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권으로 읽는 지젝
켈시 우드 지음, 박현정 옮김 / 인간사랑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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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슬라보예 지젝을 알게 된 계기는 철학에 있어 변증법에 관심을 가지면서부터였다. 근현대 철학을 배우면서 변증법은 피할 수 없는 사고의 틀이었고, 이런 변증법을 비판적으로 계승한 대표적인 사람이 바로 슬라보예 지젝이기 때문이다. 지젝에 관심을 가지며 그의 글을 검색하여서 읽었는데, 내가 읽었던 글은 영화에 대한 글이었다. 그 글에서 느껴지는 박식한 세계관이 굉장히 매력적이었다. 이후 지젝을 다시 만나게 된 것은 경제학 저서를 뒤지면서였다. 마르크스의 공산주의 이론을 공부하고, 공산주의 사상이 현대에는 어떻게 계승됐고 발전됐는지를 알아보는 과정에서 나는 과거에 만났던 지젝을 다시 마주하게 됐다. 두 번의 만남을 통하여, 나는 지젝의 철학에 궁금증이 생겼지만, 물리적 시간의 한계와 나의 게으름을 핑계로 만남은 쉽게 이뤄지지 않았다. 그러다 최근, 이렇게 개론서를 통하여 지젝의 관념을 처음이자 본격적으로 접하게 됐다. 

한 철학자의 사상을 받아들이고 비판적으로 수용하는 방법에는 크게 두 가지가 있다. 첫 번째로 그 사상가의 철학을 정리하여 쉽게 풀어쓴 개론서로 만나는 방법이다. 이 방법은 공부하려는 철학자의 사상에 익숙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매우 유용한 방법이다. 또 한가지 방법은 바로 개론서 없이 원전 번역된 글을 직접 접하는 것이다. 이 방법은 매우 거칠고 힘들지만, 타자의 도움 없이 나만의 주관적인 관념으로 철학자를 접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두 방법 모두 좋은 방법이지만, 결국 마지막에 가서는 그 철학자의 저서를 나만의 관념으로 독해하여 비판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으로 끝나기 마련이다. 이 책은 지젝의 대표 저서를 차례대로 잘 정리한 개론서라고 할 수 있다. 다만 기존의 개론서가 가지는 성격과는 조금 다른데, 지젝의 사상을 그대로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저자 나름대로의 주관을 개입하여서 해설을 시도하고 있었다.

책은 솔직히 어려웠다. 아무리 재미있고 유머러스한 인물의 철학이라 하더라도, 철학이라는 장르가 쉽게 다가갈 수 있는 분야는 아니다. 더구나 나는 근대철학자들의 저서를 아직까지 섭렵하지 못했으므로, 오늘날 현대 철학자라 할 수 있는 지젝의 사유를 이 책을 통하여 온전히 알아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철학이란 장르가 그렇다. 철학은 이 땅을 살아온 선각자들이 행했던 사유의 집합이자 연속체다. 그렇기에 플라톤의 철학은 아리스토텔레스에 비판적으로 계승됐고, 이런 고대철학은 중세의 신학 철학에 영향을 미쳤으며, 신학 철학에 반발로 이성을 중시한 근대철학이 들어섰다. 데카르트의 관념론은 칸트와 헤겔을 통해 이어졌고, 이런 헤겔의 변증법은 지젝의 철학적 사유의 핵심이 됐다. 이뿐 아니라 지젝의 철학에는 순수 철학과 관념론만 내포한 것이 아니다. 그의 철학에는 라캉과 프로이트의 정신분석 이론 역시도 포함됐으며, 마르크스의 정치 경제학적 요소도 포함됐다.

수학을 배울 때 곱하기 나누기를 모르면 인수분해를 할 수 없듯, 이 책 역시 개론서임에도 불구하고, 책을 완벽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최소 헤겔의 변증법과, 라캉의 정신분석학 정도는 알고 있어야 한다. 헤겔에 대해서는 깔짝거려본 경험이 있고, 풍문으로 알고 있는 잡지식이 있지만, 라캉은 나에게 매우 생소했다. 지젝은 라캉을 이해하고 있다는 전제 하에서 철학적 이론을 전개하고 있으므로, 라캉의 이해 없이 지젝을 이해하기란 너무도 어려웠다. 물론 책 앞에는 라캉에 대한 기본적인 부분을 기술하고 있었지만 그래도 책을 이해하기란 쉽지 않았다. 그래서 책을 읽으면서, 라캉에 대해 알고 난 뒤에 다시 재독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책을 통해 만난 지젝의 세계관은 매우 넓었다. 저서를 통해 본 그의 사유는 굉장히 넓고 깊었다. 보통 철학자는 한 분야에 몰두하여 집중적으로 사고하기 마련인데, 이 사람은 정치, 경제체제, 문화, 영화, 혁명, 경제 등등의 광범위한 영역에서 사유를 전개하고 있었다. 한 인간이 다방면적인 사고를 통해 비치는 세계를 이토록 명료하게 정의하고 정리할 수 있다는 것에서 나는 감동을 받았다. 그의 글은 매우 논쟁적이고 도발적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엄숙한 진지함만을 고집하지 않았다. 유머러스한 비유와 해학적인 풍자를 통하여 청중에게 재미를 선사하기도 하였다. 또 인상적인 것은 그토록 방대하고 견고한 자신의 세계관을 스스로 비판하고 붕괴하여 재구성한다는 점이다. 자기 자신의 철학을 스스로 비판하는 것은 정말 힘든 일임에도 불구하고 지젝은 이런 사고과정을 통하여 스스로의 관념을 확장시켰다. 나는 이런 그의 비판정신이 매우 인상적이었다.

 광대한 그의 사고, 그 사고로 형성된 지젝만의 세계는 나를 불편하게 만들었다. 어렵기도 어려웠지만, 같은 인간이지만 이토록 넓은 세계를 구축한 그가 부러웠다. 어려운 그의 세계관에 모두 동조하는 것은 아니지만 분명한 사실은 그의 철학적 사유의 폭을 보며, 나의 인식의 빈약함을 절실하게 느꼈다. 나의 세계관은 지젝의 세계관에 비해 허술하고 좁으며, 깊지 않았다. 물론 넓고 깊고 튼튼한 것이 무조건적으로 좋은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나는 그의 세계로 인해 정신적인 자극을 받은 것임에는 틀림없다. 철학의 목적은 무엇일까? 인간은 왜 타자의 깊은 사유와 세계를 배우고 받아들이며, 비판하는 것일까? 그저 타인의 사유를 수동적으로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데에 목적이 있지는 않을 것이다. 책을 읽으며 지젝의 완고하면서 단단한 세계관과 나의 빈약한 세계관이 충돌했다. 그 충격으로 인해 나의 세계관과 관념은 박살 나고 일그러지는 느낌을 받았다. 나의 좁았던 내면은 붕괴했고, 이전의 영역보다는 좀 더 크게 사유하기 시작하고, 좀 더 넓은 세계관을 구축하기 시작한다. 사유와 사유의 충돌, 그리고 그 여파로 인한 내면적 갈등, 그리고 이어지는 내면의 성장. 이것이야말로 철학이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목적이 아닐까?

  그래서 나의 내면은 이 책을 통해 좀 더 넓어질 수 있었다. 책의 어려운 내용을 모두 완벽하게 이해한 것은 아니지만, 독서를 통해 이러한 목적의식을 가지게 된 것만으로도 나는 큰 소득이 있다고 생각한다. 다음번에 다시 읽을 때에는 지금처럼 불편하게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불편하지 않다는 것, 그리고 쉽게 이해할 수 있고, 자유롭게 비판할 수 있다는 것은 그만큼 나의 내면과 세계가 성장했다는 증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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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추공양전 - 국내 최초 완역본
공양자 외 지음, 곽성문 옮김 / 인간사랑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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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추》를 주석한 책은 대표적으로 세 가지인데 이를 열거해보면 다음과 같다. 《춘추좌전》, 《춘추곡량전》, 《춘추공양전》. 이 세가지 고전은 춘추삼전으로 불려왔으며, 공자가 편찬한 《춘추》를 이해하는데 길잡이 역할을 하였다. 《춘추》는 유교의 사서오경에도 들어가는 귀중한 역사책이지만, 사실 《춘추》 자체의 기록은 매우 소략하고 간략하게 기록되어 있다. 거추장스러운 수사가 없는 짧은 단문 형식의 메모글로 역사를 서술하였기에, 《춘추》 자체만을 읽는 것은 크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 《춘추》가 이렇게 소략하게 기록됐기에 《춘추》를 연구했던 후학들은 독자적인 주석을 가미해 《춘추》의 뜻을 확장하고 《춘추》의 뜻을 명확하게 설명했으며, 《춘추》가 다루던 배경을 주석으로 자세하게 설명했다.

  흔히 오늘날 《춘추》를 말하면 대부분 《춘추좌전》을 의미하는데, 그만큼 《춘추좌전》은 춘추의 주석서 중 가장 권위 있는 주석서로 인정받았으며 이런 시각은 오늘날까지 이어졌다. 《춘추좌전》은 《춘추》의 소략한 기록의 배경을 방대하게 풀어내어 설명했다. 기본적으로 《춘추》는 노나라 역사를 중심으로 전개되지만 《춘추좌전》에서는 노나라 역사도 역사지만 노나라 역사가 진행될 때 제후들과 주변국의 움직임을 굉장히 디테일하게 서술하고 있었다. 또한 간략하기 그지없는 《춘추》의 본문을 부연하고 해설하는 경우도 많았다. 물론 《춘추좌전》이 《춘추》가 다루는 내용을 그저 부연하고 설명하는 것에 그치지는 않았다. 《춘추좌전》의 저술 목표는 '역사적 사건에 대한 정당한 시비'에 있다. 그렇기에 결국 본문을 부연하고 주변 나라들의 동향을 자세하게 기록한 이유 역시 올바른 시대적 판결이라는 목적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다.

 《춘추공양전》과 《춘추곡량전》 역시 기본적으로 《춘추좌전》과 비슷한 목적하에 편찬됐다. 다만 《춘추좌전》에 비해 《춘추공양전》과 《춘추곡량전》은 역사에 가깝기보다 철학에 가까운 저서들이다. 《춘추좌전》은 공자가 편수했다는 《춘추》 본문도 중시하지만 그 외의 주변국의 상황이나 역사적 사례 등등을 설명하는데 있어서도 공을 들이고 있는데 반해, 《춘추공양전》과 《춘추곡량전》의 내용은 철저하게 《춘추》 본문의 경문을 벗어나지 않는다. 《춘추좌전》이 경문을 넘어선 배경까지 다루는데 반해 《춘추곡량전》과 《춘추공양전》은 철저하게 경문 중심이다. 두 책은 《춘추》의 경문이 어떤 연휴로 기록됐으며 기록의 의미가 무엇인지에 대해 소상하게 밝히고 있다. 이런 기술법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두 책은 《춘추좌전》에 비해 유교적 이데올로기가 강조됐다는 부분이다. 《춘추》의 원문을 중시하여 밝힌다는 것은 이를 정리했다는 공자를 드높이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으며, 그렇기에 《춘추곡량전》과 《춘추공양전》은 엄밀히 따지자면 역사를 바탕으로 한 철학서라고 해도 무방하다. 반면 《춘추좌전》의 경우는 전형적인 역사책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춘추곡량전》과 《춘추공양전》은 둘 다 유학을 중심으로 철학적인 해설이 붙어졌지만, 그 정도의 차이가 있다. 《춘추곡량전》은 유학적 이념이 매우 깊은 저서지만 《춘추공양전》은 유학적 이념에 충실하되 현실적인 힘의 관계도 나름 고려하는 시각을 보여주고 있다. 이런 《춘추공양전》의 시각은 대표적으로 들끓는 패자 국가들과 주나라 황실에 대한 해석에서 볼 수 있다. 《춘추》와 세 주석서의 공통된 주제는 유학적 이념에 충실한 것이고, 그러한 유학적 이념이 지향하는 목표는 주나라 봉건제의 질서를 강조하는 것이다. 따라서 세 책은 모두 주나라 황실에 대한 대의명분을 강조한다. 그러나 《춘추곡량전》은 무조건적으로 주나라 황실을 옹호하는 반면, 《춘추공양전》은 주나라 황실과 봉건제를 옹호하면서도 한편으로 신망을 잃은 주나라 황실 역시 비판적인 서술로 기록했다. 비유하자면 《춘추곡량전》의 입장은 윗물이 똥물이더라도 아랫물은 그저 맑아야 한다는 논리고, 《춘추공양전》의 논리는 아랫물이 맑아야 하긴 하는데, 윗물 역시도 맑음을 유지해야 하니, 이런 혼란은 결국 두 물 모두에서 비롯한 것이라고 분석했다.

  그렇기에 두 책은 유교 이념에 치우친 역사 철학서지만, 나름의 균형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는 쪽은 《춘추공양전》 쪽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개인적으로는 《춘추공양전》보다는 《춘추좌전》 쪽이 더 재미있었지만, 고대 동양에서 역사를 철학적으로 풀이한 《춘추공양전》 역시도 흥미롭게 읽었다. 《춘추공양전》의 핵심은 바로 '대일통 사상'이다. 즉 문자 그대로 하나로 통일된 것을 의미하는 '대일통 사상'은 《춘추》와 《춘추공양전》의 핵심적인 키워드다. 하나로 통일된다는 것은 결국 무너지고 붕괴한 주나라 봉건주의 시스템의 복원을 의미하는 것이고, 즉 이를 역사적으로 밝히기 위해 공자는 《춘추》의 경문을 지었다는 것을 《춘추공양전》은 강조한다. 공양학파의 논리를 정리해보자면 결국 공자는 《춘추》를 저술함에 있어 대일통 사상에 입각하여 역사를 정리하였고, 《춘추공양전》은 그런 공자의 숨겨진 대일통 사상을 자세하게 드러내어 공자의 집필 공식을 밝힌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런 대일통 사상은 분봉제를 바탕으로 한 봉건주의 질서를 강조하는 것이지만 이것이 순수한 지방 영주들 위주의 정치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대일통 사상의 핵심은 천자로 대표되는 막강한 제왕을 중심으로 정치가 돌아가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왜 《춘추공양전》이 한나라 시기에 유행했는지를 살펴보면 그 의도를 쉽게 파악할 수 있다. 중국 한나라 시대에는 분봉제를 기초로 한 중앙집권 형태 국가였다. 그렇기에 지방 자치를 의미하는 분봉제와 황제의 권력을 강화하려는 중앙집권제가 혼합된 형태라고 할 수 있다. 이 이질적인 정치제도를 잘 굴러가게 하려면 분봉을 받은 제후국은 지방에서 실력을 과시하기보다 중앙 정부의 명령만을 잘 받도록 관리해야만 했다. 또한 중앙에 위치한 황제 역시도 지방 영주들로부터 지지를 받아야만 자신의 정치적 영향력을 만방에 넓힐 수 있었다. 이런 환경은 필연적으로 《춘추공양전》이 지향하는 대일통 사상을 떠올리게 만든다. 그래서 한나라 대에 황제들과 중앙 관리들은 의도적으로 《춘추공양전》을 드높였고, 그래서 한동안 성행했다고 한다. 오늘날 중국이 시행하는 소수 민족 정책 역시도 어찌 보면 대일통 사상을 떠올린다. 결국 중앙 한족으로 통일하는 것. 소수민족의 자치를 인정하는 것 같으면서도 결국 의도를 뜯어보면 궁극적으로 한족으로부터의 예속, 종속을 의미하는 것이니까 말이다.

  《춘추공양전》의 또 다른 특징은 바로 공자가 다룬 노나라의 역사를 시기적으로 세 부분으로 나눠 해석했다는 부분이다. 이를 두고 책에서는 '장삼세설'이라고 이야기한다. 이 세 부분은 난세(소전문세), 안정과 발전기(소문세), 태평세대(태평세)로 구분되는데, 유학이 추구하는 이상적인 국가의 발전 모습을 그대로 담고 있다는 점이 눈에 들어온다. 《춘추》의 경문은 공자의 죽음으로 끝맺고 있는데, 결국 국가 발전의 마지막 단계인 태평성대는 공자라는 성인의 등장과 그의 철학이 세상에 퍼지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다만 이런 기록과는 다르게, 국제 정세와 노나라의 정세는 시간이 흐를수록 패권주의로 흐르고 있었다. 《춘추공양전》의 장삼세설은 이념적인 측면에서 강조됐지만, 정작 현실은 《춘추공양전》의 기록과는 다르게 더더욱 난세로 치닫고 있었다. 기록대로라면 노나라의 발전과 중원 대륙의 발전은 태평성대로 끝나야 함에도 불구하고, 춘추시대가 흐르면 흐를수록 국가 간의 질서와 천자와 제후 간의 균형은 무너져갔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런 장삼세설을 통해 나는 역사를 파악하는데 있어 하나의 주관과 이데올로기를 고집한다면 그것은 필연적으로 역사의 왜곡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깨달았다.

  《춘추공양전》은 역사 기록을 유교 철학적 이데올로기에 입각하여 잘 풀어낸 명저지만 분명한 사실은 그 유학적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힌 시각 때문에 역사의 의미를 축소하거나 왜곡된 시각으로 바라보기도 하였다. 나는 역사를 해석함에 있어서 하나의 주관을 가지고 집필을 하는 것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이다. 물론 일정한 집필 방향이 있으면 좋겠지만 때론 집필 방향과 어긋난 역사적 사건이 일어날 경우, 역사가는 진실에 입각하여 기록을 하기보다, 자신의 집필 방향 (어떠한 이념이나, 목적 따위)에 충실하여 진실에 입각한 역사를 져버리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내가 생각하는 바람직한 역사가는 자신의 관념 역시도 오류가 있을 수 있다는 열린 마음을 바탕으로 사료를 대하고 선별하며 해석해야만 한다. 따라서 이런 나의 역사적 주관에 입각한다면 《춘추공양전》의 장삼세설은 비판적인 눈으로 볼 수 밖에 없다. 

  집필 방향이 아쉽긴 했어도 재미있게 읽었다. 무엇보다 까마득한 고대에, 역사를 두고 이토록 진지하게 철학적으로 풀어낸 저서가 있다는 것 자체가 놀라웠다. 《춘추공양전》을 읽으면서 앞서 읽었던 《춘추좌전》이 많이 생각났다. 두 저서는 같은 《춘추》를 해설하고 있다는 점에서 비교될 수밖에 없는 책이다. 두 책이 추구하는 춘추필법의 공통점은 주나라 봉건시대로의 회귀를 지향한다는 점이고 차이점은 집필법이 상이하다는 점이다. 《춘추좌전》은 전형적인 스토리텔링 기법을 통해 사건을 평가하는 정통 역사서고, 《춘추공양전》은 스토리텔링보다 《춘추》의 경문이 어떻게 집필됐는지 치밀한 질문을 통해 의미를 찾는 역사 철학서다. 따라서 두 책은 같은 내용을 바탕으로 했지만 집필 스타일로 인해 전혀 다른 장르의 책으로 갈라졌다. 《춘추공양전》의 문답법을 읽다 보면 서양의 소크라테스 문답법이 생각났다. 소크라테스는 플라톤의 《대화편》에서 상대의 의견에 꼬리에 꼬리를 무는 물음을 구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마찬가지로 《춘추공양전》 역시 《춘추》 본문의 집필 의도를 밝히기 위해 끊임없이 물음에 물음을 거듭하고 있었다.

  역사철학서라 장르 자체에서 내용이 딱딱할 수밖에 없는 《춘추공양전》이지만, 중간중간에 역자의 센스 있는 해설이 있어서 책의 이해에 큰 도움을 준다. 해설은 모든 대목이 있진 않고 복잡한 사건이거나, 부연 설명이 필요한 부분에만 나와 있는데, 괜찮은 편제 같았다. 해설이 길지도 않고 적당한 부분에만 있어서, 본문에 집중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춘추좌전》과 《춘추공양전》을 읽었으니, 《춘추곡량전》도 읽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춘추곡량전》까지 읽어야 비로소 '춘추삼전'을 읽었다고 할 수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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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초고왕을 고백하다 백제를 이끌어간 지도자들의 재발견 1
이희진 지음 / 가람기획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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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에서 가장 중시하는 것은 사료라고 불리는 텍스트와 그 사료를 검증할 수 있는 고고학적 유물이다. 그렇기에 고대사는 늘 논란의 여지가 많다. 전해오는 것들이 적은 데다 전해지는 것들 역시도 매우 부분적이고 파편적이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의 역사도 마찬가지다. 중세인 고려와 근세인 조선의 경우 전해지는 유물과 기록이 많은 반면, 그전의 고대 시대는 유물도 적고 기록 역시도 미미하기 때문이다.

삼국 중 그나마 형편이 나은 것은 신라다. 신라는 삼국을 통일했고, 통일 왕조로 한동안 있었기에 다른 두 국가에 비해 전해져오는 기록과 유물이 많은 편이다. 반면 고구려와 백제의 경우는 전해져 오는 것들도 드물고 사료도 매우 파편적이다. 백제와 고구려 중 그래도 우리에게 친숙한 것은 고구려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좋아하는 정복군주 광개토태왕이라는 불굴의 영웅이 고구려 출신이기 때문이다. 한반도 국가 중 광개토태왕만큼 영토를 넓힌 나라는 없었다. 한반도는 역사적으로 늘 대륙 중국으로부터 시달림을 당했다. 그런데 광개토태왕은 이런 중국이 분열된 시기를 틈타 북방으로 영토를 개척했다. 그랬기에 우리는 광개토태왕의 정복을 통하여 '을로써 지낼 수밖에 없었던 역사적 아픔'을 삭히곤 했다. 광개토태왕은 그래서 우리 민족에게 늘 선망의 영웅이었다.

삼국 중 대중적으로 인지도가 적은 국가는 백제다. 물론 백제는 문화가 뛰어나서 지식인들 중에는 백제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일반 대중적인 관점에서 바라보자면 백제는 확실히 신라와 고구려에 비해 인지도가 떨어진다. 시험 문제에 단골로 나오는 삼국의 전성기 - 4세기 백제의 근초고왕, 5세기 고구려의 광개토태왕, 6세기 신라의 진흥왕 -를 빼고는 도통 가깝게 와닿지 않는다. 책은 이렇게 생소한 백제의 역사를 다루고 있었다. 책은 백제의 역사를 통사로 다루는 것이 아니라 업적을 이룬 인물을 중심으로 다루고 있었다. 다루고 있는 인물은 두 사람, 첫 번째는 백제의 영향력을 최대로 높였다는 정복군주 근초고왕과, 두 번째로 백제의 중흥을 이끌었던 성왕을 다루고 있다. 제목은 '근초고왕을 고백하다'이지만 근초고왕의 파트보다 성왕의 파트가 분량이 좀 더 많았다.

백제는 가야와 더불어 우리 역사에 있어 수수께끼와도 같은 존재다. 왜냐하면 워낙 전해지는 사료가 미약하고, 그나마 전해지는 사료 역시도 백제에 대해 매우 불리한 기록들이 대부분이다. 그래서 백제의 진면목을 오늘날 밝히기에는 매우 어렵다. 현전해는 사료 중 백제에 대한 사료로 취급하는 것은 바로 두 가지 텍스트인데 《삼국사기》와 《일본서기》다. 《삼국사기》야 그렇다 쳐도 《일본서기》는 왜곡투성이의 일본 기록인데 이게 과연 백제의 모습을 밝힐 수 있는 사료로 활용할 수 있을까란 의문이 든다. 그러나 이렇게 따지면 《삼국사기》 역시도 매우 편향적인 역사서다. 왜냐하면 《삼국사기》를 저술한 김부식은 대표적인 신라계 인물인데, 그는 노골적으로 친신라적인 사관을 《삼국사기》에서 보여주기 때문이다. 《삼국사기》를 잘 읽어보면 신라의 기록이 가장 자세하고, 고구려, 백제 순으로 점점 기록이 미비해진다. 《삼국사기》 역시 백제사를 왜곡과 폄하의 시각으로 바라봤다. 그러므로 양 사서에 편향된 기록을 걷어내고 비판적인 눈으로 독해해야지 온전한 백제에 다가갈 수 있다.

근초고왕의 가장 큰 업적은 바로 백제의 주적인 고구려에 대항하여, 남방 세력을 평정했다는 점이다. 백제는 고구려에 대항하기 위해 남방 경략에 힘을 썼는데, 마한 세력을 제압하고, 가야 연맹을 자신들의 세력권에 넣었으며, 왜 역시 이런 연합 세력에 편입시켰다. 백제는 왜를 이용하여 신라를 견제했고, 왜는 가야 연맹에 임나를 통해 한반도에서의 활동 영역을 보장받았다. 백제는 임나를 통하여 가야 세력과 왜를 배후에서 조종하였다. 즉 백제를 중심으로 한 남방 연합군이 형성됐다. 근초고왕이 이룬 업적 중 가장 큰 업적이 바로 이 연합 세력의 구축이었다. 근초고왕이 이룩한 이 남방 연합은 결국 광개토태왕의 남방 정벌로 인해 무산된다. 광개토태왕은 신라를 구원함과 동시에 남방 연맹의 핵심 거점인 가야 즉 임나를 공격하였고, 이로 인해 임나의 중심이었던 금관가야는 패권을 잃고 만다.

백제의 성왕은 근초고왕이 이룩했던 남방의 맹주 자리를 다시 되찾으려고 노력했던 군주다. 당시에는 백제와 신라가 동맹을 맺어 고구려에 대항하고 있는 형국이었지만, 성왕은 잔존한 가야 세력과 왜 그리고 신라까지 연결한 거대 연맹국을 창설해 백제가 조종하려는 시스템을 구축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신라와 가야, 왜나라는 백제의 이런 움직임을 불편하게 여겼다. 설상가상으로 금관가야가 신라에 투항하자 백제는 강압적인 정책으로 나머지 가야 세력과 왜국을 독촉했고 결국 백제 중심의 남방 연합군을 다시 설립했다. 이러한 전략으로 백제는 한강 탈환을 감행했지만 신라의 배신으로 성왕은 전사했고, 백제는 어렵게 이룩한 남방 연합군의 맹주 자리에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결국 책에서 다루고 있는 핵심은 연합 맹주를 주도하던 백제의 모습이다. 백제는 신라가 한강 유역을 먹기 전까지 한반도 남방의 외교와 정치를 주도했던 강대국이었다. 시시각각 변하는 국제정세 앞에서 백제의 지도자들은 매우 탄력적인 모습으로 외교를 감행했다. 오늘날 생각했을 때 고구려와 백제는 하나의 민족이라고 생각하지만 이 당시에는 그렇지 않았다. 그렇기에 오늘날의 민족적 개념으로 이 시기를 해석해버리면 당시의 시대를 정확하게 조망할 수 없다. 당시 고구려와 백제는 철천지원수와 같은 사이였다. 백제의 최대 주적은 신라도 아니고 가야도 아닌 고구려였다. 고구려 역시 남쪽에서 사사건건 불편한 눈으로 바라보는 백제를 곱게 보지 않았다. 양국은 서로의 군주를 참살했을 정도로 치열하게 싸웠던 사이다. 백제는 이런 고구려에 맞서 가야와 왜를 이용한 연합 세력을 구축했다. 오늘날 관점으로 보자면 같은 민족인 고구려를 치기 위해 일본인에게 도움을 청한 백제가 매국노처럼 보이겠지만 당시 백제에 있어 고구려는 그저 물리쳐야 할 적일뿐이었다. 마찬가지로 신라가 통일을 위해 외세를 끌어들였다고 하는데, 이런 관념 역시도 근현대 시대에 형성된 민족관에서 비롯했다. 당시 신라에게 고구려나 백제는 같은 민족이 아닌 적국일 뿐이었다.

책을 보며 새삼 느낀 것은 국제 관계의 본질은 역시 힘에 있다는 것이며, 그렇기에 힘이 결여되면 관계 역시도 비틀릴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이런 면에서 나라와 나라 간에 행하는 외교는 본질적으로, 자연계의 약육강식과 매우 닮았다. 강력한 힘을 바탕으로 근초고왕은 백제 중심의 남방 연합군을 결성했다. 그러나 광개토태왕은 이를 힘으로 깨부쉈고, 공고할 것만 같았던 남방의 연합세력은 바로 와해됐다. 왜는 백제로부터 문화적인 유산을 제공받는 입장이라 꾸준하게 백제를 우대했지만, 가야는 광개토태왕의 정벌 이후 바로 백제와 연을 끊어버렸다. 고구려가 이토록 강대해지자, 고구려의 속국인 신라는 자주를 외치며 백제와 동맹하여 고구려와 맞섰다. 굳건한 나제동맹이 이뤄졌지만 결국 성왕 때 가야 세력을 포섭하는 문제와 한강 유역을 차지하는 문제에서 신라는 백제를 배신했다. 그러므로 고대왕국 시대에 나라와 나라의 외교관계는 본질적으로 의리나 명분 따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지극히 현실적인 법칙에 지배를 받았다.

또한 흔히 우리는 고조선과 연맹왕국 시기를 거쳐 삼국시대로 넘어갔다고 생각하지만 이는 매우 편견인 듯싶다. 나는 이 시기를 오국시대로 정의해야 한다고 본다. 당시 한반도에서는 고구려와 백제가 남북의 형세로 싸우고 있었으며, 신라와 가야가 자국의 이익에 맞게 눈치껏 고구려와 백제에 편을 들었다. 그리고 또 하나의 나라 왜 역시 한반도에 많은 흔적을 남겼다. 왜는 본질적으로 백제와 깊은 관계를 맺고 백제의 입장을 끝까지 지지하여서 신라와 가야처럼 가변적인 움직임을 보여주지 않았다. 또한 한반도 자체에 위치한 국가는 아니지만, 한반도 세력이 격돌할 때 왜군은 늘 파견되었고 백제군과 함께 싸웠다. 그러므로 왜 역시 우리의 고대사를 다룰 때 빠질 수 없는 존재라고 생각한다. 마찬가지로 일본의 고대사도 한국과 깊은 연관이 있다. 왜는 이런 지원을 통해 문화적인 혜택을 백제로부터 누렸다. 이러한 한반도 도래 문화를 바탕으로 왜는 나라와 교토에서 독자적인 국가로 발전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양국의 고대사는 서로의 존재를 제외하고는 설명할 수 없는 부분이 매우 많다. 따라서 한국의 고대사와 일본의 고대사는 하나로 연결됐고, 하나라는 시각으로 바라봐야지 편협한 오류와 편견을 벗어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일본서기》는 기본적으로 일본인과 천황을 노골적으로 높이는 목적 하에 저술된 책이지만, 한반도의 세력 판도와 한반도에서 파견됐던 왜국 군대의 동향 등등을 자세하게 기록한 것으로 봤을 때 기록들을 모두 무시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일본서기》에서 흔하게 나타나는 자문화 중심주의적 허구와 과장은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한 것이기 때문에, 비판적인 독해를 한다면 허구 속의 진실을 분명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런 것들을 공부하고 연구하고 밝히는 것이 사학자 본연의 임무가 아니겠는가.

마지막으로 근초고왕과 대륙 백제에 대한 생각을 적어보려 한다. 책에서는 대륙 백제에 관한 내용이 하나도 나오지 않는다. 대륙 백제란 백제가 중국의 동쪽 지역을 자국화하여 통치한 지역을 의미한다. 과연 대륙 백제는 존재했을까? 당시 근초고왕은 국가 팽창정책을 내세웠고 남방 경략을 했으며 북쪽으로는 고구려를 정벌하여 왕을 쓰러트리는 등의 활동을 보여줬으니 분명 바다에서도 왕성한 경제정책을 감행했을 것이다. 그러나 과연 정치적으로도 중국 동쪽 지역을 장악했을까? 의문이 든다. 경제적인 영향력이 무조건 정치적인 영향력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정치적인 영향력을 가진다는 것은 결국 중국 대륙 안에 백제가 거점을 마련하고 영토화했다는 이야기인데, 당시 백제가 중국의 동쪽 영토를 자국화하고 유지할 수 있는 국력이 있었을까? 아무리 중국 대륙이 혼란스럽더라도 먼 바다 건너에 영토를 확장한다는 것은 매우 부담스럽다. 무엇보다 그 세력을 유지할 수 있는 현실적인 자금과 비용, 힘이 있었을까? 당시 근초고왕 시대 백제의 가장 큰 사업은 대륙 백제의 확장이 아닌 한반도 세력 내에서 북방 고구려의 세력에 대비하여 남방 세력권의 연합을 구축하는 것이었다. 가야와 왜를 연결하는 거대 연맹체를 만들고, 또 백제 내부에서도 전남 지역의 마한 세력들을 복속하기 위해 노력했다고 하는데 이런 시기에 과연 바다 건너 중국 본토에 영토를 마련할 여유가 있었을까? 상식적으로 너무 앞뒤가 안 맞는 추측이라고 생각한다. 정복이라는 것은 본토와 가까운 지역부터 정벌을 마친 뒤에야, 외부로 눈길을 돌리는 것이 일반적이다. 백제 바로 밑에 마한 세력도 통합하지 않았는데, 바다 건너 대륙에 영토를 신경 쓴다? 앞뒤가 안 맞는 이야기다. 따라서 내 생각을 정리해보자면 근초고왕 시기에 분명 서해를 통해 중국 대륙과 경제적인 교류는 매우 활발했을 것이고, 서해의 장악력 역시 백제가 쥐고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즉 서해와 중국 동쪽 지역에 있어서 경제적인 주도권은 백제가 가졌을지도 모르겠지만, 그것이 정치적인 영향력은 아니었을 것이다.

아무튼 책을 읽으며 저자의 신선하고 비판적인 해석이 눈에 들어왔다. 잊었던 백제의 영웅들을 복원하는 것은 매우 한계가 있는 작업이지만, 그런 한계 속에서도 과거의 자취를 복원하는 것이 역사학자의 소명이다. 저자는 복잡한 자신의 의견을 평이한 서술로 알기 쉽게 대중에게 선보였다. 그래서 흥미롭게 책을 읽을 수 있었다. 책을 통해 백제 군주들의 새로운 모습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이 책의 후속작인 《의자왕을 고백하다》도 읽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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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키아벨리 전술론
니콜로 마키아벨리 지음, 이영남 옮김 / 인간사랑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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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키아벨리의 대표작은 《군주론》이다. 물론 마키아벨리를 깊이 읽은 분들의 입장에서는 《로마사 논고》를 꼽을지도 모르겠지만, 《로마사 논고》는 《군주론》만큼 후세에 큰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는 점에서, 《군주론》을 앞설 순 없다고 생각한다. 그는 《군주론》에서 강력한 군주가 되기 위해서는 자강을 갖춰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그 자강의 핵심은 군대였다. 뿐만 아니라 《로마사 논고》에서도 마키아벨리는 군대에 대한 생각을 깊이 있게 밝혔는데, 이로 추측해볼 수 있는 부분은 마키아벨리의 생각 속에는 언제나 군대에 관한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런 마키아벨리가 자신의 군사 철학을 저술한 책이 있는데 그 책이 바로 《전술론》이다. 후대의 학자들은 《군주론》과 《로마사 논고》 그리고 《전술론》을 마키아벨리의 3대 저서라고 이야기했다. 그만큼 《전술론》은 마키아벨리의 사상을 배우는데 있어 중요한 저작으로 간주됐다. 당시 유럽의 정세는 지방의 중소 영주 세력들을 중심으로 한 봉건주의 체제가 붕괴하기 시작했고, 강력한 중앙집권을 바탕으로 한 강대국들이 세력을 확장하고 있었다. 강대국들은 자국의 패권을 이용하여 약소국을 이용하거나 식민지화했으며, 이러한 현상은 신대륙과 식민지를 바탕으로 한 제국주의의 배경이 되었다. 애석하게도 마키아벨리가 있던 이탈리아 대륙은 여전히 봉건주의 체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으며, 강대국들에 의해 이탈리아의 도시국가들은 휘둘리고 수탈당하고 있는 실정이었다. 이를 안타깝게 생각한 마키아벨리는 과거 이탈리아 대륙에서 찬란한 제국을 만들었던 로마 시대를 주목했고, 그러한 고전주의 정신을 바탕으로 이탈리아의 정치와 군대를 개조하여야 한다고 소리쳤다. 그런 마키아벨리의 정치적인 관념을 대변하는 저서가 《군주론》과 《로마사 논고》이며, 군사적인 관념을 대변하는 저서가 바로 《전술론》이다.

  클라우제비츠는 자신의 명저인 《전쟁론》에서 '전쟁은 정치의 연속이다.'라는 유명한 명언을 남겼다. 마키아벨리의 사상도 마찬가지다. 그는 정치 안에 내재됐던 과대평가된 종교적, 윤리적인 부분을 걷어내고, 정치의 현실주의를 밝히기 위해 노력했다. 그런 정치의 현실주의는 어떻게 완성되는가? 핵심은 지도층의 현실을 바탕으로 한 리더십과, 그 리더십을 뒷받침할 수 있는 군대였다. 오늘날 현대에는 직접적인 전쟁을 겪을 일이 없기에 군대에 소중함이 크게 와닿지 않지만, 근대 이전까지만 해도 강대국의 필수 조건은 강력한 군사력이었다. 어느 시대에나 스스로 힘이 있어야 다른 세력에 휘둘리지 않고, 내 목소리를 당당하게 외칠 수 있다. 물론 표면적으로는 평화나 미덕, 아름다움, 종교 등등으로 치장하고 포장했지만, 냉혹한 국제질서를 움직이는 원동력은 언제나 군대를 필두로 한 힘이었다. 사실 오늘날도 별반 다르지 않다. 국제사회를 주도하는 G2를 잘 살펴보면 하나같이 경제력과 군사력이 강하다는 공통점이 있다. 아무튼 정치적 현실주의는 군사력으로 대표되는 힘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다. 그렇기에 《전술론》은 정치철학자인 마키아벨리에게 있어 뜬금없는 저작이 아닌, 당연히 저술해야만 했던 저작이었다.

  《전술론》의 내용적인 측면은 책의 부피에 비해서 크게 독창적이진 않는다. 고전 옹호 주의자, 로마 시대를 극도로 찬미하는 마키아벨리는 군사적인 체제나 제도 역시도 찬란했던 로마 시대의 제도를 본받자고 이야기했다. 그뿐 아니라 공화정 로마 시대의 사심 없었던 장군들의 내면적인 정신을 본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즉 로마인의 제도를 본받아 응용하고 로마 군인들의 정신을 본받아 자국을 강화하자는 것이 이 책의 주된 내용이다. 가장 특기할 만한 사항은 바로 상비군에 대한 생각인데, 마키아벨리는 직업 군인을 비판적으로 바라봤다. 그럼 의문이 들 법도 한데, 직업 군인을 양성하지 않으면 도대체 나라의 자강은 어떻게 이루려는 것일까? 이에 대한 해답으로 마키아벨리는 시민군을 강조했다. 마키아벨리는 직업 군인은 특성상 호전적이며 전쟁을 위해 자신의 이익을 탐하는 존재들이므로, 위급한 상황에서는 도움이 될지 모르겠지만 평화로운 시기에는 국가에 해가 된다고 주장했다. 실제로 그는 로마 역사의 선례를 거론하며, 공화정이었던 로마가 독재정 국가로 갔던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직업 군벌 세력들의 야심과 직업 군인들의 입김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기에 전문적인 직업 군인들은 평화의 시기에 국가를 전복할 수 있는 막강한 세력으로 남을 수 있다고 경고했다. 

  따라서 마키아벨리는 공화정 초기에 로마가 시행했던 군사 정책에서 시민군 징집에 집중했다. 공화정 초기에 로마는 전문적인 군인을 두기보다, 전쟁이 일어나면 시민들의 모병과 모집으로 군대를 꾸려서 전쟁에 임했다. 즉 시민군을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병농 일치라고 볼 수 있다. 전쟁이 나면 시민들의 징집으로 군사를 충당하고 전쟁이 끝나면 다시 군대를 해산하여 생업으로 돌아가는 시스템이다. 이럴 경우 사령관은 승리를 거두더라도 군벌 세력을 갖지 못하기에 국가에 위협적인 요소로 남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다만 마키아벨리의 주장은 너무 이상적인 모습이 아닐까라는 생각도 들었다. 시민군 제도는 오늘날 우리나라의 예비군 제도와 비슷하다.  생업을 하다가 전쟁이 나면 군대에 가는 것은 어찌 보면 매우 효율적인 시스템이나, 과연 이렇게 모은 병사들이 정예화되고 훈련받은 병사들보다 노련할까? 로마 초기 공화정 시대의 이탈리아 반도의 국가들은 사실 전쟁의 수준이 매우 미개하고 떨어졌다. 그런데 마키아벨리가 사는 시기에는 전쟁 기술과 더불어 책략과 기교가 고대 공화정 로마 시절보다 훨씬 발전한 시대다. 과연 급조적인 시민군으로 막강한 정예병과 싸웠을 때 이길 가능성이 높을까? 의문이 든다. 물론 마키아벨리는 이런 시민군들은 상비적인 훈련과 뛰어난 지도력을 갖춘 장군의 지도를 따르면 막강한 군대로 돌변한다고 이야기하는데, 너무 추상적인 이야기가 아닐까. 마찬가지로 정예화된 군대가 뛰어난 지도력을 갖춘 장군을 따른다면 시민군보다 훨씬 강력하지 않겠는가? 그래서 내 생각은 그렇다. 최소한의 정예병은 유지하되, 시민군의 징집으로 나머지 병사들을 운용하는 것이다. 아무튼 시민군을 바라보는 마키아벨리의 생각을 읽으며, 나는 그가 정말 로마 시대를 그리워하고 존경하는구나라고 새삼 느꼈다.

  그 외에 특이한 사항은 없었다. 보병 중심의 군대를 지향하는 점, 군대의 배치와 공격 수비에 대한 전문적인 이론, 그리고 비밀을 중요시하고, 군대에서는 임기응변이 가장 최우선으로 고려해야 한다는 점 등등은 《손자병법》을 필두로 한 동양의 군사 사상과 흡사했다. 하긴 진리라는 것은 시대와 지역에 따른 개별성보다 그것들을 초월하는 보편성에 가치를 두고 있다. 그렇기에 동양의 병법 진리와 서양의 병법 진리가 서로 궤를 함께하고 있다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일지도 모르겠다. 책 말미에서 마키아벨리는 오늘날 이탈리아를 통치하는 군주들이 나약하기에 올바른 군대와 군대 체계를 이룩할 수 없었다며 통탄한다. 그렇기에 이탈리아의 군주들은 저 위대한 로마 시절의 군대 체계를 본받아 군대를 조직하여 강한 모습으로 쇄신해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했다. 이 모습은 마치 《군주론》의 마지막 대목, 이탈리아 통일을 위한 바람과 같이 굉장히 웅변적인 어조였다. 이렇듯 그는 자나 깨나 조국에 대한 마음으로 가득한 인물이었다. 애석한 것은 그의 이런 사상은 당대에 수용되지 못 했다는 점이다.

 책에서 가장 흥미로운 부분은 바로 책의 구성이다. 《전술론》은 플라톤의 《대화편》처럼 대화체로 구성됐다. 이 대화에 나오는 사람들은 모두 실제로 마키아벨리와 함께 루첼라이 정원 모임에 참석했던 인물들로, 하나같이 인문적 교양이 충만한 사람들이었다. 마키아벨리는 정치적 실각 이후 루첼라이 모임을 통해 후학들에게 자신의 사상을 이어가길 권고했다. 책의 배경은 실제 마키아벨리의 경험에서 비롯한 것이다. 책에서 군사학에 대해 주된 논의를 이끌어가는 인물은 파브리지오라는 사람인데, 결국 이 사람의 목소리는 마키아벨리의 목소리나 다름없다. 마치 플라톤이 《대화편》에서 자신의 목소리를 스승인 소크라테스의 말로 표현하는 것과 비슷하다. 또한 《전술론》 대화편의 대화 내용을 보면서 실제로 마키아벨리는 루첼라이 정원에서 어떤 방식으로 후학들과 교류를 하였는지 대강 유추해볼 수 있었다. 아무튼 마키아벨리의 저서는 사실과 허구를 섞어서 책을 쓴다는 특징이 있는데, 루첼라이 모임이라는 현실적 배경을 바탕으로 한 부분은 사실적인 모습을, 자신의 목소리를 파브리지오라는 인물에 투영하여 전개한 부분은 허구를 반영한 것으로 볼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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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어 - 전면개정판
좌구명 지음, 신동준 옮김 / 인간사랑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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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어》의 한자는 國語를 사용하는데 얼핏 보면 '나라의 문자'를 의미하는 것 같다. 왜냐하면 國語라는 한자는 오늘날 흔히 사용하는 나라의 문자인 '국어'와 같은 한자를 쓰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국어》에서 사용된  語는 문자를 뜻하는 것이 아닌 이야기라는 뜻으로 사용됐다. 그렇기에 나라의 이야기 즉 나라의 역사를 의미하고 있다. 그럼 무슨 나라의 역사를 이야기하고 있는 것일까? 책은 중국 춘추시대의 다양한 나라들을 나라별로 체계적으로 정리하여 기록하고 있다. 그래서 《국어》의 제목을 풀어내보자면 '춘추시대 국가의 다양한 역사 이야기' 정도로 정리할 수 있다. 따라서 같은 춘추 시대를 다루고 있는 《춘추좌전》과 《국어》은 상호보완적 관계로 읽을 수 있는 역사서다. 두 사서의 가장 큰 차이점은 바로 편집이다. 《춘추좌전》은 노나라 역사를 중심으로 주변국들의 상황을 시간의 순서에 따라 기록한 '편년체' 역사서인데 반해, 《국어》는 특정한 국가의 시각으로 편집한 것이 아니라 나라별로 나눠서 역사를 기록한 '국별체' 역사서다.또한 두 사서는 내용에서도 차이점이 두드러지는데, 《춘추좌전》은 사건을 자세하게 분석하고 조리 있게 정리하여 평가하는 것에 집중했다면, 《국어》의 서술은 역사적 인물과 인물 간의 대화체로 구성됐다. 그렇기에 《국어》의 서술은 《춘추좌전》에 비해 좀 더 가치중립을 확보하려고 노력한 모습이 보이며, 《춘추좌전》은 《국어》에 비해 저자의 주관적인 관점이 두드러진다.

그럼 이런 《국어》라는 고전의 주제는 무엇일까? 왜 저자는 춘추시대의 다양한 국가들의 역사를 정리하여 《국어》라는 고전을 남겼던 것일까? 내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급변하는 시대적 변화를 놓치지 않고 기록하려는 데 《국어》의 저술 동기가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중국사에서 춘추시대는 시기적으로 매우 과도기적인 시대다. 춘추시대의 전후를 살펴보자면 앞에는 서주시대가, 춘추시대의 뒤에는 전국시대가 위치한다. 서주시대의 특징은 바로 봉건제의 완성이다. 황제를 중심으로 황제와 인척 관계의 인물들을 주변 제후국으로 파견하여 황제의 나라를 보필하는 시스템이 바로 봉건제인데, 이러한 시스템을 주나라가 확립했다. 그러나 시대가 지날수록 황제 주변의 제후국들은 자신들의 힘을 키우기 시작했고, 여기서 두각을 드러낸 패권국이 국제 질서를 주도하기 시작했다. 즉 명목상으로는 주나라 황실을 우대했지만 실제적인 실권은 힘 있는 제후국이 가지기 시작했다. 이런 현상이 춘추시대에 들어 생기기 시작했다. 

 춘추시대를 지나 전국시대로 넘어가면, 제후국들의 패권주의는 극에 달하고, 주나라 황실은 아무런 권위를 내세우지 못하고 역사 속으로 사라진다. 봉건제의 흔적이 완벽하게 사라지고, 철저하게 약육강식의 법칙만 남은 시대가 바로 전국시대다. 춘추시대는 이런 봉건제 시스템과 제후국들의 약육강식 패권주의가 공존한 과도기적 시대였다. 《국어》의 저자는 이런 시기에서 각 나라들의 동향을 국가별로 자세히 기록했고 그 기록한 문헌이 바로 《국어》라는 역사 고전이다.

그럼 《국어》의 핵심 주제인 중원의 패권은 누가 가졌고 어떻게 이동하였을까? 흔히들 춘추시대에는 오패 즉 다섯 명의 패자가 군림했다고 이야기한다. 이 오패는 기록에 따라 다르지만 손에 꼽는 인물은 총 8명이다. 먼저 제나라의 제환공, 송나라의 송양공, 진(晉)나라의 진문공, 진(秦)나라의 진목공, 초나라의 초장왕, 오나라의 합려와 부차, 월나라의 구천 등이다. 여기서 논란의 여지가 있는 인물은 송양공과 진목공이다. 송양공은 다른 패자들이 힘과 실력으로 나라를 이끌었을 때, 그는 인의와 예의를 내세워 주변국의 신망을 얻었다. 그의 드높은 인의는 많은 존경을 샀지만 반대로 너무 인의와 예의에 얽매여 전쟁과 현실 정치에서는 과오를 범하기도 하였다. 후대의 유학자들은 이런 송양공을 칭송하여 오패의 하나로 간주하기도 하였지만 객관적으로 살펴봤을 때 송양공에게 패자의 칭호를 붙이기에는 여러모로 부족하다. 실제로 《국어》에서도 송나라를 다룬 챕터는 없었다. 

 진목공은 진(秦)나라를 중흥한 군주로 알려져 있다. 춘추시대에 진나라는 두 국가가 있었는데 하나는 진문공의 진(晉)나라고 하나는 진목공의 진(秦)나라다. 진(晉)나라는 전국시대에 세 개의 나라로 쪼개지지만, 진(秦)나라는 결국 전국시대를 통일하는 나라로 성장한다. 유명한 진시황도 진(秦)나라 출신이다. 아무튼 춘추시대 때 진(秦)나라는 서쪽 변방에 위치한 약소국이었다. 문공은 이런 진(秦)나라를 성장시켰고, 나름 중국의 중앙으로 진출하려고 노력하였지만 결정적인 전투에 패배한 뒤, 방향을 바꿔 서쪽의 융족들을 토벌하여 세력을 넓혔다. 패자라는 칭호는 당시 중국의 중앙 정치와 제후국들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권력이 있는 군주들이 칭했던 칭호다. 그러므로 진목공은 뛰어난 중흥 군주였지만 중국의 패자라고 칭하기에는 무리가 있는 인물이다. 설상가상으로 《국어》에도 진(秦)나라에 대한 챕터가 없다.

그럼 《국어》의 내용을 바탕으로 춘추오패를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제나라의 제환공, 진(晉)나라의 진문공, 초나라의 초장왕, 오나라의 합려와 부차, 월나라의 구천. 여기서 오나라에는 두 부자인 합려와 부차를 거론했는데, 사실상 두 부자는 오나라의 패권주의를 달성하는데 있어 연장선에 있는 인물이므로 하나로 묶어도 될 듯하다. 이렇게 정하고 보면 중국의 패권이 이동하는 방향이 매우 이채롭다. 제나라와 진나라는 전형적인 북방 문화권, 화하 문화권인데 반해 초나라와 오나라 월나라는 남쪽 변방에 위치한 국가이기 때문이다. 즉 춘추시대의 패권전쟁은 북쪽에서 남쪽으로 이전됐다는 것이 특징이다. 또한 북방에서 남방으로 패권이 이전되면서, 기존에 유지하고 있던 봉건제의 질서는 더더욱 무너져갔다. 단적인 예로 제나라와 진나라가 패자를 자처할 당시에는 군주들의 호칭이 공이었지만, 남방의 초나라를 필두로 오나라와 월나라의 군주들은 하나같이 왕을 자처하고 있었다. 원래 군주들의 호칭은 천자인 주나라 황제만이 부여할 수 있는 특권이다. 그러나 초나라가 패자를 자처할 때부터 힘 있는 국가들은 자신들을 왕으로 선포하기 시작했으며, 이는 봉건질서의 붕괴를 상징하는 것이었다. 

 또한 제환공과 진문공이 패자에 있던 시대에는 기존의 봉건질서를 무조건적으로 무시하지 않았다. 패권국은 힘이 있었지만 약소국과 외교를 할 때 공정한 입장에서 외교를 진행하는 등, 나름의 봉건질서와 규율을 지키려고 노력했으며, 명분만 남은 주나라 황실을 우대하려고 나름 노력했었다. 그러나 패권이 남방으로 이전되면서, 이런 봉건적 질서와 규율은 급격하게 파괴되기 시작했다. 봉건질서가 무너진 전국시대가 도래한 배경에는 이런 사건들이 있었던 것이다. 즉 춘추시대를 정리해보자면 봉건적 이상 질서를 지키고자 하는 이상과 현실적 패권주의에 입각한 정치활동이 공존하는 시대였다. 군주들은 이런 이상과 현실 속에서 정치를 했으며, 지식인층도 이런 이상과 현실을 대표하는 학파를 만들기 시작했다. 봉건제를 옹호하고 과거의 예의를 바로잡으며 질서를 구축하고자 했던 학파는 유가 학파였고, 현실을 앞세우고 대표했던 학파는 병가와 법가 학파였다. 이렇듯 춘추시대에는 정치와 사회를 둘러싸고 이상과 현실의 갈등과 조화가 나타났던 시대였다. 그러나 책을 읽으며 느꼈던 것은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이상을 강조하던 유가 학파와 봉건주의 옹호자들보다 현실을 강조하던 병가, 법가 학파와 패권주의 옹호자들이 강세를 보였다는 점이다. 실제로 춘추시대가 흐르면 흐를수록 봉건주의 질서보다 패권주의가 점점 강해졌으며 이후 전국시대는 현실 중심적 철학이 대세를 이뤘고, 군주들 역시 패권주의로 국가를 다스려왔다.    

  《국어》를 읽으며 이 책의 저자는 분명 북방 문화권 출신이 아닐까 생각해봤다. 각 나라별로 역사를 기록했다고 하지만 북방에 위치한 국가들의 내용이 남방에 위치한 국가들의 내용보다 훨씬 많다. 특히 진(晉)나라의 기록은 책의 1/3 정도의 분량을 차지하고, 이를 가지고 몇몇 사람들은 저자가 진나라 출신이라고 주장하는데, 이는 너무 나간 주장 같다. 다만 저자는 분명 기존의 전통적인 중화 문화권의 영역인 북방 문화권 출신이라서 북방 출신의 국가 기록을 상세하게 기록했을 것이다. 나는 《국어》를 《춘추좌전》을 읽으며 부교재처럼 참고했다. 《춘추좌전》은 《국어》에 비해 디테일하고 자세한 부분이 있겠지만, 노나라의 정치사를 중심으로 여러 나라의 사건들을 시간대별로 기록하다 보니, 주변 국가에서 일어났던 사건들을 체계적으로 파악하기가 어려웠다. 뭐랄까 좀 산만한 전개라고 해야 하나. 반면 《국어》는 특정 국가의 입장으로 역사를 기록하는 것이 아니라 챕터를 나라 순으로 편집하고, 그에 맞춰 사건들을 기록하고 있어서 각국의 역사를 살펴보는 것에는 훨씬 가독성이 뛰어났다. 

 또한 문체도 《국어》가 《춘추좌전》에 비해 훨씬 평이하고 가독성이 좋았다. 《춘추좌전》의 문체는 분석적이고 논리적이지만 현학적인 부분도 있고, 이념적인 부분도 있었지만 《국어》는 《춘추좌전》에 비해 훨씬 명료하고 단순하게 서술됐다. 그래서 읽는데 부담도 없었다. 그렇기에 과거 사람들은 《국어》를 두고 《춘추좌전》의 보조자료인 《춘추외전》이라고 평하기도 하였다. 사실 우리나라에서는 《국어》는 크게 알려진 고전이 아니다. 《춘추좌전》과 전국시대를 다룬 역사서 《전국책》에 비해 《국어》는 아무래도 포스가 떨어지는 고전이다. 그러나 내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춘추시대에 대해 가장 빠르고 쉽게 배울 수 있는 고전을 꼽으라면 《사기》도 아닌, 《춘추좌전》도 아닌, 《국어》를 꼽고 싶다. 사람들은 흔히 춘추전국 시대를 이야기할 때 《사기》를 대표적인 역사서로 꼽는다. 물론 《사기》는 매우 뛰어난 고전이다. 그러나 《사기》는 춘추시대에 기록된 것이 아니라 전한 시대에 기록된 문헌이다. 따라서 《사기》는 춘추시대를 다룬 1차 문헌이 아니라 2차 문헌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그 시대를 알아보려면 그 시대와 가장 가까운 시기에 나온 1차 문헌을 확인해야 한다. 《국어》는 명실공히 춘추시대를 다루는 1차 문헌이며, 사마천 역시 《사기》를 저술할 때, 《국어》을 참고했다. 이런 중요성을 가진 고전인데 정작 우리나라에서는 홀대받는 현실이 매우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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