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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기를 생각하는 걷기 - 함부르크에서 로마까지, 산책하듯 내 몸과 여행하다
울리 하우저 지음, 박지희 옮김 / 두시의나무 / 2021년 6월
평점 :
60을 바라보는 독일의 언론인 울리 하우저(이하 '울리')는 오랜 기간 꿈꿔왔던 본인의 버킷리스트를 위해 회사에 6개월 휴직을 낸다. 그의 희망사항은 울타리를 넘어 다니고 주변을 구석구석 두 발로 밤늦게까지 누비던 어린 시절처럼 밖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싶다는 꿈이었고, 이를 위해 무작정 아무 생각 없이 '그냥 신선한 공기를 마시고 싶어서' 걷기 여행을 떠난다.
특별한 계획도, 뚜렷한 목적도 없다. 그냥 발길 닿는 대로 바람 부는 대로.
'바깥에 대한 갈증'으로 함부르크에서 출발한 울리의 여정은 100일간에 걸쳐, 스위스를 찍고 로마에서 교황을 만나는 것으로 끝난다.
걷는 건 아무나 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울리처럼 거의 국토 순례에 준하는 도보여행은 특별하다. 이 여정은 "산책하듯 내 몸과 여행하는" 길이며, 걷는 행위와 손에 비해 홀대받는 발에 대해 알아가는 자각의 과정이다. 그런 의미에서 <걷기를 생각하는 걷기>라는 국내판 책 이름은 매우 합당한 제목이다.
독일의 유명 주간지 <슈테른>에서 30년 가까이 기자로 일하고 있다는 저자는 언론인답게 매사를 '매의 눈'으로 보며 드러난 현상의 이면을 적확하게 본다. 스타 저널리스트라 그런지 방대한 인맥이 형성되어 있어 여행 중간중간 이들을 만나 잠시 동행하거나 도움을 받는다.
어떤 여행이든 '길 위에서'는 다양한 이야기가 피어난다. 차 안에서 보는 풍경과 자전거를 타며 보는 풍경이 같을 수 없다. 하물며 도보 여행이라면 더욱 풍성한 이야깃거리가 있으리라 기대해봄직한데 언론인 울리 하우저는 독자들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다. 독일의 역사와 전통, 철학이 '길과 사람'과 어우러져 곳곳에 무시로 출몰한다.
길에서 보내는 시간이 오래될수록 몸은 피곤할지언정 정신은 맑아져 쓰고 싶은 글감이 샘물처럼 솟아 올랐다고 하는데 그 결과물이 이 책으로 완성된 것!
"나는 수련 여행을 하고 있었다. 볼 것이 너무 많았고 배울 것도 너무 많았다. 독일의 자연에 대해, 사람에 대해, 그리고 과거와 현재에 대해 새롭게 알게 된 것이 많았다." - 143쪽
저자는 과거 분단 시기 동·서독을 교차해 걸으며 만감에 젖기도 하고, 이제는 거의 잊힌 독일의 옛길을 걷기도 하며 변해버린 과거의 추억을 아쉬워한다. 주로 아스팔트보다 오솔길을, 빌딩 거리보다 숲속을 걸었기에 멧돼지, 노루도 만나고, 진드기는 원하지 않는 동반자였다. 지인이 아니더라도 숲 주위, 작은 마을에서 만난 사람들은 대도시 사람 같지 않아 친절을 베푸는 데 거리낌이 없어 풍찬노숙에 큰 힘이 되어준다.
그가 철인이 아닌 이상 여정 내내 씩씩하게 걷는다는 건 불가능했다. 분리수거도 제대로 하려면 힘들듯, 걷기도 제대로 하려면 얼마나 힘든지 울리는 전문가들을 통해 깨닫는다. 그는 '통증을 잘 잊어버리는 재능이 있으며, '어슬렁어슬렁 거닌다''라는 평가를 받는다.
걷는 행위의 의미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게 된 울리는 발의 분신인 신발의 중요성을 새삼 느낀다. 그래서 여정의 중간중간 다양한 걷기 관련 고수들을 만나 한 수 배우는 과정이 매우 중요한 행사로 등장하는데, 그가 만난 이들은 보행 전문가, 의족 기술자, 신발 장인, 치료용 특수 신발 제작자, 물리치료사 등을 총망라한다. 전문가들의 대담을 통해 '걷기와 신발의 모든 것' 같은 테마의 책을 써도 좋을 정도다. 최근 유행하는 특수 소재의 메이커 운동화들은 최악이라고!
"그건 아마 걷기가 몸을 움직이는 가장 좋은 방식이라서 그렇겠지. 일정한 속도로 걷다 보면 걸음과 몸의 다른 활동이 함께 하나의 리듬을 만들게 돼. 호흡과 심장박동, 혈액의 흐름 등이 말이야." - 151쪽
"어쩌면 누군가가 걷기란 무척 좋은 거라고 알려주기도 전에 이미 우리 내면에는 걷고 싶어 하는 정신이 자리하고 있었는지도 몰라. 왜냐하면 우리 인간은 앉아 있기보다는 걷도록 만들어진 것 같거든. 우리 신체는 걷기에 적합하지, 오랜 시간 앉아 있는 것에는 적합하지 않아. 만약 그렇지 않다면 걷기보다는 앉아 있기 위한 근육이 더 발달했을 거고, 오래 앉아 있기 때문에 생기는 질병과 고통은 생기지도 않았을 거야." - 152쪽
걷기는 누구나 쉽게 할 수 있는 운동의 마지노선이다. 하지만 학창 시절을 거쳐 직장 생활을 하면서 우리는 걷기의 소중함을 잊었다. 현대에는 모니터 아니면 스마트폰의 노예가 되어 엉덩이만 무겁고, '글루테우스 막시무스'라는 근사한 이름의 엉덩이 근육은 의자에 매몰됐다.
지나치게 편리한 환승 제도는 예전 같으면 걸어 다녔을 한 정거 거리마저 절대 안 걷게 만들었고, 지하철 계단마저 에스컬레이터로 교체되고 있는 중이다. 3번 출구는 계단, 4번 출구는 에스컬레이터라면 대부분 사람들은 4번으로 올라와 3번 방향으로 이동한다.
이와 반대되는 현상으로 제주 올레길 이후 '온 국토의 둘레길화'(化)라고 명명해도 좋을 만큼 곳곳에 둘레길이 들어서고 있다. '아름다운 강산' 대한민국에 걸을만한 둘레길은 지천이다.
독일 중년 언론인의 특별한 걷기 여행 <걷기를 생각하는 걷기>는 직립 보행이 인간에게 얼마나 큰 행운이며, 많은 것을 줄 수 있는가 웅변하는 사색적인 걷기 예찬이다.
이 책을 읽으며 울리의 행보를 따라가는 것보다, 중간에 책을 덮더라도 밖으로 나가 어디라도 걸어 다니길 저자는 원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