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즈가 나에게 말하는 것들 - 지금 여기에서
최은창 지음 / 노르웨이숲 / 2024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삶이라는 무대 위에서 우리는 대부분 악보 없이 던져진 연주자와 같다. 공연 준비는 해야 할 텐데, 다음 마디에 어떤 코드가 올지, 옆 사람의 연주가 언제 끝날지 모른 채 그저 순간의 감각에 의존해 소리를 내야 한다. 그것이 때로는 소음처럼 느껴져 불안할 때, 베이시스트 최은창의 『재즈가 나에게 말하는 것들』을 만났다. 이 책은 음악 이론서가 아니다. 엉망진창인 삶의 소음 속에서 어떻게 나만의 리듬을 찾고 타인과 조화를 이룰 것인가에 대한 긴 호흡의 철학적 보고서다.




스누피, 멋진 하루, 그리고 재즈

사실 나에게 재즈는 어려운 음악이라는 편견 뒤에 숨은, 낯설지만 매혹적인 세계이지 않나 싶다. 돌이켜보니 재즈는 예고 없이 내 삶의 틈새에 스며들지 않았을까. 어린 시절 일요일 아침마다 나를 깨우던 애니메이션 '피너츠(Peanuts)'의 경쾌한 피아노 선율이 빈스 과랄디(Vince Guaraldi)라는 재즈 피아니스트의 손끝에서 탄생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의 놀라움. 영화 '멋진 하루'에서 하정우와 전도연이 거닐던 서울과 경기의 낯선 공기를 세련되게 감싸주던 푸디토리움(김정범)의 음악. 그리고 우연히 카페에서 흘러나온 에디 히긴스 트리오의 'Bewitched'에 마음을 뺏겨 한동안 그 앨범만 반복해 듣던 날들.


그렇게 알게 모르게 내 안에 재즈의 씨앗이 심어져 있었음을 안다. 그리고 이제, 그 씨앗이 최은창이라는 베이시스트의 문장을 만나 비로소 어떤 의미의 싹을 틔우게 된다. 저자는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솔로 악기가 아닌, 묵묵히 저음으로 리듬을 지탱하는 베이시스트다. 그는 김윤아의 밴드 멤버로, 또 재즈 펑크 밴드 JSFA의 리더로 20년 넘게 무대를 지켜왔다. 그의 글은 베이스의 현처럼 굵고 단단하며, 낮은 곳에서 전체를 조망하는 통찰을 담는다.



협상의 기술 (Art of Negotiation)

이 책은 재즈를 정의하는 수많은 말들 중 가장 인상적인 정의를 내린다. 바로 '협상의 기술'이다. 우리는 흔히 재즈를 자유로운 영혼들의 즉흥적인 향연이라 생각하지만, 저자는 그 이면에 숨겨진 치열한 '듣기'와 '타협'의 과정을 이야기한다.


쉬운 합의가 아니라 끈질긴 협상 뒤의 타협, 나와 다른 존재를 인정하고 그것을 받아들이되 나의 나 됨은 잃지 않으려는 투쟁, 그 힘겨루기가 만들어내는 예기치 못한 결과가 art of negotiation, 협상의 기술이며 곧 재즈란 얘기다. 뒤늦게나마 나는 그 협상의 기술을 갈고닦아야 한다. 그것이 재즈의 본질임을 인정한다면.


우리는 관계 속에서 얼마나 자주 쉬운 합의를 택하는가. 또는 반대로 나를 잃어버릴 정도로 타인에게 휩쓸리는가. 재즈 연주자들은 무대 위에서 끊임없이 서로의 소리를 듣는다. 드럼이 리듬을 쪼개면 피아노가 화답하고, 색소폰이 질주하면 베이스가 길을 터준다. 그 과정은 평화로운 대화일 때도 있지만, 서로의 자존심을 건 투쟁일 때도 있다. 하지만 그 투쟁의 끝은 파국이 아니라 서로가 서로를 인정하는 조화가 된다. 나의 '나 됨(Self-identity)'을 잃지 않으면서 타인의 소리를 받아들이는 것.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타인과 부대끼며 살아가는 매일의 일상에서 가장 필요한 기술이 아닐까.



엉망진창인 상황이 만들어내는 예술

저자는 20년의 연주 생활 동안 겪었던 좌절과 소화불량 같았던 시간들을 솔직하게 고백한다. 즉흥연주가 마치 초등학생에게 주어진 수능 수학 문제처럼 느껴졌던 막막함, 재능 없는 자신을 미워하는 데 썼던 20년의 세월. 그 고백은 화려한 무대 뒤편의 그림자를 보여줌과 동시에 우리 모두가 가진 불완전함을 위로한다.


"대가들이 공통적으로 했던 것 중 하나는 자신의 자기 자신됨, 스스로의 경험에 절대로 등을 돌리지 않은 것이었다. 자기가 인생을 통해 겪은 것이 자신의 소리를 형성하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뛰어난 예술은 엉망진창인 상황에서 나왔다. 그 상황에서 빠져나와 어디론가 가기 위해 무엇이 필요했다. 그게 재즈가 태어난 지점이고 힙합이 나온 곳이다.” (로버트 글래스퍼)


'엉망진창인 상황'. 이 말이 주는 묘한 안도감이 있다. 우리의 삶도 자주 엉망진창이 된다. 계획은 틀어지고, 관계는 꼬이며, 그 위에선 나는 초라해진다. 하지만 재즈는 말한다. 바로 그 엉망진창인 상황이 당신만의 소리를 낼 수 있는 재료라고. 매끄럽게 포장된 도로가 아니라, 울퉁불퉁하고 진흙탕인 길을 걸어왔기에 낼 수 있는 고유한 소리가 있다고. 실수(Miss tone)조차 다음 음을 어떻게 연결하느냐에 따라 의도된 불협화음처럼 들릴 수 있는 재즈처럼, 우리 인생의 실수들도 결국 나라는 사람을 완성해 가는 과정의 일부일 것이다.



듣는 이가 완성하는 세계

저자는 연주자이지만, 책의 많은 부분에서 '듣는 행위'의 위대함을 이야기한다. 음악은 연주자의 손끝에서 시작되지만, 그것이 완성되는 곳은 청자의 마음속이다.


듣는 이가 추상적인 이야기에 자신의 감정과 이해를 덧입혀 완성해 가는 것은 무척이나 개인적인 경험일 수 있습니다. 가사가 없을 때, 혹은 도무지 앞뒤가 안 맞는 가사로 가득 차 있을 때 듣는 이는 훨씬 더 적극적으로 자신을 투영할 수 있게 됩니다. 정작 연주자는 오직 악기 소리로만 이야기할 뿐인데, 듣는 이는 ‘어떻게 나를 이렇게 잘 아는 거지?’ 하는 마음으로 받아들이게도 됩니다.


가사가 없는 연주곡을 들으며 펑펑 울어본 적이 있는가. 혹은 낯선 멜로디에서 오래된 기억을 마주한 적이 있는가. 그것은 음악이 비어있기 때문이다. 그 여백을 채우는 것은 청자인 '나'의 경험과 감정이다. 책을 읽는다는 행위도 이와 같다. 저자의 텍스트는 악보와 같고, 그 행간에 나의 삶을 투영하여 해석하는 것은 나만의 즉흥연주다. 저자가 말하는 '개인적인 기대를 투영해서 작품을 감상하고 평가하는 태도를 덜어내려는 노력'은 역설적으로 우리가 얼마나 자기중심적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있는지를 깨닫게 한다.



4분 음표로 걷는 삶

재즈 베이시스트는 주로 4분 음표를 연주한다. '둥, 둥, 둥, 둥'. 화려하지 않고, 멜로디처럼 도드라지지도 않는다. 하지만 그 4분 음표가 끊어지지 않고 이어질 때(Walking Bass), 다른 연주자들은 그 위에서 마음껏 춤을 춘다.


재즈가 대중음악의 중심에서 점차 밀려난 지 벌써 몇십 년이 지났다. 훌륭한 4분 음표를 가진 베이스 연주자라면 모두에게 환영받던 시기가 있었지만, 이제는 그 가치를 감상해 낼 사람들이 많지 않은 세상이 되었다. 그렇다면 과연 나는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과거의 화려하던 시절을 흐릿하게 재현하는 중일까? ‘여기에는 커다란 의미가 있어, 어쩌면 지금 너희들은 공감하지 못할 수도 있겠지만.’ 하고 중얼거려 본다.


이 시대는 자극적이고 빠르며, 시각적인 것에 열광한다. 묵묵히 리듬을 지키는 4분 음표 같은 삶은 주목받지 못하겠지. 그러나 저자는 믿는다. 시대와 불화할지라도, 이 음악 안에, 그리고 묵묵히 자신의 자리를 지키는 행위 안에 커다란 가치가 있다고.


이 책을 덮으며 나의 일상을 생각했다. 매일 반복되는 출근과 퇴근, 누군가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일, 사소한 배려들. 어쩌면 나 역시 인생이라는 밴드에서 4분 음표를 연주하고 있는 베이시스트가 아닐까. 화려한 솔로 연주는 아닐지라도, 내가 묵묵히 짚어가는 이 리듬이 누군가의 삶을 지탱하고, 나의 가정을, 나의 관계를 굴러가게 하는 동력일지도 모른다.




삶이 자꾸만 엇박자로 느껴질 때

사람들 사이의 소음이 견디기 힘들 때

이 책이 전하는 재즈의 지혜를 떠올리고 싶다.


불협화음을 두려워하지 말 것

엉망진창인 상황을 내 고유한 소리로 만들 것


그리고 무엇보다

타인의 소리에 귀 기울이되 나만의 리듬을 잃지 말 것


재즈는

그리고 삶은

결국 계속해서 이어지는 연주(Play)니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물질의 세계 - 6가지 물질이 그려내는 인류 문명의 대서사시
에드 콘웨이 지음, 이종인 옮김 / 인플루엔셜(주) / 2024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우리는 인류 역사상 가장 가벼운 시대를 살고 있다 믿는다. 손가락 하나로 지구 반대편의 소식을 전해 듣고, 보이지 않는 클라우드(Cloud)에 기억을 저장하며, 가상 화폐로 부를 축적하는 시대. 우리는 물질의 제약에서 벗어나 순수한 정신과 데이터의 세계로 진입했다고 착각하곤 한다. 하지만 이 책, 에드 콘웨이의 『물질의 세계』를 펼치는 순간, 그 투명하고 매끄러운 환상은 산산이 조각난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며 스마트폰 화면을 두드리던 내 손끝이 사실은 거칠고 투박한 돌멩이와 연결되어 있음을, 내가 누리는 이 안락함이 땅속 깊은 곳에서 누군가가 파낸 흙더미 위에 위태롭게 서 있음을 느낀다. 에드 콘웨이는 영국의 저널리스트이자 경제 전문가지만, 이 책에서 그는 숫자가 아닌 흙먼지를 뒤집어쓴 채 우리를 지하 갱도로 안내한다.


그가 안내하는 여섯 가지 물질—모래, 소금, 철, 구리, 석유, 리튬—의 여정을 따라가다 보면, 내가 그은 밑줄들은 단순한 정보의 기록이 아니라, 우리 문명이 잊고 지낸 거대한 빚문서처럼 다가온다.





우리는 여전히 돌을 깨고 있다


아직도 땅을 폭파하여 얼마나 많은 모래와 암석을 얻고 있는지를 고려한다면, 우리는 여전히 석기시대에 꽉 붙들려 있다고도 할 수 있다. 철과 구리에 대한 수요는 최근 들어 더 증가했다. 상황이 이럴진대 현대는 철기시대이고, 더 나아가 구리시대, 소금시대, 석유시대, 리튬시대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AI 시대', '디지털 시대'라는 화려한 명패를 내걸었지만, 실상 우리는 역사상 그 어느 때보다 더 많은 땅을 파헤치고 더 많은 돌을 깨부수고 있다. 단지 그 행위가 우리의 시야에서 아주 멀리 떨어진 칠레의 사막이나 콩고의 광산에서 이루어지기에 모르고 있을 뿐.


이 문장을 읽으며 내 삶의 태도를 되돌아본다. 너무 쉽게 결과만을 향유하려 하지 않았던가. 과정의 지루함, 노동의 고단함, 물질의 저항 같은 것들은 촌스러운 것으로 치부하고, 오직 세련된 결과물만을 탐닉하지 않았나. 하지만 문명이라는 거대한 탑은 클라우드 서버가 아니라, 땅속 깊이 박힌 철근과 콘크리트 위에 서 있다. 이 첫 번째 문장은 붕 떠 있던 내 두 발을 땅으로 끌어내려 단단한 대지에 밀착시켰다.



매끄러운 화면 뒤의 거친 손길

책을 읽어 내려가며 마주한 불편한 진실은 우리의 우아한 일상이 누군가의, 혹은 지구 어딘가의 처절한 파괴를 담보로 하고 있다는 점이다. 특히 나의 시선을 오랫동안 붙잡아 둔 문장은 결혼반지에 대한 저자의 자조적인 독백이었다.


어째서 나는 이 금이 어디에서 왔는지 확인하지 않았던 걸까? 아내의 약혼반지 다이아몬드가 분쟁지역 다이아몬드가 아니라는 사실은 그렇게 열심히 확인했으면서 말이다. 그런데도 이 반지를 만들기 위해 인간과 토지가 어떤 희생을 치렀는지는 왜 확인하지 않았는가.


우리는 완성된 보석의 영롱함에는 감탄하지만, 그것을 얻기 위해 파헤쳐진 20톤의 흙과 암석, 그리고 갱도 속 광부의 땀방울은 상상하지 않는다. 이것은 단순히 자원 문제에 국한되지 않는다. 우리의 삶 전반에 걸친 '단절'에 대한 이야기다.


식탁 위의 고기가 어떤 생명이었는지, 내가 입은 옷을 누가 바느질했는지, 내가 쓰는 스마트폰의 배터리 원료를 캐기 위해 어떤 아이가 갱도로 들어갔는지. 우리는 '소비자'라는 편리한 이름 뒤에 숨어 생산 과정의 고통과 버려지는 부산물을 외면한다. 저자가 느꼈던 '도살장을 둘러보기 전의 기분'은 현대인이라면 누구나 품고 있는 근원적인 부채감일 것이다.


이 문장은 나에게 묻는다. 우리의 안락함은 무결한가. 우리가 누리는 것들의 출처를, 그 무게를 감당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



보이지 않는 것들이 세상을 지탱한다

우리는 스티브 잡스나 일론 머스크 같은 비전가들을 숭배한다. 하지만 에드 콘웨이는 이 화려한 무대 뒤에서 묵묵히 기계를 돌리는 진짜 주인공들을 조명한다.


물질세계에서 당신은 낯선 이름이지만 매우 중요한 회사들, 예를 들면 CATL, 바커 Wacker, 코델코 Codelco, 사강 Shagang, TSMC, ASML을 만날 것이다. 이 이름들은 당신에게 별 의미가 없겠지만, 누구나 다 아는 월마트 Walmart, 애플 Apple, 테슬라 Tesla, 구글 Google 같은 비물질 세계의 회사들보다 어쩌면 더 중요할 수도 있다. 현대 경제에 가장 잘 숨어있는 비밀이 바로 이것이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브랜드들은 그들의 똑똑한 아이디어를 제품으로 만들기 위해 물질세계의 이름 없는 회사들에 전적으로 의존한다. 물질세계가 있음으로써 비로소 아이디어가 현실에서 구체화될 수 있는 것이다.


애플의 매끄러운 디자인도, 테슬라의 혁신적인 자율주행도, 결국은 리튬을 정제하고 구리를 제련하고 실리콘을 웨이퍼로 구워내는 이 '이름 없는 회사들' 없이는 허상에 불과하다.


미국에서 생산하는 5달러 중 4 달러가 서비스 부문에서 나오고, 나머지 1달러는 에너지업· 광산업·제조업에서 나온다. 그렇지만 소셜네트워크부터 소매업, 금융업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것이 물질적 하부구조에 의존하고 있지 않은가. 그것들을 가능하게 하고 거기에 에너지를 제공하는 건 물질계이다. X(트위터의 새로운 이름)나 인스타그램이 갑자기 사라진다고 해서 세상이 종말을 맞진 않을 것이다. 그러나 강철이나 천연가스가 갑자기 사라진다면 상당히 심각한 이야기가 된다.


이 대목에서 나는 삶의 우선순위에 대한 통찰을 얻는다. 겉보기에 화려하고 주목받는 것들(서비스, 브랜드, 아이디어)이 있겠으나, 정작 위기 상황에서 나를 지탱해 주는 것은 투박하고 눈에 띄지 않는 것들(건강, 가족, 성실함, 저축)이라는 사실이다. 우리는 종종 눈에 보이는 성과에 매몰되어 그 성과를 가능하게 하는 단단한 기반을 소홀히 한다. 강철과 천연가스처럼, 내 삶을 지탱하는 '물질적 하부구조'는 무엇인지 고민하게 된다. 그것은 아마도 매일 반복되는 지루한 일상과 꾸준함이겠지.



혐오와 감사의 딜레마

석유 챕터에서 저자가 보여주는 균형 잡힌 시각은, 세상을 선과 악으로만 나누려는 우리의 이분법적 사고에 경종을 울린다.


석탄의 시대에 뒤이어 등장한 석유의 시대는 인류를 힘들고 단조로운 육체노동에서 해방시켰고, 전 세계의 소득을 높이고 우리가 더 오래 살 수 있게 해 주었다. 석유 제품과 석유 에너지는 영아 사망률을 낮추었고 영양실조와의 싸움에 힘을 보탰다. 다시 말해서, 연료와 화학물질의 원천인 석유가 없는 세상을 상상하기 어렵다... 하지만 땅속에서 원유를 퍼올리는 과정에서 우리는 인류가 존재하기 전부터 계속되어 온 지질학적 사이클을 파괴하고 있다. 석유와 가스를 태우는 동안, 지하에 격리되어 있던 이산화탄소가 다시 대기 중으로 나오면서 지구온난화라는 새로운 시대를 촉발했다.


석유는 인류를 기아와 노동에서 해방시킨 구원자인 동시에, 지구 온난화라는 재앙을 불러온 파괴자다. 우리는 석유를 미워하면서도 석유 없이는 하루도 살 수 없다. 이 모순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이것은 우리 삶의 모습과도 닮았다. 나를 성장시킨 시련이 동시에 나에게 트라우마를 남기기도 하고, 나를 편안하게 하는 습관이 나를 병들게도 한다. 모든 물질에는, 그리고 모든 삶의 요소에는 명과 암이 공존한다. 저자는 석유를 무조건 악마화하거나 옹호하는 대신, 그 복잡한 딜레마를 직시하자고 말한다. 구리 챕터에서 언급된 '생태 문제와 환경 문제를 고려한다면 모든 해결책은 구리에서 찾을 수밖에 없습니다'라는 역설적인 문장처럼, 우리는 문제를 일으킨 바로 그 물질(자원)을 통해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운명일지 모른다. 도망칠 곳은 없다.



다시, 상상력의 빈곤을 넘어 물질의 제약으로

인류는 앞으로 평탄치 않은 몇 년을 보내게 될 것이다. 지난 수십 년 동안 우리는 인간의 주된 제약이 상상력의 빈곤뿐이라고 굳게 믿었다. 우리는 무척 세련되고 매끄러운 경제 체계를 만들었고, 그다음에는 그걸 구축했던 물질에 대해서 완전히 망각해버리고 말았다. 그러나 탄소 중립을 이루고자 하면서 우리는 열역학과 물질의 제약이라는 피할 수 없는 한계에 직면하고 있다.


'꿈꾸면 이루어진다'는 식의 낭만적인 구호가 지배하던 시대는 저물고 있다. 우리는 이제 물리학의 법칙과 자원의 유한성이라는 차가운 현실 벽 앞에 서 있다. 하지만 나는 이것이 비관적인 결말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것은 성숙을 위한 초대장이다.


무한한 가능성이라는 허상에서 깨어나 내 손에 쥐어진 자원의 한계를 인정하는 것. 그리고 그 제약 안에서 최선의 해답을 찾아내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것. 그것이 현시대를 살며 후손에게 남겨야 할 우리의 태도가 아닐까. 상상력만으로 모든 것이 해결되지 않는다. 결국은 물질을 만지고, 다듬고, 때로는 흙투성이가 되어야만 세상은 아주 조금 바뀐다.



흙을 만지는 마음으로

책을 덮으며 나는 내 주변의 사물들을 다시 본다.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노트북의 알루미늄 바디, 방을 밝히는 전구 속의 구리 선, 밖으로 낸 유리창. 이 모든 것은 저 먼 우주에서 온 마법이 아니라, 지구의 살점을 떼어내 수많은 사람의 노동으로 빚어낸 결정체들이다.


에드 콘웨이의 『물질의 세계』는 우리에게 감사함과 두려움을 동시에 알린다. 이 풍요로운 물질문명을 누리는 것에 대한 감사함, 그리고 이 문명이 얼마나 위태로운 균형 위에 서 있는지에 대한 두려움이다.


나와 당신의 문장은, 이제 공허한 관념의 유희를 멈추고 땅으로 내려와야 한다. 뜬구름 잡는 소리 대신, 모래알처럼 까슬까슬하고 소금처럼 짭조름하며, 쇳덩이처럼 묵직한 삶의 질감을 회복해야 한다. 우리가 걷는 이 길이 아스팔트가 아니라, 수억 년 된 암석과 누군가의 땀으로 다져진 길임을 기억할 때, 우리의 걸음은 조금 더 조심스럽고, 조금 더 겸허해질 것이다.


진짜 세상은 클라우드 너머가 아니라, 당신의 발밑에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여우의 계절 - 귀주대첩, 속이는 자들의 얼굴
차무진 지음 / 요다 / 2024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것은 명백한 거짓부렁이다. 다만, 나는 동굴에 들어가 홀로 웃는다. 이 서사가 사실이라고 믿는다. 끊기고 정렬되지 못한 기록의 공간이 넓고 거짓이 아니라는 증거도 없기에. 그래야 내 상상이 빛을 발할 것이기에. - '작가의 말' 중


우리가 평생에 걸쳐 읽고 쓰는 모든 문장 중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 어쩌면 그것은 이미 존재하는 진실을 기록한 문장일 수도 있겠으나, 세상이 알아주지 않는 공백을 채우기 위해 내가 스스로 믿기로 선택한 문장일지도 모른다. 차무진 작가의 장편소설 『여우의 계절』을 덮고 난 후 나는 책의 본문이 아닌 '작가의 말'에 그어진 이 밑줄을 오랫동안 응시할 수밖에 없었다.


'이것은 명백한 거짓부렁이다.'라는 도발적인 선언으로 시작된 이 문장은, 단순한 팩션(Faction)을 넘어선 한 작가의 깊은 문학적 사유를 관통한다. 작가는 이 말을 통해 독자에게 역사적 사실과 스토리텔링의 경계를 흐리는 것을 넘어, 인간이 가진 믿음의 근원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내가 쓰는 이 글이 『여우의 계절』을 조명하는 이유이자, 나아가 '나와 당신의 문장은'이라는 오래된 주제를 새롭게 정의할 단초이다.



작가 차무진과 그의 '위대한 거짓말'

차무진 작가는 한국 장르문학계에서 대중성과 문학성을 고루 갖춘 보기 드문 이력의 소유자이다. 그의 작품 세계는 슬픔 뒤의 악함, 반전 속 유머, 서정이 깃든 공포 등 이율배반적인 요소들을 능숙하게 교합하며 끊임없이 독자의 예상을 뒤집는다. 이는 그 서사 자체가 고정된 규칙이나 정답을 거부하며, 우리가 익숙하게 여겨온 현실의 이면을 들춰내는 데 탁월하기 때문이다.


『여우의 계절』은 고려의 가장 극적인 승리였던 귀주대첩이 벌어지기 직전, 스무날 동안 구주성(귀주성) 안팎에서 벌어진 미스터리한 사건을 다룬다. 노쇠한 대원수 강감찬을 중심으로, 갑자기 사라진 최강 기마부대 '대마신군'의 행방, 군영 내에서 벌어진 의문의 살인사건, 그리고 미래를 보는 신력을 가진 설죽화와 살인병에 걸린 동생 설매화의 존재가 얽히며, 이야기는 역사 스릴러와 환상소설의 경계를 넘나 든다.


이 소설의 핵심은 역사의 공백을 미스터리와 오컬트로 채우는 대담한 상상력에 있다. 우리는 흔히 강감찬을 문인 출신이었으나 나라를 구한 천재적인 전략가로 기억하지만, 이 소설 속의 강감찬은 원숭이탈을 쓰고 노쇠한 몸을 간신히 가누며 심지어 귀신의 힘이라도 빌려 전쟁을 이기려 하는 듯한 기행을 보인다. 역사적 기록은 귀주대첩이라는 결과만을 적어두었겠으나, 작가는 그 결론에 도달하기까지의 과정, 즉 인간의 불안, 광기, 그리고 절박한 믿음의 순간들을 재창조한다.



공백의 미학이 주는 통찰

작가의 말엔 작가가 스스로 자신의 소설이 '명백한 거짓부렁'이라 칭하면서도, 동시에 '이 서사가 사실이라고 믿는다'고 고백하는 역설을 담고 있다.


모든 역사는 결국 기록된 것만을 사실로 인정하는 제한적인 문장들의 집합체다. 기록은 언제나 끊기고 정렬되지 못한 공간을 남긴다. 강감찬이 거란 10만 대군을 구주벌로 끌어들이기까지의 숨겨진 20일 동안, 구주성 안에서 어떤 불안이, 어떤 암투가, 어떤 인간의 원초적 공포가 들끓었는지에 대한 기록은 없다.


작가는 바로 이 기록이 침묵하는 넓은 공간을 향해 상상력이라는 빛을 쏘아 올린다. 살인사건, 예지력, 토속신앙의 주술, 환각을 일으키는 약초 '쓰리나리' 등, 이 모든 것은 작가가 '거짓이 아니라는 증거도 없기에' 과감하게 심어 넣은 요소들이다.


여기서 얻을 수 있는 통찰은 삶의 본질을 관통한다. 우리의 삶 역시 과거의 행동, 타인의 시선, 사회적 평가라는 기록들로 이루어져 있지만, 그 기록들 사이에는 언제나 해명되지 않은 공백이 존재한다. 우리는 종종 이 공백 때문에 괴로워하거나, 남이 쓴 평가와 통념에 갇혀 스스로의 본질을 잃어버린다.


하지만 『여우의 계절』은 가장 절박한 순간에 승리라는 '사실'을 만들기 위해 필요한 것은 냉철한 계산이 아니라, 미친 듯이 그 승리를 '사실이라고 믿는' 강렬한 서사적 의지라는 것을 이야기와 문장으로 건넨다. 노쇠한 강감찬이 외형적 무력함에도 불구하고 미스터리와 오컬트까지 이용해 빅 픽처를 완성하려는 모습은, 자신의 삶을 걸고 필요한 거짓말(서사)을 만들어내는 인간의 웅장한 투쟁을 상징한다.


결국 '끊기고 정렬되지 못한 기록의 공간이 넓고 거짓이 아니라는 증거도 없기에'라는 문장은, 우리에게 주어진 삶의 공백 앞에서 두려워하지 말고, 가장 아름답고 용감한 문장으로 그 공백을 채우라고 독려하는 것과 같다.



나와 당신의 문장은

결국 『여우의 계절』은, 기록된 역사 속 인물들이 실은 얼마나 인간적이고 복잡한 존재였는지를 드러낸다. 그들은 신의 영역을 넘보고, 주술에 기대고, 때로는 잔혹함을 감수하면서 자신이 지켜야 할 가치를 향해 나아간다. 비록 그들의 진심은 역사책에 남지 않았지만, 작가의 상상력 속에서 가장 강렬한 빛을 발하며 되살아난다.


그렇다면 인생에서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 그건 아마도 ‘내가 나를 어떤 존재로 규정할 것인가’라는 질문에 스스로 답하는 일이지 않을까. 타인의 눈에 비친 나의 과거는 정렬되지 못한 기록의 조각들일 수도, 때로는 명백한 거짓부렁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진정한 성찰은 바로 그 순간, 동굴 속에서 홀로 웃으며 '나는 이 서사가 사실이라고 믿는다'고 선언하는 내면의 용기에서 시작된다.


『여우의 계절』에서 길어 올린 나와 당신의 문장은, 세상이 인정한 객관의 기록이 아니라 우리가 가장 간절히 믿기로 선택한 진실의 형태다. 혼돈 속에서 길을 잃었다고 느낄 때, 해명되지 않은 과거의 공백이나 남의 시선을 탓할 이유는 없다. 우리는 언제든 새로운 문장을 쓸 수 있으며, 그 문장을 믿는 순간 비로소 상상과 의지가 미래를 향해 빛을 내기 시작할 것이다. 이것이 『여우의 계절』이 천 년의 강을 건너 오늘의 우리에게 전하는 뜨겁고도 독특한 깨달음이라 믿는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나는 농담으로 과학을 말한다 - 무심코 읽었다가 쓸데없이 똑똑해지는 책
오후 지음 / 웨일북 / 2019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타노스는 무작위로 절반을 죽였지만, 사실 우리가 사는 세계의 모든 것은 처음부터 무작위였다.


오후 작가의 『나는 농담으로 과학을 말한다』를 읽다 보면 계속 웃음이 난다. 하지만 웃음이 끝날 무렵엔 어느새 등골이 서늘해진다. 이 책은 과학을 다루지만 사실 과학책이 아니다. 이것은 우리가 '당연'이라 믿는 세계가 실은 얼마나 불안정한 합의 위에 서 있는지를 폭로하는 고발서이자, 그 불안정함 속에서도 어떻게든 살아가는 인간의 우스꽝스럽고도 숭고한 초상화다.


오후라는 작가는 이상한 사람이다. 『우리는 마약을 모른다』로 금기의 영역을 농담처럼 다뤘던 작가는, 이 책에서는 과학이라는 또 다른 금기(적어도 많은 문과생에게는)에 손을 댔다. 그의 글쓰기는 마치 경계를 허무는 놀이 같다. 과학잡지에는 문학적인 글을, 문학잡지에는 과학적인 글을 쓴다는 그의 소개는 단순한 자기 PR이 아니라 일종의 철학 선언이다. 경계란 누군가 그어놓은 자의적인 선이고 그 선을 넘나드는 것이야말로 진짜 앎의 시작이라고 말하는 듯하다.


책은 질소 비료, 단위, 플라스틱, 성전환, 우주 과학, 빅데이터, 일기예보라는 7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겉으로 보면 아무 연관 없는 주제들이지만, 읽다 보면 하나의 굵은 줄기가 보인다. 그것은 '표준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물음이다. 우리는 표준을 객관적이고 과학적인 것으로 여긴다. 미터, 킬로그램, 섭씨온도 같은 것들 말이다. 하지만 오후 작가는 이렇게 묻는다. 정말 그럴까?


화씨와 섭씨라는 온도 단위를 보자. 나는 이것이 어떤 과학적 원리에 기반한 객관적 척도라고 막연히 생각했다. 하지만 파()렌하이트 가 100℉를 정할 때 기준으로 삼은 것은 다름 아닌 '아내의 겨드랑이 온도'였다. 이보다 더 자의적일 수 있을까. 자신이 생각하는 가장 추운 온도를 고향 겨울 기온에, 가장 따뜻한 온도를 아내의 체온에 맞춘 것이다. 세계의 절반이 사용하는 온도 체계가 한 남자의 향수와 애정에서 출발했다니. (섭씨는 시우스-이수사 의 중국 음역에서 유래했다.)


더 황당한 건 길이 단위다. 1인치는 '엄지손가락 중간 마디의 길이'였고, 1피트는 '통치자의 발 길이'로 정해졌다. 왕이 바뀔 때마다 피트의 길이가 달라졌다는 소리다. 스코틀랜드의 데이비드 1세는 그나마 양심이 있었는지 성인 남성 다수의 엄지를 측정해 평균값을 냈고, 에드워드 1세는 보리 세 톨의 길이로 인치를 표준화했다. 하지만 엄지손가락도, 보리 알도 제각각이긴 마찬가지였다.


이런 자의성은 단순히 웃고 넘길만한 문제가 아니다. 1628년, 스웨덴의 최첨단 전함 바사호는 처녀항해에서 단 1.3킬로미터를 나아가고 침몰했다. 수백 년 후 인양된 바사호를 조사하자 진짜 원인이 드러난다. 좌현은 스웨덴 조선공이, 우현은 네덜란드 조선공이 만들었는데, 서로 다른 기준의 인치와 피트를 사용했던 것. 서로의 '인치'가 다르다는 걸 아무도 몰랐다. 첨단 기술을 집약한 배가 좌우 대칭조차 맞지 않아 바다에 가라앉았다. 64명의 선원이 죽었다. 표준의 부재, 아니 표준의 자의성이 사람을 죽인 것이다.


나는 여기서 우리 삶을 떠올린다. 우리가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수많은 '표준'들. 성공의 기준, 행복의 척도, 정상과 비정상을 가르는 선. 이 역시 누군가의 엄지손가락이나 아내의 겨드랑이 온도만큼이나 자의적인 것은 아닌가. 하지만 우리는 그것이 과학적이고 객관적인 진리인 양 받아들이며, 그 기준에 맞추려 발버둥 친다. 바사호처럼 서로 다른 인치로 만들어진 우리 삶은, 조금씩 균형을 잃고 기울어간다.


페루의 구아노(새들의 배설물이 퇴적, 응고되어 화석화된 것, 새똥이다) 이야기는 더 씁쓸하다. 새똥으로 일확천금을 벌게 된 페루는 연 9%가 넘는 경제 성장을 이룬다. 하지만 영국은 부패한 페루 정치권을 꼬드겨 그 돈을 설탕 플랜테이션 사업에 투자하게 만든다. '안타깝게도 이런 곳에는 늘 부패한 정부가 있다'는 오후 작가의 냉소 섞인 문장이 가슴을 찌른다. 감언이설에 속아 시작한 사업은 실패하고, 구아노마저 바닥나자 페루 경제는 끝없는 수렁으로 빠진다. 이것은 19세기 남미 이야기지만, 동시에 21세기 어디에나 있는 이야기다. 돈이 흘러들어오면 부패한 권력이 생기고 그 권력은 외부의 더 큰 권력에 포섭되며, 결국 평범한 사람들이 대가를 치른다.


볼리비아의 해군 이야기는 또 어떤가. 칠레에 해안을 빼앗겨 내륙국가가 된 볼리비아는 아직도 해군을 유지하고 있단다. 티티카카 호수에 잠수함과 전함을 띄워놓고 복수의 날을 기다린다지. 처음엔 우스꽝스럽게 들렸다. 바다도 없는 나라에 무슨 해군이람. 하지만 생각할수록 슬프고, 슬픈 만큼 이해가 됐다. 상실을 인정하지 못하는 것, 돌이킬 수 없는 것을 되돌리려 집착하는 것. 이것은 비단 볼리비아만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도 누구나 티티카카 호수에 전함을 띄우며 살지 않을까. 돌아오지 않을 사랑, 되돌릴 수 없는 선택, 다시는 오지 않을 과거. 우리는 그것들을 위해 쓸모없는 해군을 운영하며, 복수나 복원의 날을 꿈꾼다.


하지만 오후 작가의 글이 빛나는 건 그가 냉소에 머물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인간의 우스꽝스러움을 비웃으면서도 동시에 그 우스꽝스러움 속에서 뭔가를 만들어내는 인간의 힘을 믿는다. 표준은 자의적이지만, 우리는 그 자의성에 합의함으로써 바사호보다 나은 배를 만들어냈다. 미터 협약은 1875년에 체결됐고, 이제 전 세계 대부분이 같은 단위를 쓴다. 완벽하지 않지만, 적어도 좌현과 우현이 다른 인치를 쓰진 않는다.


단두대 이야기도 그렇다. '놀랍게도 단두대는 사형수의 인권 증진을 위해 도입된 기구'라는 문장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단두대. 그 잔혹한 처형 도구가 인권을 위한 것이었다니. 단두대 이전의 처형은 끔찍했고, 계급에 따라 다른 방식으로 죽었다. 단두대는 빠르고, 고통이 적고, 무엇보다 평등했다. 귀족도 평민도 같은 방식으로 죽었다. 프랑스혁명이 꿈꾼 평등은 아이러니하게도 죽음의 방식에서 실현됐다. 이것은 암울한 이야기지만, 동시에 인간이 조금씩이라도 나아지려 한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빅데이터 이야기는 더 섬뜩하다. 월마트는 데이터 분석을 통해 허리케인이 올 때 사람들이 '딸기맛 팝타르트'를 평소보다 7배 많이 산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왜 하필 딸기맛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월마트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딸기맛 팝타르트를 배송했고, 그것은 불티나게 팔렸다. 데이터과학자 캐시 오닐이 빅데이터를 '대량살상 수학무기'라 부르는 이유다. 데이터는 인과를 설명하지 않는다. 상관관계만 보여줄 뿐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것을 진리처럼 받아들인다. 빅데이터라는 새로운 신이 탄생한 것이다.


우리는 또한 매일 플라스틱 속에서 산다. 신용카드 한 개 분량의 미세 플라스틱을 몸에 축적해 가며. 생수를 사 마시지만 그 생수의 93%에도 미세 플라스틱이 들어있다. 플라스틱으로 된 블라인드로 아침을 맞고, 플라스틱 칫솔로 이를 닦고, 플라스틱 옷을 입고, 플라스틱 카드로 결제한다. 우리는 플라스틱 없이는 하루도 살 수 없으면서, 플라스틱이 우리를 죽이고 있다는 것도 안다. 이 모순. 우리는 이 모순 속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작가는 답을 주지 않는다. 질문만 던진다. 하지만 그 질문은 농담처럼 가볍고, 가벼운 만큼 깊이 박힌다. 그가 마지막 장에서 기상청 직원들을 위한 헌사를 쓸 때 조금 울컥했다. 기상청은 늘 욕을 먹는다. 일기예보가 틀렸다고. 하지만 날씨만큼 예측하기 어려운 게 또 있을까. 무수한 변수가 얽힌 카오스 시스템 속에서 그들은 최선을 다해 내일을 예측한다. 틀릴 때도 많지만 맞을 때도 많다. 그런데 우리는 맞았을 땐 당연하게 여기고 틀렸을 땐 비난한다.


이것이 우리가 사는 방식이다. 우리는 표준을 만들고, 그 표준에 갇히고, 표준이 틀렸다며 분노하고, 그럼에도 새로운 표준을 만든다. 자의적이고, 불안정하고, 불공평하지만, 그것 말고는 방법이 없다.


개별 인간의 DNA는 99.7% 같다고 한다. 단 0.3%에서 나와 당신의 모든 차이가 발생한다. 엄밀히 말하면 우리는 거의 같다. 하지만 그 0.3%가 전부다. 그 작은 차이가 당신을 당신으로, 나를 나로 만든다. 세상의 모든 표준도 그렇지 않을까. 99.7%는 자의적이고 불합리하지만, 0.3%의 합의가 우리를 함께 살게 만든다.




그래서 이 책은 결국 과학 이야기를 빌려 우리 자신을 비춘다. 세계의 표준이 얼마나 허술하게 시작되었든, 우리가 믿고 의지하는 질서가 얼마나 우연과 맹목의 산물이든, 작가는 그것을 비웃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매일 새로이 합의하고, 고쳐 쓰고, 살아내는 존재임을 보여주기 위해 꺼내 든다. 이 책의 농담은 가볍지 않고, 웃음은 낭비되지 않는다. 농담과 농담 사이, 우리는 우리가 기댔던 표준들이 언제든 흔들릴 수 있다는 사실과 동시에 그 흔들림 속에서도 서로를 붙잡고 새로운 기준을 세우며 살아가는 인간의 끈질긴 의지를 보게 된다.


어쩌면 표준이란 처음부터 거대한 진리가 아니라 우리가 함께 살기 위해 마련해 둔 작은 약속의 집합일지도 모른다. 그 약속은 부서지기도 하고 오류를 내기도 하며, 때로는 누군가를 벼랑 끝으로 밀어내기도 한다. 그럼에도 우리는 또 다른 약속을 주워 들고 내일을 향해 나아간다. 오후 작가가 던지는 질문들은 그래서 희망적이다. 세계는 늘 불완전했고 앞으로도 완전해지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그 불완전함을 인식하고도 서로에게 표준을 설명하고 다시 조정하며 또 한 번 합의해 낸다면, 그 0.3%의 차이는 우리를 갈라놓는 균열이 아니라 함께 살아가기 위한 최소한의 여지가 된다.


결국 작가는 이렇게 말하는 것이 아닐까. 세계는 본래 엉망진창이고, 인간은 그 엉망진창 속에서 여전히 사랑하고 일하고 예측하고 실패하며 다시 시도하는 존재라고. 그래서 그의 농담을 다 읽고 책을 덮는 순간, 우리는 이상하게도 조금 안심하게 된다. 표준이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나 역시 완벽하지 않아도 살아갈 수 있다고. 과학이 아니라 인간을 향한 위로가, 이 책의 가장 과학적인 진실처럼 느껴진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나의 친구들 페이지터너스
에마뉘엘 보브 지음, 최정은 옮김 / 빛소굴 / 2023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진정한 고독은 낭만이 아니다.
질척대는 구걸꾼으로 만드는 비루한 허기다.


우리는 흔히 고독을 커피 한 잔의 여유나 사색을 위한 고고한 시간으로 포장하려 하지만 그 포장지를 거칠게 뜯어내면, 그 안에는 '나를 좀 봐달라'고 소리치며 타인의 바짓가랑이를 붙잡는 어린아이 같은 자아가 웅크리고 있다. 나는 오늘, 우리가 애써 외면해 온 그 '지질한 고독'의 민낯을 이야기하려 한다. 100년 전 파리의 뒷골목을 서성이던 한 남자의 독백을 빌려서.


작가 에마뉘엘 보브(Emmanuel Bove). 이름조차 낯선 이 작가는 문학사에서 기이한 궤적을 그린다. 1898년에 태어나 라이너 마리아 릴케와 사뮈엘 베케트 같은 거장들의 극찬을 받았으나, 사후에는 완벽하게 잊혔다. 마치 그가 평생 천착했던 주제인 '군중 속의 고립'처럼, 그는 문학의 역사 속에서 고립되었다. 하지만 그의 딸의 헌신으로 1970년대에 이르러서야 기적처럼 부활했다.


베케트는 그를 두고 '누구보다 본질적인 디테일을 다루는 본능을 가진 작가'라고 했다. 여기서 본질적인 디테일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인간의 위대함이나 숭고함이라기보다는 인간이 감추고 싶어 하는 찌질함, 비겁함, 그리고 타인의 온기를 갈구하다 못해 비굴해지는 순간의 심리 묘사를 뜻한다. 에마뉘엘 보브는 인간의 마음속 가장 어두운 지하실에 촛불을 들고 내려가는 작가다.


『나의 친구들』의 주인공 '빅토르 바통'은 1차 세계대전 상이군인이다. 연금으로 근근이 살아가는 그는 직업도 가족도 없고, 무엇보다 친구가 없다. 소설은 그가 친구를 만들기 위해 파리의 거리를 헤매는 과정을 그린다.


하지만 바통을 응원하기란 쉽지 않다. 그는 가난하지만 선량한 피해자가 아니라, 타인을 자신의 외로움을 채워줄 도구로 보는 사람이다. 돈 많은 친구를 질투하고 자신보다 불행해 보이는 사람에게서 우월감을 느끼며, 여성을 오직 자신의 존재를 확인시켜 줄 대상으로 여긴다. 그는 끊임없이 계산하고, 의심하고, 기대했다가 혼자 실망하고 도망친다.


책을 읽으며 이 한심스러운 인물을 꾸짖는다. '뭐 이런 인간이 다 있어?'라며 혀를 차기도 하고. 하지만 책장을 넘길수록 그 경멸은 묘한 불편함으로 바뀐다. 그 불편함의 정체는 공포다. 바통의 속마음이, 사회적 가면을 쓴 우리가 차마 입 밖으로 내지 못했던 내면의 목소리와 너무나 닮아 있기 때문이다. 바통은 타인이 아니라, 가면을 벗은 우리 자신의 초상은 아닐지.




고독이 나를 짓누른다. 친구가 그립다. 진실한 친구가……
이런 나의 탄식을 곁에서 들어줄 사람이라면 아무라도 상관없다고 생각한다. 하루 종일 그 누구하고 아무런 대화도 나누지 않은 채 거리를 헤매다 밤이 되어서 집으로 돌아오면 녹초가 된다. 손톱만큼 밖에 안 되는 우정과 사랑이라도 얻을 수만 있다면, 나는 그것을 위해 내가 가진 모든 것을 내놓을 것이다.


이 문장은 숭고한 우정에 대한 갈망이 아니다. 이것은 생존의 문제다. 바통에게 타인은 나라는 존재의 이유다. 그는 혼자서는 자신이 살아있음을 느끼지 못한다. 우리는 흔히 '자신을 먼저 사랑해야 타인도 사랑할 수 있다'라고 말하지만, 바통은 그 명제가 거짓이라 믿는 듯 온몸으로 증명하려 한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타인의 시선이 있어야만 비로소 나라는 형체가 만들어진다. '손톱만큼의 우정'을 위해 모든 것을 내놓겠다는 말은 헌신이 아니라 자아의 붕괴다.


나는 완전히 맥이 풀린 채로 그 자리를 떠났다. 억지로 기운을 내 보려고도 하지 않고, 오히려 가능한 한 슬픔을 지속시키기 위해 애를 쓰며 걸었다. 마음을 꽁꽁 닫아걸고, 내가 정말로 보잘것없고 비참한 존재라는 사실을 일부러 더 각인시키려 애쓰며 걸었다. 나는 그렇게 함으로써 마음의 위안을 찾고 있었다.


누구나 한 번쯤 이런 경험이 있지 않을까. 누군가에게 상처를 받았거나 혹은 일이 뜻대로 풀리지 않을 때, 무의식적으로 찾아오는 불행한 표정과 축 늘어뜨린 어깨. 내가 얼마나 비참한지 세상이 알아주기를, 누군가 다가와서 무슨 일이냐고 물어봐 주기를 바라는 무언의 연기(acting). 바통은 자신의 불행을 전시함으로써 위안을 얻는다. 이것은 고독이 낳은 병적인 자기애다. 슬픔조차도 타인의 관심을 끌기 위한 무대 장치가 된다.


내가 원하는 건 불행한 친구다. 나처럼 있을 곳이 없는 사람, 같이 있어도 의리나 은혜 따위에 신경을 쓰지 않아도 되는 가난하고 착한 사람. 내가 찾는 건 오직 그런 사람이다.


바통의 이 고백은 잔인할 정도로 솔직하다. 그는 자신보다 잘난 친구를 원하지 않는다. 자신을 비참하게 만들지 않을, 자신이 마음대로 휘두를 수 있는 '만만한 대상'을 원한다. 여기서 우정은 수평적인 교류가 아니라, 나의 결핍을 메우기 위한 수직적인 착취가 된다. 우리는 과연 바통보다 나은가? 우리 역시 친구를 사귈 때 심연의 저편에서 '나에게 도움이 되는가', '나와 결이 맞는가', '내 이야기를 들어줄 만한가'를 따지지 않는지. 바통은 그 저열한 속내를 들켰을 뿐이다.


내 몸이 따뜻하다. 틀림없이 살아 있다. 그렇게 생각하면 안심이 된다. 애정을 담아 나의 피부를 만지며, 심장의 박동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하지만 가슴에 손을 대지는 않는다. 사실 아무리 무섭다 해도, 심장 박동 소리만큼 무서운 건 없다. 명령도 하지 않았는데 규칙적으로 움직이는 이 기관은, 언젠가는 분명 허망할 정도로 간단히 멈춰 버릴 것이다.


바통이 그토록 타인을 갈구하는 근원적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혼자 있는 방, 적막 속에서 들려오는 자신의 심장 소리는 그에게 '살아있다'는 증거가 아니라 '언젠가 죽는다'는 카운트다운으로 들린다. 타인과 대화하고 소란스러운 관계 속에 있을 때 우리는 잠시 죽음을 잊는다. 고독은 우리를 죽음과 독대하게 만든다. 그래서 바통은, 어쩌면 우리는, 죽음을 잊기 위해 거리로 나가 누군가의 옷자락을 붙잡는 것일지 모른다.


고독, 얼마나 아름답고 또 슬픈 일인가. 스스로 선택한 고독은 더할 나위 없이 숭고하지만, 내 뜻과 상관없는 오랜 세월의 고독은 한없이 서글프다. 강한 사람은 고독해도 외로움을 느끼지 않는다. 하지만 나는 약한 존재이다. 그래서 친구가 없으면 외롭다.


여기서 에마뉘엘 보브는 '자발적 고독(Solitude)'과 '비자발적 고립(Loneliness)'을 명확히 구분하는데, 철학자나 예술가들이 말하는 고독은 전자다. 그것은 충만함이다. 하지만 바통이 겪는, 그리고 우리 대부분이 겪는 고독은 후자다. 그것은 결핍이다.


'강한 사람은 고독해도 외로움을 느끼지 않는다.'는 말은 우리 사회가 강요하는 폭력과도 같다. 우리는 쿨(cool)해져야 하고, 혼자서도 잘 지내는 독립적인 개인이어야 한다는 압박을 받는다. 외롭다고 말하는 것은 곧 약함을 인정하는 패배 선언처럼 여겨진다. 그래서 우리는 소셜 미디어에 화려한 혼밥 사진을 올리고, 바쁜 척을 하며, 고독을 숭고한 척 포장한다.


하지만 바통은 '나는 약한 존재이다'라고 시인한다. 이 뻔뻔할 정도의 솔직함 앞에 무장해제된다. 약해서 외롭다는 것. 친구가 없어서 미치도록 괴롭다는 것. 이 단순한 진실을 인정하는 것이 왜 그리 힘들었을까. 바통의 지질함은 자신의 나약함을 있는 그대로 긍정하는, 가장 인간적인 용기일지도 모른다.


바통은 결국 친구를 만들지 못한다. (혹은 만들었다가 제풀에 망쳐버린다.) 그는 여전히 외톨이고, 여전히 춥고, 여전히 누군가를 기다린다. 소설은 해피엔딩도 아니고 비극적 파국도 아니다. 그저 끝나지 않는 고독의 순환을 보여줄 뿐이다.


책을 덮으며 생각해 본다. 우리는 모두 각자의 방에 갇힌 바통이겠구나. 타인을 온전히 이해할 수도 없고, 타인으로부터 온전히 이해받을 수도 없다. 그 불가능성을 알면서도 우리는 또다시 누군가에게 '나의 친구가 되어 달라'고 손을 내밀고 있구나. 상처받을 것을 알면서도, 내 이기심이 튀어나올 것을 알면서도.


그리하여 바통이 우리에게 건네는 한 줄은 이것이다.

'고독은 극복해야 할 질병이 아니라, 인간이라는 종(種)이 지닌 피부와 같다.'

우리는 그것을 벗어버릴 수 없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고독하지 않은 척 연기하는 것을 멈추는 것이다.

나의 외로움이 숭고하지 않고

비루하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


'나 지금 너무 외로워'

'그래서 네가 필요해'라고 말할 수 있는 비루함.


어쩌면 그 솔직한 비루함만이 가면을 쓴 서로의 벽을 허물고

아주 잠시나마 체온을 나누게 해 주지 않을까.


타인의 관심을 끌기 위해 비틀거리며 걷던 바통의 뒷모습이 자꾸만 눈에 밟힌다.

그 뒷모습이 거울에 비친 나 같아서.


오늘은 나 스스로를 안아주어야겠다.

심장 소리가 너무 크게 들리지 않도록.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