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대로 가랴마는

저자 : 박용철


설만들 이대로 가랴마는
이대로 간단들 못 간다 하랴마는

바람도 없이 고이 떨어지는 꽃잎 같이
파란 하늘에 사라져버리는 구름쪽 같이

조금만 열로 지금 수떠리는 피가 멈추고
가는 숨길이 여기서 끝맺는다면-
아-얇은 빛 들어오는 영창 아래서
차마 흐르지 못하는 눈물이 온 가슴에 젖어나리네.
- P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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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나가는 배

저자 : 박용철

나 두 야 간다
나의 이 젊은 나이를
눈물로야 보낼 거냐
나 두 야 가련다

아늑한 이 항구-ㄴ들 손쉽게야 버릴 거냐
안개같이 물 어린 눈에도 비치나니
골짜기마다 발에 익은 묏부리모양
주름살도 눈에 익은 아-사랑하던 사람들

버리고 가는 이도 못 잊는 마음
쫓겨가는 마음인들 무어 다를 거냐
돌아다보는 구름에는 바람이 회살짓는다
앞 대일 언덕인들 마련이나 있을 거냐

나 두 야 가련다
나의 이 젊은 나이를
눈물로야 보낼 거냐
나 두 야 간다
- P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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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를 심다가 가만히 생각을 해보니까 또 싱겁다. 이 벼가 자라서 점순이가 먹고 큰다면 모르지만 그렇지도 못한 걸 내 심어서 뭘 하는 거냐. 해마다 앞으로 축 불거지는 장인님의 아랫배(가 너무 먹어서 그런 걸 모르고 냇병이라나, 그 배)를 불리기 위하여 심곤 조금도 싶지 않다.
"아이구 배야!"
난 모를 심다 말고 배를 쓰다듬으면서도그대로 논둑으로 기어올랐다. 그리고 겨드랑에 꼈던 벼 담긴 키를 그냥 땅바닥에 털썩, 떨어치며 털썩 주저앉았다. 일이 암만 바빠도 내 배 아프면 고만이니까, 아픈 사람이 누가 일을 하느냐. 파릇파릇 돋아 오른 풀 한 숲을 뜯어 들고 다리의 거머리를 쓱쓱 문대며 장인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 P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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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돼지는 푹푹 크는데 왜 이리도 사람은 안 크는지, 한동안 머리가 아프도록 궁리도 해보았다. 아하, 물동이를 자꾸 이니까 뼉다귀가 움츠러드나 보다, 하고 내가 넌지시 그 물을 대신 길어도 주었다. 뿐만 아니라 나무를 하러 가면 서낭당에 돌을 올려놓고,
"점순이의 키 좀 크게 해주십사. 그러면 담엔 떡 갖다 놓고 고사 드립죠."하고 치성도 한두 번 드린 것이 아니다. 어떻게 돼먹은 건지 이래도 막무가내니••••••. 그래서 내가 어저께 싸운 것이지 결코 장인이 밉다든가 해서가 아니다.
- P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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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는 하도 답답해서 자를 가지고 덤벼들어 그 키를 한 번 재볼까 했다마는, 우리는 장인이 내외를 해야 한다고 해서 마주 서 이야기도 한 마디 하는 법이 없다. 우물길에서 언제나 마주칠 적이면 겨우 눈어림으로 재보고 하는 것인데 그럴 적마다 나는 저만침 가서,
"제 - 미 키두!"
하고 논둑에다 침을 퉤, 뱉는다. 아무리 잘 봐야 내 겨드랑(다른 사람보다 좀 크긴 하지만) 밑에서 넘을락 말락 밤낮 요모양이다.
- P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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