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는 날마다 축제
어니스트 헤밍웨이 지음, 주순애 옮김 / 이숲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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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에서 미끄러질 때 진실한 문장 한 줄은 우리를 붙잡아 주는 가장 작은 손잡이가 된다.


헤밍웨이는 파리에 살며 날마다 축제였다 말하지만, 그에게 축제의 북소리는 늘 조용한 곳에서 시작된다. 벽난로 앞에서 귤껍질을 눌러 파란 불꽃을 튀기고, 창가에 서서 지붕들을 내려다보며 스스로에게 속삭이던 주문. '네가 알고 있는 가장 진실한 문장 한 줄을 써봐.' 이 한 줄은 문학의 비밀이자, 동시에 삶의 기술이었다. 문장을 쓴다는 건 결국 마음의 체온을 측정하는 일이고, 우리가 견딜 수 있는 온도로 세계를 다시 데우는 일이니까.


어니스트 헤밍웨이가 누구인가. 전쟁의 파편을 몸에 박아 두고도 사슴의 발자국처럼 간결하게 걸어가는 문장을 쓴 사람. 용기와 절제, 명예와 상처의 무게를 몇 개의 동사로만 지탱하려 한 사람. 그의 작품은 '보이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것이 더 크다'는 빙산의 윤리를 따른다. 그러나 이 회고록, 파리는 날마다 축제에서는 그 아래 잠긴 덩어리가 빼꼼하니 얼굴을 비친다. 젊은 부부의 가난한 식탁, 실비아 비치의 서점에서 건네받은 책의 종이 냄새, 센 강변을 걷다 마주친 봄의 숨결. 이 책은 '가난했지만 행복했던' 기억의 나룻배를 타고, 우리가 언젠가 놓친 생의 리듬을 다시 건너게 한다.


나는 밑줄을 따라 그의 파리를 거닐었다. 강가에서 낚시꾼이 시간을 낚아 올리고, 바지선들이 느리게 계절을 밀어 나르는 풍경 앞에서 그는 '혼자가 아니다'라고 말한다. 도시의 숲—플라타너스와 느릅나무, 군데군데 서 있는 미루나무—사이에서 봄은 눈에 보일 만큼 가까워지다가, 어느 밤 따뜻한 바람 한 점에 갑자기 도착한다. 봄은 어떤 문장과도 닮아있다. 이미 우리 곁을 맴돌면서도 한 단어 때문에 멈칫하고, 그 단어가 제자리를 찾는 순간 비로소 ‘와 있는’ 계절이 된다. 그가 두려워한 건 봄이 오지 않는 것이 아니라 '오지 못할 뻔했다'는 상상 자체였다. 삶은 종종 그 상상 하나 때문에 견디기 어렵다. 그러나 헤밍웨이는 봄을 믿었고, 봄을 믿는 마음으로 문장을 믿었다.


그 믿음에는 혹독한 윤리도 붙어 있지. 그는 '소설을 생계로 쓰지 않겠다'고 결심한다. 쓸 수밖에 없는 순간까지 기다리겠다고. 압력이 고인 뒤에야 문장을 돌리겠다고. 어쩌면 우리도 사랑이든 꿈이든 쫓기는 마음으로 하지 않겠다고 맹세해야 하는지 모른다. 하지만 삶은 늘 스스로 세운 원칙을 시험한다. (기독교에서는 시험에 든다 고도 하지) 그는 사랑 앞에서 두 갈래, 아니 세 갈래의 길에 서고는 '끔찍하게도 행복했다'고 고백한다. 젊음은 종종 옳고 그름의 표지판을 잃은 교차로이고, 파리는 '아무것도 단순하지 않은' 도시였다. 가난도, 갑자기 생긴 돈도, 달빛 아래의 숨소리도. 그러니 정직함은 사건의 결론이 아니라 복잡함을 있는 그대로 적어 내려가는 태도다. '한 줄의 진실'은 결국, 내가 복잡하다는 진실에서 시작된다.


그는 도서관에서, 더 정확히 말해 실비아 비치의 서점에서 글쓰기의 날을 세운다. 체호프 앞에서만큼은 칼을 든 외과의사 같았고, 맨스필드를 향해선 독하게 솔직했다. 도스토옙스키를 두고 '다시 읽을 수만 있다면 참 행운'이라면서도 '결국 화를 낼 것'이라며 말장난을 걸었다. 이 시니컬한 판단들은 그의 야성만을 말해 주지 않는다. 자기 문장에 부여한 기준의 높이를 암시한다. 좋은 문장은 사람을 고치되 과하게 절개하지 않고, 도덕을 품되 설교하지 않으며, 감정을 울리되 독주처럼 취하게 하지 않는다. 체호프가 '투명함만 뺀 물'이라면, 헤밍웨이는 아마 표면은 차갑고 속은 끓는, 불이 스친 물에 가까웠다.


헤밍웨이의 이야기에는 사람의 그림자도 비친다. 누군가의 사악함을 '명마의 혈통처럼 드러난다'고 적으면서, 어떤 이는 그저 '못생겼을 뿐'이라고 한다. 기묘한 구획, 어딘가 무정한 구분. 우리는 종종 못생김을 사악함으로 오해하고, 매끈함을 선량함으로 오인한다. 헤밍웨이의 칼날 같은 문장은 그런 착시를 찢는다. 동시에 그는 스스로의 허영과 약점도 숨기지 않는다. 낯선 여인의 순간을 '당신은 내 것이고, 파리도 내 것이고, 나는 이 공책과 연필의 것'이라고 속삭일 때, 소유의 망상과 헌신의 진실이 한 문장 안에서 충돌한다. 우리가 가진 것보다 우리를 가지고 있는 것들이 있다. 사랑, 도시, 그리고 문장.


포기하는 것에 대해 그는 담담했다. 좋은 것을 포기하면 허전함이 남고 그 빈 곳은 더 좋은 것으로만 채워진다고. 나쁜 것을 포기하면 공허는 저절로 사라진다고. 삶은 장바구니가 아니라 서랍이다. 아무거나 던져 넣으면 엉켜 버리고, 비우면 비로소 필요한 것이 제자리를 찾는다. 허전함은 삶이 더 나아질 여백이라는 뜻이다. 우리는 종종 그 여백을 두려워하지만 그 틈으로 봄이 들어온다. 그리고 봄은 축제의 시작을 알린다. 헤밍웨이가 말하는 '움직이는 축제'는 밤마다 불꽃놀이를 하는 도시가 아니라, 마음이 이동할 때마다 따라오는 은밀한 환영식이다.


이 책은 헤밍웨이 사후에 정리되어 1964년에 처음 나오고, 2010년에 손자인 숀 헤밍웨이가 미완성 원고를 덧대 복원했다. 결말을 이렇게도 저렇게도 써 본 흔적. 삭제선의 먼지, 후회의 체온이 고스란하다. 이 불완전함은 책의 결점을 드러내기보다는 틀리고 고쳐 쓰고 흔들리는 살아 있는 기억의 방식을 증언한다. 완벽이 아니라 수정이 우리를 구한다는 사실. 그 자체가 위로다.


결국 이 책에서 건져 올린 것은 파리 관광 지도가 아니라 하루를 건너는 방식이다. 일이 막히면 귤껍질의 냄새로 시작하는. 불 위에 떨어지는 작은 주황색 한 방울을 눈으로 본 뒤 네가 아는 가장 진실한 한 줄을 적자. '오늘은 바람이 나를 데리고 걷는다.' '나는 누군가를 사랑하고, 다른 누군가는 멀어진다.' '봄은 오지 못할 뻔했지만, 결국 온다.' 이렇게 한 줄을 만나면 다음 줄은 저절로 오고, 문장은 문장끼리 손을 잡는다. 그 손잡이들이 이어져 다리 하나가 놓이고, 우리는 그 다리를 건너 어제보다 멀리 간다.


나와 당신의 문장은 그렇게 만난다. 당신이 쓴 한 줄의 진실이 내 안의 봄을 데려오고, 내가 쓴 한 줄의 진실이 당신의 밤을 덜 춥게 한다. 헤밍웨이가 젊은 날 파리에서 배운 것도 아마 이 간단한 비밀이었을 것이다.


축제는 장소가 아니라 문장이다.

축제는 돈이 아니라 정직이다.

축제는 화려한 악기가 아니라 '걱정하지 마'라고 스스로에게 건네는 낮은 목소리다.

우리가 매일 한 줄씩 진실에 도착한다면 파리는 우리 곁에서 날마다 축제로서 열릴 것이다.

그리고 그때마다 우리는 혼자가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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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담과 그림자 말들의 흐름 8
김민영 지음 / 시간의흐름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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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담은 우리를 다치지 않게 가까워지게 하고, 또 다치지 않게 멀어지게 하는 거리의 기술이다.


김민영의 ‘농담과 그림자’를 읽으며 내가 가장 먼저 붙잡은 말은 이것이다.

'농담의 본질은 거리에 있다.'

사람과 사람 사이, 사람과 상황 사이를 미세하게 재단하는 촘촘한 간격. 농담이란 결국 그 간격을 손끝으로 더듬으며 서로의 모서리에 긁히지 않도록 매만지는 일이다. 적당히 웃기고, 적당히 가볍고, 적당히 비켜간다. 그 ‘적당히’의 감각이야말로 이 책이 말하는 세계의 윤리다. 너와 나 사이에 다리 대신 가느다란 줄을 걸고 건너는 법. 한 발 헛디디면 떨어질 수 있으니 농담은 사실 꽤 진지한 균형 감각이다.


저자는 공장에서, 길에서, 교실에서, 오가는 길의 창가에서 세계를 본다. '오가는 길 위에서 떠오른 몇 개의 장면들로 이 책을 썼다'는 고백처럼, 그의 시선은 새로운 장소를 만들기보다 이미 있는 자리의 기척을 오래 듣는다. 긍정도 부정도 아닌 태도. 냉소 바로 전의 유머. 그러니까 그는 현실을 변호하지도 고발하지도 않은 채 그것을 견딜 수 있게 만드는 아주 얇은 농담을 건넨다. 한밤중에 전화를 걸어도 '괜찮아'라고 말해줄 사람 같은 문장들. 이 책이 지침서가 아니라 술친구에 가깝다는 소개는 정확하다. 해답 대신 체온, 처방 대신 체류.



나는 일상에 대한 그 기술에 오래 머물렀다.

'일상은 단단한 것이다. 같은 시간을 살아가는 타인의 아침이 막연하고 낯설 만큼, 각자의 일상이란 견고한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어느 날 불쑥 나타난 작은 균열 하나에 쉽게 무너지는 것이기도 하다. 별다른 일 없이 반복되는 오늘이 내일로 이어지리라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다. 너무나 단단해서 연약할 수밖에 없는 일상을 흔들림 없이 지키는 일은 그래서 필사적이고 절박한 일이다. 일단 쳇바퀴에 올라탄 이상 쉬지 않고 달려야만 하고 그것이 쳇바퀴를 유지하는 유일한 방법일 뿐이다.'


너무 단단해서 연약할 수밖에 없는 것, 그게 우리의 하루다. 단단함과 연약함이 한 몸인 모순 앞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어쩌면 쳇바퀴처럼 도는 내 인생을 그저 비난할게 아니라, 그 속도를 ‘나의 보폭’으로 조정하는 일인지도 모른다. 내가 줄곧 실패했던 건 쳇바퀴가 싫어서가 아니라 내 발의 호흡을 잊고 달렸기 때문이었다. ‘달리면 유지된다’는 말은 곧 ‘멈추면 무너진다’는 협박이지만, 작가의 문장은 균열을 무서워하지 말자고 속삭인다. 무너질 수 있다는 사실이 우리를 더 조심스럽게, 서로에게 더 다정하게 만든다고.



이 책에서 가장 섬세한 도구는 말하지 않은 말이다.

'입 밖으로 꺼낸 말보다 속으로 감춘 말이 언제나 더 많다. 늘 그렇다. 그렇기 때문에 당신이 무슨 말을 했는지보다는 무슨 말을 하지 않았는지가 항상 더 중요하다. 말하지 않음으로써 말해지는 수많은 의미들. 누군가의 말을 듣는다는 것은 그런 것이다. 저 말들이 교묘하게 피해 가고 있는 어떤 지점들을 찬찬히 들여다보는 것. 말의 빈자리, 도넛의 구멍을 찾는 것. 곳곳에 감춰져 있는 말의 여백에 따라 우리가 뱉은 말은 진실이 되기도, 진실처럼 보이려 애쓰는 거짓이 되기도, 허울에 감춰진 욕망이 되기도 한다.'


농담은 대체로 그 구멍을 향해 던져진다. 정답을 비껴가며 생기는 여백, 웃음이 새어 나오는 틈. 생각해 보면 관계란, 결국 서로의 말하지 않음 들을 보호하는 계약이다. 내가 침묵으로 지킨 것이 너에게 상처가 되지 않도록, 네가 삼킨 말이 내게 무심한 칼이 되지 않도록. 이 책은 그 여백을 돋보기로 들여다본다. 그래서 그의 농담은 누군가를 이기려는 재치가 아니라, 다치지 않게 하려는 주의다. 재치가 아니라 주의. 이 감각은 문장과 문장 사이에도 번진다. 마침표를 찍을 때조차 그는 독자에게 숨을 쉬라고, 너무 빨리 결론으로 달려가지 말라고 괄호를 열어 둔다.


결핍에 관해서도 단단히 말한다. '결핍을 대하는 태도는 결국 삶을 대하는 태도'라고. 결핍을 흉터로만 대할 것인지, 수납공간으로 대할 것인지, 그 차이가 우리의 시간을 만든다. 나는 이 문장을 읽다 말고, 오랫동안 비어 있던 책장 한 칸을 떠올렸다. 채워야지, 채워야지 하면서도 비워둔 칸. 왜 그랬을까. 아마 그 빈칸 덕분에 방 안의 공기가 돌았기 때문이겠지. 결핍을 대하는 우리의 습관—허기를 몰아 채우거나, 빈자리를 제 자리에 두거나. 김민영은 후자를 조용히 편든다. 비어 있음 덕분에 들어오는 것들, 늦은 오후의 그림자, 초여름의 바람, 낯선 웃음. 결핍을 통로로 대하는 태도는 삶을 급조된 완성의 전시장으로 만들지 않는다. 아직, 다, 아닌 채로 살아도 되는 허락.


저자가 사랑을 부를 때도 마찬가지다. '연애는 몇 개의 장면들을 주섬주섬 그러모아 놓는' 일이라고, 그는 무심히 말한다. 우리는 흔히 정의를 먼저 원하지만, 사랑은 정의를 비웃는다. 장면들의 다발. 창틀에 걸린 젖은 수건, 문턱에서 멈춘 미안함, 다투고 난 뒤 같은 방향으로 걷는 두 사람의 발끝. 정의보다 장면이 정확하다는 걸, 우리는 뒤늦게 안다. 그래서 '낮의 바다는 살아 있는 것 같았고, 밤의 바다는 삶을 삼킬 것 같았다'는 그 짧은 문장이, 연애의 전 생애를 한 번에 건드린다. 빛과 어둠의 심장 박동, 두려움과 생동의 교차. 사랑을 구한다는 건 어느 쪽 바다를 볼지 고르는 일이 아니라 그 변화를 견디는 일에 가깝다는 것을.


희망과 절망에 대한 그의 태도는 잔혹할 만큼 소박하다. '절망은 허망이다. 희망이 그런 것처럼.' 냉소인가. 아니다. 나에게 이 문장은 방향을 잃지 않기 위해 지도에만 집착하지 말자는 충고처럼 들렸다. 희망과 절망은 거대한 표지판이고, 우리는 그 사이에서 밥을 먹고 설거지를 하고, 믿을만한 타인을 사랑하고, 서로에게 농담을 건넨다. 표지판을 신성화하면 길을 놓친다. 그러니 표지판은 이따금 보되, 내딛는 내 발의 감각을 믿자. 오늘의 소소한 웃음이 내일의 삶을 지탱하는 데 더 유효할 수 있다. 거창한 약속들이 실패했을 때도 작은 농담은 남는다. 산 자의 유머. 살아내려는 사람의 미세한 기술.



내가 웃음 뒤로 오래 생각한 문장은, 펑크에 대한 빌리 조 암스트롱의 대답이었다.

“누군가 펑크가 뭐냐고 물으면 나는 쓰레기통을 걷어차며 ˝바로 이런 거야˝라고 말할 거야. 그럼 그 사람이 다시 쓰레기통을 발로 차며 이게 펑크냐고 물으면 ˝아니 그건 유행을 따라 하는 거야˝라고 말할 거야.”


농담도 그렇다. 살아 있는 농담은 쓰레기통을 걷어차는 발의 온도를 가진다. 흉내 내는 농담은 유행의 표정을 갖는다. 이 책의 농담은 후자가 아니다. 저자는 무엇을 깨부수는 제스처보다, 왜 걷어차고 싶은지의 정황을 오래 보여준다. 억울함, 고단함, 지루함, 우스움—그 감정들의 뒤엉킴이 농담의 연료임을, 그는 그대로 보여준다. 그래서 그의 유머에는 품이 있고, 어둠에는 윤리가 있다.


저자는 ‘말들의 흐름’이라는 이름에 어울리게 말의 물살을 믿는 사람이다. 문장을 세게 밀어붙이지 않고, 흐르게 둔다. 공장 노동자의 몸, 교실의 공기, 밤 버스의 창—그 틈으로 스며드는 말들. 그래서 이 책은 펼칠 때마다 다른 장소가 열린다. 어느 날은 퇴근길 담장의 회색이 진하게 보이고, 어느 날은 빈 교실의 흰빛이 날카롭다. 농담과 그림자 사이를 오가는 그의 걸음은 빠르지 않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아마도 그 느림일 것이다. 감정이 잦아들 때까지 기다릴 줄 아는, 말이 스스로 말이 되게 두는 속도.


농담이 생활화되어 고착된 나 이기에, 핀잔도 꾸지람도 헛헛함도 잘 삼키지만. 이 책 덕분에 삶의 기술을 하나 더 배웠다. 누군가와 가까워지고 싶다면 농담을 하자. 그 농담의 목적을 웃기기가 아니라 다치지 않기에 두자. 누군가와 멀어지고 싶다면 침묵하되 그 침묵의 모양을 무시가 아니라 여백으로 만들자. 단단한 일상을 사랑하되 그 단단함이 부서질 때 나를 탓하기 전에, 부서짐이 나를 더 유연하게 만드는지를 보자. 결핍을 채우려 하기 전에 그 빈칸을 통해 무엇이 드나드는지를 먼저 듣자. 그리고 무엇보다, 제때의 농담을 잃지 말자.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서로를 잃지 않는 방식이니까.


첫 문장을 다시 불러와 끝을 맺는다. 농담은 거리의 기술이다. 그리고 그림자는 그 거리를 걷는 우리의 모양을 비춘다. 가까워질 때의 굴곡. 멀어질 때의 음영. 저자의 문장들 덕분에 나는 오늘도 조금은 더 조심스럽고, 조금은 더 다정하게, 당신과 나 사이의 줄을 건넌다. 웃음은 가볍지만, 건너는 일은 언제나 숙연하다. 이 숙연함을 알고 웃는 사람들 사이에, 우리의 작은 공동체가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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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애들 - 최고 학력을 쌓고 제일 많이 일하지만 가장 적게 버는 세대
앤 헬렌 피터슨 지음, 박다솜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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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게을러서 망가진 게 아니라 남의 꿈으로 설계된 트랙에서 너무 오랫동안 달렸다. 이제는 서로의 시간을 지켜 주며 그 트랙에서 내려오는 법을 배워야 하지 않을까.


나와 당신의 문장은 오늘도 같은 페이지에서 만날 것이다. 앤 헬렌 피터슨의 『요즘 애들』은 내게 '반드시 이렇게 살 필요는 없다'라는 작은 구급약을 건넨다. 낡아 빠진 위로 같지만 이 책의 문장은 도리어 차갑고 맑다. 누가 우리에게 이 속도를 강요했는지, 누가 우리의 피로를 수익으로 환전했는지, 누가 '하면 된다'를 '해야 한다'로 단단히 굳혀 우리 등을 떠밀었는지. 이 책은 집요하게 묻는다.


앤 헬렌 피터슨은 버즈피드의 수석 작가였고 지금은 뉴스레터 ‘컬처 스터디’에서 대중문화와 정치, 노동, 돌봄의 균열을 집요하게 파본다. 2019년, 조회수 700만 회를 넘긴 칼럼 '밀레니얼은 어떻게 번아웃 세대가 되었는가'의 연장선이 된 이 책에서, 그는 자기 계발 대신 구조를, 개인 탓 대신 맥락을 들이민다. 이 책이 관통하는 태도는 명징하다. 세대를 선동하지 않겠다. '요즘 애들'의 애들이 아니라 '요즘'이라는 구조에 방점을 찍는다.




내가 밑줄 그은 문장들은 대체로 염치없을 만큼 솔직했다.

실로 밀레니얼은 부머의 제일 끔찍한 악몽이다. 왜냐고? 대체로 한때 그들이 가장 좋은 마음으로 키워낸 꿈이, 바로 우리이기 때문이다. 부머와 밀레니얼에 대한 대화에서 이 내용은 자주 생략된다. 어렸을 때부터 베이비붐 세대는 말 그대로 우리의 부모, 교사, 코치였다. 비유적으로 표현하자면 그들은 우리를 빚은 이데올로기와 환경을 만든 사람들이다. 따라서 그들은 우리의 현재 상황에 대해, 다방면으로 책임을 져야 한다.


부모, 교사, 코치로서 베이비붐 세대는 우리를 빚은 이데올로기와 환경을 만들었다. 그러니 책임의 일부는 그들에게 있다—이 문장은 비난의 묵직한 돌을 던지기보다 경로를 그려 준다. '하면 된다'의 시대를 믿었던 사람들의 선의를, 그리고 그 선의가 만든 트랙이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 지금을.


그 트랙 위에서는 시간을 들인 사람이 성실한 사람이다. 출근이 더 빠를수록, 퇴근이 더 늦을수록, 더 그럴듯한 헌신처럼 보인다. 작가는 말한다. 더 긴 근무시간은 생산성이 아니라 '헌신을 표현하는 다른 방법일 뿐'이라고. 사무실에서 오래 머무르는 일은 종종 무언의 자랑이 되고, 그 자랑은 금세 기준이 된다. 기준은 타인을 불안하게 하고, 불안은 번아웃으로 직행하지. 나도 예전에 남아서 불을 끄는 마지막 사람이 칭찬받는 회사를 다녔다. 이상한 일이다. 누구나 쉬어야만 하는 밤이, '내가 이만큼 남았다'를 인증하는 무대가 되다니.


번아웃의 바닥에는 구조가 있다. 피터슨은 '아웃소싱은 직원에게 안정적인 임금을 제공하지 않는다'고 적는다. 월급봉투는 얇아지고, 스케줄은 뒤틀리고, 복지는 애매해진다. 그 대신 주식시장의 그래프는 올라간다. 선택지가 부족한 사람들 위에 설계된 구조—그 설계는 몇몇의 부를 높이고, 다수의 삶을 얇게 만든다. 그래서 '노동자들은 게을러지지 않았고, 멀티태스킹 능력이 떨어진 게 아니다.' 조건이 나빠졌을 뿐이다. 나빠진 조건 속에서 우리는 오히려 자신을 탓하는 법을 먼저 배웠다. '아마 내가 더 열심히 하면 될 거야.' 이 착각이야말로 구조가 개인에게 이관해 놓은 가장 값싼 비용이다.



여가의 장면에서도 구조는 작동한다.

우리는 TV를 보고, 우리 몸을 억지로 쉬게 하기 위해 마약을 더 많이 하고 술을 마시고, 늦어서 미안해요, 집에 있는 게 더 좋거든요라고 적힌 티셔츠를 입고 내향적 행동을 추앙한다. 우리는 지금 이대로도 괜찮다고 느끼려 애쓴다. 하지만 내가 떨칠 수 없는 생각은 우리에게 더 많은 시간이 주어진다면, 지금 우리가 여가 시간에-안 그래도 부족한데 뭘 하겠다는 과욕으로 더욱 피로해지는 시간에-해온 것과는 다른 일을 했으리라는 것이다. 우리의 가장 좋은 자아는, 가장 호기심 많고 창의적이고 온정적인 자아는, 우리가 아는 지금 삶의 표면 바로 아래, 생각보다 가까운 곳에 있다. 우리에겐 그것들을 현실로 데려올 공간과 시간, 휴식이 필요할 따름이다.


우리에게 조금만 더 시간이 있었다면, 우리는 여가를 피곤하게 만드는 방식 대신 다른 걸 했을지도 모른다. 가장 호기심 많고 온정적인 자아는 놀랍게도 가까이에 있다. 그 자아에게로 가는 길은 더 많은 앱이나 루틴이 아니라, 아주 둔하고 느린 시간이다. 무언가가 되어 가는 시간이 아니라, 잠시 아무것도 되지 않는 시간. 우리는 그 시간만큼은 유능하지 않아도 괜찮다.



돌봄의 시간은 특히 불균형하다.

유치원에 다닐 연령의 자녀를 둔 워킹 맘은, 밤중에 아이가 깼을 때 같이 깰 가능성이 아버지보다 2.5배 높다. 유아를 키우는 아버지는 주말에 ‘여가’로 보내는 시간이 어머니보다 두 배 길다. 아기가 태어난 지 얼마 안 됐는데도 불구하고 가을에 주말마다 풋볼 경기를 보고 야외 파티까지 참석했던 친구가 생각난다. 그는 아내가 그런 일정을 토요일과 일요일 이틀 내내 보내지 못하게 한다고 화를 냈었다. 문제는 아버지가 여가 시간을 누릴 자격의 유무가 아니다. 문제는 어머니의 여가 시간이 거의 없다시피 한데도 많은 아버지가 본인의 여가 시간을 마땅히 누려야 할 권리로 간주한다는 것이다.


(요즘은 그렇지 않으리라 믿지만) 많은 아버지에게 여가는 권리로, 많은 어머니에게 여가는 불법처럼 배당된다. 이 불평등은 도덕의 문제가 아니라 시간의 배분, 곧 삶의 질서 문제다. '당신도 쉬어.' 이 한마디가 가정에서, 팀에서, 사회에서 동시에 필요하다. 누가 쉼을 누릴 권리가 더 많은가가 아니라 쉼이 누구에게 가장 먼저 삭제되는가를 묻는 일.



피터슨은 자본주의의 얼굴도 벗긴다.

자본주의는 절대 자애롭지 못하다. 자본주의를 무조건 칭찬하도록 길러진 미국인들에겐 그런 말을 듣는 것도,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어렵겠지만 이는 엄연한 사실이다.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성장하는 것이 불변의 목표라면, 생산성이 향상되고 이윤이 증가하는 한 직원들을 기계 부품처럼 착취해도 된다. 그러나 대공황 후부터 1970년대 침체 전까지 자본주의는(적어도 미국에서는), 다소 인간적이었다. 여전히 불완전하고 배타적이며 시장의 변덕에 끌려다녔어도, 인간적이었다. 이 시기의 존재는 우리가 미래에도 반드시 지금처럼 살아갈 필요는 없다는 증거다.
그 시기 자본주의가 (약간) 더 노동자 친화적이었던 건 기업이 양심의 가책을 느껴서가 아니었다. 노동조합과 정부 규제로인해 당시 기업들은 고용인들을 사람답게 대해야만 했다. 아플 수도 있는 사람, 자녀가 있는 사람, 일하다가 다치기도 하는 사람, 일자리 하나에 쓸 만큼의 에너지만 가진 사람, 그러니 일자리 하나만 가지고도 먹고살 수 있는 임금을 받아야 하는 사람, 일 바깥에도 인생이 있는 사람으로 대우해야 했다.
그러나 기존 규제를 회피할 방법들과 함께 찾아온 규제 완화와 반노조 입법은, 자본주의를 가장 무자비한 모습으로 되돌려놓았다. 경제는 번창하지만 빈부격차는 점점 더 커지고 있으며 (기업이 비교적 자애로웠던 시기에 형성된 중산층은 꾸준히 움츠러들고 있다. 월스트리트를 연구한 인류학자 캐런 호 Karen Ho는 이렇게 설명한다. ˝근래 자본주의의 역사에서 독특한 지점은, 기업에게 인식되는 이익과 직원 대다수에게 돌아가는 이익이 완전히 분리되었다는 것이다. ˝


'자본주의는 절대 자애롭지 못하다.' 그러나 한때는, 노동조합과 규제가 그 자본을 사람 쪽으로 기울게 했다. 기업이 양심에서가 아니라 제도에서 사람을 대우하도록 되어 있던 시절. 그때는 '일 바깥에도 인생이 있는 사람'이라는 사실이 제도에 새겨졌다. 규제가 완화되고 노조가 약화되자 기업의 이익과 다수의 삶이 갈라졌다. 그래프는 오른다. 삶은 내려앉는다. 이 간극이 번아웃의 온도다.



이 문장에 오래 머물렀다.

번아웃을 해결하려면, 당신의 하루를 채우는 것들이 - 당신의 인생을 채우는 것들이 - 당신이 살고 싶은 인생, 당신이 찾고 싶은 삶의 의미와 결이 다르다는 착각을 지워야 한다. 번아웃상태가 단순한 일중독 문제가 아니라고 이야기하는 이유다. 번아웃은 자아로부터의, 욕구로부터의 소외다. 당신에게서 일할 능력을 뺏는다면, 당신은 누구인가? 더 발굴해 낼 자아가 남아있을까? 아무도 당신을 지켜보지 않을 때, 제일 저항이 적은 경로를 선택하지 않아도 될 때, 당신이 뭘 좋아하고 뭘 좋아하지 않는지 알고 있는가? 앞으로 나아가지 않는 방향으로 움직이는 법을 아는가?
자신에게 다시금 전념하고 자신을 아끼는 것은 이기적이지도, 자기중심적이지도 않다. 도리어 이는 가치의 선언이다. 당신이 일을 하고 소비하고 생산해서 가치 있는 게 아니라, 당신이 그저 존재하기 때문에 가치 있다는 선언이다. 이것이 번아웃을 떨치고 일어나 다시 그 수렁으로 빠지지 않기 위해 기억해야 할 사실이다.


'번아웃은 자아로부터의, 욕구로부터의 소외다.' 그래서 해결은 더 잘 일하기가 아니라 다르게 존재하기에서 시작한다. '당신이 그저 존재하기 때문에 가치 있다.' 이 문장을 읽는 순간, 내 오래된 버릇에 눈이 간다. 내가 얼마나 쓸모 있는지를 증명한 뒤에야 스스로에게 쉬어도 좋다는 허락을 받는 버릇. 존재는 허락이 아니라 선언이어야 한다. '오늘, 아무도 지켜보지 않을 때,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할 수 있는가?' '앞으로 나아가지 않는 방향으로 움직일 수 있는가?' 이 질문들은 몸에 너무 크지만, 천천히 맞춰 입을 수 있는 옷 같다.



그리고 가장 고독한 설득이 이어진다.

모든 개인이 자신을 나머지 사회 구성원들과 제로섬 전투를 벌이고 있는 독립 계약자로 간주할 때, 유대는 혐의가 된다. 개인이 일하지 않고 보내지 않는 모든 순간이, 다른 누군가가 앞서 나가서 그를 불리하게 만든다는 의미가 된다.


서로의 쉬는 순간이 질투의 사유가 되는 사회. 휴가를 쓰는 동료에게 마음속으로 벌점을 주는 우리. 피터슨이 제안하는 탈출구는 단순하다. 제도가 아니라 연대. 자기 돌봄이라는 몽글몽글한 단어가 제도와 연대를 대체할 수 없다는 고백. 우리는 서로에게 '너의 쉼이 내 불이익은 아니야'라고 말하는 법을 다시 배우는 중이다.




『요즘 애들』 은 밀레니얼의 궤적을 연대기처럼 따라가되 심리를 해부하기보다는 구조의 계보를 그린다. 교육의 트레드밀, 감시되는 업무, 아웃소싱과 금융화, 워라밸에 대한 강박, 젠더화된 돌봄, 셀프헬프의 한계, 그리고 연대의 가능성. 인터뷰와 사례는 구체적이고 문장은 단호하다. 가장 인상 깊었던 지점은, 이 책이 우리를 ‘불쌍한 세대’로 호명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피터슨은 우리가 처한 설계의 모습을 정확히 보여준 뒤 한 발 물러서 말한다.


'이렇게 살 필요는 없다.'


좋은 삶은 효율이 아니라 호흡의 일이다. 당신이 잠깐 멈춘다고 뒤처지지 않는다. 그 시간에 누구도 당신을 벌하지 않는다. 당신은 그저 존재하므로 이미 충분하다. 그러니 오늘은 이 문장을 서로에게 건네자. 우리에겐 더 느린 속도를 선택할 권리가 있고 서로의 여가를 의심하지 않을 예의가 있으며, 공동의 시간을 다시 설계할 상상력이 있다. 번아웃은 개인의 결함이 아니라 사회가 잘못 설계한 구조의 문제다. 설계는 바뀔 수 있고, 그 첫 도면은 여기서 시작한다.


'반드시 이렇게 살 필요는 없다.'


오늘은 이 문장을, 나와 당신의 문장으로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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흰 고래의 흼에 대하여
홍한별 지음 / 위고 / 202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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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의 빈 공간에서 배우는 사랑의 문법

우리가 서로에게 건네는 모든 말이 결국 번역이라면, 완벽한 소통이란 애초에 불가능한 꿈일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계속해서 말을 걸고, 듣고, 이해하려 애쓰는 걸까. 홍한별의 『흰 고래의 흼에 대하여』를 읽으며 나는 번역이 단순히 언어를 옮기는 기술이 아니라 불완전함을 받아들이면서도 끝내 포기하지 않는 사랑의 방식임을 깨닫는다.



20년을 걸어온 번역가의 고백

클레어 키건의 『이처럼 사소한 것들』, 조앤 디디온, 수전 손택의 작품들을 우리말로 숨 쉬게 한 홍한별. 20여 년간 100여 권의 책을 번역하며 언어와 언어 사이의 새하얀 진공을 탐험해 왔다. 『아무튼, 사전』에서 단어들의 무한한 세계를 어루만졌던 그녀가 이번에는 번역이라는 '실체 없는 행위'를 거대한 은유로 풀어낸다. 이 책은 번역 기법에 대한 매뉴얼이 아니다. 오히려 '불가능한 번역을 정의하려는 불가능한 몸짓'이자, 언어의 한계와 가능성을 동시에 탐구하는 한 번역가의 치열한 지적 여정이다.



돌아버릴 지경으로 지연된 만남

책의 제목이 암시하듯, 저자는 허먼 멜빌의 『모비 딕』에 등장하는 흰 고래를 번역의 완벽한 은유로 소환한다. '에이해브는 책의 4분의 1지점이 되어서야 비로소 고래 뼈로 만든 의족을 딛고 등장한다. 모비 딕은 135장으로 이루어진 책의 133장까지 가야 마침내 드디어 흰빛을 번뜩인다.''돌아버릴 지경으로 지연된 클라이맥스'는 번역가가 마주하는 원문의 실체와 놀라울 정도로 닮아있다.


번역가는 매일 자신만의 모비 딕을 쫓는다. 원문을 읽는 순간부터 번역을 완성하는 그 마지막 순간까지, 진정한 의미는 계속해서 유보되고 미끄러진다. 마치 연인 사이의 진짜 마음이 고백의 순간이 아니라 그 이전과 이후의 모든 침묵 속에 숨어있듯이, 텍스트의 진실 또한 단어들 사이의 빈 공간에서 번뜩인다. 우리는 너무 성급하게 상대방을 이해했다고, 사랑한다고 결론 내리곤 한다. 하지만 진정한 만남은 언제나 '나중에 나타날 모습'을 위해 기다릴 줄 아는 여유에서 시작된다.



모든 색이면서 동시에 무색인 것

그렇다면 흰색은 왜 섬뜩한가. 이슈메일(모비딕의 화자)의 분석을 빌려, 홍한별은 '흰색은 본질적으로 색깔이라기보다 눈에 보이는 색깔이 없는 상태인 동시에 모든 색깔이 응집된 상태'라고 설명한다. 이 역설적 정의야말로 번역이 마주하는 딜레마의 핵심이다. 번역문은 아무것도 아닌 투명한 매개체가 되려 하지만 동시에 원문의 모든 뉘앙스와 가능성을 품어야 한다.


'번역을 시도한 적이 있는 사람은 누구나 흰 고래 같은 텍스트를 만났을 것이다. 잡히지 않는 공허. 포착할 수 없는 의미.' 이 문장을 읽으며 나는 번역뿐만 아니라 우리가 일상에서 마주하는 모든 소통의 순간들을 떠올렸다. 누군가의 괜찮다는 대답 속에 숨은 진짜 마음, 아이의 울음 뒤에 감춰진 욕구, 연인의 침묵이 담고 있는 무수한 의미들. 우리는 매일 이런 흰 고래들을 쫓으며 산다. '이쪽을 붙들면 저쪽을 놓치고, 저쪽을 잡으면 이쪽이 사라지는' 그 미끄덩한 의미들을 붙잡으려 애쓰면서.



바벨의 축복, 언어의 풍요로움

흥미롭게도 홍한별은 바벨탑 이야기를 언어의 저주가 아닌 축복으로 해석한다. 신이 인간의 언어를 흩뜨려놓은 사건을 통해 '같은 것을 말하는 수만 가지 다른 방식이 생겼다'는 것이다. 만약 우리 모두가 똑같은 방식으로 말한다면, '서로 다른 말들의 부딪힘과 어울림, 언어를 가지고 노는 다양한 방법, 날마다 우리가 느끼고 겪는 언어의 신비한 변화, 언어의 무한한 가능성'을 잃게 될 것이다.


이는 우리 시대의 소통에 대한 중요한 성찰을 던진다. 모두가 이해할 수 있는 평이한 언어, 오해의 여지가 없는 명확한 표현만을 추구하다 보면, 우리는 '흐릿하고 개성 없는 공용어로는 접근할 수 없는 섬밀하고 정교한 언어의 세계'를 놓치게 된다. 단테가 죽은 언어인 라틴어가 아닌 살아있는 속어로 『신곡』을 썼기에 불멸의 작품이 탄생할 수 있었듯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평준화가 아니라 더 탁월한 특이성일지도.



배신이라는 이름의 창조

그렇다면 번역은 왜 배신일까. 홍한별은 히에로니무스가 창세기를 번역하면서 라틴어 '악(malum)'과 '사과(malus)'의 음성적 유사성 때문에 금단의 열매를 사과로 만든 일화를 들려준다. 원래 히브리어 성경의 '과일(peri)'이 번역자의 작은 선택으로 인해 사과가 되었고, 이후 수천 년간 서구 문명의 상상력을 지배하게 되었다.


'번역이 배신인 까닭은, 혼란스러운 언어를, 부유하는 기의를 일시적으로나마 고정하려고 시도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배신은 단순한 왜곡이 아니다. 오히려 번역은 '무수한 가능성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고 다른 것들은 저버리는' 창조적 행위다. 사랑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내가 당신을 이런 사람이라고 규정하는 순간, 나는 수많은 다른 당신들을 놓치게 된다. 그럼에도 우리는 선택한다. 그리고 내일, 또 다른 당신을 위해 다시 선택한다. 번역이 매일의 윤리인 것처럼 사랑 또한 매일의 번역이다.



행간을 헤아리는 마음

홍한별이 번역의 영역을 확장하는 대목이 특히 인상적이다.

'번역이라는 일이 단어든 의미든 텍스트만 가지고 씨름하는 일은 아니라는 것이다. 이를테면 나에게 밥 안 먹었냐고, 재미없냐고 묻는 사람이 어떤 마음으로 그렇게 물었는지 행간을 헤아리는 것까지가 번역의 일이다.'


이 문장을 읽으며 나는 우리가 매일 하는 모든 대화가 번역의 과정임을 깨닫는다. 밥은 먹었냐는 단순한 질문 속에 배려라는 색을 칠할 수도, 간섭이라는 색을 칠할 수도 있다. 상대방의 표정, 말투, 맥락을 종합해서 그 의도를 번역하는 것이 바로 소통의 핵심이다. 험프티 덤프티가 '단어의 뜻은 내가 정한다'고 선언했듯이, 의도가 모든 것을 결정할 때가 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상처를 줄 수 있는 해석과 구원을 건네는 해석 사이에서 가능하면 후자를 선택하는 의도 친화성일지 모른다.



아름다운 간섭, 살아있는 흔적

번역가는 투명해지려 애쓰지만, 역설적으로 그 노력 자체가 번역가의 존재를 드러낸다. 홍한별은 이를 오히려 번역의 미덕으로 본다.

"번역문에는 번역의 흔적이 남을 수밖에 없다. 때로는 그 흔적이 번역문의 미덕이 된다. 타자의 언어와 나의 언어가 포개어지고 간섭이 일어날 때 아롱거리는 무늬가 언어에 아름다운 흔적으로 남는다."


'아롱거리는 무늬‘는 번역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우리가 쓰는 모든 언어는 사실 혼혈의 언어다. 내가 읽고 사랑한 문장들, 만났던 사람들의 말투, 지나간 경험들의 어조가 얇은 막처럼 포개져 오늘의 내 목소리를 만든다. 완벽하게 원어민 같은 매끈함보다는, 이 미세한 간섭과 충돌이 만들어내는 독특한 결이 더 아름다울 수 있다. 내 안의 타자들이 만든 무아레 무늬가 나를 더 풍요롭게 한다.





순수 언어를 향한 꿈

책 중간에 홍한별은 앙토냉 아르토의 발음 불가능한 음절 덩어리들을 언급한다. 'orch torpch', 'ta urchpt orchpt' 같은 '아무것도 가리키지 않는 단어, 기의를 향하지 않는 기표'. '소리에 신경 쓰면, 의미는 따라올 것이다. 혹은 의미 같은 것은 아무래도 좋다.' 이는 벤야민이 말한 순수 언어, 바벨탑 이전의 근원 언어를 향한 염원을 담고 있다.


때로 우리는 의미가 아닌 리듬으로 서로를 이해한다. 아이가 잠에서 깨며 내는 알 수 없는 소리, 사랑하는 사람의 한숨 끝 미세한 떨림. 번역이 의미의 길이면서 동시에 음향의 예술임을, 삶이 문장이면서 동시에 호흡임을 이 책은 잊게 하지 않는다.



끝내 고정되지 않는 것을 사랑하기

『흰 고래의 흼에 대하여』를 덮으며, 나는 번역이 단순히 언어의 기술이 아니라 삶의 태도임을 깨닫는다. 완벽한 이해는 불가능하지만, 그 불가능함을 인정하면서도 끝내 상대방에게 다가가려는 노력. 하나의 의미로 고정하려는 유혹을 견디고, 무수한 가능성들이 살아 숨 쉴 수 있는 여백을 남겨두는 것.


홍한별이 해신 프로테우스의 이야기로 마무리하듯, 끊임없이 변하는 대상을 '온 힘을 다해 꽉 붙들고 절대로 놓아주지 않으면' 그것은 변신하기를 포기하고 진실을 들려준다. 번역도, 사랑도, 때로는 그렇게 꽉 붙드는 일이다. 그러나 동시에 그것이 다시 변할 수 있음을, 내일은 또 다른 모습으로 나타날 수 있음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 책을 읽고 나서 대화의 속도를 반 박자 늦추기로 했다.

상대가 아직 말하지 않은 것을

내 귀가 아직 알아듣지 못한 것을 위해서

내 문장 끝에 여백 하나를 더 두기로 했다.


그 여백에서 당신의 문장이

마침내

눈 덮인 산처럼 번쩍이기를 바라면서.


흰 고래는 영영 잡히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그 흰빛은 우리 사이의 모든 침묵을 비춘다.

그리고 그 빛 속에서 우리는 비로소 서로를 번역하는 법을 배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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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 하나는 거짓말
김애란 지음 / 문학동네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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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을 살리는 말은 대개 정답이 아니라 ‘그런데’와 ‘한편’ 사이에서 건네지는 작은 거짓과 빛, 그리고 온기일지 모른다.


김애란 작가는 오래전부터 다양한 작품으로 삶의 모서리를 쓰다듬어왔다. 안과 밖의 시차를 정밀하게 맞추고 씁쓸함과 다정함이 번갈아 입김처럼 서린 문장으로, 우리가 겨우겨우 버티는 방식을 기록해 온 사람. 연극적인 호흡이 배어 있는 대화, 생활감이라는 단어로 밖에 설명이 되지 않는 촉감, 불쑥 찾아오는 재치. ‘빛과 거짓말 그리고 그림’—그가 새 장편을 이렇게 예고했을 때, 사실 이미 김애란의 페이소스는 그 세 단어 안에 있었다. 빛은 불완전한 살핌, 거짓은 상처를 잠시 덮는 붕대, 그림은 악수 대신 이루어지는 접촉.


이야기는 고2 겨울, 두 달 남짓한 방학을 통과하는 세 아이, 지우, 소리, 채운을 따라간다. 담임이 만든 자기소개 게임, '다섯 문장 중 하나는 거짓말.' 이 작은 규칙이 서늘한 균열을 낸다. 서로의 거짓에 비밀이 섞여 있고 그 비밀이 다른 비밀을 돕는다. 지우는 엄마의 부재를 지나 도마뱀 용식을 품고, 소리는 손을 잡는 대신 연필을 잡고, 채운은 집안의 잔혹한 사건을 견딘다. 소설이 영리한 건, 진실을 밝혀내는 서늘한 재미를 좇지 않고, 진실에 닿아가는 동안 무너지고 바뀌는 정서의 지형을 섬세하게 그린다는 점이다. 그래서 만화가 들어온다. 지우가 연재하는 <내가 본 것>은 서사의 삽화가 아니라, 인물들의 감정이 옮겨 심어진 제2의 신경계다. '종이 위에 연필이 마찰하는 순간 떨림', 소설은 그 떨림을 만지작거리며 악수하지 않고도 서로를 만지는 감각을 보여준다.




'작고 말랑한 데다 한 손에 쏙 들어오고 값도 비싸지 않아서였다. 훌쩍 키가 자란 뒤에도 지우는 종종 우울에 빠져들 때면 손에 미술용 떡지우개를 쥐고 굴렸다.'


지우개. 지우개는 이 소설의 소도구이자 윤리다. 삶은 때로 덧칠보다 지움으로 유지된다. 너무 진하게 새긴 선을 조금 옅게 하는 지우개의 일. '옅은 수평선이 가슴을 눌러주는 느낌'. 거창한 도약 대신 무탈이라는 소망을 눌러 고르게 펴는 일. 김애란의 문장은 바로 그 미세한 압을 앎으로써 우리를 살린다.



'지우에게 책을 읽어주던 어른들의 목소리는 대부분 다정했다. 그건 이미 이야기의 결말을 아는 이들의 평온함, 앞으로 펼쳐질 이야기가 얼마나 난폭하든 또는 얼마나 위험하는 주인공도 또 자신도 결국 제자리로 돌아올 것임을 아는 이들의 온화함이었다.'


목소리. 이 문장을 읽고 나는 알았다. 좋은 이야기꾼은 결말을 알려주지 않지만, 결말이 있다는 사실을 몸짓으로 전한다. 폭풍이 몰아쳐도 돌아갈 자리가 있을 거라는 온기. 이 소설은 그 온기로 아이들을 감싼다. 돌아가야 할 제자리가 꼭 과거일 필요는 없음을, 서로가 잠시 머물다 쉬어갈 새 자리를 만들어준다는 뜻으로.


김애란은 접속사를 윤리로 쓰는 작가다. 채운이 '논리로 설명 가능한 건 ‘그래서’와 ‘그런 뒤’ 다음에 일어난다'고 생각하는 대목이 있다. 흥미와 삶의 온도는 ‘그런데’와 ‘한편’에서 오른다. 복수 시점, 만화의 삽입, 어긋나는 시계들 같은 이 소설의 구조는 바로 그 ‘그런데’의 문법으로 사건을 훑는다. 그러니 '규칙을 어겨 미안한데, 지금 내가 한 말 중 거짓은 없어'라는 결말의 어떤 진술은 문법을 한 번 비틀어 진실을 지키는 선언처럼 들린다. 형식을 깼지만 의미를 살렸다. 때로 정직은 규칙보다 더 넓은 규범을 따른다.



가난. '가난이란 하늘에서 떨어지는 작은 눈송이 하나에도 머리통이 깨지는 것.' 눈송이는 가볍지만 어떤 머리는 그로 인해 이미 금이 가 있다. 그 금 위로 떨어지는 하얀 것을 사람들은 계절이라 부르고 우연이라 부르지만, 당사자에게는 지워지지 않을 사건이다. 같은 눈을 보면서 누군가는 풍경을 찍고, 누군가는 머리를 감싼다. 이 소설은 그 둘의 시차를 끝까지 잃지 않는다. 그래서 또 다른 눈의 장면, 차창에 매달린 눈송이들이 '어떤 거짓은 용서해 주고 어떤 진실은 조용히 승인해 주는 작은 기척'처럼 들릴 때 알았다. 거짓이 반드시 악의의 다른 이름은 아니라는 것을. 허위가 아니라 유예. 아무 말도 하지 않음이 아니라 아직 말할 수 없는 누군가를 위한 잠깐의 침묵.


떠남. '눈앞에 출구가 보이지 않을 때 온 힘을 다해 다른 선택지를 찾는 건 도망이 아니라 기도니까.' 이 문장에 도망이라는 단어의 먼지를 한 번 털어낸다. 누군가에게서 멀어지는 건 그를 향한 배반일 때가 있지만, 어떤 시간에는 자기 자신을 향한 충성이 된다. '너는 너의 삶을 살아. 나도 그럴게. 이건 희생이 아니란다'라고 말할 때, 그것은 서로를 향한 배려가 아니라 서로를 위한 배분이 된다. 각자의 생을 각자에게 돌려주는 일. 우리는 흔히 관계를 붙잡는 게 사랑이라 믿지만, 이 소설은 거리를 마련해 주는 사랑도 있음을 알린다. 멀어짐은 붕괴가 아니라 붕괴를 막기 위한 지지대일수도.


빛. '옛 화가들이 눈동자에 찍는 아주 적은 양의 흰 물감' 같은 빛. 그것은 거대한 서사의 구원도, 대낮 같은 밝음도 아니다. 단지 한 사람의 정수리를 데우는 소량의 온기. 겨울 바다에서 파도를 타다 쓰러지며 웃는 사람들의 머리 위로 위험의 빛이 번쩍일 때, 우리가 목격하는 것은 ‘두려움의 반대’가 아니라 ‘두려움을 데리고 가는 기쁨’이다. 삶은 안전해진 다음에 시작되는 게 아니라 안전하지 않음을 감내하겠다고 결정하는 순간에 비로소 진행된다. 김애란 작가는 그 미세한 결심을, 눈썹을 스치는 정도의 바람으로 써 내려간다.


작가에 대하여 말을 보태자면, 그는 요약을 거부하는 인물을 오래 쫓아온 사람이다. ‘달려라, 아비’에서의 발랄함, ‘바깥은 여름’의 응시, ‘두근두근 내 인생’의 애수. 그의 작품들은 늘 제자리에서 반 보씩 옮겨 앉는다. 이 작품에서는 그리는 행위가 서사의 심장으로 들어왔다. 말로 하면 훼손되는 마음을, 그림으로 묽게 펴 바르는 일. 말보다 그림, 그림보다 침묵이 더 안전한 순간들을 그는 정확히 안다. 그래서 인물들은 서로에게 손을 내밀지 않고도 포개진다. '누군가와 악수하지 않고도 접촉하는 듯한 감각' 이 문장이, 김애란 소설의 오래된 미덕을 낯설게 다시 만든다.


다시 지우개로 돌아가 보자. 지우개는 틀린 것을 지우는 도구가 아니라 살아남기 위해 진심을 옅게 만드는 도구였다. 어떤 진실은 날 것으로 건네면 칼날이 되고, 약간의 고무가 그 칼날을 뭉툭하게 만든다. 우리는 왜 가끔 거짓을 섞는가. 고의적인 속임이 아니라 도달하지 못한 성숙의 여백, 그 여백을 안전하게 통과하려고. 이야기의 거짓은 현실의 진실을 장식하는 것이 아니라 그 진실이 우리를 다치지 않게 들려주는 기술이다. '규칙을 어겨 미안한데', 그리하여 그 규칙은 잠시 깨지지만, 마음은 무너지지 않는다.




사람은 서로를 고치지 못할지 모른다.

대신 우리는 서로의 가장 아픈 문장에 작은 흰 점을 찍어줄 수 있다.

아주 소량이겠지만, 영혼을 표현하는 데 꼭 필요한 그 점.

누군가의 출구가 보이지 않을 때, 다른 선택지를 제안해 주는 것.


누군가의 눈송이가 유독 아프게 떨어질 때 잠시 지붕이 되어주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

‘그런데’와 ‘한편’을 아끼는 문장으로 서로의 삶을 이어주는 것.

삶은 그렇게 천천히 덧붙여진다.


덜 상처받는 쪽으로

더 무탈한 쪽으로


규칙을 어겨 미안하지만, 지금 이 글에서 내가 당신에게 한 말들 중엔 거짓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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