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곱 번째는 내가 아니다
폴 클리브 지음, 백지선 옮김 / 서삼독 / 202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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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매일 서로에게 안부를 묻고, 가끔은 테이크 아웃 잔을 빌어 마음을 내밀기도 한다. 하지만 그 다정한 일상의 표면 아래, 도저히 해독할 수 없는 암호 같은 타인의 심연이 도사리고 있다면 어떨까. 폴 클리브의 소설 『일곱 번째는 내가 아니다』는 그 엽서 같은 일상의 뒷면을 칼날로 도려내어 우리 눈앞에 들이민다. 주인공 ‘조’는 그 절개된 틈 사이로 흘러나오는 악취 나는 진실의 화자다.




'나'라는 이름의 가장 완벽한 알리바이

정유정 작가의 소설 『종의 기원』에서 주인공 한유진이 자신의 포식자적 본능을 '피의 운명'이라는 비극적 탐미주의로 장식하며 독자를 압도했다면, 폴 클리브의 '조'는 철저하게 자신을 '평범함'이라는 익명성 뒤로 은폐한다. 1인칭 시점은 독자를 주인공의 머릿속에 가두는 가장 강력한 장치다. 유진의 문장이 날카로운 메스처럼 독자의 심장을 직접 겨눈다면, 조의 문장은 눅눅하고 곰팡이 핀 지하실의 공기처럼 서서히 독자의 판단력을 마비시킨다.


문에는 검은색 글자로 내 이름이 새겨진 작은 금색 명패가 걸려 있다. 조. 성은 없다. 이니셜도 없다. 그냥 ‘조’다. 어디에서나 볼 법한 평범한 조. 그게 나다. 평범하고 흔한 조.


조는 끊임없이 자신을 '평범함'으로 규정한다. 그는 자신이 사이코패스가 아니라고 강변하며, 단지 '관점의 문제'로 살인을 행한다고 말한다. 이 대목에서 소름 끼치는 질문과 마주한다. 우리가 믿고 있는 '평범함'이라는 기준은 얼마나 허약한가. 누군가에게 평범함은 삶을 지탱하는 단단한 대지이지만, 조에게 평범함은 자신의 피비린내를 세탁하는 가장 투명한 세제일 뿐이다. 그는 사회가 부여한 '느린 조(모자란 청소부)'라는 가면을 쓰고, 그 뒤에서 타인의 생사를 유희처럼 주무른다.



결핍이 빚어낸 괴물

집에서 키우는 두 마리의 금붕어에게 먹이를 주며 조가 느끼는 '신이 된 기분'은 그의 자아가 얼마나 지독한 결핍 위에 서 있는지를 반증한다. 낮에는 경찰서의 오물을 치우며 그림자처럼 존재하고, 심지어 유일한 가족인 어머니에게조차 한 명의 인격체로 대우받지 못하는 존재. 그런 그가 선택한 권력의 방식은 생명을 거두는 '크라이스트처치 카버'가 되는 것이었다.


먹이를 조금 뿌려주고 녀석들이 수면으로 올라와 먹이를 먹는 모습을 지켜본다. 이 녀석들을 보고 있으면 무한한 애정이 샘솟는 동시에 신이 된 기분이 든다. 내가 누구든 무슨 일을 하든 금붕어는 나를 우러러본다.


이 문장은 조라는 인간의 본질을 관통한다. 그는 누군가와 동등한 눈높이에서 대화할 능력이 없다. 오직 자신을 우러러보거나, 자신의 발아래에서 목숨을 구걸하는 대상만을 인식한다. 악은 거창한 악마적 철학에서 시작되지 않는다. '나'라는 존재를 온전히 증명받지 못한 자가, 타인을 나보다 못한 존재로 규정하고 그 위에 군림하려 할 때 악은 비로소 구체적인 형체를 갖춘다. 조가 모방범을 찾아 나선 이유는 정의감 때문이 아니라, 자신의 유일한 권력이자 자부심인 '연쇄살인'마저 누군가에게 침범당했다는 소인배적인 질투 때문이다.



전복되는 포식자

소설의 중반, 조의 오만함은 자신보다 더 강력하고 잔혹한 존재인 멜리사와 마주하며 처참하게 무너진다. 조는 자신이 이 도시의 유일한 '감독'인 줄 알았다. '주도권은 나에게 있다. 누가 살고 누가 죽을지는 내가 정한다'라고 호언장담하던 그의 세계는, 자신을 놀잇감으로 삼은 또 다른 포식자의 등장으로 송두리째 흔들린다.


이 지점에서 조가 느끼는 공포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라기보다,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변수'에 대한 결벽증적인 분노에 가깝다. 그는 자신을 모방한 자를 응징하려 하지만, 오히려 그 과정에서 자신이 얼마나 어설픈 아마추어였는지를 폭로당한다. 타인을 도구화했던 자가 도구로 전락하는 순간의 비참함. 작가는 조의 찌질하고 비겁한 내면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며, 우리가 '악'에 대해 가졌던 막연한 경외심이나 카리스마를 비웃는다.


악은 세련된 것이 아니다. 그저 더 강한 힘 앞에 비굴해지는 비겁함의 다른 이름일 뿐이다.



크라이스트처치, 낙원 그 뒷면의 진실

작가 폴 클리브는 자신이 나고 자란 뉴질랜드의 크라이스트처치를 소설의 배경을 넘어 하나의 살아있는 '어두운 캐릭터'로 구축한다.


크라이스트처치. 여긴 ‘천사의 도시’ 따위가 아니다. 뉴질랜드는 평온함과 양과 호빗으로 유명하고 크라이스트처치는 공원과 폭력으로 유명하다. 공중에 본드 한 봉지만 던져보시라. 백 명이 서로 밀치고 넘어지면서 그 냄새를 맡으려고 달려들 것이다.


관광객이 열광하는 아름다운 풍광 뒤에서 조와 같은 포식자들이 배회한다. 조가 사냥하는 대상은 본인 보다 약한 자들이다. 작가는 조의 시선을 통해 우리에게 묻는다. 우리가 '낙원'이라 믿으며 고개를 돌리는 사이, 그늘진 곳에서 어떤 얼룩들이 지워지고 있는지를. 묘지가 다시 자연의 손에 내맡겨지는 것을 슬퍼하던 샐리의 시선과, 그 묘지 사이를 사냥터로 삼는 조의 시선이 교차할 때, 도시는 비로소 인간성의 시험대가 된다.



타인의 대상화

조는 시종일관 오만하다. 자신은 짐승이 아니며, 나름의 인간성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그가 말하는 인간성은 철저히 '자기' 중심적이다. 타인을 나와 같은 무게를 지닌 '당신'으로 인정하는 순간 살인은 불가능해진다. 조가 끝내 이해하지 못한 것은 '당신도 나처럼 아프고, 나처럼 살고 싶어 하는 존재'라는 평범한 진리는 아닐는지.


우리의 일상에서도 '조'의 그림자는 발견된다. 타인을 나의 편의를 위한 수단으로 보거나 특정 집단을 혐오의 대상으로 규정하여 그들의 인격을 지워버리는 행위는, 조가 저지른 살인의 심리적 전초 단계와 닮아 있다. 조가 경찰서 청소부로 일하며 완벽하게 범죄의 흔적을 지우듯, 우리 역시 무의식 중에 타인의 고통을 '어쩔 수 없는 일' 혹은 '관점의 문제'로 치부하며 깨끗이 닦아내고 있지는 않은가.



우리라는 문장이 가닿아야 할 곳은

조는 여전히 자신이 똑똑하며, 결국 '가끔은 악당이 이긴다, 그게 인생이다'라며 냉소한다. 하지만 소설은 조의 승리를 응원하지 않는다. 오히려 조의 1인칭 시점 틈새로 보이는 주변인들의 선의—비록 조가 '멍청하다'고 비웃는 그 선의—가 얼마나 단단한지를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인생은 조의 표현처럼 '조금만 방향을 틀어도 흙길로 빠지는 고속도로'와 같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흙길 위에서도 누군가는 멈춰 서서 길 잃은 이의 안부를 묻는다. 조가 '느린 조'로 연기하며 받아냈던 동료들의 동정과 친절은 조에게는 기만할 대상이었겠지만, 사실 그것이야말로 조가 결코 가질 수 없었던 진정한 '인간의 문장'이지 않았을까.




조가 흩뿌려 선혈로 진해진 밑줄들을 덮으며, 다시금 나와 당신 사이에 놓인 이 문장들의 온기를 가늠해 본다. 우리가 서로를 도구가 아닌 존재로 읽어낼 때, 비로소 우리 곁을 배회하는 '조'의 지하실 문은 닫힐 수 있을 것이다. 악의 승리는 영원할 것 같아 보여도 결국, 무덤가에 자라난 잔디를 걱정하는 마음 하나를 이기지 못한다. 그것이 이 잔인하지만 흡입력 넘치는 소설을 읽으며 끝내 놓지 말아야 할 사유의 끝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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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에게 묻는다
정용준 지음 / 안온북스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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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때로 가장 가까운 존재를 파괴하며 그 폐허 위에 신의 섭리를 조각한다.


잘못 만들어진 질그릇은 깨뜨려야 하고 놋그릇은 용광로에 녹여 쓸모 있는 새 그릇으로 다시 만들어야 한다고 믿는 이들이 있다. 그것을 신의 섭리라 부르고 올바른 부모의 권리라 확신하는 광기. 정용준의 소설 너에게 묻는다는 이 지독한 오만함이 한 인간의 생애를 어떻게 난도질하는지 응시한다. 정용준 작가는 평소 유령처럼 존재하는 이들, 이름조차 부를 수 없거나 잃어버린 자들의 곁을 서성인다. 그는 말하지 못하는 자들의 침묵을 문장으로 옮기고 이름 없는 자들의 서러움을 산책하듯 더듬어 나간다. 이번 작품에서는 ‘사랑’이라는 성스러운 외피를 두른 채 자행되는 사적이고도 내밀한 폭력, 아동학대, 그리고 그것을 방관하는 거대한 시스템의 폭력을 가감 없이 직시한다.



부모라는 거대한 함정과 창조주의 오만

자식을 가장 사랑하고 걱정하는 사람이 부모라는 명제는 우리 사회에서 틀려서는 안 되는 진실로 통용된다. 경찰도, 이웃도, 법도 이 명제를 믿는다. 아니, 믿을 수밖에 없다. 그 말이 무너지는 순간 공동체를 지탱하는 가장 기초적인 윤리가 붕괴하기에. 그러나 소설은 바로 그 '틀릴 수 없는 진실'이 누군가에게는 빠져나올 수 없는 지옥의 문턱이 된다는 사실을 고발한다. 학대를 훈계로 포장하고 폭력을 신의 뜻으로 합리화하는 이들에게 자식은 고유한 영혼이 아닌 '나의 것'에 불과하다. 안인수라는 목사가 설파한, 이 피조물은 창조자의 것이라는 논리는 부모를 신의 자리에 올려놓고 자식의 생사여탈권을 쥐고 흔드는 괴물 같은 권력을 부여한다.


안인수의 아내는 남편의 폭력을 "믿고 싶어서가 아니라 믿어져서 믿는다"고 말한다. 그녀의 표정은 결여되어 있고 정신은 이미 인간의 것이 아니다. 엄마의 껍질을 뒤집어쓴 유기체처럼 변해버린 존재. 나를 가장 잘 아는 사람, 나의 약점과 절박함을 속속들이 들여다보는 존재가 나를 파괴하기로 마음먹었을 때 우리는 과연 어디로 숨을 수 있는가. 타인은 기껏해야 피부를 상하게 하지만 가장 가까운 이는 내밀한 장기를 녹이고 영혼의 결을 찢는다. 잘 알고 이해하는 만큼 그들은 우리가 무엇에 가장 약한지 정확히 알고 그곳을 찌른다.



법이라는 무능한 조립체

정의라는 이름의 권위는 실상 누군가가 이 판례 저 판례를 뒤지며 내리는 기계적인 판단의 조각들에 지나지 않는다. 법은 법이 아니라 사람일 뿐이다. 경찰의 발과 변호사의 입, 검사의 손과 판사의 머리로 조립된 이 거대한 인간형 기계는 정작 개별적인 인간의 고통에는 관심이 없다. 요란스럽게 불을 지르면 둔한 벌레 몇 마리는 잡을 수 있겠지만 대다수의 악은 더 좁고 깊은 곳으로 숨어들어 누굴 갉아먹는지 모르게 된다. 탄원서 몇 장에 집행유예로 풀려나 다시 집으로 돌아가는 가해자들. 그들이 다시 문을 걸어 잠글 때 그 안에서 벌어지는 일은 다시는 '공적 영역'의 레이더에 잡히지 않는다.


법이라는 이름의 인간은 인간을 모른다. 열여덟이 되어 보육원을 떠나면 새로운 세계가 열릴 줄 알았지만 문 밖에는 길이 없었다는 아이들의 절규는 우리가 외면해 온 사회적 공백의 다른 이름이다. 보호받지 못한 생명들은 법의 테두리 밖에서 각자의 방식으로 서서히 소멸해 간다. 작가는 묻는다. 이 모든 결과를 초래한 것이 법이라면, 법이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아 누군가 대신 그 짐을 지고 있다면, 우리는 그것을 누구의 책임이라 불러야 하는가.



침묵이라는 유일한 저항

상처받은 아이들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저항은 입을 닫는 것이다. 울게 할 수도 있고 때려서 비명을 지르게 할 수도 있지만 의지로 굳게 걸어 잠근 입술은 끝내 열리지 않는다. 말하지 않음으로써 자신의 고유한 세계를 지키려는 그 처절한 몸부림은 되려 그들이 겪는 고통이 얼마나 거대한지를 보여주는 강력한 증거가 된다. 작중 주인공인 유희진이 목격한 아이들의 눈동자에는 냉담함과 무표정이 서려 있다. 눈치를 보다 고개를 숙이고 나중에는 안 보이는 척 멍하게 있는 그 상태. 그것은 생존을 위한 최소한의 단절이다.


마음속에 없는 것은 깊숙이 감춰진 것이 아니라 원래부터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사랑이 있다고 믿고 싶어서, 혹은 있어야만 하니까 있다고 우길 수는 있지만 그것이 실재가 되지는 않는다. 부모에게서 사랑을 발견하지 못한 아이가 그 부재를 받아들이는 과정은 시리고 차갑다. 엄마의 재를 물에 타 마시며 결코 잃어버리지 않겠다고, 늘 함께 있겠다고 다짐하는 유희진의 모습은 소름 끼치도록 슬프다. 그것은 사랑받지 못한 존재가 사랑을 내면화하기 위해 선택한 가장 극단적이고도 유일한 방식의 결합이기 때문이다.



따를 수 없는 윤리와 새로운 길

우리는 흔히 보편적인 윤리와 정의를 따라야 한다고 교육받는다. 하지만 따를 수 없는 윤리를 윤리라는 이유만으로 따라야 하는가. 정의롭지 않은 정의를 정의이기 때문에 믿어야 하는가. 소설 속 유희진은 단호하게 고개를 젓는다. 차라리 자신만의 윤리를 세우고 그것을 따르는 것이 옳다는 선택은 법과 시스템이 포기한 폐허 위에 개인이 직접 발을 들이는 위험하고도 숭고한 성찰로 이어진다.


누군가의 오늘을 파괴하고 내일을 앗아간 것이 생명이라면 어떤 이자로도 갚을 수 없다. 판결 한 줄에 눈물 흘리고 박수 칠 수 없는 이유는, 그 판결이 아이들의 잃어버린 시간을 단 1초도 되돌려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덧없는 말은 그저 덧없는 말일뿐, 다른 무엇이 되지 않는다. 이길 수 없는 싸움을 계속하는 것, 수취인 불명 딱지를 받고 되돌아올 편지를 계속 쓰는 것. 이제는 이런 일을 숭고하다고 미화하고 싶지 않다. 그것은 그저 견딜 수 없는 것을 견디기 위한 필사적인 몸부림일 뿐이다.


가족이라는 성역은 때로 폭력의 완벽한 은신처가 된다. "자식을 사랑하지 않는 부모가 어디 있겠어"라는 안일한 믿음이 누군가에게는 날카로운 흉기가 되어 심장을 찌른다. 사랑은 소유가 아니다. 상대가 내 뜻대로 빚어지지 않는다고 해서 깨뜨려버릴 수 있는 그릇도 아니다. 우리는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자행되는 그릇된 신성을 이제 그만 무너뜨려야 한다.


모든 것을 참지만 아무것도 믿지 못하는 아이들, 그리고 기뻐도 우는 어른들에게 우리는 끊임없이 물어야 한다. "당신의 오늘은 안녕한가"라고.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믿을 만한 정의가 부재한 세상에서 서로의 곁을 지키며 텅 빈 객석을 향해 노래를 부르는 일인지도 모른다. 비록 그 노래가 무의미해 보일지라도, 그 소리가 모여 누군가의 무너진 삶에 작은 교두보가 되어줄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정용준의 문장을 통해 본 이 아픈 질문들에 대해

우리는 어떤 대답을 준비해야 할까.


사랑이 무엇을 부수는 망치가 아니라

무엇을 지키는 품이 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이 길고 긴 중얼거림을 맺는다.


불가해한 용광로 속으로

기꺼이 손을 집어넣는 그 용기가 우리에게도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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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춘단 대학 탐방기
박지리 지음 / 사계절 / 201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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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모든 발자국은 제 주인의 몸무게보다 깊게 파이기 마련이지만 어떤 삶은 평생을 걸어도 그림자조차 남기지 못할 만큼 투명하게 취급받는다. 박지리의 소설 『양춘단 대학 탐방기』를 읽으며 내가 가장 먼저 마주한 것은 화려한 캠퍼스의 조경 뒤에 숨겨진 그 투명한 존재들의 서늘한 온기였다. 이 글은 단순히 한 노인이 대학에서 청소부로 일하며 겪는 소동극이 아니다. 그것은 대를 이어 내려오는 가난과 무지, 그리고 그 질긴 고리를 끊어내기 위해 밤마다 코끼리 석상의 배를 두드리던 어느 노년의 처절하고도 거룩한 성찰에 관한 기록이다.


박지리라는 작가는 우리 곁에 분명 존재하지만 눈에 보이지 않던 이들을 지독하게 현실적인 감각으로 길어 올리는 재주가 있다. 스물아홉이라는 젊은 나이에 이토록 농익은 서사를 풀어냈다는 사실보다 놀라운 건, 해방 전후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우리 현대사의 굴곡을 ‘양춘단’이라는 한 여성의 몸에 고스란히 통과시켰다는 점이다. 그녀의 문장은 세련된 수사 대신 흙먼지 묻은 투박한 진심을 담고 있다.



배움의 문턱에서 만난 거대한 돌의 세계

양춘단에게 '대학'은 물리적 공간을 넘어선 성소(聖所)였다. 초등학교도 채 마치지 못한 채 동생들을 돌봐야 했던 그녀에게 배움은 평생의 허기였다. 65세의 나이에 대학 청소노동자가 되며 내뱉은 "춘단이 오늘 대학교 댕겨왔습니다"라는 말은, 보란 듯이 성공했다는 선언이자 동시에 박탈당했던 세월에 대한 뒤늦은 복수였다.


하지만 그녀가 마주한 대학은 상아탑의 숭고함보다는 그들만의 리그이지 않았던가. 미화원들은 학생들의 발등 위로 겹쳐지는 작은 그림자일 뿐이었고 더러운 것은 싫어하면서 청소하는 손길은 외면하는 기만적인 공간이었다. 춘단은 그곳에서 석공이었던 아버지 양호익을 떠올린다. 무지한 돌을 깎아 부처를 만들고 예수를 만들던 아버지. 아버지가 새긴 예수의 얼굴에는 고통과 슬픔이 서려 있었지만 사람들은 그 앞에서 제 복을 빌기 바빴다. 춘단은 깨닫는다. 세상은 진실을 눈앞에 보여줘도 볼 의지가 없는 이들에겐 그저 황무지에 불과하다는 것을.



이상(理想)은 배부른 자들의 만찬인가

소설 속 하숙생과 시간강사 한도진의 죽음은 춘단의 삶에 균열을 낸다. 살아본 적 없는 세상을 그리워하는 것을 이상이라 부른다는 청년의 말에 춘단은 묻는다. 그것이 돈 있고 배부른 사람들의 전유물이냐고. 그러나 한도진은 죽음으로써 그 질문에 답한다. 희망이란 살아남은 자들이 즐기는 만찬일 뿐 죽은 자는 말이 없다는 서늘한 진실을.


춘단은 자신에게 배달된 한도진의 일기장을 보며, 그가 왜 가족도 친구도 아닌 '청소부 양춘단'에게 유품을 남겼는지 고뇌한다. 그것은 아마도 가장 낮은 곳에서 가장 투명하게 존재하던 그녀만이 자신의 진실된 비명을 가감 없이 들어줄 유일한 관객이라 믿었기 때문일 것이다. 춘단은 죽은 이의 필체를 흉내 내어 화장실 구석구석에 글을 쓰며 그를 살려내려 애쓴다. 이것은 지식의 전수가 아니라 존재와 존재가 밑바닥에서 조우하며 나누는 가장 인간적인 연대였다.



대를 잇는 고통의 고리를 끊어내는 망치질

이 글의 끝자락에서 내가 얻은 것은 반복되는 실패에 대항하는 개인의 의지다. 춘단은 코끼리 석상을 바라보며 생각한다. 세상에 완벽하게 새로운 사람은 없으며 다들 누군가의 피를 흉내 내며 대를 이어 똑같은 고통을 맛본다고. 아들의 죽음, 남편 영일의 투병, 그리고 멈추지 않는 노동.


그래서 춘단은 망치를 든다. 밤마다 거대한 코끼리의 배를 두드린다. 그 소리가 잠든 이들을 깨우길, 그리고 아버지에게서 자신으로, 다시 아들에게로 이어진 그 질긴 불행의 고리를 끊어낼 수 있기를 염원하며 손이 부서지도록 두드린다. 그것은 계란으로 바위 치기 같은 무모함이 아니라 내 삶을 규정짓던 거대한 관성과 한판 붙어보겠다는 존엄한 선언이다.




우리는 모두 각자의 대학을 탐방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누군가에게는 명예의 전당이고, 누군가에게는 치워도 끝이 없는 쓰레기장인 그곳에서 우리는 각자의 그림자를 확인한다. 양춘단은 우리에게 말한다. 비록 우리가 누군가의 발등에 밟히는 그림자일지언정 우리 안에는 돌을 깎아 신을 만들던 석공의 피가 흐르고 있다고.


나쁜 일은 바람결에도 생기지만 좋은 일은 무릎이 벗겨지도록 기도해도 오지 않는다는 냉혹한 현실을 그녀는 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잘된 거여"라고 스스로를 다독이며 다시 빗자루를 잡는 마음. 그것은 체념이 아니라 삶을 있는 그대로 껴안는 거대한 긍정이다. 박지리 작가가 우리 주변의 실제 인물들일 것이라며 남긴 이 이야기는, 지금 이 순간에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 세상을 닦아내고 있는 수많은 '춘단'들이 결코 지워지지 않는 실체임을 잊지 말라는 선언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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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 개의 파랑 - 2019년 제4회 한국과학문학상 장편 대상
천선란 지음 / 허블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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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리 달리는 것에 익숙해진 우린
제자리에 멈춰 서는 법을 고장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효율과 속도가 지배하는 세상에서 멈춤은 곧 도태를 의미하고 느려짐은 폐기의 충분조건이 된다. 하지만 천선란의 소설 『천 개의 파랑』은 그 고장 난 존재들이 서로의 부서진 틈을 맞대고 앉아 세상이 정해놓은 속도가 아닌 자신의 속도를 찾아가는 과정을 다정하게 그린다. 이 글은 내가 이 소설 속에서 발견한, 내 삶의 굳은살을 건드린 몇몇 밑줄에 관한 기록이다.



최소한의 방, 최대한의 소외

소설 속 휴머노이드 기수 ‘콜리’가 머무는 기수방은 성인 한 명이 웅크려 앉을 만큼 비좁다. 그곳엔 누울 수도 발을 뻗을 수도 없다. 효율을 위해 설계된 로봇에게 휴식이나 안락함은 불필요한 낭비일 테니까.


기수(騎手) 방은 성인 한 명이 웅크려 앉을 수 있을 정도의 공간이다. 누워 있을 수도, 발을 뻗고 앉을 수도 없을 만큼 비좁다. 하지만 이 방을 쓰는 기수는 누워 있을 이유도, 발을 뻗고 앉을 이유도 없다.


이 문장을 읽으며 스스로를 가두고 있는 현대인의 ‘기수방’을 생각해 본다. 우리는 얼마나 자주 우리의 삶을 목적과 기능으로 제한하고 있는가. 잠은 때로 내일의 노동을 위한 충전일 뿐이고 식사는 에너지를 얻기 위한 수단으로, 관계는 인맥이라는 자산으로 치환되지는 않던가. 발을 뻗고 앉을 여유조차 사치로 여기며 우리는 스스로를 누워 있을 이유가 없는 존재로 프로그래밍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콜리의 비좁은 방은 단지 로봇의 처지가 아니라 효율이라는 감옥에 갇혀 스스로의 영혼을 웅크리게 만드는 우리 시대의 자화상이다.



고통, 생명이라는 증거의 비린내

천선란 작가는 SF라는 외피 아래 가장 뜨거운 생명의 본질을 묻는다. 작가는 주로 기술의 진보보다는 그 진보가 훑고 지나간 자리에 남겨진, 소외되고 부서진 것들에 시선을 둔다. 코끼리의 상아가 사라진 것이 인간으로부터 살아남기 위한 비극적인 진화였음을 언급하며, 발전이 누군가를 배제하고 거세하는 방식이라면 그것은 결코 좋은 진화일 수 없다 말한다.


내가 추론해 낸 바를 말하자면, 고통은 생명체만이 지닌 최고의 방어 프로그램이다. 고통이 인간을 살게 했고, 고통이 인간을 성장시켰다.


우리는 고통을 제거해야 할 오류로 보지만 콜리는 그것을 생명의 핵심으로 짚어낸다. 고통이 있기에 우리는 멈춰야 할 때를 알고, 상처를 돌봐야 할 이유를 찾는다.


소설 속 '보경'은 소방관이었던 남편을 잃은 슬픔을 ‘비린내’라고 표현한다. 슬픔도 배출할 수 있는 골든타임이 있는데 그것을 놓치면 슬픔은 몸 안에서 고여 비린내를 풍기기 시작한다고.


슬픔이 비림으로 바뀌자 후에는 꺼내려고 해도 비릿해서 꺼낼 수 없어졌다. 그렇게 계속 몸에 담아두었다. 고여서 비려질 때까지. 끝끝내 썩어 마를 날을 기다리면서.


그리움은 기억을 간직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기억을 하나씩 포기하고 덩어리를 떼어내어 마침내 비워내는 과정이라는 보경의 고백은 지독하게 아프다. 우리는 그리움을 사랑의 연장선이라 믿지만 실은 살기 위해 죽은 자의 흔적을 도려내는 필사적인 수술에 가깝다. 그 비릿한 상실감을 견디는 것이 생명체만이 누릴 수 있는 고통의 특권이라는 역설은, 우리에게 살아있다는 것의 무게감을 다시금 일깨운다.



언어의 빈곤과 천 개의 파랑

휴머노이드 콜리는 만들어질 때 천 개의 단어를 입력받았다. 하지만 곧 깨닫는다. 자신이 아는 ‘파랑’이라는 한 단어로는 매 순간 변화하는 하늘의 진실을 담아낼 수 없다는 것을.


하늘은 매일, 매시간 색과 모양이 바뀌었다. 하늘은 파란색이었지만 가끔 보라색이나 분홍색, 노란색, 회색이 섞이기도 했다. 그렇게 섞인 색을 뭐라고 표현해야 할지 몰라 콜리는 ‘파랑분홍’이나 ‘회색노랑’으로 단어를 합쳐서 불렀다. 세상에는 단어가 천 개의 천 배 정도 더 필요해 보였다.


우리의 언어가 너무나 빈약하기에 타자와 연결되지 못함의 근본적인 이유를 발견한다. 우리는 누군가의 복잡한 슬픔을 단순히 ‘우울’로 명명하고, 타인의 고군분투를 ‘실패’로 낙인찍는다. 이름을 붙이는 순간, 그 존재가 가진 수천 가지의 색채는 사라지고 만다.


콜리가 발명한 ‘파랑분홍’은 사전에는 없겠지만, 그 순간의 진심을 담은 가장 정확한 언어다. 우리가 서로를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세상이 정해놓은 규격화된 언어를 버리고 서툴더라도 자신만의 언어를 발굴해야 한다. 타인의 심장 박동을 유압기의 피스톤질로 느끼면서도 그것을 생명의 떨림으로 정의하는 콜리처럼,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정답이 아니라 기꺼이 오해받을 용기를 가진 다정한 발명일 것이다.



경사로, 혹은 다정한 장애물

휠체어를 타는 '은혜'에게 세상은 기술이 해결해주지 못하는 거대한 벽이다. 사회는 은혜에게 수천만 원짜리 기계 다리를 달아 정상인처럼 걷기를 강요한다. 하지만 은혜가 원하는 것은 사이보그 다리가 아니다.


세상이 조금만 더 자신을 남들처럼만 대해준다면 은혜는 사이보그 따위 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했다. 몇천만 원을 웃도는 기계 다리 부착 수술보다 더 필요했던 건 인도에 오를 수 있는 완만한 경사로와 가게로 들어갈 수 있는 리프트, 횡단보도의 여유로운 보행자 신호, 버스와 지하철을 누구의 도움 없이도 탈 수 있는 안전함이었다. 휠체어를 끌어주는 휴머노이드나 사이보그 다리가 아니라.


진정한 진보는 시스템에 적응하지 못하는 존재를 수리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존재든 수리받지 않고도 살 수 있는 시스템을 재건하는 일이어야 한다. 우리는 기술로 인간의 결함을 보완하려 하지만 사실 그 결함을 안고도 당당히 살 수 있는 경사로를 놓는 것이 더 인간다운 진보이지 않을까.


콜리가 마지막 순간에 하늘을 바라보며 낙마하게 된 것은 투데이라는 말의 연골이 닳아 없어지기 전에 그를 멈춰 세우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효율의 세계에서 이는 치명적인 오류지만 관계의 세계에서는 숭고한 희생이 된다. 콜리는 말한다. “연재는 실수가 기회와 같은 말이래요.”라고. 완벽한 프로그래밍을 거부하고 기꺼이 실수를 선택할 때, 비로소 우리는 기계적인 삶에서 벗어나 기회라는 이름의 생명을 얻는다.



다시 흐르기 시작한 시간

소설의 끝에서 경주마 투데이는 시야 가림막을 벗고 연골이 부서지는 것도 잊은 채 제 속도로 달린다. 그것은 1등을 하기 위한 속도가 아니라 완주를 못하더라도 행복할 수 있는 속도, 즉 ‘자신의 속도’다. 콜리는 그 곁에서 고삐를 잡고 나란히 질주한다.


나는 세상을 처음 마주쳤을 때 천 개의 단어를 알고 있었다. 그리고 천 개의 단어로 다 표현하지 못할, 천 개의 단어보다 더 무겁고 커다란 몇 사람의 이름을 알았다. 더 많은 단어를 알았더라면 나는 마지막 순간 그들을 무엇으로 표현했을까. 그리움, 따뜻함, 서글픔 정도를 적절히 섞은 단어가 세상에 있던가.

천 개의 단어만으로 이루어진 짧은 삶을 살았지만 처음 세상을 바라보며 단어를 읊었을 때부터 지금까지, 내가 알고 있는 천 개의 단어는 모두 하늘 같은 느낌이었다. 좌절이나 시련, 슬픔, 당신도 알고 있는 모든 단어들이 전부 다 천 개의 파랑이었다.

마지막으로 하늘을 바라본다. 파랑파랑하고 눈부신 하늘이었다.


콜리가 마지막으로 바라본 하늘은 ‘파랑파랑’이었다. 그가 알고 있던 천 개의 단어는 사실 모두 하늘의 다른 이름이었다. 우리가 좌절이라 부르는 것, 슬픔이라 부르는 것, 시련이라 부르는 것들조차 모두 거대한 ‘파랑’이라는 삶의 물결 속에 포함되어 있다는 깨달음.


나와 당신의 문장은, 어쩌면 이 거대한 경주로 위에서 서로의 속도를 늦춰주는 다정한 장애물이어야 할지도 모른다. 서로의 휠체어를 허락 없이 밀지 않으면서 그저 옆에서 나란히 걷는 것. 보이지 않는 속내를 알 수 없기에 끊임없이 “즐거워하고 있는 건가요?”라고 물어봐 주는 것. 그 복잡하고 비효율적인 과정이야말로 우리가 살아있다는 증거이지 않을까.




천선란 작가는 ‘우리는 모두 천천히 달리는 연습을 해야 한다’는 한 줄의 메모에서 이 이야기를 시작했다고 한다. 너무 빨리 지나가는 풍경 속에서는 결코 보이지 않는 길가의 여린 풀잎을 보기 위해, 우리는 기꺼이 느려져야 한다.


내가 그은 밑줄들은 결국 ‘멈춤’의 미학에 관한 것이었다. 1등을 하지 않아도, 완벽한 다리를 갖지 않아도, 비릿한 슬픔을 안고 살아가도 괜찮다. 중요한 것은 얼마나 빨리 가느냐가 아니라 그 길 위에서 얼마나 많은 ‘파랑’을 발견하고 얼마나 많은 존재와 눈을 맞추느냐는 것.


비록 우리의 시간이 제각기 다른 속도로 흐를지라도, 이따금씩 말하지 않아도 서로의 마음을 알아차리는 그 찰나의 기적을 믿으며 살아가고 싶다. 너무 빠르지도, 너무 느리지도 않게. 세상의 압박으로부터 벗어나 등속 운동을 유지하며 자신에게 다시 생긴 삶을 이어갈 투데이처럼, 우리도 이제 각자의 파랑을 품고 천천히 걸음을 옮겨야 할 때다.


우리가 겪는 모든 고통과 상실은 결국 하늘을 이루는 천 가지 파란색 중 하나일 뿐이다. 그러니 오늘 당신의 하늘이 조금 흐리거나 어둡더라도 낙심하지 않기를 바란다. 그것은 단지 당신의 삶이 또 다른 파랑으로 채워지는 중이라는 신호일 테니까. 당신이 오늘 마주한 파랑은 어떤 빛깔인가. 그 색에 이름을 붙이기 위해 잠시 걸음을 멈춰도 좋다. 그 멈춤이야말로 우리가 기계가 아닌 생명으로 존재한다는 가장 확실한 증거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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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임스
퍼시벌 에버렛 지음, 송혜리 옮김 / 문학동네 / 202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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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옥의 한가운데에서 자신의 이름을 정자로 써 내려가는 행위,
그것은 단순히 문자를 기록하는 일이 아니라 부당하게 빼앗긴 세계를 통째로 탈환하는 혁명이다.


퍼시벌 에버렛의 소설 『제임스』는 140년 전 마크 트웨인이 창조한 『허클베리 핀의 모험』이라는 익숙한 무대의 뒤편, 그늘진 곳에 서 있던 흑인 노예 '짐'을 무대 정중앙으로 불러내어 '제임스'라는 온전한 이름을 돌려준다. 우리는 그동안 헉(허클베리)의 눈을 통해 짐을 보아왔다. 미신을 믿고 어리숙하며 백인 소년의 모험에 동행하는 충직한 조력자로서의 짐. 하지만 에버렛은 이 고전의 전제를 뒤엎는다. 짐은 사실 칸트와 로크를 논하는 지식인이며 백인들 앞에서는 생존을 위해 '노예 필터'를 거친 어눌한 말투를 연기하는 치밀한 전략가다.


작가인 퍼시벌 에버렛은 철학을 전공한 이력답게 작품 전반에 걸쳐 언어와 존재의 상관관계를 집요하게 파고든다. 그는 흑인 작가로서 미국 사회의 인종 우월주의와 그 저변에 깔린 지적 허영심을 풍자와 철학적 사유로 해체해 온 사람이다. 『제임스』에서 그가 다루는 핵심은 '주체적인 언어의 소유'이다. 노예에게 글을 읽고 쓰는 능력이 금기시되었던 이유는, 글이 곧 생각의 질서를 만들고 그 질서가 기존의 억압 체제를 무너뜨릴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무기이기 때문이다.


소설 속에서 제임스가 도망 중에도 연필 한 자루를 목숨처럼 지키며 종이 위에 글자를 긁어 내려가는 장면은 눈물겹도록 엄숙하다. "만약 이 글자들이 의미를 가질 수 있다면, 삶도 의미를 가질 수 있을 것이고, 나 역시 의미를 가질 수 있을 것"이라는 그의 독백은, 존재의 증명이 타인의 인정이 아닌 오직 자신의 기록으로부터 시작됨을 시사한다.


우리는 흔히 자유를 '어디로든 갈 수 있는 상태'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제임스의 여정은 우리에게 다른 질문을 던진다. 진정한 자유란 '내가 나를 어떻게 정의하는가'의 문제다. 제임스는 백인 소년 헉에게 "난 깜둥이가 아니야. 누구나 자기가 원하는 사람이 될 수 있어"라고 말한다. 이는 단순한 신분 해방을 넘어선 존재론적 선언이다. 타인이 규정한 '노예'라는 껍데기를 스스로 찢고 나와 '제임스'라는 고유한 내면의 지도를 그려가는 과정 자체가 곧 자유인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며 가장 아프게 다가온 지점은 '기다림'에 대한 성찰이었다. "기다림은 노예의 삶에서 커다란 부분을 차지한다. 노예는 기다리고, 좀 더 기다리기 위해 또 기다린다." 지시를 기다리고, 음식을 기다리고, 구원을 기다리는 수동적인 삶. 어쩌면 우리 역시 현대판 노예 제도의 변형된 형태 속에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시스템이 정해준 순서를 기다리고, 타인의 평가가 내려지길 기다리며 내 삶의 주도권을 외부에 맡기고 있지는 않은가.


제임스는 이 기다림의 연쇄를 끊어내기 위해 스스로 '죽음의 천사'가 되어 가족을 구하러 나선다. 그리고 마침내 자신의 이름 그 자체인 '제임스'로 바로 선다. "내 이름은 내 것이 되었다"는 문장은 그래서 읽는 이의 가슴에 묵직한 파동을 일으킨다.


삶에서의 성찰은 결국 이 지점에 닿는다. 세상이 나를 무엇이라 부르든, 내가 나 자신에게 부여하는 이름의 무게를 견디고 있는가. 우리가 일상에서 펜을 들고 일기를 쓰고 문장을 다듬고 내 생각을 조탁하는 행위는 제임스가 미시시피강의 진흙탕 속에서 연필심을 아껴가며 쓴 글자들과 본질적으로 맞닿아 있다. 그것은 나를 소유하려는 세상의 시선으로부터 나를 격리시키고 오직 나만이 접근할 수 있는 내면의 서재를 구축하는 일이다.


『제임스』는 우리에게 말한다. 당신이 누구인지, 당신의 고통이 어떤 색깔인지, 당신의 사랑이 얼마나 깊은지를 타인의 입을 통해 들려주지 말라고. 스스로 써 내려가라고. 비록 그곳이 지옥의 한복판일지라도 자신의 손으로 적어 내려간 문장 하나가 있다면 그곳은 이미 지옥이 아니다. 그 문장은 이미 '더 푸른 땅'으로 향하는 유일한 통로가 되어줄 것이기에.




내 이름은 무엇인가.

나는 나를 어떻게 기록하고 있는가.


제임스가 쥔 부러진 연필 끝에서 시작된 이 질문이

오늘 밤 우리의 잠잠한 사유 속에서 길게 이어지길 바란다.


자유는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내 손에 쥔 연필 끝에서 매 순간 쟁취하는 것임을 잊지 않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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