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이사를 간다. 언제였던가, 이사를 할 때마다 단상을 적어보자는 생각을 했었다. 기획이 실패한 이유는 내가 게으른 탓이 절반, 이사가 너무 잦았던 탓이 절반쯤 되리라. 평생, 최소 14번의 이사를 했고. 2009년 이하로 적게 잡아도 6번 이상의 이사를 했다. 문장이 최소’, ‘적게 잡아도따위의 불분명한 수사를 포함한 이유는 이사로 쳐야 할 지 말아야 할지 모를 자잘한 것들을 과감하게 제외했기 때문이다.

 

죽기 전, 연말 영화시상식처럼 이사와 관련한 어워드를 개최한다면, 이번의 이사는 갑작스러운 이사상과, 가장 긴 거리의 이사상에 동시에 노미네이트 될 가능성이 크다.

 

당연한 말이지만 이사의 주체에게 이사란 환경의 총체적인 변화를 의미한다. 나는 이제 영원히 모가 만든 타일랜드식 커리를 맛 볼 수 없게 되었고 새뮤얼이 가끔 내 주는 블론드 퓨어 맥주를 마실 수 없게 되었다. 한편으로는, 세바스찬의 퀘퀘한 체취와, 종종 부엌에 무리로 출현하는 개미떼들과의 굿 바이를 의미하기도 한다. 무슨 일이든 일장일단이 있는 법이다.

 

말이 나왔으니 말이지만 이번 이사의 가장 큰 장점은 나의 존재가 자연 생태계의 일부에서 문명사회로 회귀한다는 것에 있다. 아직 자연의 숨결이 머무는 이곳은 무서울정도로 생물 다양성을 갖춘 지역, 언급했던 개미 정도는 사실 변변한 위협 축에도 끼지 못한다, 집 안에 상주하고 있는 도마뱀들은 수해를 입었을 때 한끼 비상식량쯤으로 생각한다면 그닥 귀찮을 것도 없다. 파리나 나방은 내 비상식량이 될 도마뱀의 비상식량이기에 공생의 여지가 있다. 문제는 그 다음 레벨부터다. 아침에 눈을 떴을 때 어린애 주먹만한 호주 바퀴벌레가 나와 살을 부비고 있다면? 살이 통통하게 오른 타란튤라가 무시로 욕실에 출몰한다면? 바야흐로, 생물 다양성은 삶의 질과 직결되는 문제가 되어 버린다.

 

타란튤라는 이 동네 먹이사슬 피라미드에서 상위 포지션을 점유한 절지동물로 종종 참새마저 포식하는 극강의 포스를 자랑한다. 무성한 털 하나하나마다 독성을 내재한 타란튤라가 벽을 타고 기어 내려오다 점프를 해 바닥에 착지하는 모습을 보고 있자면, 혹시 이들이 인간보다 근사한 진화의 루트를 선택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결국 나는 이 분야의 전문가 김늘보에게 의뢰하여 타란튤라 접근방지 부적까지 만들어야 했던 것이다.

 

 

 

 

 

하지만 타란튤라는 상위 포식자인 거대 박쥐떼들에 비하면 다리 여덟개 달린 어린아이에 불과하다, 거대 박쥐떼들을 포썸과 비교한다면 그들은 사랑스러운 밤의 천사들일 뿐이다. 그 무시무시한 포썸도 블랙맘바 살모사 앞에서는 귀여운 햄스터고, 포유류들에게 공포와 전율의 상징인 블랙맘바 살모사는 레드백 스파이더 옆에서 나긋나긋한 실지렁이 취급을 받는다. 하지만 레드백 스파이더마저도 불과 몇 킬로미터 앞 해변가에 서식하는 백상어에게는 등에 빨간 점 있는 애교만점 귀요미로 전락한다는 사실. 물론 백상어조차 거대 바다악어를 만나면 지느러미를 꿇고 목숨을 애걸한다는 소문이 있으나, 먼 바다의 일이라 실제로 확인하지는 못하였다.

 

내 생태학적 지위는 이 집의 인간들 중 가장 높은 위치다. 그러나 이종간에서는 포썸과 블랙맘바 살모사 사이의 어디쯤이다. 나는 포썸을 만나면 불같이 화를 내며 그들의 무례함을 꾸짖지만, 블랙맘바 살모사를 만나면 공손히 예를 갖추는 실리외교로써 생태계의 평형을 도모하며 인간족을 이끌어 왔다.

 

그러고 보면 사람을 뜻하는 한자 인은 두 사람이 서로 기대고 있는 형상이다. 인간의 간''도 사이, 즉 관계를 의미하는 글자 아닌가. 그래서 우리의 삶은 늘 그런 식이었던 것이다. 이사가 끝나고 도착하는 그 곳에서, 나는 또 어떤 관계 사이의 무엇이 되리라.

 

짐을 다 쌌다. 공항까지 짐을 옮겨 주기로 한 친구를 기다린다.

 

늘 그렇듯 정리는 간단하다.

 

 

#. 2

 

잠시, 사진기를 챙겨 노르만 파크에 갔다. 꾸며진 무엇 없이 그저 빈 땅과, 제멋대로 펼쳐진 잔디로 휑뎅그렁한 곳. 나는 이곳을 좋아했다.

 

 

 

 

이 고장의 하늘은 으레 무언가를 퍼 붓곤 하는데 오늘은 비 그친 하늘 햇살이다. 텅 빈 땅에 단지 햇살을 받고 있으면 내장까지 정화되는 느낌을 받는다. 이것이 신대철 선생이 말한 천, , 인의 조화인가. 선생은 어느 수필에서 발 댈 곳 줄어가는 공지空地 대한 아쉬움을 토로했다. 그 수필을 읽은 후 가끔 발길 미치는 곳에서 공지를 발견하면 반가운 생각이 들곤 했는데 노르만 파크에 이르러서는 선생을 한번 모셔오고 싶다는 생각까지 든다.

 

특유의 공손한 목소리로, 공지가 뒤지게 많네요. 라고 하실 것 같다. (존경받는 시인이자 천상병 시인의 친우였던 그는 '선생님, 천상병 시인은 왜 바보가 됐어요?' 라는 나의 질문에 '뒤지게 맞아서 그렇죠?' 라고 언급한 전례가 있다.)

 

내 외롭고 고단한 날들을 함께 해준 이 땅에 무릎을 꿇고, 키스를.

 

안녕,

 

나는 이사를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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뷰리풀말미잘 2013-02-10 21: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알라딘님들아 자체적인 사진 편집기능좀 지원해주라. 이게 최선일까?

Mephistopheles 2013-02-11 01: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난 베어그릴스가 한국어로 뭘 썼나 했다는..

뷰리풀말미잘 2013-02-12 10:12   좋아요 0 | URL
정말 제가 베어 그릴스라고는 생각하지 않으시는군요?

Mephistopheles 2013-02-12 12:51   좋아요 0 | URL
설마 애 셋 딸린 유부라는 사실을 고백하시는 거라면...

뷰리풀말미잘 2013-02-12 21:48   좋아요 0 | URL
아니, 애 셋 딸린 유부녀가 뭐 어때서. 애 좀 딸릴 수도 있지. 하지만 저는 미혼이라능.. 결혼을 혐오하던 시절도 있었지만 요즘은 확실히 하나보단 둘이 나은 것 같다는 생각을 해요. 하핫..

메피님도 그렇게 생각하시나요? (이런건 비밀댓글로 ㅋㅋㅋ)

Mephistopheles 2013-02-13 09:07   좋아요 0 | URL
휴....쩝 먼 산(")

뷰리풀말미잘 2013-02-13 11:21   좋아요 0 | URL
ㅋㅋㅋ

Forgettable. 2013-02-11 12: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느 동네 가요?

뷰리풀말미잘 2013-02-12 10:12   좋아요 0 | URL
시드니요

LAYLA 2013-02-11 22: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거대 박쥐떼들을 포썸과 비교한다면 그들은 사랑스러운 밤의 천사들일 뿐이다.
------- 뽱 터지구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정말 자연속에서 살고 계시군요
저번에 올린 사진 보고 말미잘님 집이 너무 이뻐서 놀랐습니다
새 집 사진도 올려주세요~~~~

뷰리풀말미잘 2013-02-12 10:16   좋아요 0 | URL
ㅋㅋ 지금은 임시 거처에서 지내고 있고요 쭉 살 곳이 정해지면 그때 찍어올리지요. 매번 새 환경에 적응해야는게 늘 적응이 되지 않네요. (..무슨 말이지..)

Arch 2013-02-12 15: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 괜찮네요.

이러고 시크하게 서재를 나가려고 했는데 ^^

저도 지난번에 살던 동네가 참 좋았어요. 점 하나가 있다면 그 주위로만 세번 이사를 했는데 다닐 때마다 원룸을 참 그지같이 지어놓는다거나 곰팡이 없는 집에서 사는게 소원이란 식으로 바람이 달라져요. 그 전 집에선 주거환경 개선 요건이 까마득하게 많았어요. 이사를 하면서 불편한 것들이 라졌는데도 그 집과 그 골목, 집으로 오르는 계단과 햇살이 가끔 생각나요.

Arch 2013-02-12 15:57   좋아요 0 | URL
어머, 이미 추천도 했네요.

뷰리풀말미잘 2013-02-12 21:43   좋아요 0 | URL
저는 주거환경을 개선하기 위해 주 1회 20분의 청소를 실시하고 있습니다. 2주 1회 청소하던 시절보다 삶의 질이 한결 나아졌어요. 또 하나 삶의 질을 높이는 좋은 방법은 쓸데 없는 걸 집안에 두지 않는 것이죠. 사실 인간이 살아가는데 정말로 필요한 건 그렇게 많지가 않은거 같애요. ㅎㅎ

우리는 끊임없이 이별하고 끊임없이 무언가를 새로 만드는 시대에 사는 것 같아요. 아치님은 돌아갈 고향이 있으신가요. 그런게 있는 사람들은 이사를 그렇게 부담스럽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아요.

추천을 아주 빠른 속도로 누르면 두번도 됩니다. 예전에 하날리님이 가르쳐 주셨는데. 앞으로 제 글에 추천을 누르실땐 빠른 속도로 두번을 눌러주시길 바래요.

아치 2013-02-13 09:37   좋아요 0 | 수정 | 삭제 | URL
손이 떨리니 그 방법은 무리일 것 같아요. 로그아웃하고 추천을 누르도록 하죠.
미잘, 제가 이런 사람입니다.

어? 로그아웃하고 했는데 이미 추천했다고 나오네요. 미잘 서재에는 두번 추천을 할 수가 없네요

뷰리풀말미잘 2013-02-13 11:17   좋아요 0 | URL
쳇..

2013-02-13 13: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치님 대신 제가 추천 하나 눌렀습니다.

돌아갈 곳이 있는 사람은 이사를 부담스러워하지 않는다는 것, 왠지 돌아갈 곳이 없는 사람만 알아채는 사실 같네요. 전 돌아갈 곳에 돌아와 있는데, 그 다음은 뭘까요?^^

뷰리풀말미잘 2013-02-13 18:43   좋아요 0 | URL
중동의 대사상가 이븐 칼둔의 무깟디마라는 저작이 있습니다. 그 책에서 그는 도시에 정착하여 농경사회를 이루고 살아가는 도시인과 사막에서 유목하는 베두인을 언급하지요. 베두인은 척박한 사막에서 터득한 강인한 근성과 지혜로 나태한 도시인들을 공격해 결국은 도시를 차지한다고 합니다. 한편, 도시의 편안함에 길들여진 도시민들은 나태하고 미련해 베두인들에게 도시를 빼앗기고 축출되게 되어있답니다. 하지만 결국 도시를 차지한 베두인들은 결국 용맹과 지혜를 버리고 나태한 도시민이 된다고 하지요.

지금 대한민국에서 사는 사람 치고 나태해질 여유가 있는 사람은 드물겠고, 혹시 베두인들을 동경하게 되지 않을까요?

2013-02-14 18: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오, 빙고!! 저는 야생의 삶을 동경해요.

<파이 이야기> (영화) 보면서 주제와는 별도로, 파이가 배 위에서 생존의 사투를 벌이며 문명에 길든 나약함을 벗는, 뙤약볕과 소금물이라는 자연 속에서 살아남는 '야생성 회복'을 눈여겨 보게 되더군요. 김영갑 씨의 제주도 분투기를 읽으면서도 그렇고.

다 버리고 자연으로 갈 수 있을까. 거기서 나의 사투를 벌이고 다른 육체, 다른 정신이 될 수 있을까. 고민하곤 합니다.ㅋ

뷰리풀말미잘 2013-02-14 22:51   좋아요 0 | URL
현실적으로 그것이 어렵기 때문에 정글의 법칙 시청률이 그렇게 높은 것이겠지요. 리얼이네 아니네 논란도 일어나구요. 리얼이 아니어도 거실에서 과일 까먹으면서 티비 시청하는데 하등의 지장은 없으나, 대리만족의 크기는 병만이를 고생고생 시켜야 충분해지기 때문이겠죠.

변변한 험지도 없는 대한민국에서 4륜구동 SUV가 잘 팔리는 이유도, 아파트 값은 폭락해도 가평이나 양평 전원주택지 가격은 거꾸러지지 않는 이유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제가 가끔 예리한 나이프를 책상 서랍에서 꺼내서 손톱을 다듬는 이유도 그렇겠구요.

얽매어 살고 싶지 않아서, 얽매어 살기를 그만뒀는데 지금은 또 얽매어 살던 삶이 그립기도 합니다. ㅎㅎ
 















 

#. 1

 

 

 


내가 이 집을 일년을 지낼 보금자리로 채택 한 것은 집이 예쁘거나 대단한 사용자 편의성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 아니었다. 일단 집세가 좀 싼 편이었고, 내 방 스크린만 걷으면 스무 발자국 거리에서 브리즈번 강이 도도한 자태를 뽑내며 유유히 흐르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인들에게 강변에서의 삶은 로망이다. 이건희와 신춘호가 이태원에 수백억짜리 고래등 같은 집을 지어놓고 한강이 보이네 마네 송사질 하는 꼬라지만 봐도 알 법 하지 않은가. 심지어 김소월은 이렇게 노래했다.

 

엄마야 누나야 강변살자

뜰에는 반짝이는 금모래빛

뒷문 밖에는 갈잎의 노래

엄마야 누나야 강변살자.

 

이역만리 타국의 낮선 도시에 떨어져 눈물젖은 빵으로 곯은 배를 채우며 뒷골목을 전전하던 시절,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던거다. 그래, 그 좋다는 강변나도 한번 살아보자

 

왜 그랬을까?

 

씨발.


 

#. 2

 

하상계수河狀系數란 강의 특정 지점에서 최대 유량과 최소유량의 비율을 말한다


1에 가까우면 하황이 양호해 강의 범람이 적고. 1에서 벗어날수록 하황이 거지같아서 범람은 잦다. 세계 주요 강의 하상계수는 다음과 같다. 한강 1 : 393, 낙동강 1 : 372, 금강 1 : 299, 나일 강 1 : 30, 앙쯔 강 1 : 22, 라인 강 1 : 8, 콩고 강 1 : 4. 한강에 왜 잠수교가 있는지, 왜 라일강 유역에서 문명이 발생했는지 대충 알 법 하지 않은가. 브리즈번강의 하상계수야 내 알바 아니나, 사철 건조하고 기후변동이 심하지 않은 이 나라의 특성상 한강 보다는 콩고강과 비슷한 입장에 있다는 것이 자명한 사실.

 

대한민국은 대표적으로 하상계수가 높은 나라에 속한다그런 전차로 대한민국의 거주양태는 대체로 강 기슭에 집을 짓지 않는 형태로 발달했지만, 이 곳 퀸즐랜드는 아주 그냥 강가엔 빈 곳이 없이 빼곡하게 집을 짓고 요트를 끌어다 놓고 매일같이 낚시질에 카약질을 즐기는 자들로 가득한 것이다. 혹시 이런 나라도, 카약정도는 한번 쯤 타 볼 수도 있지 않을까. 그것이 바로 내가 이 동네에 방을 구한 배경철학이다.

 

일 주일 전이었던가. 옆집 폴네가 이사한다고 일손 보태러 간 자리에서 그래도 혹시나, 살풋 홍수에 대해 염려했을 때, 강 건너 사는 로드니가 그랬다. “푸핫, , 너 걱정도 팔자다. 내가 여기 20년 살았는데 홍수나는 거 딱 한번 봤다. 재 작년에. 뭐 그땐 난리도 아니었지만, 이제 그런 홍수 보려면 또 20년 쯤은 걸릴껄?.”

 

그리고, 딱 세 시간 전, 로드니는 갈리아 원정에 출정하는 로마 병사같은 얼굴로 내 방문을 두드렸고 결연한 태도로 방수포를 빌려갔다.

 

지금 우리 집 앞 브리즈번 강은 전례없는 하상계수를 기록하고 있다. 

 

한 마디로, 턱밑까지 물 지옥이라는 말이다.


 

 


 

 


 

 

물과 땅이 거의 같은 높이다. 



#. 3

 

노아의 방주, 길가메쉬 서사시, 북미 인디언의 전승 등 세계 각국의 홍수설화는 실제로 세계를 휩쓴 대홍수에 대한 인류사적 트라우마가 아니다. 그런 상상은 평생 콘크리트 건물에 살아 물 무서운 줄 모르는 퇴마록 작가의 것. 아마, 홍수 설화의 진정한 의미는 각 민족-부족 집단의 집단 무의식 원형(archetypes)으로, 간단하게 말하면, 사람은 어디에 살든 물을 두려워하게 되어있다는 반증에 가까울거다.  


노자의 말대로 천지天地는 불인不仁하다또한 과학과 기술의 발달과는 아무상관 없이 인간은 자연 앞에 무력하다.

 

몇 년 전, 어느 산기슭, 억수같이 비가 쏟아지던 날 새벽 세시 반, 등이 축축해서 일어나 보니 텐트의 절반 이상이 침수되어 있었고, 아직 가까스로 침수되지 않은 코딱지 반만 한 그 공간에서 나와 이름이 같은 그 녀석이 퀘퀘한 체취를 풍기며 자고 있었다. 피할래야 피할 수도 없었다. 그칠 비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잠을 포기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으니. 결국, 나는 인간의 존엄성을 포기하고 젖은 몸으로 냄새나는 그 녀석과 포개져 다시 잠이 들었던 것이다. 아, 나의 암울한 흑역사여.

 

2009년, 카트리나가 뉴올리언스를 물바다로 만들었을때, 살아남은 자들은 당혹감에 휩싸였다. 물에 휩쓸려 죽고, 집이 떠내려간 것도 억울한데, 평생 문제없이 써 온 와이파이며, 전기며, 심지어 수도까지 끊길지 누가 알았겠는가. 물 지옥에서 물을 구하지 못해 목이 마르는 아이러니. 어느 학교에 마련된 임시 구호소에서 상하수도가 끊기자 차마, 누군가의 응가 위에 본인의 응가를 쌀 수 없어 곡기를 끊고 일주일간 구조대를 기다린 어느 아가씨의 주옥같은 일화가 옷고름을 적신다.   


조금 전, 캐리어에 짐을 담아 2층으로 올렸다. 브리즈번 시에서 제공한 기상 레포트에 따르면, 나는 아마 오늘 밤, 침대도 없는 쪽방에서 냄새나는 세바스찬과 뒹굴고, 새뮤얼 녀석의 똥 위에 내 똥을 갈무리해야 하는 불상사가 발생할 공산이 클거다. 아, 착하게 살았건만..


천지는 불인하다.

 

 

#. 4

 

이것이 바로 호주 기상청에서 제공하고 브리즈번 시청에서 정리한 홍수 예상 보고서다. 우리집이 바로 노르만 파크 Gillan ST 57번지. 보고서에 따르면 내일 오전 11시에는 모든것이 결딴이 나게 되어 있는 것이다. 



 

..구해줘! 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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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드 2013-01-28 20: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불행을 유머로 승화시키셨으니, 웃어도 되나요?... 하기엔 상황이 심각하네요. 위로도 구호도 못해드리니, 같이 브리즈번 하늘에 욕이나 해드리겠습니다. #!$#$ㅒ%ㅆ$ㅒㅛ^&%*ㅕ*(

뷰리풀말미잘 2013-01-28 20:09   좋아요 0 | URL
나중에 ARS 수재민 성금 나오면 한 통화 부탁드려요.. ㅠ_ㅠ

Mephistopheles 2013-01-28 21: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강장동물은 물을 무서워하지 않습니다.

뷰리풀말미잘 2013-01-28 23:05   좋아요 0 | URL
뭡니까 이 조교느낌은? 사랑하는 애인 이름이라도 외치며 저 강으로 뛰어들어야 할 것 같은 이 퓔링은? 네?

Mephistopheles 2013-01-29 00:05   좋아요 0 | URL
ㅋㅋㅋ 제대로 각잡고 읽으면 충분히 그리 느끼기도 하겠군요. (3번 올빼미 애인있습니까?)

뷰리풀말미잘 2013-01-29 00:18   좋아요 0 | URL
다행히 아직은 괜찮은 것 같습니다. 그 영화 생각나네요. 이승희의 '물위의 하룻밤'이라고. 마침 요즘 잘 때 누드로 자는데. 오늘 그 영화 클라이맥스 씬 찍을일 생기지 않을까 싶어요.


Mephistopheles 2013-01-29 01:52   좋아요 0 | URL
아..미치겠습니다. 왜 에로티즘적인 생각보단 수달혹은 해달이 물 위에 누워 조개 탁탁 두들겨 깨먹는 상상이 되는건지..

뷰리풀말미잘 2013-01-29 10:40   좋아요 0 | URL
민물에 조개는 없더군요.

blanca 2013-01-29 10: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저 집 사진이 어디 인터넷에서 퍼 온 사진인 줄 알았습니다. 저런 곳에 사시다니 부럽네요. 하지만 홍수 위험이 큰 일이네요. 무사히 넘어가시기를...

뷰리풀말미잘 2013-01-29 10:39   좋아요 0 | URL
비오면 물에 잠긴다는게 함정.
 

 



月下獨酌  (월하독작)  달 아래 홀로 술을 마시다. 



李白 이백 



花間一壺酒  (화간일호주)  꽃 밭, 술 한 동이


獨酌無相親  (독작무상친)  홀로 마신다, 친구도 없이.


擧盃邀明月  (거배요명월)  잔 들어 달을 맞이하고


對影成三人  (대영성삼인)  그림자 마주하니 세 사람 되었구나.


月旣不解飮  (월기불해음)  달은 본래 술 마실 줄 몰라


影徒隨我身  (영도수아신)  그림자만 나를 쫒아 마시는데


暫伴月將影  (잠반월장영)  잠시 달과 그림자 더불어


行樂須及春  (행락수급춘)  즐긴다, 기다린 봄 온 듯이.


我歌月排徊  (아가월배회)  내 노래 소리에 달이 춤추고,


我舞影凌亂  (아무영능란)  , 춤추니 그림자는 더욱 신나 흔드네.


醒時同交歡  (성시동교환)  맑은 마음으로 함께 기뻐하다 


醉後各分散  (취후각분산)  취하여 서로 흩어지려니 


永結無情遊  (영결무정유)  영원히 맺은 담담한 교유.


相期邈雲漢  (상기막운한)  저 먼 은하에서 다시 만나자.



이백의 월하독작 4수중 제 1수를 번역하여 옮긴다. 

이미 수 많은 번역이 존재하나, 제대로 시를 이해하고, 한글의 아름다움을 살려 번역한 것을 보지 못하였다. 나의 번역은 깊이 있지 않으나. 내가 본 수십편의 한역과 영역을 통틀어 가장 좋은 번역이다. 

 

나는 오늘 밤, 


홀로 마신다. 친구도 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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웽스북스 2012-12-09 21: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크. 좋아요!

뷰리풀말미잘 2012-12-09 22:21   좋아요 0 | URL
네, 나른하고 알딸딸한게 좋으네요.. 하하.. 더 취해야 잠이 올 것 같은데 술이 없군요. 이런.

Mephistopheles 2012-12-10 09: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양주를 드실 땐 예이츠의 시도 번역 부탁드립니다.

뷰리풀말미잘 2012-12-10 17:26   좋아요 0 | URL
현실이었다면 딴청을 피웠을 타이밍인데.. 이런..

Mephistopheles 2012-12-10 18:15   좋아요 0 | URL
대부분의 판타지는 술 깨보니 아름다운 여인이 내 옆에서 곤히 잠자고 있었다.(화들짝)인데 말미잘님은 술 깨보니 시집이 펼쳐져 있어서 화들짝 놀랐다. 가 되는 것이군요.

뷰리풀말미잘 2012-12-10 22:28   좋아요 0 | URL
고작 그런것을 어찌 판타지라고 하겠습니까. 천하의 메피님이 포부가 그것밖에 안되서야.. 2번은 약간 악몽쪽에 가깝고, 1번은 수위가 전 연령 관람가 수준이네요. 무슨 크리스마스 가족영화도 아니고.

Mephistopheles 2012-12-11 02:27   좋아요 0 | URL
삐리삐리 뻴뻴 삘뻴뼬은 심의상 생략입니다.

2012-12-10 12: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해석 완전 멋집니다. /메피님 말씀대로 다음엔 예이츠의 시를...ㅋㅋㅋ

뷰리풀말미잘 2012-12-10 17:26   좋아요 0 | URL
어, 어쩌지?.. 대충 인터넷에서 퍼와서 내가 번역했다고 할까..?

2013-01-24 17: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1-25 09:3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1-25 11:1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1-25 23:12   URL
비밀 댓글입니다.
 
















어처구니가 없었다. 그날 점심, 슈가 백에서 꺼낸 건 딱 두 가지, 무려, 김치와 햇반. 내가 엔카, '宿から'(북쪽의 창)을 흥얼거릴 때 실소를 금하지 못하던 인간이 가방에서 김치랑 햇반을 도시락이랍시고 꺼내다니. 뭐냐, 이 미친 일본인은.

 

슈가 노르만 파크의 따사로운 햇살을 받으며 김치 한 조각을 입에 쑤셔넣고 우물거리면서 그런다. “글로벌 시대 아니겠어?” 나는 그날 글로벌 시대에 발맞추어 엄청나게 글로벌한 경험을 하고 만다. 무려 일본인에게, 김치를 빌어먹는.

 

그 다음주 주말, 은혜를 갚기 위해 슈를 집에 초대했다. 스테이크를 해 준다고 했더니, 자기는 코리안 음식이 좋단다. 이왕이면 스파이시한 걸루다가. 결국 나는 겁없는 일본인의 취향을 맞추기 위해 제육덮밥을 시전했다. “‘노리기무치도 있는데 줄까?” 하니까. 그런다. “하이! ‘이랑 김치를 주세요!. I can eat rice with only kimchi!

 

그래서 물어봤다.

 

그러하다면, 일본인들은 김치를 잘 먹나보지?”

 

슈가 그런다.

 

はい!”

 

사 먹니?”

 

はい!”

 

니네, 김치가 한국음식인줄은 알고 먹니?”

 

はい!”

 

그럼 독도는 누구 땅인데?”

 

“Japan!”

 

이년이.. 내가 김치 얘기 나올 때 부터 이럴 줄 알았다.

 

“Put my Kimchi down.

 

“Ko..Korea..?”


“Enjoy your meal.”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김치를 우물거리던 슈.

 

しかし竹島日本..

 

알아들었다. 내 김치 내려놔라.”

 

“Oh my God! 미잘.. 먹을 거 가지고 진짜 너무하는 거 아니야?”

 

그렇게 슈 요시오카와 오붓한 런치타임을 즐기고 있는데 마침 하우스 메이트, 홍콩 간지남 새뮤얼이 퇴근을 했다. 그리고 우리의 대화를 엿 듣다 끼어들어서는 버릇없는 고양이처럼 내 신경줄에 발톱자국을 내고 만다


“미잘, 손님한테 그러면 쓰나. 그런건 어디까지나 폴리티컬 프라블럼 아냐?” 

 

나는 탕 하고 수저를 내려놨다. 이 자식 잘 생겨서 오냐오냐 했더니, ? Political problem!? 


“Look, Samuel. It’s not a ‘political problem’, Sue’s grandfather tortured my grandfather. Got it? 그런데도 난 슈에게 무려, 점심식사를 대접한다고! 이 데탕트를 방해하지 마라.”

 

옆에서 슈가 '내가 너한테 김치 줘서 고맙다고 초대하는 거라며..' 라고 중얼중얼 거렸지만 난 개떡같은 일본식 옹알이 영어를 찰떡같이 알아들을 만큼 대단한 영어의 고수가 아니다. 또 정중하게 발언권을 요구하고 침착하게 의견을 개진할 수 있을 정도로 엄청난 일본어의 고수도 아니다.

 

うるさい!!(시끄러!!) 게다가, 원래 땅은 국가의 것도, 민족의 것도, 인간의 것도 아니야. 또 나는 한국의 내셔널리스트가 아니고! 다만, 나는 자국의 이익을 위해서 당연한 사실을 사실이 아닌 것으로 만들려고 하는 작금의 시츄에이션이 싫을 뿐이야.”

 

새뮤얼이 그런다. “하지만, 아마 일본 사람들도 한국 정부를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거야.”

 

이자식. 아주, 국제 신사처럼 행동하고 있네! 


한국 사람은 누구나 독도에 대해 해박하게 알고 있어, 독도가 우리의 땅이기 때문이야, 하지만 일본 사람들도 그런가? ! 너 독도가 어디있는지 알아?!”

 

日 .. 日本海?

 

“하, 니네 내말 잘 들어, 내가 영어를 잘 못하니까 독도에 대한 지리, 생태, 역사정보를 한국말로 알려줄게. 하지만 이걸 들으면 니네도 독도가 한국땅이라는 것을 알 수 있을거야.”

 

눈을 똥그랗게 뜨고 나를 주목하는 슈와 새뮤얼.

 

우선 독도의 지리정보는 다음과 같아. 울릉도동남쪽뱃길따라이백리외로운섬하나새들의고향그누가 아무리자기네땅이라고우겨도독도는우리땅경상북도울릉군남면도동일번지동경백삼십이북위삼십칠평균기온십이도강수량은천삼백독도는우리땅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하는 그들. 

 

, 이번엔 독도의 생태정보를 말해주지. 오징어꼴뚜기대구명태거북이연어알물새알해녀대합실십 칠만평방미터우물하나분화구독도는우리땅.


경악을 금치 못하는 그들.


이번엔 역사정보다! 지증왕십삼년섬나라우산국세종실록지리지오십쪽셋째줄하와이는미국땅대마도는일본땅독도는우리땅러일전쟁직후에임자없는섬이라고억지로우기면정말곤란해신라장군이사부지하에서웃는다독도는우리땅.”

 

이사부가 지하에서 웃는다고! 의기양양해진 나는 최후의 일격을 가했다. 

 

한국인이라면, 누구든 이 정도는 알고 있지! 이제 알겠냐? 독도가 누구땅인지!


절망스러운 표정의 슈, 뭔가 굳어진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거리는 새뮤얼. 

 

이게 웬, 점심먹다 독도는 우리땅 완창한 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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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YLA 2012-09-08 14: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제가 본 가장 귀여운 말미잘님의 모습입니다.
즐겁게 지내고 계시군요

뷰리풀말미잘 2012-09-08 14:32   좋아요 0 | URL
네 ㅎㅎ 즐겁게 지내고 있습니다. 돼지고기를 커다란거 한 덩어리 사왔는데 제가 곱게 자라서 이걸 도대체 어떻게 해야 음식으로 바꿀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양념도 고추장이랑 소금 설탕밖에 없고.. 토요일 오후의 고민이네요..

라일라님은 잘 지내고 계시나요?

정육식당 2012-09-08 21:31   좋아요 0 | 수정 | 삭제 | URL
고추장에 설탕을 섞어 소스를 만들고 거기에 돼지고기를 푹 넣엏다 빼서 구워 먹어보세요. 괜찮을것 같습니다.
물론 타지 않게 잘 굽는게 중요해요.

뷰리풀말미잘 2012-09-08 23:09   좋아요 0 | URL
참고하겠습니다. 요리에 일가견이 있으시군요.

프레이야 2012-09-08 16: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말미잘님, 너무너무 재밌어요. 연이어 빵빵빵 터졌어요.ㅎㅎㅎ

뷰리풀말미잘 2012-09-08 20:30   좋아요 0 | URL
히히.

정육식당 2012-09-08 21: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매주 목요일에 업뎃한다 하시고는 오늘 토욜 입니다.
그나저나 그... 참...........년..........이군요. 아니 왜 그 나쁜뇬이 호주에서 우리 한국'놈' 화나게 하고 난리야! 나 씅질나게..

뷰리풀말미잘 2012-09-08 23:09   좋아요 0 | URL
놈.. 입니다. 슈 요시오카는.. 그리고 전.. 여자..

웽스북스 2012-09-08 21: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진짜 빵터졌어요 ㅋㅋㅋㅋㅋㅋ 저도 비상시를 대비해 가사를 외워야...? ㅋㅋㅋㅋ

뷰리풀말미잘 2012-09-08 22:41   좋아요 0 | URL
음? 이 노래 가사 모르세요? 국민 누구나 알고 있는 건전가요인줄 알았는데. ㅎㅎㅎ

웽스북스 2012-09-09 17:04   좋아요 0 | URL
일절만 외워요 ㅠㅠ

라주미힌 2012-09-08 23: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뷰리풀말미잘 2012-09-08 23:33   좋아요 0 | URL
라주미힌님 오랫만에 뵙습니다. ㅎㅎ 그간 무고하셨는지요.

하이드 2012-09-09 00: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식당에서 밥먹다가 눈물 쏙 빼고 웃었어요. ㅎㅎㅎ 해운대에서 독도는 우리땅 완창하고 있는 녀자 보면 그건 나! ㅎㅎㅇㅎㅎㅎㅎㅎ

뷰리풀말미잘 2012-09-09 12:13   좋아요 0 | URL
요즘 해운대에 계시나봐요. 좋은 곳이죠!

독도는 우리땅입니다!

정육식당 2012-09-13 15: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목요일............입니다만.

뷰리풀말미잘 2012-09-14 18:33   좋아요 0 | URL
죄송해요.. 토요일날 쓸게요..

윤슬천사 2012-10-17 18: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대박입니다....지나는 길에 뭉클하면서도 큭큭 많이 웃었습니다.

뷰리풀말미잘 2012-10-21 11:42   좋아요 0 | URL
ㅎㅎ 감사합니다.
 

 

#. 1

 

지구 반대편, 이곳도 어제는 휴일이었고, 웹 서핑을 하다 우연찮게 네이버에 연재되고 있는 '강남'이라는 웹툰을 봤다. 워킹데드류의 좀비물인데, 주인공은 여대생으로 도서관에서 자다 깨 보니까 세상이 좀비천지로 변해 있다는 내용이다. 가냘파 보이는 외모인데도 억척스럽게 좀비들을 무찔러 가며 도망 다니는 내용이 어쩐지 밀라 요보비치의 레지던트 이블과도 설정이 겹치는 것 같다.

 

조금 인상적인 내용은, 주인공이 사실은 뇌종양으로 시한부 인생을 살다가 가족들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기적적인 회복을 했다는 비하인드 스토리. 그래서 주인공은 자신의 삶이 자신의 것만이 아님을 알고, 살기위해 망설임 없이 좀비가 된 옛 남자친구의 팔목을 도끼로 내리친다.


#. 2

 

3년 전 어느 날 저녁, 나는 일 때문에 지방의 어느 임시숙소에 머물고 있었고, 동료들은 모두 국가대표 축구 경기를 본다고 떠들썩한 분위기였다. 나는 예나 지금이나 축구엔 관심이 없어 뒤척이다 복도로 나왔는데 유독 그, ''의 방만이 인기척이 있었다. 내가 그의 방문을 열었을 때, 그는 침대에 혼자 엎드려 있었다.

 

-축구 안 봐?

 

조용하고 착한남자. 훈이 씩 웃으며 작은 핸드폰을 들어 보인다.

 

-축구 봐.

 

-왜, 큰 화면으로 안 보고.

 

그는 손가락으로 잘 보이지도 않는 화면의 개미만한 어느 누군가를 가리켰다.

 

-얘가.. 내 동생이야.

 

벅찬 목소리로 그가 가르킨 사람은, 지금 올림픽 대표팀으로 한창 주가를 올리는 K, 그였다.

 

나는 아무도 없는 골방에서 혼자 DMB로 경기를 보며, 그 경기의 누군가를 응원하는 그 마음을 그 때나 지금이나 잘 이해하지는 못한다. 다만, 어쩐지 굉장히 절박한 그런 마음일거라고 생각한다.


#. 3

 

K집안에 대한 자세한 내막은 모르나, K의 조부는 국가유공자라 K와 훈 둘 중 하나는 병역이 면제되는 혜택을 받는 것으로 안다. , 그 집안이 그리 넉넉한 형편이 아니라 K와 훈, 둘 중 하나밖에 밀어줄 수 없는 처지였던 것으로 안다.

 

훈도 열정 있는 사내였으나, 결국 집안에서 밀어주게 된 것은 K. 훈이 자진해 먼저 입대를 했고, K는 자연히 병역이 면제되었다. 이후 K는 승승장구해 대표팀 유니폼을 입고 그라운드를 누볐고, 올림픽에서 좋은 성적을 받아 최소한의 병역마저 면제되는 혜택을 받았다.

 

하지만, 나는 그 둘의 입장이 반대로 바뀌었어도 훈이 해내지 못했으리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하지만 반대로, 어떤 형이라도 그런 절실한 마음으로 동생의 승리를 바라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세상이 떠들썩하다. K는 온갖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세상을 활보하는데, 혼자 DMB로 그를 응원하던 훈은 어디서 뭘 하고 있을까. K는 알까? 그의 승리가 오롯이 그 만의 것은 아니라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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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육식당 2012-08-30 10: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뷰리풀말미잘님은 좀비가 되지 말고 건강하고 예쁘게 지내세요. 뷰리풀말미잘님 글 팬입니다. 자주 써주시기 바랍니다.

뷰리풀말미잘 2012-08-31 21:26   좋아요 0 | URL
닉네임이 정겹네요. 제가 조만간 캥거루 꼬리곰탕을 해 먹어보려고 하는데 전문가적 견지에서 어떻게 생각하세요?

정육식당 2012-09-03 11:03   좋아요 0 | 수정 | 삭제 | URL
캥거루 꼬리곰탕은 글쎄요, 맛을 장담할 순 없지만, 충분히 고아서 파를 송송 썰어 넣어 먹는다면 먹을만하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그런데 뷰리풀말미잘님과 캥거루 꼬리곰탕은 사실 좀 어울리지는 않는듯 합니다. 다른걸 찾아보세요. 차라리 캥거루 옆에서 함께 뛰며 캥거루가 뜯어먹는 풀을 함께 뜯어 드시는 것이 더 어울리는데요.

뷰리풀말미잘 2012-09-03 22:05   좋아요 0 | URL
아.. 아무래도 좀 그러는편이 낫겠죠..?

정육식당 2012-09-03 11: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그나저나, 다음 글은 언제 업데이트 되나요? 정기적으로 해주셨으면 합니다. 제가 매일 들어와보지 못하거든요. 그러니까 매주 목요일 혹은 첫째 셋째주 화요일, 이런식으로 고정해주시는 건 어떨지요.

뷰리풀말미잘 2012-09-03 22:01   좋아요 0 | URL
그, 그럼.. 매, 매주.. 목요일로 하겠습니다...

뷰리풀말미잘 2012-09-07 22:10   좋아요 0 | URL
미안해요 정육식당님 내일은 꼭 쓸게요 ㅠ_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