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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리다와의 데이트 - 나는 애도한다, 고로 존재한다
강남순 지음 / 행성B(행성비) / 2022년 8월
평점 :
나는 ‘데리다’를 데리고 다닐 때마다 언제나 처음이다
《데리다와의 데이트: 나는 애도한다, 고로 존재한다》와 데이트 하면서
철학자의 주특기는 일반인이 이해하기 어렵게 쓰는 천부적인 재주다. 특히 들뢰즈를 비롯해 데리다와 같은 프랑스 철학자는 낯선 개념을 끊임없이 창조할 뿐만 아니라 문장도 난해하기 이를데 없는 경우가 많다. 들뢰즈는 아예 철학의 임무는 새로운 개념을 창조하는 일이라고 했다. 흔히 해체의 철학자라고 불리는 자크 데리다도 몇 권의 책을 사놓고 몇 번에 걸쳐 통독에 도전해도 여전히 난공불락의 문을 열어주지 않는다. 좌절감을 맛볼수록 더 알고 싶고 알아야만 된다는 강박적 의무감마저 갖고 있다. 데리다의 해체 철학을 제대로 배워보고 싶은 욕망의 물결이 강남순 교수의 《데리다와의 데이트》라는 책과 조우하면서 나와 무관하면서 난해한 지성으로만 생각했던 데리다가 갑자기 눈물과 기도, 연민과 환대를 품은 시인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이렇게 된 사연과 배경에는 데이트라는 메타포가 자리잡고 있다. 역시 메타포는 배움의 대포임에 틀림없다. 철학교수가 철학자를 만나 데이트한 경험을 진솔한 깨달음의 언어로 독자를 안내하고 있다. 삶에서 건져 올린 앎으로 데리다와 데이트하면서 새롭게 바라본 철학자 데리다는 우리가 흔히 관념적으로 생각하는 난해한 철학자만은 아니었다. 철학의 궁극적 임무도 우리가 살아가는 삶을 어제와 다르게 조명해보고 새로운 질문을 품고 성찰하는 삶으로 이끄는데 있음을 다시 한 번 확인시켜주기도 했다.
나는 애도한다. 고로 존재한다.
데리다와 데이트에 빠져들려는 순간 눈앞에 아른 거리는 문장이 바로 “나는 애도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문장이다. 이 책의 부제목이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데카트르는 존재론적, 개체론적 인식론의 한계를 정면으로 드러내는 선언이라면 데리다의 “나는 애도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선언은 인간으로 기본적으로 누군가와의 관계 속에서 애도하는 인간일 때 비로소 인간관계 속의 인간의 살아감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는 주장이다. 데카르트의 존재론적 선언을 데리다 입장에 비추어 볼 때, 함께 살아가는 공존과 관계로서의 인간적 미덕과 이상은 발견할 수 없다. 인간은 단순히 사유하는 존재를 넘어선다. 인간은 사유 주체를 넘어 공존의 주체(the subject of coexistence), 즉 타자의 아픔에 애도하는 주체(mourning subject)다. 애도한다는 의미는 항상 타자와의 관계를 전제하는, 단순히 사유하는 독립적 주체로서의 인간을 넘어서는 새로운 시선이다. 타인의 아픔에 무관심하지 않고 나와 너의 관계 속에서 ‘함께-잘-살아가려는’ 관심과 애정의 연대가 구축되는 과정이 바로 애도하는 순간이다. 따듯한 눈길과 손길로 보살피며 깊은 애정과 관심으로 인간관계를 맺어갈 때 연민의 연대가 자연스럽게 구축되면 애도하는 인간으로 거듭난다.
저자는 데리다 철학을 만나는 하나의 방법으로 《데리다와의 데이트》라는 컨셉을 제시했다. 데이트 메타포는 난해한 데리다 철학자의 사상적 깊이를 애정과 관심을 갖고 이해하는 여정으로 부드러우면서도 한번 읽기 시작하면 빠져나오기 힘들 정도의 깊은 유혹임에 틀림없을 정도로 강력했다. 400 페이지가 넘는 책을 틈틈이 읽었지만 하루 종일 통독하는 기쁨을 선물로 받았다. 우리가 철학자를 만나는 이유는 저마다 다르다. 마찬가지로 데리다를 왜 읽어야 하는가는 질문에도 대답은 저마다 다를 것이다. 저자는 “왜 데리다인가?”라는 보편적 질문보다 “데리다는 나에게 왜 중요한가?”로 되물어볼 때 데리다와 만나는 색다른 가능성의 문이 열린다고 한다. 왜냐하면 모든 읽기는 읽는 사람의 문재의식이나 경험과 가치관의 차이로 똑 같은 책을 읽어도 저마다 다르게 읽히는 자서적 읽기이기 때문이다. 데리다를 왜 읽어야 되는지에 대해서는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단 한 가지 일반적인 답은 존재하지 않는다. 저마다의 이유로 데리다와 데이트를 시작하면 저마다 다른 데리다를 만날 수 있다.
철학자의 사유체계와 만나 나를 ‘업데이트’하는 방법은 ‘데이트’다.
데리다는 우리가 사용하는 개념을 두 가지로 나눈다. 하나는 ‘인용 부호가 없는 개념’이고 다른 하나는 ‘인용부호가 있는 개념’이다. 인용부호가 없는 개념은 아무런 의문을 던지지 않고 평상시 사용하는 무수한 개념이고, 인용부호가 있는 개념은 평범한 개념에 대해 의문을 품고 문제의식을 더해 이전과 전혀 다른 개념으로 재탄생시킨 개념이다. “우리가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개념을 인용부호 속에 넣는 순간, 그 개념은 우리의 비판적 조명의 대상이 된다”(81쪽). 인용부호가 있는 개념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강남순 교수가 말하는 ‘의도적 망각(active forgetting)’을 실천할 필요가 있다. 의도적 망각이란 개념에 대한 기존 인식이나 통념을 괄호 속에 가둬놓고 기존 개념이 품고 있는 고정적 의미를 전혀 다른 각도에서 재음미해보고 재정의하려는 노력이다. 평범했던 개념이 데리다의 손길을 거치면 전혀 다른 의미를 잉태하고 있는 낯선 개념으로 탄생된다. 개념에 대한 통념이 무너지면서 색다른 신념이 싹트는 순간이다. 데리다는 물론 신념이 무조건적 신앙으로 돌변하면서 불변하는 고정적 진리로 자리잡는 것에 대해서는 비판의 칼을 여지없이 들이대고 해체를 시작한다. 개념의 재개념화가 이루어지면서 기존 개념으로 바라보던 세상과는 전혀 다른 세상으로 다가오기 시작한다.
낡은 생각을 품고 있는 개념을 익은 생각을 품고 있는 날 선 개념으로 재창조하려는 노력이 데리다의 모든 저작에 숨어 있다. 인용부호가 없는 개념을 끊임없이 만들어내려는 노력은 ‘범주화(categorization)’ 또는 ‘범주화 열병(categorization fever)’에 대한 데리다의 또 다른 문제의식과 연결되어 있다. 예를 들면 동물이라는 범주가 생기면 소, 닭, 돼지, 참새, 고슴도치, 원숭이, 사자, 호랑이와 같은 모든 동물은 하나의 범주 속에 들어가면서 동물들이 지니고 있는 저마다의 고유한 개성은 상실되기 시작한다. 동물이라는 하나의 범주에 포함되면서 동물마다 고유한 다름과 차이는 동질화(homogenization)되고, 고정화(staticization)되며, 과대 단순화(oversimplification)되어, 동물마다 지니고 있는 사회역사적 탄생배경이나 진화과정이 비역사화(unhistoricization)된다. 동물이라는 개념을 아무런 문제의식 없이 사용하다가 데리다가 창안한 인용부호가 있는 개념에 집어넣는 순간, 전혀 다른 의미로 다가오기 시작하며, 동일한 범주 속에 갇혀 신음하던 동물에 대한 기존 개념들의 아픔이 가슴으로 느껴진다. 동물이라는 범주에 갇혀 저마다 다른 자기 정체성이 동물이라는 범주화에 가로막혀 자기상실의 아픔을 겪고 있는지 범주를 만든 사람은 모르고 살아간다.
존재한다는 것은 상속받는 다는 것이다.
데리다는 무의식적으로 사용하는 개념, 즉 ‘인용부호가 없는 개념’을 ‘인용부호가 있는 개념’으로 위치지우고 그 의미를 반추하며 물어보기 시작한다. “무엇보다 데리다는 특정한 개념에 대한 우리의 인지 세계를 흔들고 뒤집는다. 그러나 그 불편함을 통하지 않고서 새로운 통찰이나 인식을 불가능하다”(60쪽). 예를 들면 상속하면 떠오르는 단어는 유산 상속이다. 인용부호가 없었던 ‘상속’이라는 개념을 인용부호가 있는 ‘상속’ 개념으로 위치지우는 순간, 상속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상속 수혜자가 적극적으로 묻고 딜레마를 해결할 대안을 모색하는 과제를 수행하지 않을 수 없는 개념으로 바뀌어 다가온다. 상속은 수동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능동적으로 해석해내야 될 과제다. 니체도 “사실은 없고 해석만이 존재한다”고 주장했던 것처럼 내가 몸담고 있는 전통적 규범과 가치관, 문화와 제도 역시 나에게 주어진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해석하고 나의 삶에 비추어 그 의미를 매일 실천해야 되는 필생의 과업인 셈이다. 유산 상속자로 살아가는 우리는 상속받는 제도나 시스템, 문화나 사유체계에 담긴 의미를 지속적으로 되새기면서 그것이 지향하는 의미나 가치를 지금 여기서 지속적으로 성찰하는 과정을 반복할 필요가 있다.
데리다의 책을 통해 데리다가 건축한 사유체계로 잠입해서 들어가는 순간 데리다가 남긴 수많은 사상적 기반은 나의 삶에 비추어 재해석해서 적용하고 실천해야 할 상속으로 다가온다. 우선 데리다와의 데이트라는 책에 빠져 이 책의 저자가 경험했던 데이트를 물흐르듯 따라가면서 중요한 개념과 주장을 메모하고 나의 생각을 틈틈이 기록해두었다. 데리다 유산을 상속하는 첫 번째 과제는 데리다가 남긴 사상적 전통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수많은 개념이 어떤 문제의식을 갖고 태어났으며, 그 때 데리다가 품었던 철학적 지향성은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를 스스로에게 물어보는 것이다. 데리다 유산 상속의 첫 번째 과제가 긍정과 수용이었다면 번째 과제는 비판적 문제제기를 통해 데리다가 남긴 개념과 주장을 나의 삶에 비추어 재해석해보고 나의 언어로 내 삶을 재진술해보는 노력이다. 모든 읽기는 자신의 체험적 배경과 인식적 기반에 비추어 읽어내는 자서전적 읽기다. “내가 칸트를 읽을 때마다, 그것은 언제나 처음이다”라고 고백한 데리다처럼, “내가 데리다를 읽을 때마다, 그것은 언제나 처음이다”라고 고백한 강남순 교수처럼 나 역시 《데리다와의 데이트》를 읽을 때마다. 그것은 언제나 처음이다. 데리다와의 데이트가 매번 다른 감각적 깨달음을 다르게 주듯이, 데리다의 사유체계를 상속하는 경험도 매번 다른 생각과 느낌으로 다가오는 영원한 현재진행형 프로젝트가 될 것이다.
“나는 태어났다”가 아니라 “나는 태어난다.
나는 태어났으면 태어난 상태로 정체성을 띠는 게 아니다. 오늘의 나는 어제의 나와 다르고 내일의 나는 오늘의 나와 다를 것이다. 온전한 나를 총체적으로 이해하는 것은 영원한 미완성이다. 앞으로도 계속 태어남을 거듭하면서 미결정성으로서의 정체성을 다르게 형성할 것이다. 고정된 나는 없다. 데리다는 고정된 의미를 품고 시공을 초월해서 진리로 통용되는 것은 없다고 한다. 데리다의 독특한 철학적 사유체계를 관통하면서 나름의 통찰력을 얻기 위해서는 몇 가지 사전에 이해할 개념이 있다. 난해한 데리다 저서를 읽어내는데 자주 등장하는 개념들이다. 그 중에 한 가지 개념이 더블 제스처(double gesture)라는 표현이다. ‘한편으로는(on the one hand)’ 시작하는 문장과 또 ‘다른 한편으로는(on the one hand)’이라는 문장을 연결시키는 방법이다. 한편으로는 이미 태어난 나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면서도 또 다른 한편으로는 앞으로 도래할 나의 새로운 가능성에 주목하면서 나를 이해하는 노력이 필요한 이유다.
한편으로는 기존 교육 개념에 대한 긍정적 측면을 부각시키면서도 또 다른 한편으로는 기존 교육개념이 태생적 한계나 문제점을 드러냄으로써 제3의 교육 개념을 모색하는 물꼬를 트는 전략에 적용해도 데리다의 개념은 의미심장한 깨달음을 준다. 비슷한 맥락에서 데리다는 더블 바인드(double bind)라는 개념도 제시한다. 나를 끊임없이 이해하려는 노력도 필요하지만 한 편으로는 나를 완벽하게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필요성(necessity)과 불가능성(impossibility)의 두 축으로 사물의 본질적 속성을 이해하려는 노력이다. 교육을 통해 인간적 변화를 추구할 분명한 필요성을 탐구하는 노력과 더불어 교육을 통해 인간을 변화시키는 노력의 불가능성을 함께 생각해보자는 개념이다. 흑백논리에 익숙한 이분법적 사유의 한계를 지적하면서도 그것을 뛰어넘을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는 개념이다. 데리다는 또한 “만약 그러한 것이 있다면(if such a thing exist 또는 if there is such a thing)”이라는 표현을 차용함으로써 기존의 정의방식을 따를 경우, 특정한 개념 자체가 당연히 가능한 것으로 전제하면서 정작 그 개념 자체에 대한 근원적인 물음을 생략하는 오류를 막을 수 있다고 한다.
텍스트 바깥에는 아무것도 없다.
저자는 데리다와 본격적으로 데이트를 시작하기 전에 데리다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한 일곱 가지 읽기 방식을 제안한다. 우선 알고 있다는 생각을 잠정적으로 괄호 속에 넣고 생전 처음 만나는 것처럼 새롭게 경험하는 게 중요하다고 한다. 둘째로, 데리다에 관한 해설이나 해석을 읽는 노력보다 데리다 쓴 원전의 몇 문장만이라도 반복해서 읽어야 남이 해석한 데리다의 사유에 종속되지 않는다. 셋째, 데리다 책은 페이지마다 숨겨져 있는 의미의 껍질을 깨고 들어가 천천히 음미하면서 읽는 질적 읽기를 하지 않으면 아무리 많이 읽었다고 해도 무용지물이 될 수 있다. 넷째, 부가적 읽기는 데리다 저서에서 만나는 개념과 연관된 다른 사상가의 개념을 읽으면서 해당 개념이 탄생한 문제의식이나 배경을 함께 읽어내려는 노력이다. 다섯째, 책에 나오는 구체적인 개념의 의미나 다른 개념과의 연관성을 비교하고 분석하면서 읽는 미시적 읽기와 이 책의 문제의식이 태동한 사회역사적 배경이나 전체적인 구조적 연관성을 따져서 읽어보는 거시적 읽기를 융합해야 비로소 포괄적 읽기가 가능해진다. 여섯째, 개념목록을 만들면서 책을 읽는 것이다. 다른 철학자와 마찬가지로 데리자 역시 자신이 품고 있는 문제의식을 풀어내는 고유한 개념을 새롭게 창조하는 경우가 많다. 모든 개념은 그 개념이 품고 있는 문제의식과 새로운 세계를 품고 있다. 개념을 안다는 것은 그 개념이 품고 있는 새로운 세계와 만나는 일이기도 하다. 마지막으로 아무리 책을 빠져서 읽어도 책을 다 읽은 다음 빠져나와서 그 책이 던져주는 의미와 시사점은 내 삶에 비추어 볼 때 어떤 의미가 있고, 어떻게 내 삶에 적용할지를 따져보면서 책이 말하는 대로 직접 실천하는 과정이 다를 때 비로소 읽기는 의미심장하게 다가오는 것이다.
이러한 읽기는 단순히 문자로만 된 텍스트를 읽는 걸 의미하지 않는다. 현실 세계에서 벌어지는 모든 사건과 사고, 사물이나 현상의 복잡한 상호작용으로 드러나는 모든 일상에서 만나는 마주침도 다 텍스트다. 읽기는 책 읽기를 넘어서 사람 읽기이고 세상 읽기다. 데리다가 “텍스트 바깥에는 아무것도 없다(There is nothing outside text)”고 말한 이유다. 내가 만나는 세상이 모두 텍스트이고 텍스트를 발생시키는 세상은 또한 콘텍스트이기에 데리다는 나중에 “콘텍스트 바깥에는 아무것도 없다(There is nothing outside context)”라는 말을 덧붙인다. 이런 텍스트를 해석하는 읽기는 자서전적 읽기다. 동일한 텍스트를 읽어도 그 텍스트를 읽고 이해하는 사람의 경험과 가치관과 문제의식에 따라 철저하게 개별적으로 읽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텍스트 읽기는 개별적 사건으로서의 읽기로 연결된다. 동일한 책을 지금 읽을 때와 나중에 읽을 때 그 읽기는 동일하게 다가오지 않고 매번 다르게 읽히는 개별적 사건이다. 사건은 대체불가능하고 반복할 수 없는 고유한 개별적 경험이기 때문이다. 텍스트는 인내심을 갖고 끈질기게 물고 늘어지지 정밀하게 읽지 않으면 텍스트가 함의하고 있는 의미의 껍질을 깨고 속내를 보여주지 않는다. 이런 모든 읽기는 해체적 읽기로 귀결된다. 읽기를 통해서 발견한 의미는 언제나 다르게 다가오고 지금 여기서 그 의미를 고정된 형태로 결정하지 않고 시간적으로 끊임없이 연기시켜 놓아야 한다. 해체적 읽기는 책으로 만나는 모든 의미는 고정된 명사가 아니라 부단히 의미변화가 일어나는 동사로서의 비결정성을 띤다는 전제로 이루어지는 읽기다.
해체는 방법이 아니라 ‘사건’이다. 해체는 키스다.
이 책을 읽으면서 크게 깨달은 것 중의 하나가 바로 데리다의 해체(deconstruction) 개념이다. 내가 그동안 이해했던 창조적 파괴나 탈구성적 해체와 같은 개념과는 근본적으로 차이가 있는 개념이었다. 해체 개념에 대한 데리다의 근본적인 문제의식은 “의미구조가 고정되는 것, 보편적인 것으로 되는 것, 또한 그 의미구조가 탈역사적(ahistorical)이라는 전제를 근원적으로 비판”(197쪽)하는 데 있다. 해체에 대한 또 다른 오해는 해체를 방법이나 어떤 이론 또는 ‘주의(ism)’, 예를 들면 ‘해체주의’로 해석하는 것이다. 해체를 이렇게 해석하는 순간 고정된 도식이나 결정된 논리체계를 따라야 한다는 암묵적 전제를 갖게 된다. 해체는 사건이다. 사건은 두 가지 독특한 특성을 담고 있다. 첫째는 대체 불가능성(irreplaceability)이고 둘째는 반복 불가능성(unrepeatability)이다. 해체를 하나의 방법이나 이론으로 간주하면 해체 작업을 할 때마다 방법과 이론이 처방해주는 절차나 순서를 따라가면 된다는 전제나 가정을 담보하고 있다. 하지만 사건으로서의 해체는 매번 새롭게 전개되기 때문에 지금 이 순간의 해체를 다른 그 무엇으로도 대체가 불가능하며, 다른 어디에서도 반복해서 추진할 수 없다.
사건으로서의 해체는 연인과의 키스에 비유할 수 있다. 연인과 마주하는 키스는 오늘과 내일이 같을 수 없다. 오늘 한 키스의 감각적 느낌은 절대로 반복될 수 없고 대체할 수 없다. 오늘 한 키스는 영원히 반복될 수 없는 개별적 사건이다. “진정한 키스란 서로의 존재를 함께 나누고자하는 사랑, 갈망이 없으면 불가능하다. 언제나 ‘더(more)’가 있음을 생각하고, 그 ‘언제나 더 있음(ever more-ness)’을 갈구하고 추구하는 것, 결코 끝나지 않는 사건이 바로 해체인 것이다”(202쪽). 오늘 연인과 나눴던 달콤한 키스를 돌이켜 생각하면서도 내일은 오늘보다 더 멋진 키스를 상상하는 경험, 진정한 키스 경험은 아직 도래하지 않은 꿈이라고 미뤄두는 기다림과 그리움에 키스는 늘 어제와 다르게 태어나는 사건이다.
“데리다의 해체는 아직 오지 않은 그 무엇, ‘도래하는 것’을 기다리고 긍정하는 사건이다”(222쪽). 해체는 완벽하게 끝나는 결과나 성과로 판단할 수 있는 일기가 아니다. 해체는 영원히 마무리 할 수 없는 미완성이다. “사건으로서의 해체는 언제나 다가올 세계, 또한 보다 더(more)를 추구하고 갈망하는 ‘불가능성에의 열정’의 촛불을 켜는 소중한 생명 긍정의 초대장이다”(222쪽). 의미의 고정성이나 결정성을 인정하지 않고 끊임없이 시공간을 열어놓고 탐구하는 열정의 근간에는 사랑이 매개되어 있다. 데리다에게 모든 개념은 고정된 의미를 품고 잠자는 명사가 아니다. 시공간을 바꿔가면서 끊임없이 재생산되는 동사다. “해체란 언제나 이미 일어나고 있는 사건이며...이제 충분하다가 아니라, 언제나 ‘더(more)’에 대한 갈망을 품고 있다. 해체는 허무주의적 파괴가 아니라, 고도의 긍정의 제스처”(382쪽)다. 여기서 긍정의 의미도 기존의 의견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거나 인정(positive)하는 노력 또는 긍정과 부정의 이분법적 분리를 통한 긍정의 의미를 넘어선다. 데리다 말하는 긍정은 다름과 차이를 차별하지 않고 끌어안고 보듬으면서 제3의 대안을 모색한다는 어퍼메이션(affirmation)이라고 할 수 있다.
해체라는 개념은 ‘삭제 아래(under erasure)’라는 개념과 만나면서 더욱 구체적인 실천성을 띤다. 삭제 아래는 우리에게 익숙한 개념에 붙박혀 있는 고정관념이나 틀에 박힌 관습적 사유를 뒤흔들어 고정성을 띠고 오랫동안 우리들의 사고를 지배해온 통념을 깨부수고 이전과 다르게 의미를 부여하는 활동이다. 예를 들어 종교를 삭제 아래 두면(삭제 아래 종교) 기존 종교에 대한 통념에서 벗어나 새로운 개념으로 탈고정화과정을 거친다. 삭제 아래 종교가 자리잡는 순간 데리다가 말하는 ‘인용부호 없는’ 기존 종교 개념에서 ‘인용부호가 있는’ 종교 개념으로 새롭게 부각된다. 삭제 아래 자리에 익숙한 개념이 들어가는 순간, 고정된 의미로 사용되던 개념은 끊임없이 다른 의미로 거듭나면서 ‘언제나 이미’ 미결정성의 개념, 도래할 개념으로 부각될 뿐이다. 삭제 아래라는 개념은 데리다의 또 다른 개념, X 없는 X라는 개념과 연결시켜 생각해보면 훨씬 이해가 빠를 것이다. 예를 들어 ‘교육 없는 교육’이라고 한다면 첫 번째 나오는 교육은 인용부호가 없는 전통적인 의미의 교육이고, 두 번째 나오는 교육은 ‘삭제 아래’라는 개념에 들어가 새로운 교육적 개념으로 재개념화되면서 ‘인용부호가 있는’ 교육으로 거듭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교육 없는 교육’에 익숙하게 자리잡은 모든 개념을 집어넣고 해체하면서 고정된 명사로서의 의미를 끊임없이 다르게 탐구하고 시간적으로 연기해놓는 차연의 활동을 반복할 때, 교육에 대한 해체는 어제와 다른 차이를 반복하면서 부단히 일어나는 사건이 되는 셈이다.
차연(differAnce)은 사전에 대한 저항이다.
사전에 정의된 의미는 고정된 형태로 사전 속에 죽어있다. 아무 때나 다시 들여다봐도 개념에 대한 정의는 늘 불변하는 상태로 잠자고 있다. 차연(differAnce)은 공간적으로 다르고(differ) 시간으로 연기(defer)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개념이든 현상이든 그 의미를 지금 여기서 알아보는 것과 다른 곳에서 그 의미를 재고해보는 것은 언제나 같을 수 없다. 늘 다른 의미로 다시 태어난다. 시간적으로 오늘 특정 단어의 의미를 규정한다고 내일도 그 의미 상태로 고정될 수 없다. 시간이 지나면서 모든 개념은 어제와 다르게 오늘 새로운 모습으로 내 앞에 나타난다. 차연으로 그래서 개념적 차이점을 오늘 여기서 규정하지 말고 연기해놓자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온전한 의미를 지금 여기서 완벽하게 규정할 수 없다. 데리다가 의미는 언제나 도래한다고 주장하는 이유다. 데리다 이름처럼 사전 속에서 잠자고 있는 고정된 개념적 의미를 여기저기로 데리고 다니면서 의미상의 차이를 끊임없이 탐구하는 지극한 사랑과 열정이야말로 차연이 내포하는 가장 소중한 함의다. 내가 사람이나 대상을 사랑하지 않으면 호기심과 질문이 없어지고 어제와 다른 의미탐구 여행을 시작하지 않는다. 비록 어떤 개념이나 현상의 의미를 영원히 알 수 없는 불가능한 영역이라고 할지라도 미지의 세계에 대한 탐구를 멈추지 않고 계속하는 이유는 알고 싶다는 호기심을 넘어 탐구 자체를 사랑하고 식지 않는 열정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데리다는 자서전적 읽기를 강조하면서 누군가 자서전을 써도 온전히 자신을 다 담아낼 수 없다고 한다. 나에 대한 온전한 이해도 끊임없이 달라지기 때문이고, 시간적으로 연기되기 때문이다. 차연은 의미의 비결정성을 내포한다. 나에 대한 의미는 영원히 결정될 수 없다. 공간적으로 다른 의미의 결정체로 끊임없이 변신을 거듭하면서 다가오고, 시간적으로 그 의미의 열린 가능성을 열어놓고 무한정 지연시켜 놔야 하기 때문이다. 데리다의 비결정성은 결정할 수 없기 때문에 여기까지의 노력을 끝으로 개념적 의미를 더 이상 탐구하지 않겠다는 무관심이나 게으른 포기 선언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비결정성은 ‘불가능한 것에의 열정’, 그리고 ‘정의를 향한 갈망’이다”(356쪽). 데리다에게 비결정성은 엄밀히 말하면 결정할 수 없는 것에 대한 겸허한 인정과 수용이자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가능한 앎의 세계에 도달하려는 치열한 열정이다 데리다가 신앙을 “무엇인지 내가 알지 못하는 그 어떤 것에 대한 열정(371쪽)”이라고 해석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미지의 세계를 알고 싶은 열정으로서의 신앙은 “새로운 세계, 불가능성의 세계, 도래할 세계(the world to-come)의 희망과 약속을 동시에 담고 있다”(375
데리다의 차연 개념에 비추어 전문가를 새로운 의미로 탄생시킨 개념을 《브리꼴레르》라는 책에 소개한 적이 있다. 전문가와 전문사 사이에 존재하는 차이를 존중해주고 내가 갖고 있지 않은 다른 사람의 전문성을 나의 전문성과 융합, 새로운 지식을 끊임없이 창조하는 사이 전문가(homo differAnce)다. 생각하는 인간(homo sapiens)처럼 전문가 사에 존재하는 차이를 끊임없이 탐구하는 사이 전문가는 데리다의 차연(differAnce) 개념을 호모와 융합, 새롭게 창조한 신조어다. 한 분야만 깊이 파다가 기피 대상이 되거나, 자기가 판 우물에 매몰되는 좌정관천의 어리석음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나의 전문분야와 다른 분야에서 깊이 파는 전문가와 자주 만나서 소통하면서 내가 모르는 세계를 배우려는 겸손한 자세가 필요하다. 전문가에 대한 정의도 한 분야를 깊이 파는 사람이라고 정의하는 순간, 새로운 전문가, 아직 만나보지 못한 전문가, 미래에 도래할 전문가의 의미를 포착할 수 없다. 과거에 내가 만난 전문가, 오늘 만나는 전문가의 이미지로 전문가의 의미를 온전히 파악할 수 없다. “온전한 의미란, 만약 그것이 존재한다면, 언제나 도래하는 것이다”(213쪽). 가능성의 문을 활짝 열어놓고 지금까지의 전문가와는 전혀 다른 전문가를 만나는 미래가 있다는 사실에 심장이 뛰는 이유는 무엇일까.
우리는 환대가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나는 환대한다. 고로 존재한다”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환대는 데리다 사상체계를 구축하는 가장 핵심적인 개념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데리다는 갑자기 왜 언어는 환대라고 했을까. 국제적으로 통용되는 언어는 영어다. 한국에서 한국말로 다른 사람을 초대하면 나는 주인으로서 행세하지만 영어가 모국어인 미국에 가면 나는 손님을 넘어 주변인으로 전락한다. 모국어가 통용되는 곳에서 나는 주인으로 손님을 환대할 수 있지만 모국어가 통용되지 않는 다른 나라고 가면 나는 완전히 주변인으로 전락하면서 환대 밖에서 방황할 수밖에 없다. 내가 잘 할 수 있는 모국어로 손님을 초대하는 사람 입장에서 환대를 베푼다고 해도 그 환대에 담긴 개인적 차원의 배려는 물론 국가적 차원에서 베푸는 정치적 의미상의 미묘한 차이를 다 알 수 없다. 데리다가 “우리는 환대가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234쪽)”고 한 이유다. 환대는 환대가 이루어지는 컨텍스트에서 생각지도 못한 경험이 부각되는 텍스트이기 때문이다. 환대를 알지 못하는 이유는 환대가 언제나 사건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진정한 환대란 언제나 아직 아닌, 우리의 이해력 너머에 있는 ‘도래할 환대(hospitality to-come)’의 사건이다”(240쪽).
이 말은 환대에만 적용되지 않는다. 사랑, 열정, 행복, 도전, 신뢰를 비롯 우리가 사용하는 거의 모든 추상명사에 해당된다. “사랑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도 마찬가지다. 사랑은 인지 세계 내부에서 일어난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인식행위가 아니다. 저마다의 애정과 관심의 연대망에서 천차만별의 다른 상황에서 어제와 다른 사랑을 구체적으로 경험하는 사건이기 때문이다. 사건은 반복 불가능성과 대체 불가능성을 함의하고 있다. 사랑은 언제나 우리의 이해력 너머에 있는 도래할 사건이기 때문이다. 지금까지의 사랑과 차원이 다른 또 다른 사건이 언제 어디서 일어날지 예측할 수도 없고 어제의 사랑과 똑같은 사랑의 경험을 감각적으로 지각할 수 없다. “환대란 언제나 특정한 정황 속에서 논의되어야 한다”(244쪽).
데리다의 문제의식과 마찬가지로 나에게 교육은 아직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교육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도 교육은 이미 결정된 이상적인 상태의 정의가 있다는 가정을 내포한 질문이다. 이 질문을 데리다는 “교육은 나에게 어떤 의미인가?”라는 방식으로 되물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교육도 인지구조의 변화나 사고방식의 변화처럼 머릿속에서 일어나는 관념적이고 추상적인 개념체계의 변화과정을 지칭하는 말이 아니다. 교육은 언제나 특정한 정황 속에서 일어나기 때문에 교육장면에 참여하는 가르치고 배우는 사람은 모두 저마다의 고유한 1인칭 시점에서 경험하는 자서전적 깨달음을 얻는다. 교육적 경험은 일반화시킬 수 없는 개별적이고 단독적인 경험이다. 그 경험은 심지어 언어로 온전히 번역해서 표현할 수 없는 독특한 깨달음이자 심리적이고 신체적인 각성체험이다.
엘리베이터가 없는 3층 건물은 비장애인에게는 걸어서 올라갈 수 있기 때문에 적대적이지 않지만 장애인에게는 걸어서 올라갈 수 없는 적대적인 건물이다. 이런 점에 주목한 데리다는 적대와 환대를 이분법적으로 구분 할 수 없는 현실적인 문제의식을 품고 적환대(hospitality+hostility=hostipitality)라는 개념을 창안한다. “존재하기 전에 주차료를 지불하십시오(Please pay your parking fee before existing).” 이 말은 나가다(exit)라는 말의 ‘s’가 들어가서 ‘존재하다(exist)’로 잘 못 표기된 것이다. 그리고 사진 위에는 “나는 지불한다. 고로 존재한다(I pay. Therefore I am)”이라고 누군가 덧붙여 쓴 글귀가 붙어 있었다는 재미난 사례가 이 책에 나온다. 주차료를 지불하면 주차기계에게 환대를 받지만 지불 능력이 없으면 영원히 적으로 취급, 차를 밖으로 끌고 나갈 수 없게 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환대는 손님이 지불능력이 있을 때 주인에게 대접받을 수 있다는 전제가 깔려 있다. 주인이 원하는 만큼의 금전적 지불능력이 있으면 손님은 환대를 받지만 주인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할 때 손님은 환대에서 바로 적대적인 관계로 전락한다. 환대와 적대는 사전에 정해진 관계가 아니라 순간순간 바뀔 수 있는 비결정적 개념이다.
살아감이란 언제나 ‘함께 살아감’, 나아가 ‘함께-잘-살아감’이다.
데리다의 철학적 문제의식이 지향하는 곳은 “어떻게 함께-잘-살아갈 것인가”라는 질문에 녹아들어 있다. 데리다가 말하는 함께 살아감은 인식과 관심을 같이하는 공동체 구성원이 끼리 끼리 어울려 살아감을 의미하지 않는다. 데리다가 진정으로 의도하는 함께 살아감은 나와 인식과 관심은 물론 종교, 인종, 가치관이 다름에도 불구하고 상대의 아픔에 기꺼이 애도하고 연민하는 마음으로 연대를 이루어 살아가는 것이다. 동질성을 전제로 엮여 있는 공동체의 틀을 벗어나 다름을 차별하지 않고 존중하며 환대하며 서로의 아픔에 연민의 정을 품고 애도하는 더불어 살아감이 함께 살아감의 현실적 의미다. 함께 살아감은 더 이상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인식의 문제가 아니라 구체적인 삶의 현장에서 우리가 매일 매일 직면하는 난국을 돌파하고 서로가 손잡고 일궈 나가는 실천의 문제다.
함께 살아감의 근본적인 동력은 연민(compassion)에서 나온다. 연민에 해당하는 영어, compassion을 긍휼감으로 번역하고 강남순 교수가 번역한 동정(sympathy), 감정이입(empathy)을 각각 공감과 위로로 번역하는 사람도 있다. 어떤 말로 번역되든 sympathy는 아픈 감정을 공유하기는 하지만 머리로 이해하고 상대의 아픔을 치유하기 위한 구체적인 행동을 취하지는 않는다. 누군가 돌아가셨을 때 조의금을 내는 것으로 상대의 슬픈 심정을 이해하려는 노력이 동정이다. 동정심이 발현되는 근간에는 동정 받는 너는 동정심을 베푸는 나에 비해 위계적으로 바닥에 놓여 있다는 심리적 우월주의가 숨어 있다. 이에 비해 감정이입이라고 번역되는 empathy는 동정처럼 동정심으로 심리적 위로를 받는 시혜자와 수혜자의 위계적 관계를 상정하지 않는다. 타인의 아픔을 나의 아픔처럼 끌어안고 체중이 실린 언어로 상대와 함께 살아가려는 마음을 온몸으로 보여준다. 상대의 감정 속으로 나의 감정도 이입되어 상대의 아픔으로 머리로 계산하지 않고 가슴으로 받아들이려는 안간힘이 바로 감정이입이다.
이에 반해 연민은 강남순 교수에 따르면 타자의 고통에 대면해서 고통을 제기한 원인을 제거하기 위한 적극적인 행동을 감행하면서 함께 살아감을 구체적으로 실천하는 애쓰기다. 연민은 동정과 감정이입과는 다르게 “감정적 반응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행동으로 이어지게 하는 힘”(276쪽)이 있다는 점에서 전자의 두 가지 개념과 확연하게 구분된다. 연민은 타자의 고통을 인지적으로 이해하는 노력을 넘어서 상대의 고통이 나의 고통임을 몸으로 받아들이고 그 고통을 치유하기 위해 기꺼이 실천으로 옮기려는 비판적 행동주의(critical activism다. 함께 살아가면서 발휘되는 연민은 관념적이고 인식론적인 문제가 아니라 구체적인 삶의 현장에서 매일 매일 결단을 내리고 행동으로 옮기는 실천의 문제다. 연민의 정을 나누면서 이루어지는 “함께-잘-살아감”은 나와 전혀 다른 사람은 물론, 내가 아직 모르는 사람, 이미 과거로 돌아간 사람까지도 포함한다. 이런 사람과 잘 살아간다는 문제는 현재의 자신은 물론 과거의 자신과 다가오는 미래의 자신과도 함께 살아간다는 의미다. 생각보다 다양한 어려움과 직면할 수밖에 없다는 불확실성을 내포한다.
애도는 기억이자 책임성이다
“‘함께 살아감’은 함께 고통함의 의미를 지닌 ‘연민’, 그리고 상실에 대한 아픔을 드러내는 ‘애도’와 분리할 수 없다. 너와 나의 관계가 형성되자마자 애도는 시작된다”(288쪽). 애도는 세상은 나 혼자 살아간다고 생각하는 사람에는 필요없는 인간적 미덕이다. 애도는 나는 누군가와 함께 살아가는 관계론적 존재임을 자각할 때 비로소 다가오는 숭고한 윤리적 결단이자 정치적 실천이다. 인간으로 살아간다는 의미는 나와 더불어 이 세상을 살아가는 다른 사람의 아픔에 기꺼이 감응하고 책임감을 지닌다는 의미다. 책임감을 의미하는 영어 단어, ‘responsibility’도 타자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 ‘반응(response)’하는 ‘능력(ability)’을 의미한다. 책임감 있는 사람은 다른 사람의 미묘한 움직임도 한 눈 팔지 않고 깊은 관심을 갖고 바라보기 시작한다. 다른 사람이 보여주는 작은 행동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 순간 내가 어떤 반응을 보여주는 것이 상대를 진정한 마음으로 보살피는 행동인지를 심사숙고하고 주어진 상황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대안을 모색한다. 데리다가 “애도는 먼저 떠난 사람을 기억하고 동시에 그 떠난 사람이 못다 한 삶까지 살아내는 책임성을 의미한다(288쪽)”고 정의한 이유를 주목해보면 우리가 흔히 상식적으로 생각하는 애도 개념과 근본적으로 다른 의미를 내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데리다에게 애도는 나보다 먼저 살아간 사람의 치열했던 삶의 족적으로 더듬어 알아보고, 그들이 이루고 싶었던 꿈이 무엇인지, 왜 그런 꿈을 이루지 못했는지를 주어진 사회역사적 역학관계 속에서 파악해보려는 노력으로 시작된다. 그들이 못다 한 삶까지 끌어안고 지금보다 더 멋진 세계, 앞으로 도래할 세상을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구체적인 책임과 역할을 고뇌하고 결단하며 실천하는 과정이 바로 데리다가 말하는 애도의 진정한 의미다. 함께-잘-살아감은 살아감을 넘어 ‘살아남음’에 담긴 비장한 각오와 책임감을 함의한다. 살아남은 사람은 먼저 살아간 사람의 족적을 더듬어 반추해보고 그들이 살고자 했던 세계를 함께 만들어가기 위해 치열하게 살아가려는 살아 남은자의 사투이자 안간힘이다. 이런 점에서 애도는 지금 이 순간 함께 잘 살아가기 위해 사투를 벌이고 있는 모든 사람들을 향한 사랑의 표현이자 지금보다 더 나은 삶을 살아가기 위한 희망과 용기의 연대망을 구축하려는 인간 존재의 실존적 노력이 아닐 수 없다. 이런 인간의 실존적 노력을 포기하고 타자의 고통에 무관심하거나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는 수동적인 자세를 데리다는 “인류에 대한 범죄의 시작”이라고 강조한다.
나는 《데리다와의 데이트》를 읽을 때마다 언제나 처음이다
우리가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데리다는 난해한 포스트모더니스트를 지향하는 철학자라기보다 “환대의 예술가이며 시인”(263쪽)이다. 데리다는 자신을 기도와 눈물의 사람(person of prayers and tears)(356쪽) 주장한 바 있다. 절대적 확실성과 진리를 구원하기 위해 행하는 평범한 종교인의 기도와는 다르게 데리다의 기도는 여타의 확실성을 정지시켜놓고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는 “도래할 신(a god to come), 절대적으로 알려져 있지 않은 비결정적 수신자의 이름”(359쪽)에게 던지는 ‘불가능성에의 열정’이며 ‘비결정성에의 열정’(359쪽)이다.
반복 불가능하고 대체 불가능한 사건으로서의 해체를 평생 동안 추구해온 데리다는 관념적이고 추상적인 철학자라기보다 사랑과 열정의 예술가이자 언제나 세상을 낯선 시선으로 바라보며 새로운 개념으로 다르게 바라보려는 시인에 가깝다. 이런 점에서 데리다는 주디스 버틀러가 말한 “새로운 선생”이며, 마이클 나스가 표현한 “뛰어난 선생”이다. 데리다의 ‘시선(gaze)’은 언제나 당연함을 부정하는 ‘낯선 시선’이며, 고정된 의미를 무너뜨리고 색다른 의미체계로 건축하는 ‘날선 시선’이기도 하다. 그렇다고 데리다의 시선은 세상을 낯설고 날 선 눈으로 바라보는 냉정한 지성주의자의 관점을 넘어선다. 언제나 ‘너’를 바라보는 ‘나의 시선’과 ‘나’를 바라보는 ‘너의 시선’이 맞닿으면서 함께 살아가려는 연민의 연대를 꿈꾸는 기도와 눈물의 시선이다. 우리가 해야 될 과제는 데리다가 남긴 유산을 상속받는 것이다. 데리다가 말한 대로 상속받는 것은 가만히 앉아서 수동적으로 얻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데리다가 남긴 사상적 족적으로 더듬어가면서 그것이 우리에게 던져준 의미가 무엇인지를 지금 여기서 재해석함은 물론 데리다가 꿈꾸었던 도래할 미래를 함께 건설하기 위해 분투노력하는 지상과제를 몸을 던져 수행하는 것이다. 데리다 강조했던 비결정성, 차연, 해체라는 개념에 비추어 보아도 그 누구도 데리다의 사상적 기반을 완벽하게 해석하는 완결성을 이룰 수 없다. 데리다가 남긴 유산으로서의 사유체계는 부단히 해체하지만 끝을 알 수 없는 비결정을 향한 열정의 대상이며, 영원히 온전한 앎의 총체성으로 정리해낼 수 없는 언제나 이미 도래할 유산(legacy to com)이다.
“나는 데리다를 읽을 때마다, 그것은 언제나 처음이다”라는 강남순 교수의 고백처럼 같은 맥락에서 “나는 《데리다와의 데이트》를 읽을 때마다, 그것은 언제나 처음이다.” 다음에 다시 데리다와 데이트할 때는 이전과 다르게 설레는 마음으로 다시 만날 것을 생각하니 벌써부터 그리움이 스며들기 시작한다.
“나는 데리다를 사랑합니다.
그리고 당신이 어디에 있든지 당신을 향해 미소 지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