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 독서교육 어떻게 할 것인가?


어제부터 <초등 읽기능력이 평생성적을 좌우한다>라는 책을 읽고 있습니다. 이 책은 읽기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그 이유에 대해서

설명주고 있습니다. 가장 간단한 상식에서 부터 시작해 봅시다. 읽기는 '힌 종이 위에 문자를 눈으로 읽고, 눈으로 들어온 문자는 뇌로 가서 이해된다.'는 것으로 이해합니다. 가장 단순한 원리이면서 기본적인 상식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나 독서는 이러한 단순한 앎은 넘어 더 광대하고 포괄적인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단순한 문자를 뇌에 집어 넣기 위한 수동저인 의미로만 독서를 이해하게 된다면 참 슬픈 일이 아닐 수 없을 것입니다. 정말 종요한 것은 독서의 진정한 의미와 목적을 이해할 때 독서의 힘은 무한대로 확대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읽기능력에 대해 꾸준히 연구해 온 박수자 박사는 2001년에 출간한 <읽기 지도의 이해>란 책에서 '높은 수준의 학습을 하기 위해서는 핵심이 되는 것은 글을 완전히 이해하며 읽는 능력'이라고 했다. 그래서 '읽기 능력에 대한 관심은 교육분야에서 지대한 관심의 관심의 대상이 도리 수밖에 없고 읽기 능력과 사고력의 관계 또한 지속적인 관련을 맺을 수밖에 없다'고 주장한다."(19쪽)


이 책은 아무래도 공부라는 주제 억지로 꿰맞추어진 느낌이 든다. 그럼에도 읽기란 무엇인가는 곧 이해를 전제 한다는 것을 말해준다. 읽기는 곧 이해하는 것이다. 성적이 떨어지는 학생들의 특징은 '난독증'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글을 제대로 대하지 못하고 문자 자체에 대한 공포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초등학생을 가진 학부모로서 읽기능력의 중요성을 충분히 공감하는 바이다. 어제는 아이들과 문제집을 함께 풀면서 느낀 것은 아이들이 문제가 의도하는 바를 정학하게 이해하지 못함으로 인해 답을 맞추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 문제를 모르는 것이 아니라, 문제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답을 맞추지 못하는 것이다. 즉 이런 문제이다. 초등학교 5학년 수학에 나오는 문제를 바꾸어 봅니다.


*문제, 철수네 반의 학생들은 모두 35명이다. 이 중에서 남자 학생들은 21명이다. 그렇다면 나머지 학생들의 수와 남자 학생들의 수의 차이는 얼마인가? 

풀이과정1) 35-21=14

풀이과정 2) 21-14=7

답은 2이다. 

아이들은 문제를 읽고 생각을 하고, 풀이과정을 잘 이해하고 있어야 문제를 풀수 있다. 아들은 이 문제를 읽고 한참을 생각하더니 엉뚱한 답을 했다. 풀이과정 1에서 더이상 응용하지 못한 것이다. 아무리 설명을 해도 풀이과정2로 넘어가지 않았다. 사실 풀이과정 2는 응용의 단계이다. 문제안에는 35와 21만을 말하고, 여학생의 숫자인 19는 상상의 산물이다. 아들을 상상하지 못함으로 문제가 무엇을 요구하는지를 깨닫지 못한 것이다. 그러나 읽기가 아닌 식으로 문제를 주었더니 쉽게 풀어냈다.

1) 35-21=14

2) 21-14=7


읽기란 결국 문제가 요구하는 것을 이해하는 것이어야 한다는 점이다. 결국 읽기에서 수동적인 자세는 진정한 읽기가 아니다. 독서기술의 고전이라 할만한 모티머 애들러 <독서의 기술>에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독서에는 정보를 얻기 위한 독서와 이해를 깊이 하기 위한 독서가 있다. ... 신문. 잡지와 같은 것을 읽는 경우... 정보의 양을 증카시켜 줄 뿐이지 이해를 깊이하는 데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 ... 저자가 말한 것뿐만 아니라 그 의도나 이유를 이해야만 비로서 무엇인가 가르침을 받은 것이 된다."

애들러 역시 단순한 정보의 양만을 불려가는 것을 독서라고 말하지 않는다. 독서는 이해하는 것이며, 자신의 것으로 만들 수 있을 때 비로소 독서의 완성이 이루어진 것이다. 그래서 누군가는 '논어를 읽고 변하지 않았다면 그는 논어를 읽은 것이 아니다'라고까지 말한다. 독서의 목적은 처음부터 양이 아닌 질에 있다. 변화받고 변화 되기를 갈망하는 마음으로 읽어야 하는 것이다. 필자는 이것을 '자기수양적 독서'라고 말하고 싶다. 이러한 자기 수양적 책읽기는 음식에 비하면 인스턴트가 아니나 슬로우 푸드에 해당한다. 


자기 수양적 독서를 위해서는 반드시 거처야얄 단계가 있다. 그 첫번째는 본이 스스로 겸허한 마음으로 책을 대해야 하고, 선별해야 한다. 자기욕망에 사로잡히 독서는 결국 패스트푸드는 잔뜩 먹고 몸을 망치는 것과 다름 없다. 오랜 시간동안 씹고 소화시켜 완전히 자기의 것으로 받아드릴 것을 각오 해야한다. 이것이 결코 쉽지는 않다. 필자도 일년에 수백권의 책을 읽는 다독 중독에 빠져있다. 그럼에도 고전이나 중요한 책은 몇 번이고 재독하거나 곁에 두고 천천히 묵상하며 읽는다. 지금 필자의 책상에는 논어과 채근담, 안씨가훈, 다산의 목민심서와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가 있다. 이러한 책들은 한 번 읽고 덮어둘 책이 아니라 거울과 같에서 끊임없이 읽고 또 읽는 책들이다.

















초등학생의 독서능력을 키우는 방법에는 몇 가지의 방법이 있다. 

첫번째는 호기심을 이용하는 방법이다. 아이가 좋아하는 분야의 책을 골라 그 책을 중심으로 읽히되 비슷한 주제들로 확장 시켜 나가는 것이다. 예를 들어 첫째 아들은 독서를 무척 싫어해서 한시 라도 책 앞에 있기를 싫어했다. 그러나 올로나 레고같은 만들기 등은 무척 좋아해서 하루종일 해도 지겨워하지 않았다. 그래서 아이디어를 내었다. 아이가 좋아하는 로봇관련 책인 <레고 아이디어북>을 사서 아빠와 함께 이야기하며 읽기 시작했다. 책이라면 질색을 하던 아이가 로봇관련 책은 아주 재미나게 읽었다. 이것이 아이의 특징이다. 얼마적에 읽은 레고응용 서적도 재미있어했다. 아무리 책 읽기를 실허해도 자신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주제를 가진 책은 읽는다는 것이다. 


두번째는 독서하기까지 읽어 주는 것도 좋다. 우리 부부는 독서에 집중하지 못하는 아이들 때문에 고민을 하다 우연하게 책 한 권을 접하게 되었다.  <아이의 두뇌를 깨우는 하루 15분 책 읽어 주기의 힘> 이란 책이었다.

그동안 독서의 중요성을 알았지만 그 방법에서 고민을 해본 분이라면 이 책을 적극 추천한다. 독서 좋은 것이다. 그러나 스스로 독서하기까지 부모가 읽는 줄 필요가 있다. 처음이 아이들은 책 읽어주는 것에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그러나 한 달 정도 규칙적으로 계속되자 아이들은 자기 전 책을 읽어달라고 강제적?으로 협박까지 한다. 그동안 자기 전 침대위에서 읽어준 책만해도 올들어 10권을 훌쩍 넘겼다. 분량을 보아도 작게는 수십페이지에서 두꺼운 책은 300페이지가 넘는 책들이다. 아이들에게 300페이지가 넘는 책을 읽어준다는 것은 쉽지 않을 것이지만 하루에 정해진 분량대로만 읽어 주어도 좋아한다. 기억에 남는 책은 <제임스와 슈퍼 복숭아> <샬롯의 거미줄> <스튜어트 리틀> 등이 있다. 이러한 책들은 아이들의 나이와 정서에 딱 들어 맞는 책들이다. 2살 차이가 있어 이해도가 달라 어려울 것 같지만 모험과 이야기로 꾸며진 내용은 저학년들도 쉽고 재미나게 듣는다는 특징이 있다. 사실 읽어주는 나와 아내도 그 다음 이야기가 궁금해 하루종일 밤을 기다린 적도 있다. 일부러 아이들과 함께 내용을 공유하고 싶어 읽지 않은 덕이다. 이래저래 함께 이야기를 공함으로 아이들과 많이 친해져서 정말 좋았다. 
















세 번째 추천하고 싶은 방법은 독서시간을 정하고 가족끼리 독서를 함께하는 것이다. 이 방법은 처음 시도할 때는 별다른 기대는 없었다. 단지 아이들이 텔리비전과 게임에 빠진 것을 보고 책이라도 읽히려는 속셈이었다. 초기에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던 아이들이 한달을 넘어가자 스스로 그 시간을 기다리면서 책을 고르는 진풍경이 벌어졌다. 책을 그리 싫어하던 아이들이 스스로 책을 골라 그 시간을 기다린다는 것이 정말 신기했다. 독서 시간은 저녁 식사 후 약 2-30분 정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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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경전의 종류와 구분


불교 경전은 크게 두 종류로 구분한다. 원시불경(초기불경)과 소승과 대승으로 구분되 이후  텍스트를 중요시하는  대승불경으로 나눈다. 


원시불경은 부처의 가르침을 직접 받아 적거나 당대의 가르침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는 경우다. 원시 불경에는아함경(阿含經), 열반경, 범망경, 법구경, 숫타니파타, 자타카, 백유경, 부모은중경, 유교경, 미린다왕문경 등이 있다.













대승경전

대품반야경 소품대양경, 대반양경, 반야심경, 금강경, 법화경,관음경, 무량의경, 유마경, 화엄경, 무량수경, 관무량수경, 아미타경 등이 있다.













이 외에도 정토, 밀교와 관련되 불경들이 있다. 해인사에 있는 팔만대장경은 다수의 불경들을 집대성한 것이다. 현재 전산화를 모두 마친 상태이다.

불경란 무엇인가?

불경은 일차적으로 부처의 말씀이다. 더 넓은 의미로는 부처의 제자들의 말씀도 포함한다. 이후 소승불교와 대승불교로 나누어지면서 문자를 중요시하는 대승불교에서는 자기들만의 가르침을 설파하기 위한 수트라 즉 경을 만들었다. 대승불교의 경전들은 부처의 직접적인 말씀이나 직계제자들의 가르침이 아니기 때문에 불경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부처의 가르침을 확장시켰다는 의미에서 불경으로 받아 들인다.

불교에서 경전을 팔만사천법문이라고도 부른다. 여기서 팔만사천은 실수가 아닌 무수 즉 많으므로 없다는 뜻이다. 이것은 인간의 생로병사에 과련된 애환과 아픔이 팔만사천 처럼 셀수도 헤라릴 수도 없다는 뜻이고, 이에대한 부처의 가르침 역시 헤아릴 수 없다는 뜻에서 팔만사천문이라고 부른다. 해운사에 있는 고려대장경 역시 팔만여장에 가까운데 이것은 그만큼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불경의 언어

부처는 제자들에게 자신의 가르침을 모든 사람들이 듣고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일상어로 전하라고 했다. 당시 흔히 사용하던 언어는 마가다어였다고 한다. 부처가 입멸한 뒤 불법은 다시 팔리어로 전래 되었다. 그러나 입멸후 2-3세기가 지나면서 불경은 산스크리트어로 전래 된다. 산스크리트어는 전문가들의 언어이다. 이후로 불경은 평민들에는 쉽게 접근할 수 없는 고립된 가르침으로 남게 된다. 이 때를 기준으로 대승불교가 확연하게 생겨나게 되었고, 학문적이고 교리적인 가르침으로 굳어지게 된 것이다. 

남방으로 전해진 불경은 보수적이고 전통적인 측면이 강해 팔리어 경전으로 아직도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인도를 넘어 서북과 북쪽으로 전파된 북방불교의 경우는 자신의 언어와 현대적 언어로 변환시켜 번역했다. 현재 우리나라나 일본 중국등은 북방불교의 영향을 받은 것이고 이로 인해 직역이 아닌 그나라의 문화과 언어로 의역된 불경을 소지하고 있는 셈이다.
















불경의 역사를 살펴보면 기독교의 성경의 역사와 너무 흡사하다는 생각이 든다. 성경도 초기에는 아람어로 예수님이 설교한 것을 제자들이 대중적인 언어인 헬라어로 기록한다. 성경에 사용된 헬라어는 일반인들이 사용하는 코이네 헬라어이다. 이후 성경이 교리적이고 체계적이 되면서 성경 원전은 그대로 보존되지만 교리적인 주석서들이 대거 편찬되면서 기독교의 화석화가 이루어진다. 중세의 기독교는 권력과 타협하여 철저하게 대중들로부터 고립되었으며, 라틴어로 번역되어 사제들에 의해서만 설교되고 가르치게 된다. 아직도 천주교는 이러한 전통을 따르고 있으며, 불과 얼마 전에 교인들도 성경을 읽도록 허락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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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sy6200 2019-09-21 12: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부모은중경‘은 원시불경이 아닙니다. 중국에서 불교가 토착화되는 과정에서 유교 윤리를 수용하여 효를 강조하는 경전이 만들어졌는데, 그 경전이 바로 ‘부모은중경‘입니다.
 

아래의 글을 쓸 때가 [2012-04-14 18:54]이다. 지금은 2018년 2월 11일이다. 벌써 6년이 지났다. 사실 지금과 그 때의 시각은 완전히 다르다. 댓글을 보니 심하다. 아마도 내용도 글도 맘에 안든 모양이다. 물론 내가 이 책들을 다 읽은 것은 아니다. 몇 권을 읽었을 뿐이다. 특히 <시민 K. 교회를 나가다>는 두 번이나 읽었다. 그러나 그 때는 이 책의 의미를 몰랐다. 지금은 전적으로 저자의 편에 가깝다. 좋게 변한 것인지 내가 변질된 것인지는 모르나 하여튼, 글을 지우지 않고 둔다. 이것도 나의 일부가 아닌가. 그런데 지금 읽어보면 내가 이 글을 댓글을 단다면 욕해 주고 싶은 글이다. 내가 변한 거지.. 확실히...

이런 식으로 글을 쓰면 안됩니다!


그럴줄 알았다. 제목과 내용이 심상치 않아 저자의 출신을 보니 한신대이다. 그가 진심으로 교회와 신상을 위해 고민했는지, 아니면 적어도 교회의 입장에서 구도자로서 살아보았는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꽝이다! -100자 평에서


나는 저자를 신뢰하지 않는다. 그가 마치 신실한 교인으로 살아가다 회의를 느끼고 이 책을 쓴 듯한 착각을 불러 일으키고 있지만 새빨간 거짓말이다. 나는 이런 부류의 사람들을 혐오한다. 그가 교회를 나갔다고 웃기지 말라. 그는 교회를 제대로 다녀본 적도 없다. 자 이제 나의 주장이 왜 거짓이 아닌지를 살펴보자. 

잡소리 집어 치우고 그의 교회에 대한 비판이 얼마나 엉터리 인지를 보여준다.

먼저 그는 한신대 출신이다. 한신대는 진보적 신학교이다. 즉 그는 신학을 전공했다. 소위 말하는 일반 평신도가 아닌 전문가이다. 그런 그가 마치 선량한 교인인 것처럼 꾸며대는 짓은 그만 두어야 한다.

둘째, 그의 교회 비판은 처음부터이다. 교회를 잘 다니다 회의가 들어 이 책을 쓴 것이 절대 아니다. 그는 '꾼'이다.
1996년 4월 출간한 그의 첫책은 '예수 르네상스'이다. 이 책은 현재 품절이다.
2000년 2월에 출간의 두번째 책은 '예수 역사학'이다.
2001년 12월 출간된 또 다른 책, 반 식학의 미소
2007년에 출간한 무례한 자들의 크리스마스, 무례한 복음
2010년에는 인물로 보는 성서 뒤집어 읽기


















나는 글을 비교적 어리숙하게 쓰고, 비판적이지 않다. 그러나 이런 무례한 못되 먹은 사람들에게는 평이한 글로 대하고 싶은 생각이 추후도 없다. 


까놓고 말하지만 이 사람은 교회에 대해 무엇을 진지하게 생각했고, 교회를 사랑했던 적이 있던가?  아니지 않는가. 그는 처음부터 교회를 욕하는 사람이고 교회에 대하여 비판적 시각으로 일관했던 사람이다. 플리즈~ 제발 이런 식의 탁상공론으로 글을 써서는 안된다. 진짜다. 요즘 어느 쇼셜북에서도 소개되는 이 책은 처음 접하는 사람들에게 '한국 교회는 정말 못됐구나!'라는 인식을 주기에 딱이다. 그동안 한국이 기독교를 인정한 적이 있는가? 없다. 


그리고 말이지 기독교 안에도 얼마나 많은 교파가 있으며, 다양성과 다름이 존재하는가. 그럼에도 싸잡이 이야기하는 것 또한 전혀 옳지 못하다. 


남의 자식 비판하기는 쉽다. 그러나 자기 자식 비판하기는 어렵다. 남의 자식 비판 하기는 자기 자식 비판 이후에 해야 한다. 먼저 자신이 한국의 기독교에 대하여 얼마나 알고 있는지 성찰해야 옳다. 기독교에 대하여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처음부터 치우쳐진 시각으로 글을 쓰다니... 정말 황당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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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5월, 가정의 달에 읽은 책
    from 낭만인생의 독서노트 2012-05-29 22:05 
    5월, 가정의 달에 읽은 책5월에 들어 읽은 책들입니다. 요즘은 그냥 읽는 책도 있지만 내용이 괜찬은 책들은 노트에 일일이 필기를 하면서 읽기 때문에 시간이 많이 걸립니다. 9일 밖에 되지 않았는데 세어보니 열권을 넘겼습니다. 언제 다 읽었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 책들인데 금새 저의 손을 벗어났습니다. 가정의 달인데 아이들 양육관련 서적을 읽었는데 가정이 행복을 주제로한 책은 아직 읽지 못했네요.♣우리 아이 자존감의 비밀♣우리아이 게임 절제녁♣아이의 정서
  2. 한국교회와 시민정신을 생각하다.
    from 낭만인생의 독서노트 2012-06-05 19:11 
 
 
다른 기독교인 2012-04-14 23: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당신의 편협함부터 성찰해보세요. 무조건 '우리편 아니니 나쁜놈' 외치지 마시고요.

차트랑 2012-04-15 00: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책과세계 2012-04-15 01: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놀랍다. 책도 안 읽고 서평을 쓰다니!! 그 용기가 대단합니다. 그런데 어쩌죠? 당신의 글을 읽고 이 책을 더 간절히 읽어야 하겠단 마음이 들었단 말이죠.

낭만인생 2012-04-15 13:07   좋아요 0 | URL
제가 그 책을 읽었는지 안 읽었는지 어떻게 아셨는지 신기하네요.

지나다가.. 2012-04-20 01: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내용에 대한 구체적 평은 한 마디도 없다는 게 놀랍네요..^^; 이 책을 읽고 불쾌했다면 '나는 왜 불쾌한 걸까?'부터 곰곰히 생각해보심이 어떠실런지.. 저는 이 책 참 고개를 끄덕이며 읽었습니다. 기독교가 기독교다우려면 지금의 모습에 대한 통렬한 회개가 있어야 하는 게 아닐까요.. 기독교 '욕'하는 게 요즘 대세라면서요? 그 욕을 넘어 무엇이 문제인지 분석하는 사람이 없는 마당에 참 좋은 책 나온 거 아닌가요? 님도 이 책을 읽고 아팠다면 아프게 했다고 화부터 낼 게 아니라 왜 아픈지, 어떻게 해야 앞으로 기독교인인 게 안 부끄러울지 고민해보시길.. 비아냥이 아니라 진심으로 하는 말임..

한심합니다.. 2012-04-21 17: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낭만인생님 같은 분들 때문에 한국 기독교가 더 욕을 먹는 것 같습니다...

메리제인 2012-04-22 23: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낭만인생 님, 님이 '제목과 내용이 심상치 않아 누가 썼는지 봤더니 한신대 교수더라'라는 말을 시작으로 비난을 하니, 또 책의 내용에 대한 구체적 비판은 없으니 책도 안 읽고 책을 까는 거라고 '추측'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죠.

님이 이 책을 비난하는 논리는 딱 다음과 같습니다.
"책 내용이 한국 개신교를 비난하는 내용이다."
"저자가 한신대 교수다. 그는 교회를 사랑했던 적이 없는 사람일 거다."

님이 책에 대해 진정으로 건설적 비판을 하고 싶으면, 책을 읽고 저자가 한국 개신교를 비판하는 논리가 타당한지 그렇지 않은지로 따져야했겠죠. 하지만 님은 일차적으로는 이 책이 한국 개신교 비판 내용을 담고 있다 하여 발끈하신 거잖아요. 그리고 한신대 교수인 것까지 발견하고선 '이 자는 교회를 사랑해본 적도 없는 백면서생으로 비판만 해단다'고 까시는 거고.

님의 평은 독서인으로서 저질적인 평입니다. 책 내용에 대한 비판이 아니라, 저자에 대한 인신공격으로 책 전체를 깎아내리고 있으니까요. 한국 개신교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게 개신교라는 종교 전체를 비하하는 것도 그 교도들을 깎아내리는 것도 아닙니다. 남들의 비판에 귀만 꾹 닫고 있다가는 어느 집단이든 자신들만의 우리로 고립될 것이고 결국엔 쇠퇴의 길로 가는 것도 무리는 아닐 겁니다.

구름물고기 2012-05-27 22: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서평이 아니라 글쓴이에 대한 인신공격이라는 의견에 동의합니다. 아울러 글이 너무나 난잡하여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군요.
'한국이 기독교를 인정한 적이 있는가' 부분에서 웃어야 할까요?

andrewx 2012-06-04 01: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 번 물어봅시다. 그러면 이 책에 나오는 얘기들이 역사적 사실이 아닌가요? 현재 교회의 대체적인 모습이 아닌가요?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면 교회를 그냥 둘까요? 뒤집어 엎을겁니다. 당신들은 그 예수를 다시 십자가에 매달까요? 서로 먼저 그를 매달려고 악을 쓸 사람들이 현재 한국개신교입니다. 한국개신교에 있어 예수 그리스도는 돈 벌기 좋은 '브랜드'일 뿐입니다. 싸잡어서 비판하는 것 아닙니다. 일부 선한 교인과 목자가 존재함을 압니다. 그들까지 욕하는 것은 아닙니다. 한국개신교는 반드시 망하고 다시 시작해야 합니다!!!!

JJ 2016-12-04 01: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ㅋㅋㅋㅋㅋㅋㅋ 웃음만 나오네. 저자가 한신대라는 것 빼곤 비판의 근거도 없고. 다 웃긴건 자기가 무얼 비판하는지도 모른다는거지 ㅋㅋㅋㅋㅋㅋㅋ. 솔직히 말해라ㅡ이 책 안읽었지? 아니면 이해력이 딸리거나 ㅋㅋㅋㅋㅋㅋ
 


[대학]과 [중용]의 저자는 정확하지 않다. 다만 후대에 성리학을 집대성한 주희에 의하여 새롭게 편역된 책이다. 주희는 리와 기를 통해 성리학을 집대성했으며, 이후의 중국 철학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사람이다. 

대학과 중용은 [예기]의 한 부분이다. 예기는 한무제 때 유학이 지배사상이 되면서 여러학자들에 의하여 수집 정리된 것이다. 진대에 분서갱유 사건으로 인해 유가사상이 훼손되기는 했으나 한대에 다시 복권되어 지배상이 되었다. 중국의 사상사를 볼 때 수당대의 경우 불교를 지배체제의 주종교로 받아 들일 때는 유가사상은 수동적이고 폐쇄적인 자리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러나 다시 한대와 같이 유가사상의 복권이 이루어진 시기는 주도적인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 대학은 유가사상의 대표적인 사상을 담고 있다. 논어와 맹자 등과 더불어 중요한 교육서였다. 이에 비해 [중용]은 도가사상에 가까운 면이 많다. 무위사상가 불교적 숙명론이 깊이 자리하고 있다. 그럼에도 중용은 난세를 살아가는 중요한 지혜로서 자리하고 있다.

















불교가 심성을 강조하는 비텍스트의 종교라면 유가는 도덕과 행실을 중용시하는 텍스트의 종교이다. 유가가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방법론을 통해 모더니즘적인 성향을 추구한다면, 불교는 비언어적이며 현대의 포스트모더니즘적인 성향을 견지하고 있다. 이러한 사상적인 차이로 인해 한 시기는 숭상을 받고 다른 시기는 무시당하는 일이 일어났다. 

대학이전에 소학을 먼저 공부하는 것이 우선이지만, 소학은 대학 이후에 주희에의하여 대학을 입문하기 전에 기본 소양을 갖추기 위한 목적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그래서 소학을 8세 쯤으로 공부를 시작하는 시기로 잡고 생활 예절이나 음악, 활쏘기, 말타기, 글쓰기, 셈하기 등을 배우게 하였고, 대학은 대인지학이라 하여 학문을 공부할 수 있는 성인이 되었다는 뜻으로 15세 쯤으로 잡았다. [소학] 구체적이고 생활에 관련된 것이라며, [대학]은 생활 속에서 체득되어진 것들의 원리나 사상을 잡아내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대학5에 보면 '사물이 탐구된 뒤에 앎에 도달한다'고 말한다. 여기서 앎은 현대적의미에서는 물리학을 의미하지만 당시의 상황 속에서는 [소학] 또는 자연의 현상과 만물의 원리를 말하는 것이다. 유가사상의 8조목은 '격물 치지 성심 정심 수신 제가 치국 평천하'이다. 먼저 자연의 관찰하고 탐구하여 이치를 깨닫고 다시 자신의 마음을 수양하고 다스린다면 가정과 더 나아가 온 세상을 다스릴 수 있다. 자연을 관찰하는 것과 자신을 관찰하는 것은 다르지 않으며 우선순위에 있어서 다를 뿐이다. 주희는 전5장의 격물지치에서 '자신의 앎을 확충(확장)하는 것을 사물을 탐구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홍익출판사에 대학과 중용을 한 권으로 묶은 이유는 두 책다 모두 극히 작은 분량 때문이다. 또한 대학과 중용이 학문의 깊이는 더하고자는 수준을 요하는 사람들의 필독서이기 때문이다. 출판사에서 한글 번역과 원문을 함께 책을 펴낸 까닭에 쉽게 접근할 수 있다.



대학은 삼강령으로 시작한다. 대학의 목적이자 본질은 덕을 밝히고, 새롭을 새롭게 하고, 선(착함)에 머무는 것이다. 삼강령은 순차적이며 과정을 통해 선에 머무는 것으로 마무리 된다. 

대학1
大學之道는 在明明德하며 在親民하며 在止於至善이니라. 
대학지도 재명명덕 재친민 재지어지선
대학의 도는 밝은 덕을 밝히는 데 있으며, 백성을 새롭게 하는 데 있으며 지극한 선에 머무는 데 있다.


삼강령은 대학 즉 공부하는 방향과 목적을 담고 있다면 격물치지 성의정심 수신체가 치국 평천하의 8조목에서는 공부의 방법을 논하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먼저는 사물의 이치를 깨닫고, 다음은 의지를 다음은 마음을 다스리고 다음으로 가정과 나라를 다스리는 것이이다. 다스림의 순서로 본다면 사물을 다스리고 자신을 다스리고 다음으로 가정과 나라를 다스려야 한다.


8장의 정심수기의 일 부분이다.


心不在焉(심불재언)이면 : 마음이 있지 아니하면

視而不見(시이불견)하며 : 보아도 보이지 않고

聽而不聞(청이불문)하며 : 들어도 들리지 않고

食而不知其味(식이불지기미)니라 : 먹어도 그 맛을 알지 못한다.

此謂修身(차위수신)이 : 이래서 몸을 닦음이

在正其心(재정기심)이니라 : 그 마음을 바르게 함에 있다고 하는 것이다.


결국 대학이란 모든 백성을 평안케 하려는 마음이 담겨 있는 것이다.


중용은 공자의 아들인 리가 낳은 자사로 전해진다. 공자의 손자인 셈이다. 주희는 중용을 세 부분으로 나누어 해설한다.

첫째는 밝은 도의 보의 본원은 하늘에서 나왔으니 바꿀 수 없으며, 그 실체는 자신에게 갖추어져 있어서 떨어질 수 없음을 밝히고,

둘째는 본래으 선한 마음을 간직하고 본성을 잘 기르도록 살피는 공부를

셋째는 신묘한 성인의 역할과 교화의 지극함을 말한다. 즉 '배우고자 하는 사람은 여기에서 자신을 되돌아보나 스스로 터득하여 밖에서 들어오는 사사로운 유혹을 제거하여 본연의 선함을 자신의 몸과 마음에 가득 채워야 한다."는 것이다. 이로 보건대 중요은 맹자의 성선설을 그대로 따르고 있으며, 사람의 본을 선에 놓고 있다.  그래서 중용의 첫 시작은 이렇게 풀어낸다.


'하늘이 만물에게 부여해 준 것을 '본성'이라고 하고, 자신이 부여받은 본성에 따르는 것을 '도'라고 하며 도를 닦는 것을 '가르침'이라고 한다.


중용의 원리는 성급하게 판단하지 않고 기다려 보는 것이다. 마치 밥을 오래 씹으면 안에서 단물이 나오듯이 모든 이치도 오래 기다리고 살필 때 본심이 나온다는 것이다. 중용은 욕망에 의하여 흐려진 마음을 바로잡고 올바로 나아가는 것이라 할 수 있다. 


5. 그러므로 군자는 여러 부류 사람들고 잘 어울리기는 하지만 사악한 방향으로 빠지지 않으니 이 얼마나 강하가, 꿋꿋한 기상여! 가운데 서 똑바로 서서 한쪽으로 기울지 않으니 이 얼마나 강한가....



중용에서도 여전히 공자의 입을 빌어 말하고 있으며, 대학의 8조목이 군데군데 스며있는 것을 본다. 결국 중용은 도가적 사상을 완전히 따지는 않으며, 차리라 유가사상 안에 담긴 진보적 성향이라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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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4-14 15:53   URL
비밀 댓글입니다.

낭만인생 2012-04-14 18:29   좋아요 0 | URL
사실 저도 중용을 몇 번을 읽어도 쉽게 다가오지 않습니다. 생각보다 중요한 문제를 언급하고 있는데 같은데 이해도 풀이도 쉽지 않는 주제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2012-04-15 00: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새무얼 스마일즈의 [자조론]



새무얼 스마일즈, 그는 이렇게 말했다. 

생각을 바꾸면 행동이 바뀌고,

행동을 바꾸면 습관이 바뀌고,

습관을 바꾸면 삶이 바뀌고,

삶을 바꾸면 운명이 바뀐다.


어느 노트 뒷표지에 실린 글이었다. 십여년 전에 읽었던 글인데도 그가 누구인지 어떤 사람인지 알려고 노력하지 않았다. 나도 그러고 보면 정말 무심한 사람인가 보다. 그러나 몇 달전 공병호씨의 책에서 이 글을 다시 보았고, 이 책이 [자조론]이란 책에서 가져온 것이라고 언급하고 있었다. 공병호박사는 스스로 [자조론]을 번역하기도 했다. 이렇듯 그는 새무얼스마일즈의 자조론을 침이 마르도록 칭송했다. 그런데도 나는 그 때까지만 해도 스마일즈의 자조론의 위력을 알지 못했다. 


















새무얼스마일즈의 첫장 첫 말은 '하늘은 스스로 돕는자를 돕는다'이다. 어디서 많이 들어본 말이다. 새무얼스마일즈가 처음 한 말은 아니다. 우리나라에도 전해오고, 중국과 유럽에도 동일하게 전해오는 금언 중의 하나이다. 이 말이 도대체 무슨 말일가? '스스로 돕는 자'란 말이 무슨 말일까? 자조론을 더 읽어보자.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 이 말은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한 마디로 함축하고 있다. 스스로 돕는 자로 정신은 개인이 성장하는 근원이며, 국민 모두가 이 자조 정신을 실천하면 그것이 곧 국가의 힘이 되는 것이다.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기만 한다면 사람은 결국 약해지고 만다. 그러나 스스로 돕는 사람은 한결같이 강한 사람이 된다. 무엇이든 남의 힘을 빌려서 하면 그 때문에 스스로 일하려는 자극과 필요가 사라지게 된다. 그리고 지나치게 남에게 의지하면 무능한 사람이 되고 만다."

스마일즈는 '스스로 돕는 자'란 뜻을 독립의 의미로 사용했다. 자기 스스로 생존할 수 있도로 노력하는 것이 바로 '스스로 돕는'는 다는 뜻의 '자조'인 것이다. 


자조론의 시작은 홀로 스스로 서는 것을 말하는데 스마일즈는 어떻게 자조하는 가를 '그것은 오로지 각 개인의 행동과 습관으로 성취되는 것'으로 말한다. 자조론은 스스로 서고 일어 서기를 권면하는 데 그것은 습관에 있다는 것이다. 


자조론에 대한 많은 번역본이 있다. 
















자조론은 매혹적이다. 단지 자기 노력만을 추구하라는 용기를 북돋는 것만이 아니다. 인간으로서 다해야할 도리를 담고 있기 때문이며, 성공적인 살을 살기 위한 최고의 도서이다.  


"돈 많은 사람이 돈을 주어서 자기 일을 남에게 시킬 수는 있지만, 생각은 남에게 시킬 수는 없는 것이며, 금전으로 남의 교양을 살 수도 없는 것이다."


자조론의 본질은 자신의 삶은 자신이 책임지는 것이다.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책임지고 스스로 만들어 나가는 것이다. '훌륭한 사람은 제아무리 수준 높은 학문을 연구한다고 하더라도 성실설, 깊은 주의력, 몰두, 그리고 굳은 인내와 같은 평범한 행동의 가치를 가볍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렇다. 자조하는 사람은 기본을 성실하게 이행하는 사람이다. 대박을 꿈꾸는 어리석은 사람들은 일상의 삶을 무시하고 허황된 것을 추구하지만 이것이야 말로 가장 어리석은 사람의 특징이다. 얼마전 바벨론부자들의 비밀이란 책에서 부자의 특징은 수입이상을 쓰지 않고 갑자기 부자되는 것을 바라지 않으며, 천천히 재산을 불려가는 것이라고 조언하고 있다.


자조의 기본은 하루하루를 성실하게 살아가는 '인내'이다. "뷔퐁은 이렇게 말했다. '천재는 바로 인내이다.' 그렇다. 천재는 자신의 재능을 알아차리고 시간을 들여 갈고 닦는 사람이다. 뉴턴은 재능을 타고 났지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항상 그것을 깊이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이탈리아에 나오는 속담처럼 '천천히 가는 사람이 오래 가고 멀리 간다.' 성경 잠언에도 보면 속히 부자가 되면 망한다고 하지 않았던가! 준비되지 않는 사람에게 부와 명예는 저주다. 


자조론에는 수많은 유익한 권면들이 가득하다.  클로노라는 유명한 화가는 처음에는 비록 빛나지 않았지만 성실한 노력을 통해 유명한 화가가 되었다. '그는 쉬지 않고 자연을 자세히 관찰하고 연구했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 그는 유명해진 것이다.


멋진 인생, 성공적인 인생을 살아가기 위한 정말 멋진 책으로서 '자조론'을 적극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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