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마법 임동석 중국사상 63
사마양저 찬, 임동석 역주 / 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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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법서라고 다 같은 사상이나 전략과 전술만을 이야기하진 않는다. 각 병법서마다, 추구하는 사상이 조금씩 다르기도 하고, 어느 병서는 전략적인 부분을 어느 병서는 실제 전술적인 부분을, 어느 병서는 군법에 관한 부분을, 등등 책마다 강조하는 것이 다르기 마련이다. 무경칠서로 이야기되는 병법서들 역시도 마찬가지다. 7권의 책은 병가라는 철학 특유의 권모를 중시하는 부분도 있지만, 세부적으로 우위에 두는 철학은 각 책마다 다 다르다.

 

<사마법>은 그 중 사상적으로 가장 독특한 특성을 가지고 있다. 텍스트는 굉장히 짧은 책이며, 소실이 많아서 분량도 얼마 되지 않는 병법서다. <사마양저병법>, <사마병법>이라고도 통칭되는 이 병법서는 제나라의 명장 사마양저가 지었다고 하는 병법서다. 흔히 병가를 집대성한 손무의 외가가 사마양저라고 끼워 맞추는 소설 등이 있는데, 밝혀진 바는 없으며,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억측에 불과하다고 생각한다. 분명한 사실은 손무 이전 세대의 사마양저는 그 당시 시대에 병가의 선각자였음에 틀림없고, 손무 역시 그의 저술이나 사상에서 많은 영감을 받은 것 같았다.

 

<사마법>의 사상적 특이성은 '의전론'을 강하게 주장하고 있는 부분이다. 즉 인위와 도덕, 명분을 앞세운 전쟁을 선호하고 첫 장의 제목 '인본'에서 보듯, 인과 예를 중시하여 전쟁을 치러야 한다는 명분주의 전쟁을 지향하고 있다. 사상적으로 유가 사상에 깊이 연관을 받은 것 같이 느껴졌다. 쉬운 예로, 몇 가지 들어보자면, 적이 상을 당했을 때에는 공격하는 것은 도의에 어긋난다. 겨울과 여름에는 군대를 일으키지 않았는데 이는 아군과 적군의 백성 모두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의를 두고 다투었고 이를 두고 다투지 않았으니 이로써 용을 밝혔던 것이다. 앞의 구절들에서 볼 수 있듯 유교적 덕목 명분주의에 입각한 병법서라고 할 수 있겠다.

 

책을 보며 송 양공의 고사가 생각났다. 송나라가 초나라와 싸울 때, 송 양공은 먼저 전쟁터에 도달했다. 초나라 군사들이 강을 건널 때 제장들은 공격을 가해야 한다고 했다. 원래 병법에서 물가를 지나는 병력을 강을 건널 때 공격하면 승산을 잡을 수 있다고 가르쳤기 때문이다. 그래서 병법에서는 습지나 물을 만날 때는 신속하게 지나치라고도 경고를 했다. 그러나 양공은 그것은 '의'에 어긋난다 하여 초나라 군사들이 전열을 가다듬을 때까지 기다려주고 결국 초나라와 싸워서 패배하며 자신 스스로도 목숨을 잃고 만다. 지금의 가치로 보면 참으로 어리석어 보이는 행동이지만, 그 당시에서는 송 양공을 뛰어난 군주라며 칭찬한 사람들도 많았었다. 대표적으로 맹자 역시도 양공의 의를 행한 행적을 칭송한다.

 

그러나 이 부분은 명분적인 '의전론'의 한계를 보여주는 부분이다. 전쟁이란 명분이 중요하다. 전쟁을 일으키는 동기적인 부분에서 명분이 없다면 목적 없는 전쟁으로 비치기 마련이고, 그렇게 된다면 부하들의 사기에도 많은 영향을 미친다. 그렇지만, 실제 전투에 들어갔을 때, 명분을 어디까지 인정해야 하느냐는 관점에서는 역대 병가들은 현실을 중요시했다. 전쟁에 돌입한 즉시, 장군은 이기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야 한다. 우리는 병법 이론이 기업 경영과도 상통한다고 하나, 경영과 병법의 가장 큰 차이점은 이런 극도의 현실 추구의 정도 차이라고 할 수 있다. 기업에는 엄연한 윤리와 도덕이 있고, 불문율에 그런 부분들을 지키며 경쟁을 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전쟁이란 그런 것이 허용되지 않는다. 그랬다간 내가 죽는다. 인간에게 있어서 생존이라는 것은 무엇보다도 가장 우선시되는 덕목 중 하나다. 따라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승리로 일궈내는 것이 전쟁이며, 이겨내서 전쟁 초에 내세웠던 명분을 증명해 보이는 것이 전쟁이다.

 

그런 부분에서 보자면, <사마법>의 의전론은 지금 시대와, 어쩌면 춘추전국 약육강식 시대에서 한계가 있다고 할 수 있겠다. 전쟁의 동기를 인간의 야욕에서 찾아낸 <오자병법>의 사상과도 상반되는 부분이다. <사마법>에선 군대를 일으킬 때에는 의와 예에 입각하여야 한다고 주장하는데, 두 사상은 상당히 상반적인 부분이다.

 

그렇다고 해서 <사마법>이 병가 특유의 권모를 경하하고 있지 않다. 책 중반부에 보면 이런 대목이 나온다. '무릇 전투에서 가장 훌륭한 것은 근본(모책)을 사용하는 것이며, 그다음에는 지엽적인 공전과 징벌의 방법을 사용하는 것이다. 장수는 책략을 잡고 은미함을 지켜야 한다. 본말은 오직 권변으로 승리하는 것이다.' 이것은 결국, 전쟁을 '의전론'으로 시작하더라도, 실제 전투에서 장군은 책략을 은밀하게 사용하며, 결국 전쟁의 승패의 본말은 권모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이것은 결국 병가 사상들이 강조하고 있는 권모숭상이 나타나 있는 부분이라 생각했다.

 

<사마법>은 평화를 지향하는 병서지만, 평화 시에 전쟁을 항상 유념하고 신경 써야 하며 군사 훈련들도 갖춰야만 평화를 유지할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이 부분을 보며 조선이 생각나기도 했다. 조선 초에는 상당히 강력한 군사정책을 시행하여 부국강병의 초석을 닦아놨는데 성종 이래로 태평성대가 열려, 나라의 국방이 저하되기 시작됐으며, 국방력 약화의 방점을 찍은 것이 임진전쟁과 병자전쟁 정묘전쟁이다. 전쟁을 지향하는 것도 안 좋지만, 지양하는 것 역시도 경계해야 한다. 나라의 근본은 경제력과 국방이라는 점은 지금도 유효하기 때문이다.

 

<사마법>의 초반이 '의전론'에 무게를 뒀다면 <사마법>의 중반은 군법에 대한 이야기가 강조되고 있으며, <사마법>의 후반에 이르러야 현대적으로 의의가 와 닿을 수 있는 장수의 리더십에 대하여 거론되고 있다.

 

<사기열전> 사마양저열전을 보면, 사마양저가 얼마나 군법을 중시했는지 나와 있다. 당시 사마양저는 제나라 경공에게 발탁되었는데, 한미한 출신을 가지고 있어서 군대를 통솔하기에 위엄이 서지 않았다. 고민한 양저는 경공에게 한 가지 청을 하는데, 경공이 아끼는 부하 한 사람을 보내 달라고 해서 자신의 군율에 위엄을 싣게 해 달라고 말했다. 그랬는데, 문제는 경공이 아끼던 신하가 늦게 도착한 것이다. 송별연에서 술을 거하게 마시다가 합류한 시간에 늦게 도착했는데, 양저는 이 군주의 신하를 목을 참수함으로써 군법의 지엄함을 보였다. 경공은 뒤늦게 부하가 위험에 처했다는 사실에 급히 사신을 보내 양저에게 참수를 취하하라는 명을 전달했으나 양저는 '장수가 밖에 있을 시에는 군주의 말을 다 따르지 않는다.'며 단호하게 전장으로 나아간다. 

 

위의 예를 보듯, 사마양저는 굉장히 군법을 중요시했다. <사마법>이라는 제목 자체에서도 풍겨 나오듯, 법이라는 대목에서 군법에 대한 부분들을 직접적으로 드러내는 것이 아닐까라고도 생각했다. 책에서의 군법은 고대 이래로 행해지던 군법들을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있었다. <사기열전>에서 보이듯, 이 당시 군법은 상당히 문란했을 것으로 추측되는데, <사마법>은 특히 다른 병서보다 군법의 지엄함과 군법의 예를 소상하게 기술하고 있으며, 군의 위계를 강조하는 항목들이 상당히 많았었다.

 

특히 문무양권에 대해서, 책에서는 문권은 무권을 간섭하지 않으며, 무권 역시도 문권을 넘봐선 안되며, 그렇게 문무 양권은 각자 맡은 바에 충실해야 한다는 대목. 이 대목. 이 대목은 후대 병가들에게 숱하게 재해석되어, 손무를 비롯한 여러 후학들은 '설사 군주의 명이더라도 현장에 나간 장군에게 명을 내릴 수 없으며, 장군 역시도 상황 판단에 입각하여 군주의 명이더라도 따르지 못하는 것은 따르지 않아야 한다.'라는 개념까지도 도출시키지 않았나 싶다.

 

승패는 병가지상사라는 이념도, <사마법>에서는 나온다. '무릇 전쟁에서 군사의 숫자로 많고 적음에 따라 승리하기도 하고 패배하기도 한다.'라고 명시하는데 중요한 부분은 장군이 전쟁을 하다 실수에 따라 패배할 수도 있음을 인정하고 있다. 그러나 '승패를 떠나 똑같은 일을 반복하지 않는 것을 일러 정칙이라 한다.'라는 대목을 보건대, 같은 실수를 장군이 반복하는 것을 극도로 꺼렸다. 장수의 계책 하나로 삼군이 이기기도 하며 지기도 하니, 장군의 묘계는 그만큼 중요하다고도 역설하고 있었다.

 

그리고 유독 반복되고 있는 병법으로는, 사지에 몰린 적에게 통로를 내 주고 도망갈 길을 열어주라는 부분과, 병졸들에 대한 교육 역시도 반복하여 강조하고 있다. 특히 병졸의 교육에서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출신 지역이 다른 병사들은 서로 다른 성격을 가지고 있으며, 그 성격은 각 주에 따라 다르다. 이들에게는 교육을 통하여 습속을 이루도록 해 줘야 한다. 그 풍습도 각 주마다 다르니 도로서 이를 교화시켜야 한다.'라는 부분에서 병사의 다름을 인정하고 교육을 추구해야 한다는 점이 인상 깊었고, 이 부분은 다원화된 사회에서 부하 인재를 육성할 때에 참고할 부분이라고도 생각했다.

 

어쨌든 '의전론' 사상이 들어간 명분주의 병법서라서 한계가 있기 마련이지만, 고대 중세 이래로 <사마법>은 상당히 중요한 텍스트였다. <사기열전> 사마양저열전에서도 사마천은 양저의 병법이 널리 알려져 있어서 병법에 대한 이야기는 생략한다고 이야기했는데, 그만큼 사회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병법책이다. 같은 <사기열전> 손무오기열전에서는 사마천이 손오의 병서는 집집마다 다 가지고 있는 병서이니, 라는 대목. 즉 이 당시에 <손자병법>, <오자병법>, <사마법> 3가지의 텍스트는 사회적으로 상당히 중요시된 문헌이라는 점을 알 수 있겠고, 사관인 사마천의 기록으로 짐작건대 병법서로서 중요한 권위를 가지고 있었음을 짐작하는 부분이다.

 

거기다 삼국지의 영웅 조조는 <손자병법>을 재구성하며 <사마법>을 인용한 주석을 썼다고 한다. 조조는 <손자병법>과 <사마법> 두 책의 주석서를 남겼다고 하는데, 지금 현존하는 것은 <손자병법> 뿐이다. 어쨌든 전쟁영웅 조조가 중시할 정도로 <사마법>은 주목받은 텍스트가 아닐까 싶다.

 

원문은 155편이라고 <한서 예문지>에 기록되어 있는데 지금 현전하는 것은 5편으로, 상당히 많은 유실이 있는 병법서다. 유실이 많은 책이라 사실 책의 논고가 뒤죽박죽이고 문체도 상당히 거칠었으며, 내용의 연속성에도 아쉬운 부분이 많은 책이다. 어쨌든 사마양저는 손무 이전 시대에는 가장 뛰어난 장군임엔 틀림없었다. 책을 보면서 <사마법>이 병가를 집대성한 <손자병법>에 영향을 준 부분들이 상당히 많은 점들을 찾아낼 수 있었다. 그런 소소한 비교 포인트도 독서의 즐거움이라면 즐거움이겠다... (누군가가 보기엔 상당히 머리 아프겠지만...)

 

어쨌든 발굴을 통해 유실된 부분들이 발견됐으면 싶고, 연구와 논증을 통해 책이 좀 더 보완됐으면 했었다. 아무튼 양이 너무 적은 텍스트라서 아쉬움을 가지며 책을 덮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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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아들아 너는 인생을 이렇게 살아라 - 아버지가 아들에게 보내는 인생최대의 교훈
필립 체스터필드 지음, 권오갑 옮김 / 을유문화사 / 200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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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버지와 떨어질 때, 어린 나에게 아버지는 이 책을 손에 쥐여주며, 나를 안아주셨다. 그리고 아버지께선 사우디아라비아로 떠나셨었다. 아버지께선 나에게 말씀하셨다. '이 책은 아버지가 쓴 것이라고 생각하고 항상 지니며 읽어라.' 그러나 나는 이 책을 이해하기엔 너무도 어린 5살의 꼬마였었다. 그 당시 나는 이 책을 이해할 수 있는 수준이 되지 못 했다. 여전히 그림책이 익숙했던 그런 아이였었다.

 

그래도, 나는 이 책을 항상 지니고 있었다. 강원도에서 서울로 갈 때에도, 나는 이 책을 항상 가지고 갔었다. 이 책은 나에게 이해할 수 없었던 책이지만, 이 책은 나에게 아버지의 사랑 그 자체였었다. 여덟 살 무렵, 나는 이 책을 부단히 읽었다. 여전히 이해하기 힘든 어른들의 세계였었고, 초등학생이 이해하기는 버거운 현실적인 교훈이었으나, 아버지의 사랑이라고 생각하며 계속해서 읽어나갔다.

 

9살이 돼서야 나는 이 책을 '의미론적으로' 처음 읽었다. 첫 회독 후의 기쁨은 말로 이루 설명할 수 없었다. 나는 이 책의 뒤 갈피에, 짤막하게 소감을 남겼다.

 

'받은 지는 꽤 지났지만, 나는 오늘 이 책을 받은 거나 다름없다.'

 

그랬다. 꼬꼬마였던 다섯 살의 내가 이해하기에는 이 책은 너무도 범주가 컸고, 이해하기 힘든 어들들의 관념이 많았다. 그것은 9살 이래로 계속되었다. 9살이 돼서야 나는 이 책의 진정한 진가를 알아보기 시작했으며, 이 책이 상당히 잘 저술된 책이라는 것을 어림풋하게나마 이해하고 있었다. 아홉 살 초등학교 2학년, 이제 슬슬 또래의 무리에서 작은 사회라는 것을 알아가고 체득하는 이 시기에 내게는 이 책은 보물단지처럼 다가왔었다.

 

그 뒤 나는 매년 이 책을 읽어왔다. 책은 읽으면 읽을수록 의미는 명료해졌으며, 교훈은 구체적으로 다가왔다. 나는 이 책을 읽을 때마다 형광펜으로 중요 구절들에 줄을 그어가며 읽었다. 사실 이런 부류의 책은 흔하디 흔했다. 뻔한 자기 계발서와 뻔한 힐링 서적이 난무하던 시절, 이 책 역시도 어떻게 본다면 그렇게 받아들일 수도 있는 책이지만, 그러나 이 책은 그런 가벼운 책들과는 다른 '자기 계발서' 였었다.

 

원제인 <Letters To His Son>에서 볼 수 있듯, 이 책은 누군가나 독자들을 의식하고 쓴 책이 아니다. 원래 이 책은 필립 체스터필드라는 영국의 정치가이자 문필가가, 자신의 아들에게만 써 준 작은 책자다. 출판을 염두에 두고 쓴 책이 아니었으며 따라서 이 책은 아버지가 인생을 살면서 느낀 진솔한 경험의 진액이 그대로 녹여있는 진국의 경험담이었다.

 

그것은 아들을 향한 사랑이었다. 다른 자기 계발서들과 느낌이 다른 이유는, 그것은 아버지가 아들을 향해 쓴 사랑이 묻어있기 때문이며, 진심이라는 마음으로 써 내려간 책이기 때문이다. 숱한 자계서들 이 자극적이거나, 혹은 가볍게, 독자들에게 관심을 받으려고 몸부림치는 그런 가식성이 없는 진솔함이 담긴 책이다. 그래서 이 책은 특별하다.

 

책은 인생사에 대한 모든 것을 이야기하고 있다. 처세와 인간관계, 배움, 우정, 삶의 의미 등등 여러 범주에서 아버지는 아들에게 친절하게 인생을 설명하고 있었다. 아들과 아버지의 관계라서, 아버지는 남들에게 보이던 가식적인 모습을 걷어내고, 솔직하고 담담하게 글을 써 내려가고 있다. 글이 어려운 부분은 없다. 자상하고 친절하게 배려하며 아버지는 그렇게 아들에게 글을 쓰고 있었다.

 

이 책이 나올 때의 시대적 배경을 보자. 체스터필드는 영국의 중상주의 시대를 대표하는 정치가이다. 당시 영국은 수상인 로버트 월폴이 집권하고 있었고 부유한 번영을 이뤄나가던 국가였다. 영국은 이 시기 부유한 시민과 근대적인 지주를 기반으로 하여 막대한 부를 창출했다. 이 부를 경제 발전에 적극적으로 쏟아부어 산업혁명을 일궈내어 제국주의의 기반을 마련했었다. 그렇게 영국은 세계로 팽창하고 있었고, 이 영국을 롤모델로 삼아 지금의 패권을 가지게 된 국가가 미국이다.

 

그러한 사회적 배경 아래에서 영국에서는 젠틀맨 정신을 발전시켰으며, 이 책은 유감없이 그런 영국의 귀족주의적 덕목들을 소상하게 밝혀내고 있다. 그래서 사실 책에는 귀족적인 냄새가 풍기는 한계가 있긴 하지만, 그런 소소한 단점들이 책이 가지는 장점을 덮을 수는 없고 생각한다. 분명히 말하지만 이 책은 상당히 의미가 깊은 자기 계발서의 모태라고 할 수 있다. 이 젠틀맨 정신의 교과서를 영국의 사상가들은 대부분 모두 읽었다. 유명한 존 스튜어드 밀이나, 과학의 찰스 다윈 등등 분야를 가리지 않고 명사들은 이 책에서 깊은 영감을 얻었다.

 

한 가지 또 생각해 볼 점은, 현대 자기 계발서의 모토는 새뮤얼 스마일스의 <자조론>이다. 스마일스의 <자조론>은 온갖 좋은 덕목들을 청교도 정신으로 압축시켜, <자조론>에 투영한다. 노력, 근면으로 이야기되는 <자조론>. 그 <자조론>을 쓴 새뮤얼 스마일스 역시도 이 책을 읽었고 많은 영감을 받았던 배경이 있다. 그렇게 본다면, 현대 자기 계발서의 모태는 바로 이 책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현대 자기 계발서와 스마일스의 <자조론>은 이 책을 따라오지 못한다. 그 이유는 바로 이 책의 진솔한 면과 가식이 없는 점. 출판을 염두에 두지 않고 오로지 자식에게만 사랑으로 가르침을 전하려는 체스터필드의 저술 동기를 자기 계발서들은 따라오지 못한다. 수많은 대중을 염두에 두고 쓴 책과 아들에게만 전하려고 한 책은 근본적으로 다를 수밖에 없다. 그것은 현대 고전이라고 칭송되는 <자조론>에게도 적용되는 사례다.

 

나는 이 책에서 책을 읽는 방법과, 삶을 살아가면서 지식을 어떻게 습득해야 하나, 책으로 보는 지식과 경험으로 통하는 지식의 조율, 그리고 특히 인간관계에 대응하는 방법과 진실한 친구를 만드는 법과 알아보는 법을 배웠던 것 같다. 그것 외에도 배움에 대하여, 사교에 대하여, 노는 것에 대하여 등등, 책은 짧아도 상당히 깊은 내용을 담고 있는 책이다. 그래서 나는 이 책을 남녀노소 따지지 않고 강력하게 추천하고 싶다.

 

이런 종류의 책은 대체적으로 도덕적이고 옳은 이야기만을 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체스터필드의 책은 그렇지 않다. 한 가지 예로 독서가 중요하지만 책 더미에만 쌓여서 사교할 기회를 놓치는 것은 굉장히 잘못된 일이다고 하는 부분. 텍스트라는 책을 읽기보다 사회라는 책을 읽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부분. 그렇다고 해서 책을 경하하는 입장도 아니었다. 하루 30분 집중하여서 책을 읽도록 강조하는 부분과, 만년 노년이 되어서 자신은 책 더미에 쌓여서 보내는 여생이 아주 유쾌하다는 그의 입장에서 어디 하나에도 치우치지 않은 합리적인 사고를 볼 수 있었다.

 

사교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너무 경박하고 가벼운 인간들과 교제하지 말거니와, 너무 무거운 학자들의 모임 역시도 힘이 빠지기 마련이니, 적당하게 사람을 보고 대처하는 방법을 이야기하고 있었으며, 겉만 뻔지름하고 속은 텅 빈 가식쟁이들을 구분하는 방법과, 특히 마음에 들었던 말은 '결점까지 칭찬하는 인간에게는 심적으로 접근하지 말라.' , '시시한 인간은 가볍게 대하되 적으로 돌리지 말라 - <논어>에서도 이러한 대목이 나온다.' , 그렇다고 하여 인간관계를 너무 수동적으로 생각하지도 말고 자신이 능동적으로 만들어 가야 한다는 부분, 등등은 아주 곱씹을 만 하다고 생각했다.

 

지금의 자본주의의 정점을 찍은 미국이 산업혁명으로 부를 창출하던 영국을 쫓았던 것과 같이, 우리나라도 미국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현재 우리만의 <내 아들아 너는 인생을 이렇게 살아라>와 같은 정신적인 성숙을 보여줄 수 있는 책이 있는 것일까? 그저 모양이나 겉모습만 따라 하기 급급하지 내면이나 정신적인 부분 등등은 아직도 미숙하고 함량 미달이라고 생각한다. 중상주의가 만연하는 영국의 그 시대에서 정신적인 젠틀맨 사상이 발전했듯, 우리도 너무 자본주의 사회의 발전만을 생각하지 말고 그 자본주의에 어울리는 우리만의 사상을 계승하거나 만들어가야 하지 않을까? 사상과 정신의 빈곤이 참으로 아쉽다. 이번에 책을 보며 그런 생각도 들었었다.

 

가끔 나는 생각한다. 나의 아버지는 왜 나에게 저런 글을 못 남겨주실까라는 아쉬움도 들었다. 그러나 세월을 살다 보니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나의 아버지께선 아들인 나에게 저런 글을 남기진 못하시더라도, 좋은 책을 나에게 소개할 안목이 있다는 것에 대해서 고마움을 느꼈다. 그리고 설령 그런 안목이 없더라도 상관없다. 체스터필드가 아들에게 줬던 사랑이나 아버지가 나에게 줬던 사랑이나 비교할 수 없는 부분이기 때문이니까, 그것으로 나의 투정에 위안을 삼는다. 어쨌든 내 인생에서 이 책을 어린 시절에 만났던 것은 참으로 행운이었다. 덕분에 나는 '필립 체스터필드'라는 또 다른 아버지를 어린 시절부터 만났으니까 말이다,

 

모쪼록 자라나는 청소년이나, 아들, 딸들에게 선물하기에 좋은 책이 아닐까 싶다. 지금 보고 있는 판본은 구판본이다. 아버지가 나에게 이 책을 물려주셨듯, 나도 이 책을 미래의 내 자손에게 물려주고 싶다. 어쨌든 이 책은 나의 유년 시절과 지금에서도 많은 정신적인 영감을 줬던 훌륭한 도서다. 분량도 짧고 문체도 명료하며, 교훈적인 좋은 도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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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세자가 꿈꾼 나라 - 250년 만에 쓰는 사도세자의 묘지명, 개정판
이덕일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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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드라마 '비밀의 문'이 방영되면서 사도세자에 대한 관심이 많아졌다. 물론 드라마는 기대 이하의 성적을 보이고 있지만, 나는 나름대로 만족하며 보고 있다. 극중 나오는 사도세자의 이야기나 스토리의 구성에서 이 저서가 떠올랐다면 오버일까?

 

실제 이 책을 읽어보고도 나는 그런 생각이 들었다. 분명 '비밀의 문'의 작가는 이 책을 탐독했을 가능성이 높다. 왜냐하면, 드라마에서 보여주는 많은 대사나 사도세자의 모습들이 이 책에서 주장하는 모습과 겹치기 때문이다. 이덕일은 사도세자에 대해서 긍정적인 해석을 가하여 이 책을 완성시켰다. 그는 여기서 혜경궁 홍 씨가 집필한 <한중록>의 한계를 정확하게 지적한다. 그것은 지금 주류 사학계가 받아들이고 있는 사관과는 약간의 거리가 있다.

 

학계의 논쟁, 정병설과 이덕일은 이 문제로 강하게 대립했다. 정병설은 사도세자의 죽음에 대해서 <권력과 인간>이라는 책에서 다루고 있었다. 그는 이 책에서 이덕일이 주장하는 논고에 대해서 강하게 부인했다. 그러자 이덕일 역시 책을 개정하면서 대대적으로 정병설의 주장을 반박하는 글을 서두에 남겼다.

 

그들의 논쟁은 둘째치더라도, 책 서두에 이런 부분을 50여 쪽에 가까이 할애하여 논고한다는 것에 대해 옳고 그름을 떠나 보기에는 안 좋았다. 나는 책을 볼 때 항상 머리말을 읽는다. 오프라인이나 온라인에서도 책을 살 때 머리말을 보고 구매를 할지 말지를 결정한다. 그러나 이 책은 서두부터 다소 논쟁적인 부분을 다루고 있어서, 다소 난잡하게 느껴졌었다. 차라리 이 부분은 책의 말미에다가 뒀으면 어떨까 싶다.

 

나는 솔직하게 말해서 이덕일의 입장을 존중하고, 이덕일이 해석하는 사도세자의 모습도 일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솔직하게 말해서 정병설이 주장하는 <한중록>의 입장을 존중하는 부분은 따르기가 힘들다. 상황적인 부분과, 그녀의 배경, 그리고 그 당시의 노론과 소론의 분위기 등등을 살펴볼 때에 <한중록>이 사실이라고는 믿어지지가 않는다. 분명한 사실은 사도세자는 권력의 암투에서 제거된 차기 임금이었으며, 당쟁의 희생물이다.

 

그러나 사도세자가 성군의 자질을 가지고 있고, 뛰어난 자질을 가지고 있다는 부분도 선뜻 수긍하기는 힘들다. 모든 역사적 텍스트는 엄정한 사료이지만, 후대의 집권 세력의 이념이 투영된 경우가 많다. 엄밀하게 말해서 역사라는 학문은 객관적일 수 없는 학문이다. 따라서 사도세자를 추존하는 사료들 역시도 쉽게 믿을 수가 없다. 당시에 사도세자는 제왕의 후계자로 태어났다. 따라서, 조금이라도 기특한 점이 발견되면 신하들이 뻥 튀겨서 성군의 자질이 보인다고 이구동성으로 오버를 하기도 할 가능성도 있다. (이건 역대 임금들이 어릴 때에도 숱하게 나오는 부분이다.) 생각해보라 우리가 어린 시절, 우리 부모님께 나 똑똑했어요 나 좀 특별한 점은 없었어요?라고 말하면 누구나 하나쯤은 다 있기 마련이다. 자식을 바라보는 아버지의 눈에는 자식이 조금만 기특하고 뛰어나도 엄청 기특하다고 생각하며 자랑한다. 세자도 이와 같다. 신료들의 눈에는 차기 임금의 기특한 부분을 뻥 튀겨, 성군이 되실 것이라고 칭송하는 경우도 허다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역사서에 나오는 뛰어난 현군이라는 말 역시도 쉽게 믿어선 안된다고 생각한다. 그런 점에서 이덕일이 주장하는 현군의 자질이라는 점 역시도 쉽게 믿기지는 않는다. 물론 사도세자가 현군일 가능성은 있고, 현군임에도 불구하고 집권 여당인 노론을 지지하기보단 야당인 소론을 지지하여서 배척당해 비운의 죽음을 맞이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어쨌든 사서에 기록된 사도세자의 돌출 행동들은 어떻게 해석하더라도, 아쉬운 부분이 있다.

 

정조처럼, 좀 더 고압적이고 강압적인 아버지 영조의 기준에 맞춰, 공부나 학문을 게을리하지 않고, 정사에 모범을 보이는, 그런 모습을 보일 수 없었을까? 결국 사도세자는 영조라는 아버지를 올바르게 이해하지 못했고, 손자인 정조는 영조를 정확하게 이해하여서, 영조의 비위에 거슬리지 않고, 참고 또 참아서 왕이 됐다.

 

영조라는 임금은 현군이며 똑똑하긴 했지만, 상당히 히스테릭하며, 논쟁적이고 자신의 충성을 시험하고 싶었으며, 아들임에도 불구하고 사도세자를 항상 견제하려고 노력했던 인물이다. 그런 권력지향자의 아버지 앞에서 세자인 사도세자는 좀 더 참고 기다릴 순 없었을까? 이덕일의 책은 이러한 사도세자의 모습마저도 어쩔 수 없었다는 식으로 해석을 하고 있었는데 이 부분은 어떻게 설명을 하더라도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다.

 

자신이 좀 더 인내하며, 아버지의 뜻에 거스르지 않으며, 아버지의 위압에 억눌리지 않으며 자존을 지켜가며, 그렇게 하루하루를 버텨내서 용상에 앉았을 때, 자신이 원했던 정사를 - (이덕일이 주장하는 것은 북벌이라고 했다.) 펼치는 것이 차기 지존으로서의 인내의 도가 아닐까? 물론 이 죽음 때문에 타산지석을 삼은 정조는 역도의 아들이라는 오명 속에서도 잘 인내하고 잘 절제하여 용상에 오른 뒤 어머니의 가문을 도륙 내버린다.

 

나는 책을 보면서 모든 것의 시작은 인조에서부터 시작됐다고 생각한다. 책의 시작은 인조에서부터 이야기가 시작된다. 인조는 소현세자가 의문의 죽음을 당한 뒤, 세손에게 왕위를 주지 않고, 둘째인 봉림대군을 세자로 지목한다. 원래, 왕위 승계는 세자가 죽으면 세손이 잇는 것이 관습이다. 그런데 인조는 그렇게 둘째를 왕으로 내세우며 첫째의 씨를 말라 죽여버리는데 일조했다. 인조라는 왕 자기 스스로도 왕이 되려고 반정을 했으며, 그렇게 왕이 되어 호란으로 인해 굴욕을 당한다. 말년에 자신의 첫째인 소현세자를 정치적으로 견제하기 시작했으며, 그렇게 소현세자가 죽은 뒤 소현세자 가문을 박살내고, 둘째를 왕위에 올린다.

 

그 뒤로, '삼종의 혈맥'이라는 신조어가 태어난다. 삼종이란 효종(봉림대군) - 현종 - 숙종을 뜻하며, 특히 이 3대에는 아들 손이 귀하여 '삼종의 혈맥'이라는 단어가 등장한다. 즉 그만큼 손이 귀하다는 뜻이다. 아마 적손이었던 소현의 가문을 죽인 원한이 이 삼종의 혈맥에 영향을 준 것은 아닐까라는 섬뜩한 생각도 들기도 했다.

 

거기다 숙종의 두 아들, 경종과 영조 역시도, 배다른 형제이지만, 정치적 노선이 달랐다. 동생인 영조는 형인 경종을 압박하기도 했고, 경종은 영조를 감싸면서도 배척하는 이중적인 모습을 보인다. 결국 경종 역시도 의문사를 당한다. 그렇게 영조는 권력투쟁에서 살아남아 왕위를 계승한다. 그리고 먼 훗날 자신의 하나뿐인 아들을 권력 때문에 죽여버린다.

 

소현세자의 의문사, 경종의 의문사, 사도세자의 죽음에는 커다란 공통점이 있다. 바로 권력의 개입이라는 부분이다. 소현세자는 설에 따르면 병약하여 죽었다고도 하지만, 일각의 시각으로는 살해당했다고도 한다. 이 당시 소현세자는 아버지 인조와 정치적 대립을 하고 있었다. 경종 역시도 마찬가지다. 경종은 영조가 음식에 독을 타 죽였다고도 했으며, 실제로 영조 집권 시기 그런 의혹들에 영조는 히스테리 한 반응과 갑옷을 걸치고 국문까지 진행할 정도로 민감한 반응을 보였다. 어쨌든 어떻게 죽은 지는 모르겠지만 중요한 사실은 경종의 죽음 직전에는 왕과 소론의 경종 라인과 세자와 노론의 영조 라인의 대립이 있었다. 사도세자의 죽음 역시도 마찬가지다. 아버지 영조와 장인, 처가 세력의 노론과 세자의 소론이 대립했었다. 결국 세 인물 모두가 죽기 직전 권력의 개입이 있다는 부분이 공통점이다.

 

자고로 권력은 아들과도 나눌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역사는 때때로 비정한 군주와 세자의 사례를 보여준다. 그러나 조선 후기에 가서는 그 강도가 더 심해진다. 정통성이 없는 군주일수록, 이러한 강도는 더욱더 심하다. (인조, 영조) 게다가 조선 왕조에서 종이 아닌 조자 붙은 임금들은 태조를 제외하고는 하나같이 정통성이 불안했던 임금들이 많다. 자고로 조자는 함부로 붙이는 것이 아닌데, 역설적으로 가장 약한 정통성을 지닌 왕들이 그 자신의 콤플렉스를 극복하고자 조를 붙인 것은 아닐까도 생각했다.  

 

어쨌든 이 책은 조선 후기의 비극적인 사건, 아버지가 아들을 죽인 사건에 국한하지 않고, 인조 시대 때부터 비극의 싹을 심도 있게 밝힌 부분이 흥미로웠고,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렇게 조선 후기에 왕가의 비극이 많다는 점은, 결과적으로 왕권의 약화라는 부분으로 귀결됐다. 신하들의 붕당을 막아야 할 왕이, 자신의 정권 강화를 위해 한쪽 붕당을 편애하고 기반으로 삼는 것은 그만큼 신권이 강력해졌다는 뜻이며 왕권은 그만큼 취약해졌다는 뜻이다. 반정과 올바르지 않은 왕위 계승은 그런 왕권 약화를 가져오게 만들었다.  

 

다만 한 가지 언급하고자 한다. 이덕일의 초기 역사서들은 심각한 문제점이 있다. 바로 서술 방법 중 문제가 있는 부분이라고 생각한 것인데. 책을 보다 보면 책에서 역사적 인물의 심적인 부분까지도 묘사하는 부분이 보인다. 가령 이런 부분 책의 첫 대목 사도세자가 태어날 때의 설명을 하면서 영조의 심정을 묘사한다. '제발... 아들이기를'

 

이 책은 문학 작품이 아니다. 역사 책이다. 설사 영조가 그런 마음을 지녔다. 하더라도, 기록되지 않은 부분을 함부로 추측하여 쓰는 것은 오해를 불러일으킬 가능성이 있고, 후대의 생각으로 선대를 오해할 수 있는 좋은 예가 아닐까? 그래서 반대 측인 정병설 쪽에서 '아류 소설'이라고 폄하하는 이유도 이 부분은 아닐까 생각했다. 나도 이 부분은 참으로 아쉽다. 만약 이러한 근거가 실록에 있다면 정확한 인용을 밝혀야 하고 주석으로 처리를 해야 한다.

 

이덕일은 서두에서 자신은 이 책을 두 가지 버전으로 내려고 생각했다고 한다. 첫 번째는 지금의 책 형태로, 두 번째는 다소 주석을 가하여, 전문성을 보완한 형태로 출간하려고 생각했단다. 그러면서 두 번째 책을 내지 않은 이유에, 분명 주류 사관의 입장인 정병설 쪽이 인정하지 않을게 뻔하다며 이야기하는데, 그럴수록 더 주석이 달린 책을 발간해야 하지 않을까? 주석을 인정하는 것은 전적으로 독자의 몫이다. 나는 이 책을 보며 가장 아쉬웠던 점이 '전문성'이 없는 부분이 아쉬웠다. 판단은 독자가 한다. 분명 주석을 달고 인용을 하면 옛 문헌 자체를 인용해야 하는데, 그 옛 문헌이 수정될 여지도 없는데도 불구하고 인정하지 않을 것 같다는 모호한 이유로 주석을 곁들은 책을 내지 않는다는 것도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정병설 쪽이 인정을 하던 안 하던, 옛 문헌이나 옛 문집,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이 바뀌지 않는 한, 타당한 인용과 근거를 제시한다면, 오히려 역으로 자신의 주장을 강화할 수 있는 좋은 부분이라고 생각했다.

 

저자는 이 책 개정문에서 스스로의 책을 둘러 보건대, 이 책이 참으로 잘 지었고 그 시절 참으로 열정을 가지고 공부를 한 흔적이라고, 그런 비슷한 말도 남겼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좀 더 자세한 사도세자의 입장이나 새로운 논거를 펼치고 싶다면, 대대적으로 책을 다시 개정하여, 논의한 부분들의 인용을 정확하게 밝혀준다면 더더욱 좋은 책이 아닐까 싶다. 최근의 이덕일의 책들은 인용도 정확하게 나타내고, 역사적 인물의 생각을 자신의 추측대로 기술하는 그런 서술 방식도 보이지 않아서 괜찮았는데, 이 시절의 책은 그렇지 않아서 아쉬운 마음이 있었다.

 

아무튼 의미가 있는 책임은 분명하다. 이 책 덕분에 우리는 사도세자라는 인물을 색다른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됐었다. 그런 부분에서 이 책은 많은 시사점을 남긴 책임에는 분명하다. 내용적으로 보자면 권력의 비정함을 제대로 느낄 수 있는 책이라 할 수 있겠다. 어쨌든 이러한 다양한 역사적 해석이 많이 나왔으면 싶다. 아무튼 주석이나 서술 방식이 보완된 개정판이 나왔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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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비된 신혼이 아름답다 - 사랑도 공부가 필요해
조연경 지음 / 느낌이있는책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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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처럼, 서점에서 기웃거리며 약속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 책 저 책을 둘러보고 둘러보고 하다가, 뻔한 제목의 다소 튀는 표지, 핑크 핑크 한 러블리한 표지의 이 책을 발견했었다. 뻔하고 뻔한 책이겠거니 했지만, 역시 뻔한 책이기도 했었고 뻔하지 않은 책이기도 했었다.

 

그래서 주문을 했었다. 책은 간결했다. 쪽수도 짧았고, 하루에 다 읽을 정도로, 집중하면 4시간 안에 독파할 정도로 부담 있지도 않았다. 거기다 꼬아 놓은 부분도 없었다. 그래서 술술 읽혔었다. 술술 읽히는 책이었지만, 가볍게 서술된 내용과는 다르게 나는 상당히 집중하여 읽었던 책이었다.

 

'연애를 글로 배웠어요.'라는 대사처럼 과연 연애나 결혼을 글로 과연 배울 수 있을까? 나는 글로 배울 수 있다고 생각한다. 다만 여기에는 조건이 있겠다. 얕은 기교나 하룻밤 잠자리를 위해 부리는 잔꾀나 꼼수가 기록된 책이 아닌, 사랑의 본질적인 부분을 이야기한 책들에게서는 배울 점이 있다고 생각한다. 이 책은 후자에 속하고, 다른 사랑을 다룬 책들과는 다르게 평이한 일상을 주제로 이야기하고 있었다.

 

핵심은 다름이다. 배우자와 나에 대해서 틀림이 아닌 다름을 인정하고, 배우자의 입장을 최대한 고려하여서 내가 더 배려하자는 그런 생각. 여기까지만 하면 다른 책들과 다를 바 없는 뻔한 책으로 치부되기 쉽다. 그러나 이 책은 그 다름을 어떻게 구체적으로 실천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소상히 밝히고 있었다.

 

특히 내가 감동받은 부분은 여행에 관한 부분이었다. 책에서 이야기하는 여행에는 다른 서로가 어떻게 그 다름을 인정하며, 여행을 같이 할 수 있는가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우리는 보통 연인과 여행을 가게 된다면 모든 일정을 같이 보내는 것을 생각한다. 뭐든 함께 해야 하고 뭐든 함께 해야만 의미가 있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개인의 기호가 다르듯 여행에서 추구하려는 개인의 생각은 다를 수밖에 없다.

 

책에서 말한 대로 나와 같은 경우는 여행 가서 맛 집들을 일일이 검색해서 찾아가서 먹는 것을 선호한다고 치자. 그러나 배우자는 아니다. 대충 앞에 들어가서 먹는 주의라고 한다면, '식사'를 따로 하면 된다. 배우자는 호텔이나 숙소에서 늘어지게 누워서 쉬는 것을 선호하고 나는 바닷가를 거니는 것을 좋아한다. 이럴 경우 따로 행동하면 된다. 사실 여행 가서 커플들끼리 싸우는 경우도 참 많다. 연인 때야, 서로를 배려하고 같이 행동하지만 결혼하고 나면 그런 배려심은 사라진다. 피곤한 일상에서 나만의 힐링 방법 (설사 그것이 늘어지게 쉬는 것이더라도)으로 쉬겠다는데 그 사람의 휴식의 방법에 대해서 '당신은 분위기도 없고 감수성이 없다.'라고 매도해버리면 상대는 발끈하기 마련이다. 합치될 수 없는 경우에는 다름을 인정하고 따로 행동하면 된다고 하는데 상당히 일리 있는 방법 같았다. 그렇다고 해서 여행의 가치가 떨어지는 것은 아니니까, 함께 여행하고 있다는 것은 변함없다.

 

책에서는 혼자서 잘 노는 사람이, 외롭지 않고 결혼 생활도 잘 한다고 한다. 배우자에게 너무 의존하고 배우자가 없이는 아무것도 못하는 사람들을 나는 종종 봤다. 그러나 배우자가 곁에 없더라도 스스로 홀로 일어설 수 있어야 한다. 이 부분은 <스님의 주례사>에서도 이야기한 부분으로 온쪽과 반쪽의 개념으로 이야기를 한 부분이다. 나 스스로의 온쪽이 되야만 상대가 있어도 없어도 구애받지 않고 일상을 살아갈 수 있다. 상대를 너무 의존하는 것 역시 상대를 지치게 하고 상대를 힘들게 하는 부분임에는 틀림없다. 배우자가 일에 치이거나 휴식 날 늘어지더라도, 개념치 말고 놀고 싶다면 혼자서 수행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일리 있는 말이다. 결혼했다고 해서 '모든 것'을 배우자와 함께 할 수는 없으니까,

 

또 한가지 감동적인 부분은 사랑한다면, 그 사람의 가족에게 먼저 호의를 베풀어라는 부분, 이 부분도 상당히 일리 있는 부분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장인과 장모를 어려워하고, 시월드는 역시 시월드라며 꺼린다. 분명한 사실은 그 사람을 감동시키는 것의 가장 직접적인 효력은 가족에게 감동을 선사하는 것이다. 결혼이라는 것은 그 사람만을 받아들인다는 뜻이 아니다. 그 사람을 둘러싼 모든 환경과 그 사람의 모든 가족들까지도 받아들이는 것이 결혼이다.

 

나와는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을 가족으로 맞이하고, 그 가정에 갔을 때, 나를 긁는 사람도 있다. 나를 탐탁지 않게 여기는 시동생이나, 나를 탐탁지 않게 여기는 어머님 등등 복병은 수도 없이 많다. 책에서 그런 분들에게 대응하는 방법은 마음으로 품는 방법이라고 강조한다. 때론 시댁이나 장인의 집에 가서 불만사항을 배우자에게 토로하기도 하는데, 사실 팔은 안으로 굽는다고, 별로 효과적이지 못하다. 인생 살다 보면 나랑 원치 않는 인간관계도 많이 만난다. 학교에서 재수 없는 동창, 직장에서 꼴보기 싫은 상사, 친구 중에서 유난히 거들먹거리는 인간 등등 모든 인간 사회에서는 내가 원하고 날 이해해주는 인간만 볼 수 없다. 처가나 시댁도 마찬가지다.

 

그런 부분을 이해하고, 불만을 받더라도 불만 사항을 이야기하기보단, 감싸 안으며 생활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책은 강조하고 있다. 배우자 앞에서 배우자의 가족을 욕하는 것만큼 배우자를 화내는 일은 없다. 반대로 배우자에게 점수를 따려면 배우자의 가족을 품어안아야 한다. 때론 내 마음에 들지 않는 시동생, 어머니더라도, 결혼한 순간부터는 '내' 가족이니까

 

그리고 또 하나 여자들이 특히 잘하는 심리전인 '어떻게 하나 두고 보자.' 이런 태도는 부부관계를 망치기 마련이라고 했는데 특히 공감 갔다. 연애시절에는 일정한 밀당이 있고 그 밀당이 있어야지 연애가 탄력도 받는다면 결혼은 다르다. 부족한 것이 있다면 솔직하게 이야기하고, 해법을 찾아야지 자꾸 꼬아서 생각하고 갈등을 쌓아둔다면 자신에게도, 그리고 이 사실을 알았을 때 배우자의 기분도 상당히 안 좋다. 사실 나도 이런 습관이 있었는데 이 습관이 아주 안 좋은 습관이라는 것을 느끼고 고쳐야겠다고 생각했었다.

 

결혼 준비 과정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의 가치'를 확고하게 세워서 결혼을 진행해야 한다는 부분, 이리저리 휘둘리고, 저 사람은 혼수를 이렇게 했네, 이 사람은 예단 예물을 이렇게 했네 이런 환경들을 다 고려하다 보면, 싸우기 마련이다. 결혼의 준비는 일차적으로 아내 될 사람과 남편 될 사람 두 사람이 정해야 하며, 결혼 준비 노트를 만들어서 스스로 계산해보고 양가 부모님께 조언을 구하는 방법도 괜찮아 보였다. 자꾸 사회적인 가치를 따지고, 체면을 따지다 보니 결혼의 주체가 신랑 신부가 아니라 신랑 신부를 둘러싼 환경으로 결정되는데 이 부분도 잘 생각을 해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개인적으로 나는 번거로운 부분을 다 최소화하고, 실용적으로 생활에 필요한 부분들만 준비해서 가고 싶다는 생각도 했던 것 같다.)

 

개인적으로 공감이 가는 말들이 참 많았다. '아내는 엄마가 아니다.' '남편은 오빠나 아빠가 아니다.' 등등의 말들, 그리고 평이한 서술이고 에세이 형식의 서술이었고 특별하게 거창한 서술 방식이 돋보이진 않았어도, 글의 참으로 잘 읽혔고 마음을 움직이는 구절이 많다고 생각했다. 책을 통해 에세이라는 장르에 대해서도 다시 생각하게 된 계기가 됐다.

 

 모쪼록 여성이 쓴 책이라서 섬세한 감수성이 돋보이고, 약간은 낭만적인 부분들 (예를 들면 이태원에서 유럽풍 귀족 드레스를 사서 남편을 위해 입는 ㅋㅋㅋ)도 보이기 마련이었지만, 내 개인적인 판단으로는 <스님의 주례사>보다는 더 실용적이고 괜찮은 책 같아 보였다. 확실히 결혼 전에 읽어두면 상당히 유용할 것 같고, 결혼하고 나서도 부부싸움 후 이 책을 본다면 많은 부분을 느낄 것도 같다. 돈값은 하는 책인 것 같다. 그래서 나는 <스님의 주례사>, <그 사람 더 사랑해서 미안해>와 더불어 '나만의 결혼 3 서'로 지정하여서 책꽂이에 두려고 한다.

 

한가지 단점이라면 결혼생활에 대한 모든 것을 짧은 지면으로 다루다 보니, 다소 경제적인 부분을 덜 다룬 부분이 아쉽다. 물론 보험이나 재테크, 돈 관리 요령 등등의 거국적인 이야기를 쓰고 있었지만, 그래도 이 부분을 자세하게 다뤄졌으면 어떨까 싶다. 챕터가 39장으로 이뤄졌는데 솔직하게 중복되는 내용들도 많아서, 그런 부분들을 모아서 다시 편제하고 경제적인 부분을 좀 더 자세히 고찰했으면 어떨까도 싶었다. 결혼은 돈과 연관되는 현실적인 부분도 크니까 말이다, 책 보다 보니 저자가 부동산이나 경제에 대한 지식도 빠삭한 것 같아서 그런 아쉬운 생각이 들었다. 어쨌든 책은, 신혼부부뿐만이 아니라 특히 권태기의 부부들에게도 좋은 책 같다. 오래간만에 부담스럽지 않으면서도 흥미롭게 본, 느낀 것이 많은 책이다. 추천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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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자병법 - 산동성주간
노병천 지음 / 양서각 / 200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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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계속해서 미뤄왔던 손무의 <손자병법> 서평. 올해가 가기 전 여러 번 읽었던 경험을 하나로 쏟아내어, 정리하고 싶었던 마음도 컸다. 수도 없이 읽고 또 읽은 책인데, 이제야 드디어 리뷰를 끄적여본다. 물론 나의 이 리뷰는 부족한 부분이 많을 것이고, 앞으로도 더 병법 사상에 대해 공부하며 보완해야 할 부분이 많을 것이다. 그러나 일단은 중간결산을 하는 마음으로, 지금까지 내가 한간본 <손자병법>을 읽어 오며 느꼈던 점들을 최대한 추려 적어보려고 한다. 단 책의 이 부분에서 나는 손무의 사상을 이야기하기보단, 한간본에 대한 내 생각을 추려서 적으려고 한다. 자세한 손무의 병법 이론과 사상에 대해서는 따로 <손자병법> 서평을 작성해도 록 해 보겠다.

 

나는 개인적으로 <손자병법>이라는 텍스트를 검토하려면 세 가지 판본을 대조해 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첫 번째로, 한간본이라 불리는 <산동성 죽간 손자병법>, 그리고 통행본 <손자병법>, 그리고 마지막으로 삼국지의 영웅 '조조'의 주석이 달린 <손자병법>이다. 우리가 흔히 보고 있는 <손자병법>은 이 중 두 번째에 위치한 책으로 11가 주석이라 불리는 <손자병법>의 원문을 뜻한다. 11가주 주석<손자병법>은 정형화된 통행본 <손자병법>에 조조를 필두로 한 11명의 대가들이 주석을 넣은 주석서를 뜻한다. 여기서 주석을 삭제하고 원문만을 옮겨 놓은 것이 통행본 <손자병법>의 모태라고 할 수 있겠다.

 

보통 우리는 <손자병법>이 하나의 문헌으로 내려온 것으로 알고 있는데, 절대 그렇지 않다. 동양의 많은 텍스트들은 여러 사본과 여러 이본들이 존재하며, 시대를 거치며 원저자의 원문이 왜곡되거나 수정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손자병법> 역시도 이에서 벗어날 수 없다. 기존 내려오는 <손자병법>은 여러 가지 의문이 있었다. 과연 원저자인 손무가 실존 인물인가? 손자라는 것이 손무를 뜻하는 것인지 그의 후손인 손빈을 뜻하는 것인지 모호하기도 했으며, 어느 학계에서는 '조조'가 <손자병법>의 실제 저자라고까지 주장할 정도로, 여러 가지 설이 난무했다.

 

왜 이렇게 <손자병법>의 저자를 둘러싸고 학계의 공방이 치열한 것일까? 이유는 간단하다. <손자병법>이라는 책이 문헌상으로, 그리고 역사적으로 굉장히 높은 가치를 지닌 책이며, 뛰어나고 조리 있는 전쟁이론의 책이라서, 이를 둘러싼 여러 의문점들은 중세와 근세 그리고 지금에까지도 논란이 되고 있다.

 

국내에서는 신동준 씨가 <손자병법>의 원저자는 조조라고 주장하고 있으나, 이 부분은 상당히 근거가 떨어지는 것 같다. 실제 조조는 원문의 100배나 뻥튀기된 난잡한 <손자병법>을 대거 수정하여 지금의 13편으로 추려 놓은 공이 있다. 현행 <손자병법>의 원문은 그가 대폭 수정하며 손질한 원문일 가능성이 높으며, 따라서 다른 누구의 주석보다도 조조의 주석은 가치가 있다. 지금의 현행 원본을 수정하며 자신의 생각을 짧고 간결하게 주석을 달아놔서, 내용의 정리를 시도하였기에 그의 주석은 가치가 있는 주석이다. 실제로 조조는 실전 전쟁에 달인이었으며, 진중에서도 병법 이론을 공부하는데 뛰어난 능력을 발휘했다. 즉 실전과 이론 둘 다 능통한 주석가였으며 주석가로서도 편집자로서도 자질은 굉장히 뛰어나다고 할 수 있겠다. 다른 문사들이 탁상공론으로 주석은 단 것에 비해, 그의 정리 방법은 군더더기가 없고 장황하지 않으며 핵심만을 추려서 주석을 가하고 있기 때문에, 손무의 사상을 읽어내는 데에 참고할 만한 자료이다.

 

그래서 일각에는 편집자인 조조가 손무의 이름을 빌려 자신의 병법 이론을 정리했을 가능성이 있다고도 주장했으며, 따라서 <손자병법>은 실질적으로 조조의 저작이라고도 이야기하는데, 이에 대해서 태클을 걸 만한 사건이 발생했다. 바로 1972년 전한 시대의 무덤에서 무더기의 죽간이 발간됐는데, 이 죽간들 중 특이한 사항은 병법 죽간이 많았다는 점이다. 거기에는 두 가지의 <손자병법>이 들어 있었다. 바로 손무의 <손자병법>과 손빈의 <손자병법> 두 가지가 나왔었다.

 

이 죽간들의 발간으로 두 가지 문제가 정리된다. 첫 번째는 통행본 <손자병법>과 한간본 <손자병법>의 대조를 통해, 학계는 조조의 <손자병법> 정리본이 한간본과 크게 차이가 나지 않는다는 점을 발견했었다. 이 말은 즉, 조조가 <손자병법>을 정리했을 때에는, 참고할만한 정본을 바탕으로 하여, 난잡하고 원문이 부풀려진 <손자병법>을 정확하게 정리했다고 결론지을 수 있다. 물론 편명이 조금씩 다르지만 기본적인 편제와 기본적인 문체가 얼추 비슷한 부분으로 볼 때, 조조가 정리한 통행본 <손자병법>은 조조의 자의적인 견해보단 정확하게 원문을 살려 추려서 정리했다고 볼 수밖에 없다. 기존의 의견은 삼국지의 악역 조조의 이미지 때문에 (촉한정통론) 조조의 학문적인 식견을 의심하며 심지어 그의 주석을 폄하하기도 했었는데, 실제로 조조는 그렇지 않았다. 그가 있었기에 지금의 통행본 <손자병법>을 정리할 수 있었으며, 그는 손무의 원문을 최대한 복원하는 쪽으로 책을 정리했다고 밖에 결론을 지을 수가 없다. 따라서, 저자가 조조라는 설도 설득력을 잃게 되고, 손빈이라는 설도 설득력을 잃게 된다. (손빈의 사상이 담긴 또 다른 <손자병법>이 동시에 나왔기 때문에...) 어쨌든 손무의 사상을 계승한 <손자병법>이라는 책은 전국시대 이래로 쭉 내려져 오고 있었다.

 

다만 과연 이 한간본 <손자병법>이 실제 손무가 지은 원본과 동일하다고는 확신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사기 열전>에는 손무의 열전이 나오지만, <춘추>에는 손무의 행적이 기록되어 있지 않다. 따라서, <춘추>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손무라는 인물이 가공된 인물이라고도 주장하고, 일각에서는 실존하는 손무의 사상을 누군가가 정리한 책이 <손자병법>이라고도 하는데, 책의 원 저자에 대해서는 솔직히 문헌이 없어서 알 도리가 없다 손무가 가공의 인물인지, 손무가 실존했고 그가 쓴 병서인지, 손무라는 인물은 존재했지만 <손자병법>은 손무가 쓰지 않고 그의 이름을 빌린 누군가가 그의 병법 이론을 체계적으로 정리했는지는 알 수가 없다, 분명한 사실은 전국시대 이래로 내려져오는 <손자병법>이란 텍스트를 조조가 최대한 올바르게 복원하였다는 점. 그리고 1972년 발견된 한간본 <손자병법>은 통행본 <손자병법>보다 훨씬 연대가 앞서기 때문에 진본에 가까운 문헌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으로 정리할 수 있겠다.

 

위의 세 가지 사례를 정리하여서, 앞서 나는 <손자병법>이라는 문헌을 진지하게 탐독할 때엔 세 가지 텍스트를 고찰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한간본 <손자병법>은 지금까지 출토된 <손자병법> 문헌 중 가장 시대적으로 앞선 문헌이므로 진본과 가장 가까울 가능성이 있어서 반드시 참고하여야 한다. 통행본 <손자병법> 역시 조조의 정리가 가미된 부분이 있지만, 고대 이래로 현재까지 원문으로 공인받은 문헌이므로 무시할 수 없다. 조조의 주석 역시도 <손자병법>을 가장 체계적으로 정리한 그의 생각을 담은 글로서, <손자병법>의 사상을 연구할 때 무시할 수 없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손자병법> 번역물들은 통행본 원문을 번역하고, 아전인수 격으로 얕은 경영 이론에 대입하는 식으로 번역하는 것이 대부분이다. 그나마 우리나라에서 조조의 주석을 가미하여 내놓은 <손자병법>은 두 가지 책이 있는데, 하나는 유동환의 '조조병법' 이란 책이며 또 하나는 신동준의 '무경십서 - 손자병법' 편이다. (유동환의 '조조병법'은 절판됐다. 신동준의 '대여대취'라는 책도 조조의 주석이 가미된 <손자병법>을 번역한 책이다.)

 

이 책은 국내에서는 최초로, 대중에게 한간본 죽간을 베이스로 하여 <손자병법>을 번역한 책이라고 책에서는 말한다. 다만 일단 불만을 이야기하자면, 이 책은 첫째로 한간본을 베이스로 한다고 했지만, 내가 읽었을 때 주된 책의 베이스는 기존 통행본 <손자병법>이었던 것 같았다. 그 예로, 한간본에만 보이는 '기정편'이 이 책에는 번역되지 않았으며, 다른 한간본 문헌들(합려와 손무의 궁녀 시범, 황제가 적제 청제, 백제, 흑제를 토벌하는 내용 등등) 역시도 번역되지 않은 것이 많다.

 

즉 통행본 체제에 입각하여서, 통행본의 해석과 한간본의 해석이 다를 때 한간본의 해석을 담아 놓을 뿐, 결국 이 책이 한간본의 모든 내용을 담고 있진 않았다. 통행본과 한간본의 차이는 편명과 단어의 차이가 많았는데, 그 부분들은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지만, 이 책만으로는 한간본이 어떤 체제로 구성됐는지 올바르게 확인할 수 없었다. 이 부분이 결정적으로 아쉬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장점이 있다. 첫째로, 통행본의 체제로 한간본의 번역을 기술한 책이라, 통행본 <손자병법>을 번역한 책들과 비교하여 봤을 때, 한간본만의 어휘나 추가된 구절 등을 확인할 수 있다는 점, 이를 통해 어느 부분이 후대에 변화를 주고 첨삭을 했는지를 살펴보기엔 용의하겠다.

 

두 번째로는, 책의 사이즈가 아주 적고 얇아서, 들고 다니기가 아주 간편하다. 다른<손자병법> 처럼 원문 이상의 뻥튀기된 사례 중심의 책이 아니라, 깔끔하게 원문만 번역한 책이라서, 군더더기 없이 고전의 원문만을 읽을 수 있다는 점이다. 책은 다이어리 사이즈에 200쪽 내외다.

 

어쨌든 그래도 아쉽다는 게 내 생각이다. 내가 생각하는 가장 바람직한 <손자병법> 정본은 다음과 같다. 첫째, 한간본 <손자병법>의 원문과 번역을 충실하게 번역하여 포함하여야 한다. 두 번째 통행본 <손자병법>의 원문과 번역을 충실하게 번역하여 포함하여야 한다. 세 번째, 조조의 주석을 반드시 표기하여야 한다. 네 번째, 작년 리뷰한 리링 교수의 <손자병법> 해설서 같이 통찰력 있고 철학적으로도 깊은 내공이 담긴 역자의 해설이 있어야 한다.

 

아니 적어도 네 번째까지는 내 욕심이긴 하지만, 세 번째 항목까지는 반영하는 책이 나왔으면 좋겠다. 국내에 <손자병법>에 대한 책은 난무하지만 내가 만족하는 <손자병법> 번역서는 아직도 없는 실정이다. 특히 우리나라에는 한간본 <손자병법>의 내용을 오롯이 알 수 있는 텍스트가 존재하지 않는다. 이 부분이 심히 유감이다. 이런 상황에서 이 책은 상당히 의미 있는 책이나 앞서 말한 통행본의 입장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했다는 점에서 아쉬움이 크다. 어쨌든 이 책의 한계를 보완하여 한간본 <손자병법>에 내용과 체계를 정확하게 알 수 있는 번역본이 나왔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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