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Book] 채식주의자 (개정판)
한강 지음 / 창비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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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 욕망, 그리고 구원에 관한 이야기


현실과 타인의 시선에서 영혜는 정신분열증과 신경성 거식증을 앓고 있는 환자이다.

소설 속 인물들 대부분은 자신의 위치와 관점에서 영혜를 바꾸려고, 고치려고 한다.

역시나 그들이 생각하는 정답은 정신질환의 완치, 육식의 식생활, 사회와 가정 내의 역할에 충실함 등...

한 인간이 진실하게 추구하는 것 따윈 고려되지 않은, 오로지 타인의 관점에서 옳다고 여겨지는 '거짓과 위선'의 것들이다.

우리들은 과연 훌륭한 연극의 구성원이 되어 역할 놀이를 하기 위해 태어난 것인가?

아니라는 것을 다들 알면서 인간은 세상에 태어나는 순간부터 죽을 때까지 타인에 의해 정의되고, 타인을 정의한다.

아무것도 모르는 갓난아기조차도 점점 자라면서 결국은 인간과 세상을 '정의'내리는 존재가 되어버린다. 

소설 <채식주의자>가 말하는 폭력은 바로 여기서 시작된다.

한 사람이 진정 원하는 것, 그가 욕망하는 것, 그 사람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이 타인과 세상에 의해 철저히 '부정'되는 것.

이것이 바로 이 소설에서 그려지는 폭력의 본모습이다.

폭력이라는 것은 그것의 겉모습이 눈에 뚜렷하게 잘 보여야 굉장히 거창한 것이 되고, 대다수의 사람들이 인식하게 된다는 허점을 이 소설에서는 반대로, 역설적으로 드러낸다.


영혜의 아버지는 월남전에 참전하여 무공훈장을 받은 군인이었다.

아버지의 가정에서의 폭력적 행위들은 이 소설 속에서 겨우 몇 문장 내로 설명된다.

자녀들 중 말 수가 적고, 온순하고, 고지식했던 영혜가 가장 많이 맞고 자랐고, 그녀는 온 몸으로 그 폭력의 기억들을 전부 흡수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라고 영혜의 언니가 마지막 장 <나무불꽃>에서 말한다.

아버지가 영혜에게 가한 폭력은 그렇게 자세히 그려지지도, 드러나지도 않는다.

때린 것 외에 언어적 폭력, 아버지 자신의 가치관의 강요, 영혜의 정신적 가치들에 대한 무관심 등등 겉으로 보이지 않는 폭력은 단순히 언어로 묘사되지 않는다.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님을 역설적으로 일깨워준다.

영혜의 정신착란과도 같은 이상 행위들에서 폭력의 잔재를 짐작해봄으로써 폭력의 형체는 점점 큰 발걸음으로 우리 앞에 다가오게 되는 것이다. 

형태도 없고, 소리도 없는. 조용하고 은밀하게 인간 내부로 모조리 흡수되어버리는 폭력의 얼굴.

그것이 우리 사회에, 개인에 만연한 저마다의 폭력의 모습을 암시한다.


그러나 영혜의 채식 행위와 정신분열증의 직접적인 원인이 바로 아버지의 폭력때문이었을까?

표면적으로 그렇게 보이나, 그것만이 전부는 아니다.

폭력은 피할 수 없이 육체와 정신으로 스며든다는 점에서 인간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 것이지만, 그 사이에는 인간 정신의 근원에 자리잡힌 '욕망'과 '구원'의 영역이 있다.

인간으로 태어나 온 정신과 육체에 걸쳐 강렬하게 원하는 것.

무슨 일을 겪는다해도 나를 지켜내고 살아가게 만드는 인간 정신 내부의 어떤 강한 힘.

어떤 소설이든, 영화든 이야기의 중심에는 반드시 인간들의 욕망이 있고, 각자 그것을 대하는 태도에서 다른 삶의 방식이 정해지고, 다양한 인간 군상이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욕망에 의해 스러지고, 무너진 인생 앞에서 구원의 방식을 달리하며 인간은 생의 끝까지 나아가게 된다.


영혜에게도 왜 그것들이 없었으랴.

폭력이 인간을 무너뜨리고, 사람의 의지 또한 꺾어버리지만, 그렇게 속수무책으로 인간은 당하고만 있지 않는다.

폭력에 대해 강렬히 저항하는 사람, 자신이 겪은 폭력을 또 다른 이에게 가하면서 고통을 치유하는 사람, 살기 위해 자신이 겪은 폭력을 철저히 외면하고 무시하는 사람, 그리고 영혜처럼 폭력을 정신과 육체로 모두 흡수하여 그 고통에 결국 잠식당하는 사람 등등.

폭력을 경험하고 그것을 어떻게 대하는지에 따라 인간의 삶의 방식은 전혀 다르게 전개된다.


이 소설에서 아버지는 영혜를 결국 미쳐버리게 만든 장본인이며, '악'으로 상징되는 인간이라고 평가받을 수 있겠지만, 폭력을 행하는 '인간' 자체는 그저 겉껍데기에 불과하다.

폭력은 형체를 가지지 않고, 한 인간의 내부에서 외부로, 다시 다른 인간 내부로 끊임없이 전달되고, 깊숙히 파고든다. 

끝없이 생명이 탄생하고 죽고, 다시 탄생하는 우주의 섭리 속에서 폭력은 유전처럼 전해지고 가해진다. 생명이 창조되고 탄생하는 순간의 경이로움은 잠시, 생명은 폭력 속에서 무참히 짓밟히고 다시 일어서며 죽음을 향해 나아간다. 이것을 외면하고 부정해야만 오늘을, 내일을 살아갈 수 있기 때문에 대다수의 사람들은 폭력과 고통에 무감각해져야만 하는 것이다. 그것의 실체를 마주하고 파고들어가는 순간, 영혜처럼 인간 근원의 죄의식에 잠식되어버리니깐.


영혜가 갑자기 채식 행위를 시작하게 된 원인은 무엇이었나? 

'꿈을 꿨어'라고 말하는 영혜의 대사들과 중간 중간 등장하는 꿈 속 해괴하고 잔인한 내용들.

처음에는 형체를 알 수 없는 것들과 핏덩이 고기들이 등장하지만, 영혜가 가족들 앞에서 손목을 긋고, 피가 솟구치는 장면과 함께 그 모든 정신착란의 원인을 알 수 있는 영혜의 어린시절 기억이 등장하게 된다. 아마 소설에서 가장 잔인하다고 할 수 있는 이 장면의 묘사가 인간이 자행하고 있는 폭력의 실체를 고스란히 보여준다.


아홉살의 영혜는 키우던 흰둥이 개에게 다리를 물린다. 아버지는 흰둥이를 나무에 매달아 불에 그슬리나, 두들겨패지는 않는다. 대신 오토바이에 매달아 동네를 몇바퀴 째 계속해서 달린다. 흰둥이의 목에서 피가 솟구치고 눈에는 핏물이 고이고. 그렇게 개는 잔인하게 죽는다. 죽어가는 모습을 어린아이였던 영혜는 두 눈을 부릅뜨고 지켜본다. 아버지의 학대가 다 끝나자, 흰둥이는 분해되어 음식으로 등장한다. 이웃들과 아버지는 그걸 먹는다. 개에 물린 상처는 개를 먹어야 낫는다면서 영혜도 먹게한다. 들깨냄새로도 가릴 수 없는 누린내를 맡으면서 영혜는 한그릇을 다 비워낸다.


이 장면이 영혜가 자해를 시도한 장면과 함께 등장하면서, 영혜의 채식 행위의 원인은 결국 어린시절 흰둥이에게 가한 영혜 자신의 폭력이라는 것을 독자들은 알 수 있게 된다. 키우던 개를 잔인한 방법으로 죽이고 먹게 만든 건 아버지이지만, 그 모든 과정을 영혜는 지켜보기만 했다. 아홉살짜리 어린아이가 과연 아버지의 행동을 말릴 수 있겠냐마는, 영혜를 미치게 만든 기이한 꿈들의 근원에는 결국 영혜 자신이 행한 폭력에 대한 '죄의식'이 담겨있었던 것이다.


자신도 한 생명을 죽인 방관자임을 깨달으면서 영혜는 채식을 하게 된다. 고기를 먹지 않으면 그 공포스러운 꿈들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영혜의 죄의식은 단순히 폭력에 대한 반성으로 끝나지 않는다. 영혜는 분명 자신이 행한 폭력과 자신에게 가해진 폭력 속에서도 삶 쪽으로 발걸음을 향했다. 채식을 하면서 영혜는 그렇게 살면 되었다.

한 인간의 죄의식과 반성, 그것에 대한 개선의 의지는 분명 살아서 꿈틀거렸다. 영혜는 그때까지만해도 정신분열증의 증상을 보이진 않았기 때문이다. 그녀가 어렵게 찾아낸 삶의 방식을, 생의 의지를 부숴버린 건 가족들의 새로운 폭력이었다. 그녀의 뜻을 존중하지 않는 아버지, 어머니, 남편, 언니, 남동생 모두들.

그녀의 뺨을 때리고, 강제로 입을 벌려 고기를 먹이는 잔인한 폭력 속에서 아마 영혜는 느꼈을 것이다. 자신이 어린시절, 바로 그 '흰둥이'같은 존재라는 걸. 자신도 목이 매달려 그렇게 피가 솟구치면서 결국 죽게 될 것이라는 것을 영혜는 그때 어렴풋이 느끼지 않았을까?


자신의 죄에 대한 반성과 개선의 의지를 가진 참된 인간이었던 영혜는 그렇게 가족과 세상으로부터 철저히 부정되고, 버려진다.

영혜가 원하는 삶의 방식, 영혜의 욕망, 영혜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은 가족들에게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그렇게 영혜는 정신병원으로 가게 되고, 아직 그 실체도 없었던 정신분열증의 병까지 그녀에게 씌워진다. 세상이 바라보는 방식대로 그녀는 정의되는 것이다. 가장 끔찍한 폭력이 바로 이것이다.


영혜는 자신의 죄의식과 고통스럽게 정면으로 마주했고, 그 속에서 삶의 방법을 찾아내었다.

채식을 하는 것은 죽어가는 행위가 아니라, 살고자 하는 영혜의 강렬한 의지였다.

그러나 가족들은 한결같이 그녀가 죽어가고 있다고 생각했다.

나는 책을 읽어나가면서 그것이 너무나도 답답했다.

왜 아무도 영혜가 살고자 하는 의지를 읽어내지 못하는거야?

그 연둣빛의 꿈틀거리는 눈부신 의지와 욕망을 어째서 아무도 보지 못하는 거야?


아무리 고통스러운 폭력이라 할지라도 그것을 삶에서 밀어낼만큼 강력한 것이 바로 '욕망'이다.

이것은 한 인간을 살게 만드는 근원이다.

'욕망'

언젠가부터 욕망이라는 단어는 밖으로 꺼내자마자 비인간성을 상징하는 무시무시한 괴물같은 존재가 되어버린 것 같다.

욕망이란 인간이 강렬하게 원하고 바라는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인간이라면 누구나 다 가지고 있는 본질적인 것이다.

욕망이란 한 사람을 추악하게 만들 수도 있지만, 태양보다도 더 반짝이게 할 수도 있는 것임을.

그것의 긍정적 속성까지도 외면하는 것이 욕망을 대하는 우리 사회의 모습이다.

왜 현대사회는 한 개인의 욕망을 세상 밖으로 표출하는 것이 타인에게 비호감을 받는 것으로 여겨지게 된걸까?

겉으로 꺼내져서는 안되며 인간의 깊숙한 곳에서만 간직되어야만 하는 것이 마치 도덕법칙인 것 마냥, 욕망은 그렇게 아주 더럽고 은밀한 것으로 정의되어버렸다.

변질된 욕망의 뜻에서 순수한 욕망을 구분해내는 작업을 먼저 하지 않으면 이 소설의 진정한 아름다움과 가치가 왜곡될 것 같아서 앞으로 '순수한 욕망'이라고 언급할 것이다.


이 소설 속에서 가장 순수하고 진실한 욕망을 추구하고 실현시키려 했던 두 사람이 바로 '영혜'와 그녀의 '형부'였다.

온 몸에 꽃과 줄기와 잎사귀들을 그리고 그것이 결합하는 행위였던, 그들의 정사 장면이 나는 너무나도 아름다웠다. 이렇게 생각하는 내가 정상인 걸까? 라고 스스로에게 수없이 질문했어야 할 만큼. 이것을 글로 써내고 눈 앞에 그려볼 수 있게 해준 작가에게 무한히 감사하면서.


형부, 그는 영혜의 생에 대한 의지와 욕망을 밖으로 끄집어내게 만든 사람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는 이렇게 느꼈다.

"그것은 구석구석 일체의 군더더기가 제거된 육체였다. 그는 그런 육체를, 육체만으로 그토록 많은 말을 하는 육체를 처음 보았다."

영혜의 남편도, 아버지도, 언니도 영혜를 '말수가 적은'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가족이지만 이토록 영혜에 대해서 잘 알고 있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다는 게 원통하게 느껴진다.

겉으로 표현하지 않는다고 해서 한 사람의 언어가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님을 그들은 왜 모르는 것일까?

영혜는 입 밖으로 말을 꺼내는 대신 자신의 언어를 온 몸 속으로 흡수하고 품어온 것이다.

형부는 그녀의 육체에서 그녀가 진정 하고 싶은 말을 읽어냈다는 점에서 표면적으로는 변태 성욕자로 보일 수 있겠으나, 영혜의 삶에 대한 욕망을 유일하게 알아본 중요한 인물이다.


그는 비디오 영상 작가이다. "광고, 드라마, 뉴스, 정치인의 얼굴들, 무너지는 다리와 백화점, 노숙자와 난치병에 걸린 아이들의 눈물들을 인상적으로 편집해 음악과 그래픽 자막을 넣는 것"이 그가 해온 작업들이다. 그는 그것에서 환멸을 느끼며 구역질이 난다고 했다. 거짓과 위선의 작업들을 하느라 밤새도록 시달렸던 순간들이 '폭력'으로 느껴졌다고 하는 대목에서 그가 지향한 건 상업 쪽이 아니라 예술임을 알 수 있다.

예술가로서의 작업을 할 수 있길 기대하면서도 그는 그렇게 오랫동안 쭉 상업 작가로서의 일을 해온 것이다. 그랬던 그가 자신이 원치 않는 작업을 해야만 했던 순간을 '폭력'이라고 직시하게 된 계기가 바로 영혜의 자해 시도였다. 영혜가 손목을 긋고 피가 솟구칠 때, 가장 먼저 지혈하고 들쳐 업고 병원으로 달려간 건 바로 형부였다.

줄곧 방관자였던 그가 그렇게 필사적이 되었던 순간은 분명 그가 자신을 제대로 마주해볼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그는 그때의 기억을 떠올리며 십년이 넘도록 자신이 해온 모든 작업이 자신의 것이 아니었다고 생각하게 된다. 그리고 2년의 공백기를 가지면서 그를 처음으로 진정한 예술가로서의 작업을 할 수 있게 해준 '어떤 이미지'를 떠올리게 된다. 


벌거벗은 몸에 꽃과 줄기와 잎사귀들이 그려져있고 그 나신들이 교합하는 장면. 그의 머릿 속을 강렬하게 사로잡은 이미지이며, 영상 작업으로 만드는 것에 어떤 운명적인 갈증을 그는 계속 느껴온 것이다. 그러나 구체적으로 실현시키기에는 부족했던 찰나에 아내의 말이 그를 비극으로 치닫는 예술을 하도록 만들었다.

'몽고반점'. 아내가 그에게 영혜의 엉덩이에 아직 남아있다는 몽고반점에 대해 이야기했을 때, 자신이 그토록 갈망해 온 이미지가 비로소 완성되었다. 

'엉덩이 가운데에서 푸른 꽃이 열리는 장면'을 떠올리는 건, 그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예술가로서의 '비상'을 꿈꾸게 만들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에게 있어 영혜는 처제이기에, 그는 죄의식에 사로잡힌다. 스스로를 경멸하기도 하고, 자신을 낯선 존재로 인식하기도 하는 등, 그는 자신에게 도덕적 질문들을 던진다.

그러나 결국 그는 그 작업을 해야만 한다는 욕망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리고 그것을 행한다.

여기서 중요한 건, 벌거벗은 몸에 꽃을 그리고 영상으로 촬영한다는 것을 그가 영혜에게 제안한 것이 영혜에게는 중요한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보통 사람들이라면 미쳤다고 욕하며 제안을 거절했을테지만, 영혜는 수락한 것에 이어 적극적으로 임한다.

오히려 자신의 나체에 꽃과 식물의 것들을 그리는 것에서 영혜는 생에 번뜩이는 감정들을 느낀다. 자신의 육체에서 자연의 일부를 꽃 피워낸다는 것이 영혜에게 있어, 그녀가 줄곧 벗어날 수 없었던 죄의식을 벗어던질 수 있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라고 추측해본다. 그녀가 연둣빛으로 생생하게 살아 움직이고 삶을 느끼는 장면에서 나는 그녀가 살아낼 수 있을 것이라 희망을 가졌었다.


형부가 처제의 알몸에 그림을 그린다는 건 현실에서는 말도 안되는 이야기이지만, 이것은 두 사람이 각자 자신의 욕망을 표출하는 것과 그것이 일치했다는 점에서 충분히 설득력이 있다. 

형부는 자신이 그토록 갈망해온 예술 작업을 실현했다는 점에서, 영혜는 채식 행위로도 씻어낼 수 없었던 죄의식의 근원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는 점에서 그들의 욕망은 일치했고, 그 결과가 바로 '몽고반점 1- 밤의 꽃과 낮의 꽃' 이라는 제목의 비디오 테이프였다.


그는 이 영상으로 예술가로서의 작업을 한 것에 만족해야만 했다. 하지만 여기에서 멈출 수 없다는 또 다른 욕망에 사로잡혀 결국 그는 넘어서는 안되는 선을 넘게 된다.

그의 후배인 J와 영혜의 교합 장면 촬영이 실패로 돌아가고, 그는 작업의 끝까지 지켜왔던 이성의 끈을 놓아버린다.

그를 완강하게 거부하는 영혜에게,

"내 몸에 꽃을 그리면, 그땐 받아주겠어?" 라고 말하는 그의 말이 왜 그렇게 비참하고 처절하게 들렸을까.


이 전까지 그는 영혜의 벌거벗은 엉덩이의 몽고반점을 보면서도 성적인 느낌과는 전혀 무관하게 그것이 태고의 것이며 진화 전의 것, 광합성의 흔적을 연상시킨다고 했다. 그는 그것에서 무한한 예술적인 영감을 느끼는 것에 압도되는 '예술가'의 면모를 보여주었다. 영혜의 육체를 성적인 것이 아닌, 마치 조물주가 창조한 경이로운 것인 마냥 바라보았다. 그래서 작업이 끝날 때까지도 그는 숨죽이며 오로지 자신의 예술 작업에만 몰두해 있었다.


그가 만든 작품은 철저히 그의 외부에 존재해야만 했다. 그는 절대로 그 작품 안에 들어가면 안되었다. 그러나 그는 결국 들어가고야 만다. 그리고 그 작업물의 주인공이 되어버린다. 돌이킬 수 없는 걸음 바로 전에 그는 일종의 고해성사같은 눈물을 흘린다. 

"죽었으면 좋겠어"라고 수없이 되뇌이며 눈물을 흘리면서도 그는 자신의 온 몸에 꽃을 그리고는, '석유를 부은 불처럼 타오르는 욕망' 을 품고서 영혜를 찾아간다. 그리고 그들의 적나라한 교합의 장면이 흘러나온다.

교합이라는 단어를 쓴 것은 그것이 남녀간의 애정이 담긴 행위가 아니라 말 그대로 꽃과 줄기와 잎들이 서로 맞물리는 행위만이 눈앞에 그려졌기 때문이다. 그것은 인간의 것이 아니다. 식물의 것도 아닌, 아주 기괴한.

(일본의 테라야마 슈지라는 영화감독이자 연극 연출가인 예술가가 있었다. 그의 실험극 영화가 바로 이러한 종류의 것이었다. 내용은 다르지만 비슷한 결을 가지고 있는 영상 작업이다. 유투브에 영상이 있었지만 매우 기괴하고 선정적이라서 언젠가부터 볼 수 없는 것으로 되었다. 하지만 예술가로서의 그의 작품은 충분히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한 관점에서 형부의 영상 작업을 이해하는 것이 이 소설을 이해하는 데에 도움이 될 것 같다.)


이 장면이 소설에서 가장 논란이 된 장면이었다.

표면적으로만 본다면 당연히 그럴만하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점은, 그의 욕망과 영혜의 욕망에 대한 본질적인 것을 되짚어보는 것이다.

영혜는 이 모든 것이 끝난 이후에, "이제 무섭지 않아요. 무서워하지 않을 거에요." 라고 말했다. 그리고 그 전에 촬영 작업이 끝난 이후에도 그에게 계속 몸에 그림을 그려달라고 말한 것으로 보아, 자신의 죄의식의 근원을 직시하고 새롭게 살아갈 삶의 방식을 찾은 듯 해보였다 분명히.


그러나 내가 헷갈리는 건 형부인 그의 욕망에 대한 것이다. 알몸에 그림을 그리고 영상 촬영을 한 것이야 예술 작업을 하겠다는 욕망이 반영된 것이지만, 그 또한 몸에 꽃을 그리면서까지 그녀를 탐하는 욕망은 과연 단순한 성욕일까 아니면 영혜에 대한 사랑일까.

나는 아직까지도 그것에 대한 해답을 찾진 못했다.

한가지 추측해볼 수 있는 건, 소설에서 묘사한 영혜와 형부의 성향에 대한 것들이다.

영혜도 말 수가 적고 온순하고 고지식한 사람이었고, 형부 또한 그런 성질의 사람이었다. 

둘 다 타인에게, 세상에게 비위를 맞추어 살아갈만큼의 면모는 없는.

사회로부터 부유하는 듯 살아가지만, 이 소설에서 유일하게 둘은 자신에게 가해진 폭력을 직시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폭력의 근원을 마주하고, 그것에서부터 벗어나려는 욕망을 품고, 스스로를 구원하려는 인물들이라는 점에서 어쩌면 형부는 영혜에게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한 걸지도 모른다.

결국 그는 영혜에게서 발견한 자신의 모습에게 연민을 느끼게 되고, 자신을 진정 사랑하고자 했던 것 아닐까? 영혜를 사랑한 것이 아니라. 일종의 나르시시즘일까?


예술가로서의 작업을 하고 싶었으나 정작 현실에선 거짓과 위선으로 점철된 작업물만 만들어내는 자신에 대한 연민과 사랑. 그것이 영혜와의 관계에 투영된 그의 욕망이라고 추측해본다.


그러나, 적어도 한 순간만큼은 내 가슴이 절절할 정도로 설레었었다.

그가 자신의 온 몸에 꽃과 식물을 그리고 그녀에게 달려가는 장면.

그녀를 탐하는 것이 그녀에 대한 사랑이 아님을 알면서도 나는 한 순간 어떠한 형태의 사랑을 느꼈었다. 그의 발걸음 하나, 하나에 담긴 비장함과 숨결이 진실하게 와 닿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그와 그녀의 처음이자 마지막인 '비상'이다.

이 다음날 아침 영혜의 언니인 인혜에게 둘의 현장이 발각되고, 인혜는 구급차를 불러 영혜를 결국 정신병원으로 보낸다. 그리고 형부는 잠적한다.

영혜와 형부의 순수한 욕망이 그들에게 잠재한 폭력을 극복하기 위한 것이었더라도, 현실 속 처방은 윤리적 잣대에 충실한 것이기에 그들의 행동은 더 이상 용납되어서는 안되는 것으로, 영원히 사라지게 된다. 영혜가 원했듯이, 또 예술작업의 일환으로써, 그녀의 몸에 형부가 꽃과 식물을 그리고 촬영하고. 그렇게 하면서 살아가는 것은 현실에서는 말도 안되는 정신이상자의 행동인 것이다. 나조차도 그것을 온전히 받아들이기까지 고통스러운 공감과 이해가 필요했으니깐.


더 이상 작업을 할 수 없게 된 것은 형부에게 있어서는 예술가로서의 종말이고, 영혜에게는 정신분열증의 시작이 되어버렸다.


'구원'

영화 올드보이의 대사 중에 이런 것이 있다.

"노루가 사냥꾼의 손에서 벗어나는 것과 같이,

새가 그물 치는 자의 손에서 벗어나는 것과 같이,

스스로 구원하라"

성경에 나오는 구절이라고도 한다. 자신을 구할 수 있는 건 역시 자신이라는 것.

나에게 가해진 폭력을 거두어 내고, 그로부터 벗어나는 것은 '스스로'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과연 그럴까? 이 소설은 한 개인에게 가해진 폭력이 어떠한 것인지보다, 그것을 온 몸으로 흡수하며 고통스러워하는 한 인간의 상처와 내면에 중점을 두고 있다. 그만큼 몸 안에 깊숙하게 들어와 있는 폭력에서 벗어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말하는 것이다. 

폭력과 그것의 죄의식에 잠식된 인간이 그 모든 것들을 벗어던지기 위해서 필요한 용기나 강함 같은 성질의 것들은 오히려 영혜에게 있어 또 다른 폭력이 된다.

정말 영혜를 구하려고 했다면, 필요했던 유일한 건 가족들이 영혜의 삶의 방식을 존중해주는 것이었다.

정신과 치료를 받으면서도 영혜는 백화점 일자리를 구하려고 했고, 자취방에 혼자 살면서도 자해를 하지 않았었다. 그녀는 분명 자신이 삶에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를 찾아내는 중이었다.


그러나 형부와의 관계로 인해 결국 영혜는 정신병원에 입원하게 되고, 거기에서 다시 해답을 찾아낸다. '물구나무 서서 땅을 받치고 있는 나무가 되는 것'.

영혜가 여기까지 이르지 않도록 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언니 인혜는 말한다.

그러나 그것은 인혜의 생각 속에만 존재할 뿐, 인혜조차도 영혜를 구원하지 못한다.

바로 여기에서 스스로 구원한다는 진정한 의미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영혜가 자신의 죄의식에 마주하고, 그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채식을 선택한 것도 스스로를 구원하는 행위였다.

영혜가 형부의 예술 작업 제안을 받아들이고, 온 몸에 물감칠을 하게 된 것도 스스로를 구원하는 행위였다. 

그리고, 정신병원에 갇혀 물구나무 서서 땅을 두 팔로 받치고 있는 나무들을 보면서 자신도 나무가 되기 위해 영양분 섭취를 아예 끊어버리며 죽음을 향해 다가가는 것도 스스로를 구원하는 행위였던 것이다. 이것은 독자들에게 온전히 이해되기 힘들수도 있을 것이다. 죽음을 택하는 것이 구원이라니. 


영혜는 자신의 내장이 퇴화해가는 과정을 기뻐한다. 자신의 육체에서 인간의 성분들을 모조리 비워내고 게워내는 과정을 기꺼이 선택한다. 이것이 구원이라고? 이렇게 생각하는 나조차도 비정상일지도 모르겠지만, 영혜는 그렇게 기꺼이 죽음을 기대하고 맞이한다.


몽고반점 이야기에서 영혜는 식물이었다. 자신의 푸른 생명력을 그때까지만해도 간직하고 있었다. 그러나 식물은 허공에서 자라지 못한다. 결국은 땅 속에 뿌리내려야 살아갈 수 있다. 그녀는 나무불꽃 이야기에서 그 진실을 깨닫게 되고, 기어이 땅 속에 뿌리내린다. 그러나 인간은 식물이 아니기에, 푸른 빛의 생명은 나무가 되지 못하고, 영혜는 앙상한 나뭇가지처럼 마른 육체 안에 얼마 남지 않은 피마저도 토해내며 생의 끝자락을 향해 나아간다. 


인간의 순수하고 진실한 욕망이 인정받지 못할 때, 삶의 방식이 존중받지 못할 때, 인간은 이렇게 절벽에 서게 된다. 추락하는 것 말고는 달리 살 길이 없는 상태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사람을 벼랑 끝으로 내모는 세상의 모든 폭력들을 경계하라고, 마지막 장인 <나무불꽃>은 공포에 질릴 정도로 무섭게 말하고 있는 것 같다.

나무의 잎사귀들을 '초록빛의 불꽃'이라고 묘사하는 장면에서 나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섬뜩함을 느꼈다. 그것을 영혜의 언니가 무언가에 항의하듯 어둡고 끈질긴 눈으로 바라보는 모습이 이 책의 마지막 문장이다. 언니의 눈빛에서 말하고 있는 무수한 언어들을 독자들이 이어보길 바란다. 그것에서 많은 질문도 던져보고, 답도 찾아보길 바란다.


이 책을 읽는 사람들은, 굉장히 무거운 감정 속에서 한동안 힘겨울 수도 있을 것이다.

인간 내부의 깊숙한 곳까지 들여다본다는 것은 그 어떠한 공포 영화보다도 무서운 일이다.

그러나 무엇이 되었건, 살아내었으면 한다.

영혜는 그저 무기력하게 죽어가던 것이 절대로 아니다.

생에 대한 눈부신 의지가 봄날의 아지랑이처럼 아른거렸고, 생생히 살아있었다.

그것을 분명 꽃 피워내려고 했었다.

내가 이 소설에서 포착한 생명력을, 여러분도 느꼈으면 좋겠다.

그리고 그것이 당신을 살게 하는 힘이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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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야제 2024-10-22 00: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서재 주소(도메인) 변경을 하고 나서 그동안 제가 쓴 리뷰들이 삭제되었다고 접속이 전혀 안 되길래 제일 최근에 썼던 채식주의자 리뷰를 다시 삭제하고, 새로 작성해서 올려보았더니 그래도 서재 접속이 안되네요ㅠㅠ 제 채식주의자 리뷰에 좋아요 눌러주셨던 분들께 감사드리고, 글 삭제해서 넘 죄송합니다ㅠㅠ 서재랑 글이 복구가 되어야 될텐테 걱정입니다ㅠ

appletreeje 2024-10-22 01:1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이고, 어떡해요? 전야제 님 주옥같은 리뷰들이 삭제되어서요. ㅠㅠ
부디 서재랑 글들이 복구되기를 빕니다!

전야제 2024-10-22 01:26   좋아요 1 | URL
안녕하세요! 이 늦은 밤에 댓글 감사합니다ㅎㅎ 주옥같은 리뷰라니 칭찬 넘넘 감사합니다!! 제가 로그인해서 서재 들어가는 건 되는데, 제가 리뷰를 썼던 책에 있는 제 글을 클릭하면 삭제된 서재라고 전부 다 그렇게 뜨네요ㅠㅠ 심지어 핸드폰 어플로는 저도 접속이 안되구요ㅠ 일단 알라딘 고객센터팀에 문의글은 접수해놓았으니 어떻게든 해결될 수 있길 바래봅니다ㅠㅠ 걱정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안녕히주무세요^^

appletreeje 2024-10-22 01:37   좋아요 1 | URL
서재 복구 되었나 봅니다! 다시 글들이 다 보이고 이달의 당선작 리뷰도 보이네요~~
마음 고생 많으셨습니다. 편안한 밤 되시고 안녕히 주무세요!^^

전야제 2024-10-22 01:46   좋아요 1 | URL
우와 아까 저녁 9시 넘어서부터 계속 안됐는데 정말 이제 접속이 되기 시작해요ㅠㅠ 아직 책에서 리뷰 접속하는 건 안되긴 하는데 그것도 왠지 될 것 같아요. 감사합니다ㅎㅎ appletreeje님 덕분입니다 진짜^^ 행복한 한 주 되세요!!
 
반추
박이도 지음 / 문학수첩 / 2003년 3월
평점 :
절판


박이도, <가을이 오는 소리>


가을은 오는가

무력했던 여름

비극의 환상이 언뜻언뜻

무더위로 사라진다


이제 무엇을 더 기다리겠는가


어둠의 꺼풀을 벗고

먼동이 꿈틀대는 모습

무엇인가 살아 움직이는 것들의

순리를 보러가자


흥건히 이슬에 젖은 발부리로

이 육신을 세우고

대지를 향해 나선다

마을을 나서는 기침소리

가까이 흐르는 냇물소리


살아있는 모두의 안부를 묻는다.


차가운 소리

가을이 온다, 내 정신으로

살아온다


*******************************************************************************************

가을이 이렇게나 장엄하고 웅장한 것이었던가.

박이도 시인의 '가을이 오는 소리'는 가을을 서정적으로 표현한 다른 시들과는 다른 느낌이다.

'가을'을 떠올리면 보통 외로움, 쓸쓸함, 그리움 등의 하강하는 정서를 떠올리게 되는데, 이 시에는 그러한 감정은 단연코 들어있지 않다.

가을이 오는가 보다, 라는 수동적인 자세가 아니라.

기어이 가을 속으로 성큼성큼 들어가겠다는 화자의 결연한 의지가 느껴진다.

가을과 '결연함'은 도대체 어떠한 관계가 있을까?

그건 바로 전의 계절인 여름을 어떻게 살아내었는가와 관계가 있을것이라 추측해본다.

'무력했던 여름'과 '비극의 환상이 무더위로 사라진다'는 표현으로 보아,

표면적으로는 무더위에 무너졌을 수 있겠지만, 사실은 여름 동안 어떤 비극적 일들을 겪어 온 화자의 시간이 느껴진다. 그 비극을 무더위에 실어 다음의 계절로 날려보내야 할 만큼.

그 여름이 가을을 대하는 화자의 강한 의지를 불러일으킨 원인이라고 생각하는 건, 나 또한 처절하게 무력했던 여름의 시간을 보냈기 때문이다.

수면 아래에서 수면 위로 손을 계속하여 뻗는 이의 간절함과, 아무것도 잡을 수 없었던 공허한 빈 손. 그것을 지속해야만 하는 숨막힘.

간혹, 연과 연 사이에 가슴에 훅 치고 들어오는 강렬한 문장이 존재하는 시가 있다. 이 시에서도 그렇다.

'이제 무엇을 더 기다리겠는가' 

나는 사실 이 한 문장에 꽂혀서 박이도 시인의 시집을 사게 된 것이다.

이 한 문장이 화자가 가을을 대하는 태도를 온전히 담아내고 있다.

'이제 무엇을 더 기다리겠는가'는 더 이상 기다리지 않겠다는 화자의 뜻이다.

그럼, 포기하겠다는 것인가?

아니다. 그것의 정반대이다.

기다리지 않고 내가 움직이겠다는 것이다. 내 의지로 나아가겠다는 것이다.

먼동이 꿈틀대는 것과 살아 움직이는 생명들의 웅장함을 포착하기 위해, 그 순리를 보기 위해.

얼마나 마음이 꿈틀대었으면 '이슬에 젖은 발부리로', 새벽부터 길을 나선 것일까.

생명의 일렁임을 강하게 품은 화자의 눈부신 설레임도 느껴진다.

그리고는 또 연과 연 사이에 있는 강렬한 한 문장, 이번에는 위에서와는 사뭇 다른 느낌이다.

'살아 있는 모두의 안부를 묻는다.' 

자신에게서 '모두'에게로 시선이 확장되었음을 알 수 있다.

나는 이것을 화자의 생명에 대한 '포용'이라고 부르고 싶다.

비극의 환상 속에서 무력했던 여름 내내 존재하지 않듯이 살아왔을 화자는, 이제 그 몹쓸 환상 따윈 날려보내고선 마치 만물의 생명을 꽃 피우겠다는 결연한 의지로 대지를 향해 나선다.

마지막 연에서 화자의 의지가 단순히 일시적이고 감정적인 강함이 아닌, '냉철한 이성' 속에서 나오는 의지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무기력했던 무거운 몸을 일으켜 당당히 가을 속으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가는 화자의 장엄한 발걸음이 느껴진다.

화자는 모든 것이 스러져 낡아가는 가을의 낙엽과도 같은 것들에서 오히려 생명력을 끌어내어, 그것들을 다시 일으켜 세우려 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대들, 아직 살아있는가? 그렇다면 다시 앞으로 나아가자.' 라는 어떤 외침이 나는 이 시를 읽으면서 계속 귀에 들려왔다. 내 스스로에게 해주고 싶은 말인가? 모르겠다.

강인한 생명력을 노래하는 수많은 시 중에서, 부서지고 스러져가는 것들에 대한 생명력을 가을에 담아 노래한 시는 처음 본다.

살아가야 하는 존재들과 이제 모든 것이 없어져가는 계절과의 대비가 미묘하게 조화롭다.

시인의 언어는 이토록 아름답다.


가을이 왔다. 차가운 소리로, 차가운 공기로.

그러나 무기력했던 여름과는 확연히 다른 가을이다.

아니, 새로 태어났다고 하는 게 맞을 것이다.

간신히 잡은 감사함과 행운은 곧 손가락 사이로 모조리 빠져나갈 것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눈 앞의 행복으로부터 도망치지 않을테다.

체념과 포기 상태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지난날과는 분명 다르다.

프로와 아마추어의 차이란 무엇일까?

많은 것들이 있겠지만. 그 중에 하나는 바로 '아마추어는 자기가 좋을 때만 하고 싫을 때는 도망칠 수 있지만, 프로는 눈이 오나 비가오나 1년 365일 쉬지 않고 자신이 해야할 일을 묵묵히 한다'는 것이다. 꿈을 이루는 일에는 좋은 일만 있는 것이 아니다. 싫은 것들, 귀찮은 일들, 피하고 싶은 고단한 노력의 끝없는 여정 속에서 도망치지 않고 자신의 일을 꾸준히 성실하게 해온 사람들이 '프로'이다.

나는 바로 그 '프로'가 되고 싶다. 아직은 애기 수준이지만. 멈추지 않고 걷다보면 어느새 내가 그토록 살고자 했던 나의 꿈에 한층 가까워질 수 있을것이라 믿고서.

불현듯 다시 살아나는 나의 의지와 박이도 시인의 시가 맞물려, 나 또한 이 시의 화자처럼 '결연함'을 품고서 새벽의 이슬을 들이키며 길을 나선다.


-> 박이도 시인의 시집 <반추>의 서문이다. 여기에 인용된 '젊어서 쓴 시는 무의미하며 평생을 기다려 노년기에 몇 줄의 시를 써야 한다.' 는 릴케의 어록이 심장에 비수를 꽂듯, 깊이 새겨졌다. 어쩌면 아직 노년기를 맞지 않은 사람들을 안심하게 만드는 말이기도 하다. 지금은 쓸 수 없어도, 나이가 많이 들면 쓸 수 있을 것이라는 어줍잖은 믿음. 그것이 잘못된 믿음이라는 것은 잘 알고 있다. 그저 나이가 들었다는 사실만으로 글을 잘 쓸 수는 없다. 그러나 재능이 없더라도, 혼자만이 알고 읽는 글이라 할지라도 계속 써나가고 싶다. 글 쓸 때의 자유로움. 그것은 마치 내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듯한 느낌을 주면서도, 진정 살아있다는 어떠한 증명을 보여준다. 읽히기를 위해서가 아닌, 내가 존재하기 위해서일 때.

시인은 내 최초의 꿈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금은 다 내려놓았다. 나에게는 손 닿을 수 없는 창조의 영역이다. 시인의 언어는 깊고 푸르다. 푸른색의 '지구' 같다. 우주가 아닌 지구. 광활하고 애매모호한 우주가 아니라 생명력 넘치고 온 몸의 감각으로 제시해주는 한정된 세계. 시는 일상의 언어로 추상을 표현한다. 그리고 읽는 사람은 그 추상을 다시 눈 앞에 재현한다. 세상에 존재하는 것으로.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가? 시를 읽는 것이란.



*박이도 시인의 '가을이 오는 소리'는  그의 시집 <홀로 상수리나무를 바라볼 때>에 실린 시이다.

나는 그것이 이 시집 <반추>에 나온 줄 알고 구매했지만, 그래도 시인의 다른 시들을 감상할 수 있어서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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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 맨즈 독 One Man's Dog
조지수 지음 / 지혜정원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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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중걸 작가님의 책 중에 가장 먼저 읽은 책이 바로 '원 맨즈 독'이었다.

이 책을 읽고 한국에 이러한 수필 작가가 있다는 것에 감탄했고, 작가님이 예술사와 철학을 전공한 교수님이라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이후에 작가님의 철학책도 읽게 되었고, '나스타샤'와 '마지막 외출'이라는 멋진 소설도 읽을 수 있었다.

원 맨즈 독을 거의 5번은 읽었다. 읽을 때마다 새로운 것들이 보여서 반복해서 읽는 것이 전혀 지루하지 않았다. 읽는 내내 작가만의 경험과 그 여정 속에서 함께 울고 웃었다. 인생은 그저 살아내는 것 만으로는 경험이 만들어지지 않는다. '경험의 주인'이 되기 위해서는 도무지 이겨낼 수 없을 것만 같은 고통과 인내, 체념, 포기 그리고 자신에 대한 사랑과 운명에 맞서는 용기. 이런 거대한 것들을 다 품어내야만 하고, 그 때 비로소 나만의 경험들이 생기는 것이다. 주어진 시간 속에서 그냥 살아가는 것만으로는 다채로운 경험들이 저절로 생기지 않는다.
자신의 인생과 운명 앞에서 처절하게 무너지게 되고, 다시 일어나서 앞으로 나아가고, 도망가지 않고 정면으로 마주해본 사람만이 말할 수 있는 경험들이 있고, 그에 대해 끊임없이 생각하고, 반성하고, 자신을 이끌어 온 인생이 있는 것이다.

<원 맨즈 독>은 바로 이 토대 위에 쓰여진 글이다. 그러니 독자들은 한 사람의 인생을 마주하며, 동시에 자신의 인생 또한 진실하게 마주하게 될 것이다. 무엇이든 그 실체를 알게 된다는 것은 두려운 일이지만, 두려움 속에서도 실체를 마주하고 인정하는 용기는 언제나 우리를 더 성장하게 만든다.

지금 생각해보면 삶에서 우연이 우리에게 주는 힘은 정말 대단한 것이다. 나는 어떠한 계기로 이 수필집과 만나게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 책의 서문과 첫번째 챕터를 읽는 순간, 수필의 장르와 형식 안에서 하나의 새로운 세계가 창조되었음을 느꼈다. 수필이 보여줄 수 있는 무한한 매력의 세계를 이토록 광활하게 넓혀준 작가에 대한 감사함도 느낀다. 왜냐하면 나는 수필이라는 장르를 진심으로 아끼고, 또 수필이 출판으로 이어지기에 얼마나 모호한 장르인지도 어렴풋이 알기 때문이다.

단순히 자신의 경험과 통찰을 적었다고 해서 수필이 작품으로서의 가치를 자동적으로 가지는 것은 아니다. 대단한 문학 작품을 써낸 작가들도 수필이라는 분야에선 오히려 더 낯설어지는 경우도 보았기에, 수필이라는 장르는 참 까다롭기도 하다. 게다가 자신의 진짜 경험을 그대로 노출한다는 점에 있어서 꺼려질 수 있는 영역이기도 하다.

수필을 쓰려면 자신의 경험에 정면으로 마주할 수 있는 '용기' 또한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경험에는 달콤한 추억만이 들어있는 것은 아니다. 쓰라린 상처와 이겨낼 수 없는 고통 또한 경험의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한다. 그래서인지 나는 작가들의 수필 작업을 정말 존경해왔다. 관심있는 작가의 작품을 접하면 반드시 그들의 수필집을 사 읽곤 했다. 내가 수필을 사랑한다고 해서 그 분야에 정통하다는 것은 절대로 아니다. 문학에 대해 이러쿵 저러쿵 말하기엔 나는 그저 조용한 '감상자'일 뿐이다.

지금까지 많은 책을 읽어왔어도 나는 서평을 거의 쓰지 않았다. 타인의 작품의 가치를 평가한다는 것은 내 성향에도 안 맞고(남 비판하는 일은 죽어도 못한다), 바람직한 일이 아니라고 생각해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리뷰 중심의 마케팅 현실과 또, 좋은 작품에 리뷰나 서평이 없다면 사람들이 구매하는 것을 망설인다는 사실을 알고나서부터는, '좋은 작품을 어떻게든 세상에 알려야지' 라는 생각으로 서평을 조심스레 쓰기 시작했다.

내가 생각하는 좋은 작품이란 그것을 접한 것으로 인해 나의 인생에 어떤 영향을 끼치게 만든다는 것이고, '영향' 그 자체가 바로 작품이 지닌 가치라고 생각한다. 작품이 나에게 끼치는 영향과 그것이 나와 인생에 어떠한 변화를 이끌어 내는 과정에서 작품과 '소통'하고 있음을 느낀다.
작품도 홀로 존재하지 않게 되고, 독자도 혼자가 아니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 작품이 탄생하고, 그것을 누군가가 감상하게 되는 건 그 자체로 얼마나 아름다운 사건인 것인가? 서로가 혼자가 아니게 되는, '하나'가 되는 것, 그것이 예술 감상의 중요한 부분임을 생각해본다.

이런 점에서 조중걸(조지수) 작가의 수필집 <원 맨즈 독>은 한국 수필 문학의 역사에 기록되어야 할 책이라고 생각한다.
수필은 자신의 경험을 기반으로 한 통찰과 성찰을 감각적으로 표현한 글이기에, 작가의 내면과 경험이 있는 그대로 진솔하게 드러난다. 그래서 한 인물의 일대기를 알고자 한다면, 외부의 다른 사람의 관점에서 쓴 전기나 평전보다는 당사자가 쓴 수필을 읽는 것이 훨씬 진실에 가깝다.
한 사람이 평생에 걸쳐 진실하게 부딪혀 온 경험과 그것에서 느낀 통찰은 날 것 그대로 일수록 매력적이고, 눈부시다. 자신의 못난 모습, 잘난 모습, 기쁨, 슬픔, 고통 등의 모든 측면들을 있는 그대로 마주하는 것에서부터 수필은 시작되기 때문이다.

우리가 하루를 시작하면서부터 잠자리에 들 때까지 하루 동안 보게 되는, 일상의 평범한 사람들을 떠올려보자. 분명 그들 중에는 왠지 모를 반짝반짝 빛이 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매일 똑같은 일을 하는 평범한 사람이지만 틀에 박히지 않은, 자신만의 어떤 독특한 세계가 있을 것 같은 분위기의 사람들이 있다. 그런 사람들의 공통점은 바로 자신만의 '경험'들로 인생이 풍부한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누구에게나 하루 24시간이 주어진다. 그러나 그 24시간을 그저 살아낸다고 해서 다 자신만의 경험이 생기는 것은 아니다. 자신의 일상과 사건에 파고들어갈 때, 문제를 외면하지 않고 마주할 때, 자신의 감정으로부터 도망가지 않을 때 비로소 나는 시간과 경험의 주인이 되는 것이다.

누군가가 말하길, '두려움'은 모든 감정에 앞서서 존재하는 것이라고 한다. 그 말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심지어 사랑과 행복 앞에서도 인간은 두려움을 먼저 느낀다고 한다. 그래서 눈 앞에 행복이 있는데도 불안해하며 행복을 잡는 것을 망설인다고 한다. 그러나 그렇게 망설여서는 진정 내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인생의 '경험'이 만들어지지 않는다. 두려움을 가지면서도 행복을 선택하고, 사랑을 온전히 받아들이는 것. 그것은 위대한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

Fortes fortuna juvat. 내가 가장 좋아하는 말이다. 행운은 용감한 자의 것이라는.
용감한 자만이 자신만의 경험들로 가득찬, 풍부한 인생을 살아간다. 세상에서 가장 부러운 사람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언제나 나는 '자신만의 경험을 계속해서 만들어 나아가는 사람' 이라고 답할 것이다. 세상 어떤 부자도 내가 진실하게 추구해 온 나만의 경험이 없다면 불행할 것이며, 가장 높은 명예와 지위를 가진 자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내가 온몸으로 부딪혀 살아온 나의 경험과 인생은 얼마나 눈부신 것이며, 설령 그것이 고통과 고난의 연속이라해도 그 속에서 사유하고 나를 이끌어온 힘은 세상 가장 값진 것이다.
나는 그런 사람들을 깊이 존경한다. 그렇기에 조중걸 작가님을 존경한다.

용기가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라 생각하는 나 자신도 사실은 매 순간이 두렵다.
오늘 하루가 두렵고, 살아갈 내일과 미래의 시간들이 두렵다.
나와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헤쳐나가야 할 이 세상이 두렵다.
그러나 두려움 속에서도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사실을 명확하게 알고 있다.
주어진 운명과 우리가 살아가야 할 시간 속에서 용감하게 맞서야만, 먼 훗날 나만이 걸어온 나의 인생과 경험을 제대로 마주해볼 수 있을 것이다.
그건 정말 행복한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행운이라고 생각한다.
이 책이 정말 많은 힘이 된다.
가장 인상 깊게 읽었던 부분이 '빙하기와 요리하기'이다.
이 부분은 정말 외울 정도로 많이 읽었다. 예상하지 못했던 불행이 닥쳤을 때 어떻게 헤쳐나갈 것인가에 대한 답이 제시되어 있다. 그 중에 한 구절을 소개하며 마무리한다.

'고통 없고 상처받지 않는 인생이란 없다. 또 고통 없는 인생이 더 좋은 것도 아니고. '원유회'나 '음악수업'을 보았을 때의 감동은 암울하고 애조 띤 색조에 있고, 모차르트나 바흐의 음악도 단조로의 변조에서 극적 아름다움을 지닌다. 나는 운명이 편안하고 한결같기를 바라지 않는다. 힘든 인생인들 고마운 마음으로 견딜 용기를 바란다. 편한 운명을 바란다고 삶이 항상 편하겠는가. 운명에 대고 무엇을 바라기보다는 내 마음을 다잡으려 애쓴다. 이겨낼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 한편, 운명과 우연도 나를 도와 줄 것이라고 믿으려 애쓴다. 나 자신에게 거듭 말한다. 낙천적으로 마음먹고 인내와 끈기로 버티라고. 비관하면 고통이 더욱 견딜 수 없다고. 운명에 기만 당하는 한이 있더라도 희망을 유지하는 것이 내 과거 삶에서 중요했다.'



-> '빙하기와 요리하기'에서 감자튀김 요리법을 소개하는 부분. 감자 요리를 정말 좋아하기 때문에 어쩐지 배가 고파져서 입맛 다시면서 읽었다. 역시 작가님께서 mbti 중 가장 과학자 유형인 INTJ라서 그런지 감자의 원산지에 따른 분석이 요리법에 가미된 부분이 너무 재미있었다. 요리에 대한 작가님의 통찰과 철학 또한 전적으로 공감한다. 여자든 남자든 자신의 입으로 들어가는 걸 만드는 일은 가능한 한 직접 스스로 해야한다. 밥 먹는 일을, 밥 짓는 일을 집안일 중 하나의 일로써 가볍게 생각하는 사람들 보면 참 안타깝다. 내 입으로 들어가는 것을 남한테 맡긴다는 건, 내 생명을 남한테 맡기는 것과 같다. 그러니 누가 나에게 밥을 지어준다면, 그 사람의 노고에 절대적으로 감사할 것이며, 되도록이면 내가 직접 요리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잠버릇'에서 코골이를 과학적으로 분석하는 대목. 정말 재밌었다. 현실에서 이루지 못한 것들을 자면서, 꿈 속에서 이루어보려는 것으로 이해해보는 관용적인 부분의 문장이 정말 감각적이었다. '그들 삶의 낮과 밤의 대비가 나의 마음을 쳤다. 슬프게 쳤다. 바로크 회화의 키아로스쿠로가 감상자에게 그러했듯이.'라는 문장이 너무 아름답다. 이런 표현으로 가족의 코콜이와 잠버릇을 이해해보려는 작가의 포용이 이 수필이 가진 매력 중에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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젤소민아 2024-11-06 23:5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왓뜨! 조중걸 작가님이 조지수???? 왜 전 몰랐던 거죠! ㅠㅠ 감사합니다! 이달의 당선작, 축하드리고요~친구신청 받아주세요~

전야제 2024-11-07 00:54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친구신청 감사합니다ㅎㅎ 맞아요! 조중걸 작가님의 수필이나 소설 쪽 필명은 조지수라고 합니다. 저도 최근에 작가님 소설이랑 수필 읽고 감동받아서 리뷰까지 썼는데 이게 이달의 리뷰로 당선될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ㅠㅠ 젤소민아님의 프로필 문장 정말 멋있어요!!!ㅎㅎ 앞으로 좋은 글 많이 읽으러 방문할게요. 감사합니다^^
 

(2016년도에 그렸던 것. 손으로 그리고 색칠한 거라 어색하지만 재밌었다. 질릴만큼 그림 연습하면서 느꼈던 건, 그림에는 재능이 없구나! 라는 것. 뭐든 해봐야 안다. 해보지도 않은 상태에서 말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꿈도 그렇다. 하고 싶은 일이 있으면 꾸지만 말고 행동으로 바로 옮겨야 한다. 실제로 해보면 나의 길이 아닌 것과 나의 길인 것이 이렇게도 다르다는 걸 처절하게 깨달을 수 있다. 그리고 내가 할 수 없는 것들을 최고로 잘 해내는 사람들에 대한 경외감도 가지게 된다. 그건 질투가 아니다. 부러움도 아니다. 그저 '존경심'일 뿐이다. 창작의 고통을 감내해야만 한다는 두려움과 그것을 무던히 해낸 창작자에 대한 존경의 마음. 살면서 좋은 작품들 많이 읽고 보고 느끼는 것. 그것은 '행복한 관객'의 길이다. 창작의 고통 속에서 인생을 다 바쳐 작품을 완성해내는 '프로'의 길을 아마추어들은 절대 따라가지도 못하겠지만, 그래도 그들의 여정을 알고 바라보는 우리 감상자들도 있어야 하지 않을까? 그래야 프로들의 작품이 세상에 빛을 발할 수 있을테니. 무엇이든 저마다의 자리에서의 풍경이 있는 법이다. 가질 수 없는 것을 애써 가지려 하지 않고, 헛된 꿈으로 자신을 고통 속에 던지지 말고, 자신의 여정에 충실하는 것. 그것에서 예술의 진정한 아름다움을 느낀다. 감상자들도 예술이 아닌 부분에 있어서는 오로지 자신만의 인생이 있고, 그 부분을 어떻게 헤쳐나갈지에 대한 삶의 진지한 고민들은 예술가들의 열정과 다르지 않을 것이므로.)


#한때 꿈이었던 것들에 대한 그 첫번째 이야기 _ (1) '만화가'


인생에서 가장 책을 많이 읽었던 시기가 언제였던가, 생각해보았더니 초등학생 때 지금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독서를 많이 했었다. 다독이라는 관점보다는, 항상 손에서 책을 놓지 않고 있었을만큼 책과 하나가 되었던 것 같다. 그도 그럴것이 부모님께서 책을 좋아하셨고, 방 전체가 하나의 서재처럼 책장으로 꽉 차 있었다. 초등학생이었던 나와 동생을 위한 외국의 고전 소설 전집, 역사와 과학 백과사전 전집, 초등학생이 읽어야 할 필독도서들, 아버지 취향의 경영과 경제학 도서들, 어머니 취향의 수필과 문학 도서들. 이사할 때마다 이삿짐 센터의 직원 분들께서 오죽하면 책 때문에 돈을 더 받아야한다고 우스갯소리로 말하시면서 우리 가족은 다같이 이삿짐을 옮기며 웃곤했었다.

여기서 중요한 사실은, 부모님께서는 책을 '많이' 읽는 것을 전혀 강요하지 않으셨다는 점이다. 그저 부모님께서는 다양한 책들을 읽으며, 다양한 관점에서 다채롭게 생각하고 사람과 세상을 이해할 수 있는 아이가 되길 바라셨다. 책을 읽고 그 속의 인물들과 세계관을 이해한다는 것은, 언제나 자신이 갇힌 새장을 부수고 밖으로 나가는 일이기도 하다.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어렸을 때부터 나는 선입견과 편견이라는 것들을 깨부수기 위해 어떤 것이든 이해해보려는 시도를 항상 했었다. 아마도 그건 선천적으로 생각이 많았던 기질 탓이었을 수도 있다. 그것이 고등학교 가서는 현 교육 시스템에 대한 소심한 반항으로 이어져서 다들 수능과 대학 입시에 매달릴 때, 나는 내가 평생 살아가야 할 나만의 인생과 내가 진정 되고 싶은 그 무언가의 꿈에 대하여 진지하게 생각하느라 입시에 소홀했다. 그것이 학생의 본분에 있어서는 잘못된 행동이었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나는 학생들의 꿈보다 대학 입시를 더 중요하게 여기는 한국의 교육 시스템에 왜 그렇게 서운하고 실망했는지 모르겠다. 어쨋든 고등학교 3년의 시간은 내 이상과 현실과의 괴리로 인해 많이 힘들었다. 대부분이 날들이 인생에서 가장 '잿빛'의 하늘이었던 것 같다.


그러나 그 막막한 시간들 속에서도 나는 최선을 다해 내가 좋아했던 것들에 파묻혀 살긴 했었다. 책을 좋아하긴 했지만, 상상 속의 이야기를 언어로만 펼쳐 놓는 것에 무언가 권태를 느낄 때가 아마 내가 중학생 때였을 것이다. 언어가 보여주는 세상이 얼마나 위대하고 아름다운지는 그동안 책을 읽으면서 많이 느꼈지만, 언어가 다 보여주지 못하는 세상에 대한 어떤 호기심과 의문이 내 안에서 넘쳐 흐르고 있었다. 그 시기에 나는 새로운 친구들과 친해지게 되면서 친구의 취미 세계에 발을 들이며, '만화' 혹은 '애니메이션'이라는 장르에 처음으로 접근하게 되었다. 물론 어머니께서 젊은 시절 만화를 그려서 공모전에도 수상하고 온라인에 연재도 하셨을 만큼 만화에 대해 지식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종이에 그려진 그림과 글의 형식이 '영상'으로 재현될 때의 충격을 그때 처음 알게 된 것 같다. 지금 한국의 만화, 특히 웹툰 시장은 일본을 압도할 만큼의 수준과 규모이지만, 내가 중학교 2학년이었던 2006년은 일본의 드라마, 만화, 애니메이션이 훨씬 우세하였던 시기라서 그 친구의 만화 세계를 구성했던 작품들도 다 일본의 것이었다. 친구가 추천해 준 일본 만화들을 보면서, 나는 언어가 다 보여주지 못하는 어떤 세상을 비로소 느낄 수 있게 되었다.


영상으로 재현되는 만화는 시각적으로 그 작품 속의 세계관과 메세지를 전부 다 보여준다. 우리들이 통찰을 해볼 수 있는 부분도 있기야 하겠지만, 화면 속에서 펼쳐지는 이야기가 우리의 상상력을 압도한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인간의 상상력을 제한하는 것이 아니라,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한 인간의 상상의 세계가 '어디까지' 표현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 있어서 '만화가'라는 사람은 위대한 창조자이다. 만화라는 영역이 소설과 다른 점이 바로 여기에 있다. 소설이 언어로 표현될 때, 만화는 언어가 배제된 세계를 표현해내야만 한다. 만화 속 명대사들도 우리에게 수많은 감동을 선물하지만, 이것이 만화의 본질은 아니다. 대사들로 이어나가기만 한다면 만화는 만화가 아니게 된다. 하나의 장면과 그 다음, 다음으로 연속되는 장면들이 어떻게 선택되어지는지, 무엇을 보여줄 것인지, 누구를 통해 말할 것인지, 작품 속의 시공간은 어떠한 상황인 것인지 등등에 있어 작가는 절대 언어로 표현될 수 없는 영역을 그림으로 전부 그려내어야 한다. 그리고 이것이 3D의 영상으로 다시 재탄생되는 것은 수많은 사람들의 노동력과 기술을 필요로 하는 고단한 작업이기도 하다. 만화가가 만들어내는 캐릭터는 인간의 존재와 마찬가지로 이 세상에 '단 하나'로써 존재해야만 하기 때문에, 어디에도 없는 단 하나의 캐릭터를 창조한다는 것은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예술가의 진지한 작업과 다르지 않다. 만화가 비록 상업적이고 세속의 것이라고 해서 그 진실한 작업을 저평가해서는 안된다. 그리고 캐릭터와 더불어, 만화 속 세계관을 구성하는 다양하고 신비스런 요소들까지 생각한다면 그 거대한 세계가 탄생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수고와 영감이 필요한 것인지 추측해볼 수 있다.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힘든 정도가 아니라, 만화가의 인생과 영혼을 통째로 갈아넣어야 비로소 '작품'이 완성된다. 그것을 중학생 때 경험하게 되었던 것은 나에게 참 기적같은 순간이었다.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세계를 경험할 수 있는 수단들은 만화 뿐만 아니라 참 다양하게 존재하는데, 그것이 나에게는 만화였던 것이다. 물론 모든 만화들이 작품으로서 가치가 있는 것은 아니다. 그 안에서도 좋은 작품이라고 할 만한 것들이 있고, 이것을 분별하는 것은 사람마다 취향과 가치관의 차이가 있는 것은 분명하다.

영상으로 재현된 만화를 접하게 된 이후로, 종이책으로 그려진 만화책의 가치를 더 제대로 깊게 느낄 수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생생하게 살아 움직이는 영상으로 제시된 내용이 무조건 전지전능한 것도 아니다. 단지 종이 위에 놓여진 언어와 그림들이 전해주는 감동과 매력은 화면에서 움직이는 것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의 가치가 있다. 영상매체와 종이책이 가진 차이점들을 비교해보고 직접 느낄 수 있었던 것만으로도 좋은 경험을 했다고 생각한다.


만화와 관련하여 부끄럽지만, 중학교 때의 에피소드를 하나 소개한다.

그 시절 나는 초등학교 때부터 다니던 피아노 학원에 계속 다니고 있었고, 클래식 뿐만 아니라 뉴에이지 음악이라고 불리우는 현대 음악들에 푹 빠져 있었다. 연주할 수 있는 악기가 겨우 피아노 하나였기 때문에, 좋아하는 곡을 발견하면 그것을 피아노로 연주하는 것에 굉장한 취미가 있었다. 마침 그때 로또 3등에 당첨된 아버지께서 내가 피아노 연주를 너무 좋아하는 걸 보고서는 그 당첨금과 돈을 더 보태어 피아노를 사주셨다. 그 돈으로 아버지께서 좋아하시는 것들을 살 수 있었을텐데도 내가 좋아하는 피아노를 사주신 아버지께 감사해서라도 나는 열심히 연주했었던 것 같다.

그러던 와중에 만화를 사랑하던 친구로 인해 만화의 세계를 알게 되고, 나도 나만의 만화 취향을 무의식적으로 형성하려 했던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제일 먼저 음악을 주제로 한 만화에 빠졌었다. 어떻게 알게 된 것인지는 정확히 기억이 안 나지만, '마츠모토 토모' 라는 작가의 <KISS>라는 작품을 알게 되었고, 그 속에 나오는 음악들을 한시라도 빨리 들어보고 피아노로 쳐보기 위해 나는 급히 만화책방에 들렀다. 다행히도 그 만화책이 있었고 전 권을 꺼내어 카운터로 갔는데 사장님께서 대여가 안된다고 하시는 것이었다. 아니 이게 왠걸. 그때 마침 교복을 입고 있었던 터라 사장님은 내가 중학생인지 다 알고 계셨고, 나는 그 만화책이 15금인지 몰랐었던 것이다. 그때 나는 만13살의 나이였으니깐. 그 만화책은 절대 야햔 것도 아니고 음악이 주제인 순정 만화일 뿐이라고. 그러니 제발 빌려달라고, 마음 속으로만 여러번 외쳤고, 사장님은 단호했다. 포기할 수 없었던 나는 집에 가서 어머니를 만화책방으로 모셔와서 다시 그 책을 빌려갔다. 내가 어머니를 데리고 다시 나타났을 때의 사장님의 그 어이없는 표정을 아직도 기억한다. 당시에 내성적이었던 내가 굉장히 필사적이고 적극적이었던 몇 안되는 행동 중에 하나였기에 지금 생각해보면 웃음만 난다. 어쨋든 나는 그 만화책을 빌려와서 읽게 되었고, 태어나서 처음으로 느꼈던 감동에 설레었다. 음악이 목적이었지만, 그 만화책의 인물들과 내용에 완전히 몰입하여 헤어나올 수가 없었다. 원래 순정만화가 주는 설레임이 엄청난 것이지만, 마츠모토 토모의 <KISS>는 다른 순정만화와 결이 달랐다. 모든 장면에 음악이 흐르고 있어서 그럴수도 있겠지만, 인물들의 내면과 서로에게 닿는 감정과 행동의 영향들이 실제로 눈 앞에 펼쳐지고 있는 것 같아서 아직도 내 마음 속에 생생히 살아있는 작품이다. 거기에 등장했던 음악들 중에 <Say you love me> 라는 피아노 곡이 있다. 당시에 나는 그 곡에 푹 빠져서 곧바로 피아노로 연습했었다. 곡 후반부의 트릴 연주 부분은 마치 건반 위에서 손가락이 춤을 추는 듯해서 피아노를 이렇게도 생동감있게 연주할 수 있구나, 라며 감탄했었다. 이 곡의 모든 음표들이 마지막의 트릴로 이어지는 여정을 느껴보니, 음악을 진정으로 좋아하게 된 것도 이 때였던 것 같았다.

나는 지금도 여전히 Say you love me를 들으면서 이 글을 작성하고 있다. 그 경쾌함이 내 귀에서 아직도 감미롭게 들린다. 이토록 어린 시절의 취향은 어른이 되어서도 변함이 없는가 보다.


이렇게 만화의 세계에 빠지게 되고 나서 다양한 매체의 장르들을 더 폭넓게 이해하는 것도 가능해졌다고 생각한다. 작품에 접근하는 것에도 용기가 필요한 법이다. 선입견과 편견을 가지고 있으면 접할 수 있는 작품의 폭도 좁아지게 되고, 느낄 수 있는 영역 또한 줄어들게 된다. 그래서 좋은 작품들을 진정 이해하고 알아가기 위해서는 자신의 편협한 사고방식부터 개선해야 된다고 생각한다. 세상에는 좋은 작품들이 많다. 죽기 전에 그것들을 다 볼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많다. 창작자의 입장이 아닌 관객의 입장에서는 조바심이 난다. 그것들을 다 보고 싶다는. 이걸 보면 이 시대의 감상자들은 행복한 것이다. 감사하게 여기고 있다. 좋은 작품들을 살아서 느낄 수 있다는 것에 대하여.


나는 한때 만화가가 되고 싶었다. 스토리는 무궁무진하게 머릿 속에 자라나고 있었는데, 결정적으로 부족했던 건 그림 실력이었다. 그런데 그 '실력'이란, 단순히 그림을 잘 그리는 것이 아니었다. 만화가들이 캐릭터와 배경들을 세밀하게 잘 그리기 때문에 그들의 작품이 칭송받는 것이 아니다. 자신만의 캐릭터를 창조하는 것은 그림을 잘 그리는 것과는 다른 일이다. 아라카와 히로무의 '강철의 연금술사', 이사야마 하지메의 '진격의 거인', 토가시 요시히로의 '헌터X헌터' 등의 만화책을 보면 알겠지만, 그들의 그림 실력이 뛰어난 것은 절대로 아니다. 작가가 만화책에서 보여주는 세계관과 그 속에서 살아가는 인물들을 창조하는 것은 그림을 잘 그리는 것과는 별개의 일이라는 것을 그림 연습을 하면서 깨닫게 되었다. 만화가의 일이 무엇인지 알게 되고 나니, 이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것을 처절하게 깨닫고, 포기해야만 했다. 그러나 그것이 그리 비참하지는 않았다. '만화가'라는 사람들을, 그리고 그 직업의 일을 정말로 존경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누구든 자신의 '인생 작품'이라고 여기는 훌륭한 작품들이 있을 것이다. 그것은 소설,시,영화,만화,드라마 등등 다양한 장르의 것일 테고, 각자가 인상 깊게 본 작품들은 다 다를 것이다. 하지만 본질적으로 같은 점이 있다면, 그건 바로 그 작품들을 접하기 이전과 이후는 정말 다른 세계라는 것이다. 내 인생을 바꿔 놓을 만큼의 강력한 작품들은 인생의 마지막까지 가져갈 수 있는 힘이 되어주기도 한다. 이 작품이 이 세상에 존재하기 때문에 왠지 나는 인생 끝까지 용기내서 나아갈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의 그것.


영상으로서의 명작 애니라고 한다면 역시나 일본 만화들이 우선순위에 오르겠지만, 적어도 종이책으로 출판된 만화라고 한다면 한국의 작가들이 절대 일본에 지지 않는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아니, 한국 만화가들이 만화책에 있어서는 오히려 작화와 감수성, 스토리, 구성 등에 있어 일본 작품들보다 더 우아하고 세심하고 아름답다. '마스카'의 김영희 작가, '풀하우스'의 원수연 작가, '스노우드롭'의 최경아 작가, 'I Wish'의 서현주 작가, 그리고 만화도 멋지지만 그의 인생에 대한 에세이에 더 감동 받았던 이현세 작가 등등. 다 읽어보지도 못한 좋은 작품들이 너무 많아서, 앞으로 그것들을 읽을 생각에 마냥 행복하다.


그러나 이 모든 작가와 작품들을 압도하는, 나에게 있어 최고의 만화가는 바로 '하일권' 이다. 하일권 작가님의 만화책을 20살 때 처음 접했고, 그 이후의 내 인생은 마치 그의 작품 '안나라수마나라'에 나오는 '나일등' 의 자기 인식과 자기 변화와 같을 정도로, 많이 달라지게 되었다. 만화에 교훈이나 메세지가 반드시 담겨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의 작품에서 드러나는 통찰들은 각자의 인생과 현실에 대한 반성을 할 수 있는 강력한 것들이기에 나는 하일권이라는 작가의 매력에 푹 빠졌다. 만화가 보여줄 수 있는 세계가 바로 이런 것이구나, 라는 감동은 만화에 대한 본질과 정체성에 대해서 제대로 생각해볼 수 있는 계기도 되었다. 

하일권 작가님의 작품들 중에 내가 가장 좋아하기도 하고, 자신있게 추천하는 작품은 바로 '안나라수마나라' 이다.

작품이 가진 가치들 중에 언제나 내가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는, 그 작품이 나에게 끼치는 영향과 그것이 어떠한 '변화'를 이끌어 낸다는 점이다. 그것을 통해 나는 그 작품들을 깊이 이해하기도 하며, 내게 있어 소중한 작품이 되기도 한다.


그런 점에 있어서 '안나라수마나라' 속의 '나일등' 이라는 캐릭터는 분명 작품 속에서만 존재하는 인물이지만, 동시에 현실 속 우리들이 반성해야 할 계기를 제공해준다는 점에서 작품 안과 밖을 연결해주는 중요한 인물이다. 나일등이 부모님과 사회가 제시해 온 엘리트의 길을, 그 차가운 아스팔트 길을, 자신도 당연하게 여기며 걸어왔던 길에서 비로소 스스로 벗어나게 되는 장면은 정말 압권이다. 자기 자신에 대한 인식과, 온전한 자신의 의지로 개선과 변화를 이끌어냈다는 점은 이 시대를 수동적으로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에게 귀감이 될 만하다. 주인공들보다도 나일등이라는 인물이 더 인상 깊었다. 개과천선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수동적으로 살아왔던 인물이 능동적으로, 주체적으로 살아가기 위해선 노력 이상의 것들이 절대적으로 필요하기 때문에 어쩌면 나일등의 변모는 역설적인 것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만화 속에서만 존재하는, 현실 속에는 절대 존재하지 않기에 더 감동을 주는. 하지만, 그것이 바로 하일권 작가가 보여주는, 작품과 독자 사이의 '긴장감'이다. 이렇게 되어야 한다는 강요가 아닌, 독자 스스로 생각해볼 수 있는 여지를 주는, 그러나 혹독한 자기 반성을 필요로 하는.


작품을 통해 자기 자신에 대한 반성과 개선의 의지를 불러일으키는 작가는 흔하지 않다. 독자들은 달콤하고 칭찬 가득한 표층적인 위로나 아니면 철저하게 비판할 수 있는 영역을 제시하는 작가를 더 좋아할 수도 있겠으나, 나는 이렇게 결국 자기 자신으로 향하게 만드는 작품들을 좋아하는 것 같다. 더 좋은 '내'가 되기 위해서는 스스로의 의지로 자신을 돌아보고 끊임없이 개선해나가야 하기 때문이다.


나일등의 독백으로 글을 마무리한다. 나일등이 처음으로 자기에 대한 인식을 하게 된 장면이라 기억에 남는다. 동시에 현 교육 시스템에 대한 비판과 통찰이 아스팔트 위의 길로 비유하여 제시된다. 부조리한 시스템 속에서 수동적으로 살아가는 전교 1등의 학생이 자신의 길에 대해 진정 생각해본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어떻게 알았지? 내가 아스팔트 길을 달리고 있다는 걸. 나는 아스팔트가 깔린 곧고 평평한 길을 빠른 속도로 달리고 있다. 그 길은 일방통행이라 헤맬 일도 없고 고속도로라 차가 막힐 일도 없다. 더러운 흙기로, 혹은 구불구불하게 꼬인 길로, 항상 막히는 길로 다니는 사람들과는 달리. 난 능력 있는 부모님이 깔아주신 이 아스팔트를 달린다. 주변이 보이지 않을 정도의 빠른 속도로 그렇게 앞만 보고 달린다. 달리다 보면 난 항상 1등이다.'




-> 나일등의 저 길쭉한 얼굴이 자기 인식 이후에 말끔하게 잘생긴 얼굴로 변모한다는 점이 이 만화책의 재미있는 요소들 중 하나이다. 한 캐릭터의 내면의 변화를 다채롭게 표현해내는 작가님의 능력 최고! (이 만화책이 드라마로도 제작되어 있지만, 만화책의 가치가 드라마로 다 표현되기에는 무리였던 것 같다. 하일권 작가의 만화책은 그저 만화책 그대로 읽어야 그 감동을 백퍼센트 느낄 수 있다. 원작을 뛰어넘는 영상 작업들도 많지만, 하일권의 작품들은 종이 만화책에서 그 가치가 생생하게 살아숨쉰다.)




 

-> '마츠모토 토모' 작가의 <KISS>는 '음악을 주제로 한 순정 만화'라는 걸 다시 한번 강조한다ㅎㅎ 제목 때문에 이 작품의 가치가 오해 받기도 하지만, 이 만화를 보게 된다면 왜 제목이 반드시 이것이어야 했는지 알게 될 것이다. 그나저나 애장판 구매도 못했는데 절판이라니ㅠㅠ 재출간 해주신다면 바로 살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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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외출
조지수 지음 / 지혜정원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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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수 작가의 장편소설, <마지막 외출>


오랜만에 여운이 길게 남는 소설을 읽었다.

마지막 장을 다 읽고나서도 내 안에서 해결되지 않는 질문들이 얽혀있어서, 그것들에 대한 답을 찾아내느라 생각을 한참 정리해야만 했다.

스스로 충분히 생각하고 답을 찾지 않은 상태에서 글을 쓴다는 건 거짓된 행위이기에.

나는 내 인생에 대하여서도 이렇게 많은 생각을 해왔고, 내 앞에 들이닥치는 끝없는 질문들에 대하여서도 도망치지 않고 정면으로 마주해왔다. 그리고 그 답을 찾아내기까지 때로는 발걸음 닿는 대로 걸어야만 하는 긴 여정도 마다하지 않았다.

내가 무엇을 결정하는 데 있어서 오롯이 나의 진실한 마음과 의지가 담겨있지 않다면, 그 선택이 초래할 결과와 미래는 내 것이 아닐 뿐더러, 그것들 앞에서 나는 불행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그리 잘못된 방식이 아니라는 것도 이 소설을 읽으며 다시금 깊숙히 느낄 수 있었다.

좋은 소설은 좋은 삶의 방식에 대해서 생각해보게 한다.

이 소설의 여주인공이 결국 놓쳐버린 진실한 사랑에 대해서 생각하다보면, 누군가를 진실하게 사랑하는 '마음'과 그 대상을 사랑하는 '방식'이 같은 것이 아님을 알게 될 것이며, 사랑하는 마음만으로는 아무것도 이루어낼 수 없다는 것도 알게 될 것이다. 또한 자기 자신에 대한 반성과 개선이 없는 태도와 올바르지 못한 사랑의 방식은 사람의 인생을 파멸로 이끈다는 사실을 처절하게 깨닫게 될 것이다.

사람을 제대로 사랑하는 방식과 방법에 대해서 우리들은 이토록 서툴고 어리석을 수 있다.

잃고 싶지 않은 소중한 사람이 있다면 그를 제대로 사랑하는 방식에 대해서도, 그 사람을 사랑하는 나 자신에 대하여서도 진지하고 깊숙하게 통찰해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이 소설의 여주인공처럼 생의 진실한 사랑을 찾았으면서도 결국은 제 손으로, 기어이 자신의 의지로 놓쳐버리는 잘못된 선택을 하게 된다.

비극은 자신의 의지로 선택한 것에서 오는가? 아니면 내가 선택하지 않은, 의도하지 않은 뜻밖의 것들에서 오는가?

비극은 이 우주 속에 존재하는 그 어느 것으로부터도 오겠지만 진정한 비극이란 건, 나 자신이 정답을 다 알면서도 내가 원하지 않는 다른 것들을 선택하는 것에서 비로소 오는 것 같다. 결국 '내'가 원인일 때 거기서 오는 비극과 그것이 초래하는 파멸이라는 감정은 인생을 벼랑 끝으로 내몰 수도 있는 강력한 절망을 최대치로 끌어낸다.

여주인공은 자신의 인생에서 소울메이트라고 할 수 있는 진정한 사랑인 K교수라는 사람을 우주 속에서 우연히 만나게 되었고, 그녀의 의지로 사랑했다. 오로지 '그'만을 선택할 수 있었던 기회가 정말 여러번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그녀는 언제고 다른 사람을 선택하고 거짓 사랑을 했다. 심지어 다른 남자들을 만나면서도 K교수를 사랑했다. 이것이 그녀가 결국 인생의 전반에 걸쳐 불행했던 이유였다. 그녀가 만났던 수많은 남자들이 그녀에게 준 불행이 아닌, 그녀의 온전한 의지로 선택한 불행이니, 불행은 결국 자기 자신이 불러낸 것이다. 나는 그녀가 참 싫었고, 이해되지 않았고, 답답했다. 그러나 그녀의 독백과 자기 고백적 언어들을 따라가다 보면, 아이러니하게도 누군가를 사랑하는 방식과 자기 자신에 대한 많은 반성과 통찰을 하게 된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이 소설의 진정한 '매력'이라고 생각한다.

그녀가 대학생이었을 때 K교수에게 고했던 이별이 그녀의 어리석은 첫번째 선택이자, 이 거대한 '비극의 시작'이 아니었을까? 그녀가 K교수와 동시에 만나고 있었던 D라는 남학생이 K교수와 헤어질 것을 종용하는 장면에서 그녀는 기어코 D의 명령대로 K교수에게 전화를 걸어 이별을 고한다. 아, 정말 왜 그랬을까? 그녀의 선택을 이해해보려고 참 많은 생각을 해보았다. 우선 그녀는 아직 대학생의 나이였다. 많은 공부를 했더라도 사회적으로 사리분별이 미숙한 나이였고, 어리숙한 행동을 할 수도 있다고 짐작은 해본다. 그녀는 1년 정도 K교수와 함께 하며 그의 학문적 성취, 그의 내면과 가치관 등등. 그만의 독특한 세계를 이해했다고는 하지만, K교수라는 사람에 대해서 맹목적인 신뢰를 가질 수는 없었을 것이다. 여성 편력이 심한 남자를 무조건적으로 사랑하는 것은 단순히 용기만을 가지고는 어려운 법이다. 반대로 남성 편력이 심한 여자를 맹목적으로 사랑하고 헌신하는 남자가 있을까? 앞으로 이 사람만을 사랑하겠노라는 맹세와 다짐을 명확히 보여준대도 그것이 사랑을 굳건히 지속시키는 것과는 별개의 일이다. '사랑한다'는 말 만으로 사랑이 시작되거나 완성되지는 않는다. 언어보다는 그 사람 전체를 보게 되어 있다. 물론 그조차도 현실에서는 서로의 허상 속에서 길을 잃으며, 닿을 수 없는 실체에 다가가려다 사랑에 실패하고 말지만. K교수와 함께 할 미래를 그려보는 것에 있어서 그녀는 확신이 없었던 것 같다. 그에 대한 믿음도, 그를 사랑하는 그녀 자신에 대한 믿음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래서 여주인공이 아직 대학생이었을 때 K교수에게 이별을 고한 것은 나름대로 설득이 되고 이해를 할 수 있다.

누군가를 진실되게 사랑하기 위해선 그 대상에 대한 나의 '믿음'이라는 것이, 사랑이라는 감정에 앞서서 존재해야만 하는 것 같다. 사랑이 시작되고 나서도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려고 드는 연인들의 투정과 싸움을 오랜시간 관찰해온 나로서는, 사랑이 흔들리는 이유의 본질이 바로 사랑이라는 감정에 앞서는, 대상에 대한 '믿음'의 부존재에 있다고 판단해왔다. 누군가를 진정으로 믿는다면, 그 대상의 모든 생각과 행동을 믿게 되고, 그 사람의 모든 것을 포용할 수 있게 된다. 흔들리지 않는 사랑을 언제까지고 계속 지속해나갈 수 있다. 만약 그 대상이 믿음에 배반되는 행동을 하여 사랑이 파국으로 치닫게 된다고 해도, 그 사람을 믿은 건 '나 자신'이기 때문에 그를 사랑했던 나의 '선택'만을 후회하거나 비난할 수 있게 된다.

누군가를 믿는다는 건 그 대상이 나의 것이 되기를 구속하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그 자신으로서의 '그'를 사랑하겠다는 것이므로.

진정한 믿음이란 자기 자신에서 시작하여 자신에게로 귀결되는 가장 고귀한 것이기에, 사랑의 파멸 앞에서도 대상이 아닌 오로지 '나'만이 남게 되는 것이다. 여주인공은 K교수를 사랑하는 데에 있어 바로 이 '믿음'이 부족했다. 아니, 애초에 없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녀가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나서 다시 K교수와 재회하여 그와 행복한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기회가 있었을 때에도 여전히 그녀는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믿음이 존재하지 않았고, 자신의 불행했던 결혼생활에 대한 보상 심리로 더욱더 K교수에 대한 소유욕이 커지게 된 것이다. K교수를 그 사람, 존재하는 그 자체로 바라보고 믿었더라면, 그녀는 K교수와 행복한 결말을 맺었을 수 있었을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온전한 '믿음'이 존재하지 않을 때에, 사랑하는 사람을 소유하고자 하게 되고, 구속하게 되고, 그를 자신의 뜻대로 통제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하게 된다. 그것이 '사랑을 망치는 이유'이다.

사랑을 망친 장본인이 그녀 자신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이미 K교수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다. 이렇게 믿음이 부족한 사람들은 언제나 그 대상을 완전히 잃고 나서야, 자신이 진정 사랑받았음을 깨닫는다. 영화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의 마츠코라는 캐릭터에서도 이 면모가 드러난다. 사랑받기 위해서 올바르지 못하게 대상들을 사랑해왔던 마츠코는 어느새 파멸해가고 있던 자기 자신을 들여다보게 되고, 자신이 누군가에게 진정 사랑 받았음을 깨닫는다. 그 땐 이미 너무 늦었고, 다시 세상을 사랑해보려고 용기냈을 때는, 자신조차 남아있지 않게 된다. 믿음과 비극의 관계는 세상 어느 문학과 예술에서나 파국적으로 드러난다.

나는 종교를 가지고 있지 않아서 종교적인 믿음에 대해서는 잘 모르나, 대상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기 위해서는 사랑하는 감정에 앞서 그 대상에 대한 믿음이 전제되어야 하는 것임을 안다. 그래야만 그 대상이 온전한 그 자체로 있을 수 있게 되고, 사랑을 지킬 수 있게 된다.

다시 말하지만 진정한 믿음이란 자기 자신에서 시작하여 자신에게로 귀결되는 가장 고귀한 것이기에, 대상을 온전히 믿고 사랑한다면 그 대상 또한 그 자신으로서 존재할 수 있게 된다. 나와 대상이 각자 독립하여 자신으로서 존재하면서도 서로 사랑할 수 있는 것이다.

그녀의 사랑이 참으로 안타까웠다. 이 드넓은 우주 속에서 K교수라는 사람의 진면목을 알게 된 그녀였기에. 그리고 K교수 또한 그녀가 진정 어떠한 사람인지 다 알면서도 사랑했기에. 누군가를 진정으로 이해할 수 있는 사랑은 참 드물다. 사랑하면서도 서로의 가치를 알아주고 인정하는 관계는 정말 이상적인 것이라서 두 사람의 사랑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이 비극적 결말에 얼마간 고통스러웠던 것 같다.

그녀가 남편과의 관계가 좋지 않고, 원만한 결혼생활을 할 수 없었던 것도 바로 여기에 이유가 있다. 서로에 대한 진실한 이해와 믿음에 기반하지 않은 결혼은 그저 남편과 아내라는 '역할'에 충실한 것만이 결혼의 전부이게 된다. 그 사람만의 고유한 가치를 서로가 알아주고 인정하는 것 없이, 그저 가정에서의 역할과 위치에서 서로를 바라보게 되니, 이것이 불행하지 않을 수 있을까? 

얼마전 추석 연휴에 친구를 만나 그 친구의 연애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리고 지금 우리 또래의 사랑과 결혼에 대해서 참 많은 이야기를 했다. 일자리의 경쟁에 치여 취직이 늦는 세대라서, 다들 결혼 시기가 많이 늦어졌다. 친구는 원래 비혼주의자였고, 연애를 하면서 조금은 결혼에 대해서 생각이 열렸다고 한다. 30대 초반이 되면서 또래의 여자친구들이 하나둘씩 결혼하고 있다. 그 중에는 서로 오랫동안 사랑한 끝에 결혼하는 친구들도 있지만, 사랑에 기반하지 않은 소개팅이나 맞선으로 인연을 맺고 결혼하는 사람들도 많은 것 같다. 소설과 영화에서만 사랑이 어려운 것이 아니다. 현실에서는 사랑이 이토록 더 어렵고 힘들다. 누군가를 천천히 알게 되고, 그 사람만의 진가를 보게 되고, 한 사람의 세계를 품게 되고, 사랑하게 되고...이렇게 사랑을 쌓아나가는 오랜 과정들 없이 소개팅이나 맞선 자리에서 사람을 알게 되고 결혼하는 건 내 기준에 있어서는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물론, 맞선 자리에서 본 사람을 정말 운명적으로 사랑하게 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주변을 둘러보면 그러한 운명적인 일이 있던가? 맞선이나 소개팅은 '결혼'이 목적인 이유가 대부분이기에 모든 만남의 과정이 결혼에 맞추어 흘러가게 된다. 그 사람이 진정 어떠한 사람인가에 대한 본질적인 탐구보다는, 그 사람이 결혼하기에 적당한 사람인가에 대한 판단이 중요하게 된다. '적당히'라는 말은 인생의 중요한 순간에 있어서 절대로 판단 기준이 되면 안 되는 것 중의 하나라고 생각한다. '적당한 사람과 결혼하는 것'이 30대 초반 아직 미혼으로 남은 사람들에게 사회가 요구하거나, 결혼에 조급한 사람들이 세상과 타협하게 되는 기준이 되어버렸다. 적당한 사람이라는 기준에는 결국 그가 가진 배경, 재력, 능력 등등 그 사람의 본질이라고는 할 수 없는 것들이 포함되어 있다. 한 사람이 가진 고유한, 진정한 가치들은 '적당한 사람'이라는 조건에 포함되어 있지 않다.

이 소설의 여주인공도 마찬가지이다. K교수와 헤어지고 나서 결혼한 남편이 그녀에게 있어 어떠한 사람인가? 남편의 진면목과 가치를 인정하고 그를 온전히 이해하고 사랑해서 한 결혼이었나? 아니다. 그녀도 결국 사회적, 경제적 조건들을 따지고서 그녀가 생각하기에 '적당한 사람'이라는 기준에 적합한 사람이었기에 남편과 결혼한 것이었다. 그러니 그 결혼 생활은 오로지 '조건'들이 유지되기 위해서만을 위해 흘러갈 뿐, 애정이나 신뢰같은 정신적인 가치같은 것들은 애초에 결혼생활에서 중요하게 여겨지는 것들이 아닌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K교수를 진정 사랑하게 되면서 자신이 어떠한 사람을 사랑하고 어떠한 가치들을 중요하게 여길 수 있는지 분명히 겪었다. 한 사람이 가진 가치를 알아보고 품을 줄 아는 진실한 사랑을 했던 그녀라면, 선택도 그러했어야 한다. 결국 생각 뿐이었고 행동은 그것을 반영하지 못했다. 그녀가 물질적 가치들만이 중요한 결혼을 선택했다는 것이 그녀의 두번째 비극인 것이다. 역시 그녀가 자초한.

진정한 사랑을 버리고 그 자리에 매번 거짓된 사랑을 채워 넣은 것이 그녀의 세 번째 비극이다. 그녀 자신의 진실한 사랑에 배반되는 행동과 선택이 남성편력으로 흘러가는 모습을 보면서 내 마음도 점점 무너져 내려갔다. K교수의 여성 편력과는 또 결이 다른 것 같다. 그녀는 남자들을 사랑한 게 아니라 그저 이용한 것 같다. 언제나 자신의 감정, 욕구, 위선, 사회적 지위 등에 가치를 부여하며 보여주기 식의 사랑을 해온 것이다.

정말 K교수를 사랑했다면, 그 자리에 다른 사람을 대체하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 아닐까?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그와 이루어질 수 없다고 해도 평생 마음 속에 그 사람을 품고서 혼자서 살아갈 수도 있지 않을까? 내 가치관대로 그녀를 판단하면 안되겠지만, 그녀는 욕심이 참 많은 사람이다. 욕심이 많은 사람은 절대 사랑으로 행복해질 수 없다. 사랑은 가져야겠다고 생각하는 순간, 파국으로 치닫기 시작하는 것이라서.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대학생일 때의 어느 정도의 순수함마저 잃어버린 그녀는 K교수와 재회하고나서 그와 다시 사랑할 수 있게 되었을 때, 통제할 수 없는 소유욕에 미쳐있었다. 그리고 그것이 K교수를 조현병으로, 죽음으로 몰고 간다. 사람을 자신의 것으로 소유하고자 하는 그녀의 잘못된 사랑의 방식이 한 사람을 파괴했다.

그녀가 K교수를 사랑하는 마음에 문제가 있었나? 아니다. 그녀는 진실하게 그를 사랑했다. 그를 사랑하는 방식에 결국 문제가 있었다. 이것이 맨 처음 말한 '믿음'과 절대적으로 관련이 있다.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그 사람의 모든 것을 믿어야 한다. 그러나 그녀는 결국 K교수를 믿지 않았고, 그가 캐나다의 건강식품점 여자에게 간 것에 눈이 뒤집혀 그를 추적하다가 그와 충돌하게 되고, 그를 파멸로 이끌게 된다. 결국에는 그녀 자신의 파멸이기도 한. 그를 끝까지 믿지 않고, 돌이킬 수 없는 상처와 모욕을 던진 것이 그녀의 마지막 비극인 것이다. 


사랑을, 사람을 소유하고자 하는 욕망은 정말 많은 비극을 만들어내지만, 그 중에 가장 큰 비극은 그 사람이 가진 고유한 빛과 가치를 잃게 만든다는 것이다. 한때는 그 사람을 사랑하게 된 이유였던 것들이 점차 빛을 잃어가고 중요하지 않게 되는 건 그 사랑의 대상에게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을 내 것으로 만들고, 내 뜻대로 통제하고 편하게 여기게 되어버렸기 때문인 것이다.

진심으로 사랑한다면, 사랑하는 사람이 가진 진정한 가치가 그 빛을 잃지 않을 수 있도록, 언제까지나 반짝반짝 빛날 수 있도록 지켜주어야 한다. 이것이 사랑이라는 감정보다 사랑을 더 아름답게 만드는 소중한 것임을.


이 소설 여주인공이 한 사람을 사랑하는 방식과 사랑하는 마음의 변모를 함께 따라가다보면, 진정한 사랑은 어떠한 모습이어야 하는지도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마지막 외출>이라는 소설의 중요한 가치라고 생각한다. 독자들도 마음껏 소설 속의 인물을 비평해보기도, 자신을 반성해보기도 하면서, 사랑에 대한 자신만의 통찰을 해볼 수 있길 바란다.


->꽃에 투영된 철학 이야기가 너무 귀엽다.


*개인적으로 여주인공의 독백과 자기고백적 언어 위주의 흐름이 좋았다고 생각한다.

그녀의 시선으로 본 K교수와 다른 인물들의 묘사 또한 인상 깊었다.

통찰 부분의 비중이 압도적으로 양이 많지만,

자신의 시간적 여유에 맞게 호흡을 나누어 천천히 읽으면 될 일이다.

책의 가치라는 것을 평가하는 건 옳지 않다고 생각하여 그동안 서평을 쓰진 않았지만,

많은 책들을 읽어온 지금에서 느끼는 건

어떤 책을 읽기 전과 후의 나 자신은 분명 다르다는 것이다.

책이 지닌 가치 중에 가장 소중한 것이 바로 이것인 것 같다.

책을 읽고 나서의 변화는 쌓이고 쌓여 한 사람의 성장을 구성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 소설을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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