옹정제 이산의 책 17
미야자키 이치사다 지음, 차혜원 옮김 / 이산 / 200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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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텍스트를 볼 때, 가끔은 이런 후회를 하기도 한다. '아 왜 이 책을 이렇게 늦게 만났을까?'라는 후회. 내겐 <옹정제>가 그런 책이었다. 설 연휴 때 읽은 책인데, 정말 시간 가는 줄 모르게 집중해서 읽었던 책이었다. 책의 원 저자인 미야자키 이치사다는 일본 역사학자로, 중국 역사에 대해서 굉장한 지식을 가지고 있는 분이다. 나는 저자를 <수양제>라는 책으로 처음 만났는데, 그 책을 보며 저자의 책을 검색하다가 이 책이 눈에 들어왔다. 그래서 구매하여, 책을 읽었는데 <수양제>보다 더 재미있게 읽었던 것 같다.


평전의 주인공 옹정제는 청나라 5대 군주였다. 흔히 말하는 청나라 군주의 전성시대 강희제 - 옹정제 - 건륭제 기간에 중심에 위치한 군주로 강력한 왕권을 세운 군주였다. 저자는 <수양제>에서 반면교사의 모델을 제시한다면 <옹정제>에서는 다소 긍정적인 리더의 상을 이야기하고 있다. 사실 강희제와 건륭제의 경우는 치적이 두드러지지만, 그 사이에 있는 옹정제는 왠지 묻어가는 이미진데다, 옹정제라고 하면 흔히 권력욕에 눈이 멀어 동생들을 핍박하는 철혈정치를 내세운 부정적인 지도자를 떠올린다.


저자는 이 책으로 말미암아, 그런 옹정제의 부정적인 여론을 걷어내며, 조목조목 옹정제의 치적을 부각시킨다. 하지만 저자는 옹정제를 무조건적으로 칭찬하지 않는다. 결국 독재권력을 추구한 옹정제이고, 치밀하고 밀도 있게, 그리고 성실하게 정사에 임한 이 독재 군주의 한계 역시도 정확하게 짚어내고 있었다. 평전을 볼 때 나는 무조건적인 칭찬이나 무조건적인 비판만 하는 책을 선호하지 않는다. 저자는 그 긍정과 부정의 줄다리기를 적절하게 타며, 이 모범적인 전제군주 '옹정제'에 대해서 재미있게 풀어나갔다.


저자의 필법은 다른 저서 <수양제>의 리뷰에서도 지적했듯, 상당히 심플하고 간결한 편이다. 책의 쪽수는 200쪽이 안되며, 문장들도 짧은 단문을 선호하고 있다. 복잡한 청대 정치권력 암투를 간결하고 핵심적으로 요약하여 잘 서술하고 있는 저자의 필법에게서 경외감마저 느꼈다. 그래서 익숙하지 않은 영웅 옹정제에게 좀 더 친숙하게 다가갈 수 있었고, 평이하고 쉬운 서술, 그러면서도 깊이가 있는 서술 덕분에 옹정제의 시대에 좀 더 심취할 수 있었다. <수양제>에서도 저자는 이런 필법을 보여줘서 나를 감동시켰는데​ <옹정제>에서도 이런 감동은 이어졌었다.


내가 책을 통해 만난 옹정제는 너무나도 매력적인 영웅이었다. 자고로 왕조가 흥하는지 쇠하는지를 판단하려면, 3대나 4대 군주를 살펴봐야 한다. 왕조를 세운 군주가 국가 정비를 하기에는 무리가 많았다. 대체로 왕조가 개창 되고 나면 개국 군주는 죽기 마련인데, 그 이후 절대적인 개국 군주가 죽고 나서 왕조는 혼란기로 접어들고 차기 용들이 전쟁을 벌인다. 이러한 암투 속에서 황제나 왕이 되는 군주가 국가 체제를 다시 정비하는데 대체로 3대나 4대에 이르러 이런 체제 완료가 정비된다. 고려로 말하면 개국 군주 왕건이 나라를 세우고, 광종이 대대적인 왕권 강화를 내세운다. 조선의 경우도 태조가 나라를 세우고, 태종이 강력한 왕권 주의 국가로 체제를 정비했다. 이 뿐일까? 당나라의 경우도 당 태종 이세민이 국가 기틀을 바로 세웠으며, 명나라의 경우도 3대 황제인 영락제가 조카를 죽이고 황제가 되어 국가 기틀을 정비한다.


옹정제는 5대 황제다. 다만 청나라의 경우 1대 황제인 누르하치와, 2대 황제인 홍타이지는 북경에 입성하지 못 했다. 대륙을 통일한 것은 3대 황제 순치제 때부터였다. 옹정제는 5대 군주인데 대륙에 들어온 것으로 환산해보자면 3대 군주가 옹정제인 셈이다. (중국 통일 통일로 치자면 순치제가 1대니까) 그러니 옹정제의 제위 기간은 상당히 중요했으며, 앞으로의 청나라 왕조가 어떻게 나아갈지를 결정짓는 시기였었다.


옹정제의 아버지 강희제는 상당히 치적이 많은 군주였으며, 현명한 군주였다. 다만 집권 말기에는 강희제 역시 여러 가지 실수를 하게 되는데, 가장 큰 실수가 바로 태자 책봉이었다. 강희제의 과도한 자식 사랑으로 인해 둘째 황자인 태자는 강희제를 위협할 만한 정치권력으로 부각하고, 강희제는 태자를 폐했다가 다시 세웠다가 폐하는 등, 실책을 벌인다. 이 실수로 인해, 황자들은 제각기 파벌을 이끌고, 정치권력 암투에 뛰어들었다. 옹정제는 넷째 황자였고, 정치권력에 개입하지도 멀리하지도 않고 담담하게 지켜만 보고 있었다.


결국 강희제가 죽고, 후계자로 지명된 옹정제는 황제가 된다. 재빠르게 군권을 장악하고, 정국을 장악한 뒤, 자신의 안티 세력들을 모두 벌하는데, 가장 유명한 사례가 8번째 황자와 9번째 황자를 탄압하여 죽인 것이다. 옹정제 입장에서는 무리를 해서라도 권위를 확보하려고 노력했다. 아버지 강희제가 벌여놓은 황자들의 권력 다툼을 정리할 필요가 있었으며, 떨어진 황제의 위신도 바로 세우려고 노력했었다. 그렇기에 옹정제는 자신에게 따르지 않는 형제들에게 본보기를 보일 필요가 있었다.


사람들은 옹정제를 철면피로 알고 있지만, 사실 옹정제는 상당히 따뜻한 구석도 많았다. 자신에게 복종하고 충복이 되는 형제들에게는 아량을 베풀고, 주요 요직을 맡겼다. 대표적으로 13번째 황자가 그랬다. 옹정제의 입장에서는 어제까지만 해도 권력 다툼을 하던 형제들이 자신을 황제로 인정해주길 원했지만, 다른 형제들의 입장은 그렇지 않았다. 그러나 이미 옹정제는 황제가 됐고, 황제라는 지위는 형제 관계나 부자관계를 초월하는 군신관계였다. 옹정제는 형제들에게 형제이기 이전에 군신의 예를 요구했으나, 눈치가 없거나 감정적인 형제들은 그런 옹정제의 무언의 청을 거절했다. 그래서 옹정제는 칼을 들 수밖에 없었다.


 사람들은 옹정제를 이야기할 때 이런 권력 다툼에 초점을 맞춘다. 그러나 옹정제의 진면목은 황제가 되어서 어떻게 정사를 임했는지 그 자세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옹정제는 그야말로 워커홀릭의 자세로 정사에 임했다. 아버지 강희제와 아들 건륭제가 유람도 떠나면서 좀 여유로운 정치를 했다면, 옹정제는 황궁 근처를 벗어난 적이 없었다. 새벽에 일어나서 모든 조회를 마치고, 저녁 시간부터는 전국 각지에서 올라오는 비밀 장계 들을 읽으며 일일이 다 답서를 내린 군주였다. 


가령 지방 수령들의 비밀 장계, 그리고 그런 지방 수령을 감찰하기 위해 파견한 비밀 암행어사들의 비밀 장계 들을 비교 분석하여, 어긋나는 사항이 있을 시에는 수령을 바로 문초하고 엄벌에 처했다. 중국은 땅이 엄청 넓다. 그래서 사방에서 쏟아지는 장계가 엄청날 것이다. 이 황제는 그러한 비밀 장계를 하루도 빠짐없이 다 체크하고 손수 친히 글로 답서를 다 보냈던 것이었다. 이렇게 바쁘게 정사에 임했으니, 유람을 갈 여유도 없었으며, 건륭제와 강희제의 시대와는 다르게, 엄청 경직된 사회였을 것이다.


옹정제 덕분에 청나라는 안정된 왕권의 시대를 맞이한다. 황제 자체가 근면하고 성실했으며, 총명하며, 정사를 보는 것을 즐겼으니, 그 밑의 관리들의 입장은 죽어났을 것이며, 책잡히지 않기 위해 다들 노력했다고 평전에서는 나왔다. 즉 옹정제는 역대 황제들 중 가장 뛰어난 전제정치를 펼쳤으며, 확고하게 기반을 다져나갔다. 제위 기간 동안 옹정제는 흐트러지는 모습도 없이, 경건하고 숙연하게 정사에 임했다. 이 결과, 국가의 부패를 어느 정도 막을 수 있었으며, 재정 상황도 나아졌었다.


 그는 대외적으로, 국가의 거대한 부패, 그리고 관료조직의 어쩔 수 없는 타락과 맞서 싸운 군주였으며, 사상적으로는 한족 중심주의와 싸워나간 군주였다. 그렇게 열심히 노력했음에도 불구하고 옹정제의 시대 역시도 한계가 있었다. 그 광활한 대륙을 군주 혼자서 엄격하게 통치한다는 것은 사실 불가능한 일이었다. 옹정제 역시도 그러한 부분을 인식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역대 황제들이 못 한 선정을 자신은 펼쳐 보이고 이 생이 다 하는 날까지 부패와 싸워 나가겠다고 다짐하지 않았겠는가


다만 옹정제가 요구한 관리의 덕목은 너무나도 지나친 부분이 있었다. 저자는 이 부분에서 아쉬움을 표했다. 나는 미야자키 이치사다(저자)의 이 대목을 읽으며, 중국과 일본의 차이를 느꼈다. 이치사다는 말한다. 옹정제는 인간의 본연적인 속성을 모르고 있었다. 관리라는 사람들, 그리고 관리가 아닌 모든 사람들은 본질적으로 이윤을 남기려는 욕심이 있다. 그러나 옹정제는 관리들에게 이윤추구를 과도하게 억제하라고 요구한 것이다.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부정부패를 척결하는 것은 좋지만, 정당하게 노력하고 벌어들인 이윤에 대해서도 절제하라고 무언의 압박을 준다면, 과연 불만이 없겠는가? 중국과 우리나라는 전통적으로 유학을 존숭하고 발전시켰다. 그 결과 유학에서 주장하는 정치인의 덕목을 이상화했다. 유학적인 정치가의 표본은 무엇인가? 바로 청렴함이다. 사욕을 추구하지 않으며 국가만을 위해 희생해야 하는 것이 관리의 덕목이었다.


그러나 저자가 해석하듯, 일본인들의 사상은 이와는 달랐다. 예로부터 일본은 인간의 본성적 이윤 추구를 긍정한 민족이었다. 그래서 이치사다는 옹정제의 바람직한 전제정치를 비판했는데, 이러한 비판은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물론 공직이나 위에 있는 사람들은 이윤추구를 절제해야 하며, 뇌물과 비리에 청렴해야 한다. 그러나 그들 역시도 사람이고, 사람인 이상 살아가는데 기본적인 이윤 추구는 허용해줘야 하며, 남에게 피해가 가지 않는 한에서 재산을 모으는 것에는 여유를 줘야 한다. 그러나 우리나라나 중국에서는 윗사람에게는 무조건적인 도덕주의를 내세우며, 정당한 이윤 추구마저도 청렴함을 강조하는데 이런 부분은 조금 아쉬운 부분도 있었다.


옹정제 역시도 이런 부분에 좀 더 융통성 있게 대처했더라면 기존 관료들이 좀 더 옹정제의 정치에 호응했을지도 모른다. 절대권력자의 철권통치로, 관료주의를 억누르며 부패를 척결하려는데 노력한 옹정제였지만, 결국 옹정제의 강력한 독재로도 관료주의의 타락을 극복하지 못 했던 것이다. 이것은 독재의 한계를 보여주는 것이며, 이로부터 나는 지도자는 과연 어떻게 집단을 이끌어야 하는지, 밑의 사람들의 이윤 추구를 어디까지 허용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생각을 하게 됐었다.


한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옹정제는 상당히 열정 있는 군주였다. 그가 보여준 성실함과, 그가 보여준 치밀함, 한계가 있음에도 포기하지 않고, 노력한 군주, 쉬지 않는 워커홀릭의 자세, 그리고 그의 애민정신 등등은 귀감을 사기에 충분했다. 어쨌든 그가 이렇게 국가 내부를 철저하게 다스렸기에 아들인 건륭제 시기에 확장하는 정책으로 나아갈 수 있지 않았을까 싶다.


책을 읽으며 생각했다. '자금성에 가고 싶다.', 그리고 '청나라에 대해서 좀 더 자세히 알아가고 싶다.'라고 말이다. 자금성에 가서 옹정제를 비롯한 강희제와 건륭제의 숨결을 느끼고 싶었으며, 청나라에 대한 역사도 관심이 갔다. 건륭제나 강희제를 다룬 책들도 읽고 싶으며 며칠 전에 선물 받았던 <누르하치>도 빨리 읽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어쨌든 미야자키 이치사다의 책은 이번에도 나를 만족시켰다. 일본인 저술의 특징인 얇은 부피, 얇은 부피지만 내용의 깊이가 매력적인 책이었다. 옹정제의 삶 역시도 재미있지만, 무엇보다도 옹정제의 삶을 조곤하게 알려준 이 노학자에게도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앞으로도 그의 글로 다양한 인물을 만나보고 싶다. 옹정제는 매우 매력적인 모범 전제 군주였다. 그를 통해서 많은 부분을 배운 것 같다. 특히 지도자가 되고 싶은 사람은 자신의 선배인 옹정제에게서 많은 부분을 배울 수 있을 것이다. 부피도 얇고 어렵지도 않되 깊이는 있는 책이니 추천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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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톤전집 4 - 국가 원전으로 읽는 순수고전세계
플라톤 지음, 천병희 옮김 / 도서출판 숲 / 201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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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에 정치철학서 <맹자>가 유교사상의 정치철학을 대변하고 대표해왔다면, 서구 사회에서의 정치 텍스트의 시초는 <국가>라고 할 수 있다. 사실 <국가>라는 책은 플라톤의 중기 철학, 그 자체를 대변함과 동시에, 플라톤이라는 아이콘을 대표하는 저서다. 왜 우리는 플라톤 하면 <국가>를 떠올리고, <국가>가 그의 대표작이라는 것을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것일까? <국가> 책 안에서는 여러 가지 주제가 중구난방적으로 이야기되고 있다. 가령 국가와 정치에 대해서, 그리고 순수철학과 인식론, 이데아 이론에 대해서 강하게 드러난 책이 <국가>다. 일단 <국가>는 플라톤의 저서 중 분량이 방대한 편에 속한다. 다른 대화편들이 단편적인 성격을 지닌다면, <국가>는 상당히 두꺼운 양을 자랑한다. 그만큼 플라톤은 이 책을 저술하면서, 혼을 쏟아 저술했다. 분량이 방대하다는 것은, 여러 가지 이론들이 심도 있게 많이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뜻한다. 실제 책은 국가와 정체에 대한 논의가 대부분이지만, 그런 것을 나아가, 사회와 개인, 도덕, 순수철학, 문학 분야들을 넘나들며, 이론을 전개하고 있다.


플라톤의 대표작으로 알려진 <국가>, 그리고 명문대 선정 고전에서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책이 <국가>이지만, 사실 <국가>는 상당히 어려운 저술에 속한다. 플라톤을 처음 접하는 사람들은 <국가>부터 사 놓고 책을 펴는 경우가 많은데, 이럴 경우 십중팔구 멘붕당하고, 철학을 멀리하게 될 가능성이 높다. 대표작이기는 하나, 플라톤의 입문작으로는 추천하고 싶지 않다. 책이 너무 방대하고, 여러 분야들이 뒤섞였기 때문에, 플라톤과 친숙하지 않다면 접근하기 힘든 텍스트가 <국가>다.


<국가>는 일반적으로 철학서적으로 분류한다. 그러나 나는 책을 읽으며 <국가>를 철학서적으로 분류하는 것은 오류가 있지 않나 싶다. 물론 이 책 속의 논의나 철학적인 색깔을 비하하는 것은 아니다. 이 책은 철학서로도 손색없는 뛰어난 역작이다. 하지만 내가 이렇게 주장하는 이유는 원저자의 저술 의도를 짐작하고 생각한 결과라고 할 수 있겠다. 여러 문헌에 따르면 플라톤이 이 책을 저술한 이유는 이렇게 나온다. 향후 정계에 나갈 명망 높은 유력 가문의 자제들을 교육하기 위해, 숙고하고 생각한 플라톤만의 이상적인 정체 이념이 투영된 것이 <국가>다. 그래서 나는 이 책을 순수 철학서라고 이야기하기보단, 정치철학서라고 생각한다.


당시 그리스는 심각한 위기를 맞고 있었다. 대외적으로 페르시아와 전쟁을 겪었으며, 대내적으로 펠로폰네소스 전쟁으로 인해 아테네는 엄청난 타격을 받은 상태였다. 거기다, 최종적으로 30인의 과두정은 플라톤의 스승인 소크라테스를 죽임으로써, 플라톤에게 강한 멘붕을 선사했다. 기존에 부유층 자제였던 그는 스승의 죽음에 절망하여, 정치에 환멸을 느끼고, 학문 활동에 전념한다. 보통 사람들이 어떤 충격을 맞이했을 때, 극복하는 방법은 몇 가지가 있는데, 첫 번째 충격으로부터 정면 돌파하는 경우, 두 번째 다른 분야에 몰두하면서 다른 분야를 통해 충격을 준 부분을 해소하는 경우, 그리고 마지막으로 도피하는 경우가 있겠다. 여기서 플라톤은 두 번째 경우를 선택했다. 그는 스승의 죽음을 내린 사회 앞에서, 정치가의 꿈을 접고 철학 학문을 통해, 자신의 아픔을 극복하기로 다짐했었다.


그리고 어느 정도 숙고의 삶을 거쳐, <국가>라는 텍스트를 통해 스승의 죽음을 내린 현재 그리스 정치관을 진단하고 비판했다. 플라톤의 입장에서 스승을 죽인 그리스 정부는 옳지 않은 방향으로 나아간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숙고와 사색 끝에 자신의 이상적인 정치관을 형성하고 그것을 저술로 써 냄과 동시에, 향후 자라는 아테네의 미래들에게, 자신의 정치철학을 가르치는 것으로, 자신의 절망을, 그리고 사회의 모순을 극복하려고 노력했던 것이다. 그것이 <국가>가 저술된 목적이었다.


<국가>에 나온 플라톤의 정치이념은 철저한 계급 이론을 바탕으로 하며, 가장 이성적이고, 가장 뛰어난 수호자 계급의 철인이 국가를 다스려야 한다는 것이며, 각자의 계급에서 어긋나는 것은 사회를 혼란시키게 만드는 요소라고 했다. 여기까지만 보면 전제적인 정치를 떠올리기 쉽다. 특히 몇몇 사람들은 플라톤의 이런 정치이념을 보고, 독재주의로 생각하기도 한다. 물론 그런 구석은 있다. 그러나 이런 성급한 주장을 하는 사람들은 플라톤에 대해서 잘 모르는 것 같다고 생각한다. 


플라톤은 정체에 대해서 '과두정치'와 '철인정치'를 엄격하게 구분한다. 플라톤이 이상으로 내세우고 있는 철인정치의 최고 통치자는 그야말로 이성에 의해 통제되는 인간이다. 가장 이성적이며, 가장 자제력이 뛰어난 인물, 무한한 권력 앞에서 자신의 욕심을 잘 다스리고 초연하게 행동할 수 있는 인물, 사욕을 채우지 않는 인물, 본질(이데아)를 바라볼 수 있는 인물, 그런 인물이 다스리고, 그런 집단이 지도층에 서서 국가를 이끌어나가는 것을 '철인정치'라고 이야기했다. 사실 철인 수호자가 권력을 독점하고 있는 부분에서 '과두정치'라고 규정할 수 있겠지만, 어쨌든 플라톤의 관념으로는 과두정치와 철인정치를 엄격하게 구분을 했었다.


플라톤의 수호자를 이런 부분으로도 해석할 수 있겠다. 어쨌든 인간 집단에서는 리더가 필요하다. 아무리 평등을 지향한다 하더라도, 동물과 인간은 태생적으로 대표자를 선출해왔었다. 어쩌면 플라톤은 그런 인간 조직문화의 본연적인 속성을 이해하고, 반영하되, 그 지도자에 대해서 최대한 자신이 생각한 덕목들, 즉 이성 중심적인, 철학에 능통한 자격을  통치자에게 요구한 것은 아닐까? 그런 생각도 들었다.


플라톤의 정치이념은 동양 사상의 이상주의자 공자의 사상과도 일맥상통한다. 공자가 말하는 선비 집단, 그리고 그 선비들 중 가장 뛰어난 사람을 군자라고 칭하고, 그 군자를 중심으로 정치를 이뤄나가는 것, 사농공상이 제각기 할 일을 제대로 하는 사회를 공자는 꿈꿨다. 그래서 이런 이념을 보수주의적 이념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해석은 후대의 가치를 투영하여 바라본 결과가 아닐까 조심스럽게 생각한다. 당시 공자가 말한 사 계급, 즉 선비 계급은 놀고먹고, 통치의 즐거움만 누리는 것이 아니라, 도덕적으로 농공상의 계급보다 더 청렴하고, 모범을 보여야 한다. 지도층은 내면적으로 더욱 더 성찰하고, 덕을 쌓아야 한다는 이론을 내세웠기 때문이다.


책을 읽으며 느꼈던 것은 플라톤과 공자가 간과했던 것이 있다. 플라톤의 입장부터 보자면 인간은 완벽한 이성으로 자신을 통제하지 못한다는 점을 간과했다. 공자의 입장으로 보자면 인간은 무조건적으로 선하지 않으며 무조건적인 도덕을 내세우고 있지 않다는 점도 간과하는 점이 보였다. 동양과 서양의 두 선현은 어쩌면 인간을 완벽하고 절대적인 이상적인 개체로 인식하고 정체 이론을 이야기했지만, 어쩌면 그들은 그들의 이론에 집중하여서, 인간의 이율배반적인 본성을 고려하지 않았나는 생각도 들었다. 그래서 이 둘의 사상은 의의는 있으되, 구현되기 어려운 이상주의적 성격을 가지고 있지 않을까,


 잘 알려지지 않은 부분이지만, 플라톤은 남녀평등을 이야기한 최초의 철학자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수호자 자질이 있는 여성들은 남성과 평등하게 교육해서, 국가정책에 도움이 될 수 있고 능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주장도 했다. 이 부분은 상당히 파격적인 주장이다. 고대 사회에서 여성의 지위는 그야말로 바닥이나 다름없는데, 플라톤은 이러한 관념을 뒤엎고, 남녀평등의 교육을 주장했다. 그래서 여성들도 체육관(김나지움)에 가서 남성들과 비슷하게 레슬링(고대 그리스에서 대표적으로 남성들이 단련했던 운동)을 해야 하며, 군사적인 지식과 통치, 철학에 대해서도 공부를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럼 바람직한 철인, 수호자는 과연 어떻게 국가를, 국민을 이끌어야 하는가에 대해서, <국가> 7편에 자세하게 서술하고 있다. 물론 이 7편 외에도 여러 부분에서 지도자의 덕목을 이야기하고 있지만, 흔히 말하는 '동굴의 비유'라고 하는 이 대목이 가장 인상 깊었다.



플라톤을 이야기할 때 가장 빠지지 않는 부분이 이 '동굴의 비유'다. 이것은 <국가> 7권에 나온 이론으로, 대다수의 사람들은 지금 손발이 묶인 채, 그림자가 비치는 환영만을 보며 그렇게 인생을 살아간다. 그러나 삶의 본질은 그렇지 않다. 동굴을 빠져나와서 태양 위의 세상이 본질이듯, 결국 세상의 본질(이데아)은 현재 우리가 보고 있는 것들과 떨어져 있다. 우리는 수갑을 풀고, 나와 용기 있게 동굴을 나와서 태양 아래에 올바른 세상을 봐야만 한다. 올바른 세상 그것이 바로 플라톤이 주장하는 이데아이며, 사물의 본질이라는 점이다.  플라톤은 이 동굴의 비유를 통해 자신의 이데아 이론과 더불어, 수호자가 어떤 자세로 정치를 임해야 하는가를 알려주고 있었다.


올바른 치자라면, 일단 동굴 안에서 그림자만 보는 속박당한 자신을 해방해야 한다. 수갑을 풀고, 나아가 동굴 밖으로 나가야만 한다. 그리고 빛 아래에서 세상의 본질을 바라봐야 한다. 여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치자는 다시 차갑고 어두운 동굴 안으로 다시 들어가, 환영에 사로잡힌 여러 대중들을 동굴 밖으로 이끌어야 한다. 수호자 그리고 철인은 이렇게 대중의 사슬을 끊고 대중들에게 사물의 본질, 세상의 본질을 바라볼 수 있게 하는 그런 자를 플라톤은 원한 것이다.


여기서 바깥세상, 즉 태양이 비치는 세상은 사물의 본질과, 세상의 본질 즉 이데아의 측면을 뜻한다. 플라톤이 생각한 관념 속의 개념인 것이다. 그에 반해, 우리가 지금 보고 있는 현실적 형상은 동굴 개념에서 비추는 말과 병 등의 그림자라고 할 수 있겠다. 이 부분에서 플라톤은 철저하게 이원론적 사고과정을 보여준다.


정신 vs 감각, 이데아 vs 보이는 사물의 형상, 동굴 밖의 원래 세계 vs 동굴 안의 세계, 이성 vs 감각, 등등 플라톤의 철학은 철저하게 하나의 축과 다른 축의 대립이 있다. 대체적으로 플라톤은 정신과 이상을 절대시하고, 그러한 정신과 이성으로 사물의 본질 이데아를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한 이데아를 바라보는 것이 동굴 밖의 밝은 세계를 본다는 개념으로 비유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이유로 <국가>에서 플라톤은 문학을 비판적으로 바라본다. 결국 문학은 사실이 아니라 허구로 표현한 것이므로, 가까이해서는 안된다고 이야기했는데, 이런 부분은 너무 지나친 오버가 아닐까, 플라톤에 따르면 결국 이데아(본질)은 변하지 않는다는 속성이 있는데, 결국 문학이라는 것은 실제 사건이나 영감을 포장하여 표현하는 것이다. 포장하고 묘사하는 것 자체가 이미 실제 하는 것을 비틀어 표현하는 것이라 이데아적 속성을 지니지 않게 된다. 즉 플라톤은 모든 문학은 허구와 공상이 존재한다. -> 그것은 사물의 본질이 아니다. -> 본질은 가변적 속성이기보다 절대적 속성이다. -> 이런 부분에서 보자면 문학은 이데아적 속성을 지니지 않으므로 지향해서는 안된다.로 귀결된다. 플라톤은 이런 이유로 문학을 굉장히 비판적으로 인식한다.


비판적으로 플라톤의 이념을 바라보자면, 플라톤 자신은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이데아(본질)를 사물의 본질로 인식하고, 우리가 보는 현실의 세계를 껍데기로 인식했지만, 반대로 어쩌면 이데아야말로 상상 속에 만들어진 관념일 수 있겠고, 현실에 보이는 것이 본질일 수도 있지 않은가? 이렇게 문제 제기를 하며 더욱더 현실 중심적인 것에서 답을 찾으려 했던 철학자가 아리스토텔레스이다. 그래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스승 플라톤의 문학론을 옹호하기보단, 자신만의 문학론을 <시학>이라는 저술로 남긴다.


디오게네스의 <철학자들의 생애>를 살펴보면 플라톤의 <국가>를 반박하기 위해 크세노폰은 <키루스의 교육>을 저술했다고 한다. 이 부분을 살펴봐도 <국가>의 저술 의도를 알 수 있다. 크세노폰의 <키루스의 교육>은 직접적인 리더십을 다루고 있다. 즉 외전과 내전, 그리고 스승의 죽음으로 얼룩진 위기의 아테네를 구할 정치에 대해서 플라톤이 이상적으로 생각한 것이 <국가>였다. 크세노폰은 플라톤의 사상에 반발하여 자신만의 해결책인 <키루스의 교육>을 저술했다.


두 책을 다 읽어 본 입장에서 과연 뭐가 다를까? 플라톤이 주장하는 철인은 절대적인 이성을 가진 사람이다. 그런데 크세노폰이 주장하는 키루스 대제는 이성적이긴 하되, 한계가 있는 인물로 묘사되고 있다. 절제라는 측면에서, 플라톤의 철인은 자신의 감정을 이성으로 통제할 수 있기에 절제하는 건 지도자의 당연한 책무라고 이야기한다. 반면 크세노폰의 이상향 키루스 대제는 이성적이긴 하나, 결국 인간 본성은 나약한 존재이기 때문에, 그렇기에 유혹들로부터 의식적으로 절제를 해야 한다는 그런 입장이다. 즉 플라톤의 입장은 이성을 통해 완벽한 자기 통제가 가능한 인물을 꿈꿨다. 그런 완벽한 자기통제 하에 절제를 자유자재로 하는 철인적인 인간을 이상적으로 꿈꿨다, 크세노폰은 인간은 이성으로 완벽하게 통제하기란 불가능하며, 약한 존재이기 때문에 유혹들로부터 타락하지 않기 위해 절제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플라톤은 인간은 절대적인 이성의 존재로 인식하는 반면, 크세노폰은 그런 입장에 회의적인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그것이 두 철학자의 가장 큰 인식의 차이가 아닐까?


마치 동양의 성선설과 성악설의 대립을 보는 것 같았다. 맹자의 성선설은 인간의 본성은 선하기에 본성에 따라 선을 실천하고 배우기를 갈망한다고 해석한다. 순자의 성악설에서는 인간의 본성은 악하기에, 선하려고 노력하는 것이라는 주장을 펼친다. 공자를 중심으로 유학 학파는 계보적으로 맹자와 순자가 갈리기 시작하는데, 대체적으로 동양에서는 맹자의 사상에 권위를 부여해왔고 순자를 이단으로 치부했었다.


마찬가지로, 서구 사회에서도 소크라테스의 제자 크세노폰과 플라톤이 절제라는 측면을 해석하는 부분이 다르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그리고 전통적으로 플라톤의 이념을 좀 더 우위에 두고 있는데 이런 부분은 조금 아쉽게 느껴진다. 아니 솔직하게 말해서 인간은 과연 플라톤이 말한 대로 절대적으로 이성적인 존재인 것일까? 왜 나는 이 질문이 회의적으로 들리는 것인지...


거기다 플라톤과 크세노폰은 여러 가지로 대조적이다. 플라톤은 귀족 명문가의 자제로 스승의 죽음 이후, 깊은 사색과 숙고하는 자세로 자신의 번뇌를 돌파했다. 그 결과 아리스토텔레스를 배출함과 동시에 서양 철학에 엄청난 거두로 자리 잡았다. 크세노폰은 플라톤과 달랐다. 크세노폰은 스스로가 전쟁을 경험했었고 그 경험담을 <아나바시스>라는 책으로 남겼다. 활동적 성격이 다분하기에, 숙고하고 생각한 플라톤의 글과 비교해서, 글이 투박하다. 크세노폰의 저술을 살펴보면 자신이 경험한 전쟁담과 경험이 녹아 있다는 것을 발견한다. 즉 크세노폰은 자신의 실제 경험담(주로 전쟁 경험)을 녹여서 저술을 했다.  


가령 <국가>와 <키루스의 교육>을 비교해보자면, <국가>가 상당히 이상주의적이고, 관념적이며, 철학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다면, <키루스의 교육>은 다소 현실주의적이며, 경험주의적이며, 간결하고 투박한 성격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보통 플라톤의 <국가>를 읽으면서 참고해야 할 도서로 제자인 아리스토텔레스가 저술한 <정치학>을 꼽는데, 물론 <정치학>과도 비교를 해야 하지만 크세노폰의 <키루스의 교육>과도 비교를 해 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사실 <국가>는 쉽게 리뷰할 책은 아니다. 나는 지금 비교적 책의 저술 동기에 맞춰, 정치와 지도자에 관한 부분으로 좁혀 리뷰를 진행하고 있지만, 이 책은 워낙 방대한 분량이고 다루는 부분이 많아서, 여러 각도로 리뷰를 쓰고 싶은 생각도 든다.


국내에는 <국가> 번역본이 많이 나와 있다. 그중 가장 유명한 책은 아무래도 박종현 선생님의 <국가>다. 내가 본 책은 천병희 선생님의 번역본이다. 두 책은 장단점이 확연하게 드러난다. 박종현 선생님의 국가는 직역을 바탕으로 하였고, 철학을 전공하신 탓에 전문적이고, 다양하고 심도 있는 주석이 매력적이다. 깊이 있게 <국가>를 읽을 분들은 박종현 선생님의 저작을 추천한다. 반면 천병희 선생님의 <국가> 장점은 가독성이다. <국가>를 읽어보신 분들은 알겠지만(아니 국가뿐만 아니라 사실 모든 철학서적에 국한된 것이지만,) 책은 굉장히 난해한 내용이다. 천병희 선생님은 번역을 하실 때 가독성을 최우선적으로 고려하여 번역했다고 한다. 둘 다 읽은 결과, 확실히 천병희 선생님의 역본이 보기에는 더 편했다. 이 부분은 독자가 알아서 판단하여 읽으면 될 것 같다. 참고로 두 저서 모두 그리스 헬라어 원전 번역본이다.


예전에는 우리나라에 <국가> 원전 번역본이 없었는데, 지금은 이렇게 기호에 맞게 책이 나왔으니 좋은 것 같다. 앞으로 정암학당본 <국가>가 나올 예정이라는데 기대가 된다.


지금 보면 여러 가지로 한계도 있고, 이상주의적인 부분이 많은 텍스트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가>는 역시 좋은 책이다. 리더가 되고자 하거나, 철학에 관심이 있는 분들은 필수로 읽어야 하는 책이 아닐까 싶다. 확실히 고전이라는 것은 괜히 내려오는 책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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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양제 - 전쟁과 대운하에 미친 중국 최악의 폭군
미야자키 이치사다 지음, 전혜선 옮김 / 역사비평사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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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사회에서 역사적 지식을 습득할 수 있는 방법은 여러 가지다. 그러나 가장 영향력을 발휘하는 것은 아무래도 영상매체가 아닐까? 역사학은 가장 중요한 학문이지만, 최근에는 등한시했던 것이 사실이다. 국사를 선택과목으로 지정해버린, 7차 교육과정의 폐해 덕분에, 이과 학생들은 역사에 대해서 무지하게 됐고, 관심조차 없게 됐다. 그뿐일까, 문과 학생도 국사 과목은 분량이 많다는 이유로 선택을 기피하게 돼서, 가장 중요한 학문인 국사가 그토록 천대받았던 것이 우리 시대 역사교육의 자화상이었다. 비판의 목소리가 커지자, 정부는 그제야 부랴부랴 고시에서 한국사검정능력시험을 도입하는가 하면, 여러 기업들도 한국사검정능력시험에 가산점을 부여하고, 교육인적자원부에서도 국사를 '필수' 과목으로 지정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어찌하랴, 뒤늦게 역사교육을 강조한들, 이미 나와 함께 지내온 우리 세대들의 역사적 무지(無知)는 상쇄될 수도 없으며, 어쩌면 우리 세대는 역사적 무지의 세대로 낙인찍힌다 한들, 뭐라 변명조차 할 수 없게 된 것 같다. 이 모든 것에는 역사교육을 등한시 한, 정부 교육정책의 방향이 근본 원인이겠지만, 역사의 소명을 자각하지 못한, 중요성을 인식하지 못한 우리 세대의 인식에도 그 원인이 있음을, 나는 느낀다.


그런 역사의 무지 세대인 나에게 있어, 사극은 그야말로 절대적인 영향력을 발휘했었고, 역사교육이 강조되는 지금도 사극의 영향력은 지대하다. 영상의 힘은 텍스트를 압도한다. 같은 지식을 습득하더라도, 책으로 보는 것과 시각매체로 보는 것의 여운은 월등하게 다르다. 그런 면에서 고전적인 지식 습득법이라 할 수 있는 역사책 읽기는 따분함을 불러일으키는데, 반해 사극은 적절하게 재미와 사실의 사이를 줄타기하며, 시청자들에게 관심을 유도한다. 문제는 이런 사극들도 요즘은 너무 시청률을 의식해서, 재미를 너무 강조하다 보니, 사실보다는 허구의 이야기들을 더 중요시하며, 사실인 것 마냥 다루고 있다는 점. 이런 부분들이 솔직히 걱정스럽다.


<수양제> 책을 보면서, 내가 떠오른 것은 그 예전 김갑수 씨가 능청스럽게 연기하던 그 '수양제'가 떠올랐다. 아버지를 죽인 군주, 형을 죽이고, 형의 자식을 몰살시키며, 아버지의 첩들을 자신이 취한 군주, 대운하 건설을 통해 백성들을 가렴주구로 다스린 군주, 허욕이 부른 고구려와의 전쟁에서 3번이나 패한 군주, 주색잡기에 능한 군주... 그러한 모습을 김갑수 씨는 사극 '연개소문'에서 잘 연기했었다. 사실 사극 '연개소문'의 완성도는 별로였었지만, 당시 김갑수가 연기한 수양제는 드라마 제목이 '연개소문'이 아니라 '수양제'라 할 정도로 원맨사극의 포스를 풍겼었다. 거기다 수문제를 연기한 김성경과의 조합도 상당히 볼 만 했었다. 솔직하게 말해 당시 연개소문을 연기한 이태곤은 대사를 읽는 수준이었는데, 그래서일까 사극의 초반부는 가히 '수양제의 드라마'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책을 보며 그 시절 재미있게 봤던 그 김갑수의 능청스러운 연기가 떠올랐다. 아버지의 후궁을 범하며, 아버지를 살해한 김갑수의 모습, 그리고 놀란 아버지의 후궁 앞에서 조용히 반지를 건네며 능청스럽게 아무 일 없다는 냥, 사랑을 고백하는 모습이 떠올랐다. 퇴폐적이고 엽기적인 인물이나, 타락이라는 관점에서 봤을 때 상당히 매력적이다. 그리고 내가 리뷰하고자 하는 <수양제> 역시도 매력적인 책이라 생각했다. 특히 우리나라 사학계에서는 이민족의 왕조에 대해서 상당히 베타적이었다. 조선 이래로 계속해온 전통이며, 지금도 사실 출판되는 저작을 따져 봤을 때 이런 경향이 이어지는 것 같다. 한족이 아닌 이민족의 역사라 할 수 있는 진나라, 수나라, 당나라, 청나라에 대한 책은 거의 나오지 않았다. 그나마 나와봤자, 당 태종 이세민 정도만을 다루고, 다른 군주들에 대해서는 조망조차 하지 않았다. 특히 수양제는 폭군의 대명사였고, 상세하게 풀어 놓은 대중 저술도 없었던 것이 우리 현실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수양제를 무지막지한 폭군의 대명사로 인식하고 매도했었다.


하긴 우리나라 출판계 현실이, 우리나라 군왕들의 평전도 거의 없는 마당에, 남에 나라까지, 특히 남에 나라의 폭군까지 신경 쓸 여력이 있겠는가 그렇게 위안을 해 봐도, 아쉬운 마음이 있었다. 최근 진시황에 대한 평전들이 조금씩 나오기 시작했으며, 청나라에 대해서도 새롭게 조망하는 책들이 나오고 있다. 그리고 이제는 중국 최대의 폭군이라 칭하는 '수양제'에 대해서도 평전이 나왔다. 재미있는 점은 중국인이 쓴 책이 아니라 일본 역사학자 '미야자키 이치사다'가 쓴 책이다.


저자에 대해서는 나는 잘 몰랐다. 그러나 책을 읽으며 나는 놀랍고 또 감동이었다. 일본인이 쓴 중국 황제 역사라서, 조금 편파적으로 해석하지 않을까, 걱정도 했었는데, 책을 읽는 순간 너무나도 놀랐다. 이 책의 가장 큰 서술적 특징은 바로 쉽다는 것이다. 책은 복잡한 시대인 남북조 시대를 단순하고도 명쾌하게 설명하고 있었다. 그리고 수 문제와 수 양제, 그리고 나아가 당나라의 태동까지도 다루고 있었다. 물론 수나라 양제의 이야기가 주를 이뤘지만, 이 정도면 <수양제> 평전이 아니라 '수나라'의 역사라고도 할 만 했다. 복잡한 시대상황을 일본인 특유의 간결한 필법으로 단순화하여 조곤조곤 설명하고 있었다. 역사에 대해서 무지한 사람이더라도 조금의 관심만 있다면 무리 없이 읽을 수 있는 것이 바로 이 저작의 특징이었다. 현학을 덜고, 대중화를 추구했으며, 간결하면서도 깊이가 있는, 핵심적인 내용은 가득한, 그러면서도 인간 군상의 본성을 담은 책이 이 책이다.


거기다 편파적인 해석은 없었으며, 진지하고, 성찰적인 태도로 역사를 밝히려는 저자의 노력이 느껴졌던 저서였다. 사실 역사 평전의 가장 큰 단점이자 장점은 깊이다. 장점의 입장에서 봤을 때, 깊이 있는 역사서는 사료와 실제 상황의 분석, 그리고 역사학자의 분별력 있는 의견에 만났을 때  인간 본성을 정확하게 나타낼 수 있는 부분을 독자에게 제시한다. 다만 단점의 입장에서 깊이를 보자면, 너무 전문적인 사료와 너무 복잡한 상황을 어렵게 분석해버리면, 아무리 효용론적 가치의 역사책이라 하더라도 접근 자체에서 어려움을 느낄 수 있다. 흔하게 말하는 말 '역사책은 두꺼워서 싫어'는 이런 부분을 상징하고 있다.


저자는 이러한 두 가지의 장단점, 역사학의 딜레마를 극복하였다. 부피는 줄이면서 핵심은 담은, 그러면서도 인간 본성의 통찰력을 한결 쉽게, 그리고 재미있게, 느낄 수 있는 그런 역사서를 썼는데, 그것이 바로 <수양제>라는 책이었다.


책의 본문은 230쪽 밖에 되지 않으며 나머지 232~261쪽은 그야말로 '심화 학습' 수양제에 대한 역사적 고증을 '전문적으로' 다뤘다. 즉 너무 어렵고 고증이 필요한 '논문 포스의 지식'들은 뒤에 따로 편제했으며, 본문에는 마치 할아버지가 손자에게 이야기하듯, 재미있고 간결하게 수양제에 대해 서술하고 있었다.


우리는 보통 수양제가 막장의 표본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책에서는 그런 관점을 조금 비판한다. 한 인간은 그 사회 관념으로부터 자연스러울 수 없다. 아무리 스스로가 시대적인 관념을 거부하려 하더라도 환경이라는 요소는 인간의 형성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치기 마련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자면, 당시 중국의 남북조 시대는 그야말로 '막장의 시대'였던 것이다. 이 시대의 천자들은 하나같이 다들 포악하고, 음탕했으며, 선정을 베풀기보단, 폭정을 하는 것이 일반적인 시대였다. 아버지의 첩을 강탈하거나 때로는 어머니나 아버지를 죽이기도 하며, 아비가 자식을 죽이는 것이 궁궐에서조차 보편화된 그야말로 중국 치세의 '막장의 시대'였던 것이다.


물론 수문제가 중국 남북조를 통일하여서, 당시의 막장 시대를 끝내고 조금은 다른 시대를 열려고 노력했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수문제 역시도, 권력을 쟁탈하고, 자신의 형제들을 의심하고 견제했으며, 권모술수를 자행한 점 등으로 봤을 때 환경의 영향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했음을 책에서 짚고 있다.


역사학에서 가장 경계를 해야 할 부분은 모든 것을 이분법적으로 판단하는 것이다. 가령 절대 선을 상징하고 그에 걸맞은 절대 악의 축을 '설정하는 것', 혹은 이 반대로 절대 악에 발맞추어 '절대 선'을 설정하는 것. 이러한 이분법적인 발상은 유교 사회에서 역사를 바라보는 시각이었는데(단적인 예로 유학이 추구하는 이념과 그 외의 지식을 이단으로 몰아가는 것), 수양제가 바로 대표적인 그 예였다. 앞서 말했듯, 당시 남북조시대의 군주들은 막장의 시대였었다. 그런데 유독 남북조 군주들은 묻혀버리고, 막장의 황제 하면 떠오르는 것이 수양제라는 점. 그런 부분은 아버지인 수문제와 수양제를 비교한 부분에서 파생된 부분이었다. 유학자들은 수양제의 악업을 강조하며, 대조적인 사람을 내세워야 했는데, 수문제를 선의 축으로 삼음으로써, 성군의 수문제, 악군의 수양제로 공식화하였다.


우리는 근시적인 분류를 사극에서 쉽게 볼 수 있다. 최근 방영한 퓨전사극들은 아버지 vs 아들이라는 구도 아래에서 아버지는 무조건적으로 악의 축, 아들은 성군이라는 공식을 보여주는데, 이러한 시각 역시도 거슬러 올라가면 유교 관념에 입각하여, 모든 것을 이분법적으로 판단해버리는 사관과 일통한 면이 있음을 느꼈다. 저자는 명확하게 이 점을 비판하고 나섰는데, 이런 부분은 지금 우리 사회에서 역사를 바라보는 인식에도 많은 시사점을 남기는 부분이었다.


역사는 그리 단순한 학문이 아니다. 권선징악의 구도 전래동화처럼 모든 것을 선과 악, 이분법적인 분류로 평가하기엔 인간이란 동물은 너무도 복잡하다. 선과 악이 뒤섞여있는 모습이 바로 인간이고, 특히 사학에서는 전대의 관점들을 다시 검토하여서, 올바르게 선과 악을 사실적으로 분별하는 시각을 가져야 한다.


수 양제가 폭군이 된 점은 전대의 남북조시대의 영향도 있었는데다, 마찬가지로, 수문제의 행실에도 문제가 있었다. 문제는 형제 간의 우애를 강조하라고 하면서도 자기 자신은 형제들과 반목하며 정략적인 모습을 보였다. 그리고 황자들의 가정교육을 가르치지 않아서, 하나같이 다들 망나니로 커 왔었고, 주색잡기에만 능했었다. 너무 받들여서 키운 것이 화근이었던 것이다. 물론 수문제는 한 나라의 제국을 건립했고, 중화 대륙을 통일한 황제로써, 뛰어난 군주였었다. 근검절약했으며, 내치에 집중하는 모습을 보여, 국가기강을 다진 군주였다. 그러나 그가 자행했던 권모술수들은 고스란히 수양제에게서 볼 수 있었다. 아니 수문제에 비해 수양제의 권모술수는 더 발전했었다.


저자는 분별 있는 시각과 사서의 맹점들을 짚어나가며, 수양제가 부군인 수문제를 살해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흔하게 인식된 아버지를 죽인 폭군이라는 점은 수나라 역사책인 <수사> 본기에는 나오지 않고 열전에 잠깐 나온 부분인데, 후대 사가들은 악의 상징적인 축으로 수양제를 설정하며, 열전의 이야기를 정사로 편입시켰다는 점이다. 그래서 수양제는 아비를 죽이고, 형을 죽인 폭군으로 인식됐었다.


'연개소문' 드라마에서 수양제를 연기했던 김갑수 역시도 능청스럽게 아버지를 죽인 모습이 떠올랐다. 저자의 말 대로라면 이 부분은 아무래도 각색된 것이리라. 여기서 저자의 생각을 인용해본다.


'수양제 전기는 특별히 소설을 빌려오지 않더라도 역사적 사실 자체가 재미있는 이야기다. 아니, 오히려 날것의 역사적 사실이 훨씬 재미있고, 읽는 맛에도 깊이를 느낄 수 있다. 그래서 나는 이 책을 쓰면서 역사적 사실만 추구하려고 노력했다.'


우리가 지금까지 인식하고 있는 수양제의 모습은, 대체적으로 각색된 모습이 많았다. 책에서는 그런 부분을 조곤조곤 짚어주고 있었다. 하긴 솔직히 어떻게 보면 수 양제도 피해자이기도 하다. 당대에는 그런 막장의 군주들이 '보편화'된 막장의 시대였는데, 다른 막장들은 언급되지 않고, 유독 '수양제'만 언급되니, 그것도 참 안됐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책을 읽으며, 나는 왜 그가 폭군의 아이콘으로 됐는지 이해하기도 했었다.


첫 번째로, 과한 토목공사와 전쟁이었다. 특히 중국 역사상의 궤적이라 할 수 있는 '대운하 건설'을 감행했었다. 이때 완성된 대운하는 지금의 중국의 강 물줄기에 고스란히 영향을 주고 있으며, 중국의 화북과 강남, 북쪽과 남쪽의 교통에 많은 도움이 됐었다. 그러나 그러한 물줄기를 만들기 위해, 어마어마한 공사 인력이 동원됐었다. 여기서 연상되는 군주가 있다. 바로 진시황제다. 시황제는 중국 대륙을 통일하자마자, 흉노족의 위협을 막고자 저 유명한 만리장성을 쌓아버린다.


수양제 역시, 명목상으로는 북쪽과 남쪽을 연결 짓는 수로를 만들어야 한다며, 공사의 합리화를 주장했는데, 물론 이 대운하 건설은 중국 대륙의 입장에서 꼭 필요한 공사였었다. 그러나 전란에 전란이 덮진 막장의 시대에서, 이제 겨우 통일왕조가 들어섰는데, 과연 무리해서 그렇게 공사를 해야만 할까, 당시 책에 나온 바로는 '여자'들까지 공사에 동원됐다고 한다. 일손이 모자라서 여성들까지 공사에 투입할 정도면 얼마나 무리를 해서 공사를 했는지 이해가 간다. 이렇게 완성된 대운하는 지금 시대까지 유지하고 있으며, 중국 영토의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음을 부인하기 힘들지만, 그러한 공사를 무리해서 완성하려 했던 그의 야욕은 인정받기 힘들다.


거기다 그렇게 거대한 토목공사를 일으킨 뒤, 국가가 흔들릴 정도로 사치스러운 전국 퍼레이드를 펼친다. 항상 통일왕조가 들어서면 황제들은 국가를 시찰한다는 명목으로, 과도한 퍼포먼스의 순례를 하는 경우가 많다. 진시황제도 그러했으며, 수양제도 그랬다. 완성된 대운하를 통해 양주까지 배를 타고 운행을 하는데 그 무리가 90km나 됐다고 한다. 이 많은 인원들을 데리고 수양제는 떵떵거리며 순시를 했는데, 황제가 머무는 고을에서는 이런 무지막지한 행렬의 음식과 숙박을 감당하느라, 고역이었다고 한다.


거기다 만리장성을 보수하는 공사, 고구려와의 3차례나 걸친 전쟁 등으로, 국가 경제는 파탄 나게 되고, 각지의 민심은 흉흉하게 됐었다. 그런데도 수양제는 정신 차리지 못 했고, 사치를 추구했었다. 심지어 부하들에게 죽을 때조차도, '짐이 이런 허접스러운 말을 타야 하는가? 깔끔한 말로 가져다주게.'라고 호통칠 정도니 알 만 하다.


책을 읽으며 수양제의 결점을 생각해봤는데 요약하면 다음과 같았다.


1. 무리한 토목공사와 의미 없는 전쟁으로 인해, 국고가 바닥났다.

2. 여색을 지나치게 밝혔으며, 허장과 허세, 낭비가 심했다.

3. 사람을 보는 눈이 없으며 자신보다 뛰어난 이를 공경하기보단 질투하며 배격했다.


사람들이 이야기하기에 수양제는 자질이 나쁜, 폭군이라고 인식하는데, 저자는 이에 동의하지 않았다. 수양제는 어쩌면 주변 환경에 쉽게 좌지우지 받는, 전형적인 일반인의 모습이 아닐까,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어쩌면 비극은 그런 것일지 모르겠다. 리더의 자질이 없는, 자신을 다스리지 않은, 지위적 야욕만 가득한 자들의 모습, 수양제는 그런 전형적인 인간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 같다. 그런 자가 리더가 됐으니 백성에게는 이보다 더 한 비극이 있을까? 이런 부분을 보며, 그 누구보다도 평범한 삶을 사는 나 역시, 경계해야겠다고 생각했었다.


또 한가지 느낀 점은, 저자는 말했다. 남북조와 수나라 시대의 인물 유형과, 당나라의 인물 유형은 확연히 다르다는 점을 말했다. 남북조와 수나라 시대의 인물들은 전형적으로 나의 세력을 기르고 나의 힘을 이용하기보단, 남의 힘을 권모술수적으로 빼앗아 이용하여 권좌를 획득하는 인물들이 많았다. 수문제, 수양제 역시도 이런 인물에 해당됐다. 그러나 당나라 대의 인물들은 이런 시대적인 인물 유형에서 탈피했는데, 바로 자신의 힘을 길러서 왕좌를 차지했다고 한다. 특히 이런 예에 가장 적합한 인물이 이세민이었다. 즉 남의 힘을 빌려서 떵떵거리는 것이 아니라 자강불식하여 권좌를 차지한 것이다. 그리고 이세민은 더 나아가 종래의 막장 시대 - 피폐한 쾌락주의적 사고를 거부하고, 도덕을 강조하며, 국가의 윤리를 바로 세워나간 점도 남북조, 수나라에 비해 더 나아진 부분이었다.


이런 부분에서, 생각난 점은, 특히 우리나라의 된장녀들에 대해서도 생각을 했었다. 자신을 돌보지 않고, 그저 돈 많은 남자들에 눈에 들어서 신분상승을 꾀하는 그런 부류들, 그리고 여성뿐만이 아니라 남에게 빌붙어서 뭔가를 이루려고 하는 사람들에 대해서도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됐다. 난세의 역사서, <수양제>가 나에게 알려준 것은, 결국 남에게 의지하지 말고, 되도록이면 나 자신의 힘을 주축으로 일을 도모하라는 것, 그런 자주성도 알려줬었다.


책은 아주 재미있고 간결했다. 한 편의 막장드라마를 본 것 같다. 문학에서 나 올 법한 그런 막장의 시대가 바로 이 시대였다. 허구의 문학도 재미있지만, 역시 인간의 실체 모습은 때론 허구를 넘어서는 부분이 보인다. 이 시대가 바로 그런 시대다. 야욕과 쾌락, 막장의 시대, 그것이 바로 수양제의 시대였었다. 그 시대 안에는 온갖 인간의 모습이 다 담겨 있었다. 누구에게나 추천하고 싶은 그런 좋은 역사서다. 책을 덮으며 이제야, 김갑수의 수양제를 버릴 수 있었다. <수양제> 속의 수양제는 김갑수의 수양제보다 더 매력적이었다. 책에서 나온 수양제의 모습은 폭군의 모습이 아니었다. 그 모습은 지극히도 나, 너, 우리와 닮은 일반인의 모습이었다. 그래서 나는 이 책을 반면교사로 삼으려 한다.


그리고 별개로, 이 책을 통해 저자를 알게 되어서 다행이다. 앞으로 역사비평사 출판사에서 저자의 전집을 발간할 예정이라 하는데, 기대가 된다. 깊이 있으면서도 부담스럽지 않은 서술, 그러면서 진지하고 성실한 학문적인 고찰, 우리나라에서도 본받아야 할 부분이 아닐까? 사실 우리나라 역사책들은 너무 쓸데없이 무거운 감이 없잖아 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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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갑을 열게 하는 마케팅 - 불황을 이기려면 컨슈머 마인드를 이해하라
페페 마르티네스 지음, 권기대 옮김 / 베가북스 / 2015년 1월
평점 :
절판


책을 읽기 전 자극스러운 제목이 상당히 인상적이었다. 요즘과 같은 불황에서 소비는 위축되고, 불경기가 이어나가는 작금의 시기에, '지갑을 열게 하는 마케팅'이라는 제목은 마치 알라딘의 요술램프처럼, 불황을 이겨낼 수 있는 마케팅을 이뤄줄 것만 같은 느낌이 들게 했다. 다만 내가 밝히고 싶은 것은 책 제목에 비해서, 마케팅을 다룬 내용은 크지 않았다는 점을 말하고 싶다. 책의 원제는 'The Consumer Mind'다. 번역해보면 소비자의 마음이라는 뜻이다. 


책은 뉴로마케팅(뇌과학)을 중심으로, 소비자의 마음과 심리를 추적하고, 마케팅에 접목시키는 부분을 다루고 있었다. 뉴로마케팅에서 가장 중점적으로 다루는 것은 뇌라는 기관이다. 책은 뇌를 통하여, 인간의 모든 행위를 풀어내고 있는데, 가령 기억과 감성, 지능, 이성, 행복 등등을 고찰하고 있으며, 이 모든 이야기를 뇌에 입각하여 풀이하고 있었다. 재미있는 부분은 보통 우리는 감성적인 부분을 가슴에 비유하곤 하는데, 저자의 주장에 의하면 감성을 주관하는 요소들조차도 우리 뇌에 위치한다고 이야기했다. 저자는 왜 '뉴로마케팅'을 이야기하며 이렇게 장황하게 심리적인 부분을 뇌로 풀이하고 있을까? 저자는 인간의 가장 핵심적인 부분은 뇌이며, 이성과 감성을 조절하는 센터가 바로 뇌라고 이야기한다. 그것은 결국은 마케팅 전략에서 인간의 기호를 파악하고 대중의 수요를 잘 읽는데 키워드는 인간의 뇌를 이해하는 것, 핵심은 뇌의 기능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파악해야지 다중을 상대하는 마케팅에도 유리하다고 저자는 함축하여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래서 제목과는 별개로, 상당히 심오한(?) 뇌과학 이론들이 심리학과 결부되어서 풀어지고 있었다. 이런 지식을 통해서 생각해보지 않았던 뇌에 대한 중요성도 알게 됐으며, 뇌라는 기관이 참으로 신비하고 내가 생각하는 이상으로 중요한 기관이라는 점을, 뇌의 각 부분들이 어떤 일을 하고 인간의 감정과 이성에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지도 개괄적으로 알 수 있었다. 더불어 이 책의 매력은 뇌에 대한 이론들을 이야기함과 동시에 인간의 모든 심리적인 행위까지도 고찰하고 있다. 재미있는 점은 저자는 이런 뇌 과학 이론과, 인간의 심리적인 요소를 통해 '바람직한' 인간의 상을 규정하고 있는데, 핵심은 바로 '균형성'이다. 우리 뇌에서 이성과 감성의 조화를 실천해야만 하며, 저자가 주장하는 뇌의 4요소 '행동하기' , '느끼기' , '의사소통' , '생각하기'도 조화가 이뤄져야 바람직한 인간으로 거듭난다고 주장했다.


서평을 여기까지 본 분들은 이 책이 과연 '경영 마케팅 책인가?' 의구심이 들 수도 있겠다. 나도 지적하고 싶은 부분이기도 한데, 사실 이 책은 마케팅 전략을 다룬 책이라기보다는, 소비자들의 심리를 추적한 책이라고 생각한다. 책의 구성은 16챕터로 이뤄져 있는데, 1~13챕터까지는 소비자의 심리적인 요소를 '뇌과학'으로 풀어서 해석하고 있다. 즉 소비자의 마인드를 '뉴로마케팅'의 입장으로 심도 있게 해석하고 있는데, 솔직한 심정으로, 마케팅이나 경영에 대한 부분보다, 인간의 본연적인 심리를 고찰하는 심리학서라고 생각이 들었다.



위의 사진은 책의 목차에 내가 읽고 간략하게 요약한 부분이다. 사진에서 볼 수 있듯, 01 도입부에서 ~ 13 요약 : 두뇌의 기능까지는 디테일한 인간 본연의 심리를 다루고 있다. 챕터 06 ~ 챕터 12에 이르러서는 인간의 개별적인 감정들을 뇌과학적 심리학으로 풀어내고 있는데, 상당히 심도 있게 이야기하고 있었다. 13챕터에 이르러서 지금까지의 인지된 인간 심리에 대한 고찰을 결론 내리며 두뇌에 대해서 총괄적으로 정리를 한다. 책은 그래서 두 부분으로 편재되어있다. 13장까지 뇌과학과 이론적인 부분에 대한 설명을, 그리고 책의 가장 핵심이라 할 수 있는 14장은 이러한 뇌과학적 인지를 바탕으로 하여, 설문조사하고 밝혀낸 뉴로마케팅의 사례와 중요성을 보여주고 있다.


15장은 이러한 뉴로마케팅의 첨단 과학적인 부분을 예시로 보여주며, 뉴로마케팅이 어떤 방식으로 이뤄지는가에 대해서 낙관적 전망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리고 마지막 16장에 이르러서는 인류 최대의 지성들이 밝혀 낸 철학 이론들과 저자가 이야기하는 뉴로마케팅 이론을 접목, 비교하여, 설명하는 것으로 책은 끝나고 있다.


일단 책에 대한 비판을 가하자면, 한국어판 제목 <지갑을 열게 하는 마케팅>이라는 부분으로 볼 때, 너무 주제를 벗어나고 있다. 책은 너무 많은 것을 다루고 있다. 가령 뇌과학, 심리학, 그리고 마케팅 등등을 다루고 있고, 이 분야들이 자연스럽게 연결된다면, 좋았을 텐데, 뇌과학과 심리학까지는 자연스러운 연결을 보여주고 있지만, 결정적으로 마케팅과의 연결은 다소 아쉬운 부분이 보였다. 즉 1~13 이론적 챕터와 14장의 실전을 다룬 챕터의 연계성이 부족했다. 책의 절반을 넘어선 200페이지를 소모하여 설명한 이론적 지식이 실제로, 실전 마케팅과는 다소 연결되지 않은 것은 상당히 아쉬운 부분이었다. 좀 극단적으로 말하면, 저자가 이야기하는 핵심 마케팅 챕터가 '과연 뉴로 마케팅이라는 요소가 맞을까?'라는 물음조차도 생겼었다. 차라리 이론적인 부분을 조금 단순화하거나, 분량을 줄이던가, 아니면 실전을 다룬 챕터 사이에 좀 더 이론과 실전에 가교 역할을 할 수 있는 챕터를 추가하여 서술했으면 어떨까 싶었다. 책의 내용에도 나왔는데, 너무 학문적이고 실생활과 동떨어진 내용을 서술해서는 안된다고 저자는 말했다. 그러나 이 책은 너무도, 범주를 벗어난 것 같다. 그래서 그 부분이 결정적으로 아쉬웠다. 좀 더 책의 포커스를 마케팅에 집중했으면 어떨까 싶다.


두 번째로 이야기하고 싶은 부분은 대부분의 경영학 책은 이런 사례를 보인다. 한 가지 현상에 대해서 근거 있는 비전을 제시하기보단, 이미 유행하는 비전들을 분석하여서, 그 분석을 바탕으로 이론화하는 책이 대부분이다. 물론 분석을 통해 이론화하는 것은 중요하다. 하지만, 정말 뛰어난 경영학 책이라면 분석과 이론화를 넘어서, 앞으로의 전망과, 그 전망을 어떻게 실현해야 하는가에 대한 '구체적인' 통찰력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이 책은 전형적인 전통적인 스타일의 경영학 도서와 궤를 같이하고 있다. 한 가지 예를 들어보면, 14장에서 저자는 소셜 마케팅을 이야기하며, 기존의 전통적 마케팅과 소셜 마케팅은 마인드가 다르다는 점을 지적한다. 확실히 이 말은 맞는 말이다. 우리 사회에서 많은 기업들은 블로그와 페이스북, 트위터 등등의 소셜마케팅을 지향하는 추세이고, 발 빠른 업체들은 오프라인 광고 못지않게 비용이 적게드는 온라인 마케팅을 적극적으로 애용하고 있다. 저자는 이 부분을 강조하며, 소셜 마케팅은 기존의 오프라인 마케팅과는 전혀 다른 마인드로 다가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전통적 마케팅을 주장한 업체들이, 소셜 마케팅을 어떻게 적응해야 하는가에 대해서도 소상하게 분석하고 있다.


분명 소셜 마케팅은 지금 살펴봤을 때, 대세의 마케팅이다. 그러나 저자의 책에서도 말하듯, 인간은 상당히 실증을 잘 내는 동물이다. 과연 이 대세의 소셜마케팅이 언제까지 '신선함'을 줄 수 있다고 믿는다는 것은 상당히 시대착오적인 발상이다. 언젠가 소셜마케팅은 진부한 마케팅으로 치부되겠고, 인간은 다가올 새로운 그 무엇의 마케팅에 또다시 적응하고 열광한다. 내가 책에서 기대한 것은 과연 뉴로마케팅의 측면이 이 다가올 새로운 마케팅을 예측해 낼 수 있는가에 대해서 관심을 가졌었다. 그러나 추상적인 틀을 제시하고 있었지, 구체적으로 어떤 마케팅이 대세일 것이다라고는 예상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 부분이 상당히 아쉽다.


다른 기업들보다 앞서가는 마케팅을 구사하려면, 첫째로 현재의 대세적인 마케팅을 분석하고 발빠르게 적응하며, 대세에 합류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사실은 이 대세의 마케팅의 수명을 예측하고, 다음 세대에는 어떤 마케팅이 유행할 것인가에 대한 확실한 전망이 핵심이라고 본다. 저자의 책은 뉴로마케팅을 통해, 인간의 심리와 현재 통용되는 마케팅과의 연관성을 밝혀내고 있지만, 정작이 부분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있다. 그래서 이 부분이 상당히 아쉬웠다.


그러나 그런 큰 아쉬움이 있더라도, 책은 상당히 매력적이다. 과학적인 요소, 뇌과학적 측면을 다룬 부분과, 인문적인 요소, 심리학적인 측면을 다룬 부분, 그리고 경영학적 요소, 마케팅을 다룬 부분들이 다소 자연스럽게 연결되진 않았지만, 심도 있게 다뤄지고 있었다. 특히 나는 이 책을 읽으며 경영 마케팅적인 부분보다, 뇌과학에 대해서 매력을 많이 느꼈었다. 그리고 인간의 심리에 대해서도 심도 있게 생각했으며, 과연 나의 감정과 이성은 올바른 균형을 이루고 있는가에 대해서도 스스로 자문해봤다.


재미있는 것은 밀워드 브라운이라는 회사가 뉴로마케팅을 '어떻게' 설문조사에 활용하고 있는가에 대해서도, 그리고 그들이 어떤 콘셉트로 고객의 니즈와, 경영 업계를 분석하고 있는가도 소상하게 알 수 있었다. 특히 아직은 익숙하지 않은 첨단 장비들을 동원하여, 뉴로마케팅을 실천하는 밀워드 브라운 회사가 신선하게 느껴졌다. 사실 챕터 15는 밀워드 브라운이라는 회사의 PR 같은 느낌도 들어서 거부감이 있었지만,(저자 역시 이 회사의 임원이다.) 간접광고임에도 불구하고, 흥미로운 요소들이 많았다.


모쪼록 아쉬운 부분이 있는 책이지만 매력적이기도 했었다. 사실 이 책은 인간 진화론을 긍정하고 기초하고 있다는 전제하에 기록된 책이다. 아직까지 진화론이 완벽한 이론으로 받아들이지 않은 부분이 있어서, 이런 뇌과학과 뉴로마케팅에 대한 부분도, 좀 회의적인 생각이 들 법도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너무 단언적으로 배격하는 것 역시도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 앞으로 뉴로마케팅이 인간의 현재 현상을 심리적으로 분석하는 것에만 머물지 말고, 그 분석을 바탕으로 '구체적으로' 미래에 대한 대한 제시까지 밝힐 수 있었으면... 그런 생각을 했다. 그런 부분을 밝힌 서적을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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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관정요 - 창업과 수성의 리더십
오긍 지음, 신동준 옮김 / 을유문화사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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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워낙 유명한 고전인 정관정요, 제왕학의 요체를 다룬 책이다. 원래는 완역본이 김원중이 번역한 책 하나뿐이었지만, 신동준이 새롭게 번역을 하여 샀던 책이다. 김원중본에는 번역문만 있는데 신동준본에는 번역과 원문 그리고, 당 태종에 대한 일반론과, 고전의 번역, 그리고 역대 정관정요에 판본에 대한 대체적인 이야기를 다루고 있었다. 즉 김원중 본에 비해 이 책이 더 자세하다고 할 수 있고 김원중 본에는 나오지 않는 대목들(판본이 다른 듯)도 실려 있다.  

 

 일단 말해야 할 점은, 신동준 이 저자는 주관적인 사상이 굉장히 강한 사람이다. 대체로 학계에서의 대세적인 부분을 따르지 않고 자신의 독창적인 색깔을 가미한 신선한 주장 등을 내세우는 편이다. 거기다, 이 사람의 사상 자체에는 전제 군주제나 강력한 왕권을 바탕으로 한 체제를 옹호하는 듯한 뉘앙스가 있다. 대표적으로 이 사람은 세조를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사람이다. 따라서 조금은 사상적 편향이 보이는 듯하지만, 그런 부분을 넘겨보더라도, 책의 번역 부분은 아주 깔끔하다는 점이 있다. 주관적 해석이 강한 역자의 고전인 경우는 사실 고전에 익숙하지 않은 초학자들이 보기에는 조심스럽다.  

 

 그러나 그의 사상 중에서는 고전을 현실론적 관점으로 해석하는 부분만큼은 탁월했다. 따라서 약간의 내 생각과 맞지 않는 부분도 있지만, 그런 부분을 감안하고서라도 신동준의 역본은 현실적 가치로 평가하자면 탁월한 부분 그것 하나만 보고 이 책을 선택했다.  

 

 이 책은 군주가 갖춰야 할 리더십에 대한 책으로, 역대 제왕들의 교과서와도 같은 책이었으며, 고려 시대에 광종 역시 이 책을 깊이 있게 숙독했으며, 조선조 제왕들 역시도 이 책을 깊이 탐독했다. 특히나 당 태종을 좋아한 세조 역시도 이 책을 많이 봤을 가능성이 있으며, 숙종과 영, 정조 역시도 이 책을 봤다고 실록에 나와 있다. 조선조가 들어서서 유학적 가치관의 제왕학이 성행하여 정관정요가 덜 주목받았긴 했지만, 그래도 역대 왕조에서 이 책을 무시하진 못 했다.  

 

 책을 쓴 오긍에 대해서 여러 이야기가 있지만 한 가지를 짚고 넘어가고 싶다. 그는 직필로 유명한 사관이었다. 따라서 정치권에서 자신의 정권을 합리화하는 그런 내용의 사서 편찬을 명 받았을 때 그는 동의할 수 없다며 사직했다. 오긍은 무후 실록을 편찬하는 데에도 기여했는데, 이때 재상 장열이 위원충과 관련된 일을 여러 차례 개정해 달라고 이야기를 했는데도 불구하고, 개정해주지 않았다. 즉 엄격한 사관과 나름의 객관성과 소신을 가지고 있는 사관이었다. 그런 그가 집필한 제왕학의 성전인 정관정요. 그런 직필의 손에서 탄생한 정관정요 역시도 나름의 객관성이 있는 제왕학서였다.

 

 책의 주인공, 당 태종과 그의 치세에 대한 군주론이 이 책의 핵심, 당 태종 이세민은 조선으로 말할 것 같으면 태종 이방원과 같은 전제 군주 성격의 군왕이었다. 형과 동생을 죽이고 왕위에 오른 그였으나 나라를 번영시킨 데에는 큰 공이 있었음은 부인하기 힘들었다. 그런 당나라의 성세한 시대, 당태종과 신하들의 이야기를 담은 군왕의 교과서가 바로 정관정요다.  

 

 이 책이 독특한 이유는, 앞서 말한 오긍의 직필법 때문인데, 책의 대부분은 태종의 행적에 대해 우호적인 서술이 많으나, 태종의 결점 역시도 드러내고 있다. 즉 무분별하게 태종의 치적만을 칭송하는 책은 아니다. 예를 들어 당 태종 이세민의 가장 큰 결점인, 국방 고구려와의 패전에 대한 부분을 지적하자면, 9권의 주제 국방론에 잘 나타나있다. 여기서 당 태종의 무모한 고구려 원정에 대해 신료들의 상서가 실려 있는데, 태종은 이를 묵살한 내용들이 잘 나와 있었고, 거기다 한술 더 떠서 시대의 현인들은 그 상소들이 옳다고 생각했다.라는 평까지 달아놨다. 즉 태종의 부끄러운 모습 등도, 삭제하지 않고 표현하고 있다.  

 

 책은 대체적으로 유가적인 입장에서 서술됐다. 아무래도 뭐 유학을 진흥시키자는 대목도 책에 노골적으로 나와 있으니 부정하긴 힘들겠지만, 유학에 입각한 제왕학서인 <대학연의>와 <성학집요>와 같은 책과 비교해봤을 때에는, 그 유학적 색채가 조금 덜하긴 했다. 유학의 경전 문구에 입각하여 역사를 선별한 방식이 기존의 유학적 제왕학의 서술 방식이라면 이 책은 당 태종의 행적과 역사를 우위에 두고 쓴 책이라는 점이 차이가 있었다. 그래서 다른 유가 서적들에 입각된 제왕학서에 비해서 비교적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다. 

 

 내가 재미있게 본 부분은 태종의 트라이앵글 명신들에 대한 이야기, 지략의 대가인 방현령과, 결단의 대가인 두여회 그리고 당 태종을 가장 돋보이게 만든 직간의 명신 위징에 대한 이야기. 방현령은 대체로 법가적이고 현실적 사고에 입각한 신하였다. 그는 지모가 뛰어났으며, 당 태종이 형과 아우를 죽인 현무문의 변을 실질적으로 구상하고 기획한 자였다. 특히 9권의 국방론에서, 방현령이 죽기 전 태종에게 고구려 원정을 취소하라는 상소를 볼 때, 그는 정말로 앞을 내다보는 지혜가 있었다는 걸 느꼈다. 두여회는 방현령에 비해서는 조금 지모가 떨어지지만 방현령이 가지고 있지 않은 결단력을 가지고 있었으며, 타이밍을 놓치지 않고 행동을 촉구한 신하였다.  

 

 그리고 가장 태종을 돋보이게 한 위징. 보통 전제성 군주의 경우 신하들이 직간을 하는 경우가 드물다. 왕권의 눈치를 보며, 왕이 손가락을 가리키면 그쪽으로 우르르 공론을 모으는 것이 일반적인데, 위징은 그러지 않았다. 위징은 당 태종의 일반적인 그런 전제를 견제한 유일한 명신이었으며, 당 태종의 오만을 경계하고 직간을 서슴지 않았다. 당 태종의 면전에서 민망하게 군주를 지적한 사례도 숱하게 책에 많이 나온다. 그럴 때마다 다른 군주들 같았으면 목을 치거나 했을 텐데 당 태종은 그런 그를 아끼고 아꼈다.  

 

 실제로 정관정요 2권 규간론에 보면 이런 말이 있다. '구리로 거울을 만들면 의관을 단정하게 할 수 있고, 역사를 거울로 삼으면 천하의 흥망과 왕조 교체의 원인을 알 수 있으며, 사람을 거울로 삼으면 자신의 득실을 분명히 할 수 있다.'  

 

 태종은 위징을 거울로 삼았고, 위징은 그런 거울의 입장에 충실하게 행했다.  실제 사람들의 경우는 자신에 대해 비판적인 어조로 대하면 분한 마음에, 상대와 싸우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진정한 충신은 직간을 서슴지 않는다. 위대한 군주는 자신의 비판을 잘 들을 줄 알며, 자신의 비판을 고칠 줄 아는 사람이다. 이것은 군주뿐만 아니라 개인에게도 해당된다. 나를 칭찬만 하는 사람보다는 나를 객관적으로 비판할 줄 아는 사람이 곁에 있다면, 그리고 그 비판을 내가 새겨 들을 마음을 가진다면, 그 사람은 발전 가능성이 아주 높은 사람이다. 사람을 거울로 삼아야 한다는 저 말은, 지금의 개인에게도 유효한 말이 아닐까 생각했다. 

 

 물론 태종 역시도 사람이라서, 위징의 간언한 것에 대해 '저 더벅머리 놈이 나를 너무 놀리는구나.'라고 말한 부분도 책에 나온다. 하지만 태종은 순간의 화를 내면서도 알고 있다. 위징의 간언이 충심으로 비롯된다는 것을, 전제적 군주이면서 이런 직간을 할 수 있는 사람을 둔 것에 대해서, 태종은 굉장한 멘탈을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위징은 그런 면에서 자신의 직간을 이해할 수 있는 군주를 만나서 정말 행복했던 명신이었다. 군주를 잘 못 만났다면 그냥 형장의 이슬로 갈 뻔한 대쪽같은 원칙주의자인데, 태종은 그의 가치를 알고 그를 거울로 삼았으며, 위징은 그러면 그럴수록 태종에게 더 대쪽같고 비판적, 현실적으로 태종을 일깨웠다. 그런 면에서 조선 중기의 율곡과 선조의 관계가 떠올랐다. 명신 역시도 현군을 만나야 능력을 발휘한다는 생각도 들었다.


물론 당 태종이 성공한 이유에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이런 명신들이 곁을 보좌하고 이런 명신들을 잘 이해하고 활용할 수 있었던 태종의 도량과 그릇도 볼 수 있었다. 재미있는 부분은 책에서 색욕을 멀리하라는 대목에서 고구려의 왕이 미인 두 명을 바쳤는데, 태종이 이를 보고 돌려보냈다는 대목 역시도 재미있었다. 실제 태종 이세민은 호색한 군주였기 때문인데, 조금은 신기했던 대목이다.  

 

 당 태종의 치세에서 가장 오점을 찍은 것은 무모한 고구려 원정과 더불어, 후계 구도에 너무 준비를 안 했다는 점. 특히나, 무모한 고구려 원정에 대해서, 정관정요는 비판적이었다.  

 

 아무튼 책 자체는 고전 치고는 쉽게 잘 읽히며, 더불어 군주가 행해야 할 모범적인 규범들을 교과서처럼 잘 정리했다. 대체적으로 유교적 사관이 보였으며, 특히 태종의 독단적인 모습들도 숨기지 않고 기록하고 있으며, 그 결과에 대해서도 기록하고 있다. 한 편의 역사서와도 같았으며, 가장 재미있는 부분은 태종의 명신들의 상소문이 그대로 인용된 경우가 많은데, 상소들 역시도 좋은 내용들이 많았다.  

 

 신동준의 고전 역본은 특징이 있는데, 고전을 번역한 것과 더불어 그 고전의 일반론적인 해석을 같이 첨부한다는 점이다. 보통은 고전을 번역과 역주한 것만을 놓는 것이 일반적인데, 자신만의 독특한 해설을 길게 첨부하여서 독자들에게 이해를 시키는 콘셉트. 그것이 그의 해석본의 특징이다. 하지만 그 해석이 다소 주관적인 성격이 강하다는 점도 한계가 있다.  

 

 이 책에서는 정관정요 주석론,과 정관정요 치평론으로 나뉘는데, 주석론이 고전을 주해한 부분이고 치평론이 일반적인 당 태종과 당나라 시대에 대한 이해를 돋는 일반론적 해석 부분이다. 치평론을 읽고 주석론을 읽어도 상관없으며 책의 편차대로 주석론을 읽고 치평론을 읽어도 상관이 없다고 생각했다. 독자의 성격에 따라서 자세한 배경 이해를 원한다면 전자가 좋겠고, 책을 보고 심화 학습으로 들어가고자 하는 사람들은 후자가 좋을 듯싶다.  

 

아무쪼록 국내에 나온 정관정요 책 중에선 이 책이 가장 뛰어난 책임을 부인할 수 없다. 하버드 대학을 비롯한 여러 서구의 국가에서도 정관정요는 주목받는 리더십의 고전이다. 동양적인 리더십과 동양의 모범적 군주 상에 대해서, 자세히 알 수 있으며, 도움이 되는 명문들이 아주 많은 좋은 고전이다.  

 

 두깨에 비해 그렇게 어렵지 않은 고전이라서 어릴 때부터 자주 봤던 책이다. 고전에 대한 문체만 익숙해진다면 쉽게 읽어나갈 수 있는 책이라 리더십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에게 추천을 하고 싶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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