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자 예수 - 종교로부터 예수 구하기
강남순 지음 / 행성B(행성비)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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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리로 삶을 증명하기보다 삶으로 교리를 증거하다

철학자 예수: 종교로부터 예수 구하기를 읽고

 

 

기독교 신자가 아닌 사람이 교회를 다니는 사람을 만나면 우선 마음부터 불편한 경우가 많다. 내가 말하는 모든 주장이나 의견을 기독교라는 종교적 교리에 비추어 해석을 하고 평가하면 판단당하는 경험을 여러번 해본 당사자로서 기독교가 추구하는 진리관이 시공을 초월해서 올바른 삶의 원리로 작용하는지는 언제나 의문이었다. 교회를 다니지 않는 사람은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이라는 프레임으로 나를 바라보는 시선이 불현 듯 느껴질 때마다 불편한 감정은 숨기기 어렵다. 진리에 이르는 단 한 가지 길만 존재하지 않듯이 저마다 믿고 따르는 신에게 이르는 길도 사람마다 다른 방법과 노선이 있지 않을까.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기독교 신자가 아니면 신을 믿지 않는 사람으로 획일화시켜 구원받기 어려운 존재로 해석하고 상대를 평가하는 시선이 이미 평범한 사람들의 사선을 넘은지 오래다. 사람은 뭔가 자신도 모르게 끌림이 생길 때 이성적 판단 이전에 끌림이 이끄는 방향으로 끌려가는 경우가 많다. 강남순 교수님의 이번 책, 철학자 예수도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런 끌림으로 읽기 시작했는데 쉬지 않고 단숨에 빠져 읽어버렸다. 종교적 구원자나 메시아로서의 예수라고 했으면 끌리지 않았을 텐데, 예수가 철학자로 변신한다면 과연 어떤 모습이었을지를 상상하면서 책장을 넘기시 시작했다.

 

성서는 해석을 기다리는 텍스트가 아니라 실천을 촉발하는 초대장이다

 

책과 혁명에 관한 다섯 밤의 기록이라는 부제가 붙은 사사키 아타루의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이라는 책을 읽으면서도 그냥 책을 읽은 게 아니라 책을 읽어버렸다거나 읽고 말았다는 표현이 나온다. 아타루는 자신의 책에서 책을 읽어버렸고 읽고 말은 이상 읽은 대로 생각하는 수준에서 끝나지 않고 자기 삶을 변혁하는 수단과 촉발점으로 작용한다고 한다. 책은 이처럼 사고방식의 혁명을 일으키는 수준을 넘어서 삶의 혁명을 이끄는 실천으로 이끄는 혁명의 촉발점으로 다가온다. Deleuze & Guattari(1980)천개의 고원에서 이야기하는 책의 의미가 이 시점에서 의미있는 시사점을 던져준다. 책은 일정한 의미를 품고 역사적으로 정체된 상태로 고정된 텍스트가 아니라 외부의 누구와 만나는지에 따라 그 의미가 역동적으로 달라지는 배치다. 책과 배치가 바뀌면서 텍스트는 컨텍스트에 따라 부단히 유동적으로 움직이는 의미의 생성체다. 책은 과거를 품고 있는 역사적 교과서가 아니라 미래의 누구와 어떤 배치를 만드느냐에 따라 가변적으로 의미가 바뀌는 잠재적 가능성이다.

 

책은 저자의 문제의식과 목적의식이 고스란히 내부적으로 간직된 폐쇄적 의미의 결정체가 아니라 저자가 어떤 생각과 의도로 썼더라고 하더라도 그걸 해석하는 사람의 문제의식에 따라 부단히 재탄생하는 생성적 의미의 잉태실이다. 책은 저자의 의미와 의도가 수많은 곁가지로 뻗어가면서 수직적 위계를 띄는 수직적 계통구조로 짜여진 통일된 집합체가 아니라 시작과 끝이 분명하게 구분되지 않는 상태에서 언제나 중간지점에서 또 다른 의미를 잉태하고 다른 사상적 뿌리와 우발적으로 만나 예측하지 못한 방향으로 뻗어나가는 리좀형 의미의 발산체다. 따라서 책은 저자가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역사적 문맥에서 파고들어 따져보는 해석이 중요하기보다 언제 누가 어디서 그 책과 만나는지에 따라 배치가 바뀜으로써 의미대로 삶을 살아야 하는 실천의 문제가 중요한 매개체다. 책은 누군가의 해석을 기다리는 텍스트가 아니라 배치를 달리 함으로써 색다른 의미를 현실에 구현하는 실천의 촉발물이다. 마찬가지로 성서도 예수의 가르침이 시공을 초월해서 절대 진리로 간직된 고정된 텍스트가 아니라 누가 어떤 상황에서 어떤 의미로 해석하는지에 따라 천차만별의 의미로 달라지는 새로운 삶을 살아가려는 사람에게 보내는 초대장이다.

 

앎의 경로를 의심할 때 앎의 결과에도 의문이 든다

 

철학자 예수도 오랜 역사를 통해 저마다의 방식으로 해석되어온 성서와 만나는 배치를 바꿔서 낯설게 하기(defamilarization) 위해 한글 성서보다 영어 성서를 참고했고, 성서에 사용되는 언어적이고 성적인 편견과 종교적 선입견을 없애기 위해 평등언어와 포괄적 언어를 사용하고 나아가 일상언어를 사용함으로써 그 동안의 성서와 만났던 사람들과 배치를 바꿔서 전혀 다른 방식의 마주침을 통해 색다른 깨우침의 선물을 선사해주고 있다. 이를 위해서 성서와 기존 종교나 교회가 만나서 이룩한 기존의 배치 구도가 낳은 타성과 통념에 젖은 예수의 가르침은 물론 중심부에 동조(同朝)하거나 동화(同化)시키는 주류담론에서 벗어나 변방에서 예수의 뿌리뽑힌 삶(uprooted life)’을 바라볼 필요가 있다. 주류 담론의 의사결정 근거는 언제나 중심부에 있다. 그들이 추구하는 변화는 엄격한 의미로 변화라기보다 동화. 동화는 중심부에 얼마나 가깝게 따라가느냐가 변화의 판단 척도다. 하지만 진정한 변화는 중심부에서 일어나지 않고 주변부나 변방에서 일어난다. 그 동안 주류 담론으로 해석되어 이해되었던 기독교와 교회 중심의 예수를 가리고 있는 장막을 거두도 교회와 기독교 밖에서 예수의 진면목을 바라보는 안목이 필요하다. 중심부 시선이 얼마나 예수의 본질적 가르침이라는 사선을 넘나들며 왜곡하고 있는지를 비판적으로 조명하고 해석하는 이중보기 방식이나 시선(double mode of seeing)이 지금 필요한 까닭이다.

 

철학자 예수를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기존에 알고 있었던 기독교적 예수나 교회의 교리로 포장 또는 위장된 예수를 버려야 한다. 진정한 앎은 새로운 지식을 습득해서 생기기보다 이미 알고 있는 고정관념이나 통념을 버리는 가운데 시작된다는게 바로 비학습 또는 창조적 파괴를 통한 버림학습(unlearning)이나 탈학습(delearning) 아니던가. 배움이라는 탐구 여정을 떠나 기전에 내가 뭔가를 알고 있다는 가정을 버리고 나는 모른다고 시작해야 새로운 앎이 삶을 통해 생기기 시작한다. 그래서 저자가 던지는 질문이 의미심장하다. 내가 예수에 대하여 아는 것을, 나는 어떻게 알게 되었는가(36). 알고 있는 것을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는 잘 물어보지 않는다. 앎의 경로에서 심각한 오염과 왜곡이 있을 수 있다는 가정을 갖고 이전과 다른 앎을 향한 여정을 시작할 때 전혀 다른 낯선 가능성 앞에 도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저자가 말했듯이 “‘여정이란 출발점은 있지만, 최종적인 도착점은 없다”(35). 그 여정에는 기존 가정을 의문에 붙여 놓고 부단히 탐구하는 열정만 있을 뿐이다. 호기심의 물음표가 품은 의문의 화살은 끝도 없이 앎으로 밝혀보고 싶은 과녁을 향해 쉼 없이 날아갈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예수에 대하여 아는 것을, 나는 어떻게 알게 되었는가를 스스로에게 다시 물어보았다. 사실 잘 알지도 못하지만 예수에 대한 단편적인 앎은 전부 교회 다니는 기독교 신자들을 통해 듣고 보고 느낀 지극히 편향적인 의견(疑見)의 산물일 뿐이었다. 그래서 저자도 교회와 교리안에 갇힌 예수를 탈절대화-탈교리화-탈종교화시켜 길들여진 예수의 장막을 걷어내고, 구체적인 삶의 현장에서 예수의 몸으로 만나 건져올린 신체성의 가르침으로 정체성의 본질에 다가가려는 접근을 시도하는 것이다. 예수는 자본 축적으로 건축하거나 증축한 화려한 교회나 성당의 높은 제단에서 아래를 내려다보고 설법을 전파하지 않았다. 오히려 예수는 낮은 곳, 헐벗고 힘든 사람들이 매일 매일 사투를 벌이며 살아가는 삶의 현장에서 실천하면서 가르침을 대신했다. 예수는 철학을 관념의 파편과 공허한 논리로 설파하지 않고 우리들의 일상적 삶이 펼쳐지는 현장에서 아픈 현실을 만나며 진실을 캐내고 그 속에서 진리를 꽃피우려고 몸을 던졌던 거리의 철학자이자 삶의 스승이다.

 

예수는 저 세상을 꿈꾸지 않고 이 세상 한 가운데 함께--살아감을 실천했다

 

철학자 예수는 인간의 육체성-너머의 세계에 대한 영성에 관하여 아무런 언급을 하지 않았다”(50). 충격이다. 예수를 믿으면 천당가고 그렇지 않으면 지옥간다. 기도만 열심히 해도 원하는 바가 다 이루어진다는 기독교적 주장에 늘 의문이 아니라 의심의 눈초리가 타인의 시선을 넘어섰다. “예수의 가르침 핵심은 언제나 지금 여기라는 우리의 현실의 세계에서, ‘어떻게 살아가는가에 관한 것이다”(53). 예수의 가르침을 현대적으로 해석해봐도 고진감래(苦盡甘來)는 도래할 미래가 아니다. 지금 하기 싫어도 미래를 담보로 현재를 희생하면서까지 살고 싶지 않은 인생을 살다가 오히려 통증만 생기는 고진통래(苦盡痛來)만 올 뿐이다. 우리는 천당에 가기 위해서 오늘을 열심히 살아가는 게 아니다. 우리는 예수가 온몬으로 실천하면서 가르친 사랑, 용서, 환대, 연민과 책임, 평등과 정의를 지금 여기서 어떻게 실천하면서 의미있는 삶을 만들어나갈 것인지의 시제는 지금이다. 이런 점에서 예수에게 배우는 사랑과 용서, 환대, 연민과 책임, 평등과 정의는 모두 추상명사가 아니라 매일 일상에서 실천하면서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최선의 삶인지를 구현하는 동사다. 추상명사의 동사화가 바로 예수가 꿈꾸는 거리의 철학자로서의 삶이 아닐까. 한 마디로 예수는 “‘저 세상(other world)’이 아니라 이 세상(this world)’ 한 가운데서 함께 살아가는 인간의 삶”(58-59)이다

 

예수의 가르침은 제도화된 기독교와 그 기독교의 박물관에 박제되어 버렸다”(238). 저자의 주장은 한곁같다. 예수와 제도화되고 조직화된 종교로서의 기독교는 동일하지 않다. 구체적인 삶의 현장에서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참된 삶인지를 몸소 밝히며 세상 사람들을 가르쳤던 예수의 가르침은 기도하면 다 이루어지고, 교회를 다니는 기독교 신자에게만 미래로 향하는 빛을 밝혀 마침내 천당에 간다는 주장으로 왜곡되고 곡해되어 예수의 이름으로 예수를 비방하는 수준까지 치닫고 있다. “예수는 종교적 교리의 토대를 구성하려고 한 것이 아니라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가르쳤다”(100). 그걸 가르치기 위해서는 교회나 성당에 모여 교리화된 믿음의 문장을 낭송하고 기억에 각인시키기보다 삶의 현장으로 몸을 던져 몸으로 앎을 증명해보였다. “반면 기독교는 무엇이라는 교리적 전통을 구축하면서 그 존재의미를 이어왔다”(100). 우리는 그 동안 기독교 교리 속에 화석화된 상태로 고정된 절대적 신이라는 존재로 예수를 신성시해왔다. 실제로 예수는 꿈도 꾸지 않았던 영적 세계, 신의 나라를 지금 여기서의 삶을 포기하고 오로지 저세상으로 향하는 비현실적 꿈을 꾸기 위해 오늘 우리가 겪는 고통은 마땅히 참고 하느님을 위해 봉사해야한다는 억지논리도 위장된 교리다.

 

기독교는 예수의 이름으로 예수를 배반하는 종교다

 

예수의 가르침을 전파하는 종교가 기독교이고 그걸 배우는 장소가 교회라고 알고 있었다. 철학자 예수를 읽고 크게 깨달았다. 기독교로 성문화된 교리에는 무리한 예수의 가르침이 잘 못 해석되어 있고, 교회는 박제화된 교리를 절대적인 진리로 가르치는 자본주의적 학교였다. 한 마디로 기독교와 교회는 예수를 절대적 진리의 성전으로 믿고 가르치지만 믿고 가르칠수록 예수의 이름으로 예수를 배반”(292)하는 종교다. “예수의 가르침에는 제도화된 종교가 있지 않다”(292). 예수는 호화 건축물 속의 화려한 교단에서 설교하지 않았고, 파이프 오르간을 연주하기 위해 헌금을 모으지 않았다. 예수는 헌금을 모아 현금으로 사용하지 않았고, 자신들의 안위와 행복을 위해 새벽에 모여 통성 기도를 하지 않았다. 예수는 가르침을 종교적 교리로 정리해서 수많은 사람들이 암송하는 시간을 갖는 대신에 구체적인 삶의 현장에서 오로지 몸으로 실천함으로써 가르침을 대신하였다. 입이 아니라 몸으로 증거하는 삶을 통해 정의가 강물같이 흐르는 세계”(아모스 5:24)에서 다양한 생명이 함께--살아감”(294)의 길을 온몸으로 모색한 산증인이다. 예수는 중심부를 기웃거리며 동화되는 삶보다 변방의 소외된 곳을 찾아다니며 구체적인 삶의 변화를 추구한 체인지 에이전트(Change Agent)의 전형이다.

 

삶의 철학자 예수가 실천한 사랑도 한 마디로 확정해서 정의할 수 있는 미덕이 아니다. 데리다의 철학에 비추어 예수의 사랑을 해석하면 무엇을사랑하는 일보다, ‘어떻게사랑하느냐가 더 중요하고, ‘누구를조건없이 사랑하기보다 무엇을어떤 조건에 비추어 사랑할 때 문제는 심각해진다. 대표적으로 결혼정보회사가 제공하는 사랑의 등급은 숭고한 사랑을 주고받는 누구를 무엇으로 대체해서 자본주의적 상품으로 사랑을 전락시켰다. 사랑에서 누구를이 차지하는 의미는 그 누구와도 대체할 수 없는 단독적인 고유함을 지닌 작품이다. 반면에 사랑에서 무엇을이 차지하는 의미는 금전적 가치로 대체가 가능한 자본증식용 상품이다. 그 누구와도 대체할 수 없는 고유한 작품으로 다가가는 사랑과 돈만 있으면 어떤 상품으로도 대체가 가능한 상품에 접근하는 사랑은 근본적으로 차원이 다르다. “사랑은 삶의 의미를 창출하게 하는 언제나 새로운 원리”(124)라서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의미있는 삶인지는 결국 우리들의 삶을 만들어가는 사랑의 강도와 수준을 보면 알 수 있다. 하지만 우리가 추구하고 지향하는 대부분의 삶의 철학을 보면 일상적 삶과 분리되어 믿음과 사랑이 추상적이고 논리적인 교리로만 작용하는 경우가 많다.

 

환대는 새로운 삶으로의 초대

 

사랑은 한나 아렌트가 이야기하는 탄생성(natality)’과 예수가 실천적 덕목으로 강조하는 용서라는 미덕과도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다. 새로운 탄생 가능성이 일어나기 위해서는 과거의 잘못을 용서하는 진정한 사랑이 뒷받침되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 새롭게 태어남의 가능성은 언제나 과거에 범했던 실수나 죄과를 사랑으로 감싸안아줄 때 비로소 열리는 새로운 관문이기 때문이다. 예수의 용서는 어떤 조건도 따지지 않는 전제 조건이 없는 무조건적 용서이자 불가능성도 뛰어넘은 용서다. 무엇보다도 예수가 말하는 용서는 한 번으로 완성되는 게 아니라 그 의미와 깊이를 확장하고 심화시키면서 어제와 다른 자세와 태도로 용서하는 도래할 용서(forgiveness to-com)’. 도래할 용서 속에서 당신의 죄들이 용서받았습니다라고 수동태로 표현하면서 주어와 목적어가 선명하게 구분되는 능동태형 용서에 잠재된 용서하는 주체와 받는 객체의 위계적이고 수직적인 종속관계도 무너뜨리는 것이다. 언제나 예수의 가르침은 어느 종교에 소속되어 있는지를 따져 물은 다음 해당 종파가 어떤 교리를 추종하는지를 생각하는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 지금 나와 전혀 다른 세계의 사람들과 어울려 어떻게 잘 살아갈 것인지가 중요하다.

 

사랑과 용서로 새로운 탄생가능성을 높여나가는 구체적인 노력은 새로운 삶으로의 초대를 의미하는 환대로 예수가 실천하는 또 다른 삶의 미덕과 맞닿는다. 새로운 삶으로의 초대는 나와 인식과 관심이 다른 전문분야와의 경계를 넘나드는 탈경계성의 환대이자 나와 다른 가치관을 갖고 다른 세계에 살아가는 사람들도 조건없이 초대하는 무조건적 다름의 환대다. 아무리 많은 환대를 이전과 다른 방식으로 수행해도 여전히 환대는 인간적 노력으로 완결할 수 없는 영원한 불가능성으로 다가오는 도래할 환대(hospitality to-come)’. 지금 보여줄 수 있는 모든 가능성의 환대를 열어놓고 지금으로서는 도달하기 어려운 불가능성의 환대로 한 걸음 내딛을 때 오늘보다 나은 환대의 향연이 펼쳐지면서 인간적 연민과 공감의 연대가 이전보다 더욱 공고하게 건축될 것이다. 예수의 관심은 종교적 교리로 만들어 교회에서 그걸 가르치는데 있지 않고, 언제나 함께--살아감에 있어서 다름과 차이에도 불구하고 경계를 넘나들며 무조건적 사랑과 용서를 나누며 도래할 환대의 연대망을 구축하는 데 있다.

 

예수는 지행일치보다 지행합일을 추구한 삶의 철학자다

 

종교적 교리로 박제된 예수의 가르침은 푸코가 말하는 권력/지식(Power/Knowledge)의 논리로 해체되어야 한다. 푸코에 따르면 지식이 권력으로 바뀌는 게 아니라 권력이 지식의 여부를 결정한다. 오늘날의 종교와 교회는 교리로 통용될 예수의 가르침을 선별해서 결정할 권력을 갖고 있다. 교리에 포함되는 진리는 종파마다 천차만별이다. 같은 기독교 안에서도 예수의 가르침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따져묻는 방식은 물론 그걸로 인해 얻는 해답도 다르다. 종파가 다르면 예수의 가르침도 전혀 다른 논리로 포장되면서 권력을 갖게 되고 강제적 구속력을 띤다. 문제는 교리가 맥락성을 띤 상태에서 다르게 해석될 수 있는 가능성을 갖고 있어야 하지만 교회가 가르치는 교리는 탈맥락적인 경우가 많다. 네 이웃을 사랑하하고 하지만 이웃이 주어진 상황에 따라 의미하는 바가 다를 것이고, 여기서 사랑이라는 추상명사를 구체적인 동사로 실천하는 신체성도 다르다. 똑 같은 교리도 그것이 적용되는 상황적 맥락에 따라 일리 있는 교리가 될 수도 있고 그렇지 않고 무리가 따르는 교리로 전락할 수도 있다. 니체가 말했듯이 사실이란 없다. 해석만이 존재할 뿐이다.”

 

이와는 상반되게 수전 손택은 해석에 반대한다는 책에서 해석은 지식인이 예술을 넘어 세계에 가하는 복수라고 했다. 예술작품을 창작의도와 무관하게 관념적으로 해석함으로써 작품성을 자의적으로 해독하는 행위의 역기능과 폐해를 지적하는 말이다. 마찬가지 맥락에서 예수는 구체적인 삶의 현장에서 몸으로 가르친 사랑과 용서, 환대와 용서, 정의와 평등을 예수의 본래 의도나 의지와 무관하게 자의적으로 해석함으로써 원래 예수의 가르침을 왜곡할 수 있는 가능성이 눈앞의 현실에서 펼쳐지고 있지 않은가. 예수를 믿는 것은 예수가 몸으로 가르친 덕목을 삶의 실천 철학을 구현함으로써 함께 살아감을 일상적 삶으로 만드는 노력이다. 하지만 예수를 믿는 것은 곧 교회를 다니는 것이고, 교회를 다니는 길만이 예수가 말한 예수가 말한 나는 길입니다. 나는 진리입니다의 길이자 진리가 아니다. 교회를 다니고 기독교라는 종교를 갖는 길은 예수를 믿는 길로 향하는 한 가지 일리는 될 수 있지만 그 길만이 예수의 가르친 삶을 실천하는 만고불변의 절대 진리는 아니지 않은가.

 

예수는 이런 정황이 비추어 볼 때 추상화된 교리를 관념적 철학으로 정립해서 전파하며 일상적 삶과 긴밀하게 연관된 일리와 괴리된 진리를 옹호하는 강단 설교자가 아니다. 더욱이 우리가 살아가는 구체적인 현실과 분리된 이론적 입장을 따로 정립, 무지몽매한 평범한 사람들에게 자신의 철학을 강권하는 강단철학자는 더욱 더 아니다. “예수의 철학에서 앎(knowing)과 실천(doing)은 분리되지 않는다”(47). 이런 점에서 예수는 알고 난 다음 행동하는 지행합일(知行合一)의 관념적 철학자가 아니라 앎과 삶이 일치하는 지행합일(知行合一)의 실천적 철학자였다. 예수는 오로지 어떻게 의미로운 삶을 살아가야 하는가”(46)였다. 어떻게 살아가야 의미있는 삶을 살아갈 수 있을지는 삶의 현장에서 직접 몸을 던져 실천해보지 않으면 구체적인 방법을 알 수 없다. 방법은 언제나 책상머리에서 요리조리 잔머리 굴린 관념적 파편의 조합이 아니라 일상에서 이리저리 몸을 던져 겪어보는 시행착오가 낳은 판단착오의 산물이다. 어제와 다른 시행착오만이 어제와 질적으로 다른 판단착오를 줄이는 삶의 지혜가 나오기 때문이다. 지혜를 사랑했던 예수는 누군가 개발한 지혜를 사랑한 사람이 아니라 자신이 직접 격전의 현장에서 건져올린 삶의 지혜를 사랑한 철학자다.

 

예수는 질환을 치료하는 의사가 아니라 질병을 치유하는 돌봄의 전형이다

 

예수는 앎으로 삶을 증명하지 않고 삶으로 앎을 증거했다. 예수는 입을 통해 가르치는 설교로 끝나지 않고 자신이 직접 사랑과 용서, 연민과 환대를 실천함으로서 가르쳤다. 무엇이 인간을 넘어 인류를 사랑하는 삶인지, 관념적 주장을 설교로만 전하지 않고 온갖 문제가 펼쳐지고 있는 구체적인 삶의 현장에서 몸을 던져 실천하면서 가르친 산 증인이다. 사실 예수의 이러한 가르침은 가르침이라기보다 가르치지 않고 가르치는 정문일침(頂門一針)에 가깝다. 당신 자신의 일거수일투족이 스스로전하고 싶은 메시지였으며, 헐벗고 가난한 사람, 힘들과 고달픈 사람들에게 발벗고 나서서 그들의 고통을 어루만져준 일상의 수호신이었다. 예수는 아픈 사람의 병을 치료하는 의사라기보다 그들이 힘든 삶의 현장에서 겪고 있는 아픔을 같이 아파하며 살피고 보살피는 돌봄의 전형이다. 아서 프랭크가 아픈 몸을 살다에서 구분한 질환(disease)과 질병(illness)은 다음과 같은 근본적인 차이를 갖고 있다. 질환은 체온, 혈압, 혈당 수치나 피부 상태를 생리학적으로 환원하여 제시하는 의학적인 용어라서 주로 객관적으로 측정할 수 있는 수치로 환산된다. 반면에 질병은 질환을 앓아가면서 환자가 느끼는 공포와 절망, 희망과 낙담, 기쁨과 슬픔처럼 느끼는 주관적 감정이다. 똑같은 질환을 앓고 있어도 그것에 대해 환자가 느끼는 주관적 감정은 천차만별이다. 예를 들어 의학적으로 위암이라는 질환은 한 가지 용어로 지칭할 수 있지만 위암을 앓고 있는 환자의 상태나 병력, 그리고 그것에 반응하는 환자의 자세와 태도에 따라 천차만별의 주관적인 질병을 앓고 있다.

 

환자가 동일한 질환에 대해서 느끼는 공포나 두려움, 걱정과 불안감은 다른 환자의 그것과 비교할 수 없다. 해당 환자가 주어진 환경에서 느끼는 특수한 경험이다. 이런 경험을 같은 범주로 일반화시켜 같은 환자로 취급하는 것은 의학적 치료의 효율성과 관리의 편리함을 제고시킬 수 있지만 환자를 돌보는 데는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 만약 예수가 교회나 성당에서 수많은 성도들을 모아놓고 설교를 통해 사람들의 아픔을 치료하는 의사였다면 각각의 구성원들이 겪는 개별적 고통을 일반화시켜 하나의 질환으로 규정한 다음 그걸 치료하는 일반적인 약을 처방해주었을 것이다. 하지만 예수는 저마다 사람이 느끼는 아픔과 고통의 감각적 차이는 그 사람이 지금 놓여 있는 구체적인 삶의 현장과 주어진 조건에 따라 다르기 때문에 그들과 함께 지금 여기서 함께 살아가보지 않으면 그들의 아픔을 몸으로 느낄 수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래서 예수의 가르침의 무대는 언제나 교회나 성당과 같은 화려한 건물의 제단이나 성전이 아니라 매일 매일 사람들이 살아내는 일상적 삶의 터전이다.

 

기도(祈禱)만 하면 기도(氣道)가 막힌다

 

기독교를 비롯 대부분의 종교는 기도를 통해 갈구하는 신과의 만남을 추구한다. 문제는 대부분의 기도가 자신의 안위와 행복, 성공과 성취를 위한 조건적 기도에 있다. 수험생의 합격을 기원하는 기도, 투자한 건물이나 대상이 망하지 않고 잘 되기를 바라는 기도, 먼 길을 떠나는 자식이 성공해서 돌아오기를 비는 기도, 사업적 성공을 기원하며 예수의 이름으로 올리는 각종 기도는 예수의 이름으로 기도할수록 기도만 막힐 뿐이다. 내가 목격한 가장 믿을 수 없는 교회 다니는 사람들의 말은 기도가 부족해서 꿈꾸던 목적이나 기대했던 성공이 물건너갔다는 말이다. 기도를 더 열심히 하면 당신이 원하는 꿈도 하느님께서 다 들어준다는 허무맹랑한 말이 갖는 기도의 의미는 실천 없이 기도만 열심히 해서 정말 기도가 막힐 수 있는 기도다. 기도는 나만 잘 되라고 신에게 부탁하는 간절한 기원이 아니라 함께--살아감의 연대에서 벗어나 힘든 삶을 매일 겪어내는 사람들과 연민과 그들을 향한 책임성으로서의 기도가 함께 이루어질 때, 기도의 진면목이 드러날 것이다.

 

진정한 의미의 기도는 나 자신으로부터 물러나서, ‘-너머의 존재와 대화하는 의도적 고독의 시간에 벌어지는 사건”(323)이다. 들뢰즈 입장에서 볼 때 사건은 대체 불가능하고 반복 불가능한 비가역적 의미를 지닌다. 기도하기 전과 기도한 후에 나에게 다가오는 변화의 조짐이 다양한 기호로 해석될 때, 현재 몸담고 살아가는 지금의 세계(the world of already)’와 내가 갈망하는 도래할 세계(the world-to-come, the world of not yet)’의 간극을 성찰하고 그 사이에서 내가 취할 수 있는 조치를 적극적으로 시도해보는 용기와 결단이 생긴다. 기도는 나 자신을 깊이 사유하면서 현재와 미래를 연결하는 가교를 놓는 작업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꼭 기독교 신자가 교회에서만 하는 성스러운 독백이 아니다. 오히려 기도는 도래할 세계를 맞이하는 자세를 가다듬고 불가능성 속에서도 가능성의 관문이 열리기를 갈구하면서도 동시에 다양한 시행착오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도전을 멈추지 않고 미지의 세계를 향해 담대하게 몸을 던질 때, 기도는 꿈이 이루어지도록 도와달라는 기원이 아니라 함께--살아감을 실천하는 사람으로서의 성찰적 자기반성이다.

 

예수는 현장에서 수고하면서 삶의 철학을 실천한 고수

 

예수는 성경에 나오는 모든 미덕, 사랑, 용서, 환대, 평등과 정의를 화력하고 웅장한 교회당이나 성전, 대학원과 같은 현실과 분리된 별도의 공간에서 삶과 격리된 상태로 말과 글로 전하지 않았다. “구체적인 삶에서 실천함으로써 가르쳤다”(239). 예를 들면 자기를 사랑하듯 이웃을 사랑하십시오라고 성경에 나오지만 교회다니는 기독교인들은 자기 사랑은 물론 이웃을 사랑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여기서 말하는 이웃은 나와 인식과 관심이 동질적인 이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나와 다른 세계에서 다른 생각과 행동을 하면서 살아가는 일상세계의 모든 사람이다. 교회를 다니지 않는 사람이나 다니지 못하는 사람의 속 깊은 마음을 사랑할 때 교회는 기독교인만이 머무는 특권적 장소가 아니라 예수가 평생을 통해 강조한 이웃사랑을 전파하는 만인의 학교로 탈바꿈되어야 한다. 교회를 다니지 않는 사람들의 속깊은 마음은 과학기술로 측량이 불가능하다. 그들이 오늘도 내일도 뒹굴며 살아가는 격전의 현장으로 내려가 다양한 사람들과 만남을 통해 밑으로부터의 철학”(145)을 구현해야 한다. 속세를 어쩔 수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의 속마음을 알아내기 위해서는 그들과 함께--살아봄을 실천하지 않고서는 알 수 없다. 아랫사람에게 던지는 질문을 부끄러워하지 말아야 한다는 불치하문(不恥下問)의 철학을 예수는 몸소 구현하면서 언제나 사람들과의 만남에서 마주침의 깨우침을 건져올렸다.

 

예수는 철저하게 머리의 언어, 말의 언어가 아니라 몸의 언어로 평등의 철학을 보여준 산 증인이다. 고립된 삶을 죄인으로 살아가는 삭개오에게도 고귀한 한 인간으로 지극한 사랑으로 그를 환대하며 새로운 삶의 가능성으로 초대하였다. 당시에 예수가 사용하는 언어는 지식인이 사용하는 관념과 권위적 책상 언어가 아니라 진심으로 타자를 사랑한다는 느낌이 스며들어가는 체중이 실린 진심의 언어를 사용했다. 머리의 언어는 상대가 무슨 말을 하는지에 관계 없이 즉흥적으로 반응하면서 내가 생각했던 말을 쏟아내지만 몸의 언어는 상대방이 처한 상황에서 내가 어떤 식으로 대응할지 감각적으로 조응하고 상호작용하고 협력하면서 말을 만들어 낸다. 머리의 언어는 나오자마자 상대를 무시하거나 탈맥락적이라서 맴돌면서 문맥이 막히고 주변을 배회하지만 몸의 언어는 상대방의 의중에 꽂히면서 맥락적 감수성에 조응하면서 상대의 의중을 파고들어 꽂힌다. 예수는 이런 점에서 언제나 구체적인 삶의 현장에서 고생하고 수고하면서 삶의 철학을 실천한 진정한 고수. 고수가 살아가는 터전은 강단이 아니라 일상적 삶의 터전이다.

 

예수는 밑으로부터 철학을 구현한 역경 극복의 명수다

 

철학자 예수는 저자도 말한 바와 같이 펜으로 저항하기(Fighting with a pen)” 또는 펜으로 변혁하기(Transforming with a pen)”를 통해 예수의 가르침을 오해해서 오류를 범하고 있거나 오용되어 심각한 폐해와 역기능을 양산하는 시대에 책임감으로 사랑하는 삶을 실천하는 한 가지 방법이었다. 이 책의 마지막 장을 닫으면서 도래할 또 다른 철학자 예수를 기다린다. 해석은 언제나 주어진 상황을 나의 맥락적 의미로 이해하는 과정이기 때문에, 상황(situation)이 바뀌면 맥락적(contextual) 의미도 더불어 변화되고 진화된다고 생각하면 철학자 예수는 무한 도래하는 영원한 미완성 철학자로 남아 있을 것이다. 데리다가 말한 신은 불가능성의 가능성이라는 화두를 염두에 두고 볼 때, 예수야 말로 불가능성을 좌절과 절망으로 해석하지 않고 그 속에서 어둠을 밝히는 가능성의 텃밭을 일궈낸 역경극복의 명수다. 쉽게 달성 가능하다면 우리는 굳이 신을 찾지 않을 것이다. 불가능한 한계가 경계를 가리고 장벽으로 앞을 가로막아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가능성을 극복하고 가능성의 관문을 열어가려는 열정이 바로 데리다가 말하는 종교란 불가능성에의 열정이라고 해석한 의미이자 타자에 대한 무조건적 사랑과 환대로 새로운 세계로 초대하는 책임성이기도 하다.

 

시공을 초월해서 종교적 독단의 논리로 포장된 교리에 함몰되어 구체적인 실천현장과 괴리된 상태에서 예수라는 이름으로 예수의 가르침을 위반하고 배반하는 사람들에게 이 책은 충격적으로 울려퍼지는 경종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가져본다. 자기 편의주의적으로 해석한 예수의 교리를 교회에서 가르칠수록 예수가 실천을 통해 구현하려는 이상적 현실은 현실로 다가오지 않는다. 현대 교회는 과연, 배고프고 목마른 사람들, 낯선 사람들, 헐벗고 아픈 사람들, 그리고 감옥에 갇힌 사람들처럼 나보다 힘들고 어려운 처지에서 하루하루를 살아내려고 안간힘을 쓰는 사람들에게 손내밀어 힘을 주고 있는지 물어봐야 한다. 데리다 말한 종교란 책임성의 철학을 얼마나 현실적으로 구현하고 있는지 자문자답해봐야 한다. 데리다에 따르면 책임지지 않는 종교는 아무것도 아니다. 타자를 사랑하고 용서하며 환대해서 새로운 가능성을 잉태한 탄생이 거듭나는 세계에 예수가 몸을 던져 가르친 것처럼 기독교와 교회 속에 박제된 예수를 구해서 현장으로 나가야 한다. ‘현장에 가야 현실을 만날 수 있고, ‘현실속에 우리가 찾는 진실이 숨어 있다. 이 책은 나처럼 왜곡된 정보로 예수를 오해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우리 시대의 앞날을 밝혀줄 진정한 삶의 철학자는 바로 철학자 예수임을 깨닫게 만들어주는 진리의 등불로 작용할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예수의 가르침은 제도화된 기독교와 그 기독교의 박물관에 박제되어 버렸다"(2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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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길이 돌아서서 나를 바라볼 때 시인수첩 시인선 85
고두현 지음 / 여우난골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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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길에서 도래(到來)할 길을 상상하며

 

그리움의 이불 속에서

야밤을 지새운 채

깨어지기 전 새벽 이슬 녹을까봐

성급하게 달려나온 먹구름 속 마음이

남해산 유자와 죽방멸치의 언어로 번역된 채

삭풍을 타고 떨어지는 사선의 떨림을 전한다.

 

어두울수록 빛을 발하며 읽히는

고대의 심연에 갖힌 무수한 심정들,

그대의 창연에서 비상하는 상상력으로

허공을 날으며 시행간마다 시인의 우주가 읽힌다.

 

치열한 앎보다 낭창한 앓음을 사랑하다

현실의 질곡에서 숨죽이며 기다리는

진실의 곡절이 들려주는 울림이

짙은 잔향으로 며칠 째 남아있다.

 

사회에서 만난 가장 앓음다운 친구이자

언제나 시심과 시상으로 세상에서

뜻밖의 상상의 배움을

감당치 못할 화두로 던져주는 스승이기도 하면서

곡선으로 승부하라공저자이기도 한 고두현 시인의

오래된 길이 돌아서서 나를 바라볼 때를 읽는다.

 

언제나 변방에서 변화의 길을 모색하고,

비켜간 시선에서 사고의 사선을 넘으며

메마른 가슴에

자신도 모르게 흐르는

눈물을 선사해주는 시는

이번 시집에서도 변함없이 곳곳에 숨어 있다.

 

한 때 남해 문학기행을 함께 다니며

시인의 탄생지를 순례했던 기억,

한 남해 횟집에서 시인의 작은 배려 덕분에

남해는 야해를 주제로

상상력 강의를 했던 기억을 떠올리며

아련한 추억이 몸속을 빠져나가기 전에

다시 한 번 남해로 떠나는 시인의 마음을 따라가고 싶다.

해마다
목련이 북향으로 피는 것은
햇살 잘 받는
남쪽 잎부터 자라기 때문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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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시가 필요한 시간
장석주 지음 / 나무생각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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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외로움의 촉수를 한 편의 시로 번역하는 시인이 되고 싶은 사람들에게

장석주(2023). 지금은 시가 필요한 시간. 서울: 나무생각.

 

저돌과 파격으로 낡은 세계를 새롭게 건축하다

 

글을 쓰기 위해 새로운 영감이 필요할 때, 타성에 젖은 언어에서 벗어나 사물이나 현상을 다른 눈으로 바라보며 발상을 뒤흔드는 언어가 필요할 때 시집을 꺼내든다. 시인들의 언어 사용 방식을 배우기 위해서다. “시인들은 항상 다르게 보고, 다른 것들을 들으라는 정언적 명령의 세계에 속한다. 그리하여 같은 것을 보면서도 다른 시각으로 보고, 같은 것을 들으면서 다른 귀로 들으며, 같은 목소리에서 호기심을 자극하는 새로운 목소리를 듣는다”(146). 장석주 시인의 지금은 시가 필요한 시간29명의 시인이 세상을 다르게 보고 듣고 느끼며 관성의 늪에서 벗어나 상상력의 촉수”(257)를 뻗어 건져올린 풋것들의 향연을 보여주고 있다. “풋것들은 에두르는 법 없이 사물의 핵심으로 직진한다. 풋것은 무지와 무감각으로, 저돌과 파격으로 낡은 세계를 새롭게 만들고 눌리고 찌든 우리 마음을 기쁘게 한다”(163). 절제와 압축미로 담아낸 시어는 몸을 관통한 흔적을 얼룩에서 무늬로 바꾸어 언어로 번역해내는 시심의 산물이다.

 

시인은 절망이 오면 절망의 적나라한 모습 그대로 또는 희망의 언어로 얼룩진 행간에서 의미를 채굴하고, 낙엽에 쌓인 그리움이 추위에 떨어도 추억으로 한 동안을 버티며 살아가는 주어진 현상의 이면을 파고든다. 폭설에 새겨진 아쉬운 발자국이 휘몰아치는 바람에 지워져도 새벽 찬이슬 맞으며 땅바닥에 엎드려 그 자리를 지키는 족적도 시인에게는 시심을 자극하는 위대한 족적이다. 누가 입을 지도 모르는 생각의 옷을 입은 언어들이 동맥을 타고 흐를 때 시인의 촉수는 피로써 울분을 토하며 얼룩을 무늬로 만드는 언어적 기적을 선물한다. 빨랫줄에 걸린 옷가지에 바람을 타고 지나가던 서글픈 소식들이 가지가지 사연으로 매달려 있는 순간을 놓치지 않는 시심은 언제나 심심하지 않다. 얼마나 외로운 사연 많이 품었으면 무거움을 참지 못하고 구름은 땅으로 곤두박질 치는 비의 비애를 온몸으로 느끼는 사람이 시인이다.

 

시는 찢어진 노트에 담긴 서글픔 한 페이지다

 

우리가 기다리는 시는 불행과 격투를 마다하지 않는 시, 낡은 사물이나 생각을 바꾸는 상상력으로 가득한 시, 청춘의 착란 속에서 빛나는 미래 비전을 담은 시다”(5). 누구나 시인이 되면 강물이 훑고 지나간 모래알의 그리움을 긁어내 어루만져줄 비법을 알 수 있을 것이라고 착각했다. 나이가 들어 시심이 무르익으면 새벽이 찬이슬 앞에 머뭇거리다 먼동이 터옴을 시로 번역해내는 경이로운 작법을 구름에 달가듯 자연스럽게 포착해낼 수 있을 것이라고 또 한 번 착각했다. 쟁반에 맴돌던 달밤의 낭만이 소나무 가지가 속삭이는 연서와 만나 세상에서 가장 감동적인 사랑의 싹을 틔우는 순간에도 싯구가 폭발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나이가 들어가도 하늘이 품고 있는 변덕스러운 생각에 조응하는 명령을 따를 수 있을 정도의 혜안과 안목은 여전히 오리무중이다. 오늘도 시인은 쓰다 남은 메모장에 적힌 그리움 한 조각과 찢어진 노트에 담긴 서글픔 한 페이지를 붙잡고 새벽으로 향하는 밤의 적막속에서 끝을 모르는 유영중이다.

 

시는 개별자에게 발화하는 슬픔의 결, 실패의 광휘, 패자의 심오한 승리 등을 포함한 경험에 주목한다. 그것은 시가 고백의 건축술이기 때문이다. 시는 과거의 멜랑콜리를 소환하고, 한심한 영혼의 낡은 미래를 노래한다. 고백의 언어를 펼치는 가운데 잔혹한 존재의 내출혈, 독백의 만다라, 팬터마임을 시연(試演)하기도 한다”(5). 시인에게는 비극도 어제와 다른 삶을 작곡하는 음악적 선율의 다른 이름이다. 시인에게는 정답도 없고 다양한 가능성을 잉태한 채 상황과 맥락에 따라 다르게 해석되는 해답만 존재할 뿐이다. 해석이 바뀌면 지금껏 골머리를 앓던 문제도 해결되는 삶의 지혜가 든든한 위로로 엄습하기 때문이다. 시인이 걸어가는 길은 아직 가보지 않은 위험한 미지의 길이며, 읽히지 않은 소설속에 잠복근무하고 있는 갈등과 절정의 어느 순간이다. 시인은 어떤 풍경으로 그려내도 화폭에 담을 수 없는 그림이며, 여전히 어제와 다른 영감을 기다리며 그리움에 젖어 사람이 지금 이 순간도 시어를 기다리며 거리를 방황하는 사람이다.

 

시인은 가난이라는 바다를 탐색하는 심해 잠수부다

 

모든 참다운 시는 그 불행의 참상을 낱낱이 고지하여 기소하고 동시에 사면한다. 그게 시의 숭공한 소명이라는 걸 되새기며, 여기 숭고한 소명을 향해 나아간 시인들과 시들을 불러 한 권의 책으로 묶는다(12-13). 지금까지의 생이 아픔과 슬픔이 씨줄로 날줄로 직조된 얼룩과 무늬라면 그런 생에게 따듯한 입맞춤해주며 헐벗은 옷 갈아입혀 따듯한 온돌방에 잠재우고 싶은 마음을 견디다 못해 몇 줄 쓴 시가 이 책 곳곳에서 긴 한 숨을 쉬며 독자들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다. 모든 소리 없는 아우성이 저마다 시인이 겪어내는 삶의 절규였음을 증명해주고 싶은 것이다. 비바람을 등지고 안간힘을 써가며 간신히 켜진 성냥불에 주변이 잠시 밝아진 틈을 타서 돌아온 지난 생의 어둠을 잠시 잊고 싶은 게 이책에 등장하는 시인들의 작은 소망이다. 그럼에도 시인의 주변에는 희망보다 절망의 늪으로 점철되어 있다.

 

김승희 시인의 희망이 외롭다에 나오는 절망엔 그런 비애의 따스함이 있네...희망과 나/희망은 종신형이다는 구절은 절망과 희망을 다르게 해석하는 시인의 역발상이 숨어 있다. 왜냐하면 절망은 우리를 속이지 않는다. 희망이 우리를 자주 속인다. 희망이 절망보다 더 가혹한 것은 그 때문이다. 우리는 희망의 종신형을 선도받은 채 그 가느다란 끝을 붙잡고 있는 죄수들이다”(24-25). 절망의 종신형이 아니라 희망의 종신형이라는 시어 앞에 절망과 희망의 의미를 타성에 젖은 의미로 해석했던 나의 언어사용 방식에 크게 실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희망의 종신형 앞에서 나의 관념적 언어는 바닷가에 객사(客死)한 모래알이고, 땡 빛에 힘없이 죽어가는 들국화의 쪼그라듦이다. 내가 사용하는 언어는 여전히 구체적 맥락성을 품지 못하고 현실에 뿌리 내리지 못한 채 허공을 넘다는 관념의 파편임을 알아차렸을 때, 장석주 시인의 언어는 현실 속에서 진실과 진심을 건져올리는 서광이나 다름없었다. 시인은 그래서 알은 어둠 속에서 절망에 복무하며 기다려야”(32)하고, “머뭇거림과 숙고, 무작정과 막무가내의 기다림”(33) 속에서 더 적확한 언어를 벼리고 별러서 적확한 한 문장을 완성한다.

 

시인은 가난이라는 바다를 탐색하는 심해 잠수부다”(39). 시은은 오르락 내리락 우여곡절의 전반전을 뛰고 나서 한눈팔고 딴 짓 하다 바라본 구름 한 점도 섣불리 흘려보내지 않는다. 거기에는 기꺼이 기록을 거부하는 비애 한 권의 서글픔이 주변을 서성거리고 있음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흐르는 모든 시간과 그 시간이 머물렀다 떠나는 공간은 서성거림의 방황과 배회가 남긴 시 한편이 살아가는지도 모른다. 우리가 살아내는 모든 순간은 한 두 문장으로 압축되거나 요약되지 않고 양극단의 스펙트럼에서 언제나 중심을 잡으려 안간힘을 쓰다 어느 한 쪽으로 쏠린 상식과 신념의 종합선물 세트다. 처절함과 처연함 사이에서 처참함을 느끼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다가 어딘지 모르는 중간 간이역에서 시인의 발걸음은 잠시 쉬고 있다. 그 순간에도 우리에게 던져주는 삶의 교훈이 무엇인지를 탐색하고 파고들어 의미의 지층을 깨부수는 언어광부가 시인인지도 모른다.

 

바라봄과 보지 않음 사이에서 시가 타오른다

 

연애는 상대를 낳는 산파술이다”(64). 비단 연애 뿐만 아니라 시인이 바라보는 모든 대상은 대상이 품고 있는 의미의 뒤안길을 추적해서 잠복중인 새로운 깨달음을 출산하는 산파술의 터전이다. “우리는 바라봄과 보지 않음 사이에서 타오른다. 이 타오름의 중심에 욕망이 있다. 이 타오름에서만 우리는 살아있음을 실감한다”(67). 시인은 바라보되 그냥 바라보지 않고 골머리를 앓고 있는 뭔지도 모르는 숙제를 끌어안고 해결을 위한 단초나 단서를 잡아보려고 몸부림을 친다. 그러다 만난 사소하고 하찮은 일상에서도 비상하는 상상력의 날개를 펼친다. ‘목소리들을 쓴 이원 시인의 상상력 촉수는 한 글자로 된 단어의 숨겨진 아픔과 몰래 꿈꾸는 이상 세계의 한 단면을 포착한다.

 

, 거기까지 나와 굳어진 것들

, 새어 나오는 것들, 제 살을 벌리며

, 거기까지 밀어본 것들

, 거기까지 던져진 것들

, 닿지 않을 때까지

, 치밀어 오를 때까지

, 떨어질 곳이 없을 때까지

, 뒤엉킨 것

, 기어 나온 것

, 세계가 놓친 것

, 파헤쳐진 것, 헤집어놓은 것

, 거울에서 막 빠져나오는 중,

늪에는 의외로 묻을 게 많더군

, 거울에서 이미 빠져나온,

허공에도 의외로 묻힌 게 많군

, 깨진 것, 산산조각 난 것

, 찢어진 것

, 피로 적신 것

, 가장 어두운 것

, 거기에서도 꼭 다문 것 격렬한 것

, 거기에서도 혼자 남은 것

, 거기에서도 갈라지는

, 거기에서도 붙잡힌

, 성급한, 뒤늦은, 때늦은

, 그림자가 실토한 몰골

, 손가락 끝에 딸려 오는 것

, 토사물

, 끓어오르는

, 목구멍까지 차오른

, 퍼드덕거리는

 

한 많은 세월의 얼룩이 서글픈 사연을 머금다 목구멍 사이로 터져 나온다. 차갑게 식은 냉가슴을 달구는 한 잔 술이 온몸을 휘감을 때 시인은 텅 빈 종이를 바라보다 어둠을 밝히는 밤하늘의 등불로 번역한다. 하루 종일 수영 하다 지쳐가는 몸을 가누며 물고기가 하품을 하는 순간 숱한 바람에도 쓰러지지 않았던 물가의 갈대가 온몸을 떨고 있을 때 시인은 어둠에 가려 보이지 않지만 그럼에도 빛나는 배경의 안간힘을 포착한다. 긴 밤을 뒤척이다 깨어도 여전히 적확한 단어가 떠오르지 않다가도 문득 스쳐지나는 영감을 포착했을 시인은 그것이 내가 찾는 정답이 아니라고 애써 외면을 반복하다 새벽을 맞이한다. 뒷짐을 지고 어슬렁거리다 만난 담장 너머의 무거운 침묵을 만나는 순간 고속으로 질주하던 자동차의 경적이 세월의 흐름을 추월할 때에도 시인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유 없이 어슬렁거리며 유유자적하는 산책자다. 지금은 시가 필요한 시간에는 장석주 시인이 다른 시인의 삶의 내면과 이면을 파고드는 의미의 산책자임을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

 

시는 일부러 뜯어본 주소 불명의 아름다운 편지다

 

이원 시인의 목소리들와 비슷한 맥락에서 일곱 개의 단어로 된 사전을 쓴 진은영 시인도 타성에 젖은 교과서적 정의에서 탈피, 언어적 의미를 재정의하는 짧은 사전을 보여준다.

 

, 놀라서 뒷걸음질치다

맨발로 푸른 뱀의 머리를 밟다

 

슬픔

물에 불은 나무토막, 그 위로 또 비가 내린다

 

자본주의

형형색색의 어둠 혹은

바다 밑으로 뚫린 백만 킬로의 컴컴한 터널

여길 어떻게 혼자 걸어서 지나가?

 

문학

길을 잃고 흉가에서 잠들 때

멀리서 백열전구처럼 반짝이는 개구리 울음

 

시인의 독백

어둠 속에 이 소리마저 없다면

부러진 피리로 벽을 탕탕 치면서

 

혁명

눈 감을 때만 보이는 별들의 회오리

가로등 밑에서는 투명하게 보이는 잎맥의 길

 

, 일부러 뜯어본 주소 불명의 아름다운 편지

너는 그곳에 살지 않는다

 

, 일부러 뜯어본 주소 불명의 아름다운 편지/너는 그곳에 살지 않는다.” 시는 언제나 주소 불명의 곳곳에서 날아든다. 정처도 없고 장기간 머물로 살아가는 터전도 없다. 순식간에 날아들다 기분이 내키면 잠시 머무를 뿐이다. “시인은 만물이 내는 목소리를 경청하며 동시에 이것을 세계에 중계한다”(147). 시인은 언제나 삼라만상을 경험하면서도 다른 감촉으로 상상력을 잉태한 다음 아무도 모르는 시기에 어제와 다른 문장을 아무때나 출산한다. 시인의 삶은 하루도 마음 편안하지 않다. 오히려 시인은 불편함과 불안감이 창작의 꽃을 피우는 앙스트불뷔테의 전형이다. “시인은 모든 도약에 실패한 호랑이들로, 날마다 포효를 하며 제 존재의 벽을 할퀴어댄다”(162). 자기 몸에 새겨진 상처 위에 또 다른 앎의 상처로 덧씌우며 탄생하는 쓰라림으로 애쓰며 쓰는 사람이 시인이다. 나는 이런 고통의 무한 반복이 자신이 없어 시인(詩人)이 될 수 없음을 시인(是認)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시를 읽어야 되는 이유는 시 한 편에는 우리가 살아가는 소우주가 들어 있고 자연의 위대한 법칙과 원리가 숨어 있으며,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막막한 순간에 무릎을 치는 통렬한 깨담음의 선물을 주기 때문이다. ‘새해 첫 기적을 쓴 반칠환 시인은 한 해를 정리하면서 새해를 맞이하는 우리들에게 서늘한 뜨거움을 전해준다.

 

황새는 날아서

말은 뛰어서

거북이는 걸어서

달팽이는 기어서

굼벵이는 굴렀는데

한날 한시 새해 첫날에 도착했다

 

바위는 앉은 채로 도착해 있었다

 

좋은 시는 지층을 뚫고 나온다

 

저 너머에 가장 아름다운 시와 가장 아름다운 노래와 항해해야 할 가장 넓은 바다와 추지 않은 불멸의 춤이 있다. 가장 아름답고 소중한 날들은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263). 시인에게는 비극도 어제와 다른 삶을 작곡하는 음악적 선율의 다른 이름이다. 저마다의 사유로 작별을 고하고 이별을 경험한 씁쓸한 시인은 새벽이 다가와도 잠이 오지 않는다. 창문을 두드리는 빗방울에 시름을 희석시켜 새벽별을 위한 아침을 준비하는 시인은 그럼에도 숱한 작별과 이별에 애도의 뜻을 표하지 않는다. 작별이나 이별보다 더 슬픈 결별이 기다리고 있을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럴 때마다 마음 속에 간직한 사전을 펼쳐놓고 단어들이 품은 의미를 선별하며 문장을 건축해보지만 여전히 언어는 하늘을 날며 허공에 펀치를 날릴 뿐이다. 어두워야 읽히는 시인의 문장들, 여전히 난해한 상형문자로 건축되어 있는 해독의 대상이라 스스로 좌절을 밥먹듯이 한다. 하지만 세월의 흐름이 축조한 지혜의 보고에서 며칠 밤 지새우면 세상의 언어로 옷을 갈아입을 것이라는 어설픈 희망을 가져본다. 그때는 어둠의 이불을 박차고 나와 하늘의 명령에도 불복하지 않고 구름이 안내하는 길로 총총 걸음 내딛으며 또 하루를 보낼 수 있는 용기로 두려운 불확실성 앞에 도전하는 한 줄기 싯구절을 상상해본다. 장석주 시인의 시와 시를 해설하는 언어에는 저마다 흐르는 시간을 붙잡아 머물렀던 공간의 기억을 되살려 번역해낸 체중이 실려 있다. 살갗을 파고들고 전두엽을 자극하는 전광석화의 깨달음이 스며드는 이유다.

 

좋은 시는 지층을 뚫고 나온다. 사유의 속도와 운동이 그 지층을 뚫는데, 이 속도와 운동 속에 찰나를 증언하는 번개의 빛에, 시는 있다”(11). 지층을 뚫고 나오는 글을 쓰기 위해 어제와 다른 삶의 차이를 반복하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다. 2분의 1: 인생반전을 일으키는 절반의 철학책을 내면서 저자 소개에 나의 인생이력을 짧게 써 봤다. 내가 살아온 삶만큼 읽을 수 있고 쓸 수 있다는 신념에서다. 20대는 뒷굽이 다 닳은 서글픈 신발을 신고 갈 길이 먼 다급한 마음 억누르며 그래도 분발하려는 대책없는 방랑자였다. 30대는 바람타고 쓸려간 상처 속의 신음도 찬란한 슬픔의 화음으로 재생하는 어설픈 작곡가였다. 나에게 사십은 상처입은 짐승이 내면의 아픈 기억을 어루만지다 몸부림치며 행간의 의미를 밝혀보려는 섣부른 저자였다. 나에게 오십은 새봄에 피어나는 아지랑이 타고 밀려오는 파도에게 술 한 잔 사주고 싶은 철부지 예술가다. 60에는 몸에 외로움의 촉수로 박혀 있어도 건드리면 아무데서나 한 편의 시로 승화되는 시인의 삶을 살고 싶다. 걸어가는 족적마다 다 음악이며, 달빛에 그을려진 서글픔도 그림이 되는 아슬아슬한 기적을 쓰고 싶다. 나에게 육십은 어슬렁거리다 만난 담장 너머의 무거운 침묵을 만나도 유유자적하며 삶의 순간을 만끽하는 산책자이고 싶다. 언제나 신인의 자세로 애쓰며 상상력의 텃밭에서 비상하는 글을 써야 작가로서의 본분과 작은 사명을 다할 수 있음을 장석주 시인의 지금은 시가 필요한 시간을 읽으며 깊은 깨달음의 선물을 받았다. 깊어가는 가을, 겨울 추위가 다가오기 전에 서늘한 따듯함으로 삶의 고단함을 위로받고 싶은 분들에 일독을 권하고 싶다.

 

풍파는 언제나 전진하는 자의 벗이다.

차라리 고난 속에 절반의 기쁨을 발견하라.

좋은 시는 지층을 뚫고 나온다. 사유의 속도와 운동이 그 지층을 뚫는데, 이 속도와 운동 속에 찰나를 증언하는 번개의 빛에, 시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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옷이 당신에게 말을 걸다 (DRESS TO ADDRESS)
김윤우 지음 / 페이퍼스토리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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옷이 당신에게 말을 거는 이유를 아십니까?

 

특이한 제목이 주목하게 만든다. 역시 제목은 제 목을 걸고 정해야 제 몫을 한다는 걸 이 책은 여실히 보여준다. 사람이 무슨 옷을 입을 것을 정하는 게 아니라 옷이 걸어오는 말을 잘 들어보면 내가 무슨 옷을 입어야 나다움이 드러나는지 알 수 있다는 말이다. 영어 제목도 Dress가 말을 거는(adDress)로 잡은 이유 같다.

 

숱하게 걸려 있는 옷걸이 옷들은 오늘도 주인을 기다리고 있다. 살 때는 대책 없이 사놓고 계절이 바뀌어도 거들떠보지도 않으니까 말이다. 내가 입으면 가장 자기다운 아름다움이 드러나는 옷을 심각하게 고민하지 않고 유행 따라서 또는 다른 사람의 추천이나 연예인들이 입고 다니는 옷을 따라서 사고 입어온 옷 입기 습관에 대한 혁명적 주장이 담긴 책이다.

 

흔히 옷입는 테크닉을 가르쳐주는 패션관련 책인지 알고 책을 거들떠보다 우선 목차에도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제목제 목을 거는 과정에서 생기는 책의 카피라면 목차는 목을 차도 나오지 않는 책의 핵심 줄거리 흐름이다. 1장 소제목부터 도발적이다. “내가 입은 옷, 그것이 바로 ’”라는 메시지다. 옷을 입기 전에 옷이 전하는 말을 잘 들어보고 옷은 제2의 자아이기 때문에 나를 바로 알고 나에게 어울리는 옷을 입어줘야 옷이 나를 대신해서 나를 세상에 알려준다는 메시지다

 

2장에는 자기다움을 찾은 사람은 옷 입기부터 다르다는 주장을 이어간다. 나를 치장하고 위장하는 꾸미기보다 자기다움을 더 아름답게 드러내는 가꾸기에 전력하라는 메시지와 함께 옷입기는 힘주기라기보다 힘입기라는 놀라운 주장을 연이어 펼친다. 결국 옷만 잘 입어도 없었던 힘도 생긴다는 말이다. 옷 입기가 사치가 아니라 나다움의 가치를 드높이는 노력이 되는 이유다.

 

 

3장에는 옷에 대한 까다로움이 필요한 이유를 구체적인 사례를 통해서 설명해준다. 까다로움은 고유함을 드러내는 자유로움이자 타협할 수 없는 마지노선이기에 자기다움을 완성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고수해야 되는 옷입기의 철칙이기도 하다. 까다로움은 쓸데없이 자기 주장을 펼치는 깐깐함이나 타협하기 어려운 까탈스러운 심리적 반응이 아니다. 적어도 나만의 고유한 스타일을 고수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양보할 수 없는 배수지진의 경계선이다.

 

이런 까다로운 아름다움을 찾아내고 자기 특유의 스타일을 알아보기 위해서는 스타일 검진이 필수다. 건강검진을 통해 건상상태를 알 수 있듯이 대체 불가능한 스타일링을 위해서는 스타일 검진으로 깨어나는 자기다움을 발견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스타일은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나만의 고유한 컬러이자 자기 정체성을 드러내는 이미지다. 나만의 스타일을 통해 내가 누구인지, 어떤 옷을 입으면 옷입기 센스를 살려내는, 오감을 넘어 육감적인 옷입기 스타일을 완성할 수 있는지를 22가지 감성스타일에 비추어 구체적으로 알려준다

 

 

 

7장에 가면 가장 아름다운 울림이자 이유 있는 끌림인 어울림으로 드러나는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자기만의 스타일을 살려서 옷을 입기위해 스타일 검진을 받고 나면 나에게 어울리는 옷, 자기다움을 가장 아름답게 드러내는 감각적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 어울리는 옷을 입으면 자연스럽게 자기다움이 드러나고 묘하게 사람들의 시선을 끄는 카리스마나 아우라가 자연스럽게 드러난다. 우리 모두는 저마다의 스타일로 아름답다. 타인의 아름다움은 나에게 어울리지 않는 추함으로 변질될 수도 있다. 나에게 맞는 아름다움은 오로지 경험적 미학으로 감각하는 체험적 깨달음을 통해서만이 알 수 있다는 게 9장의 주장이다.

 

10장은 이 책의 화룡점정 일보 직전에서 보여주는 아름다움의 궁극적 종착역이다. 그 종착역이 바로 사람의 품격을 드높이는 우아함이다. 아름다움의 아우라가 저절로 드러나는 미적 감각이자 자신도 모르게 공감되는 영감이며,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관능미가 바로 우아함이다. 우아한 사람은 발끝부터 머리끝까지 자신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옷으로 힘입기를 한 사람이다.

 

마지막으로 이 책은 옷입기 매뉴얼은 없다는 주장을 펼친다. 천차만별의 다른 옷도 문제지만 사람이 어떤 공간에서 무슨 목적으로 옷을 입을 것이며, 그날 분위기와 다른 사람과 만남양식에 따라서 같은 옷을 입어도 전혀 다른 감각적 경험으로 내 몸이 놀라는 경우가 많다그래서 저자는 감각적 각성 없는 충동구매는 마치 '히어로의 전투복'을 잘 못 입은것과 다름 없다고 힘주어 말하는 이유다.옷입기는 육감각을 동원하여 마치 동일한 악보도 연주자에 따라 다르게 연주하는 템포 루바토처럼 상황에 따라 얼마든지 변주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단순한 옷입기 책인 줄 알았지만 다 읽고나니 진정한 자기다움으로 가장 아름다운 우아함에 이르는 긴 자기발견의 여정에 관한 책임을 뒤늦게 알게 되었다. 사치스럽게 꾸미는 옷 입기에서 가치 있게 가꾸는 옷 입기로 에필로그를 맺으려는 저자의 의도를 알게되었다. 아무 옷이나 마구잡이로 사서 누군가의 대책 없는 조언을 따라 옷을 입었던 사람들에게 이 책은 진정한 자기발견의 출발점이자 촉발점을 알려주는 인문학적 옷입기 필독서가 아닐 수 없다.

자기다움을 찾은 사람, 옷 입기부터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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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리다와의 데이트 - 나는 애도한다, 고로 존재한다
강남순 지음 / 행성B(행성비)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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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데리다를 데리고 다닐 때마다 언제나 처음이다

데리다와의 데이트: 나는 애도한다, 고로 존재한다와 데이트 하면서

 

 

 

철학자의 주특기는 일반인이 이해하기 어렵게 쓰는 천부적인 재주다. 특히 들뢰즈를 비롯해 데리다와 같은 프랑스 철학자는 낯선 개념을 끊임없이 창조할 뿐만 아니라 문장도 난해하기 이를데 없는 경우가 많다. 들뢰즈는 아예 철학의 임무는 새로운 개념을 창조하는 일이라고 했다. 흔히 해체의 철학자라고 불리는 자크 데리다도 몇 권의 책을 사놓고 몇 번에 걸쳐 통독에 도전해도 여전히 난공불락의 문을 열어주지 않는다. 좌절감을 맛볼수록 더 알고 싶고 알아야만 된다는 강박적 의무감마저 갖고 있다. 데리다의 해체 철학을 제대로 배워보고 싶은 욕망의 물결이 강남순 교수의 데리다와의 데이트라는 책과 조우하면서 나와 무관하면서 난해한 지성으로만 생각했던 데리다가 갑자기 눈물과 기도, 연민과 환대를 품은 시인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이렇게 된 사연과 배경에는 데이트라는 메타포가 자리잡고 있다. 역시 메타포는 배움의 대포임에 틀림없다. 철학교수가 철학자를 만나 데이트한 경험을 진솔한 깨달음의 언어로 독자를 안내하고 있다. 삶에서 건져 올린 앎으로 데리다와 데이트하면서 새롭게 바라본 철학자 데리다는 우리가 흔히 관념적으로 생각하는 난해한 철학자만은 아니었다. 철학의 궁극적 임무도 우리가 살아가는 삶을 어제와 다르게 조명해보고 새로운 질문을 품고 성찰하는 삶으로 이끄는데 있음을 다시 한 번 확인시켜주기도 했다.

 

나는 애도한다. 고로 존재한다.

 

데리다와 데이트에 빠져들려는 순간 눈앞에 아른 거리는 문장이 바로 나는 애도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문장이다. 이 책의 부제목이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데카트르는 존재론적, 개체론적 인식론의 한계를 정면으로 드러내는 선언이라면 데리다의 나는 애도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선언은 인간으로 기본적으로 누군가와의 관계 속에서 애도하는 인간일 때 비로소 인간관계 속의 인간의 살아감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는 주장이다. 데카르트의 존재론적 선언을 데리다 입장에 비추어 볼 때, 함께 살아가는 공존과 관계로서의 인간적 미덕과 이상은 발견할 수 없다. 인간은 단순히 사유하는 존재를 넘어선다. 인간은 사유 주체를 넘어 공존의 주체(the subject of coexistence), 즉 타자의 아픔에 애도하는 주체(mourning subject). 애도한다는 의미는 항상 타자와의 관계를 전제하는, 단순히 사유하는 독립적 주체로서의 인간을 넘어서는 새로운 시선이다. 타인의 아픔에 무관심하지 않고 나와 너의 관계 속에서 함께--살아가려는관심과 애정의 연대가 구축되는 과정이 바로 애도하는 순간이다. 따듯한 눈길과 손길로 보살피며 깊은 애정과 관심으로 인간관계를 맺어갈 때 연민의 연대가 자연스럽게 구축되면 애도하는 인간으로 거듭난다.

 

저자는 데리다 철학을 만나는 하나의 방법으로 데리다와의 데이트라는 컨셉을 제시했다. 데이트 메타포는 난해한 데리다 철학자의 사상적 깊이를 애정과 관심을 갖고 이해하는 여정으로 부드러우면서도 한번 읽기 시작하면 빠져나오기 힘들 정도의 깊은 유혹임에 틀림없을 정도로 강력했다. 400 페이지가 넘는 책을 틈틈이 읽었지만 하루 종일 통독하는 기쁨을 선물로 받았다. 우리가 철학자를 만나는 이유는 저마다 다르다. 마찬가지로 데리다를 왜 읽어야 하는가는 질문에도 대답은 저마다 다를 것이다. 저자는 왜 데리다인가?”라는 보편적 질문보다 데리다는 나에게 왜 중요한가?”로 되물어볼 때 데리다와 만나는 색다른 가능성의 문이 열린다고 한다. 왜냐하면 모든 읽기는 읽는 사람의 문재의식이나 경험과 가치관의 차이로 똑 같은 책을 읽어도 저마다 다르게 읽히는 자서적 읽기이기 때문이다. 데리다를 왜 읽어야 되는지에 대해서는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단 한 가지 일반적인 답은 존재하지 않는다. 저마다의 이유로 데리다와 데이트를 시작하면 저마다 다른 데리다를 만날 수 있다.

 

철학자의 사유체계와 만나 나를 업데이트하는 방법은 데이트.

 

데리다는 우리가 사용하는 개념을 두 가지로 나눈다. 하나는 인용 부호가 없는 개념이고 다른 하나는 인용부호가 있는 개념이다. 인용부호가 없는 개념은 아무런 의문을 던지지 않고 평상시 사용하는 무수한 개념이고, 인용부호가 있는 개념은 평범한 개념에 대해 의문을 품고 문제의식을 더해 이전과 전혀 다른 개념으로 재탄생시킨 개념이다. “우리가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개념을 인용부호 속에 넣는 순간, 그 개념은 우리의 비판적 조명의 대상이 된다”(81). 인용부호가 있는 개념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강남순 교수가 말하는 의도적 망각(active forgetting)’을 실천할 필요가 있다. 의도적 망각이란 개념에 대한 기존 인식이나 통념을 괄호 속에 가둬놓고 기존 개념이 품고 있는 고정적 의미를 전혀 다른 각도에서 재음미해보고 재정의하려는 노력이다. 평범했던 개념이 데리다의 손길을 거치면 전혀 다른 의미를 잉태하고 있는 낯선 개념으로 탄생된다. 개념에 대한 통념이 무너지면서 색다른 신념이 싹트는 순간이다. 데리다는 물론 신념이 무조건적 신앙으로 돌변하면서 불변하는 고정적 진리로 자리잡는 것에 대해서는 비판의 칼을 여지없이 들이대고 해체를 시작한다. 개념의 재개념화가 이루어지면서 기존 개념으로 바라보던 세상과는 전혀 다른 세상으로 다가오기 시작한다.

 

낡은 생각을 품고 있는 개념을 익은 생각을 품고 있는 날 선 개념으로 재창조하려는 노력이 데리다의 모든 저작에 숨어 있다. 인용부호가 없는 개념을 끊임없이 만들어내려는 노력은 범주화(categorization)’ 또는 범주화 열병(categorization fever)’에 대한 데리다의 또 다른 문제의식과 연결되어 있다. 예를 들면 동물이라는 범주가 생기면 소, , 돼지, 참새, 고슴도치, 원숭이, 사자, 호랑이와 같은 모든 동물은 하나의 범주 속에 들어가면서 동물들이 지니고 있는 저마다의 고유한 개성은 상실되기 시작한다. 동물이라는 하나의 범주에 포함되면서 동물마다 고유한 다름과 차이는 동질화(homogenization)되고, 고정화(staticization)되며, 과대 단순화(oversimplification)되어, 동물마다 지니고 있는 사회역사적 탄생배경이나 진화과정이 비역사화(unhistoricization)된다. 동물이라는 개념을 아무런 문제의식 없이 사용하다가 데리다가 창안한 인용부호가 있는 개념에 집어넣는 순간, 전혀 다른 의미로 다가오기 시작하며, 동일한 범주 속에 갇혀 신음하던 동물에 대한 기존 개념들의 아픔이 가슴으로 느껴진다. 동물이라는 범주에 갇혀 저마다 다른 자기 정체성이 동물이라는 범주화에 가로막혀 자기상실의 아픔을 겪고 있는지 범주를 만든 사람은 모르고 살아간다.

 

존재한다는 것은 상속받는 다는 것이다.

 

데리다는 무의식적으로 사용하는 개념, 인용부호가 없는 개념인용부호가 있는 개념으로 위치지우고 그 의미를 반추하며 물어보기 시작한다. “무엇보다 데리다는 특정한 개념에 대한 우리의 인지 세계를 흔들고 뒤집는다. 그러나 그 불편함을 통하지 않고서 새로운 통찰이나 인식을 불가능하다”(60). 예를 들면 상속하면 떠오르는 단어는 유산 상속이다. 인용부호가 없었던 상속이라는 개념을 인용부호가 있는 상속개념으로 위치지우는 순간, 상속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상속 수혜자가 적극적으로 묻고 딜레마를 해결할 대안을 모색하는 과제를 수행하지 않을 수 없는 개념으로 바뀌어 다가온다. 상속은 수동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능동적으로 해석해내야 될 과제다. 니체도 사실은 없고 해석만이 존재한다고 주장했던 것처럼 내가 몸담고 있는 전통적 규범과 가치관, 문화와 제도 역시 나에게 주어진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해석하고 나의 삶에 비추어 그 의미를 매일 실천해야 되는 필생의 과업인 셈이다. 유산 상속자로 살아가는 우리는 상속받는 제도나 시스템, 문화나 사유체계에 담긴 의미를 지속적으로 되새기면서 그것이 지향하는 의미나 가치를 지금 여기서 지속적으로 성찰하는 과정을 반복할 필요가 있다.

 

데리다의 책을 통해 데리다가 건축한 사유체계로 잠입해서 들어가는 순간 데리다가 남긴 수많은 사상적 기반은 나의 삶에 비추어 재해석해서 적용하고 실천해야 할 상속으로 다가온다. 우선 데리다와의 데이트라는 책에 빠져 이 책의 저자가 경험했던 데이트를 물흐르듯 따라가면서 중요한 개념과 주장을 메모하고 나의 생각을 틈틈이 기록해두었다. 데리다 유산을 상속하는 첫 번째 과제는 데리다가 남긴 사상적 전통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수많은 개념이 어떤 문제의식을 갖고 태어났으며, 그 때 데리다가 품었던 철학적 지향성은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를 스스로에게 물어보는 것이다. 데리다 유산 상속의 첫 번째 과제가 긍정과 수용이었다면 번째 과제는 비판적 문제제기를 통해 데리다가 남긴 개념과 주장을 나의 삶에 비추어 재해석해보고 나의 언어로 내 삶을 재진술해보는 노력이다. 모든 읽기는 자신의 체험적 배경과 인식적 기반에 비추어 읽어내는 자서전적 읽기다. “내가 칸트를 읽을 때마다, 그것은 언제나 처음이다라고 고백한 데리다처럼, “내가 데리다를 읽을 때마다, 그것은 언제나 처음이다라고 고백한 강남순 교수처럼 나 역시 데리다와의 데이트를 읽을 때마다. 그것은 언제나 처음이다. 데리다와의 데이트가 매번 다른 감각적 깨달음을 다르게 주듯이, 데리다의 사유체계를 상속하는 경험도 매번 다른 생각과 느낌으로 다가오는 영원한 현재진행형 프로젝트가 될 것이다.

 

나는 태어났다가 아니라 나는 태어난다.

 

나는 태어났으면 태어난 상태로 정체성을 띠는 게 아니다. 오늘의 나는 어제의 나와 다르고 내일의 나는 오늘의 나와 다를 것이다. 온전한 나를 총체적으로 이해하는 것은 영원한 미완성이다. 앞으로도 계속 태어남을 거듭하면서 미결정성으로서의 정체성을 다르게 형성할 것이다. 고정된 나는 없다. 데리다는 고정된 의미를 품고 시공을 초월해서 진리로 통용되는 것은 없다고 한다. 데리다의 독특한 철학적 사유체계를 관통하면서 나름의 통찰력을 얻기 위해서는 몇 가지 사전에 이해할 개념이 있다. 난해한 데리다 저서를 읽어내는데 자주 등장하는 개념들이다. 그 중에 한 가지 개념이 더블 제스처(double gesture)라는 표현이다. ‘한편으로는(on the one hand)’ 시작하는 문장과 또 다른 한편으로는(on the one hand)’이라는 문장을 연결시키는 방법이다. 한편으로는 이미 태어난 나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면서도 또 다른 한편으로는 앞으로 도래할 나의 새로운 가능성에 주목하면서 나를 이해하는 노력이 필요한 이유다.

 

한편으로는 기존 교육 개념에 대한 긍정적 측면을 부각시키면서도 또 다른 한편으로는 기존 교육개념이 태생적 한계나 문제점을 드러냄으로써 제3의 교육 개념을 모색하는 물꼬를 트는 전략에 적용해도 데리다의 개념은 의미심장한 깨달음을 준다. 비슷한 맥락에서 데리다는 더블 바인드(double bind)라는 개념도 제시한다. 나를 끊임없이 이해하려는 노력도 필요하지만 한 편으로는 나를 완벽하게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필요성(necessity)과 불가능성(impossibility)의 두 축으로 사물의 본질적 속성을 이해하려는 노력이다. 교육을 통해 인간적 변화를 추구할 분명한 필요성을 탐구하는 노력과 더불어 교육을 통해 인간을 변화시키는 노력의 불가능성을 함께 생각해보자는 개념이다. 흑백논리에 익숙한 이분법적 사유의 한계를 지적하면서도 그것을 뛰어넘을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는 개념이다. 데리다는 또한 만약 그러한 것이 있다면(if such a thing exist 또는 if there is such a thing)”이라는 표현을 차용함으로써 기존의 정의방식을 따를 경우, 특정한 개념 자체가 당연히 가능한 것으로 전제하면서 정작 그 개념 자체에 대한 근원적인 물음을 생략하는 오류를 막을 수 있다고 한다.

 

텍스트 바깥에는 아무것도 없다.

 

저자는 데리다와 본격적으로 데이트를 시작하기 전에 데리다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한 일곱 가지 읽기 방식을 제안한다. 우선 알고 있다는 생각을 잠정적으로 괄호 속에 넣고 생전 처음 만나는 것처럼 새롭게 경험하는 게 중요하다고 한다. 둘째로, 데리다에 관한 해설이나 해석을 읽는 노력보다 데리다 쓴 원전의 몇 문장만이라도 반복해서 읽어야 남이 해석한 데리다의 사유에 종속되지 않는다. 셋째, 데리다 책은 페이지마다 숨겨져 있는 의미의 껍질을 깨고 들어가 천천히 음미하면서 읽는 질적 읽기를 하지 않으면 아무리 많이 읽었다고 해도 무용지물이 될 수 있다. 넷째, 부가적 읽기는 데리다 저서에서 만나는 개념과 연관된 다른 사상가의 개념을 읽으면서 해당 개념이 탄생한 문제의식이나 배경을 함께 읽어내려는 노력이다. 다섯째, 책에 나오는 구체적인 개념의 의미나 다른 개념과의 연관성을 비교하고 분석하면서 읽는 미시적 읽기와 이 책의 문제의식이 태동한 사회역사적 배경이나 전체적인 구조적 연관성을 따져서 읽어보는 거시적 읽기를 융합해야 비로소 포괄적 읽기가 가능해진다. 여섯째, 개념목록을 만들면서 책을 읽는 것이다. 다른 철학자와 마찬가지로 데리자 역시 자신이 품고 있는 문제의식을 풀어내는 고유한 개념을 새롭게 창조하는 경우가 많다. 모든 개념은 그 개념이 품고 있는 문제의식과 새로운 세계를 품고 있다. 개념을 안다는 것은 그 개념이 품고 있는 새로운 세계와 만나는 일이기도 하다. 마지막으로 아무리 책을 빠져서 읽어도 책을 다 읽은 다음 빠져나와서 그 책이 던져주는 의미와 시사점은 내 삶에 비추어 볼 때 어떤 의미가 있고, 어떻게 내 삶에 적용할지를 따져보면서 책이 말하는 대로 직접 실천하는 과정이 다를 때 비로소 읽기는 의미심장하게 다가오는 것이다.

 

이러한 읽기는 단순히 문자로만 된 텍스트를 읽는 걸 의미하지 않는다. 현실 세계에서 벌어지는 모든 사건과 사고, 사물이나 현상의 복잡한 상호작용으로 드러나는 모든 일상에서 만나는 마주침도 다 텍스트다. 읽기는 책 읽기를 넘어서 사람 읽기이고 세상 읽기다. 데리다가 텍스트 바깥에는 아무것도 없다(There is nothing outside text)”고 말한 이유다. 내가 만나는 세상이 모두 텍스트이고 텍스트를 발생시키는 세상은 또한 콘텍스트이기에 데리다는 나중에 콘텍스트 바깥에는 아무것도 없다(There is nothing outside context)”라는 말을 덧붙인다. 이런 텍스트를 해석하는 읽기는 자서전적 읽기다. 동일한 텍스트를 읽어도 그 텍스트를 읽고 이해하는 사람의 경험과 가치관과 문제의식에 따라 철저하게 개별적으로 읽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텍스트 읽기는 개별적 사건으로서의 읽기로 연결된다. 동일한 책을 지금 읽을 때와 나중에 읽을 때 그 읽기는 동일하게 다가오지 않고 매번 다르게 읽히는 개별적 사건이다. 사건은 대체불가능하고 반복할 수 없는 고유한 개별적 경험이기 때문이다. 텍스트는 인내심을 갖고 끈질기게 물고 늘어지지 정밀하게 읽지 않으면 텍스트가 함의하고 있는 의미의 껍질을 깨고 속내를 보여주지 않는다. 이런 모든 읽기는 해체적 읽기로 귀결된다. 읽기를 통해서 발견한 의미는 언제나 다르게 다가오고 지금 여기서 그 의미를 고정된 형태로 결정하지 않고 시간적으로 끊임없이 연기시켜 놓아야 한다. 해체적 읽기는 책으로 만나는 모든 의미는 고정된 명사가 아니라 부단히 의미변화가 일어나는 동사로서의 비결정성을 띤다는 전제로 이루어지는 읽기다.

 

해체는 방법이 아니라 사건이다. 해체는 키스다.

 

이 책을 읽으면서 크게 깨달은 것 중의 하나가 바로 데리다의 해체(deconstruction) 개념이다. 내가 그동안 이해했던 창조적 파괴나 탈구성적 해체와 같은 개념과는 근본적으로 차이가 있는 개념이었다. 해체 개념에 대한 데리다의 근본적인 문제의식은 의미구조가 고정되는 것, 보편적인 것으로 되는 것, 또한 그 의미구조가 탈역사적(ahistorical)이라는 전제를 근원적으로 비판”(197)하는 데 있다. 해체에 대한 또 다른 오해는 해체를 방법이나 어떤 이론 또는 주의(ism)’, 예를 들면 해체주의로 해석하는 것이다. 해체를 이렇게 해석하는 순간 고정된 도식이나 결정된 논리체계를 따라야 한다는 암묵적 전제를 갖게 된다. 해체는 사건이다. 사건은 두 가지 독특한 특성을 담고 있다. 첫째는 대체 불가능성(irreplaceability)이고 둘째는 반복 불가능성(unrepeatability)이다. 해체를 하나의 방법이나 이론으로 간주하면 해체 작업을 할 때마다 방법과 이론이 처방해주는 절차나 순서를 따라가면 된다는 전제나 가정을 담보하고 있다. 하지만 사건으로서의 해체는 매번 새롭게 전개되기 때문에 지금 이 순간의 해체를 다른 그 무엇으로도 대체가 불가능하며, 다른 어디에서도 반복해서 추진할 수 없다.

 

사건으로서의 해체는 연인과의 키스에 비유할 수 있다. 연인과 마주하는 키스는 오늘과 내일이 같을 수 없다. 오늘 한 키스의 감각적 느낌은 절대로 반복될 수 없고 대체할 수 없다. 오늘 한 키스는 영원히 반복될 수 없는 개별적 사건이다. “진정한 키스란 서로의 존재를 함께 나누고자하는 사랑, 갈망이 없으면 불가능하다. 언제나 (more)’가 있음을 생각하고, 언제나 더 있음(ever more-ness)’을 갈구하고 추구하는 것, 결코 끝나지 않는 사건이 바로 해체인 것이다”(202). 오늘 연인과 나눴던 달콤한 키스를 돌이켜 생각하면서도 내일은 오늘보다 더 멋진 키스를 상상하는 경험, 진정한 키스 경험은 아직 도래하지 않은 꿈이라고 미뤄두는 기다림과 그리움에 키스는 늘 어제와 다르게 태어나는 사건이다.

 

데리다의 해체는 아직 오지 않은 그 무엇, ‘도래하는 것을 기다리고 긍정하는 사건이다”(222). 해체는 완벽하게 끝나는 결과나 성과로 판단할 수 있는 일기가 아니다. 해체는 영원히 마무리 할 수 없는 미완성이다. “사건으로서의 해체는 언제나 다가올 세계, 또한 보다 더(more)를 추구하고 갈망하는 불가능성에의 열정의 촛불을 켜는 소중한 생명 긍정의 초대장이다”(222). 의미의 고정성이나 결정성을 인정하지 않고 끊임없이 시공간을 열어놓고 탐구하는 열정의 근간에는 사랑이 매개되어 있다. 데리다에게 모든 개념은 고정된 의미를 품고 잠자는 명사가 아니다. 시공간을 바꿔가면서 끊임없이 재생산되는 동사다. “해체란 언제나 이미 일어나고 있는 사건이며...이제 충분하다가 아니라, 언제나 (more)’에 대한 갈망을 품고 있다. 해체는 허무주의적 파괴가 아니라, 고도의 긍정의 제스처”(382). 여기서 긍정의 의미도 기존의 의견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거나 인정(positive)하는 노력 또는 긍정과 부정의 이분법적 분리를 통한 긍정의 의미를 넘어선다. 데리다 말하는 긍정은 다름과 차이를 차별하지 않고 끌어안고 보듬으면서 제3의 대안을 모색한다는 어퍼메이션(affirmation)이라고 할 수 있다.

 

해체라는 개념은 삭제 아래(under erasure)’라는 개념과 만나면서 더욱 구체적인 실천성을 띤다. 삭제 아래는 우리에게 익숙한 개념에 붙박혀 있는 고정관념이나 틀에 박힌 관습적 사유를 뒤흔들어 고정성을 띠고 오랫동안 우리들의 사고를 지배해온 통념을 깨부수고 이전과 다르게 의미를 부여하는 활동이다. 예를 들어 종교를 삭제 아래 두면(삭제 아래 종교) 기존 종교에 대한 통념에서 벗어나 새로운 개념으로 탈고정화과정을 거친다. 삭제 아래 종교가 자리잡는 순간 데리다가 말하는 인용부호 없는기존 종교 개념에서 인용부호가 있는종교 개념으로 새롭게 부각된다. 삭제 아래 자리에 익숙한 개념이 들어가는 순간, 고정된 의미로 사용되던 개념은 끊임없이 다른 의미로 거듭나면서 언제나 이미미결정성의 개념, 도래할 개념으로 부각될 뿐이다. 삭제 아래라는 개념은 데리다의 또 다른 개념, X 없는 X라는 개념과 연결시켜 생각해보면 훨씬 이해가 빠를 것이다. 예를 들어 교육 없는 교육이라고 한다면 첫 번째 나오는 교육은 인용부호가 없는 전통적인 의미의 교육이고, 두 번째 나오는 교육은 삭제 아래라는 개념에 들어가 새로운 교육적 개념으로 재개념화되면서 인용부호가 있는교육으로 거듭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교육 없는 교육에 익숙하게 자리잡은 모든 개념을 집어넣고 해체하면서 고정된 명사로서의 의미를 끊임없이 다르게 탐구하고 시간적으로 연기해놓는 차연의 활동을 반복할 때, 교육에 대한 해체는 어제와 다른 차이를 반복하면서 부단히 일어나는 사건이 되는 셈이다.

 

차연(differAnce)은 사전에 대한 저항이다.

 

사전에 정의된 의미는 고정된 형태로 사전 속에 죽어있다. 아무 때나 다시 들여다봐도 개념에 대한 정의는 늘 불변하는 상태로 잠자고 있다. 차연(differAnce)은 공간적으로 다르고(differ) 시간으로 연기(defer)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개념이든 현상이든 그 의미를 지금 여기서 알아보는 것과 다른 곳에서 그 의미를 재고해보는 것은 언제나 같을 수 없다. 늘 다른 의미로 다시 태어난다. 시간적으로 오늘 특정 단어의 의미를 규정한다고 내일도 그 의미 상태로 고정될 수 없다. 시간이 지나면서 모든 개념은 어제와 다르게 오늘 새로운 모습으로 내 앞에 나타난다. 차연으로 그래서 개념적 차이점을 오늘 여기서 규정하지 말고 연기해놓자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온전한 의미를 지금 여기서 완벽하게 규정할 수 없다. 데리다가 의미는 언제나 도래한다고 주장하는 이유다. 데리다 이름처럼 사전 속에서 잠자고 있는 고정된 개념적 의미를 여기저기로 데리고 다니면서 의미상의 차이를 끊임없이 탐구하는 지극한 사랑과 열정이야말로 차연이 내포하는 가장 소중한 함의다. 내가 사람이나 대상을 사랑하지 않으면 호기심과 질문이 없어지고 어제와 다른 의미탐구 여행을 시작하지 않는다. 비록 어떤 개념이나 현상의 의미를 영원히 알 수 없는 불가능한 영역이라고 할지라도 미지의 세계에 대한 탐구를 멈추지 않고 계속하는 이유는 알고 싶다는 호기심을 넘어 탐구 자체를 사랑하고 식지 않는 열정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데리다는 자서전적 읽기를 강조하면서 누군가 자서전을 써도 온전히 자신을 다 담아낼 수 없다고 한다. 나에 대한 온전한 이해도 끊임없이 달라지기 때문이고, 시간적으로 연기되기 때문이다. 차연은 의미의 비결정성을 내포한다. 나에 대한 의미는 영원히 결정될 수 없다. 공간적으로 다른 의미의 결정체로 끊임없이 변신을 거듭하면서 다가오고, 시간적으로 그 의미의 열린 가능성을 열어놓고 무한정 지연시켜 놔야 하기 때문이다. 데리다의 비결정성은 결정할 수 없기 때문에 여기까지의 노력을 끝으로 개념적 의미를 더 이상 탐구하지 않겠다는 무관심이나 게으른 포기 선언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비결정성은 불가능한 것에의 열정’, 그리고 정의를 향한 갈망이다”(356). 데리다에게 비결정성은 엄밀히 말하면 결정할 수 없는 것에 대한 겸허한 인정과 수용이자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가능한 앎의 세계에 도달하려는 치열한 열정이다 데리다가 신앙을 무엇인지 내가 알지 못하는 그 어떤 것에 대한 열정(371)”이라고 해석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미지의 세계를 알고 싶은 열정으로서의 신앙은 새로운 세계, 불가능성의 세계, 도래할 세계(the world to-come)의 희망과 약속을 동시에 담고 있다”(375

 

데리다의 차연 개념에 비추어 전문가를 새로운 의미로 탄생시킨 개념을 브리꼴레르라는 책에 소개한 적이 있다. 전문가와 전문사 사이에 존재하는 차이를 존중해주고 내가 갖고 있지 않은 다른 사람의 전문성을 나의 전문성과 융합, 새로운 지식을 끊임없이 창조하는 사이 전문가(homo differAnce). 생각하는 인간(homo sapiens)처럼 전문가 사에 존재하는 차이를 끊임없이 탐구하는 사이 전문가는 데리다의 차연(differAnce) 개념을 호모와 융합, 새롭게 창조한 신조어다. 한 분야만 깊이 파다가 기피 대상이 되거나, 자기가 판 우물에 매몰되는 좌정관천의 어리석음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나의 전문분야와 다른 분야에서 깊이 파는 전문가와 자주 만나서 소통하면서 내가 모르는 세계를 배우려는 겸손한 자세가 필요하다. 전문가에 대한 정의도 한 분야를 깊이 파는 사람이라고 정의하는 순간, 새로운 전문가, 아직 만나보지 못한 전문가, 미래에 도래할 전문가의 의미를 포착할 수 없다. 과거에 내가 만난 전문가, 오늘 만나는 전문가의 이미지로 전문가의 의미를 온전히 파악할 수 없다. “온전한 의미란, 만약 그것이 존재한다면, 언제나 도래하는 것이다”(213). 가능성의 문을 활짝 열어놓고 지금까지의 전문가와는 전혀 다른 전문가를 만나는 미래가 있다는 사실에 심장이 뛰는 이유는 무엇일까.

 

우리는 환대가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나는 환대한다. 고로 존재한다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환대는 데리다 사상체계를 구축하는 가장 핵심적인 개념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데리다는 갑자기 왜 언어는 환대라고 했을까. 국제적으로 통용되는 언어는 영어다. 한국에서 한국말로 다른 사람을 초대하면 나는 주인으로서 행세하지만 영어가 모국어인 미국에 가면 나는 손님을 넘어 주변인으로 전락한다. 모국어가 통용되는 곳에서 나는 주인으로 손님을 환대할 수 있지만 모국어가 통용되지 않는 다른 나라고 가면 나는 완전히 주변인으로 전락하면서 환대 밖에서 방황할 수밖에 없다. 내가 잘 할 수 있는 모국어로 손님을 초대하는 사람 입장에서 환대를 베푼다고 해도 그 환대에 담긴 개인적 차원의 배려는 물론 국가적 차원에서 베푸는 정치적 의미상의 미묘한 차이를 다 알 수 없다. 데리다가 우리는 환대가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234)”고 한 이유다. 환대는 환대가 이루어지는 컨텍스트에서 생각지도 못한 경험이 부각되는 텍스트이기 때문이다. 환대를 알지 못하는 이유는 환대가 언제나 사건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진정한 환대란 언제나 아직 아닌, 우리의 이해력 너머에 있는 도래할 환대(hospitality to-come)’의 사건이다”(240).

 

이 말은 환대에만 적용되지 않는다. 사랑, 열정, 행복, 도전, 신뢰를 비롯 우리가 사용하는 거의 모든 추상명사에 해당된다. “사랑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도 마찬가지다. 사랑은 인지 세계 내부에서 일어난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인식행위가 아니다. 저마다의 애정과 관심의 연대망에서 천차만별의 다른 상황에서 어제와 다른 사랑을 구체적으로 경험하는 사건이기 때문이다. 사건은 반복 불가능성과 대체 불가능성을 함의하고 있다. 사랑은 언제나 우리의 이해력 너머에 있는 도래할 사건이기 때문이다. 지금까지의 사랑과 차원이 다른 또 다른 사건이 언제 어디서 일어날지 예측할 수도 없고 어제의 사랑과 똑같은 사랑의 경험을 감각적으로 지각할 수 없다. “환대란 언제나 특정한 정황 속에서 논의되어야 한다”(244).

 

데리다의 문제의식과 마찬가지로 나에게 교육은 아직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교육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도 교육은 이미 결정된 이상적인 상태의 정의가 있다는 가정을 내포한 질문이다. 이 질문을 데리다는 교육은 나에게 어떤 의미인가?”라는 방식으로 되물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교육도 인지구조의 변화나 사고방식의 변화처럼 머릿속에서 일어나는 관념적이고 추상적인 개념체계의 변화과정을 지칭하는 말이 아니다. 교육은 언제나 특정한 정황 속에서 일어나기 때문에 교육장면에 참여하는 가르치고 배우는 사람은 모두 저마다의 고유한 1인칭 시점에서 경험하는 자서전적 깨달음을 얻는다. 교육적 경험은 일반화시킬 수 없는 개별적이고 단독적인 경험이다. 그 경험은 심지어 언어로 온전히 번역해서 표현할 수 없는 독특한 깨달음이자 심리적이고 신체적인 각성체험이다.

 

엘리베이터가 없는 3층 건물은 비장애인에게는 걸어서 올라갈 수 있기 때문에 적대적이지 않지만 장애인에게는 걸어서 올라갈 수 없는 적대적인 건물이다. 이런 점에 주목한 데리다는 적대와 환대를 이분법적으로 구분 할 수 없는 현실적인 문제의식을 품고 적환대(hospitality+hostility=hostipitality)라는 개념을 창안한다. “존재하기 전에 주차료를 지불하십시오(Please pay your parking fee before existing).” 이 말은 나가다(exit)라는 말의 ‘s’가 들어가서 존재하다(exist)’로 잘 못 표기된 것이다. 그리고 사진 위에는 나는 지불한다. 고로 존재한다(I pay. Therefore I am)”이라고 누군가 덧붙여 쓴 글귀가 붙어 있었다는 재미난 사례가 이 책에 나온다. 주차료를 지불하면 주차기계에게 환대를 받지만 지불 능력이 없으면 영원히 적으로 취급, 차를 밖으로 끌고 나갈 수 없게 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환대는 손님이 지불능력이 있을 때 주인에게 대접받을 수 있다는 전제가 깔려 있다. 주인이 원하는 만큼의 금전적 지불능력이 있으면 손님은 환대를 받지만 주인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할 때 손님은 환대에서 바로 적대적인 관계로 전락한다. 환대와 적대는 사전에 정해진 관계가 아니라 순간순간 바뀔 수 있는 비결정적 개념이다.

 

살아감이란 언제나 함께 살아감’, 나아가 함께--살아감이다.

 

데리다의 철학적 문제의식이 지향하는 곳은 어떻게 함께--살아갈 것인가라는 질문에 녹아들어 있다. 데리다가 말하는 함께 살아감은 인식과 관심을 같이하는 공동체 구성원이 끼리 끼리 어울려 살아감을 의미하지 않는다. 데리다가 진정으로 의도하는 함께 살아감은 나와 인식과 관심은 물론 종교, 인종, 가치관이 다름에도 불구하고 상대의 아픔에 기꺼이 애도하고 연민하는 마음으로 연대를 이루어 살아가는 것이다. 동질성을 전제로 엮여 있는 공동체의 틀을 벗어나 다름을 차별하지 않고 존중하며 환대하며 서로의 아픔에 연민의 정을 품고 애도하는 더불어 살아감이 함께 살아감의 현실적 의미다. 함께 살아감은 더 이상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인식의 문제가 아니라 구체적인 삶의 현장에서 우리가 매일 매일 직면하는 난국을 돌파하고 서로가 손잡고 일궈 나가는 실천의 문제다.

 

함께 살아감의 근본적인 동력은 연민(compassion)에서 나온다. 연민에 해당하는 영어, compassion을 긍휼감으로 번역하고 강남순 교수가 번역한 동정(sympathy), 감정이입(empathy)을 각각 공감과 위로로 번역하는 사람도 있다. 어떤 말로 번역되든 sympathy는 아픈 감정을 공유하기는 하지만 머리로 이해하고 상대의 아픔을 치유하기 위한 구체적인 행동을 취하지는 않는다. 누군가 돌아가셨을 때 조의금을 내는 것으로 상대의 슬픈 심정을 이해하려는 노력이 동정이다. 동정심이 발현되는 근간에는 동정 받는 너는 동정심을 베푸는 나에 비해 위계적으로 바닥에 놓여 있다는 심리적 우월주의가 숨어 있다. 이에 비해 감정이입이라고 번역되는 empathy는 동정처럼 동정심으로 심리적 위로를 받는 시혜자와 수혜자의 위계적 관계를 상정하지 않는다. 타인의 아픔을 나의 아픔처럼 끌어안고 체중이 실린 언어로 상대와 함께 살아가려는 마음을 온몸으로 보여준다. 상대의 감정 속으로 나의 감정도 이입되어 상대의 아픔으로 머리로 계산하지 않고 가슴으로 받아들이려는 안간힘이 바로 감정이입이다.

 

이에 반해 연민은 강남순 교수에 따르면 타자의 고통에 대면해서 고통을 제기한 원인을 제거하기 위한 적극적인 행동을 감행하면서 함께 살아감을 구체적으로 실천하는 애쓰기다. 연민은 동정과 감정이입과는 다르게 감정적 반응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행동으로 이어지게 하는 힘”(276)이 있다는 점에서 전자의 두 가지 개념과 확연하게 구분된다. 연민은 타자의 고통을 인지적으로 이해하는 노력을 넘어서 상대의 고통이 나의 고통임을 몸으로 받아들이고 그 고통을 치유하기 위해 기꺼이 실천으로 옮기려는 비판적 행동주의(critical activism. 함께 살아가면서 발휘되는 연민은 관념적이고 인식론적인 문제가 아니라 구체적인 삶의 현장에서 매일 매일 결단을 내리고 행동으로 옮기는 실천의 문제다. 연민의 정을 나누면서 이루어지는 함께--살아감은 나와 전혀 다른 사람은 물론, 내가 아직 모르는 사람, 이미 과거로 돌아간 사람까지도 포함한다. 이런 사람과 잘 살아간다는 문제는 현재의 자신은 물론 과거의 자신과 다가오는 미래의 자신과도 함께 살아간다는 의미다. 생각보다 다양한 어려움과 직면할 수밖에 없다는 불확실성을 내포한다.

 

애도는 기억이자 책임성이다

 

“‘함께 살아감은 함께 고통함의 의미를 지닌 연민’, 그리고 상실에 대한 아픔을 드러내는 애도와 분리할 수 없다. 너와 나의 관계가 형성되자마자 애도는 시작된다”(288). 애도는 세상은 나 혼자 살아간다고 생각하는 사람에는 필요없는 인간적 미덕이다. 애도는 나는 누군가와 함께 살아가는 관계론적 존재임을 자각할 때 비로소 다가오는 숭고한 윤리적 결단이자 정치적 실천이다. 인간으로 살아간다는 의미는 나와 더불어 이 세상을 살아가는 다른 사람의 아픔에 기꺼이 감응하고 책임감을 지닌다는 의미다. 책임감을 의미하는 영어 단어, ‘responsibility’도 타자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 반응(response)’하는 능력(ability)’을 의미한다. 책임감 있는 사람은 다른 사람의 미묘한 움직임도 한 눈 팔지 않고 깊은 관심을 갖고 바라보기 시작한다. 다른 사람이 보여주는 작은 행동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 순간 내가 어떤 반응을 보여주는 것이 상대를 진정한 마음으로 보살피는 행동인지를 심사숙고하고 주어진 상황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대안을 모색한다. 데리다가 애도는 먼저 떠난 사람을 기억하고 동시에 그 떠난 사람이 못다 한 삶까지 살아내는 책임성을 의미한다(288)”고 정의한 이유를 주목해보면 우리가 흔히 상식적으로 생각하는 애도 개념과 근본적으로 다른 의미를 내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데리다에게 애도는 나보다 먼저 살아간 사람의 치열했던 삶의 족적으로 더듬어 알아보고, 그들이 이루고 싶었던 꿈이 무엇인지, 왜 그런 꿈을 이루지 못했는지를 주어진 사회역사적 역학관계 속에서 파악해보려는 노력으로 시작된다. 그들이 못다 한 삶까지 끌어안고 지금보다 더 멋진 세계, 앞으로 도래할 세상을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구체적인 책임과 역할을 고뇌하고 결단하며 실천하는 과정이 바로 데리다가 말하는 애도의 진정한 의미다. 함께--살아감은 살아감을 넘어 살아남음에 담긴 비장한 각오와 책임감을 함의한다. 살아남은 사람은 먼저 살아간 사람의 족적을 더듬어 반추해보고 그들이 살고자 했던 세계를 함께 만들어가기 위해 치열하게 살아가려는 살아 남은자의 사투이자 안간힘이다. 이런 점에서 애도는 지금 이 순간 함께 잘 살아가기 위해 사투를 벌이고 있는 모든 사람들을 향한 사랑의 표현이자 지금보다 더 나은 삶을 살아가기 위한 희망과 용기의 연대망을 구축하려는 인간 존재의 실존적 노력이 아닐 수 없다. 이런 인간의 실존적 노력을 포기하고 타자의 고통에 무관심하거나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는 수동적인 자세를 데리다는 인류에 대한 범죄의 시작이라고 강조한다.

 

나는 데리다와의 데이트를 읽을 때마다 언제나 처음이다

 

우리가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데리다는 난해한 포스트모더니스트를 지향하는 철학자라기보다 환대의 예술가이며 시인”(263)이다. 데리다는 자신을 기도와 눈물의 사람(person of prayers and tears)(356) 주장한 바 있다. 절대적 확실성과 진리를 구원하기 위해 행하는 평범한 종교인의 기도와는 다르게 데리다의 기도는 여타의 확실성을 정지시켜놓고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는 도래할 신(a god to come), 절대적으로 알려져 있지 않은 비결정적 수신자의 이름”(359)에게 던지는 불가능성에의 열정이며 비결정성에의 열정’(359)이다.

 

반복 불가능하고 대체 불가능한 사건으로서의 해체를 평생 동안 추구해온 데리다는 관념적이고 추상적인 철학자라기보다 사랑과 열정의 예술가이자 언제나 세상을 낯선 시선으로 바라보며 새로운 개념으로 다르게 바라보려는 시인에 가깝다. 이런 점에서 데리다는 주디스 버틀러가 말한 새로운 선생이며, 마이클 나스가 표현한 뛰어난 선생이다. 데리다의 시선(gaze)’은 언제나 당연함을 부정하는 낯선 시선이며, 고정된 의미를 무너뜨리고 색다른 의미체계로 건축하는 날선 시선이기도 하다. 그렇다고 데리다의 시선은 세상을 낯설고 날 선 눈으로 바라보는 냉정한 지성주의자의 관점을 넘어선다. 언제나 를 바라보는 나의 시선를 바라보는 너의 시선이 맞닿으면서 함께 살아가려는 연민의 연대를 꿈꾸는 기도와 눈물의 시선이다. 우리가 해야 될 과제는 데리다가 남긴 유산을 상속받는 것이다. 데리다가 말한 대로 상속받는 것은 가만히 앉아서 수동적으로 얻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데리다가 남긴 사상적 족적으로 더듬어가면서 그것이 우리에게 던져준 의미가 무엇인지를 지금 여기서 재해석함은 물론 데리다가 꿈꾸었던 도래할 미래를 함께 건설하기 위해 분투노력하는 지상과제를 몸을 던져 수행하는 것이다. 데리다 강조했던 비결정성, 차연, 해체라는 개념에 비추어 보아도 그 누구도 데리다의 사상적 기반을 완벽하게 해석하는 완결성을 이룰 수 없다. 데리다가 남긴 유산으로서의 사유체계는 부단히 해체하지만 끝을 알 수 없는 비결정을 향한 열정의 대상이며, 영원히 온전한 앎의 총체성으로 정리해낼 수 없는 언제나 이미 도래할 유산(legacy to com)이다.

 

나는 데리다를 읽을 때마다, 그것은 언제나 처음이다라는 강남순 교수의 고백처럼 같은 맥락에서 나는 데리다와의 데이트를 읽을 때마다, 그것은 언제나 처음이다.” 다음에 다시 데리다와 데이트할 때는 이전과 다르게 설레는 마음으로 다시 만날 것을 생각하니 벌써부터 그리움이 스며들기 시작한다.

 

나는 데리다를 사랑합니다.

그리고 당신이 어디에 있든지 당신을 향해 미소 지을 것입니다.“

해체는 사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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