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두울 때에야 보이는 것들이 있습니다 - 슈테판 츠바이크의 마지막 수업
슈테판 츠바이크 지음, 배명자 옮김 / 다산초당 / 202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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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이 보약이라는데. 언젠가부터 잠을 청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잠들기까지가 조금 힘들어서, 잠들고 나서도 깊게 잠들지 못해서 이런저런 방법을 취해보지만 뜻대로 되지 않더라고요. 천연성분의 수면보조제를 주로 활용합니다만 적응의 동물이라는 인간은 참 무섭습니다. 그래도 1시-6시의 루틴은 지키려고 애쓰며 늘 밤을 건너고 있는 것 같아요. 그래서인지 언젠가부터 밤이 좀 무섭습니다. 오늘의 밤은 무탈할지. 침대 밑에서 무언가 튀어나올 것 같아서는 아니고요 ㅎㅎ


습관처럼 밤을 늦게까지 끌고 가던 날이었습니다. 머리맡에 작게 누운 책 한 권이 있었죠. 제목부터 이미 하루를 비추는 듯했습니다. 『어두울 때에야 보이는 것들이 있습니다』. 슈테판 츠바이크의 마지막 에세이들이라 했습니다. 전쟁의 한가운데를 지나 브라질 망명지에서 쓴 글이라고요. ‘어두울 때에야’라는 말이 마음을 톡 건드립니다. 늘 밝음을 향해 서두르는 삶에서 조금이라도 어두울라치면 조명을 먼저 찾은 듯한데 츠바이크는 등을 돌려 어둠을 바라보라 말하는 것 같았습니다. 별은 낮에 안 보이듯 삶의 신성한 가치도 평온할 때는 종종 가려진다고요. 그 문장을 읽는 순간, 저는 제 생활의 조명 스위치부터 내려놓았습니다. 어둡다고 해서 모두 나쁜 게 아니라고, 어둠은 때로 조용한 눈이 되어 준다고요.


책은 사람 이야기로 시작합니다. 안톤. 직업도, 집도 절도 돈도 없이 마을 모두에게 존경받는 사람. 안톤에게 오래 머물렀습니다. '모두가 그에게 반갑게 인사하고 모두가 그와 악수를 나눈다.' 츠바이크는 안톤에게서 신을 교과서처럼 믿는 삶의 힘을 보았다고 썼습니다. ‘교과서처럼’이라는 표현에 작게 웃었습니다. 교과서 같은 현실은 늘 지루하게 느껴졌으니까요. 그런데 여기엔 다른 질감의 교과서가 있습니다. 안톤의 교과서는 문장 대신 태도로, 공식 대신 관계로 써 내려간 책이었거든요.


종종 효율과 성과라는 문장으로 하루를 채워 넣습니다. 그날의 성과가 곧 그날의 가치라는 믿음으로 말이죠. 그러나 안톤의 삶은 저를 멈춰 세웠습니다. 가치가 성과에서만 증명되는 것이 아니라면, 오늘의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이 ‘얼마나 해냈는가’보다 먼저여야 한다는 걸 보여준 사람이라서요. 츠바이크는 '우리의 진정한 안전은 가진 재산에 있지 않고, 우리가 누구고 어떤 사람이 되느냐에 달렸다'라고 했습니다. 그 밑줄을 거듭 읽으며, 서랍 속에 든 온갖 명함이며 자격증보다 제 이름을 스스로 보증할 수 있는 태도 한 줄이 더 든든할지 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


책을 계속 짚다 보면 어느새 우리는 ‘시대’로 이동합니다. '이 시대의 우리는 정말로 세계적 격변을 모두 목격하고 그것에 빈틈없이 참여하고 있을까?' 츠바이크의 물음은 뉴스 알림이 쉬지 않는 스마트폰 화면을 연상시킵니다. 쏟아지는 수많은 사건사고를 따라갈 여력과 참여의식을 우리는 갖추었는가. 저는 솔직히 그렇지 못합니다. 따라가고 알고자 하는 욕심과 버거움 사이에서 중심을 잃어가죠. 츠바이크는 여기서 해명을 내놓습니다. '우리의 심장은 너무 작아서 일정량 이상의 불행을 감당하지 못한다.' 공감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너무 많은 일이 벌어지기 때문이라고요. 이 문장은 변명이 아니라 인간의 구조적인 모습에 대한 인정입니다. 저는 이 문장을 개인의 윤리로 받아들였습니다. 끝없이 연결된 세상에서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선을 정하는 것, 그 선을 정하되 무감각해지지 않도록 자주 손을 얹어보는 것.


그래서 제 삶에 스스로 할 수 있는 작은 실천을 채워 넣습니다. 감당 가능한 거리만큼만 가까이 가서 읽고, 가능한 범위 안에서 사회적인 이슈에 작게나마 참여하기. 주변 사람들의 일상에 조금일지라도 관심 갖기. 그것이 작은 심장이 포기하지 않고 뛰게 만드는 리듬이 되길 바라면서요.


'평범하지 않은 사건들이 사방에서 벌어지더라도 일상생활은 평범하게 계속 이어진다.' 츠바이크의 이 문장은 냉혹한 관찰이자 따뜻한 위로입니다. 세상은 격랑인데 밥은 여전히 지어야 하고, 신발에 두 발을 꿰고 출근길을 나서야 합니다. 이 문장을 욕망의 속도 대신 생활의 속도로 읽었습니다. 생활은 늘 작은 단위의 반복으로 유지됩니다. 커피를 내리고, 메일에 답하고, 아이의 숙제에 관심을 갖고, 저녁 약속을 소중하게 생각합니다.


때로 이런 반복이 지겹고 허무해 보이기도 하죠. 그런데 츠바이크는 말합니다. 일상이 계속된다는 사실 자체가 인간을 인간으로 지탱해 준다고. 전쟁 중에도 개는 산책을 나가고, 시장은 문을 열고, 공연장은 불을 켭니다. 그 평범함은 사치를 가장한 방치가 아니라 파괴에 맞서는 가장 묵직한 버팀일지도 모릅니다. 매일 밥을 짓는 손, 그 손이 역사의 방향을 바꾸진 못해도 한 사람의 방향을 바로잡을 수는 있으니까요.


그러나 일상만으로는 부족한 순간이 있습니다. 무엇을 선택할지가 삶을 바꿀 때. 츠바이크는 '수백 가지 사소한 일에 분산되고 쪼개지는 의지를 진정으로 원하는 한 가지에 집중하는 영혼의 결단'을 말합니다. 결단은 화려한 구호가 아니라 주의를 집중하라는 다른 의미의 이름입니다. 노트북이나 스마트폰의 화면을 닫고, 회의를 줄이고, 오늘 반드시 해야 할 한 가지를 고르는 일. 마음을 가다듬는 것은 사실 기술이 아니라 태도입니다. 가다듬지 못한 마음으로는 선한 의지도, 높은 역량도 오래가지 못한다는 것을 여러 번의 소진을 통해 배웠습니다.


어두운 시대에 무엇을 믿을 것인가. 츠바이크는 '우리 함께합시다. 각자의 나라를 위해, 각자의 언어로, 각자의 작품과 삶으로'라고 씁니다. 각자의 자리에서, 각자의 언어로, 서로가 약속한 만큼의 일을 해내는 것. 거창한 선언 대신 매일의 성실로 쌓이는 신뢰. 우리는 서로를 믿고 서로의 일을 신뢰할 때에 ‘명예롭게 의무를 완수’할 수 있다고요.


함께라는 말이 종종 부담스러울 때가 있습니다. 다 같이 하자는 말 뒤에 때로는 공평하지 않은 부담이 숨어 있기 때문인데요. 츠바이크의 함께는 강요가 아닙니다. 각자의 언어, 각자의 작품과 삶으로 참여하자는 요청입니다. 저는 이 각자의 윤리가 좋습니다. 각자가 제 목소리로, 제 속도로, 그러나 동시에 서로의 실패에 등을 돌리지 않는 방식으로 연결되는 것. 그 연결의 최소 단위는 다정한 말 한마디와 작은 몸짓일 겁니다. 그는 그것이 불행과 고통을 견디게 한다고 믿었습니다.


결국 제목으로 되돌아옵니다. '영원한 별들이 얼마나 찬란하게 하늘에 떠 있는지 알려면, 먼저 어두워져야 합니다.' 제게 이 문장은 ‘불행을 미화하라’는 뜻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어둠을 측정하고 잘 재단할 눈금을 갖추라는 뜻으로 읽혔습니다.


밝기만을 기준으로 삼으면 삶은 금세 과장됩니다. 반대로 어둠의 층위를 식별할 수 있을 때 우리는 작게 빛나는 것들을 놓치지 않습니다. 아이와 함께하는 산책, 새로 피어나는 식물의 이파리, 늦었지만 진심 어린 사과 한마디, 고단했던 하루를 마치며 씻겨 나가는 미세한 후회들. 저는 이 작은 빛들이 어둠에서만 보인다고 믿게 되었습니다. 낮의 환함은 넓지만 얕고, 밤의 빛은 좁지만 깊습니다.


이 책은 저에게 ‘나는 무엇을 이루었는가’보다 ‘나는 어떤 사람인가’를 앞세우는 질문을 남겼습니다. 안톤이 가르쳐 준 태도죠. 그리고 모든 비극에 반응하지 못하더라도 나만의 거리감을 유지할 수 있는 작은 참여. 산만함이 미덕처럼 포장되는 시대에 한 가지로 마음을 모으는 연습. 그리고 그 모든 것 위에 각자의 언어로 서로를 신뢰하자는 약속.


어둠은 사라져야 할 대상일 수 있지만 때로는 배워야 할 스승입니다. 어둠은 우리를 가만히 앉혀 작은 불빛을 보게 합니다. 츠바이크가 남긴 이야기들은 그 불빛으로 의자를 조금만 돌리자고 말합니다. 저는 오늘도 그 의자를 아주 조금, 제 자리에서 당겨봅니다. 삶의 밝기만이 아니라 명암을 함께 조절하는 법을 익히면서요. 그리고 이 문장을 조용히 마음에 새깁니다. 우리는 여전히 어두운 시대를 지나고 있지만, 그럼에도 서로의 말 한마디와 몸짓 하나로 별빛을 나눌 수 있다고요. 충분하지 않겠지만 그것 없이는 아무것도 시작되지 않는다는 것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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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선 프롬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67
이디스 워튼 지음, 김욱동 옮김 / 민음사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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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가운 뉴잉글랜드의 겨울, 그곳에는 영원히 해동되지 않을 것 같은 슬픔이 깃들어 있습니다. 이디스 워튼의 『이선 프롬』은 바로 그 얼어붙은 풍경 속에서 피어난 비극적인 사랑 이야기를 담고 있는데요. 『순수의 시대』에서 상류 사회의 위선과 내면의 갈등을 날카롭게 파헤쳤던 이디스 워튼. 이 작품에서는 전혀 다른 배경인 가난하고 평범한 시골 마을의 한 남자를 조명합니다. 이선 프롬의 이야기를 따라가며, 겉으로는 아무 문제없어 보이는 삶 속에도 얼마나 깊고 조용한 고통이 자리잡고 있는지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제가 그은 밑줄들은 그 고통의 흔적들을 더듬어 가는 길잡이가 되어주었습니다.


저는 이 책을 읽으며 우리의 삶이 '선택의 총합'이 아니라 때로는 '포기의 총합'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무언가를 얻기 위해 우리는 선택을 하지만 이선 프롬은 자신이 사랑하는 모든 것을 지키기 위해 결국 모든 것을 포기해야만 했거든요. 그의 인생을 따라가다 보면 선택의 가능성이 박탈된 채 오직 체념과 의무만으로 채워져 있을 뿐 아니라 서서히 망가져 가는 과정까지 눈에 담깁니다.


장소: 삶을 가두는 거대한 비석

가장 먼저 시선을 사로잡은 것은 '장소'가 가진 압도적인 무게감이었습니다. 이선 프롬은 공부를 포기하고 병든 부모를 위해 돌아온 스타크필드라는 마을에 갇혀 지냅니다. 그의 삶은 오직 그곳에서만 허락된 듯했습니다.


지난 몇 해 동안 이 말없는 선조들은 그의 조바심, 변화의 자유를 갈구하는 그의 욕망을 빈정대 왔던 것이다. ‘우리는 이곳을 결코 떠나지 못했다..... 어떻게 네가 그럴 수 있겠느냐?‘라는 구절이 묘석마다 쓰여 있는 듯했다. 문을 드나들 때마다 ‘나는 이곳에서 이렇게 살다가 마침내 저들에게로 가겠지 ‘하며 몸서리치곤 했다.


이 문장은 이선의 삶을 짓누르는 거대한 운명을 보여줍니다. 그의 선조들이 묻힌 묘비는 단순한 돌덩이가 아니라 그에게 속삭이는 과거의 목소리이자 미래의 비석이었죠. 그가 느끼는 조바심과 자유를 향한 갈망은 이 묘비들이 내뿜는 ‘너도 우리와 다르지 않아’라는 싸늘한 기운 앞에 매번 좌절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스타크필드라는 물리적인 공간은 그저 배경으로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이선 프롬의 모든 욕망을 가두고 그의 운명을 결정짓는 하나의 캐릭터처럼 느껴졌습니다. 우리는 모두 삶의 어느 지점에 박혀버린 채 그 자리와 장소가 던지는 운명의 무게를 감당하며 살아가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과 함께. 이선은 바로 그 무게에 짓눌려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는 인류의 보편적인 초상을 대신하고 있었습니다.


사랑: 삶의 가능성을 엿보는 짧은 순간

그런 꽉 막힌 환경 속에서 이선에게 한 줄기 빛으로 다가온 존재가 바로 아픈 아내 지나의 조카 매티였습니다. 매티는 이선에게 잊고 살았던 삶의 활기, 그리고 무엇보다 정신적인 교감이라는 기쁨을 선물하는데요.


걸어가는 길의 발자국마다 매티의 존재가 생생하게 살아 있었고, 하늘을 배경으로 뻗은 나뭇가지나 둑을 덮은 가시덤불이나 달콤한 추억이 깃들지 않은 것이 없었다. 한 번은 고요한 가운데 물푸레나무에서 들려온 새 지저귀는 소리가 너무 그녀의 웃음소리 같아 가슴이 죄었다가 다시 팽창했다.


이선은 매티와 함께하며 비로소 삶의 아름다움을 다시 감각합니다. 그의 메마른 감수성은 매티라는 존재를 통해 되살아났고, 자연의 풍경 하나하나가 그녀의 웃음처럼 들리는 마법을 경험하죠. 하지만 그 마법 같은 순간은 현실의 잔혹함과 대비되며 더욱 애틋하고 슬프게 느껴집니다. 매티를 향한 이선의 마음이 깊어질수록 매티가 다른 사람과 행복해하는 모습을 볼 때마다 그는 절망에 빠집니다. 그녀의 즐거움은 그에게 무관심으로 다가왔고, 그가 매티를 위해 존재한다고 믿었던 모든 행동과 표정들은 사실 매티가 다른 이들에게도 보였던 평범한 모습이었음을 깨닫습니다. 매티는 이선에게 '삶의 가능성'을 상징하는 존재였지만, 그 가능성은 잡힐 듯 잡히지 않는 신기루와 같았죠.


절망: 영혼을 묶는 보이지 않는 사슬

이선은 자유를 향한 욕망과 병든 아내를 돌봐야 한다는 의무 사이에서 고통을 느낍니다. 매티가 떠나기로 결정한 날, 이선은 그녀에게 절망적인 고백을 합니다.


“맷, 난 손발이 꽁꽁 묶였어. 내가 해 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어.” 그가 다시 말을 꺼냈다. “이선 아저씨, 가끔 제게 편지해 주세요.” “아, 편지가 무슨 소용이 있겠어? 난 손을 뻗어 너를 만지고 싶어. 너를 위해 모든 것을 하고, 또 너를 보살피고 싶단 말이야. 네가 아플 때, 네가 외로울 때 같이 있고 싶어.”


이선은 '손발이 꽁꽁 묶였다'라고 말합니다. 단순히 그의 경제적, 사회적 상황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영혼 자체가 거대한 사회적 제약과 도덕적 의무라는 이름의 사슬에 묶여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죠. 그는 매티에게 그 어떤 도움도 줄 수 없었고, 함께 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가 바란 것은 그저 매티의 곁에 있어 주는 것, 그녀의 아픔과 외로움을 함께 나누는 것뿐이었지만 그것마저 허락되지 않습니다. 그들의 비극은 사랑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현실의 무거운 벽을 넘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겠지요. 자유를 향한 갈망이 깊어질수록 그의 영혼은 더 깊은 고독의 감옥 안에 갇히게 됩니다.


비극: 죽음마저 허락되지 않는 삶

『이선 프롬』의 진정한 비극은 이들이 죽음 대신 선택한 결과로써 완성됩니다. 이들은 함께 죽음으로써 영원한 사랑을 지키려 했지만 결국 실패하고 맙니다. 그리고 이들의 운명은 가장 잔혹한 형태로 꼬여버리죠.


장례가 끝난 뒤에 지나가 떠날 차비를 하는 것을 보고 이선은 농장에 혼자 남게 된다는 근거 없는 공포감에 사로잡혔다. 그래서 자기도 무슨 말을 하는지 깨닫지 못한 채 지나에게 자기 집에 계속 머물러 달라고 부탁했다. 그 후로 가끔 그는 어머니가 겨울이 아니라 봄에만 돌아가셨어도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하곤 했다.


이선이 가장 두려워했던 것은 홀로 남는 공포였을 겁니다. 그런데 그는 어머니의 병수발을 위해 돌아온 후 결국 지나를 놓지 못하고 매티를 잃을까 두려워 함께 죽음을 택했지만 그 결과는 매티의 영원한 병수발을 들고, 지나와 함께 한 집에 갇히는 기이하고 잔혹한 공존이었습니다. 이선에게는 이제 진정한 자유도, 죽음이라는 해방도 없습니다. 그의 삶은 영원히 고통스러운 상태로 멈춰버립니다. 그의 비극은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삶의 가능성이 완전히 소멸된 채 영원히 지속된다는 점에서 잔인하게 다가옵니다.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이선 프롬의 이야기를 덮으며 문득 우리 시대의 '스타크필드'는 무엇일까 생각해 봅니다. 물리적인 공간이 아니라 우리를 가두는 보이지 않는 감옥. 안정이라는 이름의 틀, 타인의 시선이라는 벽, 그리고 '당연히 해야 한다'는 수많은 의무들. 어쩌면 우리 모두는 각자만의 스타크필드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하지만 이디스 워튼이 이선 프롬을 통해 우리에게 전하고자 한 것은 단순한 절망은 아니었을 겁니다. 오히려 그 절망을 응시하는 용기, 그리고 그 속에서도 삶의 의미를 찾아가는 인간의 존재 방식에 대한 깊은 성찰이겠죠. 이선이 매티와 함께 나눈 짧은 순간들, 자연 속에서 느꼈던 생동감, 그리고 누군가를 진심으로 사랑했던 그 마음 자체가 이미 삶의 가능성이었을 겁니다.


선택할 수 있다는 것

이선 프롬과 달리, 우리에게는 여전히 선택의 여지가 있습니다. 물론 그 선택들이 항상 쉽거나 완전한 자유를 보장하지는 않겠지만 적어도 우리는 우리만의 매티를 찾을 수 있고, 우리만의 방식으로 사랑할 수 있으며, 작은 것이라도 변화를 만들어낼 수 있을 겁니다.


이선의 비극을 통해 오히려 현재 주어진 선택의 소중함을 깨닫습니다. 자유가 완전하지 않더라도, 제한적이더라도, 우리에게는 여전히 결정할 수 있는 순간들이 있다는 것. 그리고 그 순간들을 놓치지 않는 것이 이선 프롬의 이야기가 우리에게 남기는 가장 중요한 교훈이 아닐까 합니다.


어쩌면 진정한 비극은 선택의 기회가 주어졌음에도 두려움이나 관성 때문에 그것을 포기하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이선 프롬의 얼어붙은 겨울을 기억하며, 우리에게 주어진 봄을 놓치지 않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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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의 마지막 여름
지안프랑코 칼리가리치 지음, 김현주 옮김 / 잔(도서출판)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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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문장은 그저 책 속에만 머무르지 않고 우리 삶의 한가운데로 걸어 들어와 가만히 말을 건넵니다. 그렇게 우리를 가만히 멈춰 세우고, 우리가 그동안 당연하게 여겨왔던 길에서 잠시 벗어나게 만들죠. 지안프랑코 칼리가리치의 『도시의 마지막 여름』이 제게 그런 책이었습니다. 이 책의 문장들은 화려한 수식 없이 텅 빈 하늘처럼 고요했고, 그 안에서 저는 멸종된 종에 속한 한 남자의 위태로운 걸음 위로 제 그림자를 겹쳐 볼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삶의 치열한 경주에서 기꺼이 스스로 제외된, 혹은 도저히 합류할 수 없었던 존재들이 누린 방관이 실은 삶의 진실에 다가가려는 가장 우아한 방식일 수도 있다는 잔잔한 깨달음은 덤이었고요.


지안프랑코 칼리가리치는 저널리스트이자 시나리오 작가로 활동하며 삶의 단면을 섬세하게 포착해 온 작가입니다. 그의 작품들은 어쩌면 빛보다 그림자에 더 주목하고 있다는 인상을 주는데요. 『도시의 마지막 여름 』역시 그렇습니다. 1970년대의 혼란스러운 로마를 배경으로, 야망이라곤 눈을 씻고 찾아도 찾아볼 수 없는 서른 살의 남자 '레오 가짜라'의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그는 미래에 대한 구체적인 계획 없이 신문사에서 용돈벌이를 하며 그저 하루하루를 흘려보내죠. 그의 눈에 로마는 사랑을 갈구하는 짐승과 같았고, 치열하게 사는 이들은 하나같이 불만족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었습니다.


'나 같은 경우에는 다행히 그 치열한 경주에서 기꺼이 제외될 수 있었다'는 그의 독백에서, 누가 정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삶이라는 여정에 성공이라는 공식으로 점철된 이 사회에 순응하지 않는 그의 태도를 봅니다. 하지만 그것은 삶을 포기한 패배자의 선언이 아니었습니다. 모두가 결승점을 향해 달려갈 때 그는 그들의 모습을 관찰하며 삶은 그저 '방관자의 시선으로 바라봐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는 것이죠. 모두가 동의하는 가치 대신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을 따랐을 뿐이라는 그의 담담한 고백은 오히려 거대한 흐름 앞에서 자신만의 속도를 지키려는 한 인간의 고독하고 단단한 의지처럼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레오에게 '로마'라는 도시는 단순한 공간적 배경이 아니었습니다. '로마라는 도시는 기억을 태워 버리는 특별한 성질을 갖고 있기에', 로마는 그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삶의 기억들을 선택적으로 남기거나 지우는 주체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최고의 사랑이 아닌 어중간한 마음으로는 이곳에서 살아갈 수 없다'는 구절은, 레오가 로마에서 느꼈던 환멸과 갈망을 동시에 보여주는데요. 이는 비단 로마라는 도시만의 이야기는 아닐 것입니다. 우리 역시 어떤 삶의 공간에 속하기 위해 온전히 마음을 바치거나 혹은 그곳에서 버려질 것을 각오해야만 합니다. 로마라는 짐승은 어쩌면, 우리의 삶 자체가 내포하고 있는 모순을 상징하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요.


이 책에서 가장 아픈 문장들은 '남은 것'들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친구 그라지아노가 던진 '우리는 멸종된 종에 속하기 때문이지. 우린 그저 우연히 살아남은 사람들인 거야'라는 이야기처럼, 레오는 끊임없이 자신의 존재를 '남은 음식(avanzo)'에 비유합니다. 연인 아리아나를 '다른 사람의 여자일 때만 내 것이 될 수 있다'라고 느끼는 것도, 그녀가 누군가의 잔재일 때만 자신에게 허락되는 존재라고 생각하기 때문인데요. 사랑마저도 온전한 형태로 얻지 못하고 누군가가 남기고 간 흔적 속에서만 자신의 것을 찾을 수 있는 레오의 삶은 황량하기 그지없습니다.


그래서 문득 깨닫습니다. 우리가 잃어버린 것, 남겨진 것, 혹은 온전히 내 것이 되지 못하는 것들 속에서 오히려 삶의 가장 진실된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을요. '만난 사람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가 떠나온 사람들을 위한 존재'라는 문장은, 우리가 남기고 온 흔적들, 그리고 우리에게 남겨진 모든 잔재들이 사실은 지금의 우리를 이루는 가장 중요한 조각들이라는 것을 비틀어 내비칩니다. 가장 아팠던 부분에서 가장 깊은 깨달음이 피어나는 순간이었달까요.


레오가 밀라노행 기차에 오르며 '기차가 다른 방향, 그 어떤 방향으로 향해도 내게는 마찬가지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에 슬픔이 밀려왔다는 부분에서는, 삶의 목적지를 상실한 한 인간의 절망이 느껴졌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어느 곳에도 닿지 못하는 존재의 자유로움이 동시에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그는 종착역에 닿기 위해 발버둥 치는 대신, 잠시 멈춰 서서 소시지 샌드위치를 먹으며 '이것만으로도 올 가치가 있다'라고 생각합니다. 삶의 거대한 의미를 찾기보다, 순간의 작은 만족을 긍정하는 레오의 태도는 오히려 삶을 온전히 사랑하는 방식이었겠지요.


『도시의 마지막 여름』은 이처럼 멸종된 종의 감정들을 담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책이 오랜 시간 동안 독자들에게 사랑받을 수 있었던 이유는, 어쩌면 우리가 모두 내면에 '남은 자'의 마음을 조금씩은 품고 있기 때문이지 않을까요. 치열한 경주에서 잠시 이탈하고 싶은 마음, 관계 속에서도 고독을 느끼는 마음, 그리고 세상의 거대한 허무함 앞에서 길을 잃는 마음. 이 모든 감정들이 칼리가리치가 그린 레오와 그라지아노에게서 우리의 그림자를 발견하게 만듭니다.


우리는 모두 삶의 방관자이자 떠나온 사람들을 위한 존재이고, 누군가의 잔재로 남겨진 사랑을 껴안으며 살아갑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이 이유 없는 슬픔을 만들어내기보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을 향한 진정한 연민을 품게 만든다는 사실.


마지막으로 레오가 생각했던 '태어나지도 못한 모든 것과 영원히 죽은 것들까지, 그 모든 것을 받아 주는 바다'에 대한 사유는, 그의 깊은 고독이 결국 세상의 모든 슬픔과의 이어짐은 아니었을지 돌아보게 됩니다. 우리의 작은 고독은 결코 혼자만의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이 품고 있는 거대한 슬픔의 한 부분이라는 것을요.




결국 칼리가리치가 우리에게 건네는 것은 '다르게 살아도 괜찮다'는 허락이 아니라 '다르게 살 수밖에 없는 우리'에 대한 깊은 이해이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레오처럼 치열한 경주에서 스스로를 제외시키는 것이 때로는 가장 용기 있는 선택일 수 있다는 것, 그리고 그 선택이 만들어내는 고독이 결코 무의미한 것이 아니라는 걸 말이죠.


어쩌면 우리는 모두 각자의 로마에서 각자의 방식으로 멸종되어 가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 멸종의 과정에서도 샌드위치 한 입의 소박한 기쁨을 놓치지 않는 것, 잔재로 남겨진 사랑이라도 그것을 온전히 받아들이는 것, 이런 작은 긍정들이 모여 우리만의 여름을 만들어내는 게 아닐까요.


『도시의 마지막 여름』을 덮으며 깨닫습니다. '마지막'은 끝난다는 슬픔이 아니라, 그 마지막까지도 여름을 품은 따스함이 있다는 것을요. 우리의 존재가 비록 남은 것들로 이루어져 있을지라도, 그 자체로 누군가에게는 한여름의 기억이 될 수 있다는 조용한 위로로 다가왔습니다.


그래서 이 책을 읽는 분들이

자신만의 속도로 자신만의 방향을 향해 걸어가는 것이

얼마나 아름다운 반역인지 알아차리길 바랍니다.


결국 우리는 모두 떠나온 사람들을 위한 존재이면서 동시에

누군가가 떠나올 수 있도록 존재하는 사람들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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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그레이션 - 북극제비갈매기의 마지막 여정을 따라서
샬롯 맥커너히 지음, 윤도일 옮김 / 잔(도서출판)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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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망치듯 떠도는 마음도 언젠가 제자리로 회귀한다는 것을 프래니의 항로를 통해 배웠습니다.


샬롯 맥커너히의 『마이그레이션』은 어찌 보면 기후소설이자 항해기이지만, 제게는 '어디에도 정착하지 못했던 한 인간이 자기 몫의 사랑을 되찾는 기록'으로 읽혔습니다. 작가는 호주 시드니에서 태어나 시나리오를 공부했다는데요. 이야기를 밀어 올리는 힘이 굵고 선명합니다. 멸종, 바다, 기후라는 거대한 의제를 앞세우면서도 결국 독자의 가슴에 남기는 것은 ‘한 사람의 결심과 회귀’ 인데요. 그녀는 이 작품을 통해 계속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왜 떠나고 무엇으로 살아남으며 어디에 속하려 하는가. 인간이 자연을 파괴하는 이야기만이 아니라 자연이 인간을 기어이 끌어안아 회복시키는 이야기에 대해서 말이죠.


주인공 프래니는 북극제비갈매기의 마지막 이동을 따라 남극으로 가기로 결심합니다. 언제 처음 이 여정을 꿈꾸기 시작했는지 자신도 모른 채 어느 순간 그 꿈이 삶을 통째로 집어삼켰다고 고백하죠. 저는 이 대목에서 계획한 미래보다 더 오래 품을 수 있는 것이 본능이라는 사실을 떠올립니다. 삶에는 계산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충동의 때가 있죠. 그 충동이 무모함일 때도 있지만 가끔은 살아내는 방향으로 우리를 밀어 올립니다. 프래니의 의지는 '끔찍하리만큼 강력'했고, 그 과잉의 힘이 그녀를 바다로 밀어 넣었습니다. 누군가는 무책임이라 말하겠지만 저는 그 과잉이야말로 상실을 건너는 인간의 근력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프래니는 자신의 삶에 '남겨질 것이 아무것도 없다'라고 말합니다. 아이도, 이름을 남길만한 업적도 없었죠. 그 고백은 무력해 보였지만 이상하게 단단했습니다. 영향력이란 것은 무엇을 남기느냐로만 측정되지 않고 '세상에서 무엇을 얻었는지'로도 측정된다는 문장을 만나며 저는 오래 멈춰 서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흔히 삶을 합계로 이해합니다. 무엇을 이뤘고, 무엇을 남겼는지. 하지만 이 책은 반대로 묻습니다. 당신은 무엇을 받아들였는가. 프래니를 빌어 이야기하는 바다의 감각, 새의 비상, 타인의 연약함, 그리고 본성의 야생성 같은 것들. 저는 이 질문을 제 일상으로 가져왔습니다. 오늘 하루, 내가 나의 세계로부터 배운 한 조각이 있다면 그게 바로 삶의 총합이라고.


프래니의 남극을 향한 항해는 순탄치 않습니다. '내 새들의 길을 보여주던 빨간 불빛'을 잃고, 폭풍 속에서 길잡이를 놓치는 장면에서 저는 프래니의 말보다 침묵이 더 크게 들렸습니다. 삶의 어느 시절에나 나침반이 고장 나고, 젖은 지도에 한탄하며, 함께 선 데크가 기울기도 하죠. 그때에 우리가 붙잡게 되는 것은 기술이나 용기가 아니라 관계입니다. 서로에게 시기하며 상처를 내기도, 누구는 화를 삼키고, 누구는 등을 다칩니다. 이 무너짐의 순간들이 오히려 공동체를 만들어냅니다. 저는 여기서 ‘구원을 수행하는 평범함’을 보았습니다. 선동하는 위대한 구호가 아니라 괜찮냐고 묻는 선의, 등을 토닥이는 손, 키를 대신 잡아주는 동료. 거대한 재난의 시대에 우리가 쥘 수 있는 것은 이런 작고 구체적인 몸짓들이 아닐까요.


프래니의 내면을 비추는 또 하나의 거울은 할머니에 대한 기억입니다. '아무도 나를 사랑하지 않을 때 조용히 나를 사랑해 준' 사람. 그 사랑을 제때 알아보지 못했다는 자책은 바다의 소금기처럼 오래 남아 그녀를 자극합니다. 저는 이 구절을 읽으며 내 삶의 조용한 사랑들을 돌아보았습니다. 하루의 고단함에도 내색하지 않고 자식들의 끼니를 걱정하셨던 어머니, 늦은 귀갓길에도 따스하게 반기는 가족, 번번이 떨어지는 면접에도 곁을 내어주던 친구들. 우리는 종종 사랑을 찾으러 먼바다로 나가지만 실은 그 사랑이 우리를 육지로 되돌리는 등대가 됩니다. 잃어버려서야 보이는 것들. 너무 가까워 오래 보지 못했던 것들. 프래니의 항해는 사라진 것에 대한 쫓김이면서 이미 받은 것을 뒤늦게 수납하는 여정이기도 했습니다.


이 소설에서 바다는 대상이 아니라 환경이며, 환경이 아니라 생명입니다. '우리는 바다에 대해서 전혀 몰라요.'라는 문장은 무지의 고백이 아니라 경외의 선언에 가깝습니다. 바다는 산소를, 이동을, 계절을, 그리고 이야기의 박동을 제공합니다. 프래니는 바다를 두려워하지 않는 자신을 이상하게 여기지만 저는 그 감정이 두려움의 부재가 아니라 사랑의 과잉이라고 읽었습니다. 두려움이 사라져서가 아니라 사랑이 그것을 덮을 만큼 커졌기 때문에 가능한 항해. 우리가 무언가를 지킬 때 흔히 드는 자세이지요. 무릎이 떨리지만 계속 서 있는 것. 울컥하지만 계속 말하는 것.


'삶에 대한 단서'를 찾아 나선 프래니가 마지막에 껴안은 단서는 어쩌면 남극도, 북극제비갈매기도 아니었을지 모릅니다. 저는 그 단서를 이렇게 적어두었습니다. 인간은 자연의 일부로서 살아간다는 것. 떠남은 끝이 아니라 귀환의 다른 이름이라는 것. 영향력은 남김보다 배움에 가깝다는 것. 그리고 희망은 상황의 낙관이 아니라 태도의 지속이라는 것. 이 네 개의 단서는 저를 일상의 뭍으로 다시 데려왔습니다. 설거지를 하다가도, 아이가 문을 쾅 닫는 소리를 들을 때도, 회사에서 본질을 빗겨 난 보고서를 마주하는 순간에도 나는 지금 무엇을 배우고 있는가, 무엇을 받아들이고 있는가를 묻게 됩니다.


샬롯 맥커너히는 『마이그레이션』에서 멸종을 말하지만, 더 깊게는 ‘살아있음의 윤리’를 쓴다고 느꼈습니다. 세계가 붕괴하는 소리 속에서도 인간이 인간으로 남기 위해 필요한 감각들을 한 사람의 목소리로 끝까지 밀고 갑니다. 그래서 이 소설의 비극은 절망으로 닫히지 않습니다. 마지막 얼음 조각 위에서 비상하는 새들과 같이, 희망은 대상이 아니라 방향으로 남습니다. 누구의 마음에도 오래 머물지는 않지만 필요할 때면 언제든 찾아와 길을 가리키는 바람처럼요.


이 소설을 통해 제 삶 속에 문장을 하나 더 기우려 합니다. 무엇을 남길까 걱정하는 대신 오늘 무엇을 제대로 받아들일 것인가를 묻는 일. 내 힘으로 막을 수 없는 거대한 변화를 두려워하기보다 적어도 내 일상에서 소멸을 늦추는 선택을 하는 일. 숙제로 지친 아이의 피곤한 등을 가볍게 두드리고, 창문을 열어 바람의 냄새를 들이는 일. 작지만 지속 가능한 태도로 세계와 다시 연결되는 일.


결국 프래니가 찾아 헤맨 것은 남극이 아니라 다시 돌아올 마음이었을 겁니다. 떠돌던 마음이 다시 제자리로 돌아올 때 우리는 비로소 자기 몫의 사랑을 이해합니다. 그리고 그 사랑은 바다의 호흡처럼 우리 안팎을 오가며 삶을 조금씩 바꿔 놓습니다. 오늘의 저는 그 호흡을 따라 제가 받은 것들을 천천히 받아들이는 쪽으로 노를 젓겠습니다. 그리고 여러분도 각자의 바다에서 자기만의 단서를 발견하기를. 우리는 아직 돌아갈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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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황석희 - 번역가의 영화적 일상 에세이
황석희 지음 / 달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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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모두 번역가다. 타지의 언어를 우리말로 옮기는 번역만이 아니라 일상의 무수한 표정과 기분, 눈빛과 기류를 나름의 언어로 받아들이는 번역가다. 황석희의 책을 읽으며 가장 강하게 다가온 사실이다. 누군가의 말을 이해하는 순간부터 아침 공기의 냄새에서 계절을 해석하는 일까지, 결국 삶은 번역의 연속이다. 나는 그 말에 오래 머물렀다.


황석희는 영화 번역가다. <데드풀>, <보헤미안 랩소디>, <아바타: 물의 길> 같은 작품을 번역한 그의 이름은 영화가 끝날 즈음 스크린에 반짝 떠오른다. 그때까지 기다릴 일도 없겠지만. 이상한 일이다. 감독도 배우도 아닌데. 자막 하나로 영화의 결이 달라진다. 이 책은 번역가라는 직업의 무게와 즐거움, 그리고 그 너머의 일상을 솔직하게 풀어놓았다. 하지만 그 이야기는 단순히 직업인으로서의 고백이 아니라, 어떻게 ‘번역하며 살아가는가’에 대한 사유로 이어진다.


'실수는 누구나 하지만 인정하고 고치는 건 쉽지 않다. 늘 자존심의 문제거든.' 그는 영화 번역에서의 오역을 예로 들며 이리 고백한다. 하지만 그 말은 번역만의 이야기는 아니겠지. 우리 삶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관계 속에서 잘못을 인정하고 고치는 일은 언제나 자존심과 맞닿아 있으니까. 이 대목을 읽으며 언젠가 아이가 커서 내게 묻는다면 이렇게 말해주겠다 다짐했다. 아빠는 반성에 자존심 같은 거 없다고. 번역이 언어를 옮기는 일이라면 반성은 관계를 옮기는 일일 것이다. 잘못을 인정하는 순간 마음은 상대에게 옮겨지고 서로는 조금 더 가까워진다.


그의 글에는 번역가로서의 자부심이 곳곳에 배어 있다. '내가 번역했다는 것 따윈 몰라줘도 상관없다. 누군가의 인생 영화를 내가 번역할 수 있었다는 감사함과 뿌듯함이면 충분하다.' 이 문장에 나는 직업에 대한 태도의 본질을 다시 생각했다. 우리는 대개 성과나 인정, 눈에 보이는 결과를 좇는다. 그러나 그는 번역가라는 자리를 행운이라 부른다. 관객들이 좋아해 주는 영화에 자신이 참여했다는 사실, 그 우연한 기회를 감사하게 여기는 태도. 그것이야말로 오래 버티게 하는 힘 아닐까. 내가 하는 일에도 같은 시선이 필요하다는 걸 깨닫는다. 성과보다 과정, 인정보다 감사.


황석희는 번역을 ‘집’에 비유한다. '자막은 영화 번역가가 사는 집이다. 그 작은 집에서 번역가를 내쫓아봐야 남는 건 온기 없이 텅 빈 집뿐이다.' 이 말이 마음에 오래 남았다. 자막 속에는 분명히 번역가의 숨결이 깃든다. 아무리 자신을 지워내려 애써도 그 언어에는 해석자의 체온이 배어 있다. 이 비유를 곱씹으며 글쓰기도 마찬가지이지 않을까 생각한다. 내가 어떤 책을 읽고 어떤 문장을 골라내는가, 그 자체가 이미 나의 번역이고 나의 집이다. 누군가 내 글을 읽을 때 보이지 않게 스며드는 온기는 결국 내가 어떻게 살아왔는가와 닿아 있을 테니까.


책에서 가장 큰 울림을 준 대목은 '우리는 모두 번역가'라는 선언이었다. 삶의 장면들은 번역의 연속이다. 연인의 짧은 메시지를 상황에 따라 달리 해석하는 일, 직장 상사의 표정을 서로 다르게 받아들이는 일, 아이의 침묵에 담긴 의미를 추측하는 일. 번역이란 결국 오역과 의역을 반복하며 가까스로 상대의 마음에 다가가는 과정이다. 영화에서는 정역이 필요하겠지만 일상에서는 그 오역조차 나름의 재미가 된다. 나는 이 문장을 읽으며 스스로에게 묻는다. 나는 내 일상을 어떻게 번역해 왔는가. 혹시 자존심과 두려움 때문에 오역을 정정하지 못한 건 아니었을까.


'과민성 이죽거림과 비아냥을 습관처럼 손가락과 입에 달고 산다… 우리는 갈수록 잔인해지고, 아니다, 그것만도 못하게 비열하고 저열해진다.' 언어가 무기가 되어가는 세상에서 그는 번역가로서 언어를 다루는 윤리를 강조한다. 이 말은 번역가에게만 필요한 것은 아니겠지. 우리 모두는 언어를 쓰는 순간 번역가이자 창작자이기도 할 테니까. 말은 언제든 칼이 될 수 있고 동시에 다리가 될 수 있다. 내가 쓰는 말들이 상대에게 상처를 주는 무기가 되지 않도록 그는 끊임없이 경계한다.


『번역: 황석희』는 직업인의 회고록이자, 일상을 새롭게 바라보게 하는 사유집이다. 나는 책을 덮으며, 번역은 결국 삶을 대하는 태도의 다른 이름이라는 것. 정확하게 옮기는 것도 중요하지만 때로는 의역으로 때로는 오역으로라도 서로를 이해하려 애쓰는 것. 그 불완전함 속에 인간다움이 있다.




나는 여전히 많은 순간을 잘못 번역한다. 아이의 표정에 담긴 뜻을 잘못 읽어낼 때도, 동료의 말을 오해하기도, 내 마음조차 엉뚱하게 해석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제는 두렵지 않다. 다시 물으면 된다. 상대가 눈앞에 있으니까. 그리고 그 모든 과정이 결국 번역이니까.


그래서 우리는 모두 번역가다. 완벽할 수 없기에, 오히려 더 다정해야 하는 번역가. 언젠가 어디에선가 누군가 이 글을 읽으며 그 안에 작은 온기를 발견한다면 그것으로 충분하겠다. 그렇기에, 나도 참 괜찮은 일을 하고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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