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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우스트 1,2 세트 - 전2권 괴테 전집
요한 볼프강 폰 괴테 지음, 전영애 옮김 / 길(도서출판)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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멈추어라, 너 참 아름답구나!
-요한 볼프강 폰 괴테 지음/전영애 옮김/ 도서출판 길

파우스트의 많은 번역본 중에서 이 책을 선택한 이유는 “운문처럼, 첫 번역처럼”이라는 단 한 문장이었다. 단테의 『신곡』을 읽었을 때 이 작품이 시라는 느낌을 받지 못했다. 물론 시는 번역불가능의 장르다. 『신곡』을 읽을 즈음, 원문의 『신곡』을 유튜브에서 들은 적이 있다. 그 내용을 전혀 이해하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너무나 아름답게 느껴졌던 이유는, 리듬과 운율 때문이었다. 번역된 시에서는 그것을 느낄 수 없다는 것이 내내 아쉬움으로 남아있었던 터였다. 그래서 평생 괴테 연구에 몰두한, 스스로를 괴테 할머니라 부르는 전영애 교수가 “시(詩)답게” 되살린 문장이라는 글을 보고 망설임 없이 이 책을 주문했다.

괴테가 60년을 두고 써낸, 12,111행의 운문이라는 두 가지의 사실만으로도 내겐 특별한 의미로 다가온 책이다. 거기다 그리스 로마 신화로부터 중세를 거쳐 근대에 이르기까지 3000여 년의 유럽 남북방을 다 아우르는 작품이다. 『파우스트』에서는 인간의 욕망이, 인간의 생애가. 인간이 그려진다. 『파우스트』는 괴테의 순수 창작은 아니다. ‘파우스트’는 괴테가 어린 시절에 인형극으로도 보고 또 커서는 영국의 말로가 작품화해서 영국 유랑극단이 독일을 돌아다니며 공연도 했던 작품이다. ‘파우스트’라는 욕심 많은 인간이 있었는데 악마와 계약하여 영혼을 팔아서 24년 동안 온갖 복락을 누렸지만 결국 지옥에 떨어졌다는 이야기로, 우리나라 흥부놀부이야기처럼 기독교권 세계의 권선징악 이야기의 하나다. 괴테는 24년의 한시적 계약을 더는 바랄 바가 없어서 순간을 향해 “멈추어라, 너 참 아름답구나!”라는 말이 절로 나올 때까지 악마가 봉사해야 하는 ‘내기’로 바꾼 것이다. (옮긴이 해제 참조)
  
“괴테가 60년을 두고 쓴 작품, 그 추동력을 한 줄로 요약하면 인간은 지향이 있는 한 방황한다.”는 구절이라고 전영애 교수는 말한다. 철학, 법학, 의학, 신학까지, 중세의 모든 학문을 섭렵한 파우스트지만 “알게 된 거라곤, 우리가 아무것도 알 수 없다는 것뿐!”이라는 탄식을 쏟아내며, 결국 악마에게 영혼을 팔게 된다. 학문의 최고 경지, 사회적인 성공, 사랑, 부와 명예 등 지상의 어떤 가치도 인간의 영혼을 자유롭게 하지도, 인간을 구하지도 못한다는 것을 이 책은 말해주고 있다. 결국 세상의 물리적인 가치가 인간의 영혼을 구원할 수 없기에, 물질적인 세계를 살아가는 인간은 방황할 수밖에 없는 존재인 것이다.

『파우스트』는 그런 인간의 방황을 긍정하고 있다. 인간의 방황은 삶을 자신에게로 되돌리기 위한 의지의 표명이다. 끊임없는 방황은 영혼의 자유와 구원에 이르고자 하는 인간의 속성인 것이다. 방황에 대한 긍정, 그것은 완벽하지 않은 인간에 대한 긍정인 동시에, 인간 속에 내재된 본성에 대한 긍정이다. 이는 ‘방황하는’ 모든 존재들에 건네는 위로다. 완벽하지 않음으로 인간은 인간일 수 있기 때문이다.
  
평생 학문적인 성취가 목적이었던 파우스트는 자신의 삶을 떠나, 사랑을 경험하고 국가의 재정 위기를 해결해 능력을 인정받고 고대 그리스 시대로 가 헬레나를 만나는 등의 시대와 공간을 뛰어넘는 여정을 경험하지만, 그런 여정들에서 멈추어라, 너 참 아름답구나! 를 쉬이 외치지 않는다.

파우스트
나는 다만 세상을 달려왔다
욕망 하나하나의 머리채를 틀어쥐었고
내게 흡족하지 않은 건, 떨쳤으며
내게서 벗어나는 건, 가게 두었다.
나는 다만 갈망하고, 다만 이루어내었고
또다시 소망하고, 그렇게 힘으로써
나의 삶을 돌파해 왔다. 처음에는 거대하고 힘 있게,
그러나 이젠 현명해졌다. 생각이 깊어졌다.
지상의 일은 이제 충분히 아는데,
저 높은 곳을 향한 전망은 막혀버렸다.

지혜의 마지막 결론은 이렇다
자유도 생명도 누려 마땅한 자는
날마다 그것들을 싸워서 얻어내야 하는 자뿐.
하여, 위험에 에워싸여 있음에도,
여기서는 아이도, 어른과 노인도 그 알찬 세월을 보낸다.
그런 무리를 나는 보고 싶노라,
자유로운 터에 자유로운 백성과 서고 싶노라.
그 순간에게 내가 말해도 좋으리,
멈추어라, 너 참 아름답구나!

자유와 생명을 누리기 위해 날마다 그것들과 싸워 이겨내는 것, 위험에 에워싸여 있음에도 기꺼이 그 세월 속에 존재하는 것, 그것을 실천하는 무리들과 함께 서 있는 것, 파우스트가 멈추고 싶은 순간이다. 이것이 파우스트의, 괴테의 지향일 것이다. 괴테는 파우스트를 통해서만 자신의 사유를 펼치지 않는다. 수많은 등장인물들 모두가 괴테다. 삶이, 인간이 완벽하지 않음을 받아들이며, 우리가 경험하는 삶의 모든 순간이 ‘멈추어라, 너 참 아름답구나!’를 외칠 수 있는 소중한 순간임을 안다면, 우리는 이 지상에서 영혼의 자유와 구원을 이뤄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세속적 욕망에 사로잡힌 인간이 이런 통찰과 지혜를 얻기는 쉽지 않다. 방황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일 것이다.
  
성모를 부르는 이 두 행은 제1부 성벽 앞 장면에서 괴로움에 찬 그레트헨이 부르던     성모의 이름 “그대 고통 많으신 이”와 각운이 맞는다(3588행) 8,000행 이상을 건너   뛰어 맞추어진 이 운은 12,077행과 연결되어 그레트헨의 비극과 구원을 잇는 작지   만, 비중 있는 장치로 읽힌다. “파우스트를 만난 헬레나가 처음에는 그리스 운율로 이야기를 하다가 나중에는 게르만 운율로 이야기한다”

위 첫 문장은 각주 514의 글이다. 두 번째 문장 역시 독자가 간파하기 힘든 부분에 대한 각주다. 전영애 교수의 번역은 그만큼 촘촘하고 꼼꼼했다. 독일어의 각운을 느낄 수는 없지만, 그리스 운율과 게르만의 운율을 구별하지는 못하지만, 8,000행 이상을 건너뛰어 맞춘 각운을 통해, 괴테의 의도를 가늠해 보는 일은 이 책이 주는 또 다른 가슴 벅참이었다. 다양한 사건과 장소와 이야기를 펼쳐놓고 종국엔 그것을 전체로 통합시키는 힘, 괴테였기에 가능했다는 생각을 했다. 그것을 감지해 낼 수 있고 그 리듬과 함께 출렁일 수 있는 원문을 읽는 독자들에 대한 부러움도 느꼈다.  

괴테가 스물두 살에서 여든두 살까지 쓴 작품, 책이 낱장이 되어 흩어질 때까지 읽었다는 전영애 교수. 그런 『파우스트』를 설익게 읽고, 읽었다고 말하는 것이 부끄럽다. 그렇지만 두 문장은 오롯이 남았다. ‘인간은 지향이 있는 한 방황한다’와 ‘멈추어라, 너 참 아름답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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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 세트 - 전3권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표도르 도스토옙스키 지음, 김연경 옮김 / 민음사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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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세 권의 책을 세 달에 걸쳐 읽었다. 1700페이지가 넘는 대 장편소설이다. 이 소설이 대단하다고 말할 수 있는 첫 번째 이유다. 읽기도 만만치 않은 분량을 써낸 작가에게 경이를 표한다.

작가는 스토리의 전개 도중 불쑥불쑥 등장한다. “그의 최후에 대해서는 때가 되면 얘기를 하겠다.”거나 “기민하고 영리한 부류에 속하는 아가씨가 어쩌다가 그런 보잘것없는 그 당시 그의 별명대로 ‘푼수’에게 시집을 갈 수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구태여 설명을 늘어놓지 않겠다.” 등 소설의 전반부부터 텍스트 속에 불쑥 들어와 아주 태연하고 능청스럽게 이야기에 개입해 스토리를 끌고 가며 소설을 읽는 재미를 더해준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은 소설의 형식을 빌리고 있긴 하지만, 종교와 철학과 인간의 심리를 망라한 책이다. 이 책이 대단하다고 느낀 두 번째 이유다. ‘친부 살해’라는 커다란 줄기에, 재산을 둘러싼 부자간의 갈등, 한 여자를 두고 벌이는 아버지와 아들의 경쟁과 시기와 질투, 서로 다른 가치관을 가진 형제들의 반목 등 다양한 사건이 얽히고설켜 이야기를 이어간다.

이기적이고 탐욕스러운 카라마조프. 그에게는 세 아들이 있다. 첫째 아들 드미트리가 육체와 욕망에 충실한 본능적인 존재라면 둘째 이반은 무신론자이며 냉철한 이성을 가진 이성주의자다. 막내 알렉세이는 타인에 대한 무한한 사랑과 동정이 넘치는 종교심이 두터운 인물이다. 그리고 그의 아들로 추정되지만, 카라마조프가에서 하인으로 일하고 있는 스메르자코프는 음흉하고 비열한 존재다. 카라마조프를 살해했음에도 죽는 순간까지 그 사실을 밝히지 않는다. 세 아들은 모두 경박하고 음탕하고 탐욕적인 아버지의 존재에서 벗어나고자 하지만, 결국 자신들에게 카라마조프가의 피가 흐르고 있다는 사실을 부인하지 못한다.

작가인 도스토옙스키는 이 소설에서 구원은 신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죄를 뉘우치는 양심의 회복에 의해 이루어진다고 보았다. 드미트리는 아버지를 죽였다는 누명을 쓰고 20년 형을 선고받고 시베리아로 떠나야 하는 형벌을 받게 된다. 죄와 벌을 결정짓는 사법 제도가 그를 죄인으로 인정한 것이다. 아무런 증거가 없음에도 평소 아버지와 자주 갈등을 일으키고 아버지를 죽이겠다는 말을 공공연히 하고 다녔다는 사실만으로도 아비가 황제이며 신인 세계에서 이미 그는 죄인인 것이다. 그러나 알렉세이는 그런 형의 도주를 돕겠다는 의도를 내비친다. 형의 도주를 돕는 것은 분명한 위법 행위임을 알면서도 누구보다 종교적인 인물이었던 알렉세이가 그런 행동을 결심한 이유는 형이 감옥에서 비록 아버지의 살해에 대한 자신의 죄목에 대해서는 아니지만, 그동안 방탕하게 살아온 자신의 삶을 진심으로 뉘우쳤고 이로 인해 형이 구원받았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또 그는 죄에 대한 의도만으로도 죄가 됨을 이반을 통해 보여준다. 아버지를 죽이고 싶었으나 죽이지 않았고 그저 죽음을 바랐을 뿐인데 이반의 영혼은 고통받는다. 이반의 고통은 신과 사법 제도가 내린 벌이 아니라, 자신의 양심이 내린 벌이었다. 종교와 사법 제도는 인간의 죄와 벌을 결정짓는 지위를 오래 누려왔고, 지금도 그 권위는 존속되고 있다. 그러나 도스토옙스키는 자신의 양심이 구원의 요건이라고 보았다. 책에서 방대한 분량을 할애하며 인간과 종교에 대한 성찰을 풀어내고 있다.

카라마조프적인 성향은 카라마조프가에만 존재한 것은 아니다. 우리 모두의 내면에는 카라마조프적인 성향을 갖고 있다. 그것을 어떻게 드러내느냐에 따라 드리트리가 될 수 있고, 이반이 될 수 있고 알렉세이가 될 수도 있고, 스메르자코프가 될 수도 있다. 시대와 공간을 넘은 그들의 분신이 우리인 것이다. 결국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답을 자신의 내면에서 구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도스토옙스키는 카라마조프가의 서사가 아닌 일류샤의 장례식으로 소설을 마무리한다. 이는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는 요한복음의 내용을 통해 죽음을 통해 용서와 화해를, 죽음이 생의 단절이 아닌 또 다른 희망으로 승화될 수 있음을 이야기하고 싶은 작가의 의도로 보인다. 그는 아이들을 통해 미래의 희망을 말하고 싶었던 것이다. 순수하고 무구한 아이의 세계가 곧 신의 세계이며, 이 세계의 회복이야말로 인류를 구원할 수 있다고 믿었던 것 같다.

또 작가는 ‘모든 사람들은 모든 사람들 앞에서 모든 것에 대해 유죄’라는 신념을 끌고 나간다. 이런 관념에서는 누군가를 비난하거나 벌을 주거나 용서를 하는 행위 자체가 모순이 되는 것이다. 결국 인간은 모순적인 존재일 수밖에 없다. 인간이 가진 선악에 대한 관념 역시 무너뜨린다. 그의 신념은 종교의 존재 방식에 대해서도 고민하게 한다. 본질적인 의미를 망각한 채 외부 현상에 집착하며 방편적인 것들이 진리인 것처럼 변질되어 버린 종교는, 자신이 가진 권위로 인간 위에 군림했던 것이 사실이다.

넌출넌출 달려 올라오는 수많은 관념들 사이 구원, 양심, 신, 선악, 종교, 이성, 본성, 내면, 욕망, 이기심 등의 단어들이 숙제처럼 남은 책이다. 두께만큼 묵직하다. 그게 결국 삶일 것이다. 결국 모든 질문과 답도 내 안에서 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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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아 아, 사람아! - 국내 출간 30주년 기념 개정판
다이허우잉 지음, 신영복 옮김 / 다섯수레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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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9페이지에 이르는 묵직한 책이다. 내용도 묵직하고 감동 또한 그렇다.

20년 전 나는 연단에 서서 지도자의 의도에 따라 작성된 원고를 소리 높여 읽었고 나의 선생님이 주창했던 휴머니즘을 비판했다. 맹종과 무지가 힘이 되고 자신감을 부여해 주던 시절이었다. 나는 만장의 박수갈채에 도취해 자기가 그런 전사가 된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했다. 20년 후인 오늘 나는 소설을 쓰게 되었다. 그리고 소설 속에서 호소하고 싶다고 생각하는 것은 내가 예전에 비판했던 바로 그것이며 토해 내고 싶다고 생각하는 것은 내가 일찍이 억누르고 개조하려고 했던 '인간다움'인 것이다... 작가 다이허우잉의 말이다.

많은 문장들에 줄을 그었는데 결국 한 단어만 남았다.
'사람'
'인간'
어떤 혁명의 목적도 우리가 추구해야 할 가치도 최종의 궁극적인 목적은 '사람다움', '인간다움'에 있음을 깨닫게 한다.

중국, 혁명기 지식인들의 고뇌와 방황을 잘 그려낸 작품이라는 생각이 든다. 역사의 격랑 속에서 그들은 살아남았다. 때로는 고난을 겪고 때로는 모습을 바꾸고 때로는 침몰하기도 하면서. 그 과정을 한 사람의 의식의 흐름이 아니라 여러 인물의 의식의 흐름으로 보여준 작가의 의도가 신선했다.

사람아 아, 사람아... 감탄사 아, 와 마지막! 는 문장부호 그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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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는 문화 신바람의 문화·문화 코드 - 에세이_신바람과 코드에 깃든 한국문화 이어령 전집 22
이어령 지음 / 21세기북스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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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령, 나는 그가 건넨 마지막 인사로 그를 기억한다. 이 세상을 떠나기 얼마 전, “여러분들 잘 있으세요” 하며 마지막 인사를 건네던 유튜브 영상이 그분을 생각하면 제일 먼저 떠오른다.

교수, 소설가, 시인, 희곡작가, 시나리오작가, 평론가, 잡지편집자, 문화비평가, 기호학자, 언론인, 장관, 문화행정가 등 수많은 이름으로 살았고, 어느 분야든 괄목한 만한 성과를 내고 간 분이다. 서울대학교 오세영 박사는 그는 기본적으로 시인이었고, 시인으로서의 비범한 상상력을 실현하고자 한 사람이었다고 평가한다. 시인으로서의 교수, 시인으로서의 소설가, 시인으로서의 시인. 시인으로서의 평론가, 시인으로서의 학자. 시인으로서의 장관, 시인으로서의 언론인, 시인으로서의 잡지편집자, 시인으로서의 문화행정가였다고 말한다.

이 책은 오세영 박사의 이런 평가를 확인할 수 있는 책이다. 이 책의 서장에서 그는 “동양은 어디에 있는가”를 반복해서 독자들을 향해 묻고 있다. 그러면서 우리는 동양이 어디에 있는지 모르며, 동양을 찾으러 서양으로 가고 있는 모순의 세계에서 풍선처럼 터지고 또 터지는 우리들의 영혼을 찾기 위해서 뒷걸음치는 것이 아니라 앞을 향하여 가겠다고 고백한다.

조선에서 근대는 일본을 통해 서구라는 외부를 발견함으로써 경험되고 시작되었다. 근대의 가치는 대부분 조선의 가치를 부정하는 것이었으며, 서구의 문명을 경험하고 배우는 것이 근대의 당면 과제가 되었다. 신문화, 신문물에 열광하며, 우리 문화가 가진 가치들은 폄하되고 상실되었다. 이런 근대의 가치가 현대까지도 우리의 인식에 뿌리 박혀 있다.

서구인들은 자신들의 문화를 보편주의, 식민지국의 문화를 특수주의로 설정하고, 식민국의 문화가 가진 특수성을 폄하하고 억압하며 자신들의 보편주의에 흡수시키려 했다. 일본 역시 서구의 사상을 받아들여 우리의 문화를 진단하고 평가했다. 그런 서구인들의 인식으로 우리는 우리 문화를 진단하고 평가해 왔다. 그런 인식에서 벗어나 우리 문화를 새로이 보고 다시 보자는 것이 이 책의 취지다.

그는 동양을 찾기 위해, 아니 그곳에 존재하는 우리를 찾지 위해 수많은 이름을 달고 세상을 누빈다. 그래서 그의 목소리는 내내 상기되어 있다. 아니 그의 목소리에 내가 상기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국수주의자도 민족주의자도 아니다. 다만 동양을 바로 알고 바로 보자는 것이다, 지금 우리는 버려진 우리 문화의 씨앗들에 대해서 생각해 보아야 하며, 그 속에서 새로운 가치를 발견해 내자는 것이다.

한국인들은 무엇인가를 창조하고 생산해 내는 것을 ‘푸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문화란 이 맺혀 있는 것, 굳어 있는 것, 빡빡한 것을 푸는 힘이다. 풀이 문화의 원동력인 신바람과 흥겨움은 생명의 근원적인 율동에서 나온다. 우리는 안다. 오늘날 문명과 긴장과 그 억압을 풀 수 있는 자가 승리자가 되리라는 것을……다만 정치가 어깨춤을 죽이고, 이 국민을 다스리려고 했기 때문에, 다만 기업가가 가락을 죽이고 고용인들을 부리려 했기 때문에, 다만 아버지가 아들을, 선생이 학생을, 남편이 아내를 신바람을 죽이고 이끌려고만 했기 때문에 이 국민은 엄청난 창조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했던 것뿐이다. 이익으로 사는 시대가 아니라 흥과 신명으로 살아가는 시대가 오리라.(책에서 발췌)

그는 우리 문화가 국가주의, 자본주의, 권위주의, 가부장주의에 의해 억눌렸던 신명을 회복해야 하며, 버려진 우리 문화의 씨앗들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 새로운 시선으로 다시 볼 줄 알아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기 위해선 경제 코드 정치코드가 아니라 문화코드로 세상을 읽을 수 있어야 한다고 조언한다. 그러면서도 그는 분명하게 말한다. 내 것을 알고 가르치는 것이, 남의 것을 몰아내고 담을 쌓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우리 문화만이 가치가 있다는 서양의 보편주의 문화와는 분명 다른 접근이어야 한다고 조언한다.

예수님께서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말은 이웃을 사랑하라는 전언만이 아니라, '내 몸과 같이'에 방점을 찍어 내 몸 역시 사랑하라는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는 글을 어딘가에서 읽은 기억이 있다. 사랑해야 보인다. 동양도 문화도 가치도.

‘신명’ 참 아름다운 단어다. 근대의 가치에 의해 잃었던 신명을 되찾는 일, 그는 떠났지만 그가 남긴 메시지가 참 근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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