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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자
울리히 알렉산더 보슈비츠 지음, 전은경 옮김 / 비채 / 2021년 3월
평점 :
한 남자가 있다. 그의 이름은 오토 질버만.
제1차 세계대전 참전용사이고, 사업체를 운영하고 하녀를 두고 살며, 아들은 프랑스로 유학보냈다. 한마디로 남부럽지 않은 사회적 지위와 부를 축적한 점잖은 중년 신사 독일인이다. 1938년 유대인 대박해의 단초가 되는 일명 '수정의 밤'이 벌어지기 전까지 말이다.
외모도 전형적인 아리안인처럼 생겼고, 독일인 부인과 사는 그는 유대인 혈통이 문제가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해 본 적이 없다. 그러나 단지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그들은 체포되고 공격당하는 신변의 위험에 처한다. 사태는 너무나 급박하게 변하고, 이 정도까지 악화되리라고는 미처 예상하지 못했다.
함께 참전했던 오랜 동업자는 갑자기 동업을 파기하고, '때는 이때다'라고 업자는 집을 헐값에 거의 뺏으려고 하고, 단골로 다녔던 호텔 매니저는 그를 쫓아내고, 질버만에게 신세를 졌던 부인의 오빠는 피신한 부인을 만나려는 질버만의 방문을 단호하게 차단한다.
가만히 집에 있다가는 무슨 일을 당할지 모르기에, 질버만은 동업자 베커에게 받은 일부 자금을 들고 독일의 여러 도시를 목적 없이 부유한다. 돈이 있고 유대인으로 보이지 않기에 그나마 가능한 옵션이다.
일반인들은 평생 모아도 만지기 힘든 거액을 들고 다니고 일등석이 익숙한 질버만이지만, 눈에 띄지 않기 위해 일등석에서 이등석으로, 이등석에서 다시 삼등칸으로 좌석을 고의로 다운그레이드한다.
헛헛한 마음을 달래줄 여인을 만나 억지로 찾아가도 보지만 남는 건 공허함뿐이고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다. 무엇보다 그는 일평생 독일인의 정체성으로 살았기에 어느 날 갑자기 자기에게 부여된 유대인이란 주홍글씨를 결코 인정할 수가 없다. 비슷한 처지의 유대인을 만나도 동지애보다는 저들 때문에 내가 이 고생이라는 이율배반적인 감정에 휩싸인다.
벨기에 국경을 넘으려는 마지막 희망마저 실패하고, 마지막 재산인 돈이 든 서류 가방은 기차에서 분실하고야 만다. 차마 목숨을 버릴 용기까지는 없는 그에게 남은 선택지는? 이런 상황에서 제정신이라면 오히려 이상하다.
"그건 그렇고, 나는 생각이라는 걸 이제 더는 하지 않습니다. 생각하는 습관을 버렸어요. 모든 것을 견디기에 가장 좋은 방법이지요." - 20쪽
"그저 다른 사람들처럼 평화롭게 살면서 자기 일을 하고, 저녁에는 맥주를 마시고, 멋진 카드놀이를 하는 것 말고는 바라는 게 없는데 말입니다." - 171쪽
질버만의 비극이 더욱 처연한 이유는 그가 상류층의 삶을 살았기에, 악화일로의 상황에서 오는 낙차가 훨씬 크게 다가오기 때문이다. 역사의 수레바퀴에 깔린 선택지 없는 개인의 삶은 작가 자신의 이력과 겹쳐지면서 커다란 감동으로 다가온다.
보슈비츠의 아버지 역시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던 성공한 유대인 사업가였고, 어머니는 정치인 집안 출신의 독일인이었다. 나치가 유대인의 재산을 몰수하는 뉘른베르크 법을 제정하자 보슈비츠 가족은 독일을 떠나 스웨덴, 노르웨이, 프랑스, 벨기에를 거쳐 영국에 정착한다. 이 와중에 보슈비츠는 수없이 경찰에 체포되고 추방되길 반복했다고 한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영국에 있던 그는 이번에는 독일 국적자라는 이유로 적국인으로 분류되어 격리되었다가 1940년 호주의 포로수용소로 옮겨졌다. 독일에선 유대인이라고 박해를 피해 타국을 떠돌았는데, 이제는 독일인이라고 수용소에 가야 하다니...
연배로 보자면 <여행자>의 주인공 질버만은 보슈비츠의 아버지의 모습이 투영된 듯하고, 보슈비츠는 소설 속 프랑스에서 아버지의 도피 방법을 알아보는 에두아르트에 가깝다. 하지만 보슈비츠의 삶 역시 '여행자'의 인생이었다. 그는 영국 귀환이 결정되어 배에 올랐다가, '최초 그에게 국적을 준' 독일 잠수함이 쏜 어뢰에 맞아 침몰해 사망했다. 그의 나이 불과 스물일곱 살이었다.
여행의 낭만이라고는 1도 없는 <여행자>를 읽으며, 과거 일제 치하 '조센징'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여기저기서 위협을 당하고, 목숨까지 읽었던 한민족의 아픈 과거가 떠오르기도 했다.
울리히 알렉산더 보슈비츠가 그냥 귀국선에서 사망한 27살의 꽃다운 청춘이었다면 아무도 기억하지 않았을 거다.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보슈비츠는 <여행자>를 남겼다.
그를 죽음으로 내몰았던 모국에서 <여행자>가 독일어로 출간된 건 2018년, 1938년 보슈비츠가 초고 <여행자>를 집필한 지 무려 80년이 지나서였다. 이 책이 바다 건너 눈밝은 출판사 편집자에 의해 한국에서도 2021년 출간된 것이다.
보다 널리 알려지고, 많은 이들이 읽어 반드시 기억돼야 할 소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