츠바키 문구점
오가와 이토 지음, 권남희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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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의 마음을 대신 적는다는 건 목소리를 훔치는 일이 아니라 마음의 온도를 재어 그에 맞는 종이와 먹, 그리고 침묵까지 처방하는 일이라 믿는다.


오가와 이토의 작품을 읽을 때면 일상에서 치부될지 모르는, 사소한 의식들이 사람을 살리는구나 싶어진다. 1973년 야마가타에서 태어나 『달팽이 식당』으로 전 세계 독자들의 마음을 어루만진 작가답게, 그녀의 세계는 음식처럼 따뜻하고 문구류처럼 정밀하다. 요란한 사건 대신 삶을 지탱하는, 손가락 마디 사이 같은 기억을 꺼내어 보여주는 그녀의 작품들은 밥을 짓고 아이를 안거나 편지를 쓰는 일 모두가 '누군가를 잘 살아 있게 하는 기술'임을 일깨운다.


『츠바키 문구점』은 그 기술들 중에서도 가장 섬세한 한 가지, 마음을 대신 써주는 대필가의 이야기이다. 가마쿠라의 고즈넉한 바닷가에 자리한 츠바키 문구점은 겉으로는 평범한 문구점이지만, 실은 에도시대부터 여성 서사들이 가업으로 이어온 대필의 전당이다. 십일 대째 그곳에서 사람들의 간절한 마음을 대신 써 내려가는 주인공 포포의 이야기는, 디지털 시대에 우리가 놓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다정하게 속삭이는 듯하다.


먹 향기에 사로잡힌 아이와 운명

포포의 어린 시절 이야기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건 먹에 대한 묘사다. '선대가 먹을 갈 때 흘러나오는 그 은은한, 뭐라고 표현할 수 없는 비밀스러운 향이 미치도록 좋았다'는 문장을 읽으며, 문장의 기원 같은 것을 보게 된다. 글쓰기는 단지 머리로 하는 게 아니라 눈과 코, 손끝으로 배우는 일이라는 걸. 핏줄보다 먼저 배는 건 향기이고 이성이 굴복하는 건 손의 기억이라는 것.


엄한 할머니의 도구를 만지다가 창고에 갇히는 벌을 받으면서도 그 검은 덩어리가 '초콜릿보다도 사탕보다도 더 근사한 맛'일 거라고 확신했던 소녀. 그 확신이야말로 대필가로서의 운명을 예고하는 신호가 아니었을까. 때로 우리를 이끄는 건 논리적인 판단이 아니라 설명할 수 없는 이끌림일지니.


마음속 어둠에 별을 켜는 주문

바바라 부인이 가르쳐준 '반짝반짝' 주문은 이 책에서 가장 아름다운 마법이지 않을까. '눈을 감고 반짝반짝, 반짝반짝, 그것만 하면 돼. 그러면 말이지, 마음의 어둠 속에 점점 별이 늘어나서 예쁜 별하늘이 펼쳐져.' 이 주문을 편지에 적용해 본다. 편지란 마음속 별자리를 그려 보내는 종이 위의 지도가 아닐까.


우리는 각자의 어둠을 가지고 산다. 그 어둠을 설득하는 건 논리보다는 리듬, 주장보다는 호흡일 때가 많지. '반짝반짝'이라는 유치할 만큼 단순한 리듬이 편지에서는 '안녕'과 '잘 지내'라는 어휘로 변주된다. 수신인은 그 리듬을 따라 마음의 밤길을 걸어오고, 편지란 결국 별빛의 배달이 된다.


진심이 사기일 수 있을까

대필이 사기냐는 포포의 질문에 할머니는 '자기가 직접 만든 것이 아니어도, 제과점에서 열심히 골라 산 과자에도 마음은 담겨 있어. 대필도 마찬가지야.' 라며 답하는 이야기에, 우리는 언어의 주인이 아니라 임차인이라 떠올려본다. 말에는 늘 누군가의 발자국이 앞서 있었고, 우리는 그 길을 조심스럽게 빌려 쓰니까.


제과점의 케이크가 내 손으로 만든 케이크보다 덜 진심일까. 생일을 축하하려는 마음이 케이크에 올라타는 순간, 그 표면의 광택은 내 기쁨의 윤택이 되지 않을까. 대필도 그렇겠지. 말에 능한 사람이야 스스로 굽고 장식하면 되겠으나, 그렇지 못한 이에게는 빵 굽는 사람의 손이 필요하지 않을까. 그로 인해 내 안의 사랑이 더 안전하게 도착한다면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을까.


수도꼭지의 물방울

'슬픈 편지는 슬픔의 눈물로, 기쁜 편지는 기쁨의 눈물로 우표를 적셔 붙여라'는 선대의 가르침은 아름다운 동시에 불가능한 지점으로 읽혔다. 포포는 그래서 '수도꼭지의 물방울'로 타협하는데, 내게 이 장면은 성숙의 정의처럼 다가왔다. 진짜 눈물은 늘 준비되어 있지는 않으니까. 그래서 우리는 그 부재를 감추기보다 당장 있는 것으로 정성껏 대체하겠지. 어쩌면 진심이란 염분 농도가 아니라 머뭇거림의 시간일지 모르겠다. 수도꼭지의 물방울을 기다리는 그 짧은 사이. 그 사이가 우리의 예의일지도.


잃어버린 것보다 손에 남은 것을

'잃어버린 것을 찾으려 하기보다 지금 손에 남은 것을 소중히 하는 게 좋다'는 깨달음이 이 책에서 길어 올린 핵심이랄까. 이메일은 눈을 스쳐 지나가지만 편지는 손에 남는다. 접힌 자국, 우표의 질감, 글씨의 호흡, 봉투 안에 갇힌 공기의 냄새까지. 상실을 되돌릴 수는 없겠지만 남은 것을 더 잘 잡을 수는 있을 테니까.


포포 역시 할머니에 대한 좋지 않은 기억들 때문에 괴로워했지만 대필을 하며 할머니의 가르침들을 새롭게 이해하게 된다. 과거의 상처를 치유하는 것은 그것을 지우는 게 아니라 다른 각도에서 바라보는 것일 수도 있겠다고.


등 뒤의 메모, 거울 장수

'자신에게는 자신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언제나 자신보다 주위 사람이 더 많이 나를 보고 있다'는 문장에 오래 마음이 남았다. 대필가는 그래서 거울 장수이겠지. 의뢰인의 말 사이에 흘린 숨을 닦아 반짝이게 하고 보낸 이가 미처 보지 못한 자신의 뒷모습을 편지라는 거울에 비춰줄 테니.


이상하기도 하지. 나 대신 써준 문장을 읽고서야 비로소 내 마음이 내 마음을 알아보는 순간이란. 언어란 결국 혼자서만 쓰는 기술이 아니라 함께 보정하는 공예이겠구나.


마음의 온도를 조절하는 기술

포포가 편지를 쓸 때 신경 쓰는 모든 것들 - 조문 편지에는 옅은 먹색을, 첫사랑에게는 투명한 유리펜을, 거절 편지에는 굵은 만년필과 금강역사상 우표를 - 이 모든 것이 편지가 아니라 내겐 마치 처방전처럼 보였다. 그래서 이 책을 '문장의 약국'이라 부르고 싶어진다. 아픈 사람들의 증상은 제각각이겠지만 기본 원리는 같을 테니까. 상대를 존중하고 형식을 통해 감정을 안전하게 들여보내는 일. 정성은 수사학이 아니라 속도일 것이다. 빨리 건너뛰지 않고 끝까지 들어주는 속도.




이 책을 덮고 나면 자꾸 종이를, 펜을 만지게 된다.

누군가에게 오래 미루어 둔 말을 떠올리고 그 말의 경도를 정해 본다.

HB로는 부족하고, 4B쯤은 되어야 할 것 같은 날들이 있지.


그리고 짧은 주문을 되뇌어본다.

반짝반짝.

그러면 마음의 어둠에도 별이 늘어나고

길을 잃은 문장 하나가 빛에 붙들린다.


편지가 기적을 약속하지는 않을 것이다. 다만 바라는 그곳에 마음이 도착하리란 건 믿는다. 나는 그 용기가 좋다. 우리가 서로의 등을 보며 살아갈 수밖에 없다면 편지는 등 뒤에 붙이는 메모 같으니까.


'나는 이런 사람이 되고 싶었고, 너에게는 이렇게 보이고 싶었어.'


『츠바키 문구점』은 그 메모를 조금 더 단정하게, 그러나 떨림이 남은 채 붙이는 법을 알려주었지.

늦었지만, 반짝반짝.

아주 천천히, 그러나 확실히 도착하는 문장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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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아름다운 정원 - 제7회 한겨레문학상 수상작, 개정판
심윤경 지음 / 한겨레출판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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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이 된다는 건 사라진 신호등 없이도 교차로를 건너는 법을 익히는 일이다.


이 소설은 한 소년의 유년으로 꾸린 정원이다. 1977년부터 1981년, 인왕산 자락의 바람이 라디오처럼 역사를 흘려보내던 시절, 난독증으로 어리숙해 보이는 국민학교 3학년 동구는 가족과 동네와 선생님을 통해 세상을 배워나간다. 작가는 그 시절의 기억을 황금빛 곤줄박이 페인트처럼 문장에 발라 올린다. 첫 장편으로 한겨레문학상을 받았던 작가는, 이 작품이 그녀에게 '행복한 어린 시절 같은 존재'였다고 한다. 그래서일까. 읽다 보면 말의 온도가 피부에 닿는 온기와 비슷하다. 문장이 어른보다 1도쯤 높은 아이의 체온으로 말한다.


가족의 구조를 보여주는 곳에서 내가 밑줄 그은 문장을 발견한다. '우리의 푸른 신호등은 영원히 잠들어버렸다. 우리는 신호등 없이는 교차로를 지나는 방법을 알지 못했다.' 집안에 그런 사람 하나쯤 두고 있지 않을까. 웃으면 밥상이 환해지는 아이, 울면 사소한 일도 태풍이 되는 아이. 그런데 그 푸른 신호등은 사람보다 먼저 늙거나 더 일찍 꺼지기도 한다. 그때 남는 건 멈춤과 출발 사이를 못 정해 덜컥거리는 가슴소리. 이 문장에 한동안 페이지를 멈추었지. 내가 잃어버린 신호등을 떠올리느라. 그때 알았다. 문장이라는 건 신호 체계를 새로 배우는 일이라고. 손에 쥐어진 작은 푸른 불빛 하나로 내 안의 교차로를 정리하는 일이라고.


동구의 세계는 어른들의 세계와 자주 부딪힌다. '중요한 건, 동구야, 엄마와 아버지와 할머니의 일은 어른들의 일이라는 거야.' 선생님의 이 말은 훈계처럼 보이지만 사랑의 실패 확률을 줄이는 지혜에 가깝다. 누군가의 문제를 대신 풀어주려다 더 엉키게 만들지 않기를,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내 자리에서 돕기를, 아직 내 손에 들어오지 않은 싸움이라면 당분간 유예하기를. 아마 성장의 대부분은 ‘참견하지 않을 용기’를 배우는 일인지도 모른다. 아이가 할 수 있는 일은 어른의 마음을 스스로의 방법으로 헤아리며 곁을 지키는 것. 어른이 된 우리는, 아이의 당시를 미루어 짐작하며 ‘지금 당장’의 해법 대신 ‘나중에 제대로’의 약속을 품는 것.


그러나 아이의 정의감은 쉬지 않는다. '나는 아버지가 미웠다. 아버지는 엄마가 자기의 엄마를 욕했다고 화를 내지만, 아버지 자신은 내 앞에서 내 엄마를 욕하고 있으니 하나도 다를 것이 없었다.' 동구는 아버지가 엄마에게 욕하는 모습을 보고 그게 할머니를 욕했다며 화내던 아버지와 다를 바 없다는 것을 정확히 짚어낸다. 아이의 세계에서 모순은 낱낱이 발각된다. 어른들의 세계가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도입한 온갖 변명과 합리화는 순도 높은 정의의 눈앞에 일시 정지된다. 이 장면에서 나는 작가의 시선이 얼마나 예리한지 실감했다. 소리치지 않고, 곁눈질하지 않고, 그저 정확히 본다. 정확히 본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세계는 조금 더 좋아진다.


동구네 집에는 두 개의 믿음도 있다. 하나는 뉴스에 기대는 믿음, 다른 하나는 전생을 불러오는 믿음. 모실 할머니는 '전생에 업이 많아 그런 것이니 도를 닦아야 한다'라고 말한다. 이 말의 옳고 그름을 떠나 나는 그 문장에 담긴 마음을 본다. 어쩌면 인간은 견딜 수 없는 일을 만나면 변명할 꺼리를 찾는다. 어떤 사람은 원인을 과학에서 찾고, 어떤 사람은 사주에서, 어떤 사람은 부처님께 절하는 일상에서 찾는다. 설명은 틀릴 수 있지만 설명하려는 마음은 종종 누군가를 버티게 한다. 작가는 그 마음을 함부로 흘려보내지 않는다.


그리고 이 책에는 누군가의 뒷모습을 처음 알아보는 순간이 있다. '커튼을 젖히고 무대 뒤편으로 가보면 그곳에는 아직 어리고 미숙한 영주, 생각 깊고 마음 넓은 동구가 있었다.' 박영은 선생님이 난독증이 심한 동구에게 한 건 특별한 교육법이 아니라 존재의 순서를 바로잡아 준 일이다. 세상이 정해놓은 이름표인 ‘덜렁대는 동구’를 떼어내고, 뒤편에 쪼그리고 있던 너를 무대 위로 불러내는 일. 우리는 모두 그런 선생님을 마음속에 한 명쯤 둔다. 어쩌면 그 선생님이란 실재의 누군가가 아니라 우리가 지금 쓰고 있는 문장일지도 모른다. 나를 불러내는 문장, 네가 거기 있었다고 확인해 주는 문장.


영주의 죽음은 이 소설에서 가장 충격적인 사건이다. 하지만 작가는 그 죽음을 단순히 비극으로만 그리지 않는다. '영주의 귓속에서 색깔 어두운 애벌레가 느릿느릿 기어 나오는 것이 보였다'는 환상적인 장면에서, 죽음은 끝이 아니라 다른 시작처럼 느껴진다. 애벌레가 '할머니가 일구어놓은 향기로운 검은 흙'에 고개를 처박는 순간을 읽으며, 나는 정원이라는 제목의 의미를 비로소 이해했다. 정원은 아름다운 꽃들만 피우는 곳이 아니다. 시들고 썩고 흙이 되어 다시 새로운 생명을 키우는 곳이다. 우리의 삶도 그렇다. 잃어버리는 것들이 있어야 새로 얻는 것들도 있다.


삼촌의 애도하는 장면도 오래 남는다. 매미 소리가 한순간 멎고, 큰 사람이 어리숙한 곰처럼 안절부절못하다가 눈가를 훔친다. 인간의 위엄은 무표정에 있지 않다. 눈가의 물기를 들키고도 무너지지 않는 데 있다. 어쩌면 동구가 배운 강함은 이 장면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강하다는 건, 울면서도 걸어가는 법을 아는 것. 울음이 나를 지배하지 못하도록 울음을 곁에 두고 같이 가는 것.


동구는 언젠가 이렇게 말한다. '하루라도 나의 갈 길을 확신하며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기도문인지 탄식인지 모호한 문장. 나는 이 질문에 내놓은 작가의 대답을 이렇게 들었다. 확신은 찾아오는 게 아니라 가꾸어지는 것이라고. 정원사가 물을 주듯 오늘의 망설임과 내일의 작은 용기를 합쳐 한 줌의 확신을 만든다고. 그 확신은 몸에 맞춘 슈트처럼 점점 내게 맞게 재단된다. 남의 확신을 빌려 입는 시절은 밖에서 보기엔 번듯하겠으나 오래 못 가겠지.


소설의 마지막에 동구는 정원을 떠난다. '아름다운 정원의 정경이 차츰 좁아지더니 마침내 가느다란 광채의 선이 되었다가, 갑자기 시야에는 녹슨 철문의 모습만 들어왔다.' 며, 그러고는 '나는 섭섭해하지 않으려 한다.'라고 말한다. 이 말은 마치 어른들의 주문 같다. 떠날 때 감정의 뒷정리를 스스로 해내는 사람들. 섭섭함을 억지로 밀어내는 대신 어디까지가 나의 몫이고 어디부터가 세계의 몫인지를 알아차리는 사람들. 작별이란 마음의 가구를 다시 배치하는 일이겠지. 빈자리엔 빛이 들고, 빛이 들면 먼지가 제 모습을 드러낸다. 그 먼지들을 한 줌씩 닦아내는 손놀림으로 우리는 살아간다.


심윤경 작가는 아이의 눈을 빌려 어른의 마음을 보여주었다. 미움과 사랑, 고집과 이해, 가난과 온기가 한 그루 나무의 뿌리처럼 얽혀 있음을, 그리고 그 얽힘 자체가 삶의 장관임을. 그녀의 문장은 설명하지 않고 보여주었고 판단하지 않고 견뎌냈다. 그래서 오래 묵직하다. 나는 이 책을 덮으며 내 안의 정원으로 내려가 작은 잡초 몇 포기를 뽑았다. 그리고 이렇게 적었다.


우리는 서로의 신호등이 되어주다 사라지겠지.
남은 자는 빈 교차로에 공손히 멈추겠지만
그때 필요한 건 차분한 손동작과
당신이 내미는 그 문장 한 줄.


나와 당신의 문장은 그래서 서로를 건너게 한다. 아이가 어른에게, 어른이 다시 아이에게. 살아 있는 자가 떠난 이에게, 떠난 이가 살아 있는 자에게. 우리는 그 다리를 건너다 한 번쯤 뒤돌아보며 손을 흔들고, 가능한 한 섭섭해하지 않으려 애쓴다. 그 애씀의 기록이 바로 우리의 아름다운 정원일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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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번째 거짓말이 중요하다
애슐리 엘스턴 지음, 엄일녀 옮김 / 문학동네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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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서로에게 건네는 첫 문장은, 사실상 첫 번째 거짓말의 각도다.


애슐리 엘스턴의 『첫번째 거짓말이 중요하다』는 제목부터 선언에 가깝다. 거짓말은 진실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아야 하고, 불필요한 가지를 만들지 말아야 하며, 무엇보다 첫 거짓말이 모든 궤도를 정한다. 나는 이 문장을 읽는 순간, '나와 당신의 문장은'이라는 내 연재 제목이 갑자기 기밀문서처럼 보였다. 첫 문장으로 우리는 서로의 신뢰를 정렬한다. 그러나 그 신뢰의 첫 좌표가, 대개는 아주 작은 각도의 허구에서 출발한다. 이름, 표정, 목소리의 온도, 어느 도시에서 왔는가 같은 자잘한 자기소개들. 이 소설의 주인공은 이 미세한 각도를 직업으로 삼는다. 그리고 우리는 그것을 일상으로 삼는다.


작가인 애슐리 엘스턴은 오랫동안 결혼식 사진사로 일했단다. 축복의 가면과 진심의 눈물이 같은 프레임에 겹치는 현장에서, 아마도 ‘연출된 진실’의 매뉴얼을 몸으로 익혔을 것이다. 그런 그가 YA(Young Adult) 소설들로 작가의 기반을 닦은 뒤 성인 스릴러로 건너오며 만든 이 소설의 주인공은 이름을 갈아 끼우는 사람이다. ‘에비 포터’는 작업용 가면이고 진짜 이름인 ‘루카 마리노’를 훔쳐 쓴 누군가가 등장하는 순간, 이야기의 바늘은 본격적으로 피를 찾기 시작한다. 미지의 보스 '스미스 씨'와의 머리싸움, 과거와 현재의 교차, 지시가 도착하던 사서함—이 작품에 리즈 위더스푼이 붙인 '스릴러에 기대하는 모든 것을 갖춘'이라는 찬사는 정확하다. 그러나 내가 골라 밑줄을 그은 건, 추격전의 속도가 아니라 그 속도를 가능하게 하는 마음의 규칙들이었다.


예컨대 이런 규율. '내가 창조한 지금의 나는 캐묻지 않는다. 불필요한 질문을 하지 않는다.' 그녀는 기억을 만들어낼 때도, 망가뜨릴 때도, 질문을 줄인다. 가면으로 살려면 질문은 위험하다. 질문은 관계의 시작이고, 관계는 기억을 만든다. 기억은 흔적을 남기고, 흔적은 도망을 어렵게 만든다. 이 문장을 나는 내 일상의 반대편에 놓고 오래 바라보았다. 우리는 친밀을 얻기 위해 질문을 늘리지만, 어떤 날들은 생존을 위해 질문을 줄여야 한다. 그것을 직업적으로 수행하는 주인공을 보며 나는 내 안의 조심성을 바라보게 된다. 오늘의 내가 캐묻지 않기로 선택한 것들. 그게 곧 내가 지키고 싶은 것들일지도 모른다.


작품에서 기억을 관리하는 방식도 흥미롭다. '열쇠를 꽂기 전에 제자리에서 빙그르 한 번 돈다'는 단순한 동작으로 루틴의 기억을 각인시키는 기술은 스릴러 한복판에서 느닷없이 생활철학이 된다. 잊지 않기 위해서는 변칙이 필요하다. 관계도 그렇다. 매일 같은 말로 사랑을 확인하면 어느 순간 기억은 모래가 된다. 작은 변칙— 지나치던 저녁 하늘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같이 본다든가, 지갑에 오래 넣어둔 여행지의 영수증을 꺼내 한 번 웃는다든가—이 우리를 그날로 되돌려놓는다. 엘스턴은 속도의 미학만이 아니라 기억의 기술을 가르친다. 긴장감이란 결국 잊지 않음의 또 다른 이름이니까.


가난의 감정선도 정확하다. '엄마는 단지 더 큰 평수의 집을 원한 게 아니었다. 다른 방식의 삶을 원했다.' 이 문장에서 집은 평수의 문제가 아니라 생존의 방식이다. 식재료 값이 모자라지 않을 삶, 내가 사라진 뒤 아이가 굶지 않을 삶. 이 소박하고도 근본적인 갈망은, 주인공이 왜 이렇게까지 치열하게 자기 자신을 가공해야 하는지의 윤리적 배경이 된다. 누군가는 '아무리 열심히 노력해도 때론 충분치 않다'는 잔혹한 사실을 너무 일찍 배운다. 그럴 때 사람은 두 가지 언어를 익힐 수밖에 없다. 하나는 세상과 협상하는 언어(가짜 신원, 조심성, 첫 거짓말 같은), 다른 하나는 스스로를 부러뜨리지 않기 위한 내면의 언어(단단함, 애도의 사용법, 떠나는 법). 이 소설은 두 언어의 문법을 다 가지고 있지.


그리고 직업윤리. '자네 자신과 작업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뭐든 해야 해. 자네는 그 가족의 일원이 아니야. 자네는 잠깐 스쳐 지나가는 유령일 뿐.' 처음엔 냉혹한 문장처럼 보였지만 나는 이 냉혹함이 경계의 기술이라는 걸 이해했다. 우리는 자주 남의 세계에 무단 입국한다. 친절이란 이름으로, 선의란 이유로, 때론 사랑이라는 위신으로. 그러나 모든 세계에 영주권이 있는 건 아니다. 내가 타인의 집에 머무는 시간은 어쩌면 유령처럼 투명해야 할 때가 있다. 열쇠를 맡기고도 마음의 방문을 닫아둘 권리가 각자에게 있다는 것을, 이 문장은 정확하게 일러준다.


배신을 겪고 난 뒤의 내면을 작가는 조목조목 적나라하게 분해한다. 분노, 실망, 쓰라림—그 감정들이 '내가 각오한 것보다 더 아프다'는 고백은, 예측 불능의 고통에 대한 생생한 메타 서술이다. 우리는 늘 '이 정도면 감당 가능'이라는 허상과 함께 산다. 그러나 고통은 사전 합의를 파기하는 데 도가 튼 존재다. 그래서 주인공은 시간을 단위로 감정을 경영한다. “나는 ‘우리의 가능성’을 애도할 시간을 5분 준다.” 불발된 미래를 슬퍼하는 5분. 그리고 다시 자신의 세계로 복귀한다. 이 5분은 냉혈이 아니라 다정함이다. 가능했던 세계를 완전히 지워버리지 않고 온전한 장례를 치를 시간을 내주는 것. 그 애도의 제한 시간은 내 삶에도 필요했다. 실패와 오해, 오판과 미련에 붙잡히지 않기 위해 나는 나만의 5분을 만들었다. 주방 타이머를 돌려도 좋고, 엘리베이터가 15층을 오를 때까지 울어도 된다. 중요한 건 애도의 형식이 아니라,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는 연습이다.


그런 의미에서 '아주 잠깐 스쳐 지나가는 유령'이라는 자기규정은 슬프도록 해방적이다. 유령이 되겠다는 건 사랑하지 않겠다는 뜻이 아니라, 망령이 되지 않겠다는 다짐이다. 타인의 세계에서 억류된 영혼으로 살지 않겠다는 선언. 사랑하고도 떠날 수 있고, 떠난 뒤에도 사랑할 수 있다. 그건 이 소설이 보여주는 윤리의 형태이기도 하다.


이 모든 것의 배후에는 언어의 민첩함이 있다. '샴페인에 일찍이 어딨어.' 실패한 축하의 아침에 내뱉는 이 농담은, 시간의 독재에 대한 가벼운 반란 같다. 기쁨은 정시 출근하지 않는다. 늦게 터진 샴페인은 샴페인이 아니냐는 듯이. 엘스턴은 이런 뉘앙스들을 빠르게 툭툭 던진다. 덕분에 서사는 무겁게 가라앉지 않는다. 주인공은 무너지지 않기 위해 웃음을 전략처럼 사용한다. 웃음은 방탄유리다. 총알을 막지는 못하지만, 파편을 둔화시킨다.


이야기를 덮으며 나는 이런 결론에 닿았다. 첫 번째 거짓말이 중요한 이유는, 그것이 결국 첫 번째 약속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대개 타인에게 거짓말을 한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자기 자신에게 먼저 약속을 건다. '나는 오늘 이 이름으로 살아보겠다.' '나는 이 가능성에 대해 5분만 슬퍼하고 돌아오겠다.' '나는 당신의 세계를 사랑하지만, 거기에 눌러살지는 않겠다.' 이 약속들이 모여 우리의 문장이 된다. 그러니 첫 문장을 신중히 택하자. 그것이 첫 거짓말이든, 첫 다짐이든, 결국 우리의 하루를 기울이는 건 그 각도다.


그리고 이 각도는 나와 당신 사이에서도 작동한다. 나는 지금 당신에게 내 문장을 건넨다. 당신이 건네올 문장은 어떤 얼굴을 하고 있을까. 혹시 오늘, 현관문을 잠그고 나오며 제자리에서 한 바퀴 돌아보는 건 어떨까. 우리도 그 작은 변칙으로 이 순간을 오래 기억할 수 있을지 모른다. 가능했던 세계들을 5분 애도하고, 이름을 다시 챙겨 들고, 누군가의 세계를 지나가되 망령으로 남지 않기를. 우리는 서로의 삶에선 잠깐 스쳐 지나가는 유령일지라도, 서로의 문장 속에서는 조금 더 오래 머물 수 있으니까.


그게 내가 이 책에서 얻은 잔잔한 깨달음이다. 첫 문장이 우리의 진실을 기울인다면, 그 기울기를 감당하는 법은 우리 각자의 몫이다. 그러니 오늘의 첫 문장을, 조금 더 다정하게, 조금 더 정확하게, 그러나 필요하다면 약간의 거짓을 허락하며—그렇게 시작하자. 첫 번째 거짓말이 중요하니까. 첫 번째 다짐도 마찬가지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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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이토록 작은 존재들을 위하여
사샤 세이건 지음, 홍한별 옮김 / 문학동네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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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한함을 받아들이는 순간 사랑은 감정이 아니라 기술이 되고
그 기술을 매일 연습하는 것이 삶을 빛낼 작은 의식이 된다.



별의 딸이 들려주는 지상의 편지

사샤 세이건의 『우리, 이토록 작은 존재들을 위하여』를 펼치고 묘한 기시감과 마주한다. 마치 오래전부터 알고 지내던 누군가가 드디어 입을 열어 말을 건네는 것 같았달까. 천문학자 칼 세이건과 과학 저술가 앤 드루얀 사이에서 태어난 그녀는, 거대한 우주를 탐험하던 아버지의 망원경을 180도 돌려 일상이라는 가장 가까운 우주를 들여다본다. 그 결과물이 바로 이 책이다.


뉴욕대학교에서 극문학을 전공했다는 사샤 세이건에게는 과학적 정확성과 문학적 상상력이 자연스럽게 공존하는듯 하다. 그녀는 부모의 명성에 눌리지 않고 오히려 그 유산을 자신만의 언어로 번역해 낸다. 이 책은 회고록도 자기 계발서도 아니다. 차라리 '우주적 일상 사용법'에 가깝다. 종교 없는 가정에서도 삶을 신성하게 만드는 방법, 취약함을 통해 더 깊은 연결에 도달하는 기술, 매일을 작은 축제로 만드는 의식의 철학을 담고 있다.


사랑이 자신에게 건네는 최소한의 예의

'우리 집은, 종교는 없어도 결코 냉소적이지는 않았다.' 이 문장에서 시작된 사샤의 고백은, 신앙 없이도 경이로움을 잃지 않는 삶의 기술에 대한 섬세한 안내가 된다. 아버지 칼 세이건이 '증거의 부재는 부재의 증거가 아니다.'라고 가르쳤을 때, 그것은 단순한 과학적 회의주의가 아니었다. 확실하지 않은 것들 앞에서 성급한 단정을 내리지 않는 지혜, 모르는 것을 인정하는 용기, 그리고 그 모름을 인지한다는 겸손을 출발점으로 삼는 성숙함이었다.


나는 이것을 '회의주의란 사랑이 자신에게 건네는 최소한의 예의'라고 부르고 싶다. 진실을 사랑한다면 그것을 함부로 규정하지 않는 것, 세상을 사랑한다면 그것의 복잡성을 인정하는 것. 얼마 전 오랫동안 확신했던 한 가지 생각을 뒤집어야 하는 상황이 있었다. '내가 틀렸을 수도 있겠구나.' 그 한마디를 속으로 중얼거리는 데 이틀이 걸렸다. 인정하고 나니 무너질 것만 같았던 세상은 조금 넓어졌다.


호기심에 대한 그녀의 비유는 특히 매력적이다. '호기심을 품고 세상을 탐구하는 일은 퍼즐을 완성하는 것보다는 조개껍데기나 우표처럼 작고 예쁜 물건들을 모으는 수집가가 되는 것과 비슷했다.' 완벽한 해답을 찾으려는 조급함 대신 내가 발견한 작은 것들을 소중히 모아가는 마음. 지엽적인 질문에도 '우리가 우주에서 어떻게 존재하느냐를 슬쩍 엿볼 수 있는 틈'이 된다는 통찰은, 일상의 사소한 궁금증들이 얼마나 소중한 철학적 단서가 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나도 한때 잡다한 질문들을 쓸모없다고 생각했지. 왜 첫눈은 소리를 죽일까, 왜 봄 냄새는 흙이 아니라 빛의 냄새처럼 느껴질까. 사샤는 말한다. 작은 조각이 다른 것의 실마리가 될 수 있다고. 그 말을 듣고 나니 내 질문들은 마치 투명한 비늘처럼 느껴졌다. 따로 보면 사소할지 모르겠으나 모이면 삶이라는 한 마리의 생명체가 된다.


진실에 몸을 열어두는 자세

이 책에서 빛나는 통찰은 취약함에 대한 재해석이다. '결국은 우리의 취약함이 우리가 무언가 더 깊은 것에 다가갈 수 있게 해 준다. 사랑도 그렇고.' 우리는 흔히 강함을 성숙의 징표로 배우지만, 사샤에게 진정한 성장은 다른 얼굴을 한다.


작년 이맘때 즈음, 한 프로젝트에서 중요한 실수를 저질렀지. 터무니없이 잘못된, 별 거 아닐 것이라 생각한 부분에서 생긴 비용이었는데, 변명을 늘어놓고 싶었더라니. 샤샤의 문장이 나를 돌려세운다. '오류를 기꺼이 인정한다면, 예측이나 선입견을 과감히 놓아버릴 수 있다면, 상상했던 것보다 더 많은 것에 다가갈 수 있다.' 취약함은 무방비가 아니라 진실에 몸을 열어두는 자세다. 실수를 솔직히 털어놓았고, 예상과 달리 빠르게 결정하고 해결할 수 있었다. 취약함은 균열이 아니라 빛이 들어오는 창문이었다.


'삶이 유한함에도 불구하고 행복한 게 아니라, 삶이 유한하기 때문에 행복하다고 느낄 수가 있었다.' 이 깨달음은 죽음에 가까이 다가서야 얻을 수 있는 성숙한 지혜이지 않을까. 끝이 있음을 깨달을 때에야 기쁨을 더욱 선명하게 인식한다는 역설. 마침표가 있어 문장이 문장이 되듯, 끝이 있어 지금이 선명해진다. 두려움을 미루는 걸 성숙이라 착각했다. 사샤는 두려움을 정면으로 바라보는 일을 '어른이 되는 관문'이라 부른다. 지식은 축복이며 때로 그 두려움을 마주하고 통과해야 기쁨에 닿을 수 있다.


어제와 내일을 맞닿게 하는

종교적 신앙이 없어도 삶을 신성하게 만드는 방법이 있다. 사샤는 가족과 함께 만든 작은 의식들을 통해 이를 보여준다. 나는 이것을 '시간을 접는 기술'이라고 부르고 싶다. 어제와 내일을 맞닿게 하는 상상. 의식.


'언젠가 딸아이가 크면 우리는 한여름에, 어쩌면 하짓날에 집밖으로 나가 어딘가 오래전부터 있었던 아름다운 곳으로 갈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지금 보는 빛이 아주 먼 옛날에 멀리에 있는 별을 떠났을 때는 이 세상이 어떠했을까를 상상해 본다.'


유난히도 무더웠던 올여름. 조금 선선해진 틈을 타 아이와 함께 나선 산책길의 끝에, 휴게공간에서 팔던 컵라면의 뚜껑으로 부채질을 해가며 하늘을 올려다봤다. 주변의 불빛을 가리려고 손을 터널 모양으로 만들어 별을 보기도 하고. 사샤가 딸과 함께 상상한다던 장난을 혼자 따라 했다. '이 빛은 언제 떠났을까.' 공기를 들이마시면서는 이런 생각을 했다. 지금 내 허파에 들어온 분자 몇 개는, 아주 오래전에 칼 세이건의 웃음 속에서 튀어나왔을지도 모르지. 알 수 없지만, 없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 가느다란 연결감이 뜨거운 여름밤을 식혀주었다.


나에게도 비슷한 의식이 있다. 얼죽아이지만 첫눈 오는 날이면 창가에 앉아 따뜻한 차와 함께 눈구경을 하는. 그 순간에는 어린 시절 마당에 내려앉는 첫눈을 보며 설렜던 마음을 되살린다. 시간이 직선이 아니라 원이라는 걸, 과거와 현재가 눈송이 하나로 연결될 수 있다는 걸 몸으로 느낀다. 이런 작은 의식들의 목적은 연결감을 느끼기 위해서다. 의식은 시간을 접는 기술이다. 어제와 내일을 손바닥에서 맞닿게 하는.


기쁨, 그 자연스러움

'어쩌면 우리는 봄을 사랑하게끔 진화했는지도 모른다. 봄이 왔다는 것은 이제 위험을 벗어났으며 얼어 죽거나 굶주릴 가능성이 줄어들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이 문장에 지난봄을 떠올린다. 겨우내 앙상했던 나무에 연둣빛 생명이 돋아나는 걸 보며 느낀 그 묘한 안도감. 그것이 단순한 감상이 아니라 수만 년 진화의 기억이었다니.


샤샤 세이건은 과학과 시의 경계에서 반짝이는 통찰을 건넨다. 봄의 기쁨은 신앙과 무관하게 누구에게나 허락된 축제라고. 생각해 보니 가끔 우리는 이유 없는 기쁨에 불편해하지 않나. 왜 봄을 사랑하는가. 왜 기쁜가. 근거부터 찾으려 들지. 그러나 봄은 근거의 반대편에서 핀다. 이유가 없는 게 아니라, 이유가 너무 많아서 셀 수 없을 뿐이다.


우리는 여기에 있었다

'우주에 어떤 비밀이 숨어 있든 우리가 태어났다는 사실은 달라지지 않는다.' 미래에 무슨 일이 일어나든, 우리는 여기에 있었다는 사실은, 우리가 살았다는 사실은, 우리가 이 거대함의 일부였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살아 있음의 모든 위대함과 끔찍함, 숭고한 아름다움과 충격적 비통함, 단조로움, 내면의 생각, 함께 나누는 고통과 기쁨. 모든 게 정말로 있었다.'


이 문장에서 묘한 위안을 본다. 때로는 내 삶이 너무 작고 하찮게 느껴질 때가 있으니까. 거대한 우주 앞에서 먼지보다도 작은 존재라는 생각에 허무해질 때가 있다. 하지만 사샤는 말한다. 바로 그 작음이 기적이라고. 우리가 이 광대함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것 자체가 축하받아 마땅한 일이라고.


'우리처럼 작은 존재가 이 광대함을 견디는 방법은 오직 사랑뿐이다.' 이 사랑은 감정의 격정이라기보다 반복되는 약속의 습관에 가깝다. 매일의 작은 의식들, 누군가의 이름을 또렷이 부르는 일, 오늘의 호흡을 의식하는 것, 이유 없이 작은 기쁨을 축하하는 것들이 모여 사랑이라는 존재 방식을 만든다. 사랑은 한 번의 격정이 아니라 수많은 작은 의식들의 다른 이름이다.


별빛을 받아쓰는 존재

결국 이 책은 의식에 관한 책이다. 종교적 의무가 아니라 인간다운 반복. 하짓날의 별을 보러 나가는 일, 첫눈 오는 날 차 한잔을 들고 둘 다를 음미하는, 꽃봉오리 앞에서 생의 기쁨에 탐미하는 잠깐의 침묵. 이런 것들이 삶을 기념하게 만든다. 거창한 축하 대신 날마다의 축복.


사샤 세이건은 거대한 것을 작게 줄이지 않았다. 대신 작은 것을 통해 거대한 것을 만지게 하지. 우리는 별의 먼지로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머리로만 알던 내가 숨을 고르고 손을 모아 어둠을 만들며 비로소 이해했다. 그리고 그녀의 문장과 밤하늘이 함께 내려주었다.


기회가 된다면 오늘 밤도 작은 의식을 치를 것이다. 창밖을 바라보며 별빛이 만든 아주 오래된 시간을 생각할 것이다. 그 빛이 떠날 때 지구에는 무엇이 있었을까, 그 시간 동안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태어나고 사랑하고 떠났을까를 상상할 것이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 한 몸 누인 작은 방에서 이 거대한 우주의 일부로 살아가고 있는 나 자신을 축하할 것이다.


그러니 오늘 밤 불을 하나 줄이고 손으로 작은 터널을 만들어보자. 오래된 빛이 도착하는 소리를 듣듯이, 천천히 호흡해 보자. 어쩌면 그 공기 속 어딘가에, 우리보다 먼저 떠난 누군가의 웃음이 아주 얇게, 그러나 확실히 섞여 있을 것이다. 알 수 없지만, 없다고 말하지도 못할 그 가능성 위에서 우리는 서로를 부른다. 여기에 있었노라고. 그리고 사랑했노라고.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축하하고도 남을 이유가 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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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윈 영의 악의 기원
박지리 지음 / 사계절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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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은 타인의 칼끝보다 내 안에서 멈춘 바퀴에서 먼저 싹튼다


창으로 쏟아진 빛이 바닥면을 기하학으로 패 쪼개는 장면을 넘기며, 나는 이 세계의 지도를 본다. 가장 밝은 빛 옆에 가장 어두운 그늘이 쫓기듯 붙는. 박지리의 소설은 그 극단의 마찰에서 시작한다. 1지구에서 9지구까지 구획된 사회. 프라임스쿨이라는 엘리트 집단 양성소의 평정과 12월 폭동의 산란함. 사진 한 장의 공백과 사라진 한 명의 아이. '손바닥만 한 파편' 위에 서서 어디로 발을 내딛을지 모르는 다윈 영의 아버지이자 죽은 제이의 친구인 니스 영의 이 감각은 사실 우리 모두의 자세다. 우리는 늘 잘라진 빛과 어둠 사이의 미세한 틈새에 선다.


박지리 작가. 스물다섯에 『합체』로 데뷔해 『맨홀』, 『양춘단 대학 탐방기』, 『다윈 영의 악의 기원』으로 전혀 다른 방언의 세계들을 구축한 사람. 그는 늘 인간의 본질, 더 정확히 말하자면, 선과 악이 서로에게 뿌리내리는 방식을 쳐다본다. 배경은 낯설지만 감각은 기이하도록 익숙하고 사물의 표면을 공들여 닦아놓은 뒤 그 안쪽의 균열을 보여주는 솜씨가 있다. 문장은 종종 우아하고, 그러나 그 우아함은 현실을 참아내는 오래된 근육에서 나온다.


『다윈 영의 악의 기원』은 사진 한 장의 부재로 시작한다. 1지구의 모범생 다윈 영, 죽은 제이 삼촌의 진실을 찾아 나서는 루미, 1지구부터 9지구까지 구획된 사회와 프라임스쿨이라는 공고함으로 쌓아둔 제도를 향해 질문을 날리는 레오, 그리고 국가에 몸을 기대어 선을 재단하고 수선하려는 어른들. 루미는 ‘사라진 사진’이 미싱링크라 직감하고 루미에 이끌린 다윈과 함께 처음으로 1지구의 울타리를 넘어 9지구로 간다. 그곳은 전설처럼 위험하다고 교육받았으나, 실은 '전 지구에서 아무 범죄도 일어나지 않는 유일한 지구'다. 공포의 설계가 어떻게 현실을 바꾸는지 보여주는 역설. '아버지는 통제와 억압이 없다고 하셨지만, 눈에 보이는 벽을 세우는 것보다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가지 않게 만드는 것이야말로 가장 강력한 통제'라는 다윈의 문장 앞에 나는 오래 멈춰 섰다. 울타리는 항상 밖에 세워지는 것이 아니다. 훨씬 효과적인 울타리는 내 안에서, 나를 설득해 멈추게 만든다.


이 소설에서 가장 흥미로운 것은 ‘진실’이라는 단어가 받는 대우다. '진실의 가치가 지나치게 과장되어 있다'라고 말하는 루미의 아빠이자 죽은 제이의 동생인 조이의 독백은 억세다. 그러나 그는 공허한 냉소를 말하지 않는다. '고통받는 인간의 머리 꼭대기에서 의기양양해하는 진실 따위는 숭배하지 않는다.' 그는 진실 대신 인간을 택한다. 루미 역시 말한다. '죽은 사람을 위해 산 사람들의 행복을 깨뜨릴 수는 없어요. 그건 정의로운 게 아니라 어리석은 거예요.' 정의가 때로 사람을 파괴한다는 사실, 그 끔찍하게 낯선 진실 앞에, 정의가 무엇을 위해 봉사해야 하는지 다시 묻는다. 아마도 정의는 인간을 위해, 그리고 인간의 삶이 앞으로도 ‘움직일 수 있도록’ 존재해야 할 것이다. '나쁘게 변한 세계보다 사람들을 더 무기력하게 만드는 건 사슬에 묶여 꼼짝하지 않는 바퀴'라는 문장은 그래서 이 책의 윤리학이 된다. 멈추게 하는 정의는 악의 사촌이다.


순결의 정치가 불러오는 폭력에 대해서도 책은 오래 응시한다. '제이와 나는 서로의 재판관이 되어 주기로 했다… 맨발로 저울에 올라도 3그램에서 멈추는 순결무구한 인간.' 그 약속이 '태생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걸 깨닫는 순간, 제이는 무시무시한 재판관으로 변한다. 이미 죽었으니, 변했었다. 완전함을 설계하는 마음이야말로 타인을 벌하고, 결국 자신을 파괴한다. 종교의 자리, 법의 자리, 윤리의 자리를 ‘완전함’으로 채우려 할 때, 세계는 곧장 음영으로 갈라진다. 박지리 작가는 그 위태로운 광휘를 끝까지 보게 한다.


레오의 아버지인 버즈는 유명한 다큐멘터리 감독이다. 그 어떤 곳보다 공고한 프라임스쿨을 다큐멘터리의 소재로 삼아 촬영했던, 오래전의 수도원을 그대로 활용해 사용중인 학교 교정의 하늘은 평정했고, 카메라 속 새는 '양어깨에 돌을 매단 것처럼' 무리하게 날았지만, 맨눈으로 보니 사라져 있었다. 렌즈를 통해 본 현실과 맨눈의 현실. 새를 통해 비틀어 본 프라임스쿨의 엘리트들. 제도는 종종 렌즈를 우리에게 쥐여준다. 더 넓게 보라고. 그러나 렌즈는 언제나 프레임을 동반한다. 어떤 것은 보이고, 어떤 것은 지워진다. 이 소설의 아이들은 렌즈를 내려놓고, 맨눈으로 세계를 보기 시작하는 과정에서 어른이 된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아마도 자기 눈을 갖는 일일 것이다.


'창 없는 답답한 상자를 견디고, 무조건적 순종에 복종하는 척하고, 동류의식의 눈빛에 포섭되는 것'—그 모든 것으로 방은 완성된다. 우리가 학교라 부르고, 회사라 부르고, 가정이라 부르는 것들이 사실은 얼마나 자주 ‘창 없는 상자’로 변하는지 생각한다. '너도 우리와 똑같은 티슈잖아'라는 눈빛은 달콤한 끈적임으로 다가오지만, 실은 나를 얇게 만들어 한 번 쓰고 버린다. 그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문장을 쓰는 일인지도 모른다. 문장은 창문을 낸다. 통풍구 하나라도 스스로 뚫어 놓지 않으면, 방은 곧장 우리를 삼켜버린다.


다윈은 거울 앞에서 '얼굴과 이름과 존재감이 각각 다른 거울의 조각'처럼 어긋난 자신을 본다. 소년에서 어른으로 진화한다는 것은, 누락된 조각을 찾는 일이 아니라 이상할 만큼 새로운 조합을 스스로 발명하는 일에 가깝다. 미싱링크는 외부에 있지 않다. 나의 내일이 오늘의 나와 정확히 겹치지 않는 그 틈, 그 벌어진 혀처럼 나를 헐떡이게 하는 시간. 아이러니하게도 우리는 그 불일치 덕에 살아간다.


죽음에 대한 문장은 유난히 맑다. '인간이 언제 어디서 어떻게 죽을지 모르는 운명에 맞서는 유일한 방법은 자기 삶을 사는 것뿐'이고, '삶은 바람 속에 흔들리는 촛불 한 자루'라면, 남은 과제는 분명하다. 꺼질 것을 생각하며 떨지 말고, 켜져 있는 동안 무엇을 비출지 결정할 것. 그때의 유효기간은 소설의 말미에 레오의 영결식을 지나 각성한 다윈이 명징한 눈으로 구긴 '놀이공원 입장권’의 숫자처럼 비에 젖어 흐릿해진다. 오래 남기는 것보다 바로 지금 밝히는 일이 중요하다. 레오의 죽음 뒤에 나리는 눈송이들이 '무명의 공동 무덤'으로 합쳐지는 풍경도 슬프지 않다. 명예욕이 없는 자연 덕분에 문명이 가능했다면, 우리의 삶도 때로는 무명이어야 더 단단해진다. 박지리는 이름을 거두어들이는 법을 안다. 그래서 그의 문장은 기다란 묘비명이 아니라 손바닥 안의 작은 온돌 같다.


작품의 내용은 치밀하다.(그래서 책이 900페이지에 가깝긴 하지만.) 12월 폭동의 잔향, 9 지구 후디들의 오래된 얼굴들, 고위 관료의 비밀번호로 열어본 아카이브에서 ‘삭제된 사진’을 확인하는 두 아이, 레오의 궤곡, 그리고 끝내 밝혀지는 진실의 공포. 그러나 이야기가 결국 가리키는 것은 범인의 지문이 아니다. 그것은 방향에 가깝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무엇을 붙들고, 무엇을 놓아야 하는가. 진실을 드러내는 일이 언제는 사람을 살리고, 또 언제는 사람을 망가뜨리는가.


나는 두 개의 문장을 마주 보게 세워두고 굴려본다. 하나는 '바퀴가 다시 움직일 수 있느냐 없느냐', 또 하나는 '진실이 인간의 행복을 위해 봉사하지 않는다면 무슨 가치가 있을까'. 움직임과 행복. 그 사이에서 우리는 법과 윤리, 사랑과 책임을 조율해야 한다. 나를 포함한 누군가의 바퀴를 멈추게 하는 신념이라면 경계해야지. 차라리 서툴더라도 바퀴에 손을 얹어보자. 이때의 선은 찬란한 강령이 아니라, 아주 작은 추진력—'오늘을 밀어 올리는 한 칸'의 미세한 이동이다.


박지리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하는 듯하다. 완벽한 심판이 아니라 미완의 삶을 택하라고. 순결무구한 인간이 되려 하지 말고 자기만의 조합으로 흔들리며 견디는 인간이 되라고. 촛불이 켜져 있는 동안 당신 문장으로 당신 방에 창문을 더 내라고. 나와 당신의 문장은 그 창문 사이로 드나드는 바람의 이름일지도 모른다.


나는 오늘도 한 장의 사라진 사진을 떠올리며 쓴다.

당신과 나 사이, 아직 이름 붙이지 못한 미싱링크가 바퀴를 조금 더 굴리게 만들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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