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이 잡아온 털두꺼비 하늘소


이름도 어렵다. 털두꺼비 하늘소란다. 너무 신기한 건 등을 만져보면 털이 나있서 부들부들한다. 

아들은 흥분해서 여름을 알리는 곤충 중 하나라고 한다. 

불쌍한 하늘소.... 

아들 때문에 이번 여름에도 곤충들 많은 고통 핍박을 당할 것 같다. 




곤충 박사가 꿈이라는 아들은 곤충과 로봇에 유난히 많은 과심을 갖는다. 아들 때문에 산 책을 책 꼿이에서 찾아보니 의이로 많다. 이 책 말고도 곤충 특히 사슴벌레와 장수 풍뎅이 같은 곤충 관련 책이 잔뜩 있다. 공부는 못해도 곤충이라면 사죽을 못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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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월함에 이르는 비밀의 노트


생각외로 평이 좋지 않다. 알라디너들 말이다. 그러나 이 책은 그렇게 나쁜 책이 아니라는 점을 말해주고 싶다. 물론 이 책 하나만을 두고 본다면 완전성에 있어서 약간 부족한 느낌이 많이 든다. 그럼에도 이 책은 썩 괜찮은 책이다. 좋지 않다는 평은 오히려 독자들이 착오가 아닌가 생각된다. 


이 책은 모두 4부로 나누어져있다. 천재들의 일상 속에서 노트가 어떤 역할을 제공했는지를 보여주려고 애쓰고 있다. 필자도 책을 읽고 노트로 필기 해둔다. 읽기만 해도 바쁜 일상에서 불필요한 것은 아닌지 의구심을 드러내는 분들도 있지만 노트에 쓰는 것은 생각보다 많은 것을 가져다 준다. 


평범을 넘어서는 탁월함은 어디서 생겨나는 것일까? 답은 기억하는 것이다. 기억력이 좋지 않다면? 메모하는 것이다. 기억은 머릿 속의 플래쉬 메모리같은 것이라 순간적인 것은 속도감있게 풀어낼 수 있지만 더 이상의 진보는 불가능하다. 그러나 메모는 하루에 한자를 그 다음날은 더해서 두자를 적어가면 생각의 깊이와 넓이를 확장시킬 수 있는 것이 메모의 비밀이다.


불교에는 점수와 돈오라는 두 가지의 깨달음이 있다. 점수는 점진적인 발전을 통해 얻는 것이고, 돈오는 갑작스런 깨달음이다. 두 가지는 서로 다른 것이 아니라 합력해야될 요소다. 갑자기 생겨난 아이디어가 돈오라면, 그것을 기록하고 체계적으로 세워나간느 것이 점수가 되는 것이다. 메모는 갑작스런 돈오와 그것을 체계적으로 만들어주는 점수가 결합된 것이다.


<적과 흑>의 저자인 스탈당은 기억력이 매우 좋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한 그가 어떻게 위대한 작품들을 쓸 수 있었을까? 답은 메모에 있다. <천재와 광기>에 소개된 일화를 보면 그는 믿을 수 없는 기억력을 보완하기 위해 손에서 연필을 놓지 않았다고 전한다. 그는 읽은 책의 가장자리, 빈 종이, 편지, 일기장에 자신의 생각을 끊임없이 적고 또 적었다.


임진왜란의 상황을 기록한 유성룡의 <징비록>을 보면 그가 얼마나 체계적이고 세밀하게 고민하고 있는 보여준다. 그는 상황을 살피고 어떻게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지를 적고 수정하고 보완해 나갔다. 데카르 역시 메모광이었다. 자신이 생각이 떠오르면 침대 맡에 놓인 메모지를 들고 즉석해서 기록했다. 아침에 늦게 일어난다고 알려진 데카르트는 침대에 누워서 생각하는 버릇이 있었다고 한다. 메모를 통해 위대한 업적을 이룬 가장 유명한 사람은 아무래도 레오나르도 다빈치일 것이다. 그는 글 뿐 아니라 그림에도 소질이 있어 그림과 함께 메모를 했다. 아직도 그의 메모들은 아이디어를 얻으려는 현대인들의 보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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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트랑 2012-04-23 11: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노트는 참 좋은 습관이고
글을 쓰는 분들에게는 아주 유익한 것이라는데 동의합니다.

그리고 기억력이 나쁜 저와 같은 사람에게는
특히나 필요해보입니다 ㅠ.ㅠ
뭘 해야지...하고는 금새 까먹거든요^^
 

진화론의 실체를 아십니까?


진화론이 대세다. 진화론은 알 수 없는 어떤 이유 때문에 진화를 거듭하여 지금의 인간이 되었다는 이론이다. 진화론자 사이에서도 주장이 많이 다른 입장에 서 있기는 하지만 어쨋든 진화는 계속되고 있다는 데 합일된 상태다. 사실 이런 책은 돈을 들여 사고 싶지 않는 책들이다. 그러나 중요한 이슈를 다루고 있어서 안 살수도 없는 책이다. 출판사의 의도된 노이즈 마케팅인지 모르겠지만 하여튼 성공한 듯 하다. 나 같은 지독한 기독교인도 이 책을 사지 않고는 궁금해서 견딜 수 없기 때문이다. 



이번에 리처드 도킨스와 그 악당 16명이 모여 한 권의 책을 펴냈다. 이름은 <왜 종교는 과학이 되려하는가>이다. 책의 요지는 간단하다. 종교는 과학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 책에서는 2005년에 있었던 펜실베니아주의 지적설계론은 교과서에 실을 수 없다는 판결에 대한 답변이라 할 수 있다. 그들은 기독교의 근본주의자들이 공교육에 진화론과 더불어 지적설계론도 함께 가르쳐야 한다는 소송을 법원에 냈던 것이다. 판결은 지적 설계론은 과학이 아니기 때문에 학교에서 가르칠 수 없다고 결론 지었다. 판결문에서 과학이 아닌 이유는 (1) 초자연적인 인과관계를 끓어들이고 허용함으로써 과학의 수백 년 된 기본 법칙들을 위반한다 (2) 지적설계... 창조과학의 종말을 부른 비논리적이고 결함투성이인 억지 이원론을 허용한다. (3) 진화론에 대한 지적설계의 부정적인 공격은 과학계에 의해 반박 되었다는 이유를 들었다. 


간단하게 한 문장으로 요약하면 지적설계는 비논리적이고 초월적이며, 과학으로 받아들일 만한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문제의 핵심은 초월과 비논리이다. 초월은 논리적이지 않다. 초월은 비논리적이다.  그렇다면 과학은 논리적이다? 과연 그럴까? 


많은 사람들이 지적설계를 반대하고 진화론을 옹호하는 글을 올렸다. 두 곳만 살펴보자. 첫장 '지적 설계는 왜 과학이론이 아닌가?'를 쓴 제리 코인의 글이다. 코인은 지적설계가 과학계를 애매모호하게 만들려는 의도라고 주장한다. 또한 위장된 창조론이라고 말한다. 여기서 코인은 더 이상 상세하게 지적설계를 설명하지 않고 곧바로 진화론을 옹호하는 쪽으로 논지를 선회한다. 그는 단도직입적으로 진화는 많은 증거를 가지고 있다고 주장한다. '증거는 화석기록, 현생 종의 해부구조와 성장과정에서 지금도 볼 수 있는 신기한 잔재들 그리고 생물 지리학-지구 동식물상의 지리적 분포-에서  나온다.'(19쪽)



화석을 근거로한 그의 주장은 이런 식이다. 화석층을 살펴보면 고생대 중생대 순서로 화석이 분포되어 있기 때문에 진화가 맞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 주장은 불쌍한 주장이다. 그들이 주장하는 방식으로 일정하게 화석이 분포되지 않는 곳이 많기 때문이다. 바이러스를 보자. 분자생물학이 발달하면서 바이러스의 연구가 활발해지고 있다. 이들의 주장은 바이러스도 환경에 따라 변화하고 진화한다는 점을 든다. 그런데 아는가 바이러스는 다른 종이 되지는 않는다. 다만 상황을 이겨내기 위해 더 강해지고 면역성이 길러진다는 것 뿐이다. 코인은 마지막 부분에서 다시 지적설계의 네가지를 들어 비판한다. 이 부분을 생략하자. 



다른 글을 하나 더 보자. '나는 어떻게 인류의 진화 증거를 발견하는가?'란 글이다. 팀 화이트에 의하여 기록된 글이다. 화이트의 주장은 정말 단순하다. 많은 화석 증거물이 존재하기 때문에 진화가 맞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어떤 부분에서는 매우 솔직하게 인정한다. "이 사건을 풀기 위한 수사는 쉽지 않을 것이다. 단서는 너무 적고, 사건은 오리무중이다. 아무고 기억할 수 없는 과거로부터 온 부서지기 쉬운 한 인간 두개골 화석이 엘니뇨 탓에 내린 비로 세상의 빛을 보았다."(91쪽) 그가 발견한 작은 뼈는 엘리뇨 때문에 우연찮게 발견 되었으며, 아직 증거는 충분하지 않다고 말한다. 그러다 갑자기 이렇게 주장한다. "이 두개골의 주인은 몸직이 큰 사람이었지만, 우리 종인 호모 사피엔스 남성임은 분명했다."(93쪽) 놀라운 비약이다. 


다시한번 그의 솔직함을 들어보자. "먼 옛날 혈통인 경우, 지구의 지질 기록은 애석하게도 불완전하다. 아버지와 어머니들의 시신들은 대부분 부패하여 아무런 흔적도 없다."(99쪽) "그것은 단순히 우리가 아직 충부한 화석을 갖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102쪽)


그의 글을 읽고 있으면 광란의 폭주를 보는 듯하다. 한 편에서도 화석의 증거들이 턱없이 부족하기 때문에 불완전하기는 하지만, ...진화는 확신하고 있다. 증거는 없는데 확신하는 것.. 그렇다 그것이 진화론의 실체다.



지직설계는 모든 기독교인들이 주장하는 창조론이 아니다. 그럼에도 가장 중요한 주류의 주장인 것 만큼은 확실하다. 지적설계는 창조주가 단번에 진화의 필요성 없이 세상을 완벽하게 창조했다는 주장이다. 진화론자들은 이러한 완벽한 단 번의 창조를 부인한다. 점차적으로 보안되고 진화되는 것으로 본다. 진화의 본질은 자연선택 즉 생물이 자기 스스로 선택하여 환경에 적응하며 진화된다는 것이다. 자연도태는 자연선택의 반대편의 필연이다. 


참 슬프다! 진화론의 주장이 무엇인지 아는가? 그 안에는 우생학이 교묘하게 들어가있다. 자연선택설의 주장에는 히틀러가 그랬고 백인들이 그랬던 것처럼 오직 그들만이 최고의 진화의 산물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솔직하게 들여다보자. 아프리카 인들은 진환론의 입장에서 본다면 백인보다 덜 진화된 존재들이다. 황인종은 그보다 조금 낫다. 진화의 최고봉은 역시 백인들이다. 이러한 진화론의 실체는 마이클 샌델이 그의 책은 <생명의 윤리를 말하다>에서 이미 지적한 바가 있다.


또하나는 진화론은 백들인에의하여 만들어지면서 교묘하게 시장개방을 충동질하며, 이론적으로 뒷받침하고 있다는 점이다. 시장이 알아서 할 것이나 정부는 손을 대지 말라는 것이다. 왜? 시장도 진화하기 때문이다. 이 오래된 시장에 대한 논쟁은 일찌기 제국의 팽창 시기에 대국들이 약국들을 잡아 먹기 위해 만들어 놓은 잔인한 술수였다. 이러한 진화론에는 흑인들을 덜 진화된 원숭이로 보며 인간을 동물로 보도록 만드는 어처구니 없는 일이 서스럼 없이 저질러졌다.


잔인하고 슬픈 일이지만 진화론의 밑바닥에는 최고만 알아주고, 1등만 사람으로 취급하는 경쟁과 분열이 숨겨져있다. 


이제 돌아가야 한다. 버려지고 소외된 이들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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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혀... 2012-04-28 13: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미안한데 최재천 교수가 설명했듯이 진화론이 이상하게 된 건 의도적으로 지들이 바꿔버린거지, 그것이 본질도 아니거니와 진화에서 비교를 한다는게 제대로 이해를 못한 거거든요? 진화론의 입장이 아니고 멍청한 백인 제국주의자놈들이 앞뒤 다 잘라먹고 아프리카인들을 자기 밑으로 분류한 겁니다. The fittest가 아니고 fitter 정도만 되어도 생존가능하거든요? 비교급과 최상급 비교를 구분못하진 않으시겠죠? 진화론의 탓이 아니고, 또 진화론이 없었어도 그런 논리는 들고 왔을겁니다. 님 주장은 제주해군기지가 있기에 타국 군대가 제주도를 침략할 거라는 논리나 아니면 우리 군대가 세력을 증강해서 타국이 공격할 것이라는 헛소리와 다를 바 없습니다.

2012-04-30 22: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서재를 잠시 살펴보니 기독교인이시군요..제가 기독교에 좋지 않는 감정을 가진건 아닌데 위에 분이 말한 것처럼 최재천교수님의 책을 처음부터 정독을 한번 해보시길 바랍니다. \
진화에 대한 기독교인의 편견을 그대로 가지고 진화론을 비판하는 것 같습니다. 종교를 가지지 않는 입장에서 지적설계론의 모순과 허구가 기독교인이 말하는 진화론의 비판보다 더 크게 느껴지는 것은 왜 일까요.?



ㅁㄴㅇㄹ 2012-05-01 09: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어처구니 없는 글이군요. 진화론의 문제가 아니라, 예전 부터 있어온 백인 우월주의는 문제 일 수 있겠죠. 관련이 없는 두 가지를 교묘하게 섞어서 같은 것으로 보는 어이 없음은 잘 보았네요. ㅇㅇ

하아 2012-05-12 23: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멍청한건지 우직한건지 알수는 없지만.
증거는 차고 넘쳐. 그걸 다 보여주면서 일일이 설명하려면 귀찮을정도로.
그리고 왜 진화론적 관점에서 보면 아프리카 인들이 백인보다 열등하다고 나오는거지?
분명 환경에 따라서 다른 적응을 했다고 보는게 진화론적 관점일텐데?
비약은 너네들이 하는거지.
그리고 히틀러...... '나는 가톨릭인이며, 앞으로도 영원히 가톨릭인일 것이다.'

그리핀 2012-05-17 09: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자신이 잘 알지 못하는 분야에 대해서 저렇게 'ㅇㅇㅇ는 xxx다'라고 단정적으로 말할 수 있다는 것이 참 놀랍습니다.
용기와 오만함을 혼돈하고 계신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이 글이 가지고 있는 심각한 오류와 문제점은 이미 위에서 많은 분들이 지적을 하셨으니 열린 분이라면 무엇이 문제인지 고민을 하실테고, 아집에 사로잡힌 분이라면 무엇이 문제인지 조차 생각하지 않으려고 하실테지요..

자신이 '지독한 기독교인'이라고 인정하셨으니 자신이 딛고 서 있는 분야의 장점과 훌륭한 점을 발굴하고 알리는 것에 노력을 하셨으면 좋겠습니다.
그 반대편의 지식체계를 악의적으로 왜곡하고 공격하는 것은 님 자신에게도 쓸데없는 시간낭비라고 생각합니다.
그 분야에 대해 깊이있는 이해와 많은 고민도 없이 수박 겉핡기식인 지식 조금 가지고 '진화론이란 xxx다'라고 하는 것은 스스로 무식을 자랑하는 것과 다름 없어 보입니다.

낭만인생 2012-05-19 18: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댓글을 달아 주셔서 감사합니다. 잘 읽고 있습니다.
얼마든지 좋은 의견이 있으면 댓글로 답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Dancer 2012-06-05 10: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우연히 클릭해서 들어왔는데. 다시는 올일 없겠군요.

비로그인 2012-06-15 01: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바이러스라고 전부 자기와 같은 DNA를 만드는건 아닌걸로 알고 있는데‥ 종교적 입장에서 창조론외에는 대부분 비판하고 싶겠지만 최근 생물학자들 사이에서 바이러스를 통해서 진화론을 보충해서 지지받고 있는 걸로 압니다ㅋ

카카오지 2012-09-12 22: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백인과 흑인,황인의 차이점은 일사량을 극복하기 위한 인류의 선택이었죠. 인간이 털이 적은것은 높은 일사량의 아프리카에서의 생활을 하기 위해서는 땀구멍이 노출되어야 하고 피부의 열을 발산하기 위해서 선택한겁니다. 그러므로 우리 인간 모두의 조상은 흑인이었을겁니다. 일사량이 적은 유럽과 상대적으로 적은 아시아의 경우는 비타민D를 확보하기 위해 일사량에 맞게 멜라닌색소가 조정된거고요..선택이라기 보다는 잘적응한 유전자가 살아남은거죠..

히틀러의 그 제3제국론도 황당하지만, 기독교인들의 십자군전쟁이나 유럽에서의 종교전쟁,마녀사냥,식민지국가에서의 착취와 비인간적 행위는 왜 묻지 않는지...?
 

이런 책 정말 괜찮은 것일까? 


아이들을 기르다 보니 자녀 양육에 관한 책이 유난히도 눈에 들어 온다. 그러다 찾은 책이 바로 [엄마수업]이란 책이다. 내용도 괜찮고 많은 분들이 추천한 책이다. 그런데 이상하게 느껴졌다. 저자가???? 법륜??? 그럼 스님??? 승려가 엄마 수업을 써.??? 처음 받은 충격은 그랬다. 그런데 이 분이 참 특이한 분인가 보다. 작년에 참 유명했던 책이 바로 스님의 주례사라는 책이다. 저자는 역시 법륜이다. 스님이 주례를 서???? 이건 뭐야??? 결혼도 하지 않고 여자와 살아 보지도 않았는데 주례를 해??? 할 수는 있겠지만 그럴만한 자격이 있는거야???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의아함이 자꾸 생겨났다. 


참 톡특한 분이다. 기발한 분이라고 해야할까? 하여튼 법륜이란 분은 약간의 의외성과 함께 뭔가 께림찍함이 묻어있다. 아... 내용을 비판하는 것은 아니니 너무 이상하게 생각들은 마시길...


스님이라면 뭐 이런 책을 써야하지 않을까?

득도, 깨달음, 착하게 살자. 등등의 제목이 붙어 있는 교훈적인 책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법륜스님은 약간의 의외성을 추구하는 분이다. 아니다. 더욱 현실에서 함께 하고 싶은 마음이 가득해 보인다. 


청년들과 청소년들위해서는 특강을 하고 책을 쓰고 있는 것을 보면 이분은 결코 보통은 아닌 것이다. 자신이 그렇게 살아서 일까? 방황하는 이들에게 던져주는 그의 가르침은 감동적이다. 가정과 현실을 떠나지 않으려는 법륜의 열정은 그가 지은 모든 책들에 깊이 스며있다.



















법륜의 책이 모두 이런 일상 만을 주제로 하지는 않는다. 붓다의 경전을 풀어낸 책들과 기도와 깨달음을 담은 책들도 있다. 중세의 천주교가 성과 속을 분리하여 이분법적으로 세상을 추한 것으로 정죄했다면 개신교는 그것을 하나로 봄으로 속을 성으로 혼돈 시킨 죄가 있다. 둘 사이에서 조화를 이루고 중용의 도를 추구하는 것을 결코 쉽지 않으리라. 법륜도 아마 이러한 중용을 추구하는 승려로서 고민이 묻어있다. 














영국의 경험론자들은 경험이 진리라고 말한다. 경험할 수 없다면 거짓이라고 말한다. 경험이란 무엇일까? 오감을 통해 이해되어지는 것이 아니던가. 그런데 세상의 모든 일을 경험해야할까? 그러면 말할 자격이 주어지는 것일까? 만약 그렇다면 아무도 자신이 경험한 것 밖에는 말하지 못할 것이다. 경험도 오류가 있고 편견이 있기 때문에... 참 지식이란 어떤 의미에서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렇게 정의해 보자. 비록 간접적이든 직접적이든 자신의 생각을 풀어낼 자격은 있다고.... 

하여튼 내게 법륜스님의 책들은 모두 공감이 가고 특별한 깨달음을 준다. 종교는 달라도 진리를 추구하는 면에서는 모두 같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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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와 권력, 기독교는 왜 타락했는가?



'서구의 역사는 기독교의 역사다.' 역사에 조금이라도 관심을 갖고 있는 사람이라면 이 말의 의미를 절실하게 느낄 것이다. 인류의 역사를 기술한 역사서적들의 목차를 보면 대체로 이렇게 되어있다.

원시시대(구석기, 신석기), 청동기 시대, 철기시대, 사대문명, 고대사회, 중세사회, 근대와 현대사회

원시사회와 청동 철기 시대까지의 구분은 동서양의 구분이 명확하지 않지만 고대 사회로 넘어오면서 역사를 그리스와 중동의 초승달 지역으로 한정된다. 중세와 근현대는 말할 것도 없이 유럽중심의 역사이다. 동양사에서 중세의 개념은 없다. 고대에서 곧바로 근현대로 넘어가 버린다. 이러한 역사 편견이 가능했던 이유는 그동안 역사를 주도해온 역사가들이 대부분 서양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고대의 역사에 빠지지 않고 나오는 것은 메소포타미아를 중심으로 한 문명 이야기와 그리스와 헤브라이즘, 그리고 이집트의 역사이다. 간략하게 언급하고 넘어 가기는 하지만 고대 후반부에 자리잡은 나라들은 모두 중세와 근현대의 지평을 열어갈 초석이되는 나라들이다. 로마시대를 거쳐 중세로 접어들면 역사는 '기독교'라는 한 종교의 역사로 변형된다. 서양의 역사는 곧 기독교의 역사가 된다. 우리가 잘 아는 로마의 멸망 시기로부터 루터의 종교개혁과 시민계급의 등장으로 인해 근대의 시작을 알리는 과학혁명 등은 모두 기독교라는 배경을 깔고 있다. 장미전쟁, 30년 전쟁 등등 서구 역사의 걸죽한 사건들은 모두 기독교와 관련된 사건들이다. 중세는 기독교가 종교와 세속정치를 한 손에 쥐고 흔들었던 시대이다. 이곳에서 왜 그러한 일이 일어나게 되었는지를  다 설명할 수는 없는 일이지만, 한가지 분명한 것은 기독교은 초심을 잃어버리고 세속적인 권력에 유혹되어 정신적인 유배를 당한 시기였다. 중세의 시작을 역사가들은 대부분 그레고리1세가 교황의 자리에 오른 시점으로 시작한다. 중세로 구분하는 기준은 종교와 권력이 일치된 시기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신학적인 문제는 그 전부터 암시되었지만 그레고리1세는 그것을 혈실화햇고, 실제로 로마의 붕귀로 인한 권랙 부재의 시기에 교회의 힘을 빌어 스스로 세속권력까지 교회가 손에 넣은 것이다. 초기의 교회권력은 혼란의 시기에 세상을 중재하고 평화를 가져다주는 수단으로서 이용되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세속정치에 중독되어 손을 놓지 못하고 만 것이다. 이리하여 중세는 교회가 종교와 권력을 한 손에 쥐고 좌지우지하는 타락한 시기요 암흠의 시기가 도래하게 되었던 것이다. 중세의 교회는 하나의 교회로 지금의 로마천주교회를 말한다. 


중세의 천년이 될 즈음에 양심적인 한 명의 수사가 비텐베르크에 95개조를 걸어 놓고 도전했다. 그가바로 종교개혁을 일으킨 마르틴 루터이다. 루터의 개혁으로 새로운 시대가 도래하였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도 물러나고 옥캄의 유명론이 대세가 된 것이다. 하나가 아닌 다양성을 추구하는 좀더 근대화된 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종교개혁과 근대는 정신을 같이한다. 르네상스 운동으로 인해 고대로 돌아가려는 욕망은 그동안 신비에 갇혀있던 원전에대한 욕구, 호기심이 일어났고 이것은 다시 사본학과 과학적 수단으로서의 분석이 요구되었다. 칼빈의 등장은 루터를 넘어서는 새로운 시민정신을 가져왔다. 칼빈은 직업과 소명을 하나로 보았고, 성과 속을 구분했던 중세의 이분법적 사고를 버리고 성속이 하나라고 말했다. 이러한 근대적이고 파격적인 선언은 세속직업을 하찬케 여겼던 중세의 사상을 벗어 던지게 했고, 세속 일하는 시민들의 열열한 반응을 얻어냈다. 실제로 프랑승의 자유와 이성, 영국의 합리주의와 시민정신은 모두 칼빈에게서 나온 것들이다. 그러나 개신교 역시 완전한 탈권력을 이루지 못한다. 지금 한국의 장로교는 칼빈의 후예들이 영국의 청교도와 스코틀랜드의 개혁자인 존 낙스의 작품이다. 장로교라는 자체가 권력적인이고 정치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다. 교회의 대표인 장로와 목사가 하나의 당회를 이루고 교회정치를 하는 것이다. 
















개신교가 가장 꽃을 피웠던 화란-네덜란드는 중세의 이미지를 그대로 가져갔다. 역사적 배경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라는 상황을 이해한다고 하더라도 화란은 종교와 정치가 하나로 통합되었다. 근대의 시작은 천주교와 개신교와의 싸움이며, 이분법적 성속관과 근대적 정신을 가진 개신교와의 싸움이었다. 승리는 자명했다. 개신교의 승리였다. 그러나 개신교는 자신이 처음부터 분열과 옥캄의 유명론적 개체주의가 하나됨의 불가능을 안고 있었다. 자신의 의견과 견해가 다르면 개신교는 끊임없이 분열하고 다시 분열하는 속성을 자체적으로 가지게 된 것이다. 


근대의 합리주의와 이성이 시대이다. 계몽과 시민정으로 똘똘 뭉친 프랑스의 지식층들은 시대를 주도했다. 영국과 미국에까지 영향을 주었다. 간접적인 영향을 받은 일본은 메이지 유신을 통해 대대적인 근대적 정신과 사물을 받아 들였다. 물론 그 이전에도 화란-네덜란드와의 무역을 통해 신신 무기인 조총을 만들어 임진왜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근대정신은 곧 과학정신이고, 성과 속이 일치되는 성향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근대정신의 속성상 교회는 다시 세속 권력으로의 발판을 놓을 수 있었고, 신의 이름으로 정치를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우리나라의 경우를 보자. 처음 우리나라에 기독교가 들어 올 때는 정치적인 성향이 거의 없었다. 초기 일제강점기 때의 기독교는 계명과 신앙이라는 타이틀로 나라와 민족을 개화하고 정신을 근대화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이 부분은 심훈의 장편소설인 <상록수>에 잘 그려져 있다.) 정치에는 일체 관여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현실도피적인 성향이 두드러졌다. 아무래도 일본과 부딪히지 않으려는 선교사들의 조심스러운 행보였을 것이다. 기독교의 영향을 받았던 민족지도자들은 개화된 정신과 과학정신으로 무장되었다. 독립선언서를 기록한 33인의 대표중 16명이 기독교인인 것은 당시의 기독교의 특징을 보여주는 부분이다.


문제는 해방 이후에 찾아온다. 우리나라 초대 대통령인 이승만 대통령은 기독교인이다. 현대인들은 그를 싸잡아 욕을 하지만 그의 초기 시절에는 나라와 민족을 사랑하는 독립운동가였다. 그러나 친미적 성향의 정권 수립과 친일파의 청산의 제대로 이루지지 않는 상태에서 '안정'이라는 이유만으로 나라를 시작한 것이 화근이었다. 그로인해 집권층은 '기독교' '친일파'라는 두 큰 기류가 생겨나게 된 것이다. 아이러니한 일이지만 일제시대 당시에는 탈 권력적이던 기독교가 집권층?이 된 다음부터 권력화되고 세미정치권력집단처럼 변질되기 시작했다. 개혁과 혁신을 부르짖기 보다는 안정과 복을 구하는 세속적 욕망을 추구하는 욕망의 도가니가 되어 버린 것이다. 


특히 군부시절을 지나오면서 권력과의 결탁이 아니며, 정치에 전혀 관심을 갖지 않도록 하는 현실도피적 형태로 갈라지게 된다. 보수적인 장로교는 정치를 공의 수단으로 생각하는 성향이 강해지고, 진보적인 기장측은 구원을 사회적 구원으로까지 확장시킴으로 정치와의 대결구도로 나아갔다. 이승만, 김대중, 김영삼, 이명박 등은 기독교인들이며, 기독교적인 성향의 대통령들이다. 기독교 대통령의 당선은 기독교의 정치적 결탁을 더욱 부추겼고, 세속적인 성공을 신앙의 성공인 것처럼 꾸며대는 일까지 벌어진 것이다.


한국교회는 탈권력화로 나아가야 한다. 초기 기독교는 중심부로 향한 권력지향이 아니라 주변부로의 치유지향이었다. 소외되고 고통받는 사람들과 함께 울고, 함께 웃도록 부름받았다. 세상을 치유하는 교회로 나아가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공의와 정죄를 일삼는 권력자가 아닌, 작은 자들과 소수자들을 향한 섬기는 자로 서야 하는 것이다. 대형화로 인해 교회 안에 소외현상이 극심하게 일어나고 있다. 교인수가 권력과 힘이되는 시대가 되었다. 교회가 스스로 높은 곳에 앉아 '체'하고 있다. 참으로 슬픈 일인다. 교회는 다시 낮은 곳으로 내려가야 한다. 


논어에 이른 말이 있다.

자식어유상자지측 하매, 미상포야요, 자어시일에 곡즉불가라

子食於有喪者之側 未嘗飽也 子於是日 哭則不歌

상을 당한 사람 앞에서 배불리 먹은 적 없고, 곡을 하면 노래를 부르지 않으셨다는 뜻이다. 이 말은 곧 아픔과 슬픔을 함께 나누고 그들과 같은 마음으로 살아야 할 것을 당부하신 말씀이다. 예수도 진즉에 '슬픈 자들과 함께 울고, 기쁜 자들고 함께 웃으라'고 말씀하지 않았던가. 이제 본연의 자리로 돌아가자. 낮은 곳으로, 소외된 곳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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