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득록, 정조대왕어록
남현희 엮음 / 문자향 / 200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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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대왕을 그렇게까지 좋아하는 편은 아니지만, 그의 어록집인 <일득록>은 너무나도 좋아한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책 중 한 권이며, 나를 되돌아볼 수 있는 경구나 문구가 많기 때문에, 나는 주기적으로 <일득록>을 읽으며 스스로를 반성한다.

 

 정조를 만났던 것은 국사 교과서 학교에서 말하는 탕평에 대한 부분으로 만났었다. 대체적으로 개혁 군주라는 칭호를 지닌 그였지만, 내가 바라본 정조의 모습은 개혁을 하긴 했으나, 시대의 큰 흐름을 읽지 못하고, 주자와 유학에 근거한 개혁이라는 점이 한계로 느껴졌다.

 

그래서 그의 어록을 보지 않았으나, 어느 날, 그의 어록 <일득록>을 얻고 나서는 그를 다시 보게 됐다. 특히 독서에 대한 그의 어록은 정말로 깊은 울림을 준다.

 

'박람강기 만으로는 남의 스승이 되기에 부족하다. 왜냐? 겉만 배우기 때문이다.'

박람강기 - 동서고금 책을 많이 읽고, 기억을 잘 하는 것을 이르는 말

 

'나는 평소 성색을 좋아하지 않아, 정무를 돌보는 여가에 시간을 보내는 것은 오로지 서적뿐이다. 그러나 패관의 속된 글들은 어려서부터 지금까지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이들 문자는 실용에 무익할 뿐 아니라, 그 말류의 폐해는 마음을 바꾸게 하고 뜻을 방탕하게 하는 데,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이다. 세상에 실학에 힘쓰지 않고, 방외의 학문에 힘쓰는 자들을 나는 매우 애석하게 여긴다.'

 

"널리 배우고 자세히 묻고 깊이 생각하고 분명히 분변하고 독실히 행하라"<중용> '책은 무턱대고 많이 읽는다고 좋은 게 아니다. 요모조모 따져보거나 이 책 저 책 참고하며 세밀하게 살펴야 한다. 그래도 의심나는 것은 스승이나 벗들에게 물어서, 그 의심을 완전히 풀어 버려야 한다. 그래야만 나의 살이 되고 나의 피가 된다. 눈 따로 입 따로 마음 따로 이렇게 책을 읽어서는 책을 다 읽은 뒤에도 아무것도 남는게 없다.

 

'책을 아무리 많이 읽은들, 생각이 깃들지 않으면 읽지 않은 것이나 마찬가지다. ~ 다섯 수레 열 상자 책을 설렁설렁 대충 읽느니 보다는, 차라리 한 권 책의 절반이라도 깊이 읽어서 진정으로 터득하는 것이 낫지 않겠는가? <시경>에 '큰 밭을 일구지 말라, 잡초만 무성하리라.' 했다.

 

'책은 많이 읽으려 힘쓸 게 아니라 전일하고 정밀하게 읽어야 하며, 신기한 것을 읽으려 힘쓸 게 아니라 평상적인 것을 읽어야 한다. 전일하고 정밀한 독서 속에 자연히 폭넓은 이치가 들어 있게 마련이요, 평상적인 내용 속에 자연히 오묘한 이치가 들어 있게 마련이다. 요즘 사람들은 책을 읽을 때 대체로 많이 보려고만 들고, 정밀하게 읽는 데 힘쓰지 않으며, 신기한 것만 좋아하고 평상적인 것은 달가워하지 않는다.'

 

이쯤 하자, 사실 <일득록> 책에는 독서뿐만 아닌, 삶을 살아가는 모든 것에 대해 정조의 말(생각)이 있다고 할 수 있겠다. 그래, 솔직하게, 정조의 개혁, 그 개혁이 방향성과 한계성이 있다 할지라도, 정조 자체는 굉장히 노력한 군주라는 점, 시대적 한계를 벗어나지 못했지만, 다른 군주들과는 다르게 스스로를 이렇게 다잡으려고 노력했다는 점,

 

그런 점을 <일득록>에서 볼 수 있어서 좋았다. 아버지 사도세자의 죽음 아래에서, 눈물 한 방울 흘리지 못 했던 그는 일탈과 탈선의 길도 있었지만, 그럴수록, 스스로를 다잡았다. 독서나 사색을 통해, 흔들리는 마음을 잡았다. 방황의 합리화로 일탈을 한 군주가 얼마나 많은가 광해군과 연산군을 보라. 그러나 정조는 그런 위인들과는 달랐다.

 

물론 <일득록> 역시도, 다른 고전들과 같이, 뻔한 소리, 그리고 훈계적 어투 등등이 있다. 과연 이 조항들을 정조가 다 실천했을까?라고 아니꼽게 생각할 법도 하다. 사실 나는 <맹자>, <논어>등의 유학 경전을 읽으면서 이 인간들은 과연 이걸 다 실천했단 말인가?라는 의문이 들었지만 <일득록>을 읽을 때는 그런 마음이 들지 않았다. 글을 통해 정조의 마음을, 정조의 숨결에 아마 깊이 공감해서일까?

 

아무래도 영화 '역린'의 흥행 때문인지 정조에 대한 관심도 높은데, 영화에서 <일득록>에 대한 부분도 좀 다뤄줬으면... 어땠을까 싶기도 하다. <중용>을 주 테마 도서로 책정한 것에 딴지를 걸 생각은 없긴 하지만...

 

<일득록>을 읽는 방법은 여러 가지겠지만, 나는 특히나 잠들기 전에, 이 책을 본다. 침상에 들어서 잠자기 전, 그가 한 말들을 한 두 구절을 읽고 잠자리에 드는데, 그때 나는 아마 오늘 하루를 반성하지 않나 싶다. 그 정도로 이 책은 좋은 책이라고 할 수 있겠다.

  

유학 경전 중 '<맹자> 만장 하'편에, 이런 말이 있다.

 

"한 고을의 선한 선비는, 그 고을의 선한 선비를 벗으로 삼고, 한 나라의 선한 선비는, 그 나라의 선한 선비와 벗을 삼으며, 천하의 선한 선비는 천하의 선한 선비와 벗을 삼는다. 천하의 선한 선비와 벗을 삼는 것으로도 만족하지 못 해서 위로 올라가 옛사람에 관해 이야기를 한다. 옛사람이 지은 시를 외우고 옛사람이 지은 책을 읽으면서도 옛사람에 대해서 알지 못한다면 되겠는가? 그런 까닭에 그들이 살았던 시대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이것이 곧 위로 올라가 옛사람을 벗으로 삼는 것이다."

 

그래, 나는 정조를 국사 교과서에서만 보고, 짤막한 역사서에서만 봤었다. 그래서 정조를 피상적으로만 이해했겠지, 그러나 그의 글을 보고 나서는 그가 참 대단한 군주라고 생각했다.

 

이런 큰 군주더라도, 시대적 한계를 못 벗어난 것이, 개혁의 큰 틀에는 복고적 사고관이 있다는 점이 너무나도 아쉽다. 그러나 한계는 한계고, 정조 개인의 인품에는 분명, 현대인이 배울 점이 많다고 생각한다. 최고 통치자가 쓴 글 서양에서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명상록>이 있다. 비교해보자면 다소 <명상록>보다는 읽기 편하고, 쉽게 써진 글이라서 부담 없이 볼 수 있다는 점도 있다. 책은 어려운 책이 아니라서, 자라나는 청소년들에게 꼭 추천을 하고 싶은 책이며, 성인들에게도 추천을 하고 싶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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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주의 조건 - 현대의 리더가 조선의 군주에게 배우는 33가지 지혜
김준태 지음 / 민음사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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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래 본 자기 계발서 중 가장 좋은 책이다. 다소 번잡스럽지 않고, 간결했으며 핵심만을 잘 이야기한 책이다. 이 책은 <조선왕조실록>에서 역대 왕들의 행동과 그에 대한 기록을 바탕으로, 리더십의 정수를 뽑아낸 책이다. 저자는 <조선왕조실록>을 비롯한 동양 철학을 공부한 사람이었다.

저자는 리더에게 있어 가장 좋은 가르침을 전해 줄 수 있는 사람은 '리더'라고 이야기한다. 다만 현세의 리더는 아직까지 평가가 상반되는 부분이 많으니, 비교적 평가가 정확한 조선의 왕들을 기초로 하고 그 왕들의 업적이나 행적들을 적은 <조선왕조실록>이 좋은 사료라고 말하며 <조선왕조실록>에 의거해 이 책을 썼다고 했다.

 저자는 <조선왕조실록>에서 리더십의 정수를 33가지의 덕목으로 거슬렀다. 대체적으로 문체는 간결했고 번잡스럽지 않아서 좋다. 역사서인 <조선왕조실록>이 좋은 문헌이고 귀중한 문헌임엔 맞지만... 그렇다고 그걸 다 볼 수도 없는 노릇이다. 마치 불교의 팔만대장경을 다 보겠다는 것과 같지 않을까? 아무튼 저자의 요약 정신이 돋보였다. 문체 역시도 간결했다.

혹자들은 말할지도 모르겠다. 조선시대의 군왕들에게 배울 것이 뭐가 있는가? 대체적으로 현군보다 암군이 많았던 조선시대의 임금들에게, 과연 배울 것이 있는가?라고 이야기할 법도 하지만, 사실 개차반 군주라고 해서 배울 점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 개차반 군주의 악행을 반대로 하기만 해도, 현군은 안 될지라도, 어긋나는 군주는 되지 않는 법이니까, 따라서 군주의 악덕 역시도 거울로 삼아 본보기로 해야 함이 옳다.

그럼 <조선왕조실록>을 추린 그 33가지 항목 중에 무슨 특별한 비결이 있느냐? 내가 살펴본 바로는 아니었다. 다른 자기 계발서들이 하고 있는 말들과 똑같은 말들이 많았다. 즉 '뻔한 말들과 주제'라고 할 수 있겠다. 그래서 사람들은 실망할지도 모른다. 저자는 리더는 리더의 자리에 있는 자만이 현실적인 가르침을 줄 수 있다고 했는데, 그렇게 떡밥에 낚인 사람들은, 정작 그 조선 왕들을 분석한 결과 특별한 점이 없다는 것에서 실망을 감추지 못하고 이 책 역시도 그저 그런 책이라고 덮어 버릴 수도 있겠다 싶었다. (사실 나도 그랬다.)

그러나 이 책을 보며 내가 느낀 것은 가장 통속적이고 알려진 자기 계발의 법칙이 바로 ' 정도'가 아닐까 싶었다. 특별하지 않은 것, 이미 듣고 들어서, 귀에 딱지가 날 법한 잔소리 같은 그런 자기 계발서의 법칙들, 그 옛날 임금들이라고 해서 뭐가 다르겠는가? 다를 것 없다. 우리는 답을 가장 잘 알고 있지만, 실천하지 못할 뿐이다. 실천하지 못하는 심리와 변명 속에서 뭔가 '새로운' 느낌과 인상을 줄 수 있는 그런 경구나 문구들을 찾아다닌다. 이미 통속화된 자기 계발서들이 숱하게 주장하는 그런 말들은, 맞는 말이다. 다 맞는 말이다. 공감하면서도 마음 한편으론 '에이 뭐 별건 없네 이 책도.'라는 이중적인 마음이 존재하고 있지 않을까?

책의 머리말과 목차를 보며, 나 역시도 그런 '신선한 경구에 대한 기대감'이 무너지는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책을 덮으면서, 그 뻔하고 뻔한 자기 계발서에서 주장하는, 여러 책에서 재탕 삼탕 하는 그런 잔소리와 같은 말들에 대해서, 어쩌면 그 말들 역시도 괜히 나온 말이 아님을, 느꼈다.

저자는 <조선왕조실록>을 아주 뛰어난 기록이고, 왕의 일거수일투족을 아주 잘 나타낸 기록이라고 하며 이 책을 썼다.

그러나 이 책을 근본으로 쓴 <조선왕조실록>은 객관적인 역사의 기록이 아니다. 그 책에 나온 왕들의 행적은 때론 사관의 정치적 이념에 따라, 기록됐을 가능성도 있다. 그렇다고 해서 <실록>을 무시할 수도 없다. 이 부분은 모든 역사가 동일하기 때문이다. 어떻게 보면 역사라는 존재는 한없이 주관적인 기록이다. 역사에 있어서, 불신을 할 수 있겠고, 승자의 기록이라는 것도 존재하여 사실을 왜곡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역사상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텍스트가 바로 <조선왕조실록>이다. 어느 나라에도 이렇게 소상하게 왕의 행적을 기록한 것은 없고, 사관은 자신의 정치적 이념을 벗어나진 못해도, 자기 딴에는 최대한 객관적으로 기록했고, 왕들의 권위에 눌리지 않고, 소신껏 기록한 문헌이 바로 <조선왕조실록>이다. 그리고 그 기록이 태조부터 한 왕조가 끝나는 시기까지 이어진다. 이런 문헌은 역사적으로 유래를 찾을 수 없다. 다른 나라에서 전해져오는 주관적인 기록들에 비해 <조선왕조실록>은 나름대로 객관성을 확보하려고 많이 노력한 텍스트다.

까놓고 말해서, 한없이 역사를 부정적으로 본다면, 전해져 내려오는 역사를 믿을 건더기가 있겠는가? 비록 주관성이 조금 개입됐다고 하더라도, 그 부분을 후세는 잘 가려내 해석하고, 잘 가려내서 사실을 밝히며, 그렇게 역사의 진실을 탐구하고, 올바른 역사를 배워나가야 한다. 한없이 시니컬하게, 역사를 편파적인 기록이라며 부정하는 입장에 취하는 것 역시 안 좋은 태도임에는 분명하다.

따라서 나는 이런 시도가 좋다고 생각했다. 방대한 고전을 바탕으로 한, 자기 계발서를 쓴 것, 시중에는 고전을 모토로 한 여러 자기 계발서가 출간됐지만, 대체적으로 성찰보단 상업적인 부분이 많다. 이 책도 어떻게 보면 그렇게 해석될 수 있고, 다소 가벼운 부분에서 그런 상업적인 모습도 보이지만,

내가 봤을 때는 나름 잘 요약했다고 생각했다. 조선 왕들을 무조건적인 긍정이 아니라, 때론 부정적인 모습들도 잘 조명하며 아쉬움으로부터 올바른 덕목을 도출하는 서술도 좋았다. 내용? 그냥 뻔한 자기 계발서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이야기들을 33개나 읊어주고 있다고 보면 된다. 특별한 것도 없으니 그런 '신선한' 내용을 기대하는 사람들에게는 뭐... 큰 감흥을 못 줄 것 같은 책이다.

저자의 약력을 보니 논문에 <잠곡 김육의 실용적 경제사상 연구>, <호정 하륜의 정치사상 연구>, <현대 정책 이론의 관점으로 본 조준의 경세론 연구>, <정조의 정치사상 연구> 등의 연구 논물을 썼다. 대체적으로 현실 중심적인 이념을 가진 정치인들을 조명한 것 같다. 김육과 정조의 경우는 다소 이상적인 경세가에 둔다 할지라도, 조준과 하륜의 경우는 현실적인 면모가 두드러지는 경세가다.

저자 자체가 현실 정치에서 조선 시대를 경장했던 사람들을 집중 조망했다고 하는데, 책의 내용 역시도 현실 우위론적인 서술이 나오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나름 현실과 이상 두 부분에 대한 해석이 편파적이지 않았다. 그래서 다소 마음 편하게 봤던 것 같다.

선물 받은 책인데, 가볍고, 읽기 편하고, 예시로 든 것들이 <조선왕조실록>에 예시들이라서, 나름 내 취향과도 맞았다. 따라서 뻔한 소리 뻔한 이야기를 33개의 항목으로 나눠서 짧고 간결하게 설명한 책이다. 사람에 따라 이 책을 보며, 뻔한 소리 뻔한 이야기를 한다고 할 수 있겠으나, 나는 <조선왕조실록>을 토대로 한 자기 계발서, 역사를 바탕으로 한 자기 계발서조차 우리가 이미 잘 알고 있는 뻔한 소리를 한다는 것은, 옛사람과 현대인의 리더의 역할이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을 느꼈고,

 앞서 말한 대로, 가장 평이하고 가장 뻔한 소리야말로, 올바른 길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뻔한 말이 대중에게 뻔하게 인식된 것은 그만큼 대중에게 많이 알려졌지만, 어쩌면 그 뻔한 소리를 행하는 것은 어려운 것이 아닐까? 뻔한 소리로 인식된 덕목들은 사실 알고 보면 지키기가 꽤나 어려운 것들이 대다수다. 아는 것은 쉬워도 행동하는 것은 어렵다는 말이 떠오른다. 다소 짧은 분량의 책, 어렵지도 않은 책이라 빨리 볼 수 있었다. 자라나는 청소년들이 봐도 무방한 책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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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지록 (양장) - 큰 뜻, 짧은 말로 천고의 심금을 울리다
사토 잇사이 지음, 노만수 옮김 / 알렙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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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간만에 고전 리뷰다. 가장 주제가 난해하다고 할 수 있는 주제 '잠언집'을 리뷰하려고 한다. 이 책은 사토 잇사이라는 일본의 대유학자가, 40년의 세월 동한 한 땀 한 땀 정성 들여 쓴 글귀들이 담겨있는 책이다. 책의 제목은 <언지록>이라고 나와있는데, 사실 원제는 <언지사록>이라고 불리고 있다. <언지사록>은 <언지록>, <언지후록>, <언지만록>, <언지질록> 등 4권으로 구성됐다. 이 책은 이 4권을 모두 번역한 책이다.

책의 주제는 뭐라고 집어 낼 수 없다. 처세를 비롯해, 학문, 독서, 생활, 수양, 마음, 정치, 등등 여러 부분에 있어 사토 잇사이가 생각한 경구들을 기록한 책이다. 우리는 이런 책을 '잠언집'이라고 부른다. 다소 짧은 경구의 글들로 이루어졌고, 저자의 진솔한 내면의 언어로만 기록된 책인데, 이와 비슷한 책으로는 중국의 <논어>를 비롯한 <노자> 그리고 <채근담> 등이 있겠고, 우리나라에는 정조 대왕이 쓴 <일득록>이라는 잠언서와, 퇴계 이황이 쓴 <자성록> 등이 있다. 서양으로 가면 아루렐리우스의 <명상록> , 루소의 <수상록>, 쇼펜하우어의 <인생록>, 귀치아르디니의 <회상록>, 등등이 있다.

다소 이런 깊은 체험적인 성찰을 짧은 경구로 쓴 것을 어려운 말로 한다면 '아포리즘'이라고 명명하는데, 나는 이런 다소 어려운 용어를 쓰는 것을 지양하는 편이라서, 그냥 '잠언'이라고 명명하겠다. 아무튼, 이 책은 일본 유학계의 거두, 사토 잇사이의 잠언이 담긴 책이라고 할 수 있다.

다른 잠언서들과 다르게, 사토 잇사이의 <언지록>은 독특한 특징이 있다. 바로 40대부터 쓰기 시작해서 80이 넘어서까지 이 책을 서술했다는 점이다. 즉 사람 인생의 반평생의 철학이 녹여든 책이라고 할 수 있겠고, 그런 삶의 울림 때문인지, 메이지유신을 일궜던 사무라이들 역시 이 책을 숙독했으며, 현재 정계나 재계에 있는 일본의 거장들 역시 이 <언지록>을 '인생의 책'으로 격상하여 보고 있다.

일단 모든 책의 내용을 다 담으면 리뷰하는데 끝이 없으니 압축해서 담아보겠다. 이 책의 가장 큰 특징은 '균형감각'이라고 할 수 있겠다. 다른 잠언서들과 비교를 해도 되겠으나, 일단 우리나라의 유학계의 거두 퇴계의 <자성록>과 비교를 한 번 해 보겠다. 퇴계와 사토 잇사이는 시대적 차이는 있지만, 둘다 지금으로 말할 것 같으면 서울대학교 국립대학 총장을 지닌 그런 경력을 가지고 있다. 게다가 두 학자 모두가 유학자이므로, 아무래도 비교를 해 볼 법하다고 여겼다.

일단 <자성록>은 다소 형이상학적인 고찰이 많이 드러난 부분이다. 사실 <자성록>은 퇴계의 잠언이라기보단, 당대의 문인들과 학구적 논쟁을 한 편지들을 모아 엮은 책인데, 그래서인가 다소 형이상학적인 고찰이 많다. 가령 사단칠정에 대한 논의, 기대승과의 논쟁의 서부 터 시작해서, 여러 유학자들과의 논의를 담은 책인데, 솔직하게 말해서 이 <언지록>에 비해 상당히 심오하고 어려운 주제를 다루고 있다. 더불어, <자성록>이란 책은 철저하게 주자의 관점을 존중한 책이다.

반면, <언지록>의 경우는 다소 형이하학적 고찰이 많이 드러난다. 용어 자체가 굉장히 간결하며, 일상용어들로 자신의 느낀 바들을 적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너무 현실 중심적인 철학을 대변하고 있진 않다. 잇사이는 어쨌든 관학의 총장을 맡고 있어서, 표면적으로는 주자학을 존숭하지만, 내면적으로는 양명학을 존중하고 있었다. 그래서, 이 책에서 그는 주자학이 옳으니 양명학이 옳으니 논쟁하기보다는 각자 장점을 취하여 발전하면 그만이다.라는 중도적 관점을 제시하고 있다. 사실 내가 봤을 때는, 사토 잇사이는 양명학 학자인 것 같았다. 그의 글에서는 물론 정통 주자학적인 사고도 보이긴 하지만, 대체적으로 양명학에 대해서 굉장히 긍정하고 있는 모습을 보이고 있는 부분이 많았다. 양명학은 유학의 일파로, 다소 주자학에 비해 실천 중심적인 학풍이며, 주자학의 사변적 논의에 비해서는 다소 담박한 느낌의 사상이다.

일본 사람들의 가장 큰 장점은 뭘까? 바로, 장점들을 모두 흡수하여, 자국화하는 능력이 굉장히 탁월한 민족이다. 그러한 이론적 철학을 정립시킨 것이 <언지록>이 아닌가 싶다. 겉으론 주자학을 존중하는 것 같으면서도, 양명학의 부분을 인정하는 부분에서 잇사이의 균형 감각을 볼 수 있다. 즉 뭐가 좋은지 공리공론으로 따지지 말고, 좋은 것만 그냥 받아서 발전시키자.라는 실용주의 관점이 돋보인다.

잇사이의 중도주의 관점은 책에서 몇몇 구절들로 나타나는데, 가령 '실력이 없는데 명예를 너무 쫓지도 말고, 실력이 있는데 너무 명예를 거부하지도 말라.'라고 말하는 부분에서, 무조건적으로 명예를 거부하는 것 역시도 나쁘다고 하고 있다. , '명리를 추구하는 것이 나쁜 것은 아니다. 다만 자기만을 위해 쓰는 것이 문제다.' '이익을 얻는 게 어찌 악하다고만 하겠는가? 단지 자기 혼자만 독점하면 곧바로 다른 이로부터 원망을 사는 길이다.'라는 부분에서 동양 전통에서 명리를 나쁘게 인식하는 것과는 다소 반대적인 입장을 두고 있다.

'위정자의 개혁에도 때가 있다.'라는 부분에서, 개혁은 필요해도 시기가 중요하고, 적당한 시기에 개혁을 하지 않고 서두르면 모든 것을 망친다는 부분 역시도 음미할 만 했다.

아무튼 기존 유학적인 사고관을 그대로 종용하는 경구들도 보이지만, 무비판적으로 존숭하지 않으면서 주체적으로 인식하는 부분이 돋보였다. 특히나 가장 놀라웠던 점은

도라는 것은 중국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단지 중국은 미리 그 도(유학)를 밝혔을 뿐, 중국이 먼저 밝혔다고 해서 성인의 국가, 성인들만 있는 국가인 것은 아니다. 중국도 악인들이 있고, 오랑캐로 취급받는 나라에서도 성인은 있으며, 악인이 있는 법이다. 이것은 모든 역사가 그렇다.라는 논지를 전개했는데, 이런 부분에서 굉장히 주체적으로 유학을 해석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나라는 솔직히, 주자의 권위에서 벗어나지 못 했다. 개혁군주 정조의 사고 관념에도, '주자'가 중심에 있었으며, 그것은 근대를 이루기 전까지도 지속됐던 것이었다. 그러나 잇사이는 이런 주자의 권위에 의문을 표한다.

'옛날 주자학파라고 하는 자들은 고루함에 빠져 있다. 오늘날 주자학자라고 칭하는 이들은 잡박함에 빠져 있다. 오늘날 양명학을 잘 참작하여 주자학 말류의 폐단을 구하는 것이 좋다.'

이런 부분에서, 잇사이는 주자학의 권위에도 눌리지 않고, 양명학을 대변하며, 상호 보완적인 유학 발전을 일궈낸다.

물론 잇사이의 이 <언지록>에도 모순은 있다. 그는 유학의 관점에서 주자학과 양명학만을 인정했을 뿐, 서양 양학에 대해서는 초기에 부정적인 눈초리를 보내며 거부해야 하는 학문이라고 이야기했다. 그러나 80세에 기록한 <언지질록>에서는 서양의 과학 기술 문명에 대해 어느 정도 애매하게 포용하려는, 관점을 내비친다.

특히 그의 후학들은 주자학자와 양명학자가 고루 배출되는데, 막말 일본 선각자인, 사쿠마 쇼잔의 문하에서 가쓰 가이슈, 사카모토 료마, 요시다 쇼인, 고바야시 도리사부로 등의 다수 메이지 유신의 인물들이 배출된다. 그리고 그들 역시 잇사이의 <언지록>을 심취했다.

물론 잇사이는 유학적 관점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다. 하지만 그는 그 유학적 관점, 주자학적 관점을 그대로 수용하지 않고 양명학과의 조화를 통해, 교리적 주자학과 실천적 양명학의 조화를 이뤄 유학을 발전시키려고 했다. 그 균형감각이, 서양 지식에까지는 미치지 못한 한계는 있지만,

그의 후학들은 그의 <언지록>의 사상, 균형감각을 더욱더 발전시켜서, 동양의 유학적인 학풍과,
서양의 지혜 역시도, 균형감 있게 인식하고 습득한다.
그 결과 일본은 빠른 근대화로 나아 갈 수 있었고, 동양의 어느 나라보다도 부국강병을 이룰 수 있는 배경이 있었다.

즉 일본의 장점, 좋은 점을 자국 화해 내는 능력을, 이론적 잠언(아포리즘) 철학으로 확립시킨 저작이 바로 <언지록>이다. 책의 주제는, 여러 처세와 여러 부분을 다루고 있지만, 궁극적으로 마음을 수양하는 것을 가장 최고로 두고 있으며, 바른 마음 맑은 평정심을 유지하기 위한 한 유학자의 성찰적 잠언이 담긴 책이다. 특히나 그런 잠언집을 40년 반 평생 써오며 교정한 책이라는 점에서, 그냥 내뱉은 말이 아닌, 잇사이가 필사의 노력과 각고의 심혈을 기울여 쓴 문구가 아닌가 싶다.

우리나라는 지금까지, 동양 철학이라고 하면, 중국 철학과, 우리나라 자국의 철학만을 최고로 여기고 일본 철학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다. 나도 별반 다를 바가 없었다. 그러나 이 책을 보며 나는 정말로 반성했다. 도는 중국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잇사이의 말처럼, 어쩌면 우리의 인식에는 반일 감정이라는 감정적인 부분 때문에, '일본 철학'을 굉장히 폄하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했다. 

이 책을 보니 확실히 일본 철학만의 매력이 있다. 첫 번째 쉽고, 두 번째 간결하고, 세 번째 그러면서도 깊다. 이것은 현대의 일본 저서들의 특징이기도 했다. 아무튼 <언지록> 이 책은 굉장히 좋은 책이다.

다만 이 책의 첫 장에 대해서 나는 동의할 수 없다. 첫 장은 사람은 정해진 운명이 있고, 노력해도 자신의 운명을 벗어날 수 없다는, 다소 운명론적인 관점이 있는데, 나는 이에 대해 절대 수긍하지 않는다. 잇사이도 <언지록>에 이렇게 말했다. '다른 것은 양보해도 뜻만큼은 스승에게도 양보하지 않아야 한다.'라고 했는데, 나는 이 구절을 여기에 적용하고 싶다.

아무튼 이 부분만을 제외하고는 모든 격언들에게서 깊은 울림을 받았다.

나는 이 책을 솔직하게 말해서 좋은 감정으로 만난 것은 아니었다. 일본인 친구와 오사카에서 이야기를 하다 싸우면서, 알게 된 책인데, 이제야 이 책을 완독했다. 그때는 이 책이 참 꼴보기 싫었는데, 지금은 그렇게라도 이 책과 만나게 된 것이 다행이라고까지 생각된다. 이 책을 통해서 마음을 닦고 배운다는 것, 사람이 된다는 것이 무엇인지 많이 생각했다. 깊은 울림을 가진 책이고, 굉장히 좋은 저서다. 이렇게 좋은 책이 1쇄에 머물렀다는 것이 참 안타깝다. 게다가 리뷰도 거의 없다... 애석할 다름이다.

일본인, 일본인의 장점, 일본인의 강점을 이해하고 싶다면 이 책을 깊이 있게 숙독할 것을 추천한다. 그리고 한 번 보는 것에 의미를 두지 말고 재독하고 재독 하길 권한다. 이것은 모든 잠언서들에 해당되는 이야기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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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와 유다의 밀약 - 유다복음
로돌프 카세르 지음 / National Geographic(YBM시사) / 2006년 6월
평점 :
품절


종교계에서는 교리를 흔들 정도로 강력하고 충격적이었던 책이지만, 사실 비종교인인 내가 봤을 때는 '아 이런 관점의 교리'도 있구나, 정도에서 스친 책이다. 어쨌든 정경으로 채택된 <신약성경>에서 유다는 그야말로 배신의 아이콘으로 낙인찍혔으며, 2000년이 넘게 인류로부터 외면당해왔었던 존재였다.

나는 <신약성경>을 보면서 가장 의아스러웠던 점이 유다에 대한 결말이 달랐다는 점이다 공관복음의 첫 장인 마태복음에서 유다는 예수를 밀고했지만, 결국 자책감에 자살을 하게 됐으며, 사도행전에서는 아예 유다가 악행의 응보를 받아 피투성이로 최후를 맞는다는 이야기다. 정경으로 선택된 복음서들의 공통점은 유다를 악인으로 규정하는데, 동의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각 복음서 별로 유다의 죽음에 대해서는 내용이 달랐다. 과연 무엇이 진실인 걸까? 

이 <유다복음>은 예수와 유다의 비밀스러운 언약을 다룬 기록으로, 여기서의 예수는 기존에 우리가 알고 있던 예수와는 전혀 다른 사람으로 나온다. 복음서의 주요 내용은 굉장히 복잡하지만, 간결하게 설명해본다면,


1. 기존 교리의 기독교적 세계관과는 전혀 다르게 세상을 인식하고 있다는 점.

2. 예수는 창조주의 아들이 아니다. 창조주는 하위 신의 개념이며 부정적인 신으로 묘사된다. 그런 부정적인 신이 만든 이 세상이라서, 지금의 현세는 타락의 공간으로 인식하고 있다. 더불어, 예수는 그 이상의 상위 신들의 영역(바르 벨로의 불멸 세계)에서 온 초월적인 존재다.

3. 다른 제자들은 이런 예수의 정체를 모르고 있지만 '유다'는 예수의 정체를 알고 있다.
'당신은 베르벨로의 불멸 세계로부터 왔습니다.'

4. 예수는 그런 유다에게만 올바른 '지식'을 비밀스럽게 전수한다. 그리고 종국에 가서는, 자신은 상위 신들의 영역으로 돌아가야 한다며, 그 방법은 오로지 육신을 포기하는 것 밖에 없으니, 이 모든 것을 이해한 유다에게, 자신을 죽여줄 것을 부탁한다.

'너는 열세 번째가 될 것이며, 다른 세대들에 의해 저주받을 것이다. 그리고 너는 그들을 다스리게 될 것이다. 마지막 날에 그들은 네가 거룩한 세대로 올라간 것을 저주할 것이다.' - 47

'그러나 너는 그들 모두를 능가할 것이다. 왜냐하면 너는 나를 옷처럼 둘러싸고 있는 그 남자를 희생시킬 것이기 때문이다.' - 56


5. 결국 유다는 예수의 말을 이해하고 하늘 위에 자신의 별을 보게 된다. (이 부분은 플라톤의 <티마이오스>의 사상이 혼합되어 있다. 플라톤은 인간의 영혼은 무수히 많은 어느 하나의 별과 같다고 이야기했다.) 예수는 유다에게 이렇게 명명한다.

'보아라 너에게 모든 것을 알려주었다. 너의 눈을 들어 구름과 그 안에 있는 빛과 그것을 둘러싸고 있는 별들을 보아라. 길을 인도하는 별이 너의 별이다.' - 57


6. 유다는 결국 예수를 배신했다. 그렇게 하여, 약간의 보수를 받았다. 복음은 이로써 마쳐진다.


생각해 봐야 할 점은, 다른 복음서들과 다르게, 예수의 부활이 언급되지 않는 점이다. 이 유다복음에 의해서는 예수는 절대 부활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그의 죽음이야말로, 그가 원래 왔던 상위 신들의 세상으로 돌아가는 것을 의미하는 것인데 (진정한 구원), 그가 현세에서 부활한다는 것은 더럽고 타락한 곳에서 다시 부활한다는 의미를 지니기 때문이다.

이 복음을 보며 생각한 것은 우리가 알고 있던 그리스도교 역시도, 여러 종파가 성행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유다복음은 '영지주의' 복음서로 분류를 하는데, 영지주의는 자아와 신의 합일을 위해 '신비스러운 지식'을 강조한다. 결국 신은 내적인 영이고 빛이기 때문에, 직접 접근하는 것이 가능하고 중재자가 필요하지 않다.

예수가 유다에게 전해 준 지식 그것이 바로, 자아와 신의 합일을 위한 신비스러운 지식에 한 예이다. 이 교리에 따르면, 인간의 구원은 오로지 죽음으로 이뤄질 수 있으며, 소수의 영을 가진 자들만이 상위 신의 영역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

다소 복잡하지만 그들의 인식 자체는 올바른 지식을 강조하는 것 같다. 세상이 타락한 원인으로는 지혜의 여신인 소피아가 타락하였다. 그 결과 네브로(반역자라는 뜻)라는 뒤틀린 신이 태어났으며 그와 사클라스(바보 멍청이라는 뜻)는 이 세상을 창조한다. 반역자와 바보가 만든 세상이 바로 현세라는 것인데, 세상이 이렇게 타락한 근본 원인에는 '타락한 지식'이라고 규정짓고 있다.

나는 책을 보며 든 생각인데, 과연 이 타락한 지식이라는 것을 문자적인 것에만 국한해야 하는가에 대해서도 생각해봤다. 아마도 이들 종파에서는 다른 교리의 종파들을 공격할 때 '타락한 지식'이란 잣대를 그대로 쓰지 않았을까라고 추측을 해 봤다. 특히나 지식을 최고의 교리로 생각하는 그들이니, 자신들은 올바른 지식과 교리를 가지고 있다는 '정당성'을 확보하기에도 용의하지 않을까 생각도 해 봤다.

그럼 현세의 이런 부정적이고 뒤틀린 부분에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들의 종교적 교리로 해석한다면, 올바른 지식(자신들의 교리)를 영접하고, 이해한 뒤, 죽음을 통하여, 하위 신이 창조한 이 세상을 넘어서 상위 신들의 영역으로 가는 것, 그것이야말로 궁극적인 구원이라고 그들은 해석하고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사실, <유다복음> 속에서의 예수는 바른 지식을 알고 있으며, 그런 예수가 어디서 왔는지 알고 있는 '유다' 조차도, 바른 지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으로 묘사하고 있다. 예수는 자신들의 제자들을 제쳐두고 유다에게만 '비밀스러운 지식'을 전승하며, 자신이 온 세계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어쨌든 이렇게 해석을 하면 우리가 알고 있던 지금까지의 기독교는 잘못된 지식의 교리를 따르고 있으며, 배신의 아이콘인 유다는 예수를 구원하였던 구도자이며, 예수의 사상을 가장 잘 이해한 사람으로 해석될 수 있다.

그러나 나는 <유다복음>도 보면서 좀 의문이 드는 게, 그럼 과연, 죽음으로 모든 것을 구원할 수 있다면, 뭐 하러 굳이 번거롭게 유다의 손을 빌려서, 예수는 죽어야 한단 말인가? 그냥 예수가 자결하면 모든 것이 해탈되는 것인데,라는 생각도 들었다. 어쩌면 이 복음서는 그럴 가능성도 있겠다. 실제 사실을 재해석하여, 의미 부여를 한 문서일 수도 있고, 어쩌면, 사실일 수도 있겠다도 싶었다. (물론 나는 재해석하여 의미 부여를 하는 쪽이 맞다고 본다. 뭔가 너무 부자연스럽고 희극과 같은 억지스러운 감정의 고조를 이끌어내는 것이 보이기 때문에)

어쨌든 이 <유다복음>은 정통 그리스도교에 대해 전혀 다른 사상과 관점을 가지고 있으며, 2세기 이레네우스가 지적을 했을 정도로, 정통 그리스도교(정확히 말하면 사상적 승리를 거둔 종파)가 보기에 가장 위험한 교리를 담고 있는 불온한 사상으로 취급되었다. 이레네우스는 사상적 승리를 통해 이단들을 배척하는데, 그 중 가장 불온한 사상으로 몰아간 것이 바로 이 <유다복음>이다.

그는 영지주의 자체를 배격했으며, 유다를 긍정한 영지주의 분파를 '가인파'라는 이름을 붙인다.

그러나 발견되지 않아서 확정하기 그렇지만 역사상 영지주의 어느 문헌에서도 스스로 '가인파'라고 명명한 종파는 없었다. 어쩌면 이 부분은 승리한 지금의 종파가, 승자의 이름으로 '가인'이라는 이름을 붙여버린 것일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책에 실린 바트 D 에이먼의 논문에서 종파 전쟁에 대한 부분을 더 인용해보자.

'간단히 말하자면 그리스도교계 내부에서 서로 경쟁하던 종파들 가운데 하나가 다른 종파를 제압하는 데 성공했다. 이 종파는 반대파들보다 더 많은 개종자들을 끌어들였고, 경쟁 종파들을 변두리로 몰아내는 데 성공했다. 이 종파는 교회의 조직 구조를 결정했다. 이 종파는 신도들이 어떤 교리를 낭송할 것인지 결정했다. 그리고 이 종파는 어떤 책들을 경전으로 받아들일 것인지 결정했다.
유스티누스, 테르툴리아누스 같은 인물들과 이레네우스는 이 종파에 속했다. 이 종파는 '정통'이 되었고 모든 반대파들에 대한 승리를 굳히자 자신들의 투쟁의 역사를 다시 써 내려갔다. 즉, 자신들이 항상 그리스도교 여론의 다수파였으며, 자신들의 견해가 사도적 교회 및 사도들의 견해와 일치했고, 자신들이 교리가 예수의 가르침에 직접 뿌리를 내리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 종파가 경전으로 받아들인 책들은 이러한 주장을 입증했다. 왜냐하면 마태와 마가,누가,요한은 모두 원시 정통파가 흔히 하는 이야기를 전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야기를 다른 각도에서 서술함으로써 원시 정통파의 경전에서 탈락된 책들은 어떻게 되었는가?'

'그러한 무서의 존재에 대한 소문이 계속 나돌았으나 보존하려는 사람은 없었다. 보존하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그런 문서들의 내용은 허위이며, 사람들을 잘못된 길로 인도할 뿐이다. 그런 문서들은 조악한 죽음을 맞도록 하는 편이 낫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렇게 했다. 오래된 원본들이 낡았을 때 다시 필사하는 경우는 드물었고, 결국 이렇게 고립된 사본들은 점차 자취를 감추었다.'


역사란 것은 사실 승자의 기록이다. 사상의 승리를 통해 정당화하는 것은 동서양을 가릴 것 없이 그대로 자행됐다. 제자백가의 철학의 전쟁터에서, 현실적으론 법가가 승리했지만, 결국 중국을 장악한 것은 유가였고, 그러한 유가는 유교로 진화하여서, 모든 제자백가들을 이단화하여서 동아시아를 지배했다.

종교라고 해서 별반 다를 바 있겠는가? 사상적으로도, 그리고 역사적 인물로도, 기록이라는 텍스트는 승자의 입장인 것이 대부분이다. 얼마 전 종영한 드라마, 정도전을 보면서도 비슷한 생각을 했었다. 이방원은 칼을 쥐고 정도전에게 말한다.

'그대가 만든 조선에서 그대는 영원히 배척될 것이오, 나는 그대의 존재를 또 다른 존재로 덮어버릴 것이오, 정몽주라는 해로 말이지, 고려를 지키려 했던 충신을 조선 선비들은 추존할 것이오.' 대충 이런 말을 하며, 정도전을 죽인다. 그리고 실제로, 정도전은 이단으로 배척당했다. 허균은 정도전의 시를 특히 좋아했는데, 정부에서는 이런 허균을 보고 이단자의 글을 좋아한다는 것을 무기로 공격했다.
 
유다 역시도 그럴 수 있는 인물이 아닐까?

물론 기존 복음서들의 말 대로, 유다는 배신자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런 문서의 발견으로 인해, 우리는 좀 더, 다양화된 사상을 만날 수 있으며, 유다라는 인물에 대해서도 해석론을 두고 다양한 견해를 둘 수 있다고 생각했다.

나그함마디 문서를 비롯해, 유다복음이 포함된 '차코스 사본'에서 우리는 기존의 성경과는 다른 복음서들을 만날 수 있다. (선택받지 못한 복음서, 외경이라고 명명되는) 나는 개인적으로 이 유다 복음보다는 도마복음이 더 매력적이다. 유다복음은 솔직히 파격적인 내용이긴 하지만, 그냥 다양한 종파가 있구나, 교리가 여러 교리가 있었구나라는 생각에서만 그쳤는데 (물론 이 부분은 내가 비종교인이라서 그럴지도 모르겠다.)

도마복음에서의 예수는 정말로 '인간적인' 내면이 돋보이는 부분이 많았기 때문이다. (이 부분은 나중에 도마복음 서평 때 올리겠다.)

책에는 번역자들의 흥미로운 논문이 많이 있었다. 로돌프 카세르의 글 '차코스 사본과 유다복음의 이야기'라는 글을 읽으며, 인간의 경제적 욕망에 인류의 유산이 이렇게까지 곤욕을 치르는 행위를 보며, 정말이지 안타까웠다. 기존 교리에 있는 사람들은 아마 이 문서가 그대로 박살 나길 원했을 수도 있겠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종교인들이야말로 이런 문서들을 읽고, 기존 교리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생각해 볼 수도 있으며, 상호보완적인 부분으로, 부족한 부분들에 대해서는 다르게 바라볼 수도 있는 기회로 삼을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물론 나는 종교인들에게 외경의 포용성을 강력하게 '권유'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

 결국 전문가의 손에 들어간 복음서는 위태위태한 상태였었고, 그것은 패배한 사상의 모습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복원이 불가능할 것만 같은 문서를 잘 복원해내서 정말 다행이었다. 패배한 사상이라고 해서 의의가 없는 것은 아니다.

책을 읽으면서 또 하나 느낀 점은, 이 영지주의자들이 중요시하는 '지식'이라는 것에 플라톤의 사상이 많이 들어가 있다는 점이 돋보였다. 나그함마디 문서에서도 플라톤의 <국가>가 나왔는데, 이 <국가> 책 역시도 영지주의적 관점으로 각색한 책이었었다. 그리고 이 유다복음에서, 사람의 혼은 별과 상응한다는 이론은 플라톤의 <티마이오스>에 나왔던 주장이었다.

이런 부분으로 볼 때, 이 <유다복음>을 중요시한 종파, 그리고 영지주의자들이 중요시하는 지식에는 '플라톤'의 철학을 긍정하고 있었고, 많은 영향을 받았다는 것을 느꼈다.

영지주의는 여러 면에서 불교 철학과 비슷하지만, 궁극적으로 차이가 있다. 영지주의에서 신성시되고 비밀스럽게 여기는 것, 신에 인간의 내면이 근접하는 매개체는 '지식'이다. 그러나 불교철학에서는 자신이 부처가 되는 데 가장 중요한 것은 '지식' 이 아니라 '깨달음'이다. 이런 부분에서 본다면 지식을 강조하는 영지주의에 대해서 거부감이 들었다. 물론 영지주의 역시 깨달음을 강조하지만 그것은 '지식'을 통한 깨달음이라는 전제가 있고, 지식이라는 측면이 더욱더 강조되는 경향을 받았다. 나는 그런 부분에서 아쉬움을 느꼈다.

사실 이 책이 발견됐다 해서, 기존의 그리스도교의 교리에 반하는 책이라고 해서, 흔들릴 필요는 없다고 본다. 믿는 입장인 종교인의 관점으로는, 자신의 믿음이 독실하다면, 자신들의 종교에 더욱더 매진하는 것으로 대응할 수 있겠고, 학자나 비종교인의 경우에는 다양한 기독교적 해석이 존재했었다는 시각으로 받아들이면 될 듯싶다.

어쨌든, 다소 분량이 적은 쪽수의 책이지만, 재미있었다.

유다복음의 신선한 시각과 유다복음의 해석뿐만 아니라, 수록된 논문들 역시도 아주 좋았다. '차코스 사본과 유다복음에 얽힌 이야기'에서 문서의 행적을 둘러싼 고고학의 노력을 볼 수 있었으며, '유다복음이 제시하는 또 다른 관점'이란 논문은 유다복음의 친절한 해설서였다. '성 이레네우스와 유다복음'이라는 논문은 사상계에서 이레네우스의 규정을 둘러싸고 유다복음과 그 종파들에 대한 상세한 검증이 돋보였었으며, 마지막 논문 '유다와 영지주의와의 관계' 역시도 영지주의에 대한 이해를 돕고 있었다. (사실 솔직히 유다복음 텍스트보다는, 논문들이 더 재미있었다.)


앞으로도 이러한 문헌들이 많이 발견됐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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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의 서재
소준섭 지음 / 어젠다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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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보다 괜찮았던 책이다. 다만 책의 제목 <왕의 서재>보다는, <왕의 공부>라고 이름 지었으면 더 적절할 것 같았다. 이 책의 주요한 논의는 바로 왕이 어떤 책을 보고 어떤 수업을 받으며, 어떤 교육을 받느냐에 대해 서술해 놓은 책이다.

대중을 의식한 교양서 치고 상당히 깊은 부분까지 치고 들어갔다. 이런 분야에 관심이 없는 사람들이 보기엔 좀 부담스러울 수 있겠으나, 깊은 내용이더라도, 생각보다 서술이 평이해서 관심만 있다면 부담 없이 볼 수 있는 책이 아닐까 싶다.

비슷한 종류의 책인 <제왕의 책>과 비교를 해 보자면, <제왕의 책>에서는 어느 한 국왕과 제왕이 아꼈던 책을 엮어서 전개했지만, 이 책은 그런 다소 미시적 관점보다는 거시적인 왕가의 교육에 사용된 통합적인 제왕학 책과 더불어, 왕가의 교육, 경연에 대한 부분까지도 고찰하고 있는 점이 눈에 들어왔다.

비단 우리나라의 제왕학이 아닌, 중국의 제왕학에 대해서도 서두에 비교하며 밝히고 있는데, 생각보다 좋았다. 다만, 저자는 강희제의 예를 들어, 그가 호학 군주였다는 점과, 서책을 가까이하고 서책들을 정리하여 <사고전서>를 추려낸 건륭제의 업적의 토대를 마련한 문화의 군주라고 말하지만, 이 부분은 깊이 들어가 보면 사실 그렇지 않다.

건륭제의 <사고전서>는 건륭제가 자행한 문화적 압박과도 같다. 물론 건륭제가 세상에 떠도는 많은 경전들을 추려 내어, 국가적으로 <사고전서>라는 방대한 정리를 했다는 점은 맞지만, 그 <사고전서>의 규정에는 '보이지 않는' 사상의 차별과, 건륭제에 취향에 부합되지 않은 사상들의 책은 모두 소거시키고 말소시키려는 이면도 숨어 있다. 혹자들은 겉으로 드러나는 건륭제의 <사고전서> 편찬이라는 문화적으로 봤을 때 방대한 서적을 포함하여 책의 전집을 만들어, 사상과 문화를 한층 더 크게 진흥시켰다고 칭송하겠지만 (아니 대부분의 중국 논문에서는 그렇게 예찬적 태도를 지니고 있다.) 사실 실상을 들여다보면, 문화적, 사상적인 획일성에 입각하여 정리된 사상적 탄압으로도 볼 수 있는 사실이다. 막말로 건륭제의 규정에 부합되지 않는 책들의 운명으로 본다면 이 <사고전서> 편찬을 칭송할 수만은 없을 것이다. 이 부분은 얼마 전 리뷰를 남긴 천쓰이 선생의 <동양 고전과 역사 비판적 독법>에서 깊이 있게 설명되어 있다.

혹자들은 건륭제의 <사고전서>와 강희제가 무슨 상관?이라고 물을 수 있겠으나 그렇지 않다. 건륭제의 <사고전서> 편찬은 강희제의 문화 진흥 정책의 실질적인 결과라고 보면 된다. 따라서, 건륭제가 자행한 획일적인 문화적 가압(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과도 동일하다고 보면 된다.

아무튼 이 점의 해석이 다소 아쉬웠었다. 책의 구성은 제왕학, 왕의 학문에 대한 논의에서부터 제왕학에 사용된 책들에 대해서, 그리고 역대 왕들이 어떤 책들을 공부했는지 이야기하며, 역대 왕들이 했던 경연과 그 경연 기록들을 몇 부분을 보여주기도 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세종과 정조에 대한 예시를 들어 책의 결론을 마친다.

재미있는 점은 중종이 <대학연의보>를 모두 완독을 했다는 것이다. 중종이란 군주는 별로 두각이 드러나지 않는 군주라고 생각할지 모르나, 생각 외로, 경연에 충실했고, 많은 책을 읽은 군주였었다. <대학연의보>는 <대학연의>에서 치국평천하가 없어서 그것을 보충한 책으로 160-_- 권으로 된 방대한 책이다. 기존의 <대학연의>가 43권, 이 책도 엄청 분량이 많아서 역대 왕들은 경연을 할 때 1년 이상을 소모했던 게 정상인데, <대학연의>와 <대학연의보> 둘 다를 '경연'으로 완독한 군주는 중종뿐이라고 했다. 아무튼... 그렇게 열심히 경연에 책을 읽었다만... 역사에 뚜렷한 치적을 남기지 못한 중종에게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경연의 가장 열정적인 군주는 세종이나 정조가 아닌 성종이었다. 실제로 성종은 하루 3번 경연을 '무조건적으로' 실천한 배움에 근면한 군주였다.

책을 보며 느낀 것은 역시 책을 많이 본다고 해서, 좋은 것은 아니라는 점을 중종에게서 봤다. 세종이나 정조는 호학 군주긴 했으나, 그 지식을 활용하는 측면에서 중종보다는 성종이, 성종보다는 정조가, 정조보다는 세종이 더 뛰어나다는 것을 어림풋이 느꼈다.

그렇다고 해서 나는 책의 무용론을 주장하고 싶지는 않다. 보편적으로, 뛰어난 인물들이나 업적을 남긴 인물들의 공통점은 '책'을 많이 읽었다는 공통점이 있다. 그리고 나아가서 그 지식을 지식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잘 활용하는 것. 거기에 독서의 효용은 있다는 뻔한 결론이 도출됐다.

최근 고전 교육에 대해서 목소리를 높이는 쪽도 있다. 이지성을 필두로 한 고전이야말로 전부고 모든 것이라고 주장하는 입장, 그리고 그 반대 고전 무용론, 고전은 허세라고 하는 쪽도 있다. 가벼운 책만 보자, 두꺼운 책은 사람 잡는다, 책만 볼 수 없다 등등의 주장들...  책의 유용론과 무용론의 논쟁과 같은 취지이지 않나 싶다. 양쪽 다 일리가 있는 말이다. 나는 생각한다. 지식으로 그칠 바에는 고전이라는 어려운 텍스트를 읽을 필요가 없다고 본다. 그러나 스스로 정리할 수 있으며, 깨달음으로 나아가려고 노력하고, 현실적 행동으로 이론을 도출해 낼 수 있는 사람이라면, 적극 고전을 읽으라고 추천하고 싶다. 그 부분을 고전을 가까이한 두 군주 중종과 세종에게서 느꼈었다.


어쨌든 책은 왕가의 교육, 특히 텍스트에 입각한 교육에 대해서 체계적으로 정리된 개론서이며, '제왕학'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잘 정리가 된 책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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