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이 당신의 손을 잡을 때
잭 캔필드, 마크 빅터 한센 지음, 이창식 옮김 / 푸른숲 / 200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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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 당신의 손을 잡을 때'
몇 년전에 헌책방에서 중고책들을 구입한 적이 있다.
책을 엄청 저렴한 가격에 판매하시길래, 읽고 싶은 책을 마음껏 구매할 수 있었다.
택배박스를 여는데, 주문하지 않은 낯선 책이 들어있었다.
포스트잇에 '서비스 책입니다. 감사합니다'라고 적힌.
그게 이 책과의 첫만남이었다.
선물과도 같은 책, 겨울철 난로보다도 참 따뜻한 책이었다.
당시에는 몰랐는데 이 책의 저자인 '잭 캔필드'의 '영혼을 위한 닭고기 수프'라는 책이 부모님 세대에 유명한 책이었다고 한다. 어머니께서 좋아하시는 류시화 작가님이 번역하셨다고 해서, 그 이후에 개정판으로 읽어보았고, 잭 캔필드 작가님의 이야기에 푹 빠져버렸다.
책 제목에서 그렇듯이 이 책은 사랑에 관한 다양한 에피소드를 담은 책이다. 좀 더 자세히 말하면 '친절함'에 대한 이야기들.

나는 아주 어렸을 때부터 '사랑'이라는 것이 단순히 누구를 좋아하는 감정만을 뜻하는 것이 아님을 잘 알고 있었다.
내가 본 최초의 사랑은 무엇이었나?
지난 날들을 떠올려보았다.
참 많은 순간들이 떠오른다. 이상하게 사랑이 녹아있던 추억은 언제나 눈물과 함께 찾아온다.
초등학교 5학년 때 학교 수업이 끝나고 청소당번이라서 담임 선생님과 함께 청소 중이었는데, 복도에서 기침을 심하게 하는 아이가 지나가고 있었다.
담임선생님은 기침 소리만 듣고도 얼굴이 하얗게 변하며 갑자기 복도로 뛰어나가 그 아이에게 '기침 소리가 심하니깐 꼭 부모님하고 병원가야되 알았지?' 라며 거듭 당부했다. 당시 나는 겨우 초등학교 5학년이었고, 선생님이 왜 그렇게 놀란 표정으로 그 아이에게 달려 나갔는지 이해가지 않았고, 중학생이 되어서야 선생님의 행동이 이해되었다. 내 막내 동생이 어렸을 때 폐렴에 심하게 걸려서 병원에 입원치료를 받았었고, 간병하신던 어머니의 말씀으로는 몇번의 심각한 고비가 있었다고 한다. 그때 나는 중학생이었고, 동생이 잘못될까봐 학교 끝나고 집에 오자마자 동생에게 줄 편지를 울면서 썼던 기억이 있다. 그제서야 그때 선생님의 행동이 이해가 갔다. 그 아이의 기침소리만 듣고도 선생님은 혹시라도 급성폐렴으로 아이가 위독해질까봐 갑자기 뛰쳐나가 아이에게 부모님과 당장 병원에 가보라고 말한 것이었다. 선생님 반의 학생도 아니었고, 전혀 모르는 아이였는데 그때 선생님의 세상 무너진 듯 걱정스러운 표정이 바로 내가 처음으로 느낀 '사랑'의 얼굴이었다.
누군가를 진심으로 위하는 그 무엇, 그것의 행동. 나는 그것이 사랑이라고 느끼고 배웠다.
선생님같은 어른이 되어야지, 라고 그때 생각했었던 것 같다.

얼마전에 도서관에 근무할 때의 일이다.
당시 첫출근 일주일 전, 나는 내가 일할 곳의 업무를 파악하기 위해서 주말 아침 일찍 도서관을 방문했다.
우리 지역의 시립도서관은 매년 50만명의 이용자들이 방문하여 책을 읽고 공부하는 곳이라, 특히 주말에는 아침 9시 문 열자마자 1시간도 안되서 자리가 다 찬다.
그날도 역시 자리가 빨리 차서, 앉을 곳이 없어 학생들이 다시 집으로 돌아가곤 했다. 나는 잠깐 물을 마시러 휴게실에 갔고, 초등학생으로 보이는 남자 아이 둘이 책가방을 옆에 두고 앉아있는 모습을 보았다. 딱 봐도 도서관에 자리가 없어서 휴게실에 쪼그려 앉아있는 것 같았다. 부모님께서 차 태워서 도서관에 내려줬을테고, 아마 부모님께서 데릴러오시기 전까진 이 아이들은 도서관에서 공부를 해야만 할것이었다. 나는 그 아이들에게 다가가 혹시 자리가 없어서 여기 있는거냐고 물었고, 아이들은 그렇다고 했다.
알고보니 둘이 형제였고 형은 이제 중1, 동생은 초등학생이었고, 공부하러 왔는데 자료실에 자리가 없어서 휴게실에서 공부하려고 했단다. 나는 그 아이들에게 1층에 있는 어린이도서관에 가면 공부할 수 있는 자리가 많다고 했고, 동생이 초등학생이라서 같이 이용할 수 있다고 안내했다. 그러자 갑자기 세상 가장 해맑은 미소를 지으며, 형과 동생이 두 손 꼭 잡고 1층 어린이 도서관으로 뛰어갔다. 사실 모르는 꼬마들한테 다가가서 말걸기가 부끄러웠고, 그 아이들이 공부할 자리가 없어 휴게실에 쪼그려 앉아있는 걸 그냥 지나칠 수 있었다. 하지만 나는 용기내서 아이들에게 다가갔고, 그 아이들이 도서관에서 마음껏 책을 읽고 공부할 수 있도록 돕고 싶었다. 절대 대단한 일은 아니지만, 도서관에서 일한다는 것에 어떤 책임감이 갑자기 느껴졌었다.
아직까지도 내 가슴에 남아있는 아름다운 장면은 그 형제의 뒷모습이었다.
오늘 도서관에서 동생이랑 같이 책도 읽고 공부하고 집에 갈 수 있다는, 그 생각에 너무 좋아서 동생 손 꼭 잡고 세상 가장 행복한 웃음을 지으며 뛰어가는 그 형제의 뒷모습을 보면서 갑자기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동생이 있는 사람들은 알 것이다. 동생을 챙겨야 하는 첫째들의 책임감과 사랑을.
사실 첫째들도 동생을 챙기기엔 너무 어리고, 무섭고, 모든 게 다 처음인데 말이다. 그래도 첫째기에 언제나 강한 척, 모범을 보여야하는 숙명. 그런데도 그렇게 좋아서 동생 손 꼭 잡고 공부하러 도서관으로 뛰어가는 형제를 보며, 또 나는 '사랑'을 보고 느꼈다.
도서관에서 일할 때도 역시나 사랑을 경험한 순간이 참 많았다.
그 중 가장 기억나는건
도서관 마감시간 전, 책 정리하느라 가장 바쁜 시간이었고
아이들이 드넓은 도서관 구석구석마다 숨겨놓은 책들을 챙겨서 서가에 다시 꽂아야 할 때,
길게 줄지어진 소파 뒤로 아이들이 떨구어 놓은 책을 모조리 꺼내야하는데 그게 참 어려운 일이었다.
근데 소파에 어떤 아저씨께서 앉아계셨고, 그 아저씨 자리 뒤쪽으로 넘어간 책을 다 꺼내야되서 아저씨께 잠깐 비켜달라고 말씀드렸더니, 아니 이게 웬걸. 이미 그 아저씨께서 소파 뒤로 넘어간 책들을 다 꺼내서 소파 위에 두셨던 것이다.
아마 내가 땀 뻘뻘 흘리며, 힘들게 구석 틈틈이 책을 꺼내는 모습을 보셨나보다. 정말 바뻤었고, 도저히 웃을 수 없을만큼 업무량이 많았을 때라 좋지 않은 표정으로 하루종일 일했을텐데. 내가 해야할 일이었는데, 책을 미리 다 정리해주신 아저씨께 너무 감사했다. 세상엔 이렇게 친절한 사람이 있구나. 나는 그때부터 더 책임감을 갖고 아무리 힘들어도 웃으며, 열심히 일했다.

아무런 대가 없이 '친절함'을 베푸는 사람들이 있다.
아무런 목적 없이 사람을 돕고 또 무심히 지나간다.
세상을 바꾸겠다는 정치인들의 거대한 신념과 담론보다,
그저 오늘, 내가 있는 자리에서 친절함을 베풀고, 선행을 실천하는 것이 진정 세상을 바꾸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게 '사랑'의 참모습이다.
그저 누군가를, 혹은 어떤것을 좋아하는 '감정'에 놀아나는 것은 사랑이 아니다.
내 감정만을 생각하고 그 감정 속에 빠지는 것이 어떻게 사랑이겠는가.
사랑은 대상에서 다른 대상에게로, 어떠한 영향이나 변화가 이루어지며 발생하는, 알수 없는 '에너지'이다.
눈에 보이지 않고, 각자가 사랑이라고 느끼는 것들이 다르지만, 나혼자만이 갖고 있는 생각이나 감정들이 사랑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가질 수 있는 건 사랑이 아니다.
사랑은 적어도 어떤 것에게 '변화'를 일으키는 것이어야 한다.
나의 행동이 어떤이에게 영향을 미치게 되고, 또 그것이 다른 것으로의 변화를 일으키게 되고.
'반향(反響)'이라는 단어가 사랑을 잘 나타낸다고 생각한다.
원인과 결과라는 형식에 영향을 미치는, 그것이 우연이든 필연이든 그 무엇이든간에, 대상에서 대상에게로 끝없는 변화를 이끌어내는 인간의 의지. 나는 이것이 '사랑'이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사랑이라고 느끼며 말하는 것들은 결국 어떤 감정이나 우리가 가진 것들이 절대 아니고,
그저 알 수 없는 원인과 결과들의 향연이라고 생각한다.
존재하는 건 다만 우리의 선택과 행동, 그리고 의지일뿐이다.
사랑은 존재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그건
눈 앞에 펼쳐진 결과들 속에서 우리의 의지가 이끌어낸 어떤 영혼의 울림을 느끼는 것이다.
이 책에 수록된 모든 이야기들이 이것을 잘 말해주고 있다.
영화 '나비가 날개를 펄럭이면'에
내가 생각하는 사랑의 의미를 잘 나타내주는 대사 있었다.
"보다시피 모든 사소한 행위 뒤에는 아무리 하찮을지라도 무한한 진실이 실려있네. 다시 말하면 끝없는 반향과 결과를 내포하는 거지" 라는.

마지막으로 이 책의 표지에 적힌 몇가지의 문장들을 적는다.
내가 그동안 '사랑'이라고 생각했던 것을 잘 나타내주는 문장들이다.
'우리는 단지 우리가 가진 것만을 주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도 주어야 한다.'
'가장 위대한 사랑의 실천은 작은 친절을 습관처럼 행하는 사람들에 의해 이루어진다.'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는 건 그 사람의 아름다움이 아닌 친절함 때문이다.'
'지나온 삶을 되돌아보면, 다른 사람들에게 베풀던 때가 인생에서 가장 인상깊은 순간이었다.'
'사랑으로 지어진 집은 천년을 견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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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장은 붉게 물들다 1
김라온 지음 / 현대문화센터 / 200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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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년대에 태어난 사람들은 아마 '인소'라는 단어를 알 것이다.
'인터넷 소설'의 줄임말.
현재 네이버의 '웹소설', 혹은 '라이트 노벨'이라고 불리우는.
한국 정통 순수문학의 범주에는 속하지 않지만,
누구는 분명 이 유치하고 논리적이지 않은 판타지같은 어설픈 소설을 왜 읽냐고 비난할지도 모르겠지만,
2000년대 초중고 시절 우리가 한때 미쳐서 읽었던 인터넷 소설이 있었다.
한국 문학에서 아름다운 묘사로 손꼽는 김승옥 작가의 무진기행만큼이나,
나에게는 미치도록 아름답고 설렜었던 인소들.
그 중에 제일 좋아했던 작품이 바로 '심장은 붉게 물들다'였다.
고등학교 2학년 때 처음으로 인소의 세계에 푹 빠졌었다.
그 전까지는 피아노와 음악과 만화에 빠졌었고, 그렇다고 공부를 소홀히 하지는 않은 모범생이었다.
그런 내가 고2 때 도도퀸단비의 '열병'이라는 인터넷 소설을 읽고부터는 미친듯이 인소에 빠져서,
당시 음악과 동영상, 텍스트파일까지 다 저장할 수 있었던 MP3에 세상 모든 인소를 다 집어넣고 야간자율학습시간에 감독선생님 몰래 읽었었다.
나한테는 이것이 크나큰 일탈이었다.
학교 자습시간에 다들 내신, 수능 공부할 때 소설을 그것도 인터넷 소설을 읽다니, 그땐 진짜 미쳤었다.
그래도 감독쌤 몰래 그 방대한 양의 텍스트파일을 빨리 읽어내느라 덕분에 수능 국어영역 점수는 좋았었다. 긴 지문을 빠른시간 내에 정확히 읽어내는 데에 인소가 확실히 도움은 되었다.
이 소설의 작가는 김라온이라고 표기되어 있지만,
당시 내가 텍스트파일로 다운 받았을 때의 필명은
'틀에박혀'였다.
아마 이 작가님도 무한경쟁의 시대 속에서 오로지 대학 진학을 위해 고등학교 3년의 수업이 수능 위주로 흘러갔던 재미없는 현실을 어떻게든 타파하고자 '틀에박혀'라는 닉네임을 쓴 것이 아닐까, 그때는 어린마음에 그렇게 추측했었다.
소설의 내용은 비운의 운명 속에서 자신을 연민하며, 그 굴레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던 여주를 무척이나 사랑해주는 남주가 등장하면서부터 여주는 밝은 모습으로 점차 달라지게 되고 둘이 행복한 가정을 이루며 살아간다는,
딱 그당시 유행하던 인소들의 패턴과 그리 다르지 않다.
근데, 설렌다 미치도록. 이게 인소의 매력이다.
별거없는 내용에 유치하게 짝이 없는 대화와 감정의 전개, 간혹 말도 안되는 판타지적인 설정들.
인소를 정상적인 소설의 범주라고만 생각하지 않는다면
이런 것들 쯤이야 다 이해하고 넘어가면 그만이고,
인소가 그 당시 그렇게 유행했던건
아마도 한창 사춘기였던 소년,소녀들의 말도 안되는 이상한 로망들이 인터넷 소설이라는 형식 안에 완벽히 구현되었기 때문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다른 또래들도 그랬겠지만, 유독 나는 상상을 많이 했다.
나는 걸어서 초중고를 다녔었고,
아침에 등교하는 길, 집에 돌아오는 길에 보았던 수많은 사람들, 자연, 건물 등의 풍경을 매일 보며,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지도 않을까? 라는 식의 모든 사건들을 상상해보곤 했다.
그게 왜 그렇게 재밌었는지.
하루는 학교에 나를 데릴러 온 어머니와 함께 걸어오는 도중에 숲을 지나오며, 흔들리는 풀꽃들을 보면서 나도 모르게 한 편의 시같은 언어들을 읊어대었고, 옆에 계시던 어머니는 '너 사춘기니?' 하시면서 웃곤 하셨다.
그 기억이 아직도 남아 있는 게 참 신기하다.
그 정도로 나는 학창시절에 문학에 빠졌었나보다.
인터넷 소설은 문학의 범주에 들어가지는 않지만,
정통 순수문학에는 없는 설레임과 떨림을 무한정으로 느끼게 해준다.
정말이지 입 틀어막고 볼 빨개지면서 속으로 비명지르면서 그렇게나 설레면서 인소를 읽었던 기억은 아마 나만 갖고 있는 게 아닐거다.
이해되지 않는 감정에 휩싸이며, 어른들이 보기엔 말도 안되는 것들로 고민하고 상처받았을 사춘기 소년 소녀들의 이상한 머릿 속 세계를 그대로 소설에 옮겨놓고 온갖 로망들로 표현한 것이 바로 인터넷 소설이었다.
거기서 위로받고 또 설레는 마음으로 학교생활을 해내었던 학생들이 나만은 아닐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인터넷 소설은 우리 세대의 혁명이었고, 우리가 사랑했던 문화였다.
한가지 더.
90년대 생들은 음악을 MP3로 들었고, PMP라는 기계에 인강이나 동영상, 텍스트파일을 넣고 보았다.
그래서 우리에겐 그 기기들이 추억 속에 가장 아름다웠던 것들로 남아있다.
MP3가 없었다면 음악을 못 들었을테고, PMP가 없이는 자습시간에 인강을 들을 수가 없었으니깐.
물론 그마저도 고3 끝무렵, 애플사의 스마트폰이 아닌 국내 회사의 스마트폰이 처음으로 출시되면서 MP3는 더이상 아무도 사용하지 않게 되었다.
누구든 자신의 세대에서 문화를 즐겼던 수단과 도구가 있었을 것이고, 그건 세월이 얼마나 흘러도 잊을 수 없어 소중히 간직하는 추억이 된다.
나는 지금도 여전히 학창시절에 사용했던 MP3를 가지고 있다.
최고급 기기는 아니었지만,
내가 상상하고 싶은 것들을 마음껏 상상하게 해주었고,
모든 감정들을 느낄 수 있게 해주었던
고마운 MP3였기에.
나는 그걸로 음악을 들으며 힘든 순간을 지나왔고,
글을 읽으며 세상에 다양한 사람들과 세계가 존재한다는 것에 매우 들떴었다.
시대를 초월하여 언제나 우리를 살아있다고 느끼게 해주는 건
음악이나 문학, 미술, 영화 등의 '예술'이다.
끝내 예술가는 될 수 없지만,
인생 살아가는 내내
그 아름다운 것들을 최대한 보고 느끼며 가슴에 품는 것은
너무 행복한 일이다.
그것만으로도 살아갈 수 있다.
.
.
내 방 책꽂이 한 켠에 있는 이 인소를 발견하고선 이렇게까지 추억에 잠겨 버렸다.
서평 쓰는 재미에 푹 빠져버렸다.
큰일이다.
당분간 여기가 내 일기장이 될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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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젯밤 카레, 내일의 빵 - 2014 서점 대상 2위 수상작 오늘의 일본문학 13
기자라 이즈미 지음, 이수미 옮김 / 은행나무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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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영원히 떠난 이를 추모하고 추억하며 살아가는 남은자들의 이야기. 드라마로 볼때 세상에 이런 각본을 쓸 수 있는 작가는 도대체 누굴까하며 찾아보았더니 소설 원작이었구나. 부부의 필력이 정말 대단하다. 고통과 상실은 상상해서 쓸 수 있는 감정이 아니기에, 이 글의 진실성이 최고조에 다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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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톤에서 비트겐슈타인까지 - 서양철학사 인식론적 해명
조중걸 지음 / 지혜정원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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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모두가 이 책이 철학의 입문서로 최고라고 극찬했는지 알 것 같았고, 개인적으로는 고등학교 때 윤리와 사상 과목이나 철학 교양서적으로 기초를 접해본 사람들이 이 책으로 철학사의 흐름 속에서 인식론이 각각의 철학자들에 의해서 어떻게 주장되는지 다시 깊게 들어가면서 공부하기를 추천한다.
조중걸 교수님께서 어려운 철학이 독자들에게 어떻게 이해될 수 있는지를 정말 진지하게 고민하며 이 책을 쓰셨다는 게, 책을 읽는 내내 잘 전달되었다.
철학자들이 등장할 때마다 각자의 주장에서 사용하는 언어와 개념들을 친절하게 설명해주셔서 초심자부터 이미 철학 공부를 한 사람들까지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도록 짚어주는 포인트들이 참 많다.
무엇보다 철학사의 전개 속에서 중심이 되는 것들, 중점을 두고 이해해야만 하는 것들이 무엇인지 명확하게 다 짚어주셔서
마치 강의를 직접 들으면서 공부하는 느낌을 받았다.
독자들이 어떤 부분에서 헷갈리는지를 이미 다 알고 계셔서,
공부하는 입장에서 모호하게 생각될 의문이 생기는 부분마다 왜 그렇게 되는지에 대한 명석한 답변들이 제시되어,
읽으면 읽을수록 이해가 되는 과정이 참 재밌게 느껴졌다.
그 어떤 농담 없이도, 철학이 이렇게 재밌게 느껴진 책은 처음이다.
독자들이 철학을 이해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 조중걸 교수님의 진실한 열정이 이 철학책에 온전히 담겨있다.
어려운 내용을 이해할 수 있게 쉽게 쓰는 건 정말 어려운 작업이다.
안 그래도 어려운 철학을 어렵게 쓴 철학서적은 전공자들에게나 겨우 의미가 있지, 철학을 공부하려는 일반인들에게는 무용지물이다.
철학을 배우고, 생각하고 현실 속에서 각자만의 논리로 적용해나가는 일은 평등하게 그 누구에게나 기회가 있어야한다.
'물고기를 잡아주지 말고, 물고기를 잡는 방법을 가르쳐 주어라' 라는 격언이 있다. 물고기 한마리를 잡아주면 겨우 하루를 연명하지만, 물고기 잡는 방법을 가르쳐 주면 일생을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책은 물고기를 잡는 방법을 가르쳐주는 철학책이다.
생각하는 힘은 단순히 지식을 많이 쌓는 것에서 길러지는 것이 아니다. 혼자서 스스로 끝없이 사유하는 과정 속에서 수없이 길을 잃기도 하고, 다시 궤도에 올라서고, 자신만의 길을 찾으면서
사람은 지혜로워지고, 올바른 길로 나아가게 된다고 생각한다.
철학 공부를 하고 싶고, 생각하는 힘을 기르고 싶은 사람들에게 이 책을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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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스타샤
조지수 지음 / 지혜정원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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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람을 진정 알게 되는 건, 하나의 세계를 품는 것과도 같다.
그 사람을 사랑하게 된 이후의 삶은 더이상 내가 살던 예전의 세상이 아니게 되는 것이다.
그 곳은 파멸의 세계일 수도 있고, 모든 것으로부터 초연한 자유의 세계일 수도 있으며, 죽음이라는 끝의 세상일수도 있다.
신 또는 우주, 우리가 불가사의라고 부르는 것들이 어쩌면
우리의 탄생부터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일들을 이미 정해놓은 것이라고, 모든 것은 정해져있다고, 내가 바꿀 수 있는 건 없다고.
나는 이렇게 운명에 굴복하며, 지금껏 나의 모든 열정을 쏟아부었던 꿈과 희망에 체념해가고 있었고, 그러던 어느날 운명적으로 '나스타샤'를 알게 되었다.
언제라도 나스타샤라는 이름을 듣게 된다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장면은 그들의 첫만남일 것이다.
조지가 케빈의 가게에서 처음으로 나스타샤를 만나게 된 장면이 눈 앞에 영상처럼, 아름답게 그려진다.
결말을 다 읽은 지금도 첫만남과 조지가 나스타샤의 미소를 보고 사랑을 느끼게 된 장면, 그리고 나스타샤라는 이름을 지어준 장면이 이야기의 마지막 장과 함께 오버랩되며 먹먹해진 가슴을 한층 더 슬프게 만들고 있다. 김춘수의 '꽃'이라는 시가 나스타샤를 위해 존재했던 것인가? 조지와 나스타샤가 서로의 이름을 물어보며 알아들 수 없음에 같이 웃음을 터뜨렸던 처음의 그때가 그들의 사랑에서 가장 행복해보였어서 마지막장에서 다시 이 페이지로 돌아가는 일을 반복하고 있다.
나스타샤가 캐나다에 오지 않았더라면, 캐나다에 왔더라도 케빈의 가게가 아닌 다른 곳에서 일했더라면 조지와 만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조지와 나스타샤가 비극적인 사랑의 결말을 맞이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윗부분에 썼던 것처럼, 우리들은 신이 미리 결정해놓은 일들 사이에서 우리의 선택과 포기와 후회와 또 전진에의 삶을 반복하며 살아가는 것이 아닐까.
지금까지 나의 삶의 태도는 이러했다. 이미 다 결정된 것이고 내가 바꿀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고.
내 삶의 의미를 찾으려 몸부림쳤던 긴 세월의 방황 또한 운명이 정해놓은 것이라고 생각하며, 운명에 모든 책임을 전가하며, 삶 속에서 무기력하게 체념해가고 있었다.
그러나, 나스타샤를 읽어나가면서, 정해진 운명 앞에서도 내가 선택하는 것들이 바꾸어나갈 미래를 믿고 싶다는 의지와 용기가 내 안에서 조금씩 싹트고 있었다. 조지가 나스타샤의 삶을 일으켜 세운 것처럼, 또 나스타샤가 자신의 비극적인 상황 속에서도 미소를 잃지 않았던 것처럼.
어떠한 운명의 장난이 그 모든 걸 결정해놓았다고해도 결국 사랑에 빠지고, 사랑을 하게 된 건 조지와 나스타샤 그 둘의 의지이다. 그들의 선택이다. 조지는 케빈의 가게에서 전화벨 소리에 몸서리치며 두려워하던 나스타샤를 모른체할 수도 있었다. 누구나 쉽게 친절을 베풀지는 않는다. 그러나 조지는 스스럼없이 그녀에게 다가갔고, 그녀의 곤란한 상황을 함께하며, 도넛과 커피를 팔며 밤을 지새웠다. 그때까지만해도 그녀와 사랑하게 될줄은 몰랐겠지만.
조지는 좋은 남자이기 전에 좋은 사람이다. 다른 사람의 고통과 의식을 이렇게나 깊게 들여다보는 사람이라면, 정말로 좋은사람이다. 그래서 조지가 알코올 중독에 빠질수밖에 없었던 것이 이해된다. 그것밖에 할수 없었다고 조지는 말하지만, 사실 조지는 나스타샤에게 정말 많은 것을 주었다. 돈, 물질, 경제적 도움 이런것들은 마음이란 것 없이도 얼마든지 오갈 수 있는 것이다. 중요한 건, 아무것도 기댈 어깨가 없는 사람에게 기꺼이 어깨를 내어주는것, 살아갈 힘이 되어주는 것, 함께 살아갈 미래를 열어가는 일이다.
이것은 애정이 없으면, 그것을 품는 인간의 따스한 마음이 없으면 절대로 가능하지 않을 일이기에.
나스타샤에 대한 조지의 사랑이 단지 동정이나 연민, 측은지심이 아니라, 진정한 사랑이었다는 걸 비로소 깨닫게 된 장면이 바로 조지가 나스타샤에게 이별을 고하는 장면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나스타샤가 보리스를 돌보며 일할 수 있는 직장을 찾아주고, 아니카의 학업계획까지 세우고. 나스타샤가 가족을 돌보며 자립할 수 있게 보내주는 장면에서 나는 드디어 조지의 사랑의 절정을 보았다. 낯선 땅에서 외롭게 지내는, 자신과 같은 처지에 있었던 한 여인에 대한 애정이 진정한 사랑으로 느껴졌던 순간이 바로 이별의 장면이라니. 나조차도 놀랐다.
사랑의 끝이 무조건 결혼이어야 하는 것이 아니다. 아이를 계속 원하는 나스타샤에게 머뭇거렸던 조지를 이해한다. 물론 그것이 보리스와 아니카의 존재 때문임이 크겠지만.
조지는 어쩌면 나스타샤와 결혼해서 가정을 꾸릴 생각이 없었을 수도 있다. 있었다해도 조지가 책의 어느 부분에서 결혼 자체를 부정적으로 바라보던 부분에서 나스타샤와의 결말이 어느정도 예상되었다. 나스타샤도 그걸 알고선 "죽기는 쉬워. 고통 속에서 사는 것이 어려워. 당신과 헤어지면 나는 아마 죽을거야. 보고 싶어서 죽을거야."라는 말을 한 것이 아닐까.
사랑이 시작되는 순간이 있다면, 반드시 끝나는 순간도 있게 마련이다. 보리스와 아니카를 부양해야만 하는 나스타샤의 처지가, 조지와 나스타샤가 이별하게 되는 진정한 원인이었을까?
그들의 사랑에 보리스와 아니카가 정말로 넘을 수 없는 장벽이었나?
나는 그저 그때가 바로 그들의 사랑이 끝나게 되는 순간이었다고, 더는 함께일 수 없는 순간이 오게 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조지는 나스타샤와 아니카와 함께 살면서 보리스를 병원에 보낼 수도 있었다. 나스타샤와 함께 살면서 모든 걸 감내하는 결말도 가능했을 것이다. 나스타샤를 끝내 그들에게 보냈다고 해서 조지가 나스타샤를 사랑하는 마음이 없어진 건 아니기에.
그러나 사랑하는 마음과, 사랑이 끝나는 건 다른 문제이다.
사랑하더라도 더 이상 함께 할 수 없는 순간이 오고야만다.
비극은 이때 비로소 시작된다.
사랑의 끝을 받아들일 수 없는 상대방의 실연과 아픔의 크기를 다른 한쪽은 온전히 체감할 수 없을때, 이별의 고통은 사람을 죽일만한 요소가 된다.
나스타샤는 이별을 끝내 받아들일 수 없었을 것이다.
조지와 함께 하는 삶이 아닌 다른 그 어떤 삶도 그녀에게 용납되지 못할만큼 나스타샤는 조지를 사랑했고, 우직했으며, 다른 삶으로의 전진을 끝내 부정했던 것이다.
이야기의 마지막에 이르러 나스타샤를 깊게 이해하게 되었다. 조지와 함께하는 삶을 꿈꾸었으나 그것이 더이상 불가능한 영역이라고 느꼈던 그녀의 좌절과 절망감을 느끼며 눈물이 났다. 조지가 알코올 중독에 빠지며 자신을 술과, 어쩌면 죽음에 내던졌던 시간에 나스타샤는 그 이상으로 고통스러워 했던 것이다.
전적으로 상대방의 보살핌을 받고, 정신적으로 의존한 상태에서 이별하게 되었을 때, 자립이라는 상황을 이겨내지 못하게 되면 인간은 벼랑 끝에서 더 이상 인생에 그 어떤 희망과 열정도 가지지 않게 된다. 살고 싶다는 욕구가 유지되기 위해 필요한 계기들, 그것이 어떤 것이 되었든간에 자신이 진정 원했던 것을 영원히 잃게 되었을 때의 절망감을 모두가 이겨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인간은 그렇게 강하지 않다. 조지의 친절과 온정과 사랑은 너무나도 따스했고, 안락했지만, 그것만으로 사랑이 유지될 수 없다. 스스로 자립할 수 없는 사랑의 결말은 이토록 비극적이다. 저자는 의존적인 사랑의 면모를 너무나도 잘 그려내었다.
보리스와 아니카를 찾기위해 적극적으로 나섰던 조지의 선택은 '역사'를 만들었다. 보리스와 아니카가 살아갈 미래의 씨앗을 심은 건 조지였다. 나스타샤가 낯선 캐나다 땅에 내쳐졌고, 혼자서 해나갈수 없는 무기력한 상태에서 가족을 찾을 노력으로 나아가기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러나 보리스와 아니카는 살아있었고, 나스타샤 앞에 조지가 나타나지 않았더라면, 조지가 그녀에게 사랑에 빠지지 않았더라면, 그녀가 조지의 친절과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았더라면, 보리스와 아니카의 미래가 어떠했을까? 사랑이 기적을 만든다는 건 바로 이런게 아닐까?
역사와 운명의 비극 속에서 상처받고 외로웠던 그들은 각자의 상황에서 각자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사랑했고, 아파했고, 이별했다. '만약에'라는 가정이 무의미할만큼 더 이상의 좋은 결말을 바라지 않는다.
그저 있는 그대로, 그들이 걸어온 길 그대로를 보아주고 싶다.
나스타샤가 죽지않고 살아남아서 언젠가 길거리에서 우연히 조지와 스쳐지나간다해도, 그것만으로 그 아름답던 미소를 지을 수 있었다면, 다시 사랑으로 이어지지 않더라도 추억을 간직하며 용기내서 삶을 살아내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라는 바램도 있지만, 그러기엔 나스타샤의 고국에서의 비극과 상처는 쉽게 아물 수 없는 것이다. 사랑과 이별의 상처는 시간이 약이지만, 나스타샤가 우크라이나에서 당한 폭력은 세월이 얼마나 흐른다해도 지워지지 않을 것이기에. 그 사실만이 소설의 끝에서 가슴을 아프게 한다.
전쟁같은 정치적 상황 속에서 잔인하게 짓밟히는 쪽은 왜 항상 이렇게 정치와 무관한 사람들일까. 정작 정치권력의 핵심 당사자들은 어떻게든 삶을 보전한다. 그들이 직접 순수한 사람들을 괴롭히고 죽이라고 명령을 내리지는 않는다. 그럼 비극은 어떻게, 누구에 의해 일어나게 되는가? 정치적 결정에 복종하고 명령을 내리고 어떻게든 권력에 빌붙어 이득을 얻으려는 중간 실무자들에 의해서, 정치와 제일 무관했던 사람들이 희생양이 되는것이다. 소설 속의 역사적 배경이 현실과 다름 없기에 참 와닿았다.
우리들은 언젠가 죽어도, 소설 속의 인물은 계속해서 살아간다.
나스타샤가 없는 세상 속에서 생의 남은 날들을 살아가야 할 조지에게 위로와 말을 건네고 싶다.
"조지, 당신은 진정으로 강한 사람이야. 연약하고 부서지기 쉬운 사람이라는 존재로서 그 모든 헌신과 책임을 감내했으므로. 사랑에서 도망가지 않았으므로. 당신이 나스타샤를 놓았다고 자책할지 몰라도, 그건 놓은 게 아니야. 사랑하는 사람이 강해질 수 있도록 멀리서 바라봐야만 하는 사람의 고통이 얼마나 큰지, 안 겪어본 사람들은 모를거야. 당신은 그걸 해냈어. 당신은 그걸 자기포기라고 생각했겠지만, 그건 진정한 사랑을 품을 수 있는 사람만이 보여줄 수 있는 가장 큰 사랑이야. 당신은 보리스가 나았을때 세상 누구보다 기뻐했고, 아니카를 세상 누구보다 아꼈어. 사랑하는 사람의 사랑하는 사람까지 사랑해낼 수 있다는 건 정말 어려운 일이거든. 그러니 조지, 당신이 언제 어디서든 행복을 느끼며 살아갔으면 좋겠어. 스스로를 사랑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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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는 사람이 이해할 수 있도록, 느끼고 상상할 수 있도록 염두하고 쓴 글은 매우 역동적이라서 읽는 그자체로 영상미가 재현된다.
그런 글을 '좋은 글'이라고 생각한다.
나스타샤는 정말 좋은 소설이다.
시대와 국가를 초월하여 명작이라고 불리우는 영화 '첨밀밀'은 한사람이 생애주기에 따라 반복해서 감상하면, 느끼는 것들이 매번 달라진다고 한다.
인생 속 많은 경험과 가치관의 변화에 따라 영화를 감상하는 태도와, 보이는것, 느끼는 것들에도 변화가 생기기 때문이다.
이 소설도 그럴 것 같다.
또 어떤 경험을 하게 되고, 지금보다 더 나이가 들었을 때
이 소설을 읽고 느끼는 것들에 대한 변화가 기대된다.
많은 분들이 이 책을 읽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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