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것도 하지 않는 법
제니 오델 지음, 김하현 옮김 / 필로우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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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것은, 세상이 우리를 어디로 끌고 가든 상관없이 내가 서 있는 이 자리에서 뿌리를 내리겠다는 조용한 선언이다.


제니 오델은 참으로 독특한 이력의 소유자다. 스탠퍼드에서 미술사를 가르치는 교수이면서, 동시에 일상에서 새를 관찰하며 많은 시간을 보내는 '새 관찰자'이기도 하다. 그녀의 예술 작업은 스크린샷을 수집해 미술 작품의 소재로 활용하는 것에서부터 자연 관찰에 이르기까지 폭넓은 스펙트럼을 아우른다. 언뜻 상반된 것처럼 보이는 이 활동들을 관통하는 하나의 축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주의 깊게 관찰하는'이다. 디지털 세상의 파편화된 정보든, 공원에서 만나는 해오라기의 새빨간 눈이든, 그녀는 무엇이든 오래 응시하며 그 안에서 우리가 놓치고 있는 본질을 찾아낸다.


오델의 『아무것도 하지 않는 법』은 2016년 트럼프 당선 이후 그녀가 느꼈던 절망감에서 출발한다. 정치적으로 조작된 정보가 쏟아지는 온라인 환경에서 벗어나 집 근처 장미 정원에서 시간을 보내며, 새를 관찰하는 시간을 해독제로 여겼던 경험이 씨앗이 되었다. '그날 트위터에서 일어난 소용돌이 같은 논쟁에서 눈을 떼고 고개를 들면 커다란 부리와 레이저처럼 새빨간 눈을 가진 해오라기 두 마리가 그대로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는 그녀의 문장은, 디지털 세계의 허상과 현실 세계의 생생함을 극명하게 대비시킨다.


관심이라는 화폐를 둘러싼 조용한 전쟁

우리는 지금 '관심경제'라는 새로운 경제 시스템 안에서 살고 있다. 소셜미디어와 디지털 플랫폼들이 우리의 관심을 상품화하고, 그 관심을 더 오래 붙잡기 위해 분노와 불안을 자극하는 콘텐츠를 끊임없이 공급한다. 우리가 무료라고 생각하는 서비스의 진짜 비용은 바로 우리 자신의 관심이다. 오델은 이러한 현실을 냉정하게 진단하며, 우리가 사로잡힌 관심의 주권을 되찾아 다른 방향으로 확장할 것을 제안한다.


그녀가 말하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은 이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그것은 무기력한 도피가 아니라, '실제로 그곳에 무엇이 있는지를 인식하기 위해서 그 자리에 가만히 머무는 것'이다. 끊임없이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압박감에서 벗어나, 지금 여기에 무엇이 있는지 온전히 인식하는 적극적인 행위인 것이다.


사색과 참여, 그 사이의 다리

오델이 인용하는 토머스 머튼의 통찰은 특히 인상적이다. 수도승이자 사상가였던 머튼은 영적인 사색과 세속적 참여가 서로 상반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발견했다. 물러남과 사색은 현재를 정확히 파악하는 데 반드시 필요하지만, 동시에 이 세상에 대한 책임을 상기시킨다. 중요한 것은 참여 여부가 아니라 참여 방식이다. 살아갈 시대는 스스로 선택할 수 없어도, 그 시대에서 어떤 태도를 취할 것인지, 현재 일어나는 사건에 어떤 방식으로 얼마만큼 참여할 것인지는 선택할 수 있다.


'한 발짝 떨어지는 것은 여기에 수반되는 모든 희망과 슬픈 사색을 품고 현재의 세계를 미래에 가능한 세계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것'이라는 정의는 단순한 거리두기가 아닌, 더 나은 미래를 상상하고 준비하는 행위로써의 멈춤을 의미한다. 이는 절망하거나 타격받지 않고 미래를 상상하는 능력을 유지하는 것이며, 나아가 '거부라는 공동의 장소에서 다른 사람과 만나겠다는 다짐'으로 발전한다.


생각은 경계에서 꽃핀다

오델이 제시하는 인식론은 우리의 고정관념을 뒤흔든다. '모든 아이디어는 나 자신과 내가 만나는 모든 것 사이에 있는 불안정하게 변화하는 교차점에서 생긴다'는 그녀의 말은, 생각이 고립된 개인의 내부에서 생성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과 타자, 자신과 환경 사이의 상호작용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현대 인지과학의 발견처럼, '인지는 이미 주어진 정신이 이미 주어진 세상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과 정신이 함께 창출해 내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우리가 어떤 환경에 관심을 기울이느냐에 따라 우리 자신도 달라진다. 스마트폰 화면에 갇힌 시선을 돌려 베란다에 방문한 하늘, 집 근처를 돌아 흐르는 개천, 동네 공원의 역사 등에 집중할 때 우리는 놀랍도록 생생하고 다정한 세계를 발견하게 된다. 이는 개인적 치유를 넘어서는 일이다. 우리의 관심이 향하는 곳이 바뀌면 우리가 속한 공동체의 지도도 함께 바뀐다.


수직으로 서 있는 삶의 자세

책에서 가장 아름다운 은유 중 하나는 오클랜드 전망탑 개관식에서 나온 '도웰링 지그' 이야기다. 나무에 정확히 수직으로 구멍을 내도록 돕는 목공 도구에서 이름을 딴 이 비영리단체의 창립자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앞으로 고꾸라지지도, 뒤로 넘어지지도 말고 땅 위에 수직으로 꼿꼿이 서 있으라.' 이 간명한 조언은 과거의 향수나 미래의 불안에 휩쓸리지 않고 현재에 단단히 뿌리내리는 삶의 자세를 상징한다.


천사에게서 역사의 본질을 읽어낸 발터 벤야민처럼, 우리는 진보라는 이름으로 쌓인 잔해 속에서 '죽은 자들을 깨워 부서진 것들을 다시 이어 붙이려' 해야 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베냐민이 말하는 해체가 단순한 파괴가 아니라는 점이다. 그것은 훼손(dismembering)의 반대인 재구성(re-membering)을 위한 첫걸음이다. 마치 외과의사가 상처를 치료하기 위해 먼저 감염된 조직을 제거하듯, 진정한 치유를 위해서는 때로 용기 있는 해체가 필요하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한때 도시를 가르며 공동체를 물리적으로 단절시켰던 콘크리트 고속도로를 철거하는 것은 파괴가 아니라 재생의 시작이다. 그 콘크리트 아래 막혀 있던 것들—냇물의 흐름, 사람들의 동선, 이웃 간의 시선—이 다시 연결될 수 있는 가능성을 여는 것이다. 우리의 관심과 감각에도 같은 원리가 적용된다. 디지털 기술이 만든 파편화된 연결망에서 벗어나 우리 인간의 동물성을 치열하게 보호하는 것은, 무너진 관계와 감각을 재건하는 첫걸음이다. 비록 전과 똑같아지지는 않겠지만, 우리는 다시 만날 수 있는 길을 복원해야 한다.


진짜 나, 진짜 세계와의 만남

오델의 목소리는 책의 말미에 가장 절실하게 들린다.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의 눈, 당신의 손, 당신의 숨결, 지금 이 시간, 당신이 이 책을 읽고 있는 장소. 이것들은 진짜다. 나도 진짜다. 나는 아바타가 아니고, 취향의 조합도 아니고, 매끈한 인지적 작용도 아니다. 나는 울퉁불퉁하고 구멍이 많다. 나는 동물이다.'


이 선언은 디지털 세계에서 매끈하게 가공된 자아가 아닌, 몸을 가진 존재로서의 인간성을 회복하자는 간절한 호명이다. 우리는 다른 생명체들과 함께 보고 듣고 냄새 맡는 세계에 살고 있으며, 이 사실을 기억하려면 시간이 필요하다. '아무것도 하지 않을 시간, 그저 귀 기울일 시간, 가장 깊은 감각으로 현재 우리의 모습을 기억할 시간'이.


돌봄이라는 이름의 저항

결국 오델이 제안하는 것은 '비도구적이고 비상업적인 활동과 생각을 위해, 유지와 보존을 위해, 돌봄을 위해, 함께하는 기쁨을 위해' 우리의 공간과 시간을 보호하는 것이다. 이는 우리의 동물성을 업신여기는 모든 기술에 맞서는 치열한 보호 행위다. 그녀가 상상하는 건전한 소셜 네트워크는 현상의 공간이다. 오랜 친구와의 산책, 전화 통화, 소모임 등이 어우러진 공간. 디지털과 아날로그가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만남을 위해 함께 작동하는 공간이다.




이 책을 읽으며 내 관심이 화살이 아니라 토양이라는 생각을 했다. 화살은 과녁을 꿰뚫지만, 토양은 씨앗을 품는다. 화살은 빠르게 성과에 도달하지만, 토양은 느리게 생을 키운다. 관심경제는 내 관심을 화폐로 만들지만, 나는 내 관심을 흙으로 만들고 싶다. 내가 오래 응시한 것들이 나를 닮아가고, 내 주변의 것들도 내 응시에 조금씩 자라난다면—그건 이미 참여라 불릴만하다.


'아무것도 아닌 것'이 용인되지 않는 세상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기를 선택하는 것은 그 자체로 가장 급진적인 저항이다. 그것은 우리가 상품이 아니라 존재라는 것을, 우리의 가치가 생산성이 아니라 생명 그 자체에 있다는 것을 선언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기술결정주의의 탄압과 역경 속에서도 '연이은 재앙 사이에 있는 작은 틈'들은 계속 자라나고 있다. 새들이 언제나 다시 돌아오고, 우리는 아직 알고리즘으로 축소되지 않았다는 사실이 그 증거다.


오늘의 나는 무엇을 오래 바라볼 것인가. 어떤 이야기에 오래 귀를 열 것인가. 어떤 장소를 오래 지킬 것인가. 제니 오델의 조용한 혁명은 이 간단한 질문들에서 시작된다. 멈출 줄 아는 사람만이 자기 속도에 책임을 진다. 그리고 책임을 지는 사람이야말로 조용하지만 정확한 방식으로 세상에 참여한다. 우리는 그 참여의 방식으로 서로를 초대할 수 있다. 당신의 눈과 손과 숨, 지금 이곳의 자리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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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트] 곰탕 1~2 - 전2권
김영탁 지음 / arte(아르테)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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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그리움이 하나의 맛으로 수렴될 때, 우리는 비로소 시간이란 되돌아가는 길이 아니라 깊어지는 농도임을 깨닫는다.


영화감독으로서 따뜻한 휴머니즘을 선보였던 김영탁 작가는 첫 장편소설 『곰탕』에서 차가운 SF 스릴러의 외피를 두르고 가장 근원적인 인간의 감정인 그리움을 끓여낸다. 2063년의 디스토피아적 부산. 쓰나미로 인해 계층이 분리된 세상에서 고아 출신 주방 보조인 우환은 오직 ‘옛날 곰탕의 맛’을 배우기 위해 목숨을 건 시간 여행을 감행한다. 이 여행은 단순한 레시피 찾기가 아니라 존재의 기원을 향한 처절한 발걸음이다.


이 책을 읽으며 그었던 밑줄들은 복잡한 서사와 반전 속에서 길을 잃지 않도록 돕는 이정표이자, 궁극적으로 삶이라는 거대한 곰탕 국물을 우려내는 데 필요한 핵심 재료였다. 그 밑줄을 따라가다 보면, 시간은 직선이 아니라 깊이를 더해가는 농축의 과정임을 깨닫게 된다.



삶의 본질을 우려내는 게으른 기다림

곰탕 맛의 비법을 찾아 2019년으로 건너온 우환에게, 당시 부산곰탕 주방장인 종인은 말보다 행동으로 가르침을 전하는 스승이 된다. 종인의 방식은 놀라울 만큼 느리고, 우리가 익숙한 ‘부지런함의 논리’와는 거리가 멀다.


종인은 물을 끓이고 뼈를 넣고, 살을 집어넣고 국을 내고 살을 삶는 그 기다림의 시간 동안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기다리는 시간은 길었다. 많은 주방장들은 물을 올려놓고 국을 끓이는 동안 뭔가를 부지런히 했다. 하지만 종인은 그러지 않았다. 그저, 불 앞에 앉아 있었다. 물이 끓기를 기다리고 뼈가 속까지 우려 지는 동안 기다리고, 살이 삶기는 동안 기다리고 그 살이 식기를 기다리고 한 번 끓인 물을 버리고 새로운 물이 끓기를 기다리고 다시 뼈가 더 속까지 우려 지기를 기다렸다. 그 긴 시간을 불 앞에서 기다리며 보냈다. 종인은 게으른 사람이었다. 새벽 4시에 하루를 시작하는 부지런한 사람이었지만, 불 앞에 앉으면 게을러졌다.


이 '게으른 기다림'은 현대인이 잊고 사는 존재의 태도이지 않을까. 2063년의 세상은 끊임없이 자극적이고, 욕심을 내고 바라는 게 많아야 인정받는 논리로 돌아간다. 끊임없이 남들처럼 살기 위해 무리를 해야 하는 삶이다. 그러나 진정한 깊이는 불필요한 움직임을 멈추고 기다릴 때, 즉 게으른 기다림 속에 우러나온다. 이는 곰탕의 깊은 맛처럼, 화려함이 아닌 한 가지 맛으로 풍부해지는 삶의 자세에 대한 성찰이다. 우리가 찾는 삶의 진정한 맛은 수많은 첨가물이 아니라, 오롯한 시간 속에서 우려낸 침묵의 농도 속에 있다.


이러한 기다림의 미학은 소통의 태도와도 연결된다. 종인과 같은 '말이 적은 사람'의 지혜는 더 많은 것을 보고 듣는 데 있다.


말이 적은 사람이 일을 잘하는 경우가 많다. 말이 적은 사람이 말귀를 잘 알아듣는 경우가 많다. 말을 적게 해 보면 안다. 입을 좀 닫고 얼굴에 달린 다른 것들을 활용해 보면 훨씬 더 많은 게 보이고, 많은 걸 알게 된다. 말로만 말하고 말로 오해를 만들고 말로 싸움을 걸고 말로 인생을 망치는, 문제는 언제나 말이 많은 사람들이었다.


우리는 너무 많은 말을 함으로써 오해를 만들고 본질을 놓치며, 심지어 말로 인생을 망치기도 한다. 작가는 언어의 과잉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입을 닫고 대신 눈과 귀를 여는 행위가 얼마나 많은 진실을 알려주는지를 역설한다. 진정한 통찰은 끊임없이 말하는 화자가 아니라, 침묵 속에서 세상의 미묘한 파동까지 포착하는 경청자에게 주어진다. 곰탕을 끓이는 기다림처럼 삶의 진리를 깨닫는 데에도 말이 아닌 세상의 속삭임을 받아들이는 내면의 여백이 필요한 것이겠지.



소중함의 기원과 체념의 미학

우환의 삶은 고아원에서 시작해 끊임없이 속한 곳과 속할 곳을 찾아 헤맨다. 그의 고독과 그리움은 소설의 가장 차가운 밑바닥 정서이며, 이는 가족과 관계에 대한 간절함으로 이어진다.


한 번도 남에게 소중한 사람이 되어본 적 없는 사람들은 안다. 누군가에게 소중한 사람이 된다는 건, 자신이 소중해져서가 아니라 더 소중했던 사람에게 문제가 생겼기 때문이라는 걸.


이 문장은 관계의 본질을 건드리는 가장 슬프고도 현실적인 통찰이다. 우리가 누군가에게 ‘대체 불가능한 소중한 존재’가 되는 순간은, 아이러니하게도 먼저 그 자리를 지키던 사람이 떠났을 때임을 우환은 너무나 잘 안다. 이 깨달음은 우환에게 가족에 대한 간절함을 증폭시키지만 동시에 그것이 '선택하지 않아도 절로 주어지는 유일한 것'이며 '바란다고 되는 것이 아니었다'는 체념을 안긴다.


이 체념은 수동적인 포기가 아닌 능동적인 수용이자 방어 기제다. 우환은 순희의 교복을 빨던 긴 시간을 회상하며, 마침내 도달하는 경지를 고백한다.


우환은 순희의 교복을 빨던 일을 생각한다. 교복은 그냥 보아도 붉고 물에 담가도 붉고 빠는 동안도 붉었다. 그 교복이 다시 하얘질 때까지 긴 시간 매달렸었다. 교복이 흰색을 찾고, 왼쪽 가슴에 이름표가 드러나고 거기에 적힌 ‘이순희’라는 이름을 보았을 때, 그랬다. 생각 없이 피를 벗겨내고, 옷에서 빠져나간 그 피로 욕실 바닥이며 흰 세숫대야까지 온통 붉어졌을 때, 그 속에서 기대하지 않았던 아버지의 이름을 보았던 그때, 그때도, 그랬다. 아무래도 피냄새가 났다. 그랬던 거 같다. 우환은 그걸 이제야 기억해 냈다.

필요했던 것 체념뿐이었다. 결국은 행복해질 수 없음을, 그때 알고 체념했어야 했다.


우환은 인간의 상처가 '욕심을 내다가, 혹은 너무 즐거워하며 있다가' 생겨난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깨닫는다. 지나친 욕망과 과도한 기대가 고통의 씨앗임을 알기에, 행복해질 수 없음을 미리 선언하고 받아들임으로써 오히려 지금 주어진 작은 평화를 온전히 지켜내려는 삶의 전략인 것이다. '바란다고 얻어지는 것이 아닌' 가족의 부재를 체념하는 순간, 우환은 그 간절함으로부터 해방된다.


또한, 깨달음이란 고통스러운 짐이 됨을 예리하게 지적하는 문장은, 우환의 행보를 단순한 생존자를 넘어선 주체로 격상시킨다.


진정한 사랑이구나, 깨닫기 시작하자 많은 문제가 생겼다. 깨달음이 그렇다. 깨닫기 전에는 인생이 편하다. 하지만 깨닫고 나면 걸리는 게 많아진다. 깨달았으니까 똑같이 살면 안 되는 것 같다. 깨닫기 전으로 돌아가려 하면, 그러고도 네가 사람이냐?라는 질문을, 남에게, 주로 어른에게 듣던 그 질문을 스스로가 스스로에게 반복하게 된다. 깨닫고 나면 평온이 찾아올 거 같지만 사실은 아닌 거였다. 망할.


진정한 깨달음은 평온이 아니라 불편함을 동반하며, 우리에게 더 높은 책임을 요구한다. 이는 과거로 와서 자신의 이익과 신분 탈취를 일삼는 다른 시간 여행자들의 행태와 대비된다. 우환은 깨달음의 짐을 지고, 자신이 '돌아가야 할 사람들을 머물게 했고, 부지런히 살아야 할 사람들을 영원히 게으르게 만들었다'는 윤리적 죄책감을 깨닫는다. 그의 고통은 결국 인간의 존재가 타인과의 연결 속에서만 의미를 가진다는 인식에서 비롯된 것이다.



시간 여행의 종착지, '함께'

우환의 시간 여행은 단순히 과거로의 이동이 아니다. 그것은 시공간을 초월하는 윤리적 선택의 순간이다. 그가 건너온 검은 바다와 구멍은 단순한 블루 홀이 아니라, '부산의 바다는 당신의 기억보다 먼 곳에 있다'는 첫 문장처럼, 삶의 불확실한 근원과 어쩔 수 없이 도달하게 될 파국을 상징한다. 우환은 이 낯선 현재에서 순희와 강희를 만나고, 그들의 오토바이 뒷자리에 앉아 부산의 밤을 달린다. 이때 느끼는 감정은 소설 전체에서 가장 따뜻하고 희망적인 순간이다.


멀미가 났다. 어지러웠다. 몰려오는 바람과 풍경들이 벅찼다. 하지만 눈을 감지 않았다. 눈을 뜨고 울었다. 슬프지 않았지만 눈물이 자꾸 났다. 바람이 사람을 울린다는 걸 우환은 마흔이 넘고 중반이 되어서야 처음 알았다. 바람에는 쉽게 익숙해지지 않았지만 우환은 강희 뒷자리가 금방 익숙해졌다. 오토바이는 빠르게 달리고 있었지만 편안했다. 우환은 순희 뒤에 탄 강희 뒤에서 편안했다. 셋이 부산의 밤을 달렸다. 달릴수록 달릴 곳을 내주는 도시였다.


이 편안함은 그가 과거에서 잠시 획득한 찰나의 가족이라는 공간이다. 특히, '달릴수록 달릴 곳을 내주는 도시'라는 묘사는, 고독했던 우환의 삶에 비로소 타인이 만들어준 여백, 즉 받아들여지는 공간이 생겼음을 상징한다. 그는 이 순간, 뜻밖에 어머니 뒤에 타고 아버지의 환영을 받는 듯한 느낌을 받으며, 잃어버렸던 가족의 온기를 잠시나마 회복한다.


우환이 찾아 헤맨 곰탕 맛의 비결은 결국 레시피가 아닌, 특정 시간대의 사람들과 그들이 나누는 정서적 유대였음이 드러난다. 그리고 이 모든 여정의 해답은 그가 미래로 돌아가야 할지, 아니면 이 현재에 머물러야 할지 갈등하는 순간에 가장 근원적인 질문에 대한 답변으로 나타난다.


니는 어떤지 모르겠다만, 나는 모든 게 달라졌다. 니가 태어난 후로.


시간과 공간을 넘어선 가장 강력한 존재의 증명. 미래에서 온 한 이방인이 잃어버린 자신의 뿌리를 찾으려 했던 처절한 여정 끝에 얻은 가장 큰 보상은, 자신이 누군가에게 변화의 기원이 되었음을 확인하는 것이다. '니가 태어난 후'라는 말은 우환에게 있어 자신의 존재가 이 세상에 불가역적인 긍정적 의미를 남겼음을 확증해 준다. 타인이 나의 현재가 된 순간, 삶은 비로소 ‘되돌릴 수 없는’ 의미, 즉 가장 진한 맛을 획득한다.



시간의 농도

김영탁 감독의 『곰탕』은 스릴러의 박진감과 SF적 상상력 속에 인간의 영원한 숙제인 상실의 무게를 견디는 법을 곰탕처럼 깊게 우려낸다.


우리는 되돌아가고 싶다는 그리움 때문에 시간 여행을 꿈꾸지만, 진정한 시간 여행은 물리적인 이동이 아니라 공감의 깊이를 통해 이루어진다. 우환은 2063년의 절망을 버리고 2019년의 따뜻한 곰탕집에 안착하려 했지만 그의 현재는 이미 종인과 순희, 강희라는 타인의 삶 속에 스며들었다.


우리는 살면서 종종 깨달음으로 인해 평온이 찾아올 것이라 기대하지만 현실은 정반대다. '깨닫고 나면 걸리는 게 많아진다'. 깨달음은 오히려 우리를 불편하게 만들고, 더 높은 도덕적 기준을 요구한다. 하지만 종인의 '게으른 기다림'과 우환의 '체념 속 평화'는 이 깨달음의 고통을 넘어설 단 하나의 해법을 제시한다.


그것은 바로 지금 이 순간을 가장 진한 곰탕 국물처럼 대하는 태도이겠지. 복잡하게 이것저것 섞어 화려함을 만들려 하지 않고 삶의 가장 단순하고 깊은 맛이 우러나올 때까지 묵묵히 불 앞에 앉아 기다리는 것. 그리하여 나의 밑줄이 끝나는 이 자리에서, 우리는 비로소 시간이라는 국물은 옅어지는 것이 아니라 한 인간의 성찰로 인해 더욱 깊어지는 농도임을 깨닫게 된다.


그 진한 국물을 혼자가 아닌, 소중한 이들과 함께 나누는 것이 삶이라는 식탁에서의 진정한 행복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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궤도 - 2024 부커상 수상작
서맨사 하비 지음, 송예슬 옮김 / 서해문집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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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언가를 완벽하게 사랑하기 위해서는 역설적이게도 그것의 가장자리가 한눈에 들어올 만큼 아주 멀리 떠내려가야 하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너무 가까워 서로를 잃어버린다. 숲 속에 있는 자는 숲을 보지 못하고, 사랑에 빠진 자는 사랑의 형체를 만지지 못하며, 삶에 매몰된 자는 삶의 표정을 읽지 못한다. 그러니 무언가를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탈이 필요하다. 중력을 거스르고, 발을 딛고 선 땅을 박차고, 기꺼이 고립을 자처하는 일. 그리하여 저 멀리 칠흑 같은 어둠 속에 홀로 떠서야 비로소 우리는 우리가 떠나온 곳이 얼마나 눈물겹게 푸른지를 깨닫게 되는 것이다.


서맨사 하비의 소설 『궤도(Orbital)』는 바로 그 거리두기에 관한 가장 아름답고도 서늘한 기록이다.




이 소설에는 우리가 흔히 우주적 SF에서 기대하는 극적인 사건이 없다. 외계인의 침공도, 우주선의 폭발도, 영웅적인 귀환의 서사도 존재하지 않는다. 지구 상공 400km, 국제우주정거장(ISS)이라는 좁은 캡슐 안에 갇힌 여섯 명의 우주비행사, 그리고 그들에게 주어진 하루가 전부다. 하지만 이 하루는 우리가 발 딛고 선 지구의 땅 위 하루와 다르다. 시속 2만 8천 킬로미터의 속도로 지구를 도는 그들에게는 24시간 동안 열여섯 번의 일출과 열여섯 번의 일몰이 찾아온다.


서맨사 하비는 이 기이한 시공간을 소설이라기보다는 한 편의 장대한 산문시처럼 묘사한다. '이 시대의 버지니아 울프'라는 별명답게, 우주비행사들의 내면과 지구의 풍경을 의식의 흐름 대로 엮어낸다. 그녀에게 우주는 정복해야 할 미지의 공간이 아니라 인간의 내면을 비추는 거대한 거울이다. 작가는 꼼꼼한 자료 조사를 바탕으로 우주의 물성을 구현했지만, 그 묘사는 과학적 사실을 넘어 철학적 은유로 승화된다.


그녀가 주목하는 것은 속도 속의 정지이며, 광대함 속의 밀실이다. 책을 읽는 내내 무중력 상태에 둥둥 떠 있는 듯한 착각에 빠진다. 문장과 문장 사이에는 공기가 희박하고, 단어들은 별빛처럼 차갑고 명징하게 반짝인다.



시간의 파편, 생명의 얼굴

이 책을 읽으며 나는 수없이 많은 문장에 밑줄을 그었지만, 그것은 활자 위에 그은 선이라기보다는 마음의 궤적을 따라 그은 등고선에 가까웠다.


로만은 선실에 둔 기록지에 88번째 줄을 더할 것이다. 시간을 흘려보내지 않고 셀 수 있는 것으로 묶어 두려는 것이다. 그러지 않으면, 중심마저 떠내려간다. 우주는 시간을 조각낸다.


지구에서 우리는 시곗바늘에 맞춰 삶을 재단한다. 하지만 90분마다 지구를 한 바퀴 도는 궤도 위에서 '하루'라는 개념은 산산이 조각난다. 낮과 밤이 수시로 뒤바뀌는 곳에서 시간은 절대적인 흐름이 아니라, 인간이 불안을 잠재우기 위해 만들어낸 허상임이 드러난다. 작가는 묻는다. 우리가 그토록 악착같이 지키려 했던 스물네 시간의 규율이, 우주적 관점에서 보면 얼마나 덧없고 인위적인 약속인가를. 88번째 줄을 긋는 로만의 행위는 시간이라는 거대한 강물에 휩쓸리지 않으려는 인간의 가련하고도 숭고한 저항이다.


외계 문명이 본다면 아마도 의아할 것이다. 저것들이 여기서 뭘 하는 거지? 어디로 가지도 않고, 왜 맴돌기만 하는 거야? 모든 질문의 답은 지구다. 지구는 환희에 찬 연인의 얼굴이다. 그래서 이들은 지구가 잠들었다 깨어나고 자기 버릇에 푹 빠져 사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지구는 이야기와 기쁨과 그리움을 잔뜩 안고서 아이들이 어서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어머니다.


하지만 이 시간의 혼돈 속에서도 유일한 상수는 지구다. 저 멀리서 푸르게 빛나는 구체. 우주비행사들에게 지구는 단순한 행성이 아니다. 치에라는 일본인 우주비행사에게 그것은, 부모를 대신하는 생명의 근원이며 비행사들 모두에게는 죽어서라도 가고 싶은 천국이다. 지구에서 우리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천국을 상상하지만, 궤도 위의 그들은 땅을 내려다보며 천국을 본다. 이 시선의 전복은 우리에게 강렬한 현기증을 선사한다. 우리가 발 딛고 선 이곳이, 그토록 그리워하던 낙원이었음을. 우리는 이미 천국에 살면서 지옥을 상상하느라 삶을 허비하고 있었던 것은 아닌가.



경계가 지워진 자리에서 본 인간의 맨얼굴

이음매 없는 지구를 계속 보다 보면 벌어지는 일을 경계해야 한다고 들었다. 충만한 지구를, 땅과 바다 사이 말고는 어떤 경계도 없는 모습을 보게 될 것이라고 했다. 국가들은 지워지고, 쪼개질 수 없으며 전쟁은커녕 그 어떤 분리도 모르는 세계가 돌아가는 모습을 보게 될 것이라고… 그런데 이곳에서는 저 멀리 작게 주름진 땅을 보고 산맥임을 알고, 웬 줄기를 보고 큰 강이 있음을 가늠할 수 있지만, 그게 끝이다. 장벽이나 장애물은 없다. 부족도 전쟁도 부패도, 뭔가를 두려워할 이유도 없다.


우주에서 내려다본 지구에는 국경선이 없다. 지도 위에 붉게 그어놓았던 선들, 내 편과 네 편을 가르던 이념의 장벽들은 그저 구름에 가려지거나 바다의 푸른빛에 녹아버린다. 작가는 이 이음매 없는 지구를 보여줌으로써 인간이 만들어낸 갈등이 얼마나 작위적인지 꼬집는다. 그러나 작가는 단순히 평화주의적 메시지를 던지는 데 그치지 않는다. 그녀의 시선은 더 깊은 곳, 인간 존재의 모순적인 본질을 파고든다.


달에 간 사람 중에 여자가 한 명이라도 있니. 비백인, 비미국인 여자는 말할 것도 없지. 이건 무르익은 남성성을 과시하는 남자들이 로켓과 추력기와 탑재 장비와 세계의 시선을 등에 업은 모습이란다. 이게 세상이야. 남자들의 놀이터, 남자들의 실험실, 경쟁할 생각은 하지 마. 그래 봤자 결국 사기만 떨어지고 열등감과 열패감을 느끼게 되니까. 왜 절대 못 이기는 경주를 시작하고, 기를 쓰고 지려고 달려드니. 그러니 딸, 꼭 기억하렴. 너는 열등하지 않아. 그걸 굳게 명심하고서 존엄한 존재로 보잘것없는 삶을 살아가렴.


우주선은 최첨단 기술의 집약체이지만, 동시에 지구의 불평등과 모순을 그대로 싣고 온 방주이기도 하다. 작가는 우주의 낭만에 취해 현실을 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높이에서 지구의 치부를 더욱 선명하게 목격한다. 태풍, 산불, 전쟁의 흔적, 그리고 우주 개발이라는 미명 하에 벌어지는 강대국들의 힘겨루기까지. 궤도 위에서도 인간은 여전히 정치적인 동물이며, 상처 입은 존재다.



아름다움은 선함이 아니라 '살아있음'에서 온다

하지만 그 모든 게 아름다워. 왜냐면 아름다움은 선함에서 오지 않거든. 너는 진보가 선하냐고 물은 게 아니었지. 인간도 선해서 아름다운 게 아니란다. 살아 있으니 아름다운 거야. 어린애처럼. 살아 숨 쉬며 세상을 궁금해하고 한시도 가만히 있지 않기 때문에. 선한지는 상관없어. 눈에 빛이 감돌기 때문에 아름다운 거야. 가끔은 파괴적이고 상처를 입히고 또 가끔은 이기적이지만, 살아 있기에 아름다워. 살아 숨 쉰다는 점에서 진보도 그렇단다.


우리는 흔히 아름다움과 도덕을 연결하려 한다. 착한 것은 아름답고 악한 것은 추하다고. 하지만 서맨사 하비는 궤도 위에서 그 통념을 과감히 부순다. 우주에서 바라본 지구는 평화롭기만 하지 않다. 폭풍우가 몰아치고, 화산이 폭발하고, 인간들은 서로를 죽이고 약탈한다. 그 모든 혼란과 파괴조차 우주의 시선에서는 거대한 생명력의 일부로 보인다.


작가는 말한다. 아름다움의 조건은 윤리가 아니라 활력이라고. 지구가 아름다운 이유는 그것이 도덕적으로 완벽해서가 아니라 끊임없이 꿈틀대고, 변화하고, 상처 입고, 다시 회복하며 맹렬하게 살아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거대한 위로로 다가온다. 우리는 얼마나 자주 우리의 삶이 올바르지 않다는 이유로 스스로를 비하해 왔던가. 실수하고, 남에게 상처를 주고, 이기적인 욕망에 휘둘리는 모습이 추하게 느껴져 고개를 떨구곤 하니까. 하지만 작가는 그 모든 소란스러움이, 그 모든 모순과 결핍이 바로 우리가 살아있다는 증거이며 그렇기에 눈물겹게 아름다운 것이라 말한다.


불을 피우고, 돌을 쪼개고, 철을 녹이고, 땅을 갈고, 신을 숭배하고, 시간을 세고, 배를 타고, 신발을 신고, 곡물을 사고팔고, 육지를 발견하고, 제도를 수립하고, 음악을 짓고, 노래를 부르고, 물감을 섞고, 책을 엮고, 숫자를 처리하고, 화살을 쏘고, 원자를 관찰하고, 몸을 꾸미고, 알약을 삼키고, 사소한 것에 연연하고, 고민하고, 마음을 가졌고, 또 마음을 잃고, 모든 것을 약탈하고, 죽음을 논하고, 과잉을 사랑하고, 과잉으로 사랑하며, 사랑 때문에 방황하고, 사랑을 결여했으나 사랑이 없어 허전함을 느끼고, 그래서 사랑을 갈망하고, 갈망을 사랑하는, 두 다리를 가진 인간이라는 존재가 아니고는.


저 긴 목록을 보라. 인류가 걸어온 길은 파괴와 창조, 사랑과 증오가 뒤엉킨 혼돈의 역사. 하지만 궤도 위에서 내려다보면 그 모든 행위는 단 하나의 거대한 춤사위처럼 보인다. 인간은 엉망진창이지만, 바로 그 엉망진창 때문에 찬란하다.



우리는 서로의 궤도에 머무는 우주비행사

책을 덮으며 생각한다. 어쩌면 우리 모두는 각자의 고독한 우주선을 타고 타인의 주변을 맴도는 우주비행사이겠구나.


우리는 타인이라는 행성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다. 때로는 너무 멀어져서 춥고, 때로는 너무 가까워져서 타버린다. 하지만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은, 섣불리 그 행성에 착륙해 깃발을 꽂으려 들거나 내 입맛대로 개조하려 드는 것이 아니라 그저 일정한 거리를 두고 묵묵히 궤도를 도는 일일 것이다.


그 거리감 속에서, 당신의 삶이 얼마나 치열하게 빛나고 있는지, 당신이 뿜어내는 폭풍과 구름이 얼마나 생생한 생명의 징후인지를 그저 바라봐 주는 것. 그것이 궤도가 내게 가르쳐준 사랑의 방식이다.





서맨사 하비의 문장들은 말한다.

당신은 선해서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 숨을 쉬고 고뇌하고 흔들리며 존재하기에 아름답다고.


저 우주의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오직 당신만이 푸르게 박동하고 있다고.


그러니 오늘 밤은

당신이라는 행성의 자전을 조용히 지켜보고 싶다.


16번의 해가 뜨고 질 때까지

나는 당신의 궤도를 떠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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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수 - 장류진 소설집
장류진 지음 / 창비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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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속으로는 울면서도 겉으로 웃는 법을 배우는 사이에 겨우 사람다워진다.


이 소설집을 읽는 동안 내내 떠오른 감정은 '부끄러움의 경제학'이다. 돈으로 셈해지는 세계뿐 아니라 품, 체면, 말의 온도까지 저마다의 단가가 매겨진 세계. 「연수」의 문장들에서 이미 가격표가 달그락거린다.


카페에서 육아용품들이 거래된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입던 팬티까지 사고파는 일이 벌어질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입던 팬티를 천 원 주고 사는 삶과 입던 팬티를 팔아서 천 원을 버는 삶, 둘 다 생경하게 여겨졌다 - 「연수」


여기엔 가난만 있지 않다. 부끄러움을 견디는 기술, 나를 보호하기 위한 체면의 장치, 남의 시선을 건너 안전지대에 도착하려는 사람의 간절함이 있다. ‘천 원’은 우스운 금액이 아니라, 오늘을 건너 내일로 이어주는 최소한의 다리다. 이 소설집은 그 다리를 어떻게든 건너는 사람들의 일기다. 그리고 그 건너는 방식은 제각각 다르지만 모두 한 가지 공통점을 품는다. 바로 '부끄러움을 다루는 법'을 익히는 과정이라는 점이다.


표제작 「연수」에서 운전을 배우는 주연은, 사실 핸들을 잡는 법보다 목덜미의 힘을 푸는 법을 배운다. 스피커폰 너머로 들려오는 강사님의 ‘잘하고 있어’라는 위로는 기교가 아니라 생존의 문장이다. 맘카페를 전전하며 얻어낸 '도로연수 추천 강사'는 만나자마자 주연의 혈액형과 나이를 셈하며, 돌려 깎는 조언으로 불편함을 선사한다. 하지만 우리는 불편에만 머물지 않는다. 운전석에 앉아 타인의 무례함을 통과해 결국 자신의 길로 나아가는 연습, 그게 이 이야기의 핵심이다. 나는 '연수'라는 단어가 기술 습득이 아니라 '부끄러움을 다루는 편안한 자세를 익히는 수련'이라는 뜻으로 읽혔다. 이 소설이 운전면허 취득기로 끝나지 않는 이유는, 결국 우리가 배우는 것은 운전이 아니라 세계를 통과하는 법이기 때문이다.




「동계올림픽」에서 선진은 작은 방송사의 인턴으로 얼어붙은 세계를 훑는다. 그 세계는 냉정하고, 꿈은 자주 미끄러진다. 그렇지만 꿈은 아주 묘한 방식으로 눈물과 웃음을 동시에 불러온다.


그 말, 그 말은 정말로 부드러운 말이었지만 내 마음속 깊숙한 곳에 꽁꽁 봉인해 두었던 말캉한 주머니를 날카롭게 푹 찌른다. 그 말, 바로 그 말에 나는 하염없이 눈물이 난다. 그 말, 꿈속의 나는 그 말을 듣는 것이 자연스럽고 당연해야 한다. 그래서 울어서는 안 되는 상황인데 꿈 밖의 내가 너무 놀란 바람에 어쩔 수 없이 눈물이 난다. 분명 우는데 꿈속에서는 눈물이 한 방울도 흐르지 않는다. 그래서 다행히 그녀는 내가 운 줄 모르고 있다. 마치 방백처럼. 방백 같은 눈물. 그녀는 내가 우는 걸 알아차릴 수 없다. 도리어 웃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마땅하게 여겨진다. 나는 울며, 그러나 웃으며 대답한다. - 「동계올림픽」


그는 운다. 그러나 그 눈물은 무대 바깥에서만 보인다. 이 ‘방백 같은 눈물’이라는 표현은, 우리 모두가 하루에도 몇 번씩 속으로 흘리는 눈물의 문법을 정확히 설명한다. 회사의 메신저 창을 닫고 한숨을 내쉰 뒤, 다시 ‘네, 확인했습니다’라고 답하는 순간의 통증. 그럼에도 선진은 화면을 잡고, 우리는 페이지 밖에 서서 그 장면을 본다. 결국 이 이야기의 메달은 성취가 아니라 지속에 있다. 무대 위가 아니라 무대 너머에서 계속 서 있으려는 의지, 그게 금빛이다. 꿈이 좌절당하는 순간보다 더 중요한 것은, 꿈이 좌절당한 뒤에도 여전히 출근하고 카메라를 잡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 소설은 성공담이 아니라 버팀목의 기록이며, 우리가 보통 주목하지 않는 포기하지 않는 평범함을 조명한다.




나는 「펀펀 페스티벌」을 읽으며 시선의 거래가 얼마나 정교한지를 새삼 확인했다.


이찬휘가 싱글싱글 웃으면서 가사를 옮겨 적었다. 정말 보통 녀석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와중에도 나는 그 애를 한 번이라도 더 보려고 부단히 노력하고 있었다. 사실 이찬휘의 실물을 처음 마주한 순간부터, 그 애가종이에 무언가를 적거나 태블릿 PC를 들여다보고 있거나 다른 조원들과 이야기하고 있을 때, 그러니까 그 애의 시선이 다른 곳을 향하고 있을 때마다 나는 그 애의 얼굴을 허겁지겁 눈에 담았고 면밀히 훑었다. 끊임없이 바쁘게 힐끔거렸다. 도저히 멈출 수가 없었다. 마치 그 애를 보고 있는 동안은 무언가 좋은 것이 내 주머니로 와르르 쏟아져 들어온다는 듯이. 그래서 마지막까지 하나라도 더 필사적으로 주워 담으려는 듯이. -「펀펀 페스티벌」


우리는 멋짐을 소비하면서 동시에 멋짐의 그림자가 된다. 합숙면접이라는 인공의 장치 속에서, 지원은 찬휘를 싫어하면서도 사랑한다. 이 이율배반은 위선이 아니다. 생존의 속도에 맞춰 감정을 압축하는, 현대적 마음의 체력이다. 장류진 작가는 ‘좋아함’이 언제나 ‘통과증’이 된다는 사실을, 누군가를 좋아하는 행위가 때로는 합격을 위한 수단이 되어버리는 현실을, 너무 차갑지도 뜨겁지도 않게 보여준다. 그래서 더 뜨겁다. 우리는 그 감정이 진심인지 전략인지 분간할 수 없고, 어쩌면 지원 스스로도 구분하지 못할 것이다. 그 혼란 속에서 우리는 자본주의적 생존 구조가 어떻게 감정의 순도마저 희석시키는지를 목격한다. 좋아함이 더 이상 순수한 마음이 아니라, 면접장에서 살아남기 위한 자원으로 전환되는 순간의 씁쓸함을 작가는 냉정하게 포착한다.




나를 무리의 마지막으로 들여보내고 뒤따라 들어온 천 사장이 카운터 바로 옆 벽에 걸린 자그마한 거울 앞에 섰다. 그리고 노란끼가 많은 조명 아래에서 코트와 머플러를 벗어 든 채 옷매무새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집게핀으로 틀어 올린 풍성한 머리칼, 그 아래로 훤히 드러난 긴 목, 폭이 좁은 브이넥 스웨터와 아슬아슬한 지점에서 딱 멈추는 브이넥의 깊이. 그 아래로 보이는 오목한 음영...... 그 그림자는 선이 아닌 점의 형태였다.
나는 그 점이 늘 징그럽다고 생각했다. -「공모」


「공모」는 권력의 촉감을 다루는 이야기다. 그 촉감은 뺨을 스치는 손바닥이 아니라, 선이 아닌 점의 형태로 남는 그늘이다. 회식이면 2차에 어김없이 들르는 주점 '천의 얼굴'. 천 사장의 목덜미에 박힌 작은 점처럼, 보이는 권력은 언제나 점으로 응고된다. 그 점을 보는 순간 누군가는 징그럽다고 느끼고, 누군가는 아찔한 흥분을 느낀다. 소설은 우리에게 묻는다. 당신은 그 점을 무엇으로 보나. 도덕의 흉터인가, 욕망의 표식인가. 회식의 관습, ‘은밀한 부탁’, 바뀌는 자리표. 이 모든 건 대문자 부패가 아니라 소문자 합의의 연쇄로 굴러간다. 그래서 더 무섭고, 그래서 더 바꿀 수 있다. 바꾸는 일은 선언이 아니라 다음번의 작은 거절에서 시작된다는 것을, 현수영은 몸으로 배운다. 이 작품이 던지는 질문은 결국 공모의 시작점에 관한 것이다. 우리는 언제부터 방관자에서 공모자로 전환되는가. 그 경계는 어디에 있으며, 그 경계를 넘지 않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포기해야 하는가. 작가는 해답을 주지 않지만, 질문의 윤곽을 선명하게 그려낸다.




한편 「라이딩 크루」는 웃으며 허벅지 근육의 윤리를 이야기한다.


사이클이란 말이야. 그간의 마일리지가 말해주는 거란다. 아무리 키가 크고, 근육질이고, 다리가 길고, 좋은 바이크에 좋은 저지를 입어봤자, 삼 년 넘게 탄 내 실력엔 절대 못 당한단다. 나는 내 허벅지 속 근육에 대한 자부심이 있단다. 삼단 고음의 맛을 좀 봐라. 아주 호되게 한번 당해봐라. 나는 바쁘게 페달을 밟아 아이유고개의 첫 번째 업힐을 빠르게 올라가기 시작했다. -「라이딩 크루」


자전거는 정직하다. 장비와 제스처, 어휘로 치장해도 오르막은 허벅지의 과거를 증언한다. 그래서 이 작품에서 제일 시원했던 문장은 '삼단 고음의 맛을 좀 봐라'였다. 해학의 리듬 속에도 삶의 요령이 숨어 있다. 우리는 어느 순간 경쟁을 덜어내려다 또다시 경쟁으로 위안을 받는다.


˝뭐예요? 쿨팬티 입으신 거예요? 저는 순면이라 불리한데요. 팬티도 서로 벗으시죠. 공정하게.˝


라는 말은, 우리가 서로의 가벼움을 들춰보며 진짜 무게를 숨기는 방식에 대한 풍자이자 자백이다. 웃다 보면 우리는 무엇을 증명하려고 그토록 페달을 밟았는지 생각하게 된다. 이 작품은 가볍게 시작해 무겁게 끝나는 구조를 지녔다. 처음엔 자전거 동호회의 소소한 에피소드처럼 읽히지만, 결국 우리가 타인과의 경쟁 속에서 자기 존재를 확인하려는 욕망의 메커니즘을 들여다보게 만든다. 자전거를 탄다는 행위는 건강을 위한 것이라 말하지만 실은 누군가를 앞지르고 싶은 욕망, 혹은 뒤처지지 않고 싶은 불안의 다른 이름이다. 그리고 그 욕망과 불안을 웃음으로 포장하는 우리의 방어기제를 작가는 예리하게 포착한다.




이 소설집은 우리 안의 가장 작은 단위를 교정한다. 돈 몇 천 원, 말 한두 줄, 눈물 한 방울, 오르막의 몇 분—작디작은 단위들의 합이 결국 우리의 품격을 만든다고, 그래서 작가는 그 작은 것들을 미세하게 들어 올려 보여준다. ‘연수’란 이름으로 묶인 여섯 편의 이야기에서 인물들은 기술을 익히지만, 실은 체면을 새로 다룬다. 체면은 버려야 할 허례가 아니라, 나를 사람답게 보존하는 얇은 외피일 때가 있다. 때로는 그 외피를 벗어던지는 용기가 필요하고 다른 때에는 그 외피가 나를 얼음장 같은 바람에서 구한다.


중요한 건 언제 벗고 언제 감쌀지를 가늠하는 감각이다. 그리고 그 감각은 하루아침에 얻어지지 않는다. 수없이 부딪히고, 무너지고, 다시 일어서는 과정에서 조금씩 단련된다. 장류진 작가가 그린 인물들은 모두 그 감각을 연마하는 중이다. 완성되지 않은, 여전히 배우는 중인 사람들. 그래서 우리는 그들을 보며 위로받는다.


내가 그은 밑줄은 결국 같은 문장으로 합류한다. '방백 같은 눈물'은 사회의 장면에서 매일 흘리는 눈물의 문법이고, '마일리지가 말해준다'는 우리가 쌓아 온 삶의 근육에 대한 신뢰다. '입던 팬티 천 원'은 타인의 사정을 쉽게 재단하지 않으려는 마음의 가격표다. 이 소설집의 힘은 바로 여기에 있다. 거창한 선언 대신 작은 단위의 진실을, 화려한 성공 대신 버티는 사람의 등을, 큰 눈물 대신 방백 같은 눈물을 보여준다는 점. 그리고 그것이 더 진짜라는 것을 우리는 안다.


잘하는 사람이 되기 전에 무너지지 않는 사람이 되자. 무너지지 않기 위해 오늘 필요한 것은 거창한 신념이 아니라 아주 작은 단위의 연습들—부끄러움을 다루는 방법, 누군가의 말 한 줄을 내 편으로 돌려놓는 연성, 점으로 남는 권력의 흔적을 알아차리는 시력, 웃음을 핑계 삼아 체면을 조금 내려놓는 순발력, 그리고 아무도 없을 때에도 쓰고, 달리고, 버티는 습관.


그러니 우리는 속으로 울면서도 겉으로 웃는 법을 배우고, 그 사이를 지나는 동안 비로소 사람다워진다. 『연수』는 그 사이를 건너는 연습장이다. 읽는 동안 우리는 번번이 넘어지고, 그때마다 '잘하고 있어. 잘하고 있어.'라는 목소리를 듣는다. 그리고 아주 조금, 내일의 나를 믿게 된다. 이 소설집을 덮으면서 나는 생각했다. 연수란 결국 실패를 견디는 법을 배우는 시간이라고. 완벽해지는 게 아니라, 불완전함을 받아들이는 법을 익히는 시간이라고. 그리고 그 시간이 끝나지 않는다는 것, 우리는 평생 연수 중이라는 것을 장류진은 알려준다. 그래서 이 소설집은 위로가 아니라 동행이다. 함께 넘어지고, 함께 일어서는 이들의 목소리. 그 목소리가 오늘도 나를 페이지 밖으로 밀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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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오지 않는 곳에서
천선란 지음 / 허블 / 202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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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목소리 들려?"


이 짧은 물음은 세상의 끝에서 던져진 가장 절박한 기도이자 무너지는 세계를 지탱하는 유일한 기둥이 된다. 종말은 거창한 굉음과 함께 오지 않는다. 사랑하는 이가 더 이상 나의 말을 알아듣지 못할 때, 나를 향해 웃어주던 눈동자가 텅 빈 동공으로 변해버릴 때, 그리하여 너와 나 사이에 쌓아 올린 시간의 지층이 단숨에 무너져 내릴 때, 비로소 세상은 멸망한다.


천선란 작가의 『아무도 오지 않는 곳에서』는 우리가 흔히 아는 좀비 아포칼립스의 문법을 따르지 않는다. 피와 살이 튀는 생존 투쟁 대신 감염되어 가는 연인의 손을 놓지 못하는 이들의 떨리는 호흡에 귀를 기울인다. 작가는 데뷔 이래 줄곧 무너진 다리 위에 서 있는 존재들, 궤도에서 이탈한 자들, 그리고 인간의 경계 밖으로 밀려난 존재들을 향해 끈질긴 구원의 서사를 써 내려왔다. 그녀에게 SF란 차가운 기술의 미래가 아니라 현실보다 더 점성 높은 슬픔을 담아내는 그릇이다. 이번 소설에서 그녀는 좀비라는 가장 비극적인 은유를 통해 역설적이게도 가장 완전한 사랑의 형태를 질문한다.




모든 종말의 순간에도 인물은 사랑하는 사람의 손을 잡고 뛰어. 서로를 살리기 위해. 죽어가는 순간에도 애틋하게 눈을 맞추고, 입을 맞추고, 사랑을 속삭여. 슬프지만 아름답고 극적인 이별을 맞이할 수 있어. 하지만 좀비는 아니거든. 사랑하는 사람을 잊고, 사랑하는 사람을 죽이기 위해 달려들고, 나를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을 향해 총을 쏴야 해. 아름다운 마지막 모습이 아니라 시체가 되어버린 처참한 몰골을 봐야만 해. 이게 가장 끔찍한 종말이야.


작가는 묻는다. 왜 좀비 바이러스가 인류에게 가장 끔찍한 종말인가. 그것은 죽음 그 자체의 공포 때문이 아니다. 나의 연인, 나의 가족, 나의 친구였던 존재가 나를 식육의 대상으로 바라보는 순간의 비참함, 그리고 내 손으로 그 사랑하는 얼굴을 파괴해야만 내가 살 수 있다는 잔혹한 딜레마 때문이다. 기억의 소거는 곧 관계의 죽음이며 관계의 죽음은 인간으로서의 존엄이 사라지는 종말이다.


그러나 이 책의 인물들은 도망치지 않는다. 우주로 탈출할 기회가 있음에도, 혹은 안전한 쉘터가 저 멀리 있음에도 그들은 감염되었거나 감염되어 가는 사랑하는 이의 곁을 지킨다. 합리적으로 판단하자면 그들의 선택은 어리석다. '타일러'처럼 명료하고 효율적인 화법을 가진 리더의 눈에는 그저 자멸로 보일 것이다. 하지만 작가는 단호하게 말한다. '진솔함과 명료함은 리더가 되지만, 무례함과 매정함은 폭군이 된다'고. 효율성이라는 이름 아래 타인의 고통을 소거해 버리는 태도야말로 진짜 재난이라고.


"태어난 게 벌이 될 수는 없어. 살아 있는 게 죄인 사람은 없어. 오해하지 마. 가끔 벌처럼 느껴질 땐, 등을 봐. 그 사람의. 노윤이의. 한참 동안 바라보면 햇살에 반짝이는 털들이 보여. 특히 뒷덜미에. 숨을 쉴 때마다 그것들이 움직여. 광대에도 털이 나 있어. 반짝여. 어깨가 미세하게 위로, 아래로, 또 위로, 다시 아래로… 숨을 쉴 때마다 바뀌어. 표정은 알 수 없지만, 알 수 없어서 더 편하고 때로는 슬퍼. 얇은 옷에 앙상하게 튀어나온 척추가 보여. 오돌토돌. 가녀리지만 단단함이 느껴져. 뼈로 이루어진 몸. 당장 죽을 것 같고, 가끔은 이미 죽은 것 같은데, 당장 무너질 것 같은 몸에도 이토록 단단한 뼈가 있구나. 무너지지 않겠구나. 나약하지 않구나. 살아 있구나. 살아 있는 걸 마음에서 죽이지 말아야지. 살아 있는데 미리 죽이지 말아야지. 살아 있다는 것만 생각해야지.”


이 문장을 읽으며 한동안 페이지를 넘길 수 없었다. 우리는 얼마나 자주, 살아있는 존재를 마음속에서 미리 죽이는가. 가능성이 없다고, 희망이 없다고, 혹은 나와 다르다고 선을 그으며 타인을 이미 끝난 존재로 치부해 버리지는 않았던가. 소설 속 인물 '은미'가 장애를 가진 딸 '노윤'을 바라보며 되뇌는 이 다짐은, 좀비가 창궐한 세상에서 인간성을 지키는 최후의 보루다. 비록 겉모습이 변하고, 호흡이 거칠어지고, 이성이 사라진다 해도, 내 앞에 있는 당신이 '살아있다'는 그 감각을 놓지 않는 것. 그것이 천선란이 말하는 구원이다.


세상은 자꾸만 우리에게 매정해지라고 가르친다. 상처 입은 나무는 베어내고, 썩은 과일은 도려내라고 말한다. 하지만 작가는 밑동이 휘어진 나무는 휘어진 채로, 흉터가 있는 나무는 흉터를 품은 채로 살아가는 것이라고 말한다.


밑동이 휘어진 나무는 그대로 휘어진 채 자란다. 기둥에 파인 흉터는 회복되지 않고 덮어버리는 방식으로 흉터 위에 벽을 세운다. 그건 새살이 돋아 상처가 아물어 사라지는 회복과는 다르다. 그래서 상처 입은 나무를 자르면 나이테에 흉터 자국이 혹처럼 남아 있다. 어느 시절에 받은 상처인지 보인다. 상처를 평생 품고 산다. 아물지 않은 채로.


그 아물지 않은 상처가 있기에 우리는 서로의 고통을 알아볼 수 있다. 소설 속 옥주와 묵호가 서로의 결핍을 알아보았듯, 상처는 부끄러운 낙인이 아니라 서로를 끌어안게 만드는 자력이 된다.


가장 인상 깊었던 지점은 작가가 숨에 부여한 의미였다. 언어가 사라진 자리, 이성이 마비된 자리에서 최후까지 남는 것은 숨이다.


엄마는 이제 숨으로 우리랑 대화할 거야. 그러니 잘 듣고, 온몸으로 기억해 둬. 아가가 가장 가까이서 들었던, 한때 너의 숨이기도 했던 숨의 말을 잘 들어야 해. 말로 하지 않아도 그 숨에 모든 말이 새겨져 있으니까. 어렵지 않아. 집중의 문제지. 긴장할 때 숨은 빨라지고, 편안할 때 숨은 느려지고, 두려울 때 숨은 딱딱해지고, 슬플 때 숨은 축축해진단다. 화가 날 때 숨은 잘게 쪼개지고, 답답할 때 숨은 눌어붙는다. 욕망할 때 숨은 뜨거워지고 낙담할 때 숨은 미지근해진다. 사랑을 느낄 때 숨은 찬란해지고 그리움을 느낄 때 숨은 잠시 멈춘단다. 그리고 이런 숨은 코나 입으로만 느낄 수 있는 게 아니야. 아빠는 엄마의 손바닥과 발바닥에서, 어깨와 등에서도 숨을 느낀단다. 특히 엄마처럼 숨으로 소통하는 인간들은 더 잘 느낄 수 있어. 엄마 품에 안겨봐.


좀비가 되어가는 아내의 숨소리를 기억하려는 남편, 변해버린 연인의 곁에서 그 낯선 호흡마저 사랑하려는 이들의 모습은 숭고하기까지 하다. 우리는 너무 많은 말들로 사랑을 정의하려 하지만 진정한 사랑은 그저 곁에 머무르며 상대의 숨결을 나누는 일인지도 모른다. 바이러스가 뇌를 파먹어 기억을 지운다 해도, 맞잡은 손끝에서 느껴지는 맥박과 체온은 거짓말을 하지 않으니까.


이 책을 덮으며 나는 생각했다. 어쩌면 우리는 모두 좀비가 되어갈 예정이거나 이미 무언가를 잃어버린 채 살아가는 존재들 일지 모른다. 현대 사회라는 거대한 재난 속에서 우리는 타인에 대한 감각을 닫고, 각자의 쉘터로 숨어들기에 바쁘다. '내 목소리 들려?'라고 외치는 누군가의 절박한 신호를 소음으로 치부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작가는 소설의 끝자락에서, 인류가 떠나버린 지구에 남은 존재들을 통해 서늘한 선언을 한다.


사람들은 다시 이곳으로 돌아오겠지. 장풍이가 바다로 돌아갔듯이, 결국에는. 하지만 나는 복수를 아는 인간이다.
그러니 돌아오지 마십시오, 그대들.
당신들이 설 자리는 없습니다. 이제 이 행성에는 우리뿐입니다.


이것은 버려진 자들의 독백이 아니다. 이것은 '사랑하기 때문에 남기로 한 자들'의 승전보이자 효율과 생존 논리만을 쫓아 떠나버린 자들을 향한 우아한 복수다. 그들은 폐허가 된 행성에서, 괴물을 끌어안고, 기꺼이 서로의 곁을 지키며 그들만의 천국을 완성했다.


우리의 삶도 다르지 않다. 매일매일 무너지는 일상 속에서, 나를 구원하는 것은 거창한 시스템이나 영웅이 아니다. 오늘 하루 힘들었지라며 건네는 투박한 위로, 묵묵히 내 옆자리를 지켜주는 사람의 온기, 그리고 나의 보잘것없음조차 끌어안아 주는 누군가의 시선이다. 효율과 생존 논리가 지배하는 세상에서, 끝내 사랑하는 이의 곁을 떠나지 않고 숨의 언어를 나누려는 이들만이 멸망 이후의 행성에서 자신들만의 천국을 짓는다.




천선란의 소설은 말한다.

아무도 오지 않는 곳이라 해도

당신이 있다면 그곳은 더 이상 고립된 섬이 아니라고.


그러니 두려워 말고

혐오하지 말고

살아 있는 모든 순간을 사랑하라고.


괴물이 되어버린 세상일지라도

우리가 서로의 숨소리를 기억하는 한

우리는 여전히 인간일 수 있다고.


오늘 밤, 당신 곁의 숨소리에 귀를 기울여 보기를 바란다.

그 규칙적이고 따스한 리듬 속에

우주보다 넓은 세계가 담겨 있음을

그리고 그것이 당신을 살게 하는 유일한 구원이며

영원히 멈추지 않을 우리 삶의 가장 오래된 문장임을 알아채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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