의 어린이들이 농장과 탄광, 공장 등에서 착취적 노동을 강요당하고 있다. 노예제가 폐지된 후 가장 빠르게 노예로 흡수된 계층이 바로 어린이였다."


그럼 즐라타 필리포빅. 멜라니 챌린저의 [빼앗긴 내일]은 어떤가. 이 책 역시 전쟁으로 인해 내일을 빼앗긴 어린이들의 이야기다. 아니 저자가 어린이들이다. 이스라엘, 팔레스틴 등 전쟁의 포화 속에서 내일을 잃은 어린아이들이 쓴 일기를 모은 것이다. 눈물이 나오고 짠한 마음을 거둘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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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물선 2014-12-07 09:1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세일즈포인트가 그런척도로 보는거네요.

낭만인생 2014-12-07 13:12   좋아요 2 | URL
정확하지는 않지만 참고는 할 수 있는 지표죠.
 

올해 가기 전 사고 싶은 책


갑자기 사고 싶은 책이 잔뜩 늘었다. 보이는대로 장바구니에 담았더니 27만원이 넘어간다. 세상에... 아내에게 보고했다. 아내의 묘한 대답. 

"장바구니에 담고 싶으면 얼마든지 담으세요!"

사주겠다는 것인가? 뭘까? 저 묘한 대답은.... 


어쨌거나 나는 담는다. 고로 존재한다. 

다시 몇 권의 책이 보인다. 고양이....




바로 이책...



우리 집에 고양이가 두 마리 있다. 길고양이를 주워 키우고 있는데 제법 컸다.

귀여운 것들...








내가 사랑한 시리즈도 좋다.  지난 번에도 언급한 노숙자와 고양이의 기구한 만남을 다룬 책. 그런데 놀랍게 노숙자와 강아지의 만남을 다룬 책도 있다. 둘 다 사고 싶다. 











cyrus 님의 추천으로 <그림속의 고양이>도 추가합니다.




아참....... 언제 사줄련지... 

어쨌든 밀란 쿤데라의 책이 이상하게 읽고 싶다. 겨울인데 말이다. 

커피숍 소파에 몸을 웅크린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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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물선 2014-12-06 17: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내가 사랑한. 시리즈가 있군요~

낭만인생 2014-12-06 18:15   좋아요 0 | URL
그러게요. 저도 처음 알았습니다.

cyrus 2014-12-06 18:1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스테파노 추피의 <그림 속의 고양이>라는 책도 좋아요. 화가들이 묘사한 다양한 고양이의 모습을 볼 수 있어요.

낭만인생 2014-12-06 18:15   좋아요 0 | URL
그렇군요. 추천 감사합니다.

수이 2014-12-06 23:1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내가 사랑한. 시리즈 저도 다 사고 싶어요. 일단 목록을 먼저 ^^

낭만인생 2014-12-07 05:40   좋아요 0 | URL
그렇죠. 저도 내가 사랑한 시리즈에 관심이 갑니다.
 

[책 속으로 떠나는 여행]

 47회 고 싶은 책과 읽고 싶은 책

2014,12,05 금, 추으나 맑음


장정일의 책 [빌린 책 산 책 버린 책]을 읽었다. 몇 달 전. 오늘도 꺼내 몇 곳을 골라 읽는다. 책이란 여전히 진행형이다. 그 때 읽었다고 망각으로 던질 책이 아니다. 책은 언제나 새롭다. 그건 내가 새롭기 때문이다. 서두에 독서일기에 대한 문장이 눈에 들어온다.

 

독서일기 라는 말이 여기저기 워낙 많이들 사용하고 있어서, 원래부터 그런 글쓰기 용례나 단어가 있기나 한 듯이 자연스럽게 여기고 있지만, 실은 이 용어가 생긴 것은 1994[나의 독서일기]가 나오면서부터다. 그때부터 독서일기란 신조어가 일반적인 독후감이나 독서 감상문과 같은 층위의 일반 명사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모두들 이 단어를 무심히 사용하기 때문에 쉬워 보이지만, 실제로 독서일기란 실현 불가능한 글쓰기다. p11

 

이런! 이건 문장도 아니다. 군더더기도 많은데다 한 문장이 너무 길다. 한 숨에 읽기에 버겁다. 출처는 2010830일 발행본이다. 고작 3년 전 책이다. 장정일! 문장력이 조금 그렇다. 지금은 많이 달라진 것으로 보인다. 그 때는 그랬다. 지금까지 마티에서 3권이 나온 것으로 안다. 검색해 보니 아직도 판매 중이다. 순전히 책 이야기만 담았다. 독서읽기가 맞다. 지금 내게는 마지막 3권을 뺀 두 권이 있다. 첫 책은 꺼내 여기저기 읽어 낸 흔적이 보이지만, 둘째 권은 아직도 구석에 처박혀 있다. 장정일 스타일을 좋아하지 않는 건 아닌지 내심 걱정이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스타일의 책인데 말이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보면 그건 순전히 저자의 책임이 가능성이 농후하다. ? 무엇 때문에? 그건 문장력이다.

 

그렇다고 장정일이 문장력이 형편없다거나 낮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나의 성향에 맞지 않을 뿐이다. 나는 장정일을 읽었고 계속 읽을 것이니 더 이상 비판의 날을 세우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 여기서는 하고 싶은 말을 하고 싶다
















책을 쓸어가면서 문장 주워 담기를 좋아 한다. 그래서 인지 나의 독서노트에는 문장 담는 곳이 따로 있다. 서평이나 감상문을 적은 다음 마지막에 항상 밑줄 긋기라든지 주워 담은 문장이란 제목을 걸고 책 속에서 감동적이거나 중요한 문장을 담아 놓는다. 종종 그 문장들이 요긴하게 쓰일 때가 많다. 한 권의 책보다 한 문장이 절대적일 때가 있다는 것은 문장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반증하는 것은 아닐까.

 

예를 들어보자 고 박완서의 <세상에 예쁜 것>이란 산문집이 있다. 재미있게 읽었던 책인데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러나 딱 한 문장은 망각의 괴물이 잡아먹지 못했다. 왜냐고? 노트에 적어 놓았거든. 바로 이 문장.

 

내 기억의 창고도 정리 안 한 사진 더미 같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건 뒤죽박죽이고 어둠 속에 방치되어 있고 나라는 촉수가 닿지 않으면 영원히 무의미한 것들이다. <중략> 아무리 어두운 기억도 세월이 연마한 고통에는 광채가 따르는 법이다. 또한 행복의 절정처럼 빛나는 순간도 그걸 예비한 건 불길한 운명이었다는 게 빤히 보여 소스라치게 되는 것도 묵은 사진첩을 이르집기 두려운 까닭이다.”

 

멋지지 않는가. 그래서 장정일의 책은 좋지만 가치가 적은 책이다. 나의 문장 담기 독서법에는 말이다. 장정일씨 앞으로 멋진 문장 많이 써주길 바랍니다. 허세가 아닌 실존적 지혜가 담긴 문장을 말입니다말이 나왔으니. 장정일이 좋아하는 작가를 알아보자. 서두에 이렇게 밝힌다.

 

박노자 씨와 고미숙 씨의 책처럼 학문적 기초가 충분하면서도 도발적인 문제제기를 하는 책들을 좋아합니다.

 

박노자, 고미숙. 고미숙은 몇 권 읽었다. 가장 기억에 남는 건 <공부의 달인 호모 쿵푸스>. 공부에 대한 이야기라기보다 철학이었다. 근대적 교육이 지식과 몸이 분리된 이원론적 공부라면, 동양적 공부는 지식과 몸이 일체된 공부다. 지식과 몸이 따로 놀지 않았던 것이다. 마치 자전거 타는 공부처럼 말이다. 경향신문에서 주도했던 <알파 레이디 북토크>에서도 고미숙은 한 부분을 차지하는데, 이곳에서도 여전히 몸의 인문학을 강조한다. 나도 고미숙의 책은 좋아 한다. 고미숙의 책을 더 찾아보니 꽤 된다.
















고미숙에게 가장 적합한 책은 아마도 <고미숙의 몸과 인문학>이리라. 나머지는 이 책의 해설이나 주석쯤 되리라. <나의 운명 사용설명서> 역시 고미숙 다운 책이다. 고미숙은 전체적으로 동양적 사고를 가지고 있기에 한의학에 관련도 책도 여럿 보인다. 가장 대표적인 책이 <동의보감>이다. 춘천에서 태어난 고려대를 졸업하고 이곳에서 박사까지 마친다. 특이하게도 공부 공동체인 <수유+너머>를 만들어 활동하다 2011년부터는 <남산강학원><감이당>에서 활동하고 있다. 감이당의 모토를 몸, , 글의 일치라고 하니 몸에 대한 집착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나의 관심을 끄는 책은 <누드 글쓰기>다. 보관함에 담아 두었다 살 작정이다.
































박노자는 누구일까? 박노자, 본명이 아니었다. 러시아인이었다. 2001년 한국인으로 귀화했다. 본명은 '블라디미르 타코노프'이며, 소련에서 태어났다. 소련이 무너지고 자본주의 성향의 러시아로 변화하는 과정을 지켜본다. 20003월에 노르웨이로 이주한다. 현지 오슬로 대학 한국한 교수로 있다. 사회주의에서 태어났는데도 사회주의에 대한 추억을 가지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자본주의에 대한 혐오가 느껴지기 때문이다. 모두가 행복하게 사는 이상주의 나라를 꿈꾸는 것을 보면 그는 분명 공평한 세상을 기대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알라딘 검색을 통해 박노자를 검색하니 50권이 넘는 책이 검색된다. 대체로 그의 책은 역사에 관련된 것으로 사회주의적 관점에서 바라보고 있다. 나는 아직까지 단 한 번도, 한 권도 박노자를 읽지 못했다. 이름은 들었지만 그의 성향이 무엇인지는 오늘 독서일기를 쓰기 위해 자료를 검색하면서 알았다. 참 나도 무심하다. 하여튼 장정일은 이러한 진보적 성향의 작가들을 좋아한다.

 

그럼 나는? 나 역시 장정일의 성향과 비슷하다. 그가 첫 권에서 언급한 피에르 바야르의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에서 이렇게 말한다.

 

복거일이나 고종석의 저작을 읽으면서 그들이 지지하는 정치적 이념을 파악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그 사람의 책을 온전히 읽은 게 아니다. 참된 독서란 내 앞에 주어진 개별적인 책을 읽는 것일 뿐 아니라, 그 책을 생성한 유. 무형의 생산 현장 전체를 읽는 일이다


에밀 파게도 <단단한 독서>에서 저자를 읽어야 한다고 목소를 높이다. 책은 저자의 것으로 저자의 삶, 사상, 그가 몸 담고 있는 문화와 역사를 초월하지 못한다. 저자를 읽어야 제대로 읽는 것이다. 


















모두가 사고 싶은 책이다. 그러나 읽고 싶은 책은 다르다. 사고 싶은 책은 대체로 자료로 쓰거나, 인용하기 위한 책이다. 지적 성숙과 글쓰기를 위한 것이다. 그러나 읽고 싶은 책은 마음을 치유하는 책이다. 이 둘이 만나기도하고, 엇갈리기도 한다. 박노자의 책이 사고 싶은 책에 가깝다면 고미숙의 책은 읽고 싶은 책이다. 장정일의 책은? 읽고 싶은 책에 가깝다. 분명한 선을 그을 수 없는 모호함이 존재하지만 동일한 것은 아니다연애에 비유 한다면, 사고 싶은 책은 연애하고 싶은 여자이고, 읽고 싶은 책은 결혼하고 싶은 여자이다. 사고 싶은 책은 호기심과 소유욕과 관련되있고, 읽고 싶은 책은 영혼과 관련된다. 영혼의 깊은 갈망이 요구하는책과 생존에 필요한 책은 다른 것이다. 


이 둘이 만나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나는 이미 만났다. 그러니 읽고 싶은 책을 먼저 사고, 사고 싶은 책도 마다하지 않는다. 그런데 묘하게도 사고 싶었던 책은 종종 책꽂이 꽂혀 나오지 않은 경우가 많으니 이를 어찌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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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4-12-05 16: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요. 책 한 권 다 읽으면 번거로워도 인용문이나 중요한 내용을 간단히 노트에 메모합니다. 서평을 작성할 때 편해요. 요즘 나오는 독서노트 어플은 사진 저장 기능까지 있어요. 좋은 문장이 있는 페이지에 사진을 찍으면 저장됩니다.

낭만인생 2014-12-05 17:36   좋아요 0 | URL
맞네요. 사진 찍는 것도 좋은 방법 이군요. 감사합니다.

yamoo 2014-12-05 16: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제가 소장하고 있는 책이 5권이나 있군요~
그나저나 장정일의 저 책은 알라딘 중고서점에서 몇 번 눈에 띄었어도 패쓰했었습니다. 워낙 사야될 책들이 많아서요..ㅎ

저는 개인적으로 사고 싶은 책이 대우고전총서 시리즈 입니다~ 도정제 시행 마지막날 50% 세일 때 못 산것이 계속 후회됩니다..

낭만인생 2014-12-05 17:37   좋아요 0 | URL
저도 대우고전 시리즈 정말 사고 싶습니다. 정가제 시행되고 나니 책 값이 무진장 올라와 있어서 깜짝 놀랐습니다. 장바구니에 담아 두기만 했는데 말입니다.
 
긍휼, 예수님의 심장
하재성 지음 / SFC출판부(학생신앙운동출판부)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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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 영국과 뉴잉글랜드(미국)를 뒤 흔들었던 위대한 부흥사 조지 위필드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녹슬어 없어지기보다 닳아져 없어지고 싶다.

 

이곳에 열정이 있고, 열정은 죽어가는 영혼을 향한 긍휼에서 나온다. 긍휼은 녹슬어 없어지기보다 닳아져 없어지길 바란다. 기독교 상담학의 전문가인 하재성 목사의 새 책이 나왔다. '긍휼, 예수님의 심장'이란 멋진 제목으로 말이다. 쌍수들고 환영할만한 가치가 있는 책이다. 필자에게 하재성 목사는 초면이다. 오래전부터 예수의 공생애와 삶을 읽으면서 긍휼이란 단어를 떠올리곤 했다. 자의적인 갈망이었고, 내 신앙의 새로운 지평을 열어줄 가늠쇠로 보았다. 성경공부를 하고, 신자로서의 삶을 살아 갈수록 알 수없는 갈증은 더해갔다. 명확하게 정의하기는 힘들었지만, 그것은 관계에 대한 열망이다. 오랫동안 함께해도 교인들은 타인처럼 멀게만 느껴졌고, 더 이상 가까이 갈 수 없는 벽이 있었다. 뭔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을 떨쳐 버릴 수 없다.

 

영아시절, 엄마는 늘 내가 혼자였다고 말씀하신다. 나를 낳고나서 어머니는 목숨이 경각에 달리면서 나를 안아주지 못했다. 그 후로도 나를 잘 안아주지 않았다. 어머니는 나를 보며 고마워하신다. 혼자서도 잘 커줬다고 하시면서. 그러나 나는 늘 외로웠다. 유년시절의 특이한 기억 중 하나는 내가 외계인이라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아니면 가족들이 외계인이든지. 지독하게 외로웠고, 친구들과 비교의식에 휩싸여 열등감에 시달려야 했다. 공부는 상위권이었지만 열등감을 치유해 주지는 못했다. 중고등학교 때는 폭력과 술에 빠져 살았다. 악몽의 이유는 나는 버려진 이었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아직도 나의 외로움을 모른다.

 

예수님의 모든 기적은 긍휼에서 시작된다. 긍휼이 없는 기적은 사탄의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구하기 위해 기적을 행한 적이 없으셨다.”

그 모든 기적의 이야기 핵심은 ... 굶주려 기력이 쇠해가는 연약한 인간을 향한 주님의 솟구치는 사랑이다. 그분의 심장이 박동할 때 주님의 기적이 일어났다.”

 

한 문장, 한 문장을 밀어내며 읽어간다. 그곳에서 치유와 회복을 일으키는 기적의 동인(動因) ‘긍휼(矜恤)’을 발견한다. 성인이 되고나서 나를 혼자 두었다는 어머니의 말을 이해하기 시작했다. 그러고 싶지 않어서가 아니라 그럴 수 밖에 없었다는 것을. 어머니는 무척 나를 자랑스러워하셨다. 나는 마을의 자랑이다. 요즘 말로 표현하면 엄친아였다. 공부, 외모, 성격, 뭐하나 부족한 것이 없었다. 그런데 나는 어머니의 자랑이 버거웠고, 한편에 어머니에 대한 미움이 똬리를 틀고 있었다. 나를 혼자 있도록 버려둔 야속한 엄마가 미웠다. 그러나 엄마는 나를 사랑했다. 끔찍이 아꼈다. 안타깝게 그것을 몸으로 표현할 힘이 없었다. 나는 성인 되고 나서야 그것을 깨달았고, 첫 아이를 품에 안았을 때 나를 향한 엄마의 긍휼도 안았다.

 

책을 읽어가다 보니 페이지와 단락에 감추어진 문장이 빛을 발한다. 울컥한 마음이 한 두 번이 아니다.

 

주님의 그 모든 기적의 목적은 하나, 곧 긍휼이었다. 우리 인생들을 불쌍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긍휼을 드러내는 것, 그 자체가 모든 기적의 목적이었다. 긍휼 때문에 십자가를 지셨다.”(36)

 

거친 호흡을 내쉬며 나 혼자 노는 모습을 하염없이 바라보는 어머니를 상상해 보았다. 안아주고 싶고, 볼에 키스해 주고 싶은 엄마의 간절함이 느껴진다. 큰 애가 태어나 혼자 노는 모습을 보면 나는 애가 탄다. 달려가서 와락 안아준다. 아이는 싫다고 바동거린다. 손에 있던 장난감을 놓기 싫은 것이다. 어머니도 그랬을 것이다. 나를 힘껏 안아주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엄마는 그럴 힘이 없었다. 약한 어머니를 이해하지 못한 나는 엄마를 오해했다.

 

사마리아 여성을 찾아간 예수님의 이야기를 읽는다. ‘사회적 의미를 상실’(44)했고, 이웃과의 관계가 단절된 그녀는 외진 시간에 우물을 찾는다. 우물에는 물도 있지만 여인들의 수다도 있다. 남편, 시어미니 말도 하고, 자식 자랑도 한다. 얼마 전 구입한 자동차 이야기도 할 것이다. 소통과 공유의 공간이다. 필요를 넘어 은근한 경쟁과 암묵적 투쟁도 있다. 여인은 그곳에 갈 수 없고, 가고 싶지 않다. 그녀는 이미 그곳에서 배제 당했고, 고립되었다. 나처럼 그녀도 늘 혼자였다. 서글프게 살아가는 그녀의 이야기를 읽으려니 마음이 답답해진다. 그 곳에서 다시 심장의 박동수를 높이는 문장을 발견한다.


그녀는 마치 부상당한 야생 기러기와 같았다. 자신을 치료해주려 한다는 것을 모르고 그저 덫에 걸리자 죽을 것 같은 두려움에 이리저리 퍼덕이고 있다.”(45)

 

순간, 저자인 하재성 목사에게 묻고 싶다. 당신도 어릴 적 깊은 상처를 받은 적이 있는가? 어떻게 인간의 내면을 이토록 적나라하게 표현할 수 있는가? 저자 스스로 공개하지 않으니 알 길이 없으나 몇 곳에서 그의 감정을 읽어낼 수 있다. 10장은 생명우선이란 제목으로 마가복음 3:1-6까지 다룬다. 그곳은 안식일에 예수께서 회당에 들어가 손 마른 사람을 고치는 장면이다. 3:5은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예수님께서 분노하시며 주위를 둘러보시고 사람들의 마음이 굳은 것을 아시고, 슬퍼하셨습니다.”

 

분노하시고’ ‘슬퍼하셨다는 표현. 감정이다. 신이면서 완전한 인간이셨던 예수는 인간들의 완악함에 분노하심과 동시에 슬퍼 하셨다. 저자는 이 부분을 언급하면서 예수의 말씀 속에는 언제나 감정이 실려있다고 말한다. 유교문화 스토아학파는 감정을 열등한 것으로 무시한다. 어쨌든 분노는 내지 말아야 한다고 가르치고 행동한다. 불교도 다르지 않다. 그런데 복음서는 이차적 문자로만 읽을 수 없다고 말한다. 그곳에 감정의 기복과 굴곡이 엄연히 존재한다. 예수의 분노는 다른 것이 아니다. 그것은 긍휼을 막고 사사건건 꼬투리를 잡으려는 바리새인들의 가식 때문이었다.

 

이처럼 완고한 그들의 마음을 보실 때 예수님의 마음은 고통스럽게 요동하였다. 한 영혼이 회복되는 과정을 털끝만큼의 긍휼도 없이 감시하고 있는 그들 때문에 주님의 분노의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예수님께서는 무감감한 탈속의 성인이 아니셨다. 주님의 가슴에서 뜨거운 분노의 불이 일어났다.”(175)

 

그 분노는 예수 자신을 닳아 없애는 것이다. 스스로 함정에 빠지는 것이며, 죽음을 자초하는 일이다. 예수는 어리석었다. 그는 분노하지 말았어야 했다. 분노는 스스로를 죽임으로 타인을 더 구할 수 있는 여지를 꺾어 버렸다. 예수의 분노는 정의를 만’(180)든다는 저자의 말에 백배 공감한다. 바로 그 정의가 예수를 죽인 것이다. 더러운 오물을 뒤집어쓴 사람은 본능적으로 빛을 싫어한다. 자신들의 죄의 오물을 들추어내는 진리의 예수를 미워했다. 그럼에도 분노함으로 그들의 악이 얼마나 끔찍하고 악랄한가를 여과 없이 드러냈다. 그리고 예수는 십자가를 향해 점점 더 나아갔다. 그는 녹슬어 없어지기보다 닳아 없어지기는 선택했다.

 

그러나 비바람과 폭풍이 몰아칠 때, 지진으로 건물이 무너져 내릴 때 자신이 몸이 부서지기까지 아이를 가슴에 품은 엄마의 마음처럼, 주님께서는 자신의 분노로 연약한 영혼들에게 평안을 주시고 자신은 십자가 앞으로, 하나님의 진노가 기다리는 그곳으로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셨다. 연약한 영혼을 지켜주시고, 그 모든 책임이 자신에게 돌아오게 하셨다.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 그 진노의 처소로 담대히 나아가셨다.”(1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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