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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적 부족주의 - 집단 본능은 어떻게 국가의 운명을 좌우하는가
에이미 추아 지음, 김승진 옮김 / 부키 / 2020년 4월
평점 :
<정치적 부족주의>(Political Tribes)는 제목만으로는 무슨 내용일지 감이 잘 안 오는 책이다.
이 책은 <타이거 마더>로 유명한, 예일대 로스쿨 교수로 재직 중인 에이미 추아의 2018 년작으로 그녀의 5번째 저서다. 이번에 알게 되었는데, 저자의 남편은 <살인의 해석>을 쓴 제드 러벤펠드이고, 이들 부부는 <트리플 패키지>란 공저도 낸 바 있다.
"정치적 부족주의"란 과연 무엇인가?
'인간에게는 집단에 속하고자 하는 '부족 본능'이 있는데, 세계의 많은 지역에서 가장 중요한 부족적 정체성은 '국가'가 아니라 '인종, 민족, 지역, 종교, 분파' 등에 기반을 둔다'라고 요약할 수 있겠다.
한국식으로 하자면 '우리가 남이가?' 정서를 기반으로 한 패거리 문화쯤 되려나!
"인간은 그저 조금 부족적인 게 아니라 아주 많이 부족적이며, 부족 본능은 우리가 생각하고 느끼는 방식을 왜곡한다." - P 57
"사람들은 자신이 속한 부족이 고유하고 자랑스러워할 만한 무언가를 가졌다고 믿고 싶어 한다. 이것이 부족적인 본능의 모든 것이다." - P 241
'정치적 부족주의'란 프레임으로 세계를 보면 많은 현상이 새롭게 보인다. 중국계이긴 하지만 저자 역시 미국인이기에 세계 도처에서 '세계의 경찰'을 자임한 미국이 왜 이렇게 헛발질을 했는지 납득할만한 설명이 이어진다. 미국의 군사·외교 관련자들에겐 필독서가 될 책이다.
미국의 눈으로 보면 베트남, 아프가니스탄, 이라크, 베네수엘라는 그냥 하나의 국가일 뿐이다.
보통의 미국인들은 이 나라가 아시아에 붙었는지, 중동에 붙었는지 구분조차 어려울 수 있고, 베트남인이 아닌 그냥 일개 '동양인'일 따름이다. 그러나 이 나라들에서 벌어진 문제들은 국가란 개념으로는 해석이 안 되고, 민족이나 종교, 인종 등 저자가 제안하는 '정치적 부족'의 개념으로 접근해야 해답이 나온다.
미국 최초이자 거의 유일한 패배로 기록된 베트남전은 주로 공산화의 도미노를 막기 위해 미군이 개입했으나 땅굴전에 능숙한 베트콩을 당해낼 수 없었던 전쟁이자, 월남 패망 이후 수많은 '보트피플'의 이미지로 기억된다.
하지만 저자는 아직까지도 실패의 원인 진단이 부족하다고 일침을 놓는다.
"오늘날까지도 미국은 베트남전쟁이 왜 그렇게 잘못 돌아가게 됐는지를 완전히 파악하지는 못하고 있다.
미국이 베트남에서 패배한 핵심 원인은 베트남의 민족(국가)주의가 가진 '민족적인' 속성을 간과했기 때문이다." - P 54
베트남, 특히 남부는 '시장 지배적 소수 민족'인 화교가 경제를 장악하고 있었고 오랜 기간 일반 민중과 소수 화교의 반목이 이어졌다. 이런 상황에서 미국이 지원한 남베트남은 애당초 다수 인민의 지지를 받을 수 없는 구조였기에 시작부터 이길 수 없었던 싸움인 거다.
"요컨대, 미국이 지원하는 남베트남의 정권은 남베트남 사람들더러 화교를 부유하게 만들어 주기 위해 목숨을 걸고 북부의 형제들을 죽이라고 요구하는 셈이었다." - P 71
역사적으로 중국, 프랑스의 지배를 받았으나 독립의 의지를 놓은 바 없는 강인한 베트남의 투쟁력이 가장 중요한 요인이겠지만, 분명 미국의 입장에서 놓친 부분이 있다. 우리가 기억하는 '보트피플'도 대부분 일반 국민이 아니라 기득권을 잃고 생명의 위협까지 느낀 화교였다는 새로운 사실도 알게 되었다.
베트남전을 다룬 두꺼운 책에서도 접하지 못하는 통찰력을 이 책의 2장 "베트남 : '별 볼 일 없는 작은 나라'에 패배를 선언하다"는 제공한다.
베트남뿐 아니라 이 책에서 개별 국가로 예를 드는 아프가니스탄, 이라크, 베네수엘라, 미국 모두 '정치적 부족주의'란 프레임이면 많은 현상이 보다 정확하게 이해가 된다. 마치 고차 방정식을 푸는 새로운 마스터키가 생긴 듯하다.
왜 아프가니스탄이나 이라크는 미국을 불구대천의 원수로 생각하는지, 탈레반, 알카에다, ISIS는 어떤 방식으로 끊임없이 이어지며 서구의 시각에서 '테러리스트'에 불과한 이들 전사들이 그곳에서는 '힙'하고 '쿨'한 이미지로 소비되는지, 왜 알카에다와 ISIS는 서로 경쟁 관계가 되었는지, 시아파와 수니파의 오랜 반목의 원인은 무엇인지, 미국 눈에 가시 같은 존재 우고 차베스는 어떻게 베네수엘라의 국민 영웅으로 아직도 추앙받고 있는지...
오사나 빈 라덴이나 차베스는 정치적 부족주의의 달인이었다.
"극단주의를 파악하는 데서 핵심은 빈곤 자체가 아니라 집단 간 불평등이다." - P 144
전 세계 지식인들의 예상과 희망을 뒤엎고 왜 트럼프가 대통령이 되었는지 다시 한번 일목요연한 설명이 이어진다.
인구 비중이 줄어들고 있는 백인들은 불안하다. 언제부터인가 흑인은 물론, 넘쳐나는 아시아, 남미인들로 인해 유색 인종, 이민자가 다수인 사회가 되어 가는 분위기인지라 심지어 백인이 부당한 차별을 받는다는 의견마저 나온다.
저자의 분석에 따르면, 이젠 미국의 백인들은 두 개의 부족으로 분열돼 있는데, 하나는 소득 수준이 높은 고학력자, 전통 인텔리 계층인 WASP의 적자들로 주로 도시/연안 지역에 거주하며 민주당 지지자들이 많다.
다른 부족은 제조업에 종사하는 노동자 계급으로 '러스트 벨트'를 비롯한 중서부나 농촌 지역에 거주하며 상대적인 박탈감이 심하고 그 분풀이로 인종차별적인 경향마저 보이며, 앞에 언급한 인텔리 부족에 비해 수적으로 훨씬 다수다.
트럼프의 당선은 이들 노동자 계층 백인들이 자신들의 대변인으로 트럼프를 택한 결과다.
우리 모두가 목격하고 있듯이 트럼프는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행보를 보이고 있다.
"개인이 제정신이 아닌 것은 드물 일이지만
집단은 제정신이 아닌 게 정상이다." - 프리드리히 니체, P 128
오늘날 세계는 어떤 모습인가?
"전 지구적 평화와 번영은 커녕 1991년부터 2001년까지 10년 동안 인종 분쟁이 확산됐고 민족주의, 근본주의, 반미주의의 강도가 높아졌으며 징발, 축출, 재민족화 요규 등이 벌어졌고, 나치의 홀로코스트 이후 본 적이 없는 규모의 인종 학살도 두 번이나 있었고, 진주만 공격 이래로 미국 본토에 대해 벌어진 가장 큰 공격이 있었다." - P 125
이 책을 읽으니 그나마 아직까지 단일민족 신화가 굳건히 유지되는 한국이 다행이란 생각이 든다.
물론 우리나라도 양극화가 심해지고, 보수니 진보니 하는 갈등이 있지만 <정치적 부족주의>에 등장한 나라들의 사례에 비한다면 애교 수준이다.
좋은 책이란 모름지기 기존 지식의 얼음을 깨는 지적 쾌감을 선사하거나, 아니면 책을 읽은 이후 작으나마 행동의 변화를 불러일으키는 책이다. 에이미 추아 교수가 신뢰할만한 저자임을 재차 입증하는 <정치적 부족주의>는 전자의 예에 해당하는 탁월한 역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