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퍼 포지셔닝의 전략가들 - 초파격의 차별화를 만드는 래디컬 컨셉의 법칙
김동욱 지음 / 래디시 / 2025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언제부터인가 회사에서 새로운 프로젝트를 맡거나, 어떤 일을 기획할 때면 습관처럼 '이 기술/솔루션 영역의 최근 트렌드는 뭐지?'를 먼저 검색하는 제 모습을 발견하곤 합니다. 늘 남들보다 한 발 앞서가야 한다는 생각, 혹은 최소한 뒤처지지는 말아야 한다는 압박감 때문일까요. 모두가 '지금은 이게 대세'라고 외치는 파도 위에서 어떻게든 균형을 잡으려 애쓰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과연 그 파도에 몸을 맡기는 것이 정답일까, 파도 자체를 만드는 것은 불가능할까 하고요.


바로 그때, 김동욱 작가님의 ‘슈퍼 포지셔닝의 전략가들’이라는 책을 만났습니다. 이 책은 '이제는 어떻게 상품을 팔까(selling)를 생각하지 마세요. 어떻게 마음을 파볼까(exploring)를 고민해야 합니다'라는 문장으로 저의 마음을 사로잡았죠. 트렌드를 쫓는 행위가 아니라, 사람들의 마음 깊숙한 곳을 탐험하고 그 안에 자리 잡는 것이 진짜 성공의 열쇠라는 깨달음을 얻게 된 순간이었습니다.



작가는 어떤 사람인가

이 책을 쓴 김동욱 작가는 23년간 광고 기획자로 일하며 수많은 성공적인 캠페인을 만들어 온 분입니다. ‘피키캐스트’, ‘우유 속에 해시태그’, ‘데상트 블레이즈’ 같은 이름만 들어도 아, 그 광고~ 하고 떠오르는 작업들을 하셨지요. 특히 ‘Share hair’ 캠페인으로 칸 크리에이티브 페스티벌에서 수상한 이력은 그의 크리에이티브가 얼마나 강력한 힘을 가졌는지 보여주는 듯합니다.


그는 인생의 방향, 전략, 그리고 크리에이티브라는 세 가지 문제를 ‘컨셉’으로 해결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입니다. 현재는 AI를 활용한 마케팅을 연구하고 개발하는 일에 매진하고 있다고 하니, 그는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탐구하고 도전하는 진정한 전략가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책을 관통하는 핵심은 '컨셉'입니다.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독창적인 컨셉을 찾아내고, 이를 통해 브랜드의 문제점을 해결하는 것이죠. 단순히 제품을 예쁘게 포장하는 것을 넘어, 브랜드의 본질을 파고들어 아무도 생각하지 못한 방식으로 접근하는 것이 그가 추구하는 바라고 할 수 있습니다.



책 속으로

『슈퍼 포지셔닝의 전략가들』은 치열한 시장에서 압도적인 존재감을 드러내는 8가지 브랜드를 분석하며, 그들이 가진 고유한 ‘래디컬 컨셉’ 전략을 보여줍니다. '래디컬(Radical)'이라는 단어는 '급진적인', '근본적인'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즉, 이 책은 단순히 눈에 띄는 일시적인 임팩트를 넘어, 브랜드의 DNA에 깊숙이 자리 잡는 근본적인 차별화 포인트를 어떻게 구축하는지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책은 거창한 비전에서 시작하지 않고, 작은 도전에서 출발해 남들과는 다른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래디컬 한 정체성을 구축한 브랜드들의 사례를 소개합니다. 물을 팔면서 ‘리퀴드 데스’라는 섬뜩한 이름을 붙여 논란을 즐기는 브랜드, 혹은 화장품 업계의 오랜 미신을 깨부수는 ‘디오디너리’와 같이 기존의 규칙을 거침없이 깨는 브랜드들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는 익숙함을 벗어나는 용기를 얻게 됩니다.


특히 디오디너리 이야기는 인상적이었는데요. ‘그들은 자사 제품과 전혀 관련 없는 진실까지 공개합니다. 예를 들어, 그들은 데오드란트를 판매하지 않음에도 데오드란트 성분에 대한 진실을 밝힙니다.’라는 문장은 그들의 전략이 얼마나 파격적인지 잘 보여줍니다. 눈앞의 이익이 아니라 진정한 가치를 전달함으로써 소비자의 마음속에 신뢰를 심는 것, 그것이 바로 그들의 전략이었습니다.



내가 그은 밑줄

이 책에서 저는 여러 인상적인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첫 번째는 ‘슈퍼 포지셔닝’의 의미입니다. ‘소비자가 특정 카테고리를 생각할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브랜드가 되는 것, 이것이 바로 슈퍼 포지셔닝의 핵심입니다.’라는 문장은 제가 늘 고민해 왔던 ‘어떻게 하면 사람들 마음속에 각인될까?’에 대한 명쾌한 답을 제시해 주었습니다. 이는 브랜드뿐만 아니라 개인의 삶에도 적용할 수 있는 중요한 인사이트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어떤 분야에서 '그 사람'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존재가 될 수 있다면, 그것이 곧 진정한 성공이 아닐까요.


두 번째는 문제의 본질을 다시 규명하는 것의 중요성입니다. 룰루레몬이 ‘그들이 창업 때부터 페르소나로 삼아온, 그래서 그들에게 지금의 성장을 가져다준 그 페르소나에만 의존하는 것이 문제’라고 판단했던 것처럼, 때로는 성공의 원인이라 여겼던 것이 성장의 발목을 잡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더 좋은 해결책을 원한다면, 더 나은 질문을 던져야 한다’는 문장은 저에게 깊은 울림을 주었습니다. 성공에 안주하지 않고, 끊임없이 '왜?'라는 질문을 던지며 문제의 본질을 재정의하는 태도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세 번째는 고난을 대하는 자세입니다. '고난은 세상에 없던 것들을 만들어내거나 한 번도 해보지도 않은 일을 하게 만드는 가장 강력한 연료라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인생에 주어진 고통을 피하고 도망쳐서 도착한 곳에 천국은 없습니다'라는 문장은 저에게 용기와 위로를 동시에 주었습니다. 삶에서 마주하는 어려움을 단지 피하고 싶은 대상이 아니라 새로운 가능성을 만들어내는 동력으로 바라보는 시각의 전환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마지막으로, ‘아니요(No)’를 대하는 태도입니다. 베른하르트라는 인물이 'No'를 실패가 아닌 'Not right now(지금은 아니다)'로 받아들였다는 내용은 저의 삶의 태도를 돌아보게 했습니다. 거절당하거나 실패했을 때, 그것을 끝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잠시 멈춰 서서 다음 기회를 모색하는 유연함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요.



그래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슈퍼 포지셔닝의 전략가들』은 그저 마케팅 책으로 치부해선 안됩니다. 이 책은 삶을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에 대한 깊은 사유를 담고 있죠.


트렌드를 쫓는 삶이 아니라, 나만의 고유한 컨셉을 만들어내는 삶

실패를 두려워하는 대신, 실패를 통해 새로운 길을 찾아내는 삶


그리고 무엇보다

나의 마음속 깊은 곳에 있는 진정성을 탐구하고 그 진정성을 세상과 나누는 삶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저 역시 저의 글쓰기를 통해 삶의 잔잔한 깨달음과 사유를 계속해서 나누고 싶습니다. '나와 당신의 문장은'이라는 연작 에세이가 저의 래디컬 컨셉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거창한 시작이 아니더라도, 꾸준히 저의 진심을 담아 글을 써 내려간다면 언젠가 누군가의 마음속에 깊이 각인될 수 있지 않을까요.


모든 것이 빠르게 변하는 시대에 우리는 다시 한번 멈춰 서서 물어야 합니다. '나는 어떤 마음을 팔고 싶은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는 것이야말로 우리 자신을 슈퍼 포지셔닝하는 첫걸음일 테니까요.


그 길 위에서 우리가 그은 밑줄들이 삶의 가장 밝은 이정표가 되어주기를 바라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맨홀 욜로욜로 시리즈
박지리 지음 / 사계절 / 2017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내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소방관인 그 사람이 가스 선에 라이터를 갖다 대며 집을 폭파시켜 버리겠다고 협박하는 그런 때가 아니라 결국 언젠가는 늙어 버릴 그가 어느 날 나에게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는 짧은 편지를 써서 내 손에 쥐여 주는 순간이라는 걸."


박지리 작가의 『맨홀』을 펼치며 이 문장 앞에서 한참을 멈춰 섰습니다. 폭력보다 더 잔인한 것이 사과라니. 가해자의 참회가 피해자에게는 또 다른 형태의 폭력이 될 수 있다는 이 거짓말 같은 진실 앞에, 저는 문득 우리가 용서라는 이름으로 얼마나 많은 상처를 가려왔는지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시멘트로도 막을 수 없는 것들

거리를 걷다 가끔 바닥으로 눈을 돌리면 맨홀 뚜껑을 마주치게 됩니다. 아스팔트 위에 질서 정연하게 배치된 원형 또는 직사각형의 금속 덮개들. 우리는 그 아래 무엇이 있는지 굳이 생각하지 않고 지나갑니다. 보이지 않으니까 없는 것처럼 여기죠. 하지만 도시가 배출해 내는 많은 오염물과 축축한 그것들이 그 어둠 속으로 흘러들어 간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박지리 작가가 제시하는 '맨홀'이라는 은유는 바로 여기서 출발합니다. 우리가 보지 않으려 하는 것, 덮어두려는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존재하는 것들에 대한 이야기죠.


"십 년간 나를 불러들인 구멍은 구청에서 고용한 사람들이 시멘트로 막아 버렸다. 하지만 여기 밤거리를 달리는 이 구멍은 무엇으로 막아야 할까."


물리적인 구멍은 시멘트로 막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마음속의 구멍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것을 메우려는 모든 시도가 실패로 돌아갈 때, 우리는 비로소 그 구멍과 함께 살아가는 법을 배워야 한다는 걸 깨닫게 됩니다.



악취로 기억되는

"그날들은 흐르지 않는 물처럼 맨홀 속에 그대로 고여 있었다. 악취가 났다. 그렇지만 이곳에 맨홀이 존재하고 내가 뚜껑을 열고 계속 들어오는 한, 나는 그 고역스런 구정물 속에서 계속 잠수를 해야 했다."


이 문장을 읽으며 저는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떠올렸습니다. 마들렌 과자에서 피어오르는 기억의 향기와는 정반대의 상황이죠. 『맨홀』의 주인공에게 기억은 달콤한 향수가 아니라 '악취가 나는' 구정물입니다.


하지만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주인공이 그 어둡고 냄새로 가득한 공간을 계속 찾아간다는 것입니다. 아마도 그곳만이 아버지의 가정폭력을 피하는 수단이며 자신의 진짜 모습과 마주할 수 있는 유일한 장소이기 때문일 겁니다. 지상의 세계에서는 '소방영웅의 아들'이라는 가면을 써야 하지만, 맨홀 속에서만큼은 자신의 어둠을 숨기지 않아도 되니까요.



반복되는 유전자

"나는 스스로도 설명하기 어려운 분노에 휩싸인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엄마와 누나를 끊임없이 의심하고, 폭언을 퍼붓고 폭력을 행사하고 있음을 깨닫는다.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이 부분을 읽으며 가장 섬뜩했던 건 폭력이 대물림되는 방식이었습니다. 주인공은 아버지를 그토록 증오했는데도 결국 아버지와 같은 모습으로 누나와 엄마를 대하게 됩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말이죠.


여기서 작가가 제기하는 것은 단순한 환경론이 아닙니다. '폭력적 환경에서 자란 아이가 폭력적이 된다'는 뻔한 인과관계가 아니라, 우리 안에 도사리고 있는 '괴물성'에 대한 근본적 질문입니다. 선량하고 피해를 당한 사람도 가해자가 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그 경계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모호하다는 것이죠.



사과라는 이름의 또 다른 폭력

다시 처음 문장으로 돌아가 봅니다. 왜 주인공은 아버지의 사과를 가장 두려워할까요?

사과는 관계의 복원을 전제로 합니다. 가해자가 사과하고 피해자가 용서하면 모든 게 원래대로 돌아갈 수 있다는 환상을 제공하죠. 하지만 어떤 상처는 용서해도 지워지지 않습니다. 또 어떤 기억은 사과를 받아도 계속 아물지 않고 덧나기만 할 뿐입니다.


더 잔인한 건 사과가 피해자에게 또 다른 부담을 지운다는 점입니다. 사과를 받으면 이제 용서해야 한다는 압박, 원망을 내려놓아야 한다는 기대, 그리고 무엇보다 가해자를 이해해야 한다는 요구까지. 주인공이 두려워하는 건 바로 이런 것일 겁니다.


"사과 같은 건 필요하지 않았다. 아무리 사과를 해도 한번 저지른 짓이 없던 일이 될 수는 없는 것이니까."


강아지 달이에게 사과하며 깨달은 이 진실이 바로 그것입니다. 사과는 과거를 지우지 못합니다. 어떤 경우에는 현재를 더 복잡하게 만들 뿐이죠.



무의미한 일상

"운동장은 셀 수도 없이 많은 검은 폐타이어로 둘러싸여 있다. 아무리 달리고 달려도 바퀴는 도통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쓸데없이 제자리에서 돌고만 있다. 하지만 의미 없는 회전을 하고 있는 것이 어디 이 타이어들뿐인가."


이 장면에서 저는 카뮈의 『시지프스 신화』를 떠올렸습니다. 끝없이 바위를 굴려 올려야 하는 시지프스처럼 우리에게 의미 없어 보이는 일들을 그것이 내가 짊어진 죄인 것인 양 반복하며 살아가죠. 하지만 카뮈가 시지프스의 '반항'에서 존재의 의미를 찾았다면, 박지리는 그 무의미함 자체를 직시하라고 말합니다.


청소년 보호관찰소의 폐타이어들은 한때 길 위를 달렸지만 이제는 움직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바람에 섞여 불어오는 고무 냄새에는 수백 개의 타이어가 달리면서 내는 바퀴 소리가 희미하게 살아 있다'라고 작가는 말합니다. 죽은 것들도 흔적을 남긴다는 뜻일까요. 의미 없어 보이는 회전도 작은 기억을 남긴다는 의미일까요. 아니면 우리가 살아간다고 믿는 모든 움직임이 사실은 제자리를 맴도는 것에 불과하다는 뜻일까요.



기억에는 별다른 경계선이 없어서

"기억에는 별다른 경계선이 없어서 발 없는 유령들이 시간의 장벽을 소리도 없이 넘어 다닌다."


이 문장이 특별한 이유는 기억을 '유령'으로 형상화했기 때문입니다. 유령은 죽었지만 죽지 않은 존재, 과거에 속하지만 현재에 나타나는 존재죠. 우리의 기억도 그와 같습니다. 지나간 일이지만 현재를 지배하고, 끝난 관계이지만 지금도 우리를 괴롭히죠.


특히 트라우마가 된 기억들은 더욱 그렇습니다. 시간의 순서를 무시하고 불쑥 나타나서 우리를 과거로 끌고 가죠. 소설 속 주인공의 의식이 현재와 과거를 자유롭게 오가는 것도 바로 이런 이유에서 입니다.



어쩌면 우리 모두는

『맨홀』에서 가장 불편한 진실은 주인공에게 이름이 없다는 점입니다. 친구들은 모두 이름으로 불리는데 그는 그냥 '나'입니다. 이것은 단순한 서술 기법이 아니라 작가의 의도적 선택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누구나 이 '나'가 될 수 있다는 뜻이거든요.


우리는 모두 각자의 어둠을 품고 살아갑니다. 대부분은 그 어둠을 잘 통제하며 살아가지만, 어떤 순간, 어떤 조건에서 그 어둠이 터져 나올지는 아무도 모르죠. 주인공도 원래는 선량한 아이였어요. 하지만 견딜 수 없는 현실 앞에서 결국 괴물이 되어버립니다. 이것이 이 소설이 주는 가장 큰 공포라 생각합니다. 남의 일이 아니라는 것, 우리 모두 잠재적으로는 가해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이죠.



허허벌판에 선 우리들

"땅바닥에 여행 가방을 내려 둔 채 표지판도, 사람도 하나 없는 허허벌판에 서서 발이 묶인 것처럼 한 발짝도 움직이지 못하는 아이의 뒷모습이 보인다."


이 장면이 가슴 아픈 이유는 그 아이가 결국 우리 자신이기 때문입니다. 갈 곳이 없는 고아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현재를 살아가는 모든 우리의 이야기로 들렸습니다. 가족이 있어도 진정한 의미에서의 귀속감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 사회적 위치를 이루었지만 정작 마음 둘 곳은 없는 사람들의 이야기이기도 하니까요.


주인공은 소방영웅의 아들이라는 사회적 정체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껍데기일 뿐, 진짜 자신은 여전히 허허벌판에 홀로 서 있는 아이나 다름없죠.



구멍과 함께 살아가는 법

결국 『맨홀』이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은 '메울 수 없는 삶의 구멍과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작가는 답을 주지 않습니다. 주인공도 끝까지 자신의 구멍을 메우지 못합니다. 하지만 그것이 패배를 의미하는 건 아니에요. 오히려 그 구멍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 자체가 시작일 수 있거든요.


우리는 모두 완전하지 않은 존재들입니다. 각자의 어둠을 품고 있고, 각자의 상처를 안고 살아가죠. 그 불완전함을 숨기려 하기보다는 인정하고, 그것과 함께 살아가는 법을 배우는 것이 더 중요할지도 모르겠어요.



작가가 남긴 마지막 질문

박지리 작가는 서른두 살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너무 일찍 떠난 천재의 죽음 앞에서 우리는 할 말을 잃었지만 그가 남긴 작품들은 여전히 우리에게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맨홀』을 읽고 나면 마음이 무거워집니다. 하지만 그 무거움이 곧 깨달음이기도 하죠. 우리가 외면하고 싶어 했던 진실들과 마주하게 되고 우리 안의 어둠을 직시하게 되니까요. 어쩌면 그것이 문학의 역할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편안한 위로를 주는 게 아니라 불편한 진실을 마주하게 하는 것, 우리가 보지 않으려 했던 것들을 보게 만드는 것이요.


박지리 작가가 우리에게 남긴 『맨홀』이라는 구멍은 아직도 열려 있습니다. 그 구멍을 들여다보는 것은 여전히 고통스럽지만 그 고통 속에서만 만날 수 있는 진실들이 있다고 믿습니다. 그리고 그 진실들과 마주할 때 비로소 우리는 조금 더 진정한 자신에게 가까워질 수 있을 것입니다.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구멍 앞에 우리는 여전히 서 있습니다.

그 구멍을 메우려 하지도 도망치려 하지도 않고 그저 그것의 존재를 인정하며 말이죠.


어쩌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용기일지 모릅니다.


완전해지려 애쓰지 않고 상처를 숨기려 하지 않으며

우리 안의 어둠까지도 받아들이며 살아가는 것.


그래서 오늘도 우리는

각자의 맨홀 뚜껑을 조심스레 열어

그 어둠 속에서 길어 올린 진실 하나를

가슴에 품고 지상으로 올라옵니다.


그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정직한 삶의 방식일지도요.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표백 - 제16회 한겨레문학상 수상작, 개정판
장강명 지음 / 한겨레출판 / 2020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장강명 작가는 스스로를 ‘월급사실주의 소설가’라 칭하며, 2011년 『표백』으로 작품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그가 주로 작품에서 다루는 것은 한국 사회의 첨예한 문제들인데요. 『댓글부대』, 『한국이 싫어서』 같은 작품들이 그렇듯, 시대의 위험을 미리 감지하고 이를 문학으로 고발하는 ‘탄광의 카나리아’ 역할을 자처하는 작가이기도 합니다. 그의 첫 장편소설인 『표백』은 바로 그 시작점에 놓여 있는 작품이고요.


『표백』은 소위 ‘스펙 좋은’ 다섯 명의 젊은이가 모여 5년 후 차례로 자살하기로 약속하는 충격적인 이야기입니다. 이들이 선택한 극단적인 행동의 배경에는 ‘그레이트 빅 화이트 월드(Great Big White World)’라는 허무하고도 완벽한 세상이 있는데요. 소설의 화자가 바라보는, 자살의 주동자, 세연이라는 인물은 그 세상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그런데 이제 나는 세상이 아주 흰색이라고 생각해. 너무너무 완벽해서 내가 더 보탤 것이 없는 흰색. 어떤 아이디어를 내더라도 이미 그보다 더 위대한 사상이 전에 나온 적이 있고, 어떤 문제점을 지적해도 그에 대한 답이 이미 있는, 그런 끝없이 흰 그림이야. 그런 세상에서 큰 틀의 획기적인 진보는 더 이상 없어.”


그들의 눈에 비친 세상은 더 이상 새로운 획을 그을 수 없는, 이미 완성된 흰색의 도화지였습니다. 혁명도, 위대한 업적도 모두 기성세대가 이뤄낸 과거의 유산이 되어버렸죠. 젊은 세대에게 남겨진 역할은 그저 기성세대가 그린 밑그림을 따라 붓질하는 ‘유지·보수자’의 삶뿐입니다. 이들은 ‘누가 빨리 책에서 정답을 읽어 체화하느냐의 싸움’ 속에서 자신의 다채로운 생각과 야심을 모두 지워버려야만 했고, 세연은 그 과정을 ‘표백’이라 불렀습니다.


자신이 뭘 잘못했는지 알 수 없는 반복된 실패와, ‘패배의 길밖에 없는 것처럼 느껴져서 화가 많이 나는’ 삶 속에서 그들은 서서히 자신을 지워나갑니다. 세상은 이미 답을 가지고 있고, 우리는 그 답을 찾는 기계가 되어야 하는 것이죠. 이러한 세상에 대한 세연의 절망은 극에 달합니다. 그녀는 자신의 자살을 세상에 대한 ‘저항’이자 ‘야유’로 정의하며,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던 선을 넘어 세상의 개념을 바꾸고자 합니다.


그녀의 자살은 개인의 비극을 넘어선 하나의 사회적 선언이자, 이 완벽한 세상에 더 이상 보탤 것 없는 청춘의 ‘표현 방법’이었습니다. 그녀의 주장에 따르면, 우리는 아무것도 하지 않을 때 사회가 바뀌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기에 가장 극단적인 방식으로 메시지를 던지려 한 것이죠. 하지만 이 지점에서 저는 이 소설이 던지는 가장 중요하고도 불편한 질문에 마주하게 됩니다.


과연 세상이 우리를 향해 '왜 사느냐'라고 물을 때, 그 대답이 오직 ‘세상을 바꾸는 위대한 일’에만 국한되어야만 의미가 있는 것인가.


“자살 선언에 대한 내 반론의 핵심은 모든 사람이 위대한 일을 할 필요는 없다는 거야. 세연은 세상을 바꾸고 사람들의 존경을 얻을 수 있는 일이 아니라면 무가치한 것처럼 얘기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우리 모두 잘 알잖아.”


소설 속 화자는 세연의 자살 선언에 대해 조용히 반론합니다. ‘호모사피엔스라는 동물종으로서 잘 가꿔진 숲길을 걸을 때 거부할 수 없는 작고 소소한 기쁨을 맛본다면, 그 숲을 지키고 가꾸는 일에 가치가 있음’을 부정할 수 없다고 말이죠. 저는 이 문장이 이 소설이 던지는 허무와 절망의 파도 속에서 유일하게 건져낼 수 있는 구명조끼처럼 느껴졌습니다.


우리는 늘 ‘거대한 무엇’을 꿈꾸도록 학습받으며 살아왔습니다. 산업화와 민주화를 이룩한 이전 세대들의 거대한 업적 앞에, 우리의 삶 또한 그에 비견될 만한 ‘위대함’으로 채워져야 한다고 생각하게 된 것이죠. 하지만 주인공의 말처럼, 우리 앞의 세대들도 결국 ‘가방 하나 들고 해외 출장 나가고, 밤새워 일하고, 거리에서 돌 던진’ 수많은 개인들의 작은 노력이 모여 거대한 역사를 이룬 것이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세연의 야심은 ‘어린아이다운 것’이었다는 휘영이라는 기자가 된 친구의 지적이 마음에 깊게 와닿습니다. 어쩌면 그들은 세상을 바꾸는 일이 아닌, ‘사랑과 관심을 바라는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그토록 위대한 일을 갈망했던 것은 아닐까요. 그들의 ‘표백’은 사회의 문제가 아니라, 자신을 ‘위대한 사람’으로 증명하고자 했던 과도한 야심이 좌절된 결과였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소설은 사회적 구조라는 거대한 벽에 부딪혀 절망하는 청춘의 초상을 사실적으로 그려냅니다. 하지만 그 끝에 저는 조금 다른 사유를 해보게 됩니다. ‘완성된 사회’는 더 이상 영웅을 필요로 하지 않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것이 한 사람의 존재 가치를 무의미하다 칭할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존재의 가치는 ‘무엇을 성취했는가’라는 거대 담론에 있지 않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아침에 눈을 뜨고, 따뜻한 밥을 먹고, 사랑하는 사람과 눈을 맞추고, 비 오는 날 창밖을 바라보는 그 지극히 평범하고도 작은 순간들 속에서 찾아지는 것이니까요.


어쩌면 ‘표백’의 시대에 필요한 것은 거창한 ‘혁명’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대신, ‘위대해지려는 욕망’을 벗어던지고 우리 자신에게로 돌아와 조용히 삶의 의미를 찾는 일일 것입니다. 사회적으로 고립되고, 더 이상 올라갈 곳이 없을지라도, 우리 각자의 삶은 그 자체로 의미 있고 가치 있습니다. 존재의 의의는 그런 것들로 희석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작가는 소설 말미에 주인공의 말을 빌어 웹사이트를 하나 만들고 싶다 합니다. 세연과 그 일당들이 수많은 젊은이들의 자살할 뜻을 모으려는 와이두유리브닷컴(www.whydoyoulive.com)이란 사이트에 대한 대답으로 디스이즈더리즌닷컴(www.thisisthereason.com)을 만들고 싶다는 것이죠. 삶을 포기하려는 사람들에게 ‘이것이 살아갈 이유’라고 말해주는 사이트.




삶의 이유는 거대한 진리와 사상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루하루를 채워나가는

작은 행동과 의미 속에서 발견되는 것이라 믿습니다.


세상의 모든 색이 희미해져도

우리 각자의 내면에 빛나는 고유한 색깔을 지키는 일.


그것이 바로 우리가 ‘표백’의 시대에 맞서 싸워야 할

가장 중요한 싸움이라 믿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나무 (가을 에디션)
고다 아야 지음, 차주연 옮김 / 책사람집 / 2024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고목이 온기를 품은 것일까, 아니면 새로 자란 나무가 한기를 막아주는 것일까."

고다 아야의 『나무』를 펼치며 처음 밑줄 그은 문장입니다. 쓰러져 죽은 가문비나무에서 새로운 생명이 자라나는 모습을 보며 작가가 던진 질문인데요. 단순해 보이는 문장이지만 그 안에는 삶과 죽음, 그리고 시간에 대한 깊은 성찰이 담겨 있다 생각했습니다.


고다 아야는 일본 근대문학의 거장 고다 로한의 둘째 딸로 태어나 1990년까지 86년을 살았습니다. 다섯 살에 어머니를 잃고 스물두 살에는 남동생마저 떠나보내는 슬픔을 겪었죠. 결혼 10년 만에 이혼하고 딸과 함께 아버지 집으로 돌아와 아버지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함께했던 작가입니다. 『나무』는 그녀가 말년에 13년 6개월에 걸쳐 일본 전국의 나무를 찾아다니며 기록한 유작으로, 출간된 지 3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꾸준히 사랑받고 있어요. 작가의 이런 개인사를 알고 나니 왜 그녀가 나무에게서 삶과 죽음의 경계를 보려 했는지 이해가 되었습니다. 상실을 겪으며 살아온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시선이랄까요.



두 번의 생명을 사는 나무들

"나무는 뿌리를 내리고 서 있을 때의 생명과, 잘려서 목재가 된 이후의 생명 이렇게 두 번의 생명을 갖는다."

호류지 대보수에 참여한 도편수들의 말을 인용한 대목입니다. 1,200년 묵은 나무일 지라도 대패로 한 번 쓱 밀면 여전히 향기를 풍기고, 습기를 머금으면 부풀고 건조하면 쪼그라든다는 고백. 살아 있다는 증거입니다.

이 장면에 우리 인생에도 '두 번의 생명'이 있지 않을까 생각해 봤습니다. 첫 번째는 우리가 실제로 살아가는 시간들이고, 두 번째는 우리가 남긴 것들이 다른 사람들 안에서 계속 살아가는 시간들 이겠지요. 고다 아야의 글이 지금도 독자들에게 감동을 주고 있는 것처럼요.


"이는 '형태를 바꾼다'는 것이다."

포플러가 목재로 가공되는 과정을 지켜보며 작가가 내린 결론입니다. 자연 속에서의 나무는 시간을 들여 서서히 형태를 바꿔가지만, 인간의 보살핌 속에서는 단 몇 시간 만에 완전히 다른 모습이 되죠. 어떤 변화는 우리도 모르는 사이 아주 천천히 일어나고, 어떤 변화는 갑작스럽게 우리를 다른 사람으로 만들어버립니다.



여러 세대가 함께 사는 지혜

"할아버지의 할아버지의 할아버지의 할아버지, 그보다 훨씬 더 윗대 할아버지부터 현재의 아버지, 자식, 손자, 증손자, 증손자의 아들까지 모두 한 그루 안에 뒤섞여 살아가는 것 같다."

폭포벚나무를 보며 작가가 써 내려간 감상입니다. 아주 오래된 가지부터 올해 자란 어린 가지까지 다양한 연령층이 한 그루 안에 공존하고 있다는 것. 인간 세계에서는 생각할 수 없는 일이지만 나무는 그렇게 여러 세대가 함께 살아간다고 합니다.


이 문장을 읽으며 저는 문득 우리들의 모습을 떠올려 봅니다.

할머니에게서 어머니로, 어머니에게서 딸아이에게로, 그리고 그다음 세대로 이어지는 그 무엇.

DNA 로만 설명할 수 없는, 습관이나 성격, 가치관 같은 것들이 복잡하게 얽히며 전해지는 과정.


나무의 관점에서 보면 개별적인 존재라는 경계가 모호해 질지 모릅니다. 어디서부터가 할아버지이고 어디서부터가 손자인지 명확하게 구분할 수 없죠. 다만 모든 것이 연결되어 있고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하나의 생명을 이루고 있다는 것이 그저 신비스러울 따름입니다.



똑바로 서는 것과 뿌리의 힘

"비스듬히 서 있는 나무는 더 많이 애를 써야 할 겁니다."

편백나무에 대해 장인이 설명합니다. 똑바로 자란 나무와 비스듬히 자란 나무 중 어느 쪽이 더 편할지는 생각해 보면 금방 알 수 있다고 하죠. 비스듬히 서 있는 나무는 자기 무게를 지탱하기 위해 더 많은 에너지를 써야 하고, 그 결과로 껍질에 뒤틀림이 생겨 좋은 목재를 얻기 어렵다는 의미입니다.


이 대목을 읽으며 저는 우리 인생에서도 '똑바로 서는 것'의 중요성을 생각해 봅니다. 여기서 말하는 '똑바로'는 도덕적 완벽함을 의미하는 건 아닙니다. 오히려 자신의 본성에 맞게, 자연스럽게 성장해 나가는 것을 말하는 것이죠.


"잔뿌리는 나무라는 구조의 말단이지만, 구조의 말단은 온 힘과 노력을 쏟고 있다."

거대한 나무의 뿌리를 보며 작가가 느낀 감동입니다. 말단이라고 해서 덜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전체를 떠받치는 핵심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이죠. 뿌리 없이는 나무가 존재할 수 없듯이, 우리 사회도 이런 '말단'의 노력 없이는 지탱될 수 없을 겁니다.



목재가 아닌 살아있는 아름다움

"왜 살아 있는 아름다움을, 숨결을 기억해주지 않는 것인가. 우리의 감수성은 이제 소멸해 버린 걸까?"

사람들이 편백나무를 목재로써만 인식하고, 살아있는 편백나무의 아름다움에는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는 작가의 안타까움이 드러나는 문장입니다. 이는 단순히 나무에 대한 이야기만은 아닐 겁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 전반에 대한 성찰이겠지요. 사람을 볼 때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그 사람의 쓸모만을 보고, 존재의 의의와 가치를 놓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요. 직업이나 학벌, 재산 같은 외형으로만 사람을 평가하고 그 사람이 살아온 시간들과 경험, 내면의 아름다움은 보려 하지 않는 우리의 모습이 겹쳐집니다.


고다 아야가 바라는 것은 '생명의 시를 읊으며 산과 들에서 살아가는 모습과 생애를 마치고 아름답고 튼튼한 목재가 된 모습 둘 다 사랑스러워하는 마음'입니다. 즉, 존재의 모든 단계와 모든 형태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사랑하는 마음이죠.



온기를 품은 죽음의 의미

다시 처음의 문장으로 돌아가 봅니다.

"고목이 온기를 품은 것일까, 아니면 새로 자란 나무가 한기를 막아주는 것일까."

작가는 이어서 말합니다.

"죽은 후에도 이처럼 온기를 품을 수 있다면 그걸로 괜찮다."

이 문장에서 고다 아야라는 사람의 삶에 대한 태도를 엿봅니다. 죽음을 두려워하거나 부정하지 않고 오히려 죽음 이후에도 누군가에게 온기를 줄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의미 있다고 여기는 마음. 상실을 경험한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성숙한 지혜는 아닐는지요.


실제로 고다 아야의 『나무』는 그녀가 세상을 떠난 후에도 여전히 독자들에게 온기를 전해주고 있습니다. 책 속의 나무들처럼, 그녀의 글 역시 '두 번째 생명'을 살고 있는 셈이죠.



나무에게서 배우는 삶의 자세

『나무』를 읽고 나니 나무가 단순한 식물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습니다.

시간을 보여주는 존재로서

생명의 연속성을 증명하는 존재로서

겸손과 인내를 가르쳐주는 스승 같은 존재임을 되새깁니다.


우리는 종종 다른 삶을 동경하여 다른 사람이 되기를 원하거나, 누군가가 나의 삶을 바꿔주기를 기대하곤 합니다. 하지만 나무는 그렇지 않습니다. 주어진 자리에서, 주어진 조건에서 꿋꿋하게 자신의 삶을 살아갑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다른 생명들에게 그늘을 주고, 산소를 뿜어내며, 아름다움을 선사하죠.


덕분에 일상에서 만나는 나무들이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냥 지나쳤던 가로수들도

공원의 큰 나무들도

각자의 이야기를 가진 존재들이라는 것.

'죽은 후에도 이처럼 온기를 품을 수 있다면 그걸로 괜찮다'는 작가의 말처럼

우리도 언젠가는 사라질 존재이지만

누군가에게 온기를 줄 수 있는 삶을 살 수 있다면 그걸로 충분하지 않을까요.


나무처럼 한 자리에서 묵묵히

꾸준히 자신만의 방식으로 세상에 기여하는 삶.


고다 아야가 나무들에게서 배운 것처럼

우리도 우리 주변의 평범한 것들에서 삶의 지혜를 발견할 수 있을 겁니다.


중요한 것은 그저 바라보려 하고

들으려는 마음일 테니까요.

오늘 길에서 만날 나무 한 그루가

우리에게 어떤 소중한 이야기를 들려줄지 기대하게 됩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그해 여름 끝
옌롄커 지음, 김태성 옮김 / &(앤드) / 2021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그해 여름 끝』은 제목과 달리 한여름의 짙은 더위 속에 시작됩니다. 주인공인 중대장 자오린과 지도원 가오바오신은 총기 분실 사건으로 인해 인생의 변곡점을 맞게 되는데요. 변변치 않은 출신으로 인해 군 생활에 사활을 걸고 있던 두 사람, 적당한 때를 지나 더 이상 실패도 실수도 용납되지 않는 말년, 거의 마지막 차수가 될 진급을 앞두고 있던 그들에게 이 총기 분실 사건은 한순간에 모든 걸 잃게 할 수 있는 절체절명의 위기였습니다. 이 두 사람이 겪는 심리적 압박감을 따라가다 보니, 겉으로 드러나는 사건의 긴박함보다 더 깊은 곳에 흐르는 불안과 절망이 함께 읽혔습니다.


중대장은 지도원에게 '지도원 자네가 내게 부대대장을 맡으라고 한다면 나는 죽어도 고개를 돌리지 않을 걸세!'라고 말하며 자신의 진급에 대한 강한 열망을 드러냅니다. 이 한 문장에는 평생을 군대라는 조직에 헌신하며 오직 승진만을 바라왔던 한 인간의 절박한 염원이 담겨 있습니다. 하지만 그 간절함과는 무관하게 총을 훔친 범인은 마치 보이지 않는 거대한 운명처럼 두 사람을 조롱하고 있는 것만 같았죠. 지도원이 '라오가오, 보아하니 총을 훔친 범인은 자네와 나를 겨냥하고 있는 것 같네'라고 말할 때, 저는 이들이 겪는 고통이 단순한 실수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그들이 속해 있는 군대라는 거대한 부조리의 시스템에 의해 조종당하고 있음을 눈에 담았습니다.


이 소설 속 인물들의 모습은 사무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속 주인공들을 떠올리게 합니다. 『고도를 기다리며』에서는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이 끝없이 기다리던 '고도'가 끝내 오지 않는 것처럼, 자오린과 가오바오신이 갈구하는 '진급'과 '도시 호구' 역시 그들에게 결코 주어지지 않을 허망한 약속처럼 보입니다. 군대라는 텅 빈 무대 위에서 진급이라는 허상과 잃어버린 총이라는 상징적 존재를 찾아 헤매지만 그들의 행동은 결국 자신들의 삶을 송두리째 짓누르는 거대한 권력의 기제 앞에 의미 없는 몸부림에 지나지 않습니다. 특히 당시 중국의 농촌 출신 인민들에게 '도시 호구'는 단순한 거주지로서의 의미를 넘어 인간다운 삶을 영위할 수 있는 계층 사다리적인 권리였기에, 이들이 맹목적으로 추구하는 목표가 얼마나 허망한지를 더욱 극명하게 보여줍니다. 옌롄커는 이를 통해 인간의 고통이 사회적 불합리성, 즉 도시와 농촌이라는 이분법적 구조 속에서 어떻게 발생하고 소외되는지를 날카롭게 지적합니다.


그럼에도 삶의 몫을 살아내는 사람들

삶의 무대가 아무리 부조리로 가득할지라도 그 안에는 따뜻한 온기가 존재합니다. 옌롄커는 이 혹독한 이야기 속에서 인간적인 연민과 성찰의 순간을 놓치지 않습니다.


"몰래 엿들었지. 그렇다고 날 원망하진 말게. 듣고 나서 감동을 받으면서도 질투가 나기도 했지. 우리가 살면서 뭘 더 바라겠나? 자기 인생의 몫을 살아내는 것뿐이지. 자네도 자신을 너무 속박하지 말았으면 좋겠네. 꼭 찾아가 보도록 하게."


이 문장은 경쟁자이자 때로는 속박의 대상이었던 지도원이 중대장에게 던지는 진심 어린 위로입니다. '자기 인생의 몫을 살아내는 것'이라는 말은 사회가 규정한 성공과 실패의 틀에서 벗어나, 오롯이 '나'로서의 삶에 충실하라는 의미처럼 다가옵니다. 인생의 방향이 총기 분실 사건으로 인해 예상 못한 방향으로 틀어졌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비로소 자신의 삶을 온전히 마주하고 받아들이는 법을 배워나가는 것이죠. '세상만사가 다 그렇지. 마음이 풀리면 되는 일 아니겠나'라는 한마디에 담긴 담담한 체념은, 더 이상 저항할 수 없는 현실 앞에 평온을 찾아가는 또 다른 방식처럼 보입니다. 모든 것을 통제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고 그 속에서 자신만의 길을 찾아가는 것. 이것이 옌롄커가 고통으로 얼룩진 이야기를 통해 우리에게 전하는 메시지 중 하나일 겁니다.


강 아래로 헤엄쳐 사라지는지는 해

이 작품에서 깊은 인상을 받은 것은 지는 해(日落)에 대한 묘사입니다. 총기 분실이라는 긴박한 상황과 대비되는, 지극히 고요하고 아름다운 순간인데요.


"맞아요, 아버지. 그곳은 너무나 아름다웠어요. 뭐라고 말로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고요해서 누군가 그곳에 도착하기만 하면 마음이 백지장처럼 깨끗해질 것 같았어요. 하지만 무엇보다도 제 마음을 사로잡은 것은 그곳의 지는 해(日落)였습니다. 해는 강에서 헤엄쳐 나와 강 아래로 헤엄쳐 사라졌어요."


마치 시간이 멈춘 듯합니다. '해는 강에서 헤엄쳐 나와 강 아래로 헤엄쳐 사라진다'는 표현은 삶과 죽음의 경계, 그리고 모든 것의 순환을 시적으로 보여줍니다. 마치 한 시대가 저물고 새로운 시대가 떠오르는 것처럼, 혹은 한 인간의 고통과 좌절이 끝나고 새로운 평온이 찾아오는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지는 해는 단순히 아름다운 풍경이 아니라 혼란스러운 세상 속에서 찾은 영혼의 안식처, 삶의 끝자락에서 마주한 깨달음처럼 다가옵니다.


결국 옌롄커는 고통과 절망 속에서도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그 아름다움을 통해 삶의 의미를 되새깁니다. 총을 잃어버린 사건은 주인공들에게 불행이었지만 동시에 자신들의 삶을 되돌아보고 진정으로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 깨닫게 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우리의 삶 역시 때때로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통제할 수 없는 불행이 닥치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 혼란 속에서도 우리는 지는 해처럼 고요하고 아름다운 순간을 발견하고, 그 순간을 통해 다시 일어설 힘을 얻을 수 있습니다.




어쩌면 우리는 모두 자오린과 가오바오신처럼 잃어버린 총을 찾아 헤매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승진이든, 성공이든, 인정이든, 우리가 간절히 추구하는 것들이 때로는 신기루처럼 아른거리다가 어느 순간 손 닿을 수 없는 곳으로 사라져 버리곤 하니까요. 하지만 옌롄커가 이 작품을 통해 우리에게 보여준 것은 그런 상실의 순간에도 삶은 계속된다는 것, 그리고 그 이어짐 안에서 언제나 예기치 못한 아름다움과 마주한다는 것일 겁니다.


'해는 강에서 헤엄쳐 나와 강 아래로 헤엄쳐 사라진다'는 문장처럼

우리의 고통도 영원하지만은 않을 겁니다.


지는 해가 다시 떠오르듯

절망 끝에서 만나는 작은 위안들이

우리를 다시 일으켜 세우겠죠.


결국 삶이란 무엇을 얻느냐가 아니라

무엇을 잃었을 때 어떻게 견뎌내느냐의 문제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견딤의 과정에서 우리는 비로소

'자기 인생의 몫을 살아내는' 진정한 의미를 깨닫게 되지 않을까요.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