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파르타쿠스 전쟁 - 야만과 문명이 맞선 인류 최초의 게릴라전
배리 스트라우스 지음, 최파일 옮김 / 글항아리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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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을 읽으며, 관심이 갔던 인물은 바로 노예 반란을 이끌었던 스파르타쿠스였다.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에는 스파르타쿠스의 단독 열전이 없었지만, 그의 이름은 당대의 유명한 정치인들의 열전에 빠지지 않고 등장했다. 크랏수스, 카토, 폼페이우스, 키케로, 카이사르 등등의 쟁쟁한 인물들의 열전에서 그의 흔적은 쉽게 찾을 수 있었다. 

 스파르타쿠스는 트라키아인으로 로마의 밑에 위치한 카푸아 지역의 검투사였다. 저자는 스파르타쿠스가 술라의 동방원정 때 징용되어서 들어온 이민족이라고 추측했다. 그 뒤 그는 어떤 잘못을 하여서 로마의 대역죄를 지었고, 그 결과 검투사가 됐던 것 같다. 그는 동료 검투사와 반란을 일으켰다. 그 뒤 베수비우스 산에서 로마군을 격퇴하고 북쪽으로 진군하며 알프스를 넘으려고 했지만 결국 부하들의 반발로 이탈리아 남부로 향했다. 북으로 향하는 도중 로마 정규군을 크게 이겼지만, 스파르타쿠스는 자만하지 않고 로마의 정예병과 최대한 접전을 피하며, 남부로 피신했다. 남부에서 반란군은 내분에 빠지는데 크릭서스가 이끄는 켈트족과 골족 세력은 이탈리아 남부에서 머물길 원했으나, 스파르타쿠스는 알프스를 넘는 길을 포기하지 않았다. 스파르타쿠스는 결국 자신들이 생존할 유일한 방법은 이탈리아 반도를 떠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로마와 근접한 이탈리아 반도에서는 끊임없이 로마의 정예병에 시달려야 하고 장기전으로 흐를수록 자신들에게 불리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스파르타쿠스는 다시 북쪽을 향해 진군했다. 로마는 이런 반란군의 분열을 이용하여, 남부에 남은 크릭서스의 군대를 박살 내고 스파르타쿠스의 군대를 다시 공격했다. 놀란 스파르타쿠스는 북진을 포기하고, 다시 남쪽으로 내려가 분열된 세력을 수습하여 전력을 정비했다. 이 과정에서 스파르타쿠스는 로마의 정예군단을 다시 한 번 격파하여 반란군의 위용을 과시했다. 이에 로마는 가장 모략적이고 음험한 정치가 중 한 사람인 크랏수스를 스파르타쿠스의 토벌 사령관으로 임명했다. 크랏수스는 반란군을 이탈리아 남부로 몰아냈고, 방어벽을 세워 장기전으로 반란군을 괴롭혔다. 스파르타쿠스는 시칠리아 섬으로 도주하여 재기를 꾀했지만 해적들에게 속은 덕에 섬으로 건너가지 못 했고, 결국 그는 크랏수스의 포위망을 벗어나 반도의 중부로 진군했다. 뒤를 쫓는 크랏수스의 군대와 조우한 스파르타쿠스는 최후의 전쟁에서 크랏수스를 향해 돌격하였고, 결국 이 돌격이 실패함으로 반란군은 패배했다. 그 뒤 크랏수스는 잔존 반란군을 토벌했으며, 살아남은 반란군 일부는 스파르타쿠스가 행하려 했던 계획인 알프스를 넘어 이탈리아 반도를 탈출하려고 도주했다. 그러나 그들은 이베리아 반도의 반란을 평정하고 돌아온 폼페이우스의 군대에 의해 모두 사살됐다. 

 스파르타쿠스 전쟁은 로마의 모순점을 그대로 보여준 사건이다. 반란을 통해 우리는 로마인과 외부 민족의 차별적인 대우, 자유민과 노예의 차별적인 대우를 유추할 수 있다. 흔히 문명국이라고 생각하면 화려한 외면과 뛰어난 내면적 규율을 떠올리지만, 제국주의 로마의 모습은 그렇지 않았다. 겉으로는 화려하고 더없이 위대했지만, 내면적인 부분에는 부패가 가득했다. 흔히 공화정 로마는 하층민의 자유를 최대한 보장한 국가라고 생각한다. 물론 맞는 말이다. 로마의 시민들은 정치적 투쟁을 통해 최대한의 정치적 권리를 보장받았고, 이것이야말로 공화정 로마의 가장 뛰어난 점이다. 그러나 이런 정치적 자유는 철저하게 로마인에 한정됐다. 타민족과 타도시 출신의 사람들은 로마인 시민이 누리는 정치적인 자유를 누리지 못하고 노예처럼 착복당했다. 게다가 로마 안에서도 노예 계급은 여전히  인간만도 못한 취급을 받으며 수탈당했다. 

 이 당시 공화정 로마제국에 벌어진 사건은 다음과 같다. 1,2차 시칠리아 노예 반란, 세르토리우스의 이베리아 반도 반란, 폰토스의 미트리다테스의 반란, 그리고 이탈리아 소도시의 동맹시 전쟁, 스파르타쿠스의 반란, 마리우스와 술라의 내전, 지중해 연안 해적 창궐. 즉 로마는 화려했지만, 화려한 제국주의를 지탱하면서 발생한 수많은 모순들이 전쟁으로 표출되고 있었다. 세르토리우스의 반란은 기득권층의 부패를 상징하는 사건이며, 미트리다테스와의 전쟁도 동방 민족들에 대한 인종차별적인 시각으로 인해 일어났다. 로마와 이탈리아 소도시가 싸웠던 동맹시 전쟁은 이탈리아 반도 내에서의 로마의 무지막지한 갑질을 상징하는 사건이며, 시칠리아 노예 반란은 계급 갈등을 상징한다. 이런 상황 속에서 스파르타쿠스의 반란이 일어났던 것이다. 이런 전쟁들은 결국 탐욕스러운 제국주의 로마의 반작용에서 비롯한 것이다. 

 반란은 아마추어적일 수밖에 없다. 아마추어적인 반란이기 때문에 반란에 어울리는 감성은 냉정이 아니라 열정이다. 반란을 지탱하는 가장 큰 요소가 바로 군중심리고, 이런 군중심리는 결국 열정의 영역에 속한다. 그래서 아마추어적인 반란군은 늘 의욕에 앞서 로마를 공격하자고 주장했다. 그러나 스파르타쿠스는 냉정하게 상황을 판단했다. 그는 최대한 로마의 정규군을 피하려고 노력했다. 애초에 급조된 반란군으로 정예화된 로마군과 전면전을 펼친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다. 그는 몇 번의 전투로 정규군을 이겼지만, 이기면 이길수록 더욱 강력한 상대를 보내서 응수하는 로마의 전력을 과소평가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결국 로마의 영향력이 미칠 수 없는 곳으로 피신하는 것만이 최선의 방법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그래서 알프스를 넘으려고 했었고, 여의치 않자 시칠리아에서 농성을 하려고 했었다. 반란이라는 것은 주동적인 뉘앙스를 풍기지만 스파르타쿠스의 반란은 수동적인 뉘앙스가 강했다. 그는 로마의 주도적인 군세를 피하려고 노력했다. 뿐만 아니라 알프스를 넘으려고 했지만 자신의 집단을 설득하지 못하자 주장을 고집하기보다 군중들의 의견을 따라서 남부로 가는데 동의했다. 그는 상황을 냉정하게 분석했지만 이를 자신의 집단에 전달하는데 실패했다. 그래서 그의 반란군에서는 의견을 달리한 이탈 등등이 빈번하게 일어났다. 

 이런 문제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반란은 매우 의미 있는 일이었다. 그의 사후 노예들은 스파르타쿠스를 자유의 상징으로 받아들이고 신봉했으며, 로마의 지식인층도 스파르타쿠스의 최후를 임페라토르(뛰어난 공적을 이룬 장군에게 주는 칭호)에 어울리는 최후라고 하며 칭찬했다. 흔히 우리는 공화정 로마를 매우 이상적으로 생각한다. 카토와 키케로 등등은 자유를 신봉하는 로마의 공화정 체제를 지키려고 노력했다. 그런 그들을 '자유의 수호자'처럼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역대의 로마 지성인들은 그렇게 평가했으니까. 그러나 스파르타쿠스의 입장에서 보자면 공화정 로마는 매우 부당한 국가다. 자국 로마인들에게는 자유의 국가일지 모르겠으나, 수많은 식민지의 사람들과 노예의 입장에서는 그저 악독한 수탈자에 불과할 뿐이니까 말이다. 어쩌면 그런 부당한 체제를 옹호하는 카토와 같은 인물을 스파르타쿠스는 가장 경멸했을지도 모른다. 결국 그들의 자유는 기득권의 자유만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역설적으로 진정한 '자유'를 상징하는 인물은 제국주의 기득권 체제에 반발한 노예 스파르타쿠스가 아닐까?

 비슷한 사례로 중국의 후한 시대에 황건적의 난을 꼽을 수 있다. 흔히 우리는 한나라를 되살리려고 노력했던 제갈량과 같은 인물들을 두고 위인이라고 칭송한다. 그리고 황건적의 난은 그저 하층민이 질서를 어지럽히기 위해 일어난 폭동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백성의 입장에서 보면 그토록 악랄하게 수탈한 한나라를 복원하려는 제갈량이야말로 역적이 아닐까? 황건난이 왜 일어났을까? 바로 하층민들에 대한 수탈이 극에 극을 달해서 일어났던 사건이었다. 황건난과 스파르타쿠스의 전쟁은 결국 봉건주의 시대에서 인간이 외칠 수 있는 최소한의 요구였던 셈이다. 수탈이 보편화된 고대의 하층민이라고 해서 눈감을 문제는 아닌 것 같다. 지나친 수탈과 억압이 아닌 적당한 수탈에 그쳤더라면 과연 그들이 난을 일으켰을까? 결국 이런 야만적 모순을 가졌던 로마 공화정은 카이사르로 인해 제정 국가로 발돋움한다. 지성인들과 로마 시민의 입장에서는 자유의 몰락이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대다수의 노예 그리고 식민지 사람들 입장에서는 체제 전복이 크게 와닿지 않았을 것이다. 

노비이자 패배자였던 스파르타쿠스였기에 현전하는 기록은 매우 미비하다. 그렇기에 책의 대부분은 저자의 유추에 의하여 구성됐다. 그렇기에 책의 내용을 전적으로 받아들이기는 조심스럽지만, 책 말미에 참고 자료를 살펴보면 저자가 미비한 기록의 인물을 복원하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지 확인할 수 있다. 책의 단점은 저자의 유추로 구성된 내용이지만, 역으로 장점 역시도 저자의 탁월한 추론이라고 생각한다. 사실 기록이 미비한 고대사 영역은 현전하는 미비한 기록을 바탕으로 많은 부분을 역사가의 주관적 유추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그런 의미에서 책의 단점이라 할 수 있는 부분은 고대사를 다루는 모든 저작에도 해당하는 공통적인 문제점이다. (우리나라 역사에서 논란이 많은 고조선 역시와 삼국시대 연구를 생각하면 될 듯싶다.) 아무튼 나는 저자의 의견을 흥미롭게 읽었으며, 분석과 유추 역시도 타당한 면이 많다고 생각했다. 그렇기에 저자의 다른 고대 전쟁 저작인 《살라미스 해전》과 《트로이 전쟁》도 읽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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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루타르코스 영웅전 7 플루타르코스 영웅전 7
플루타르코스 지음, 이다희 옮김, 이윤기 기획 / 휴먼앤북스(Human&Books)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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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행본 중 가장 두툼한 7권은 두툼한 만큼이나 가장 뛰어난 영웅들을 다루고 있다. 역사에 대해 관심이 없더라도 누구나 알고 있는 영웅 중의 영웅인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드로스 대왕과 로마의 카이사르가 책의 메인을 담당하고 있으며 그리스의 가장 유명한 명연설가 데모스테네스와 로마의 대표적인 철학자이자 웅변가인 키케로도 나온다. 뛰어난 능력을 가졌지만 당시의 정치적 상황으로 인해 조국과 맞설 수밖에 없었던 비운의 영웅인 세르토리우스와 에우메네스의 이야기도 흥미진진하다. 여섯 인물을 읽으며 들었던 생각은 과연 인간의 인생에 있어 '성공의 조건은 무엇인가'라는 의문이다.

 여섯 인물 중 흔히 속세에서 성공했다고 인정하는 인물은 알렉산드로스와 카이사르 밖에 없다. 카이사르의 경우 암살로 죽었으므로, 저자인 플루타르코스의 말대로 성공을 장악했지만 누려보지 못했기에 과연 그것이 성공한 것인가라는 의문이 있을 수 있겠지만, 그래도 어쨌든 성공을 장악했다는 점에서, 그는 성공한 인생으로 분류해야 할 듯싶다. 데모스테네스와 키케로는 뛰어난 연설 능력이 있었지만, 결국 자신들의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자결과 암살로 죽음을 맞이한다. 세르토리우스와 에우메네스도 군공을 세우고 자신들의 영지에서 실력을 과시했지만, 그리워하던 조국의 군대와 싸움을 계속했으며, 본국으로 돌아가지도 못 했다. 결국 그들은 부하들의 배신으로 목숨을 잃었다. 그래서 알렉산드로스와 카이사르는 살아있는 도중 가장 완벽한 성공을 거뒀지만, 나머지 인물들은 반쪽짜리 성공으로 만족할 수밖에 없었다. 그럼 알렉산드로스와 카이사르가 성공할 수 있었던 조건은 무엇일까?

  먼저 능력의 측면에서 생각해보자. 여섯 인물은 능력으로 보면 가장 탁월한 인물들이다. 알렉산드로스 대왕과 카이사르의 위대함은 굳이 거론하지 않아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다 알고 있으며, 데모스테네스와 키케로도 칼이 아닌 뛰어난 화술에 의지하여 당대의 가장 거대한 적을 상대해왔다. 잘 알려지지 않은 세르토리우스와 에우메네스도 매우 뛰어난 인물이다. 세르토리우스는 당대의 명장인 폼페이우스조차 버거워하던 사람이었고, 에우메네스 역시 알렉산드로스 대왕과 함께 종군했던 장군들과 맞서 호각을 이뤘다. 이렇듯 여섯 인물의 능력은 누가 봐도 출중하다. 여섯 인물이 두루 능력을 갖추고 있었으므로, 성공의 성사를 능력에서 찾기는 어려워 보인다. 물론 여섯 인물이 모두 능력을 갖추고 있으니, 성공의 조건에는 탁월한 능력이 뒷받침되어야 한다는 사실도 간과해서는 안된다.

  두 번째로 내면적인 부분을 살펴보자. 여섯 인물은 모두 품성이 뛰어난 인물들이었다. 알렉산드로스는 의지력이 뛰어났고, 성욕과 식욕, 그리고 쾌락을 멀리했으며, 온갖 생리적인 욕망으로부터 인내하는데 뛰어난 능력을 발휘했다. 그는 재물에 욕심이 없었으며, 자신의 야망과 희망만을 먹고살았던 이상주의자였다. 카이사르 역시 마찬가지다. 그는 지휘를 할 때 스스로 앞장섰으며, 모든 생활에서 절제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그는 군중들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으며, 그런 모습을 재현하는데 있어 누구보다 모범적으로 행동했다. 게다가 카이사르는 알렉산드로스와 마찬가지로 개인적인 재물에 연연하기보다, 재물을 아낌없이 투자하여 부하들과 시민들의 관심을 사는데 적극적이었다. 데모스테네스는 명연설가가 되기 위해 피나는 노력을 가했다. 올바른 교육도 받지 못하고 건강하지도 않은 그였지만, 몸을 아끼지 않고 노력한 덕분에 명연설가로 거듭났다. 키케로는 연설에 탁월한 재능이 있었지만, 그 재능을 더 갈고닦았으며, 건강하지 않은 신체를 단련하기 위해 주기적으로 노력했다고 한다. 세르토리우스 역시 본능적인 욕구를 채우지 않고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스스로를 불평하지 않으며 부하들을 독려했다고 한다. 사실 이 편에서 가장 품성이 좋은 인물을 꼽자면 세르토리우스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는 돈에 관해서도, 여자에 관해서도, 인품에 관해서도 최고의 모습을 보여준 장군이었다. 에우메데스도 세르토리우스와 비슷하게 인품과 돈에 있어서 초연한 성격이었다. 이런 내면적인 모습들을 종합해보자면 결국 생리적인 욕망에 절제할 수 있으며, 자신의 결점을 극복하고자 끊임없이 노력하는 품성으로 요약된다. 여섯 인물은 이런 품성을 공통적으로 갖추고 있었다.

  결국 결론적으로 보자면 여섯 인물은 능력과 품성을 모두 갖춘 인물이다. 그럼 성공한 알렉산드로스와 카이사르와 나머지 네 사람의 차이는 무엇일까? 나는 이 근본적인 이유가 바로 '정치적인 시각의 유무'라고 생각한다. 알렉산드로스와 카이사르는 전쟁을 할 때에나 정치를 할 때 나아가야 할 때와 물러서야 할 때를 기가 막히게 알았다. 그랬기에 불리한 상황 속에서도 무엇을 해야 할지, 어떤 일을 우선순위로 하여야 할지, 어떻게 난국을 돌파해야 할지를 명확하게 알고 있었다. 나아가 처벌해야 할 적이 누구인지, 싸움을 끝내고 나면 누구와 동맹을 맺고 누구를 숙청해야 할지에 대해서도 정확하게 파악했다. 카이사르가 말년에 암살을 당한 이유도 결국, 평생을 유지하던 맹수와도 같은 정치 감각을 느슨하게 하였기에 죽었다고 볼 수 있다. 그가 만약 젊은 시절처럼 긴장을 풀지 않았더라면 브루투스의 반역 정도는 쉽게 예상했을 것이다. 데모스테네스와 키케로는 뛰어난 정치적 안목이 있었지만 그 정치적 안목을 실현하는데 주저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으며, 문인 특유의 미적지근한 모습으로 기회를 놓치는 모습도 보여줬다. 심지어 키케로는 카이사르를 확실하게 죽일 수 있는 기회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대중들의 눈치를 살피느라 미적지근하였고 살려줬다. 세르토리우스와 에우메네스도 탁월한 능력에 비해 정치적인 시각은 떨어지는 느낌이다. 애초에 두 사람이 정치적인 시각이 뛰어났다면 어쩌면 나라를 떠나 망명을 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전쟁에 이기기 위해서는 나무와 숲을 두루 보는 것이 중요하다. 각개 전투에서도 승리를 해야겠지만 최종적으로 전쟁을 종식하기 위해서는 각개 전투보다 전쟁의 핵심을 가르는 곳에서 승리를 거둬야 한다. 쓸데없는 곳에서 승리하더라도 핵심 전투를 놓치게 되면 결국 많이 이겨놓고도 전쟁에 질 수 있다. 초한전쟁에서도 볼 수 있듯, 항우는 매번 전투에서 승리를 거뒀지만 유방의 결정적인 전략 전술에 말려들어 천하를 놓쳤다. 두 발 전진하기 위해 한 발 후퇴할 수도 있는 것이 전쟁이고 인생이다.

  성공도 마찬가지다. 개별적 능력과 인품이라는 나무도 중요하지만 결국 그 능력과 인품을 똑바로 활용할 수 있는 숲과 같은 지혜가 필요하다. 나는 이런 지혜가 바로 '정치적 시각 - 인간에 대한 이해'라고 생각한다. 결국 성공이라는 것은 나 홀로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탄생한다. 그렇기에 성공하기 위해서는 개별적 능력과 인품도 중요하지만 어쩌면 높은 자리에 오르면 오를수록 인간의 관계에 대한 깊은 이해가 더욱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이런 인간에 대한 통찰과 이해는 쉽게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숱한 경험과 뛰어난 인물들의 행적과 역사를 통해서 빚어지는 것이다. 나는 역사를 읽는 가장 근본적인 이유가 바로 인간과 집단, 그리고 권력관계에 대한 통찰력'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기에 높은 성공을 하고 싶은 사람들은 더더욱 겸손한 마음으로 역사의 사례에 귀를 기울이고 집중해야 하며 많은 사람들을 만나보고 경험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사실 7권의 핵심은 알렉산드로스와 카이사르지만, 나는 개인적으로 세르토리우스가 가장 인상적이었다. 그는 능력도 있고, 인품도 있는 매력 있는 인물이다. 또한 조국 로마를 어쩔 수 없이 등졌지만, 로마에 대한 충정을 버리지 않았다. 그의 이런 모습은 아테네의 악동인 알키비아데스를 연상한다. 능력이 탁월한 알키비아데스는 아테네로부터 추방을 당하지만 끊임없이 조국에 인정을 받고자 노력했다. 그러나 알키비아데스와 세르토리우스의 차이점이라면 알키비아데스는 조국이 자신을 비판하면 참지 못하고 다른 나라로 배신에 배신을 거듭한 지조 없는 인물이다. 그러나 세르토리우스는 로마의 정규군과 싸우면서도 로마를 걱정했으며 로마에 충성을 다하고자 했다. 비록 정치적으로 대세 군벌들 편이 아니라 배척받는 처지라서 조국과 대치하였지만, 그의 꿈은 그토록 그리던 조국에서 평범한 시민의 삶을 사는 것이었다. 이런 소박한 마음과 탁월한 능력을 가진 장군을 적으로 간주한 것은 로마의 패권주의 군벌 세력들이었다. 당시 로마는 공화정이 흔들리고 세력을 가진 군벌들이 독재를 통해 정치를 농단하고 있었다. 세르토리우스는 결국 이런 군벌 세력의 피해자였고, 살기 위해 칼을 들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의 비참한 운명, 암살당하는 그의 최후가 매우 안타까웠다. 다른 영웅들처럼 야심이 있는 사람도 아니라 소박한 인물이었기에 더더욱 안타까웠다. 그가 평화로운 시기에 태어났더라면 어쩌면 정말 위대한 장군으로 남았을지도 모르겠다. 세르토리우스의 전기에서 확인할 수 있듯 결국 인간의 성공을 결정짓는 요소에는 '운'이라는 부분도 간과할 수 없는 것 같다.

사람들은 막연하게 성공을 꿈꾸지만, 이토록 획득하기 어려운 것 또한 성공이다. 게다가 성공을 얻는 것도 힘들지만 유지하는 것 역시도 매우 커다란 노력이 필요하다. 카이사르는 성공을 얻었지만 성공을 유지하지 못하였고, 알렉산드로스 대왕 역시 성공을 하였지만 성공 이후 과도한 음주로 인해 자신의 명을 단축시켰다. 이렇듯 그들의 커다란 성공은 그들의 명을 단축시켰으니, 커다란 성공일수록 이를 유지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를 새삼 느낄 수 있다. 옛말에도 이런 말이 있지 않은가?

'부자는 삼대를 넘기지 못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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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추좌전 - 상 - 전면개정판 춘추좌전
좌구명 지음, 신동준 옮김 / 인간사랑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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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추좌전》은 공자가 편찬한 노나라 역사서인 《춘추》에 좌구명이 주석을 가한 책을 말한다. 과거에 나는 한길사에서 신동준 역자가 3권으로 번역한 《춘추좌전》으로 《춘추》를 처음 접했다. 그 뒤 시간이 흘러 그 책의 개정판이 출시됐다는 소리를 들었는데 이번에는 상, 하 두 권으로 번역됐다. 이 리뷰는 개정본 《춘추좌전》 상권에 대한 리뷰다.

역사에 조금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중국의 춘추전국 시대는 세계사에서 유래를 찾을 수 없는 난세의 시대였다는 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일본의 전국시대, 그리스 폴리스 국가들의 경쟁 체제도 난세 중의 난세라고 할 수 있지만, 중국의 춘추전국 시대에 비하면 포스가 부족하다고 할 수 있다. 이 시기 중국의 난세는 무려 500년이나 가까이 지속됐고, 이런 난세의 시기는 세계사에서 흔하지 않은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오늘날 21세기는 외면적으로는 치세의 시기를 보내는 것 같지만, 뚜껑을 열어보면 무조건적으로 평화로운 치세의 시기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오히려 자본주의 체제의 무한 경쟁으로 인해 약육강식의 법칙이 강조됐고, 그렇기에 겉으로는 평화로운 치세의 시기더라도 실상은 난세의 시대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춘추좌전》은 이런 난세 중의 난세의 시기를 다룬 역사서다. 물론 고대의 난세와 오늘날의 난세는 시대적인 이질감이 있겠지만, 한편으로는 난세라는 공통점을 공유하기에 춘추전국 시대의 역사적인 사례를 배우는 것도 오늘날의 난세를 살아가는데 있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춘추좌전》은 춘추시대의 제후국 중 하나인 노나라의 역사를 기준으로 전개한다. 다른 나라들도 많지만 왜 하필 노나라인 것일까? 이는 유교적 이데올로기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공자는 말년에 이르러 《춘추》라는 역사서를 편집했다고 한다. 《맹자》에 이르길 공자는 자신을 알아주는 것도 《춘추》일 것이요, 자신을 비난하는 것도 《춘추》로 비롯할 것이다고 이야기했다. 노나라는 그런 공자의 조국이었고, 공자는 자신의 조국의 역사를 간략하게 정리했는데 이것이 바로 《춘추》라고 알려져 있다.공자는 왜 노나라 역사를 정리한 것일까? 단순한 애국심에서 저술한 것은 아니었다. 공자가 자국의 역사를 편찬한 이유는 바로 노나라의 역사적인 배경에 있었다. 노나라는 주나라의 명재상인 주공이 봉지로 받은 나라였다. 주공은 유학에서 가장 이상적인 신하의 롤모델이었다. 그는 왕좌를 찬탈할 수 있는 권력이 있었지만, 욕심을 부리지 않고, 황위를 이을 어린 조카를 위해 충성을 다했다. 그런 주공이 건국한 나라였고, 또 그런 배경이 있었기에 주나라 황실의 문화가 가장 많이 남아있는 국가였다. 따지고 보면 공자의 유학 역시 이러한 전통으로부터 정립된 철학이므로, 공자가 노나라의 역사에 집중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런 찬란한 문화적 배경을 가진 노나라지만, 노나라는 중원의 패권과는 거리가 있는 국가였다. 《춘추좌전 상》은 노은공에서부터 노양공의 치세 중반까지를 다루는데, 읽은 입장에서 솔직히 말하자면 노나라의 역사는 힘없는 나라의 기록이었고 오히려, 다른 국가들의 팽창이 더욱 돋보였다. 이 시기에 주목할 만한 나라는 관중과 환공의 제나라, 그리고 떠돌아다니며 인생의 역전을 노렸던 진문공의 이야기, 남쪽의 강국 초나라의 부상 등등이다. 이들은 차례대로 춘추시대의 패자를 선포한 군주국이다. 시대가 흐르면 흐를수록 주나라 중앙 황실은 지방의 제후국을 제어할 수 없는 그저 명목상의 천자로 전락했고, 힘 있는 국가들은 힘을 바탕으로 하여, 자신의 국가를 중심으로 국제질서를 규정했다. 제환공, 진문공, 초장왕은 차례대로 패자에 오르며, 자신의 실력을 과시했다. 시대가 흐르면 흐를수록 힘을 숭상하는 분위기는 고조됐고, 국제질서뿐만 아니라 나라 안의 군신관계도 힘에 의해 결정 났다. 힘없는 주군을 시해하고 반란을 일으키는 것은 이 시대에 매우 일상적인 모습이었다. 노나라 역시 이런 참화로부터 벗어날 순 없었다.

즉 춘추시대는 이전 시대에 있었던 도덕과 덕이 떨어진 시대였고, 오늘날로 표현하자면 소위 막장의 시대였다. 대륙은 욕망의 전란으로 들끓었고, 평화보다 전쟁이 더 일상화된 시기였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다양한 철학이 발전했고, 마찬가지로 이러한 시대적인 혼란을 바로잡기 위해 역사학이 발전했다. 《춘추좌전》 역시도 혼탁한 시대를 바로잡으려는 지식인들의 노력하게 만들어진 고전이었다. 《춘추좌전》의 백미는 역사적인 기술도 기술이지만, 그것을 넘어 역사라는 사실을 어떻게 해석하고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가에 대한 관점에 있다.

사학자 랑케는 역사는 객관적인 사실만을 추구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반면 E.H. 카는 객관적 역사를 토대로 한 주관적인 역사를 강조했다. 이를 《춘추좌전》에 대입하여 설명해보자. 공자가 편찬한 《춘추》의 본문은 소략하기 그지없다. 짤막한 단문으로 역사적 사실만을 짧게 이야기하고 있다. 그래서 공자의 《춘추》는 랑케의 객관적인 사실로서의 역사기록으로 볼 수 있다. 반면 《춘추좌전》은 이런 공자의 짤막한 기록에 풍부하고 자세한 해설을 첨가했다. 재미있는 점은 짤막한 본문을 자세하게 부연하여 설명하는 것을 넘어서 역사가의 주관적인 생각을 적극적으로 표현한 부분이다. 《춘추좌전》의 묘미는 바로 이 사관의 주관적인 생각이라고 생각한다. '이 사건은 이렇게 생각해서 잘못됐다. 이 사건은 이렇기 때문이 바른 일이다.' 그렇기에 《춘추좌전》은 E.H. 카의 의미론적인, 주관적인 역사관과 궤를 함께하고 있다.

《춘추좌전》의 저자는 왜 이렇게 시대적인 사건에 대해 적극적으로 평가를 내리고 있는 걸까? 바로 시대의 기준을 바로 세우기 위해서였다. 모든 것이 막장으로 치닫는 난세, 그저 힘이 최강인 시대가 과연 옳은 시대일까? 땅에 떨어진 인간의 윤리와 도덕은 어떻게 바로 세워야 하는가? 야만의 시대에서 사라진 과거의 문명적 관습은 어떻게 복원해야 하는가? 그런 치열한 관념 아래에서 《춘추좌전》은 탄생했다. 평가의 백미는 '군자'라고 칭하는 인물이 사건을 평가하는 부분이다. 여기서 군자는 저자를 뜻하며, 시대의 기준을 바로 세우려고 노력하는 당대의 지성인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런 《춘추좌전》의 필법은 '춘추필법'이라는 이름으로 후대 역사가들에게 역사 서술의 표준으로 각인됐다. 이러한 춘추필법의 영향으로, 후대의 역사가들은 무미건조한 사실만을 기록하지 않으며, 이러한 사실을 적극적으로 해석하여서 자신의 의견을 사건이나 인물 말미에 정리하였다. 이런 사관의 주관적 논평이 뛰어나면 그 역사서는 높은 명성을 받았으며, 논평이 편협하고 타당하지 않으면 역사서의 평가 역시도 덩달아 낮았다.

물론 《춘추좌전》의 해석이 타당한 해석만 있는 것은 아니다. 《춘추좌전》은 유학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으므로 역사를 평가하는 기준은 바로 유교적인 마인드에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렇기에 어떤 사건을 평가함에 있어서는 명분론에 입각한 모습도 보이고, 너무 형식적인 해석도 볼 수 있었다. 자리를 바로 세우고, 권위를 회복하고, 질서를 바로잡는 부분은 봉건 국가에서는 중요하겠지만 오늘날의 관점으로 볼 때에는 이런 것들을 너무 극단적으로 강조하는 것 역시 문제가 있으니까 말이다. 아무튼 소소한 한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춘추좌전》은 매우 뛰어난 책이다. 동양 사서 집필의 표준을 제시했다는 점. 그리고 몰락하는 시대의 기준을 바로 세우려고 했다는 점, 그리고 숱한 역사적 사례로부터 얻을 수 있는 처세와 치국의 팁 등 배울 점이 무궁한 고전이다. 살아남은 책에는 이유가 있는 법이다. 다만 방대한 분량과, 생소한 문체와 배경 등등이 다가가는데 부담으로 작용하겠지만, 그런 것들을 감안하고서라도 읽을 가치는 충분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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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파이크777 2021-07-11 01: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참으로 훌륭한 서평이십니다.
 
플루타르코스 영웅전 6 플루타르코스 영웅전 6
플루타르코스 지음, 이다희 옮김, 이윤기 기획 / 휴먼앤북스(Human&Books)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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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사를 관통하는 큰 주제는 바로 이상과 현실이며, 또 하나는 역량과 운명이다. 마키아벨리는 자신의 정치적 저서 《군주론》과 《로마사 논고》에서 역량과 운명을 각각 비르투와 포르투나라는 개념을 도입하여 설명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영웅전 6권 역시 인물들을 통해 이상과 현실, 그리고 운명을 고찰하고 있다.(대놓고 무시하려는 의도로 저술한 아르타크세르크세스의 전기를 제외한다면) 디온과 브루투스 그리고 티몰레온과 아이밀리우스는 각각 자질과 역량을 갖췄으며, 자신의 이상이 확실했고, 그 이상을 현실화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디온과 브루투스는 실패했고, 티몰레온과 아이밀리우스는 자신이 이루려는 것들을 성취한다.

물론 디온과 브루투스는 티몰레온과 아이밀리우스가 가졌던 좋은 운이 없었다. 그럼 결과적으로 좋은 운명이 인간의 성공을 가르는 주요한 요소인 것일까? 결과적으로 말하면 그럴 수도 있겠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디온과 브루투스는 소위 말하는 좋은 운빨이 없었고, 그랬기에 능력을 갖추고도 실패했지만, 열전을 읽다 보면 실패의 원인이 결국 운 때문만은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다. 디온은 너무 강직했고, 비타협적이며, 자신의 이상주의에 부합하지 않는 인물들을 모자란 인물이라고 생각했다. 또한 그는 민주정이라는 열망을 가졌지만, 권력을 잡고 휘두를 때 그의 모습은 민주적이기보단 독단적인 참주의 모습과 닮았다. 그러나 플루타르코스는 플라톤의 수제자라고 할 수 있는 디온을 최대한 좋게 평가하려고 노력했다. 이러한 저자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디온의 결점은 숨겨지기보단 부각됐다. 카이사르를 암살한 브루투스도 운 때문에 실패한 것일까? 물론 그런 점도 있다. 옥타비우스와 안토니우스의 연합군과 싸울 때, 브루투스의 지지 세력이 바다에서 승리했다는 전갈을 일찍 받았다면, 그는 마지막 교전에서 좀 더 여유롭게 전쟁을 수행했을 것이다. 당시 옥타비우스와 안토니우스는 물자가 매우 부족했으니까, 그러나 브루투스의 고질적인 문제는 바로 현실을 바라보는 이상주의다. 그는 플라톤의 철학에 너무 심취했고 그랬기에 정치적인 현안을 현실적으로 결정해야 할 때 미적지근한 모습을 보였다. 카이사르를 죽이고 주저 없이 안토니우스를 바로 공격했더라면 애초에 로마 밖으로 방랑하지 않아도 됐을 것이며, 어쩌면 로마는 그가 원하던 공화정으로 돌아갔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현실적인 판단을 하지 못했고, 현실적인 정치 현안을 마냥 이상적으로만 생각했다. 그 결과 브루투스는 패배하였고, 카이사르의 대표적인 암살자로 역사에 기록됐다. 

이상을 현실화하는 것은 만인의 꿈일 것이다. 그런 꿈을 실현하는 데에는 운명과 역량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사람들은 대부분 역량을 키우기보단 운명을 앞세운다. 그렇기에 큰일을 두고 점을 본다거나, 결혼을 앞두고 사주를 보거나 한다. 로마나 그리스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전쟁을 앞두고 신전에 재물을 바치고 제를 올렸다. 동양에서도 마찬가지다. 조상님들에게 제사를 올리며 후손들의 안녕을 기원했다. 인간은 불안하고 흔들릴 때마다 종교에 의지하며 어려움을 이겨냈다. 이 모든 것이 운명 앞에 부평초같이 흔들리는 인간이기에 행하는 행동들이다. 그러나 이런 행동들도 좋지만 더 중요한 것은 바로 역량을 갖추는 것이다. 디온과 브루투스 그리고 티몰레온과 아이밀리우스의 공통점은 모두 출중한 역량을 갖췄다는 점이다. 즉 성공에 대한 역량을 어느 정도 갖춘 뒤에 운명에 자신을 호소하라는 것이 플루타르코스의 핵심이다. 아이밀리우스 편을 읽다 보면 이런 대목이 나온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람에게 신은 아무런 도움을 주지 않는다.'
'성공을 자만하지 말라. 가변적인 운명의 철퇴를 언제 맞을지 모른다. 생 앞에서 늘 겸손하라.'

나는 인간이란 존재가 불안전하기에 미래에 대한 불안함으로 운명을 신봉하는 것에 딴죽을 걸고 싶지 않다. 다만 플루타르코스가 주장하듯, 역량을 어느 정도 갖추고 나서 운명에 스스로를 맡겼으면 좋겠다. 흔히 말하는 동양 속담에 이런 구절이 있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

여기에 아이밀리우스의 명언을 붙여보자.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람에게 하늘은 아무런 도움을 주지 않는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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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사 김정희 - 산은 높고 바다는 깊네
유홍준 지음 / 창비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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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의 문화를 상징하는 정서는 '한'을 대표적으로 꼽는다. 한의 정서란 슬픔과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한의 정서는 슬픔 그 자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슬픔을 극복하거나 이겨내기 위해 슬픔이란 감정을 또 다른 무언가로 승화하는 과정을 의미한다. 우리 민족은 숱한 어려움과 외침 속에서도 고난과 역경을 이겨내기 위해 노력했으며, 이러한 역사적 배경으로 한의 정서가 발달했다. 민족의 노래라고 불리는 아리랑은 이러한 '한의 정서'를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작품이며, 한국을 대표하는 문화 위인인 추사 김정희의 삶과 작품도 마찬가지다. 추사의 삶과 예술 속에는 한민족의 DNA라고 할 수 있는 '한의 정서'가 고스란히 녹아 있다.

추사의 초년기와 중년기 시절은 매우 행복한 시기였다. 추사의 본관 경주 김 씨 가문은 당시 순조 시대에 수렴청정을 했던 정순왕후의 집안이다. 정순왕후는 정조 사후 수렴청정 당시 정치적인 영향력을 강하게 행사한 여군이었다. 그렇기에 추사 부자도 정순왕후의 혜택을 받아 순탄한 공직 생활을 이어나갔다. 과거를 공부하며 청나라 문인들과 교류하는 추사의 초년기는 문인 특유의 낭만이 가득한 시기였다. 문화적으로 앞선 청나라의 학자들과 교류를 통해 추사는 경학과 금석학 고증학을 집중적으로 공부했다. 그 뒤 대과 급제 이후 벼슬길도 탄탄대로였다. 그러나 정순왕후가 죽고, 정치판의 지각 변동이 일어나자 결국 추사 부자는 실각했고 기나긴 귀양의 시간을 보내야만 했다.

조선, 사대부의 자손에게 벼슬길이란 살아가는 이유이자 전부라고 해도 무방하다. 그런 정치적 실권을 한순간에 잃었으니 추사의 아픔은 오죽했을까? 당시 정치판은 세도정치가 극에 달했고, 보복적인 정쟁이 일상화된 시대였다. 추사는 결국 제주도로 귀양을 갔고, 그곳에서 예술에 몰두했다. 그는 자신의 정치적 실각에 굴하지 않고, 응어리진 한을 예술적 활동으로 승화하였다. 그 역시 사대부 출신이니 입신과 권력에 대한 욕심이 왜 없었겠는가? 그러나 말년의 추사는 모든 욕심을 버리고 예술 활동에 매진했다. 그는 기존의 사대부들이 보편적으로 가지고 있었던 정치적인 삶을 과감하게 포기했고, 예술적 삶을 추구하면서 조선의 예술을 한 단계 드높이는데 일조했다. 

 그의 성격은 깐깐했던 것으로 보인다. 초년기와 중년기에는 선진 청나라의 해외 견학 때문인지 국내의 작품과 작가들을 평하는데 있어 극도로 냉정했다. 이런 깐깐함 덕분에 추사는 적을 많이 만들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뛰어난 사람들에게는 허심탄회하게 인정하는 모습도 보여줬다. 정치적인 실각 이후에는 그의 모난 성격은 세월의 풍파 앞에서 점점 둥글어졌다. 한 가지 의미심장한 것은 추사는 타인에게도 엄격했지만 자기 자신에게도 냉정하고 엄격했다. 그렇기에 타인들이 자신의 작품을 칭송할 때 그는 자신의 작품을 무조건적으로 칭찬하지 않았다. 저자가 말하듯 추사의 성격은 완벽주의자들의 성격과 닮아 있었다. 그랬기에 추사의 작품은 시대가 흐를수록 다른 양식과 다른 모습으로 구현됐다.

사실 나는 예술에 관해서는 소양이 짧은 편이라서, 저자인 유홍준 교수가 설명하는 작품 설명을 모두 완벽하게 이해하진 못 했다. 책을 통해 잘 인쇄된 추사의 작품들을 보면서 저자의 시각으로 최대한 쉽게 설명해준 밥을 그저 떠먹기만 한 셈이다. 그래서 추사의 작품에 대해서 뭐라 전문적으로 글을 쓰진 못하겠지만 한 가지는 알 것 같다. 추사의 작품은 앞서 말한 대로 고정적이기보다 늘 변화를 추구했다는 점이다. 청나라 고증학 학자들에게서 배운 '입고출신 - 옛것을 본받고 새롭게 하라 - 정신'에 충실했다. 그래서 추사의 글씨와 그림 작품들은 시기에 따라 전혀 다른 모습으로 다가왔다. 틀을 존중하되 틀에 얽매이지 않는 천재성을 그는 작품 활동에서 유감없이 발휘했다. 그랬기에 그의 정치적 삶은 비루하고 우울했지만, 그의 예술적 삶은 낭만이 가득했고, 서정적인 느낌이 물씬 들었다. 아마 유홍준 교수도 이런 추사의 해학적, 낙천적, 풍류적인 모습을 인생에 귀감으로 삼았기에 추사를 공부하고 그의 평전을 작성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예술에서 보여준 추사의 천재성은 보통의 범인들이 본받기에는 너무나도 힘든 자질이다. 그렇기에 나와 같은 평범한 보통의 사람들이 추사의 삶에서 배울 수 있는 부분은 예술적인 천재성이 아닌 삶을 대하는 태도가 아닐까 생각한다. 정치적 실각 이후에 추사는 다른 양반들처럼 인생을 낭비하는 삶을 살지 않았으며, 자신의 예술에 모든 것을 불태웠다. 추사의 천재성은 재능도 재능이지만, 피나는 노력의 공도 빠트릴 수 없다. 흔히 사람들은 타인에게는 엄격하고 나 자신에게는 관대하다. 그러나 추사는 타인에게도 깐깐했지만, 자기 자신에게는 더더욱 깐깐했다. 이런 깐깐함은 스스로 예술을 대하는데 있어 피나는 노력으로 이어졌고 그랬기에 그는 조선 후기의 예술을 한 단계 더 드높일 수 있었다. 이런 추사의 모습은 오늘날 현대인에게도 뜻깊은 귀감으로 다가올 것이다.

 흔히 사람들은 조선 후기 정치의 구조적인 모순 때문에 추사와 다산과 같은 인재들이 쓰이지 못한 것이 아쉽다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한편으로 생각해보면, 추사와 다산이 정치에서 활동했다면 과연 그들이 오늘날에 이룬 것처럼 각각 예술과 학문에 있어서 두각을 나타냈을까? 역사에 있어서 가정은 덧없는 것이지만, 나는 추사와 다산과 같은 인물들이 오히려 정치판에서 소외됐기에 예술과 학문에서 빛을 발휘했다고 생각한다. 그들이 정치에 있었다 한들, 조선의 구조적인 정치판은 그들만의 노력만으로 개혁하기가 힘들지 않았을까. 이미 조선 후기 정치의 구조적인 모순은 한두 사람이 노력한다고 해서 극복할 수 있는 지경이 아니기 때문이다. 뛰어난 명군인 정조 역시도 조선의 구조적인 개혁을 이루지 못했으니까 말이다. 하물며 추사는 성격 자체가 너무나도 강직하고 타협을 모르는 완벽주의자이기에 정치와는 더더욱 거리가 있는 인물이다. 그러니 추사가 실각한 것은 어쩌면 그의 인생에 있어서도, 조선의 예술에 있어서도 오히려 다행인지도 모르겠다.

 적지 않은 평전을 읽은 경험을 바탕으로 책의 품평을 내리자면 이 평전은 참 잘 만든 것 같다. 우선 추사의 작품 도판을 깔끔하게 수록하여서 추사의 다양한 작품을 한 번에 감상할 수 있다는 점이야말로 책의 최대 장점이다. 또한 유홍준 교수의 편안한 글 솜씨 역시도 평전의 품격을 높이는데 일조하는 것 같다. 유시민 작가는 글을 쓰는데 가장 중요한 것이 단순함, 명확함, 평이함에 있다고 하였다. 유홍준 교수의 글은 평이하고 친근하며 핵심이 잘 드러난다. 그러나 그런 평이함과 친근함을 넘어 그의 글에서는 현학적이며 기교로운 문체 역시도 중간중간에 보이는데, 중요한 것은 이런 기교가 전혀 눈에 거슬리지 않는다는 점이다. 유시민이 말하는 단순성을 가짐과 동시에 자신만의 현학적인 기교가 돋보인다. 대중성과 개성을 두루 갖춘 글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런 강약 조절이 매우 성공적이기에 그의 글은 편안하면서도 나름의 품격을 잃지 않는다. 그렇기에 대중은 그의 글을 좋아한다.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역시도 이러한 이유로 밀리언 셀러가 되지 않았겠는가 생각해본다. 정리해보자면 이 책은 편집도 수준 이상이며, 저자의 필력도 어느 정도 보장하는 책이다. 또한 책의 표지도 내 취향이라 참 마음에 든다.

사실 나는 유홍준 저작을 웬만하면 다 구매한다.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역시 전질을 구매했고, 문화를 설명하는 그의 책은 거의 소장하고 있다. 《추사 김정희》의 전작이라 할 수 있는 《완당 평전》 역시도 소장하고 있다. 두 책을 비교해보건대, 확실히 《추사 김정희》가 더 대중적이다. 게다가 컬러 도판과 편집도 《추사 김정희》쪽이 훨씬 보기가 좋은 것 같다. 또한 전작인 《완당 평전》에는 몇몇 군데에 오류가 있다고 했는데, 최신판에서는 그런 부분들을 수용하고 참고하여 저술했다고 하니 완성도에도 심혈을 기울인 것 같다. 조선의 인물을 다루는 평전은 대부분 정치적 인물에 치중됐는데 전혀 다른 관점의 예술적 인물을 만나고 싶다면 이 책을 추천하고 싶다. 나 역시 최근 정치적인 인물들의 평전만 읽었는데, 예술적인 추사의 삶을 읽으며 제대로 힐링한 것 같다. 권력의 정점에서 휘두르는 삶도 멋져 보이지만, 교양 있는 명사들과 기품있게 소통하는 삶 역시 누구나 한 번쯤은 꿈꾸는 아름다운 삶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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