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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 정약용 평전 - 조선 후기 민족 최고의 실천적 학자
박석무 지음 / 민음사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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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사태를 비롯하여 관료들의 모습을 개혁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이런 시기, 주목받고 대두되는 인물이 있으니 바로 '정약용'이 아닐까 싶다. 특히나 그의 지방자치를 다룬 책 <목민심서>가 주목받고 있으며, 총체적인 행정 쇄신론을 다룬 <경세유표> 역시도 떠오른다. 

 

이 책은, 그런 시기에 적절하게 나온 정약용의 평전이라고 할 수 있겠다. 저자는 박석무 선생으로, 다산에 대한 연구를 오랫동안 해 오고 다산에 대한 책을 많이 쓴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런 그가 다산에 대한 평전을 출간했으니 당연히 관심이 갈 수밖에 없었다.

 

책은 대체적으로 다산에 대해서 서사적인 인생의 흐름을 잘 표현했다. 그리고 다산의 업적과, 공직생활, 그리고 청렴함과 강직한 모습 등을 잘 표현하고 있었다. <정선 목민심서>를 리뷰했을 때, 느꼈던 것, 굉장히 꼼꼼한 성격이겠구나라는 느낌을 평전에서 다시 받았다. 공을 이루고도, 오히려 자신에게 공을 치하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는 이야기, 아들들에게 훈계하는 이야기 등을 봤을 때 다산은 정말로 맑은 사람이라는 것을 느꼈다.

 

내가 몰랐던 부분은, 귀양살이를 하면서 경제적인 부분은 어떻게 충당했는가? 란 물음이 있었는데, 역시나 다산의 친가와 외가는 기득권 층의 양반가였고, 다산의 처가 역시도, 양반가였다. 특히나 처가에서 다산에게 마련해 준 땅은 긴 유배생활을 했을 때, 다산이 경제적인 부분으로부터 큰 도움이 됐다는 설명을 했는데, 이 부분은 몰랐던 부분이었는데, 새롭게 안 사실이었다.

 

세상에는 참으로 재능이 다방면적으로 뛰어난 사람이 가끔 존재하는데, 조선 초의 정도전이 그랬다면 조선 중기에는 율곡, 조선 후기에는 다산이 그렇다고 할 수 있겠다. 책의 뒷부분에서 다산의 업적을 이야기하는데, 경학 사상(유교 사상)과 경세 사상(치국), 문학 사상(시에서 나타난 부분), 과학 기술 사상 등의 논평은 대체적으로 다산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었다.

 

특히 눈여겨봐야 할 부분은 과학 기술 사상으로, 조선조는 유학이 발달된 인문학적 인프라가 강한 국가였는데, 여기서 다산은 <경세유표>라는 저서를 통해 말한다. 온 국민에게 수학을 가르쳐야 한다는 것과, 기술의 중심은 수학이라는 점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조선의 여러 위인들이 대체적으로 거국적인 국가의 도리와, 유교적 도덕주의를 외칠 때 다산은 한 발 더 나아가, 실용 기술, 즉 과학에 대한 부분까지도 이야기하고 있었다. 물론 이 부분은 다산만 그런 것이 아니라, 류성룡과 같은 학자들도 주장했던 부분인데, 다산은 그러한 부분들을 수용하여 더욱더 강조했었다. 

 

개인적인 생각으로 인문학의 시초는 철학이라고 생각되고, 자연 과학의 시초는 수학이라고 생각한다. 동양 문화권에서는 제자 백가의 사상적 논쟁을 통해 철학이 깊이 있게 발달했던 반면, 서양에서는 자연 과학의 수학과 이성적인 철학이 동시에 발전한다. 서양은 그 수학적 지식을 발전시켜서 근대화와 과학 기술을 발전시키는데 도움이 됐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동양보다도 더 발전할 수 있던 게 아닌가 싶었다. 그런 부분에서 인문학적 유교적 사상에 젖은 국가 조선에서 기술을 발전시키고 기술의 중심에 수학이 있다는 그의 통찰력이 돋보였었다. 실제로 그는 말뿐만이 아니라 수원 화성 축조를 효율적으로 완성한 예도 있었다.

 

문학적인 부분에서 돋보였던 점은, 한국적인 시어를 많이 사용했다는 점이 눈에 들어왔다. 당시 우리나라의 시 풍토는 중국의 것 만을 최고로 치고 잘 모방한 시일 수록 높은 평가를 받았는데, 다산은 한국적인 색채의 시나, 한국적 고사를 인용하기를 주장했다. 이런 부분에서 다산의 주체적인 부분이 보였었다.

 

어쨌든 여러 방면으로 다재다능했던, 다산은 정조의 총애를 받으며 권력의 핵심으로 나아갔지만 반대파들의 모함과, 천주교 문제로 인해서, 긴 세월 유배의 시기를 보낸다. 불우했던 그 시기를 다산은 낙담하지 않으며 여러 경전들과, 저서들을 집필하여, 자신의 재능을 사장시키지 않으려 노력했었고, 그러한 진지한 학문적 탐구에, 당파가 다른 문인들 역시도 관심을 가지며, 서로 간에 상호 비판과 우애를 다져나가기도 했었다.

 

흔히 물이 너무 맑다면, 고기가 살 수 없다고 하는데, 다산은 정말 맑은 솔향의 인간이었다. 스스로에게 엄격하며, 빼어난 재능을 스스로 다스리며, 매사 분발하는 그의 모습은 숭고했으며, 나의 나태한 인생에 깊은 반성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책을 읽으면서 생각했던 점은 환경에 대한 중요성이다. 다산의 <목민심서>와 <흠흠신서>를 지은 배경에는 환경을 무시할 수 없었다.

 

다산의 아버지는, 지방 관직을 두루 거쳤고 다산은 어린 시절부터 아버지의 행적을 보고 스스로 느낀 바가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스스로 외직에서 고을을 다스려 폐단을 수정했으며, 암행어사를 훌륭히 역임하며, 지방 행정에 대한 경험론을 바탕으로 쓴 책이 <목민심서>라고 했다. 거기다 <흠흠신서> 역시 그가 실제로 재판을 진행하며 명 판결 등을 내린 경험에서 쓴 책이었고, <경세유표>는 뒤틀려버린 조선을 획기적으로 개혁하는 방법에 대해 쓴 책. 모두가 다산이 경험했던 부분이었고, 그 경험은 다산이 처한 환경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었다.

 

다산과 같은 학자는 분명 우리나라에는 드물 것이며, 유네스코에서 지정했듯, 정말로 뛰어난 자랑스러운 우리의 선조다. 책은 그런 다산의 모습을 한껏 치하한다. 그러나 여기서 나는 책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고자 한다. 

 

이 책은 사실 굉장히 편향적인 책이다. 나는 여러 평전들을 살펴봤지만, 이 책은 유독 내가 싫어하는 스타일을 가지고 있다. 평전을 보는 이유는, 그 사람의 일대기만을 보는 것이 아닌 그 일대기를 바탕으로 저자의 분별 있는 평을 보는 것 역시 이유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러나 이 책은 그 평이 열에 아홉은 칭찬으로 덮여있다. 물론 다산이 위대한 위인임은 알고 있고, 다산이 뛰어난 사람임은 알고 있다. 그러나 나는 이 책의 서문을 보면서 놀라웠던 점이,

 

저자가 다산의 평전을 쓰며 부끄러운 점이 책이 칭찬 일색으로 덮인 것 같아서, 부끄럽다 하면서도 변명으로 내미는 것이, 조선 시대의 선비들은 대체적으로 문인을 평가할 때 칭찬을 주로 하기 때문에 이런 평가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견해를 밝힌다.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은, 그 시절의 선비들이 평가가 그랬다 하더라도, 평전이라는 것은 현세를 살아가는 사람이 내리는 평론이다. 그런데 저자는 대체적으로, 다산에 대해 칭송만 하고 있고, 딱 두 부분에서만 다산을 비판하는데 그 첫 번째 부분이 윤선도와 다산의 시를 비교하며 비교적 윤선도의 글이 더 한국적 색채가 있는데 후학인 다산은 이런 부분을 계승하지 못한 점을 비판하고 있다. 그리고 두 번째로는 홍경래의 난에 대해서 다산이 민란이라고 규정하자, 다산 역시도 지도층의 부분이라, 그들의 고충보다는 왕권을 대변하고 있다는 부분으로 비판을 한다. 그 세세한 비판 외에는 책은 칭찬 일색이다.

 

내가 국내에 나온 이순신 평전을 좋아하지 않는 이유, 너무 칭찬을 하고 있어서, 이순신이 과연 나와 같은 사람인지, 신인지 착각하게 만드는 서술이 대부분이다. 이순신이란 위인은 좋아하지만, 그를 다룬 국내의 책은 거부감이 드는 것이 솔직한 심정이다.

 

최근 읽고 있는 책 <동양 고전과 역사, 비판적 독법>, 이 책의 첫 장이 바로, 고전이라는 책을 엎드려 숭배하며 읽는 세태에 대해 비판하고 있다. 그렇게 숭배하며 읽는 고전은 비판적 시각으로 바라볼 수도 없다. 책을 읽으며, 감동을 느껴 책을 존경하는 것이지, 무턱대고 존경하며 책을 읽는다면, 똑바르게 책을 볼 수 없다. 마찬가지로 역사적 인물도 그렇다고 생각한다. 올바른 평전은, 역사적 인물에 대해서 잘한 점은 칭찬하고 잘 못한 점은 비판을 할 줄 알아야 한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위인이라는 사람들은, 일개 범부에 비해 결점이 적을뿐, 결점이 없는 사람은 아니다. 그러나 대체로 잘 알려진 위인들의 평전을 보면, 유독 이 결점을 없애려고 하며, 장점만을 부각시키려는 부분이 보이는데, 이 책도 전형적으로 이런 서술을 보이고 있다.

 

(여담이지만 <동양 고전과 역사, 비판적 독법>은 굉장히 좋은 책이다. 관심이 있는 분들께 일독을 강추하고 싶다.)

 

역사적 인물 역시도 우리와 같은 뜨거운 피가 흐르는 인간이고, 그런 인간이라면, 결점이 있기 마련이다. 물론 다산이라는 인물의 결점을 찾는 일은 힘든 일이겠다. 그렇지만 적어도 박석무 선생이라면, 다산에 대해서 깊이 연구를 한 사람이라면 이런 부분에서 올바른 비판을 할 줄 알고 믿었었는데 그런 부분이 보이지 않아서 매우 실망을 했었다.

 

따라서 좁은 소견이긴 하나, 내가 본 다산에 아쉬움을 열거하고자 한다.

 

책의 204쪽에 나오는, '서울의 생활이 지겹고 고향의 아름다운 강산이 그리워 다산은 조정의 허락도 받지 않고 훌쩍 서울을 떠나 고향으로 달려간다.' 즉 공무를 하다, 자기 맘대로 고향 생각이 나서 낙향했다는 것인데, 이 부분에 대해서 나는 의외의 다산의 모습을 발견했다. 물론 이 이후로는 이런 부분은 없었는데, 이런 부분은 어쨌든 원리와 법도에 준하지 않다고 본다. 그런데도 이 책에선 그런 다산의 행동에 대해 슬쩍 넘어가며, 놀러 가서 형제들과 쓴 시의 아름다움만 칭송하고 있으니, 아쉬운 부분이었다. 아무리 일이 고단하고 고향을 가고 싶다곤 하나, 이런 식으로 처세를 한다면 안 그래도 임금의 총애가 깊은 다산을 공격할 명분을 찾는 반대파들에게 반감을 살 행동이 아닌가 싶었다.

 

그 외 다른 부분은, 솔직히 책의 서술이 칭찬 일색이라서 보이지 않았지만, 그의 글들을 봤을 때, 저자는 진보적이고 날카로운 비평 정신이 살아있는 사람이라고 평했고, 나 역시 여기에 동의하지만 한편으로는, 다산의 글에서 보수적인 부분도 보였었다. 특히 아들들에게 내린 글들에서 신분적인 것, 사대부의 법도 등을 강조하는 모습 등에서, 어쨌든 아쉬움을 느꼈었다.

 

그리고 나는 이 책을 보며 느낀 점이, 조선이라는 나라에 대한 회의적인 감정. 임진전쟁을 겪고 그렇게 국난을 경험하고도 조정은 정신을 못 차리고, 당파 싸움에 연연하는 부분, 이런 환경을 이어나간 조선의 모습이 참으로 한심하게 느껴졌다. 정약용과 같은 인재를 내치고, 유배를 보내는 어이없는 당파싸움, 썩을 대로 문드러진 조선의 모습,

 

얼마 전 느낀 것이 <고선지 평전>을 읽으며 느꼈다. 고선지는 당나라의 장군으로 안서도호부를 총괄한 도독이었다. 그 당나라의 안서도호부를 점령한 사람이 우리 고구려의 후손이라는 점 그 부분이 놀라웠는데, 문뜩 그런 생각도 했다. 한반도의 영웅들 역시, 세계의 영웅들과 비교해보면, 우열을 가릴 수 없을 정도로, 뛰어난 분들이 많다. 조선만 해도 이순신을 비롯한 여러 무장들, 그리고 문신들 역시도 정도전이나 정약용, 류성룡, 율곡, 퇴계 등등 세계적 위인의 능력을 가진 사람들이 많았다.

 

그러나 그들은 국가를 발전시키는데 자신의 능력을 쓴 것이 아니라... 썩어진 국가를 바로 세우는데 능력을 썼다는 점이다. 조선만 해도, 그렇다. 태종과 세종의 찬란함은 200년을 이어지지 못하여 국가는 썩을 대로 썩었고, 율곡과 같은 위인이 경장을 외쳐도 당파 싸움에 실현되지 못 했다. 그 결과 임진전쟁으로 국가가 쑥대밭이 되고, 이순신과 여러 영웅들 덕으로 사직을 보전했지만 억지로 그들의 능력으로 국가를 세웠지만, 반성하지 않고 발전하지 못 했다. 왜 우리는 이런 위인들이 재능을 다 썩어진 국가를 바로 세우는 쪽에서만 사용해야 했단 말인가? 왜 다른 제국들처럼 국가가 팽창하고 발전하는데 사용하지 못했단 말인가?

 

조선 말, 정약용과 같은 재능을 지닌 사람은 한술 더 떠서, 재능을 꽃피울 기회마저도 국가가 박탈한다. 도대체 왜 다른 나라에 비해, 유독 우리나라는 이렇게 정부가 부패하는데 가속도가 붙는단 말인가? 정말 책을 보며 아쉬웠다. 당나라로 간 고선지는 자신의 능력을 유감없이 발휘하여, 당 제국의 영토를 넓히고 안서도호부를 총괄한다. 정약용을 비롯한 여러 영웅들 역시 세계의 석학들과 뒤질 것 없는 재능을 가지고 있음에도, 나라의 환경은 그들을 올바로 쓰지 못 했다. 과연 고선지가 조선에 태어났다만 이런 능력을 유감없이 발휘했을까? 왜 우리는 그런 재량들을 올바르게 사용하지 않아서, 훗날 일제의 지배를 받는 나약한 민족이 됐단 말인가? 이런 부패의 토양을 만든 조선이라는 국가 자체에 굉장히 회의감이 들었다. 꽃이 아무리 좋은 종자인들 땅이 척박하다면 꽃피울 수 있겠는가?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 역시도 크게 돌아봐야 할 부분이다.

 

그리고 이 책에서 가장 중심점을 잃은 부분. 남도에 대해서 시를 읊고 아름다움을 표현했다는 부분. 물론 이 부분에 대해서 딴죽을 걸 마음은 없지만, 갑자기 무등산을 읊은 시에서 뜬금없는 광주라는 도시의 자랑이 나오기 시작한다. 이 부분은 전혀 다산과 관계가 없는 부분인데 이런 식으로 저자의 정치적인 해석을 곁들여 쓴 부분에서 솔직하게 거부감을 느꼈다. 광주가 물론, 역사적으로 민주적으로 의미가 있는 도시임에는 인정하지만, 이 책은 지금 그런 것을 논하는 것이 아닌, 다산이라는 인물의 평전이다. 이런 부분은 사실 말하지 않더라도, 다 아는 사실인데 구태여 '다산'이라는 평전에 이렇게 직접적으로 강조를 할 필요가 있을까? 포인트가 너무 어긋난 부분이라고 생각했다.

 

그래도 어쨌든, 다산이라는 인물에 대해서 소상하게 잘 밝혀놓은 책이다. 저자 박석무 선생의 다산에 대해 과도한 사랑이 있어서 아쉬운 부분이 보이지만, 청렴했던 다산의, 맑은 인생 다산의 일대기를 보기엔 더없이 좋은 책이다. 문체 자체도 평이했으며, 글 자체도 어려운 부분은 없어서, 청소년들이 읽기에도 부담이 없는 서술이 돋보였다. 박석무 선생이 다산에 대해 많은 연구를 하신 분이라 책의 기대가 많았는데, 기대한 만큼 아쉬움도 많은 책이었다.

 

이런저런 자잘한 아쉬움에도 불구하고 다산은 정말 맑은 사람이다. 나는 다산의 저서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 와 <정선 목민심서>에 대한 리뷰를 남겼다. 그 글들 만으로도 정말 깐깐하고 대쪽같은 그의 모습을 볼 수 있었는데, 이렇게 그의 인생을 담은 책을 찬찬히 보니, 그의 맑음이 부러웠다. 소신 있고 바른 가치를 위한 그의 신념은 후세의 귀감을 주기에 충분했었고, 지금의 공직자들이나, 정치인들이 부디 다산을 본받았으면 싶다.

 

더불어, 책의 말미에는 <역주 목민심서>라는 책을 설명하며 <목민심서> 완역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그러나 지금 그 책은 '절판' 상태다. 나는 이 아쉬움을 <정선 목민심서> 리뷰에 소상히 밝혔다. 정선 목민심서는 편역본이고 <역주 목민심서>는 완역본이다. 출판사 창비 출판사에 <역주 목민심서>를 다시 재판해달라고 문의를 했는데 계획이 없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더불어 <흠흠신서> 역시 번역본 1권이 절판된 상황이다. 학자들의 다산학 논의도 좋지만, 중요한 일은 다산의 대표 저서인 1표 2서 완역본은 국민이 쉽게 볼 수 있게 해야 하지 않을까? 얼마 전 <여유당전서>가 발간됐는데, 솔직히 학자 외에 그 전집을 구매할 수 있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되겠는가? 정작 대중은 다산의 대표작 1표2 서 완역본을 보지 못하는 이 사태가 안타까울 다름이다.

 

아무튼 2014년 6월 4일, 선거일, 다산과 같은 정치인들이 많아졌으면 하는 마음에서, 이 책을 다 읽고 아쉬운 마음으로 서평을 남긴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 언급된 책 리뷰는 알라딘 서재가 아닌 개인 블로그에 담겨 있는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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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성룡, 나라를 다시 만들 때가 되었나이다
송복 지음 / 시루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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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서계가 고전에 대한 부분이 트렌드로 자리 잡으면서 동양 고전,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중국 고전들을 번역하고 그 고전들의 교훈을 밝히는 책들도 무더기로 쏟아지고 있다.

 

좋은 일이다. 문화적으로 조명 받지 못한, 고전들에 대해서, 새로운 시각으로 조명한다는 것은 참으로 의미 있는 작업이고, 다양한 사상을 국내에 소개한다는 것은 의미 있는 일이다. 그러나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든다. 동양 고전이라 하면, 중국 고전을 생각하고, 중국의 사상만을 생각한다. 물론 중국의 사상과 학문은 우리의 학문, 동아시아의 학문은 주도했었다. 그러나 그 동아시아 사상을 바탕으로 했다 하더라도, 우리는 우리다. 우리는 한족이 아니다. 따라서 우리의 독자적인 색이 가미된 고전 역시도 경시할 순 없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도 중국의 고전만을 동양 고전이라 칭송하고 앞세우고 있으며, 깊다고 이야기한다. 우리의 고전, 그리고 일본의 고전은 비교적 중국에 비해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문화적인 부분, 고전의 부분에서도 사실 편파적인 부분이 보인다.

 

 조선은 늘 그랬다. 의미 없고 맹목적인 교조화된 의명주의, 한족의 속국을 자처하며, 그들의 울타리에 끼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조선은 언제나 변방이었고, 오랑캐였고, 동이였다. 중국의 한족, 즉 명나라가 우리를 그렇게까지 자식의 국가 신하의 국가로 대우했단 말인가? 그렇지 않다.

 

이 책은 그런 우리의 고질적인 의존증과, 안일함, 나태함을 정확하게 알려주는 책이다. 책에 나오는 류성룡은 아마 잘 알려진 위인이다. 그는 임진전쟁 때 전시 체제의 조선을 이끈 지도자였으며, 바다에서 이순신이 분골쇄신 분발했었다면, 육상에서 류성룡은 혼신의 힘을 다해 조선을 이끌어나가며 전체 전선에 대해 종합적으로 조감하며, 관리했었던 재상이었다.

 

나는 얼마 전 율곡 이이의 평전을 보고 리뷰한 적이 있다. 그곳에서 율곡이 외치고 피 토하며 외치던 요지를 읽었었는데 느끼는 바가 많았다. 율곡의 말은 정말이지 신하가 군주에게 할 수는 없는 말들이었다. 이 책의 첫 장에서도 나오는데

 

'200년의 역사의 나라가 지금 2년 먹을 양식이 없습니다. 그러니 나라가 나라가 아닙니다.'

 

'지금 국가의 저축은 1년을 지탱하지 못 합니다. 이야말로 진실로 나라가 나라가 아닙니다.'

 

 

나라가 나라가 아니다... 이보다 더 수치스러운 상소가 있을까? 국가가 존재하는 이유는 백성(국민)들이 편안하고 안전하게 생활할 수 있게끔, 행복할 수 있게끔 만들어주는 것이 존재 이유다. 그런 것을 할 수 없다면, 국가로서 존재할 필요가 없다.

 

조선은 썩어 있었다. 말도 안되는 문치주의의 만연, 무를 괄시하기 시작하면서, 전쟁에 대해 깊은 성찰을 가진 장군도 없었다. 군대는 기강이 빠졌고, 조세는 탐관오리의 만연으로 인해 국고는 바닥나고 군량은 없었다. 비교적 현실적인 사상에서 나왔던 성리학의 신진사대부들, 집권한 사림은 타성에 젖었으며, 쓸데없는 공리공론만을 외치고 있었다. 지방의 군관들은 매관매직으로 관직을 사며, 비공식적이지만 합법적으로 백성들을 수탈했었다.

 

근대 이전에는 국가의 가장 기본은 경제력과 군사력이다. 돈(곡식)이 있어야 백성들을 먹여 살릴 수 있으며, 국방이 튼튼해야 자강을 할 수 있는 것은 누구나 다 알법하다. 그러나 세계에서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나라 조선은 그러지 않았다. 자강을 생각하지도 않았고, 문약한 문치주의에 빠져서, 군사력은 별 볼 일 없게 떨어졌었다. 이런 나라이니, 이웃 나라가 삼키려고 하지 않는 것이 이상하지 않겠는가?

 

임진전쟁은 절체절명의 위기였었다. 이 시기에 우리에게 위인이 있었으니, 바로, 류성룡과 이순신이 그들이었다. 타성에 젖은 대부분의 관료들과, 왕 선조에게는 조선에 대한 믿음이 없었다. 그랬다. 그들은 우리의 백성을 버렸으며, 의병을 등한시하고, 조선군을 믿지 않았으며, 오로지 명, 명나라만을 칭송하고 우대했다.

 

이순신의 발탁과 파격 승진, 문신인 권율의 무관 등용 등 파격적 인사를 한 배경에는 류성룡이 있었다. 국가 비상 위기에 가장 중심이 되어 국난을 책임져야 할 왕은, 도망가기 바빴으며, 그 뒤처리와 책임은, 류성룡이 전면적으로 도맡았다.

 

관료들과 왕은 우리나라를 버리고, 명으로 입조하려 했었다. 그러나 류성룡만이 홀로 끝까지 반대했다. '우리 영토를 벗어나면 절대 안 된다.'라는 말을 외치며, 죽더라도 한반도에서 죽을 것을 고집했다. 그의 저지 덕분에 우리는 지금까지 한글을 쓰고 있으며, 한민족이라는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고 해석하는데 정말로 수긍했다.

 

백번 이해하려고 노력해봐도 이해할 수 없는 조선의 두 왕 '선조'와 '인조', 그들에게는 왕권과 왕좌만의 전부였었다. 조선조 모든 왕들이 왕권 강화를 위해 노력했다는 것은 알고 군주국에서는 그럴 수밖에 없다는 것은 안다. 생각을 했다. 태종과 세조에 선조에 대해서, 태종 이방원 역시 강력한 권력의지와 왕권 주의가 있던 군주다. 그러나 그는 대외적으로 사대를 하며 대내적으로 경제를 발전시키고 국방을 강화하였다. 그리고 그의 왕권 속에는 백성이 있었다. 찬탈한 왕조였지만, 백성을 생각하고 근본으로 생각하는 마음으로 권력을 사용했던 군주다. 자신과 사적으로 아무리 친한 신하더라도 비리 감찰이 보인다면 가차 없이 칼을 휘둘렀던 군주다.

 

세조는 태종과 성향은 같지만 그의 왕권의 속에는 개국 공신과 자신의 야욕만 있던 군주다. 그럼 선조는? 선조의 왕권 속에는 오로지 명과 자신의 생존만 있었다. 그에게 있어 조선 백성과 관군은 불신의 대상이었다. 임진전쟁이 끝나고 폭동이 일어날까 봐 명나라 군사를 주둔시키길 '자청' 했던 군주다. 정말이지 이해를 할 수가 없었다. 자국의 병사와 백성보다도 명이 더 소중했단 말인가? 그런 그가 과연 조선의 임금이라 할 수 있는가?

 

그런 군주와 그런 그가 이끄는 조정에서, 돋보이는 영웅이 있었으니, 해상에서는 조선, 아니 이순신의 군대와 일본군, 양 군이 호남을 걸고 사투를 벌였다면, 육상에서는 류성룡이 포악스러운 명나라의 군대에 군량을 대기 위해서 동분서주하고 있었다고 한다. 우리는 비교적 이순신의 행적만을 자세히 알고 있는데, 실제로 류성룡의 군량 전쟁도 굉장히 큰 의의가 있다.

 

썩어 빠진 조선 관군들을 가지고는 현실적으로 평양과 한성 탈환이 불가능했고, 어쩔 수 없이 명의 군대를 들였는데, 조선이라는 나라는 그 명나라의 군량조차도 지급하기가 힘들었다. 우리가 힘이 없어서 외세를 들였고, 그 외세가 요구하는 필요 이상의 물자를 감당하는데, 그 몫은 모두 류성룡의 몫이었다. 가슴이 아팠다. 우리의 역사는 매번 이런 식이다. 외세의 격돌, 그것은 300년 뒤인 청일전쟁, 러일전쟁, 그리고 중국군과 미군의 전투 등, 모든 부분에서 그랬다.

 

명은 이런 우리를 국가로 취급하지 않았다. 대놓고 무시했고, 조선의 장군과 재상들을 가축 다루듯 다뤘다. 그런 명의 장군들을 선조는 머리 굽혀서 높였다. 그에게는 국가란 없었다. 그에게는 오로지 왕권만이 있었다. 오로지 그 왕이라는 지위를 유지시키기 위해서, 명나라가 행하려 했던 만행, 광해를 왕으로 내세워 조선을 분할하여 역치하려는 주장도 용인했고, 심지어는 조선을 직할 통치하려고 한 명을 무비판적으로 따르려고 했었다.

 

<군주론>에 이런 말이 있다. 마키아벨리는 정벌하기 어렵고 통치하기 쉬운 국가에 대해서, 국왕을 중심으로 똘똘 뭉치기 때문에 점령하긴 어려워도, 점령 후, 왕을 제거하기만 하고 기존의 법도를 존중하기만 하면 통치하기가 쉽다. 조선은 오랜 세습 국가였고 전형적으로 이 형태에 속한다. 명의 입장에서는 조선을 직할령으로 하기엔 더없이 좋지 않겠는가? 같은 유교 문화권에 문화적 사대주의가 심각한 나라니, 국왕만 죽이면, 조선의 반을 먹을 수 있었다. 이러니 일본과 전쟁을 하기보단 강화에 주력하지 않겠는가? 더 웃기는 것은 이런 것을 선조는 알아보지 못하고 오히려 두둔하고 있다는 점이다. 참으로 모골이 송연하지 않을 수 없다.

 

류성룡은 이와 같은 명의 만행에, 목숨을 내놓고 결사반대를 했고, 비록 중국의 속국이긴 한 조선이지만, 나라의 자주권을 지켜냈다. 선조와 같은 우매한 군주가 세상에 어디 있단 말인가, 저자는 임진전쟁은 명나라와 일본의 조선 분할 전쟁이라고 해석했는데 일리가 있었다. 우리나라가 이렇게 남북으로 양분되고 있는 부분, 그 시초는 바로 임진전쟁부터 비롯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물론 이 부분은 전적으로 조선의 군대를 관군의 입장으로 본 해석이다. 이 당시에 관군은 명나라 군대의 서포트 역할밖에 되지 않았다. 오히려 조선군이라 불릴 수 있는 군대들은 의병이었다. 관군의 입장에서 해석한다면, 임진전쟁은, 명과 일본의 전쟁이었다. 그러나 어찌하겠는가? 애통해도 나라와 왕조를 지속시키려면 명의 군대에 의존을 해야만 했던 것이 현실이다. 이 모든 것이 자강을 하지 못한, 조선 왕조의 실책임을... 그래서 책을 읽으면서 더더욱 분했었다.

 

류성룡 그는 명나라의 군대를 지원하였으며, 조선군의 기강을 바로 세우기 위해 노력하고 자강하려 애썼으며(훈련도감, 속오제), 명의 야욕으로부터 국권을 수호하기 위해 노력했었다. 밖으로 일본과의 전쟁을 총괄적으로 주관했으며, 안으로는 나약한 선조를 달래며, 능구렁이 같은 명나라로부터 조선을 지키기 위해 분골쇄신했었다.

 

전시 체제에 있어서, 이런 명재상이 있었다는 점은 정말로 조선으로서는 '행운'이다. 썩어 빠질 대로 빠지고 군사력조차 없으며 백성에 대한 의무를 지지 못하는 국가가 400년이나 지속했다는 것 자체가 운이 참 좋은 국가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러나 그런 운도 400년까지였다. 조선은 늘 그랬다. 류성룡은 주장했다. '징비' 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스스로의 힘을 길러야 한다고, 그렇지 않으면 미래란 없다고, 또 다른 외침이 있을 거라고 강하게 강하게 주장했었고, 저술들을 남겨 후세가 귀감이 되도록 애를 썼다.

 

그러나 우리는 어땠는가? 교조화된 사대주의 의명사상은 존명사상으로 바뀌며, 송강 정철을 비롯한 노론은 다 죽어 없어진 명나라만을 그리워하며 고집했었다. 시대의 흐름을 보지 못했으며, 자강하지 못했으며 징비하지 못 했다. 류성룡이 쓴 <징비록>은 읽히지 않았으며, 여전히 주자학만을 고집했었다. 하나도 바뀌지 않았다.

 

그 결과 어땠는가? 그 조선왕조를 지탱하던 운빨은 결국 한일합방에 이르러서 끝을 고한다. 제2의 이순신은 없었으며 제2의 류성룡은 없었다. 그렇게 우리는 일본의 지배를 받았었다. 결국 운으로 지탱하던 무사 안일주의는 역사적 심판을 받은 것이다. 자강하지 못했던 우리의 한

 

일본은 자국의 사무라이 무에 대한 사상을 발전시켜 경제 대국으로 성장했다. 그래 우리 조선은 뭐가 있는가? 선비정신이 있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하게 묻고 가보자. 그 선비 정신의 원류는 뭔가? 결국 중국의 사상의 복제품이 아닌가? 물론 그 선비정신을 주동적으로 해석한 조선 초의 정도전과 같은 위인들이 있었다. 그러나 조선 중 후반기의 선비정신은 뭔가? 그 문치주의 안일한 대책 없는 현실성 없는 선비정신으로 인해 국가가 약해졌다는 점도 간과해서는 안된다.

 

그 선비 정신을 올바르게 우리나라의 자국화하여 재해석하였다면, 더 나은 발전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우리의 선비정신은 다 죽어가는 명나라를 그리워하고 존중했으며, 정치인들은 바뀌는 시세를 볼 수 없었고 국가는 도태됐다. 그 문약한 문치주의, 선비정신의 사념의 결과가 바로 안전불감증으로 진화하여 지금 현실로 다가온 것 아니겠는가?

 

지금이라고 뭐 다르겠는가? 세월호 사건을 비롯한, 지하철, 버스, 터미널 등에서 산발하는 재난에 대해서, 국가는 국민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생각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가장 고질적인 문제, 안일함과 의존주의 어떻게든 되겠지, 그리고 이어지는 부정부패, 관피아... 그런 것들이 빚어져 터지는 것이 바로 이번 사태들이다. 그 옛날 조선 관료들이 도태되고 썩어 빠진 것과 뭐가 다른가, 시대가 바뀌는데도 불구하고 하나도 나아지지 않은 무능함

 

그 옛날 문약한 문치주의의 조선 왕조가 지탱해왔던 '운' , 그리고 지금 세월호 사태에서 그 불안불안한 배를 아무렇지 않게 운행해왔던 '운'

 

뭐가 다를까? 생각하니 암울하다. 지하에 있던 류성룡은 과연 지금의 국가 사태를 보며 어떻게 생각을 할까? 류성룡이 외치던 자강을 우리는 왜 하지 못했는가? 그토록 징비하라고 그는 외쳤는데... 애석하고 애석할 뿐이다.

 

책은 류성룡의 행적과, 고뇌를 실증적으로, 그리고 비교적 수치들을 동원하여서, 정치사적인 해석뿐만 아니라, 경제적, 사회적인 부분까지 고찰해가며 시대의 아픔을 잘 해석하고 있었다. 저자의 분별 있는 식견이 돋보였었고, 조선 중기의 썩은 모습들을 잘 설명하고 있는 책이었다. 그래서 책을 볼 때마다 마음이 아팠다. 조선의 못난 모습이 이곳에 다 담겨있고, 징비하지 못한 지금의 우리에게도 깊은 시사점을 남기는 책이다.

 

다만 한 가지 걸리는 점은, 저자는 율곡과 류성룡에 대한 해석에서 류성룡에 대한 부분을 높이 산다는 부분이 있는데 이 부분은 관점에 따라 다르게 생각할 수 있겠다. 저자는 율곡이 관념적인 이야기만 했다고 하는데,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류성룡의 글이 율곡보다 현실적이지 못하면 그것은 이상한 것이다. 어쨌든 류성룡은 국난을 직접 총괄했고 국가의 여러 뒤틀리는 부분들을 실제로 경험했었던 재상이다. 그런 류성룡이 율곡보다 더 현실적인 글을 못 남기면 안 된다. 어쨌든 율곡보다 실제적으로 경험하고 본 것이 많이 때문에, 그냥 나는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류성룡이 뛰어나고 명재상이지만, 결점이 없는 것은 아니다. 어쨌든 율곡의 경장을 외치는 것에 당론에 의거하여, 반대를 한 부분에 대한 언급도 없었으며, 실제로 이순신의 탄핵 때, 절친했던 류성룡조차 이순신과의 거리를 둔 부분이 <조선왕조실록>에 있었다. 이런 부분들은 구체적으로 밝혀줬다면 더욱더 인간적인 면모가 돋보였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내 가슴을 뜨겁게 울렸다. 항간엔 지금 조선 초기의 드라마 <정도전>에 열풍으로 인해 조선에 대한 긍정적인 인식이 가득하다. 물론 여말선초의 조선의 건국은 의미가 있는 일이다. 그러나 역사는 단편적으로 이해해서는 안된다. 그 찬란한 국가 조선의 중기는 썩어 있었다. 그랬다. 정도전이 기대를 걸었던 사대부는 썩었고 도태됐다. 고려 말보다도 더 한심했었다. 사명 의식을 가진 올바른 사대부 류성룡과 극소수의 신료들만이 발분해서 조선을 일으켜세웠으나, 결국 우리는 징비하지 못 했다. 그것이 사실이다. 그 조선에 대해서 우리는 알고 있는가? 그 못난 모습은 지금 우리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더불어, 우리 양옆의 중국과 일본인들이 어떤 족속들인지 이 책은 역사적 사실을 통해 소상하게 알려주고 있다. 지금도 별반 다르지 않다.

 

 

끝으로 류성룡이 쓴 상소를 인용해본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하는 일이란 언제나 급합니다. 어찌할 겨를도 없이 급하게 허둥지둥하다가 그만 일을 그릇되게 처리하고 맙니다. 그러다가 그 일이 지나고 나면 금방 해이해집니다. 그러고는 아무 일도 끝내지 못하고 내버려 둡니다. 이것이 오늘날의 큰 폐단입니다. 지금 왜적이 우리나라 중심부에 아직 있음에도 이러하다면, 만약 명나라 군대가 떠나버린다면 다시 믿을 곳이 없습니다.'


'우리나라에서 하는 일은 무슨 일이든 오래 견뎌내는 일이 없습니다. 짧으면 한두 달이고 길어봐야 한 해를 넘기지 못해 중도에서 폐지되지 않는 일이 없습니다. 의지가 굳게 서 있지 못하고 계획이 먼저 정해져 있지 않아, 이리저리 옮겨서 일이 귀착할 곳이 없습니다. 아침에는 갑이란 사람의 말을 좇아서 일을 진행하다가, 저녁에는 을이란 사람의 말을 듣고 일을 폐지합니다.

 

~

 

이미 일을 시작했다면 반드시 그 일을 성공시켜야 합니다. 혹시 일을 맡은 사람이 능력이 모자라고 직위가 맞지 않는다면 사람을 바꿀지라도 그 일을 폐지해서는 아니 됩니다.'

 

 

이게 과연, 임진전쟁 시기에 써진 글이란 말인가? 과연 우린 징비를 했단 말인가? 진심으로 깊은 반성의 마음이 일었다. 이런 애통한 마음의 기록 <징비록>을 과연 우리 국민들은 몇이나 읽었단 말인가? 어쩌면 이 책 역시도, 그런 <징비록>이 인정받지 못함을 탄식하여서, 태어난 책이 아닐까? 정말로 반성해야 한다. 국가도, 관리도, 민간도, 나 역시도... 그래야 열정적으로 민족을 보존한, 류성룡, 선조에게 떳떳하지 않겠는가?

 

지금 세월호 문제를 비롯한 여러 부분에서 나라가 통탄하고 있다.

 

실로, '나라를 다시 만들 때가 되었다.'  개혁을 외치는 지금, 나라 전체를 확실히 바꿔야 할 필요성을 국민들이 느끼고 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린 선조 류성룡에 주목해야 할 필요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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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란의 도시 - 도시에 대한 권리에서 점령운동까지
데이비드 하비 지음, 한상연 옮김 / 에이도스 / 2014년 3월
평점 :
절판


 

 

 

 생각해 볼 여지가 많은 책이었다.  

도시는 지금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있어서 필수 불가결의 장소이나, 이에 대해서 깊게 생각한 점은 솔직히 드물었던 것 같다. 저자는 데이비드 하비라는 마르크스 주의의 지리학자다. 지리학자지만 숱한 사회학서들을 냈었고, 이번 저작인 <반란의 도시>는 그의 영역인 지리학과 사회학이 합쳐진 부분도 보였다.

 

도시라는 장소는 사실, 근대와 현대가 이룩한 가장 발전된 문명의 상징이다. 물론 그 이전 세대에도 발달된 도시가 있었다. 그러나 어느 순간 급격한 사회 변동과 더불어, 기계화되고 고층의 빌딩이 들어서고, 도로가 정비되고, 각종 문화 시설 센터가 등장하는 부분 등은 어느새 우리의 가치관에서 도시의 우열적 척도를 가리게 됐고, 현대화가 더 많이 진행된 도시일수록 우리는 그 도시를 더더욱이나 무의식적으로나, 의식적으로 동경하고 있었다.

 

 지방 태생인 나는 운이 좋게도, 이모들의 생활권이 서울이라서, 어릴 때부터 서울과 지방의 문화를 모두 경험하면서 살았었다. 내 고향 역시도 사실 한국에서는 대도시나 다름없는 곳인데도, 서울 사람들의 눈에는 지방 사람들을 모두 싸잡아 '시골'이라고 지칭하고 있었고, 그 '시골 사람'들은 그런 서울이라는 공간을 대부분 무비판적으로 동경하고 서울의 삶을 꿈꾸고 있었던 것 같다. 이런 양상은 도시화가 진행되지 않은 지역일수록 더더욱 심해진다. 우리 전 세대에서 농촌에서 성공하려면 도시로 나가야 한다는 가치관이 낳은 것이 아닐까도 생각했다.

 

무조건적인 동경, 무조건적인 우열론에 입각해 도시를 생각했던 게 사실이다. 어느 누구도 도시의 권리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하진 않았었다. 다른 사회 현상에 비해서는 비판의 여론이 많았고 우리의 현 모습을 돌아볼 수 있는 주장도 많이 제기됐지만, 그런 부분은 겉으로 드러나는 정치적인 부분이나 경제적인 부분, 사회적 계층화된 부분 등에 국한됐던 게 사실이다. 그런데 저자는 도시라는 생활 공간에 대해서, 문제를 제기하고 올바른 권리에 대해서 생각할 여지를 남기고 있다.

 

하비는 지금의 도시는 자본을 옹호하는 체제로 옮겨가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 주장에 대한 근거로, 여러 부동산 데이터를 비롯해, 여러 자료들을 검토하고 인용하고 있었다. 주류 경제학인 신자유주의에 모순을 비판하며, 결국 도시는 자본가들을 위한 착취의 대상이라고 고찰하고 있었다. 결국 도시화가 진행되고 접근성이 높아질수록, 지대는 높아지고, 그럴수록 도시에 거주하던 빈민층은 교외로 몰려나가게 된다고 주장한다.

 

그런 예시를 들면서 한국 역시도 예시로 고찰하는데 다음과 같다.

 

"1980~90년대 서울에서도 건설회사와 토지개발업자가 험상궂은 용역깡패를 동원해 달동네 주택을 대형 해머로 때려 부수고 주민을 몰아내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1950년대부터 가난한 사람이 거주하던 고지대 토지가 1990년대에 이르러 가치가 높아졌기 때문에 빚어진 일이다. 현대 고지대는 온통 고층건물로 뒤덮여 있어 과거 야만적인 재개발 과정의 흔적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다."

 

이 구절을 보면서, 한 가지 기억이 떠올랐다.

 

내가 내리는 지하철역에서 정면을 바라보면, 고층 지대에 집들이 따닥따닥 붙어 있는 게 보인다. 한눈에 척 봐도, 부유층의 동네는 아니었다. 그리고 나는 지하철역을 지나 오거리에 도착한다. 오거리를 지나면 고층 지대와는 다른 세상이 펼쳐진다. 화려한 '도시스러운 모습'이 나타난다. 오거리를 지나 빌라촌을 이루고 있는 xx 빌리지 안으로 들어간다. 그곳은 아예 입구부터 경비가 서 있다. 한강이 보이는 그 빌라촌은 연예인을 비롯한 여러 재계 인사들이 사는 곳이다. 같은 동에서도 전혀 다른 세상이 펼쳐진다.

 

특히 이 빌라촌을 산책하다 놀란 점이 있었다. 비싼 빌라처럼 보였는데, 관리인만 있고 집은 텅 비었기 때문에, 나는 관리인에게 물어봤었다. '분양을 하지 않나요?'라고 묻자 관리인은 웃으면서 말했다.

 

'집값이 너무 비싸서 지금은 아무도 안 들어오지, 이러다 헐값에 내놓으면, 가진 사람들이 이때다 해서 분양을 해서 랜트를 하거나 하는 거지, 그래도 안 들어오면, 집을 그냥 부수고, 새로 지어서 분양을 다시 하기도 해.'

 

확실히 그 빌라촌을 산책하다 보면 '멀쩡한' 집을 때려부수고, 새 집을 만드는 경우도 눈에 들어왔다. 돈이 돈을 낳고 있었다. 물론 자본주의 체제 입장에서는 어쩔 수 없는 부분이지만, 확실히 생각을 해 볼 여지는 있었다. 한 쪽은 빼앗기다시피 주거지가 공사되는데... 책을 보고 지하철을 내릴 때마다, 고층 지대가 언젠가는 저런 식으로 되풀이되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이 책을 보면서 또 떠올랐던 것이 몇 달 전 sbs에서 했던 <최후의 권력>이 떠올랐다. 특히나 4부인 금권천하 편에서 미국 사회에서 벌어지는, 돈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도시 계획이 떠올랐다. 이 편에서 다루는 것은 미국의 의료보험과 미국 사회의 교육 문제를 다루는데, 특히 미국의 교육 문제를 다룬 편이 이 책의 내용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었다. 이유 없고 무분별하게 공립 학교들을 대폭 줄여버리고, 갑작스럽게 학교를 잃은 아이들의 눈물, 그 이면에는 사교육을 진흥시키고, 특권 사학의 이익을 대변하는 교육 엘리트들의 주연 파티가 있었으며(알렉이라고 불리는 조직), 그들의 내면에는 주지사가 있었다.

 

우리가 동경하고 따라 하기 급급한 미국, 자본주의의 정점을 달리고 있는 미국은 그렇게 돈이 좌지우지하고, 특권의 계층이 도시를 지배하고 있는 그런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돈이 권력이 되고, 그 권력은 특권층을 옹호하게 된다면 그것은 비극이다. 그러나 전 세계적으로 진행되고 있는 도시화의 이면에는 이러한 가치가 없다고 할 순 없겠다. 비단 우리 서울을 비롯한 도시화가 진행되는 대도시들만 봐도 이런 경향이 만연하기 때문이다. 이 책을 봤다면, <최후의 권력> 금권 천하 편을 꼭 보길 권장한다.  

 

 이 책에서 밝히고 있는 도시의 속성은 결국 착취의 대상, 신자본주의의 모순적인 모습을 정당화하는 특권 엘리트만의 공간으로 이야기하고 있었다. 책의 주제는 이것이다. 도시의 개념에 대한 논의와, 도시의 공간이 지향해야 하는 방향 권리는 어떤 것인가,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런 주제로 하비는 자신이 수집한 자료와, 생각을 이 책에 풀어놓고 있다. 그런 주장의 내용에서 도시의 기능 속에 숨겨진 신자본주의의 모순점에 대해서 비판을 가하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같은 좌파 사상을 옹호만 하는가? 아니었다. 마르크스주의자이긴 하지만, 하비는 기존의 좌파 세력에 대한 비판도 하고 있었다.

 

사회학이란 학문은 인간을 다루는 학문이기 때문에 사실, 중도적인 관점을 취하기가 굉장히 힘들다. 따라서 자신이 목표한 결과에 따라서 자료를 취사선택하여, 자신이 유리한 자료만을 내세워 자신의 이론을 정당화하기에 가장 최적의 학문이 사회학이다.

 

 기존의 미국을 필두로 한 신자본주의 국가에서는 자신들이 신봉하는 그 이념의 정당화를 위해, 객관적이지 않은 편파적 자료를 가지고 자본주의를 옹호하여 왔었다. 실제로 마르크스의 사상은 현실적으로 실패했지만, 그러나 의의가 없는 것은 아니다. 인간의 모든 제도는 완벽할 수 없다. 그것은 자본주의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그 모순을 최소화하여서 발전시켜야 한다. 진정으로 발전하기 위해서는 편파적인 눈 가리고 아옹 식의 주의보다는 다양한 관점에서의 문제 제기를 함께 모색을 하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 부분에서 이 책은 굉장히 의의가 있는 책이다. 무비판적인 동경, 문명의 꽃이라 불리는 도시에 대한 환상을 깨고, 이면에 숨겨진 도시에 가치와, 도시가 추구해야 하는 방향에 대해서 진지하게 고찰하고, 주류 경제학이 외면하려 했었던 자본주의의 모순점을 발견할 수 있는 책이다. 공유지에 대한 부분을 비롯하여 지대와 문화활동, 전반적인 도시에 대한 부분을 하비는 그만의 생각으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의아스러운 점은 아무튼 하비는 마지막에 도시에 대한 권리를 촉구하며, 실천적 '반란'을 권고하고 있는데... 월스트리트를 점령하라...이라는 이름에서 볼 수 있듯, 이 전의 차분한 실증과 논증의 분위기가 아닌 다소 격양된 어조로 행동을 촉구하고 있다. 반란에 대해서는 솔직히 좀 현실성이 없어 보이긴 했다. 어쨌든 이 책은 자본주의를 돌아보게 만든 책임은 맞다고 생각했다.

 

아직도 우리 주변에는 서울 만능주의의 사상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 서울이 문화와 여러 가치들이 집중된 도시임에는 맞다. 그 친구들이 보이는 눈에는 63 빌딩이 발전의 상징으로 보일 것이다. 그런 친구들에게 나는 이렇게 말해주고 싶다.

 

'돈이 없으면 서울에서의 삶은 낭만적이지도 행복하지도 않다.'라고 빛나고 가치 있어 보이는 도시의 이면은 그렇다. 자본이 없다면, 농촌 촌부보다도 더 고된 삶이 기다리고 있는 곳, 그것이 바로 도시화의 정점을 찍고 있는 서울의 모습이다, 중요한 것은 도시화된 도시의 환상적인 시선을 걷어내고, 현실적으로 도시의 속성을 바라볼 때다. 도시화가 진행되면 진행될수록 자본의 논리에 너무나도 충실한 것이 도시니까,

 

서두에서 예시를 든 파리의 레알 지구, 파리를 갔을 때, 다른 부분은 이질감이 들었다. 대도시인데도 앤티크 한 건물들이 많았고 그런 부분에서 문화의 차이를 경험했다, 그러나 파리의 중심지 구인 레알 지구를 갔을 때, 그 모던한 현대화된 건물의 친숙함. 주변 경관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그 공간. 거기서 느껴지는 안도감과 동질감 그것은 어쩌면 나 역시도 무의식적으로 현대 도시화의 가치에 물들여있다는 것이었고, 나 역시도 자본주의가 빚어낸 도시의 가치를 무비판적으로 수용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란 생각도 들었다.

 

어쨌든 하비의 이 책은 굉장히 화두를 많이 던져줬었다. 원래 이 책은 하비가 앙리 르페브르의 저서를 보며, 그의 도시 논의를 확장하여 쓴 책이다.(무조건적인 수용이라기보단 비판적인 수용이다.) 어쨌든, 책은 굉장히 실증적인 데이터와 자료를 가지고 조리 있게 잘 써졌으나 마지막 부분이 다소 용두사미가 보여서 아쉬웠다.

 

우리의 도시는 왜 만들어졌는가? 우리의 편의를 위해 필수불가결적으로 형성된 공간이다. 그런 도시는 누구의 것이란 말인가? '누군가의 공간'이 아닌 '모두의' 공간이여야만 한다. 그게 도시가 존재하는 목적이다. 그 가치에 대해 우리는 지금까지 망각하고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공간, 우리가 생활하는 공간 '도시'에 대해서 올바른 권리와, 지향해야 하는 부분에 대해서, 진정한 도시의 '가치'에 대해서 깊은 숙고가 필요한 시점이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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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명사회
한병철 지음, 김태환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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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간평가단이 되고 처음으로 쓰는 리뷰다. 사실 나는 블로그에 책에 대한 서평을 남기려고 노력하고 서평을 쓴 인문서들이 꽤 있다. 그런데 블로그는 나만의 공간이라서 글을 쓰는 데, 제약이 없고 내 맘대로 리뷰의 콘셉트를 잡아서 썼었다. 그런데 이 리뷰는 사실 좀 걱정이 되긴 했었다. 아무래도 신간평가단으로 작성하는 리뷰라, 대중의 의식이 느껴졌기 때문에, 리뷰의 콘셉트를 어떻게 잡아서 써야 하나 고민을 많이 했었었다. 또 한 가지는, 여기 분야의 인문 사회 과학 예술을 지원하는 다른 평가단 분들에 비해서도, 떨어지는 서평을 쓰면 안되겠다는 무언의 강박이 있었기 마련이다. 책을 읽고 며칠을 고민하다, 결국엔 그냥 내가 써 왔던 대로 마음대로 내가 느낀 대로 책을 쓰기로 마음먹었다. 블로그의 서평 모토가, 부족하면 부족함을 드러내고 쓰는 것이다. 따라서 이 생각과 같이, 최대한 내가 읽은 느낀 점을 위주로 글을 전개하기로 생각했었다. 

 

 사실 알라딘에서 신간 2권을 보내 준다고 했을 때, 기대감이 있었다. 뭘 보내줄까라는 그런 설렘으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는데, 이 책이 선정됐다는 소식을 듣고, 기쁨 반, 아쉬움 반의 감정이 교차됐다. 우선 아쉬움부터 이야기를 하자면, 생각 외로(?) 책이 적은 분량이었다. 아무래도 받는 김에, 값이 나가고 두툼한, 좋은 책이지만 압박적인 가격을 자랑하는 책을 받았으면 좋겠다는 이타적인 마음이 있었었다. 그런데 한편으로 생각해보니 잘 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냐, 어차피 이 책은 내가 관심을 가지고 있었고, 적은 양에 비해서, 가격은 높아서 선뜻 또 사기에는 미묘한 그런 부분이 있었기 때문이다. 책을 많이 애독하지만, 이런 부분에서조차 속물적인 근성이 발동하는 나의 모습을 보며, 자조적으로 한심함을 느끼기도 했었다.

 

 어쨌든 한병철은 친숙했다. 이유는, 한병철의 전작인 <피로사회>도 봤었기 때문이다. 해제에서 나오듯, 한병철은 현대 사회에서 부정적으로 인식하는 가치에 대해서, 재발견을 하고 재해석을 하며, 오히려 긍정성의 가치에 대해서 검토하고 살펴보는 철학자였다. 전작인 <피로사회> 역시도 그런 책이었다. 근대 산업혁명 이래로, 과도한 긍정주의와, 포스트모더니즘, 그리고 자본주의의 모순 등을 신랄하게 파헤치며, 인간이 이룩한 성과사회의 모순점을 적나라하게 비판한다. 그는 여러 선현들의 철학자들의 논의를 비판하며, 그의 주장을 드러낸다. 

 

 이 책 역시도 그 연장선에 있었다. 우리가 긍정적으로,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던 투명성이라는 부분에 대해서, 전면적으로 재고하며, 비판을 가하고 있다. 이 책에서 나타나는 두 대립된 측과 개념은 갈등을 유발하고 있었다. 기존의 무비판적으로, 무의식적으로, 관념적으로 긍정된 가치관과 한병철이 주장하는 부정의 가치관은 시종 일관 책에서 격돌하고 있었다. 책의 가장 핵심적인 테마는 갈등이었다. 그 싸움에서 한병철은 기존의 긍정된 투명성을 그만의 불투명성의 철학으로 전면적으로 재고한다.    

 

 책은 두 부분으로 나뉜다. 첫 번째 챕터인 <투명사회>는 거국적인 사회의 투명성에 대해서 검토하고 전반적인 사회의 투명성을 재고하며, 여러 부분을 고찰해나간다. 논의 전개에서 여러 철학자들의 글과, 그것을 검토하고 반박하는 한병철의 현학적인 수사가 돋보였던 단락이었다. 물론 그만큼 이해하는데 더 집중을 요했었다. 느낌 상이었지만, 전작인 <피로사회>에 비해서 어렵게 다가왔던 것 같았다. 위의 챕터가 전반적 사회의 고찰이었다면, 두 번째 챕터는, 투명사회의 가치관에 입각하여 한 대상에 집중적으로 논의를 진행하는데, 그 대상은 디지털 사회에 대한 부분이다. 이 두 번째 챕터는 생각보다 쉽게 논의가 전개됐다. 물론, 이 단락에서도 하이데거를 비롯한 롤랑 바르트 등의 철학자들의 논의가 있지만, 위 챕터보단 이해하기가 수월했다.

 

 세월호 참사를 겪으며, 마음이 많이 아팠다. 그래서 무의식적으로 페이스북을 들어가 봤다. 하루 만에 선장의 얼굴이 공개되고 신상이 공개된 글에 좋아요가 엄청나게 달렸고, 내 지인들은 그것을 퍼 나르고 있었다. 물론, 그 선장은 도의적으로 잘못했다. 그러나 나는 이 현상을 보고 공포를 느꼈다.

 

 책에서 주장하는 대로 그것은 '디지털 파놉티콘'의 전형적인 모습이었다. 정보의 공개 투명성의 가치를 내세우면서, 우리는 알게 모르게 서로의 모든 부분을 감시하고 있다. 확실히 우리 사회는 모든 부분에서 투명의 가치를 내세우고 있다. 세월호 사건이 터지고 온갖 정보가 쏟아져 나왔다. 이쪽에서 주장하는 것도 정보였고 저쪽에서 주장하는 것도 정보였다. 정보가 넘쳐나고 있었고, 그 정보와 정보끼리의 난잡한 '난교' 현상에서 나는 책에서 말하는 정보피로증후군(IFS)를 느꼈다. 과연 이게 어떤 정보가 옳은 것인지, 분간이 안 됐다. 추이를 지켜보고 생각을 정리하고 싶었는데, 하루가 지나면 몇 백가지의 정보가 쏟아져 나왔다. 나의 사유는 그 정보의 홍수 속에서 길을 잃었었다. 그것은 정보들의 난교적 해석으로도, 그리고 책에서도 상징하고 있던 투명성이 극대화된 '포르노 사회'였다.

 

 판단과 사색은 시간을 필요로 한다고 책에서 말했다. 그리고 정보는 즉각적이고 빠르게 전달된다. 우리는 투명성을 외치며, 즉각적이고 즉답적인 해답을 갈구한다. 그래서 판단과 사색의 기다림의 미학은 사회적인 가치로부터 떨어지고 있다. 그리고 그것의 본질에는 투명을 추구하는 우리의 가치가 내재되어 있었다. 확실히 그랬다. 판단과 성찰 그런 지식적인 부분은 기다림을 필요로 한다. 사색이라는 가치도 그렇다. 그러나 정보는 그러한 기다림의 가치를 깔아뭉개고 있었고, 인터넷이라는 시공간을 초월한 공간은 그런 정보를 우리에게 홍수처럼 쏟아붓고 있다.

 

 그러한 무차별적인 정보 속에서 몇몇의 인간은 익명성을 빙자한 악플을 달고 있었다. 책에서 말한 대로 그들은 격분하며, 어떤 대화도 논의도 불가능한 사태를 불러일으킨다. 그 악플러의 격분에서 디지털이 야기한 병폐 중 하나인 전형적인 히키코모리적 나르시시즘 보이고 있었다. 그런 자들이 내뿜는 악플은 자신의 주장과 맞지 않으면 득달같이 달려드는 승냥이 때와 다르지 않았다.

 

 진정한 주권자는, 악플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자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그러나 나는? 우리는? 우리 사회는? 그러한 악플과 인터넷으로부터 자유로웠나? 다시 한 번 생각해 볼 문제였다.

 

'포르노 사회' 저자는 투명사회를 그렇게 지칭했다. 정말로 적절했다. 손뼉을 치고 싶을 정도로, 흔히 야동을 볼 때 가장 설레고 감정의 최고조가 됐을 때가 어느 시점일까? 개인마다 다르겠지만 나는 여주인공이 옷을 벗을까 말까 하는 그 전희가 가장 설렘이 있었다. 벗기 전에는 나만의 상상이 가능하다. 나만의 해석도 가능하고, 기대감도 있기 마련이다. 그러나 벗는 순간 그런 기대는 없어진다. 그리고 점점 벗은 모습에 무감각해지는 것 같았다.

 

 포르노의 속성이 그렇다. 그것에 사랑이라는 것도 없으며, 심지어 전희라는 단계도 없다. 여자의 몸은 너무나도 투명하다. 에로스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에로스에는 사랑이 있으며, 육감적인 사랑의 철학이 내재되어 있다. 포르노는 그냥 투명한 것이다. 투명 사회가 그렇다. 너도나도 다 급하게 알려고 하는, 그런 사회에서는 서로를 알아가는 과정은 무시된다. 그래서 빠른 정보를 우선시하고 난잡한 정보들끼리 난교가 시작된다. 깊은 사색과, 깊이 있는 생각은 멀어진다.

 

 포르노는 상품적이다. 투명 사회 역시도 그렇다. 보기 좋게 잘 전시된 정보나 매개체는 자본주의를 만나 저열한 상품으로 추구된다. 보기 좋은 것에서 우리는 획일화를 느끼고 다양성은 사라지고 있다. 좋아요가 많은 포스팅은 당연하게 받아들여진다. 온 국민이 원하는, 날씬하고 예쁜 몸매, 그것 역시도 어떻게 보면 다양성의 상실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뚱뚱함의 미학, 그리스 시대의 조각품에 나오던 그런 미의 관념은 이제 사라졌다. 투명을 빙자로 포르노 사회는 모든 상품을 전시시키고 있었다.

 

 참사의 실존만으로도 마음이 아팠다. 그런데 너무나도 투명적인 이런 사태들 때문에, 더 혼란스러웠던 4월이었다.

 

 내가 페이스북을 관둔 것도, 익명성 커뮤니티 사이트를 내가 관둔 것도, 이 책에는 잘 설명돼져 있다. SNS의 모든 가치는 수량화 개량화로 귀결된다. 친밀감은 친구의 숫자로 판별되고, 자신의 가치는 좋아요의 숫자로 결정 난다. 리플은 자신의 인기로 귀결 난다. 그 속에 진지함이나 진득함보다는 무조건적인 가시적, 몰가치적인 부분만 있었다.

 

 디지털 민주주의에 대한 부분도, 그리고 디지털 파놉티콘의 논의에 이어지는 전 국민의 프로토콜의 흔적의 삶도, 하이데거를 인용하여, 진득한 농부의 삶이 아닌, 사냥감을 찾아다니는 사냥꾼의 모습이 된다는 책의 논의도 모두 공감했다.

    

 결국 내가 블로그를 하는 것 역시도, 내 나름의 소신 있게, 글을 쓰고, 표현하는 공간으로 생각하지만, 가끔은 댓글도 많은 이웃들의 블로그나 공감이 많은 블로그를 보면, 뭔가 돌아보게 하는 느낌이 들게 하는 이런 부분도(좋아요의 관심, 댓글의 관심) 디지털 사회가 야기하는 중증이었다. 이 책을 보며 나 역시도 블로그에 대해서 어떤 철학을 가지고 운영해야 하나에 대해서, 어떻게 하면 좀 더 바르게 사용할 수 있나에 대해서,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이런 그 모든 원론적인 부분엔, 과도한 긍정, 투명성이 지배하고 있었다. 그 투명성을 대표적으로 구현하여 나타나는 것이 디지털 문화다. 그래서 그럼 어떻게 살아야 하는데? 해답은?이라고 저자에게 묻고 싶었다. 그러나 저자는 문제만 진단하고 있을 뿐 해답은 주지 않았다.

 

 어쨌든, 해답의 부분은 스스로 찾아야 하는 것이겠지, 그렇다고 해서 인터넷 없이, 스마트폰 없이 살아간다는 것도 현실적이지 못하다. 다만, 우리는 이런 부분에 대해서 한 번쯤은 고찰을 해 봐야 한다. 그저 도덕 교과서 뒷부분에 나온 것 마냥, 정보화 사회의 문제점이라고 짤막하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진지하게 우리의 인터넷 문화를 비롯한, 사회의 전반적인 투명성 가치에 대해서 생각을 해 봐야 하겠다. 정치적인 부분, 경제적인 체제에 대한 부분, 사회적 현상 모든 부분에까지 심사숙고가 필요한 시점이긴 하다. 특히나 우리나라같이 디지털 강국(??)이라는 나라에서는 이 문제는 더욱더 절실하다고 느껴졌다.

 

 어떤 사물이라도 흑과 백은 존재하기 마련이다. 지금까지 우리는 투명성이라는 부분에 무비판적으로 백의 관점으로만 이해하려 했었다. 그러나 확실히 이번 사태나 이런 부분에서 흑의 관점도 고찰을 해 볼 필요는 있다. 이 책은 그러한 화두를 던져준 책이었다.

 

 마지막으로 언급하고 싶은 부분은, 그래도 정치적인 부분에 대한 투명화는 좀 더 논의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저자의 말 대로, 정치의 속성은 비밀적이고, 공개적이지 않다는 부분도 동의한다. 인간은 이율배반적인 모습이 있는 동물이다. 나의 비밀은 공개하고 싶지 않으면서 다른 이의 비밀은 알고 싶어 하는 것이 인간의 모습이다. 마찬가지다. 이렇게 생각하면 참 모순이라 생각하겠지만, 사회현상에 대해서는 투명성에 부정에 대해서, 전반적으로 찬성하지만, 정치적인 요소에서의 불투명성을 옹호는... 솔직히 선뜻, 손을 들어주기가 어렵겠다. 어쨌든 권력은 감시해야 하는 부분이다. 우리는 이 정치적 자유를 획득하고자 많은 대가를 치러왔었다. 정치와 정책이 투명하여 보이는 정치, 즉흥적인 정치를 추구하는 단점은 있을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들은 공인이고, 국가권력이 집중된 자들이어서 감시를 하지 않는다면, 더 큰 문제가 야기될 수 있겠다 싶었다. 그래서 이 부분에 대한 것은 생각을 해 봐야 한다고 느꼈다.

 

 또 하나의 문제점은 철학서들이 그렇듯, 조금은 궤변적인 부분이 있긴 하다. 그리고 내용 자체가 조금 어렵게 전개되는 부분도 있다.

 

 어쨌든 책의 논의가 재미있게 전개된다. 대립되는 두 축의 갈등의 야기, 긍정성과 부정성의 속성의 격돌, 그 사이에서 한병철은 부정의 가치를 현란한 수사로 이야기하고 있었다.

 

 책은 적절한 시기에 배송됐다. 4월, 너무나도 아팠던 사건이 있었을 무렵 비를 뚫고 배송 왔던 것으로 기억한다. 책을 읽으며, 나는 서두의 아쉬움적인 부분과, 위의 속물적인 생각을 한 번에 떨쳐버릴 수 있었다. 그만큼 책의 내용이 좋았었고, 다소 가성비적인 부분에서 고뇌를 하게 만드는 작고 적은 책이지만, 지금 시대를 살아가는데 있어서, 꼭 필요한 부분을 논설하고 있었던 책이었다. 사실 솔직하게 말해서, <피로사회> 보다는 <투명 사회>가 더 현실적으로 와 닿았었던 것 같았다. 그만큼 책의 내용은 좋았다. 작고 적은 크기의 책이지만, 내용은 그 이상이다.

 

 

 

4월 이 책을 보던 시기, 참사에 마음도 아팠고, 그리고,

투명하고, 너무나도 투명하여서,

더 혼란스러웠던 한 달이었었다.

 

그런 나에게 이 책은 여러모로, 깊은 성찰을

제시해 준 책이었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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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트루초 카스트라카니의 생애
니콜로 마키아벨리 지음, 우현주 옮김, 김상근 해제 / 살림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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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금연휴의 대부분을 마키아벨리와 보냈다. 새로 번역된 <군주론>을 깊이 있게 독서했고, 이 책 <카스트루초 카스트라카니의 생애>와도 같이 보냈다. 이 책은 마키아벨리의 후대 저작 중 하나고, 역사적 인물에 대한 짧은 생애를 서술한 책이다. 카스트루초는 실존 인물로, 마키아벨리의 조국 피렌체를 침공한 용병 대장이자 군주였다.

 

마키아벨리의 저작은 굉장한 특징이 있다. 첫 번째로 그의 의도를 숨겨놓는 필법이 그것이고, 두 번째는 사실 관계에 대한 과장과 축소가 나타난다는 점, 세 번째로는 작품 내에서 대립각의 축이 나타나고, 어떤 가치관의 충돌이 항상 보인다는 점이 그 특징이다.

 

이 작품 역시도 그렇다. 책은 실존 인물인 카스트루초를 객관적인 묘사로 사실 그대로의 그를 그린 것이 아닌 허구를 집어넣은 책이다. 즉 사실로서도, 주관적으로서의 역사서도 아닌, 말하자면 마키아벨리가 각색한 카스트루초의 역사 소설이라고 할 수 있겠다.

 

내용은 사실 단순하다. 비범한 카스트루초가 용병 대장으로 활동하다가, 본국 루카를 장악하는 과정, 그리고 옆 도시인 피사와 피스토니아를 점령하는 과정, 그리고 마지막으로 나폴리의 지원을 받은 피렌체군을 섬멸하며 반도의 통일을 꿈꾸지만, 결국의 포루트나(운명)을 극복하지 못하고 병사하는 모습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특히 마지막에 카스트루초가 양아들에게 말하는 유언 그것은 바로 마키아벨리가 독자에게 하고 싶은 말을 대신하는 것이었다.

 

 물론 읽으면서 우리와는 다른 문화와, 이탈리아 특유의 지명과 인명에 대한 언급이 나올 때, 지식이 없어서 잘 읽히진 않았는데, 다분히 마키아벨리가 쓴 의도나 이 책을 통해서 언급하고 싶은 부분은 이해할 수 있었다.

 

김상근 교수의 해설은 뭐 무난했는데, 개인적으로 잘 못 느꼈다는 부분이 한국의 현실론적인 눈으로 마키아벨리의 이상적인 정치관을 이해하려고 해서 마키아벨리에 대한 오독과 편견이 생긴다.라고 한 부분. 나는 이 부분에 대해서 좀 바꿔야 한다고 생각한다. 한국의 이상론적이고 관념적인 눈으로 마키아벨리의 현실론적인 사상을 이해하려고 하니, 오독의 여지가 있다고 말이다. 이 부분은 사실 이번에 이 책과 더불어 봤던 새로운 역본 최장집 교수의 <군주론> 해설에 나오는 말인데 개인적으로 이 해설이 더 와 닿았고 맞다고 생각했다. (자세한 논의는 <군주론> 서평에 남기겠다.)

 

그 외 다른 부분들에 대한 것은 무난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포르투나와 비르투에 관한 이야기를 할 때, 결국 카스트루초는 강한 비르투 (역량을 비롯한, 여러 인간의 주관적인 의지 - 한국어로 표현하기 힘든 부분이라 원어로 표기했다. 마키아벨리의 사상 중 가장 중요한 개념 중에 하나다.) 를 가지고 있었지만 포르투나(객관적 운명과 상황, 수동적인 여성성 - 역시 마키아벨리의 비르투와 대립각을 세우는 개념으로 중요한 개념)를 극복하지 못 했다. 김상근 교수는 이 책으로 결국 비르투를 가지더라도 포르투나를 이길 수 없고, 포르투나에 대한 경외성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나는 이 부분에 동의를 할 수가 없었다. 이 부분은 사실 후대의 자의적인 해석이 분분한 부분인데, 그 이유 중에 하나가 바로 마키아벨리의 의도를 숨긴 필법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밑에 자세히 다룸)

 

 일단은 첫 번째 궁금증, 왜? 그럼 왜? 이 역사적 인물을 이렇게 각색을 해가면서 전하고 싶은 주제는 뭘까? 또 한가지 모순은 우리는 사실 마키아벨리를 전제군주 옹호론자로 이해하고 있지만 그의 주장은 사실 공화주의를 외치고 있다는 점, 그런 면에서 마키아벨리는 '겉으로는' 공화주의자다. (이 부분도 <군주론> 리뷰에서 심도 있게 다루겠다.) 그런 그의 대표적인 이중성을 보인 것이 바로 <군주론>이다. 그러나 그는 군주에게 호의와 희망을 걸었지만 결국 군주에게 불리지 않았고, <로마사논고> - 공화주의가 강하게 표출된 책.을 저술했다. 그런 그가 왜? <로마사논고>를 써 놓고 다시 전제 군주정의 예시 사례인 <카스트루초 카스트라카니의 생애>라는 책을 저술하여서, 전제 군주의 표상을 그리는 것일까? <로마사논고>를 저술한 마키아벨리는 스스로 공화주의를 지지한다고 직접적으로 밝혔었는데, 왜 공화주의에 입각한 영웅을 그리지 않았을까?

 

나는 책을 읽으며 정말로 궁금했다. 이 부분은 어느 책, 어느 해설에도 지적하지 않은 부분이다. 그러나 나의 궁금증은 이 부분에서 머물렀었다. 해답은? 아직까지도 나는 마키아벨리의 진정한 의도를 잘 모르겠다. 어쨌든 이 책을 보면 볼수록 카스트루초는 마키아벨리가 선호하는 공화주의가 아닌 강력한 전제 군주의 모습이었다.

 

책의 영웅은 사실 '체사레 보르자'와 너무나도 비슷했다. 즉 <군주론>의 모범적 모델, 실존적 인물의 모델이 바로 '체사레 보르자' 라면, 마키아벨리만의 관념적이지만 이상화된 모델은 바로 '카스트루초' 라는 셈이다. 카스트루초는 많은 면에서 체사레 화가 됐을 정도로 마키아벨리는 각색시킨다. 책의 카스트루초의 면모를 자세히 살펴보면 체사레 보르자의 일란성 쌍둥이라 할 정도로 닮아 있다는 점.

 

과연 <군주론>으로 실패하고, <로마사논고>로 공화주의를 열망하던 그가, 왜 다시 <카스트루초 카스트라카니의 생애>를 저술하면서 다시 전제 군주의 롤모델을 제시하고 보이고 있는 것인가? 이 부분에서 나는 과연 대체 마키아벨리의 진정한 모습은 무엇일까?라는 의문이 들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런 꼬이고 꼬인 마키아벨리의 알 수 없는 얼굴에서 나 역시도 매력을 느껴, 그를 좋아하는 것이라는 것도 생각해봤다.

 

그리고 또 한 가지, <군주론>에서 마키아벨리는 분명, 포르투나는 인간의 대부분을 관여할 수 있다. 하지만 비르투를 통해서 포르투나의 홍수를 예비할 수 있다. 따라서 그는 포르투나와 비르투가 인간에 미치는 영향은 반반이라고 정의하며, 비르투를 갖추고, 포르투나의 홍수를 대비할 것을 주장했다. 다소 포르투나의 영향력에 대해 비르투의 역량을 강조하고 예방할 수 있다는 신념이 담긴 것이 <군주론>의 주장이다. 

 

그러나 <군주론>의 역사적 사례로 든 체사레 보르자는 결국 포르투나에 굴복했었다. 강한 비르투를 가지고도 실패했는데, 그럼 마키아벨리가 후대의 이상향으로 꼽은 카스트루초의 경우는 얼마든지 각색하여서 비르투로 포르투나를 이길 수 있는 스토리를 쓸 수 있었다. 진정 그가 <군주론> 본문에 입각한 비르투에 대한 가치를 드높이려면, 얼마든지 카스트루초의 일대기를 통해, 그 이상향을 표현할 수 있었다. 그는 애당초 이 책에서 카스트루초에 대한 삶을 진실적으로 규명하지 않고 앞에서 밝혔다시피 자신의 생각에 따라 '각색'을 시도했기 때문에 책의 결론 따위는 얼마든지 바꿀 수 있었다.

 

그러나 놀랍게도, 체사레와 같이 카스트루초도 결국엔 강한 비르투를 가지고도 포르투나를 극복하지 못하여 죽는, 비극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이것은 뭘 의미하는 걸까? 군주론의 본문에서 주장했던 비르투와 포르투나의 관점과 실제 영웅 체사레와, 각색한 영웅 카스트루초의 묘사에서 나오는 주장(비르투와 포르투나에 대한 관점)은 전혀 상반된다. (물론 체사레의 경우는 실제 사례를 그대로 쓴 것이라 논외로 친다고 쳐도), 과연 그의 의중은 무엇일까? 그는 비르투로 포르투나를 최소화할 수 있고, 대비할 수 있고 극복할 수 있다고 하는 인간의 의지를 중요시한 것인가, 아니면 그 반대로 운명론자의 모습인 건가?

 

 분명히 책은 <군주론>의 이상적인 롤모델을 써 놓은 전기가 맞다. 따라서 <군주론>의 후속편이라는 성격이 강하다. 두 책 모두 마키아벨리가 지향하는 강력한 군주에 대한 논의가 담겨있으니까, 그러나 같은 사상을 지닌 두 책에서도 마키아벨리는 이런 이중적인 모습을 보이며, 과연 어디에 진실을 숨겨놓고 있는지는 독자의 몫으로 돌려놓고 있다. (이것은 모든 마키아벨리의 저서에 나타난 부분이다.)

 

책은 다소 작고, 적다. 그리고 담긴 내용에 비해서는 비싼 편이다. 147쪽에 11800원... 상당히 비싼 책임에는 맞다. 그리고 잘 알려지지 않은 책이라서 국내 최초 번역이라 하는데, 이건 틀린 말이다. 국내 최초의 원전 번역이라 해야 옳다. 왜냐면 옛날에 범우사에서 군주론의 부록에 카스트루초의 이야기를 담아서 냈기 때문이다. 물론 이중 번역본이겠지. 아무튼 이런 광고 문구에서도 아쉬움을 느꼈지만, 나는 이 책을 구매했다. 이탈리아어 원전 번역본이고, 예전의 카스트루초 이야기보다도 훨씬 가독성이 좋았기 때문에 예전 판본보다 이해하기도 더 수월했다.

 

책을 읽고 나서 마키아벨리의 초상을 봤다. 야릇한 미소를 띠고 있는 그. 과연 그의 진심은 무엇인 것일까? 한 권의 책 사이에도 모순적인 부분을 서술하고, 책과 책 사이에도 모순적인 부분을 제시하며, 전혀 다른 사상의 책을 내면서 어디에 진심이 담겨 있을 것인가에 대한 실마리를 찾는 것. 그것은 마키아벨리의 저서를 보는 또 다른 즐거움임에 틀림없다.

 

사실 책의 내용은 간단하다. 그리고 사실 좀 재미는 떨어진다. 하지만 <군주론>과 이 책의 역학 관계를 생각한다면, 그리고 왜 이 책을 저술했나? 과연 이 책으로 무엇을 표현하고 싶었을까에 대한 부분을 생각한다면(김상근 교수의 해설이 있지만 사실 마키아벨리의 본심에 대해서 너무 자의적인 해석이라고 생각됐다. 르네상스 시대의 객관적 분석은 일리 있으나, 마키아벨리의 주관적 해석 부분은 따르지 않고 참고만 하길 바라는 바다) ,쉽지 않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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