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한우의 태종실록 : 재위 6년 - 새로운 해석, 예리한 통찰 이한우의 태종실록 6
이한우 옮김 / 21세기북스 / 2017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말 많고 탈많은 재위 6년의 《태종실록》을 읽으며, 나는 새삼 약소국의 입장을 생각했다. 이해에 태종은 명나라 때문에 체면을 심하게 구긴다. 불같은 성질을 가지고 카리스마가 뛰어난 태종이더라도, 명나라에 비춰보면 그저 변방 약소국의 '패왕'에 불과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태종은 명을 상대로 국방을 넓히기 위해 최대한 노력했다. 여진 세력을 쉽게 명에게 내주지 않으려고 노력했으며, 명의 사신이 갑질하는 것에 대해서 부당하다고 당당하게 외쳤다. 물론 자신의 의견을 당당하게 이야기함과 동시에, 뒤로는 명의 사신의 기분을 풀어주려고도 노력했다. 감정적인 그였으나, 역시 냉혹한 국제관계 앞에서는 이성적인 두뇌로 외교에 임한 것이다. 이를 보며 생각했다. 과연 정도전의 말대로 태조 시기에 북벌을 했으면 어땠을까. 두 가지 의문이 있다. 하나는 신생국가 조선이 과연 전쟁을 감당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과 또 하나는 과연 조선이 요동으로 침략하면, 명에서 싸우던 연왕 세력과 건문제가 연합할 가능성도 있지 않았을까. 설사 요동을 잠시 차지하더라도, 훗날 중국을 통일한 연왕 주치에 의해 역풍을 맞이할 가능성도 농후했다. 태종은 젊은 시절 명을 방문한 경험이 있으며, 그때 명의 민심과 명의 문화 수준, 국방을 세심하게 관찰했을 것이다. 거기다 훗날의 영락제인 연왕 주치도 직접 만나보지 않았던가. 아마 태종은 이러한 경험을 바탕에 두고 '명과 싸웠다간 도리어 조선이 손해'라는 것을 머릿속으로 계산했을 것이다.

 태종 이방원과 영락제 주치는 매우 비슷한 성격을 가졌다. 차이라면 태종은 조선의 왕이었고, 영락제는 명의 황제였다. 애초에 물려받은 기반 자체가 달랐으며, 영락제는 명나라의 초절정기를 열었던 전쟁 군주였다. 그랬기에 태종은 자신의 성격을 죽여야만 했다. 만약 태종이 조선 중기의 군주였다면 어땠을까, 역사적으로 우리나라가 국방이 강했을 때에는 늘 중원이 분열되었다. 만약 태종이 명청 교체기의 분열된 중원 시대에 조선의 군주였다면 분명 조선을 한층 더 팽창시켰을 것이다. 실제로 실록 기록을 살펴보면 태종은 그럴 공산이 다분한 군주다. 그러나 이방원이 집권하던 시절에는 그 누구보다 강력한 황제가 하나로 통일한 중원을 차지하고 있었으며, 심지어 그는 중원에 만족하지 않았던 군주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명과의 싸움에서는 어쩔 수 없이 물러나야만 했다. 어쩔 수 없는 냉혹한 국제 현실 속에서, 그는 조선의 자존을 지키기 위해 노력했다. 약소국의 자존을 지키려는 그의 노력이 애처로워 보였다. 그리고 그 시대의 냉혹한 국제정세 속에서 오늘날의 대한민국도 읽을 수 있었다. 오늘날 우리나라도 강대국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으니까

 괴테는 권력을 두고 이런 말을 남겼다.
'지배하는 것을 배우는 것은 쉽고, 통치하는 것을 배우는 것은 어렵다.' 이를 내 식으로 풀이해보자면 그렇다. 지배라는 것은 그저 권력을 통해 타인을 부리는 것만을 뜻한다. 통치라는 것은 자신의 권력에 책임을 지고 권력을 사용하는 것을 뜻한다. 그렇기에 지배는 쉽다. 그저 타인을 힘으로 억눌러 내 뜻대로 부리면 그만이다. 그러나 통치는 어렵다. 타인을 이끌며 내가 책임을 져야 하기 때문이다. 태종 이방원은 얼핏 보면 전자에 가깝다. 그의 권력은 그저 지배만이 전부인 것 같다. 물론 그의 권력에는 지배에 대한 속성도 내재한다. 근대 이전의 권력은 태생적으로 '지배의 속성'을 가질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의 권력이 지배만을 지향한 것은 아니다. 그의 권력은 지배와 더불어 통치의 속성도 내재하고 있었다. 그는 숱한 정쟁 속에서도 민본을 잊지 않았다. 신하들과 싸우는 도중에도 백성을 생각하는 대목이 많았으며, 일탈이라 할 수 있는 사냥을 하면서도, 백성들에게 민폐를 끼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강한 권력을 가졌고, 충분히 백성들을 마음대로 지배할 수 있는 위치에 있는 그였지만, 늘 백성을 무서워하고 조심히 생각했다.

 현실적인 정쟁에도 능하면서, 민생 안정을 최우선으로 생각하는 지도자. 가장 이상적인 지도자의 모습이 아닐까 생각한다. 기득권 세력들에게는 정쟁에 능숙한 지도자이기에 매우 부담스럽겠지만, 일반 백성들의 입장에서는 민생만을 우선적으로 생각하는 지도자이기에 이보다 더 좋은 지도자가 없을 것이다. 내가 읽었던 태종은 이에 정확하게 부합하는 군주였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이한우의 태종실록 : 재위 5년 - 새로운 해석, 예리한 통찰 이한우의 태종실록 5
이한우 옮김 / 21세기북스 / 2017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르 봉의 《군중심리》는 심리학 책이지만, 지도자가 갖춰야 할 덕목에 대해서도 심도 있게 분석하고 있다. 오죽했으면 이 책을 히틀러가 애독하여 도움을 받았다는 이야기가 있겠는가. 르 봉은 이 책에서 지도자는 군중을 이끌 수 있는 신념과 위엄이 있어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모두 태종이 가지고 있는 부분이다. 태종은 정치적으로 민생안정이라는 목표를 왕권 강화로 이룩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래서 그의 신념은 왕권 강화였으며, 그 왕권을 뒷받침하기 위해 위엄을 세웠던 군주였다. 또한 르 봉은 지도자란 논리와 이성적인 측면보다 과장과 감정적인 측면으로 군중을 사로잡는다 했는데, 태종 역시 마찬가지다. 태종은 노회한 다수의 기득권 신료들을 제압하는데 있어, 이성과 논리적인 측면만을 강조한 것은 아니다. 때로는 이성적인 측면으로 신료들을 설득하고 굴복시켰지만, 때로는 터무니없는 말장난이나, 우격다짐과 같은, 감정적인 측면에 호소하여 신료들을 움직였었다. 흔히 책상물림이나 서생들은 지도자는 늘 지성적이고, 이성적이어야 한다는 고정관념이 있는데, 이것은 그 시대 유학자들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태종은 그러한 이성의 영역과 감성의 영역을 섞어서 신료들을 다뤄왔다. 사실 사람을 감동시키고 사람의 진심을 이끌어내는 것에는 이성적인 측면보다 감성적인 측면으로 호소하는 것이 더욱 효과적이다. 르 봉은  《군중심리》에서 이를 강조했고, 태종도 이를 잘 알고 있었다.

 재위 5년에서 돋보이는 태종의 모습은 바로 이성과 감성의 변덕이다. 여러 상소문 중 형벌이나 범죄, 그리고 토지제도와, 군사에 대한 글을 볼 때 그의 두뇌는 한없이 이성적으로 바뀌었다. 복잡한 탄핵 사건을 보면 문서 그대로를 믿기보다, 자신이 풀어놓은 정보통과 비교하여 치밀하게 분석한 뒤, 결과가 관련 기관의 내용과 상이하면 끝까지 물고 늘어져서 정확한 보고를 요망한다. 더불어 국경과 관련된 일에도 그는 이성을 유지한다. 여진을 두고 소리 없이 명과 싸울 때, 그는 시시각각으로 다른 국제정세를 이성적으로 분석하며, 명과의 외교전에 임한다. 우리는 늘 조선시대를 사대의 나라, 명에게 찍 소리도 못 낸 조공국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다. 다른 시대는 몰라도, 태종의 시대에는 여진의 통치권을 두고 명과 소리 없는 외교전을 팽팽하게 펼쳤다. 물론 이 결과는 물자와 영토가 빵빵하고 국제적으로도 위엄이 있는 명이 이겼지만, 어쨌든 조선은 쉽게 여진을 포기하지 않았다. 태종이라는 군주는 명을 무조건적으로 받들지도 않았고, 나름 할 수 있는 한도 내에서 최선을 다하여 명과 맞선 셈이다. 이러한 태종의 북진정책을 이어받아, 세종 대에는 여진을 개척해 국토를 넓혀 현재의 국경을 유지하게 됐다. 아마 태종 시대에 명의 황제가 영락제가 아니었다면, 태종 대에 여진의 통제권을 확보하고 국경을 북쪽으로 더 넓히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이렇듯 태종은 국가 중요 사안과 국방에 대한 부분에 있어서는 철저하게 이성적으로 판단했다.

 그럼 그가 감성적으로 변할 때는 언제였나. 먼저 꼽을 수 있는 것은 2월이다. 태종은 궁 밖으로 나갈 때마다, 어떤 핑계를 대서라도 사냥을 했던 군주다. 사냥을 접할 때에는 거의 탐닉하다시피 집중했는데, 이전할 한양 수도를 둘러본다는 핑계로 2월 한 달을 사냥에 매진한다. 그의 사냥에 대한 열정이 돋보이는 부분이다. 그의 감성은 여가를 즐길 때만 보인 것은 아니다. 대표적으로 민생을 걱정할 때에도 나타나는데, 가뭄으로 시달리는 백성들을 보며 그는 한없이 감정적으로 변했다. 오죽했으면 한 계절이 끝나도록 조회를 보지 않아서 대간들이 소를 올릴 정도였으니, 얼마나 예민하게 신경 썼는지 짐작할 수 있겠다. 가뭄도 심하고 덮친 격으로 재해까지 심했던 한 해였다. 그래서 태종은 지방에 구휼을 하는데 각고의 노력을 다 했다. 그뿐 아니라, 매년 여름만 되면 옥에 있는 죄수들이 더위에 피해를 입을까봐 석방하거나 신경을 쓰라는 내용이 많은데, 이런 부분으로 미뤄봐도 그가 아주 인간적이고 감정적인 인물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물론 이런 감정적인 모습은 종친들과 공신들이 죄를 지었을 때 그들을 과도하게 감싸주는 것으로도 확인할 수 있는데, 이런 모습에서 완벽해 보이는 그도 결점이 있는 한 인간이라는 것을 느꼈다. 

 이렇듯 태종은 이성과 감성, 냉정과 열정을 야누스처럼 넘나들며, 통치했던 군주였다. 차가울 때에는 그 누구보다 차가웠으며, 뜨거울 때에는 그 누구보다 뜨거웠다. 이성과 감성에 충실했던 태종은, 어떨 때 이성적이어야 하는지, 어떨 때 감성적이어야 하는지를 명확하게 알고 있었다. 간혹 어리석은 지도자를 보면 이성적이어야 할 때 감성적으로 대응하고, 감성에 호소해야 할 때 이성적으로 판단하려 한다. 흔히 볼 수 있는 지도자의 결점인데, 태종은 그렇지 않다. 물론 그 역시도 이성과 감성을 잘 못 적용한 부분도 있지만, 그래도 대체적으로 중요한 사안에 있어서는 이성과 감성을 적절하게 컨트롤하였다. 그래서 태종은 일을 잘 아는 군주였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이한우의 태종실록 : 재위 4년 - 새로운 해석, 예리한 통찰 이한우의 태종실록 4
이한우 옮김 / 21세기북스 / 2017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집권 4년 차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은 이거이 부자 숙청 사건과 한양 도읍 이전 결정이다. 태종은 한양을 탐탁지 않게 여겼다. 왜냐하면 자신의 정적이었던 정도전의 주도로 선택된 수도였고, 1차 왕자의 난이 일어난 장소라 꺼림칙했던 것이다. 그래서 고려 왕조가 도읍했던 개경으로 다시 도읍을 옮기지만 이것 역시도 임시방편에 불과했다. 전 왕조의 수도였던 곳에 새 왕조의 도읍을 두는 것도 사실 마음에 쓰이기 때문이다. 이렇듯 새로운 도읍은 피를 너무 봐서 싫고, 기존의 도읍은 전 왕조가 몰락한 곳이라 있고 싶지 않았다. 그런 그에게 하륜은 무악 즉 지금의 신촌 일대로 도읍을 옮길 것을 강력하게 주장했다.

도읍을 바꾸는 것은 나라에 있어서 굉장히 중요한 문제다. 도읍을 바꾼다는 것은 어떻게 보자면 정치적인 판을 새롭게 갈아엎겠다는 것과 같다. 그렇기에 기존의 세력들은 연고가 있고 기득권이 많은 현재의 수도를 고집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태종은 이런 신료들의 속내를 훤히 읽고 도읍을 옮기기로 결심한다. 그럼 선택지는 두 가지로 좁혀진다. 무악이냐 한양이냐. 눈치 빠른 신료들은 태종의 브레인이라 할 수 있는 하륜의 의견에 동조하며 무악으로 옮길 것을 주장한다. 태종 역시도 무악을 여러 번 방문하면서 도읍 선택에 신중에 신중을 가한다.

한양이 불가하다는 이유 중에서 가장 핵심은 바로 물이었다. 한양 땅에는 큰 수로가 없다는 점이 문제로 제기됐기 때문이다. 풍수를 볼 때, 물과 산을 모두 고려해야 하는데, 산보다도 물의 형세가 더 중요하다는 내용도 실록에 있었다. 여기까지 책을 읽어보면 누가 뭐래도 도읍은 '무악'이겠구나 싶다. 무악은 물에 대한 문제도 없으며 뒤에는 안산이 위치하고 있으니 진산으로 삼기에도 무방하다. 거기다 한양 땅은 태종에게 있어 불쾌한 기억밖에 없는 데다, 자신의 심복이라 할 수 있는 하륜이 그토록 무악을 청하지 않는가? 이쯤 되면 태종이 못 이기는 척 무악으로 도읍을 결정할 법도 하다.

재미있는 것은 태상왕 이성계의 반응이다. 태상왕은 태종에게 한양 천도의 당위성을 간접적으로 설파하고, 한양으로 갈 것을 완곡하게 부탁한다. 효자인 태종은 이도 신경이 쓰였을 것이다. 어쨌든 한양은 자기는 싫어도, 조선 왕조의 입장으로 살피면 국가가 시작된 장소였으니, 한양이 가지는 정치적 상징성도 마음에 걸렸을 것이다. 이쯤 되면 머리 좋은 태종이라도 소위 '결정장애'가 올 수밖에 없다. 복잡한 상황에서 태종은 엉뚱한 것에서 해답을 찾는다. 그것은 바로 동전 던지기를 통해 도읍을 정하는 것이다. 개경과 무악 그리고 한양을 두고 동전 던지기를 해서 가장 좋은 결과가 나온 것에 '군말 없이' 따르기로 한 것이다.

이렇게 해야만, 신료들에게도 명분이 서고, 은근히 한양을 기대하는 아버지 이성계에게도 변명할 구색이 갖춰지기 때문이다. 조선왕조의 유구한 수도 한양은 그렇게 태종의 동전 던지기로 결정된 수도다. 태상왕은 이에 매우 기뻐하였다. 태종은 결과를 수용하면서도 하륜의 눈치가 보였는지, '무악 일대에는 훗날 도읍이 될 땅이다.'라고 위로해준다. 그래서일까, 오늘날의 신촌 일대는 젊은 대학생들의 도읍(?)이 됐다.

한양으로 도읍을 결정했으나 문제는 여전히 남아있다. 앞서 말한 수로가 없는 점과 경복궁에 대한 부분이다. 훗날의 이야기지만 태종은 이 두 가지를 명확하게 해결한다. 경복궁을 놔두고 창덕궁을 만들어, 동궐과 서궐 양궐 체계를 갖춘 것. 그리고 청계천 공사를 통해 인공 수로를 만든 것이다. 한양 주변에 자연적인 수로가 없다면 인공적인 수로를 만들면 문제가 해결된다. 태종은 이를 주장하고 강력하게 밀어붙였다. 그 결과가 바로 인공수로 청계천인 것이다. 청계천 공사는 태종의 업적 중 가장 뛰어난 업적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이로 인해 조선 말기까지 한양 백성들은 물을 편하게 사용할 수 있었으니, 태종의 애민사상을 엿볼 수 있는 대표적인 업적이다. 결정을 했으면 가타부타 뒤를 돌아보지 않고, 그 결정에 뒤따르는 문제들을 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해결하는 것. 그렇게 하여 문제 되는 일을 조속히 해결하는 것. 이것이 바로 태종식 정치 스타일이다. 한양 도읍 선택과 수로에 관련한 문제, 그리고 청계천 공사는 이러한 태종의 강단 있는 정치 스타일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사건이다.

전 세계에서 우리나라 서울과 같은 도시는 사실 쉽게 찾아볼 수가 없다. 큰 강이 흐르며, 산세가 도심 주변을 따뜻하게 감싸는 도시. 다른 나라의 궁궐은 도심 외부에 위치한 것이 일반적이지만, 우리나라의 궁궐은 도심의 노른자에 위치하고 있다. 그만큼 한양의 위치는 탁월하다. 이러한 한양을 수도로 선택하기 위해 우리 선조들은 수많은 고민과, 인문적 토론을 거쳐왔다. 오늘날의 기준으로 봐도 서울이라는 도시는 명당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서울은 조선시대의 한양에서 비롯한 것이니, 새삼 한양을 도읍으로 세운 태종에게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이한우의 태종실록 : 재위 3년 - 새로운 해석, 예리한 통찰 이한우의 태종실록 3
이한우 옮김 / 21세기북스 / 2017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재위 3년 차가 되자 태종의 정권도 서서히 안정됐다. 3년 차에 들어서자 기본적인 조선의 골격은 모두 정비했다. 문관과 무관을 정비했고 중앙과 지방행정을 대략적으로 정비했다. 대외적으로는 새롭게 들어선 명나라 정부로부터 공식적인 인증도 받았다. 아버지와의 관계도 풀었다. 따라서 태종의 힘은 그 어느 때보다도 막강했다. 재위 1년 차와 2년 차에서는 공신들을 처벌하지 않았는데, 재위 3년 차 중반이 되자 슬슬 공신들을 처벌하기 시작했다. 태종은 지금까지 공신들이 저질러놨던 비행들을 빠트리지 않고 가지고 있었다. 언젠가 이것들은 터질 운명이었다.

 재위 3년까지 살펴본 바, '태종의 정치 스타일'을 대충 알 것 같았다. 앞서 고찰했듯 태종은 여러 가지 일을 복합적으로 처리하기보다, 지금 처리할 수 있는 일부터 집중하여 처리했다. 재위 1년에 중앙정부의 관직과 문반들을 정비했고, 재위 2년에 무관직과 국방에 관한 부분을 정비했다. 재위 3년에는 지방행정을 손봤다. 재위 1년에는 사관들과 주로 싸웠다. 재위 2년과 3년에는 대간들(언관)과 피 터지게 싸웠다. 싸움의 이유는 바로 왕권이었다. 성리학적 시스템의 국가는 근본적으로 신권을 지향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태종은 이러한 제도를 순순히 용납하지 않았고, 그러한 행동이 바로 대간들과의 싸움이었다. 따라서 왕권을 지향하기 위해서는 근본적으로 대간들과 싸울 수밖에 없었다. 

 태종은 쓸데없는 것으로 싸우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주로 정치적 판단권을 확보하기 위해 대간들과 싸웠다. 그리고 이러한 싸움이 있더라도, 대간들을 최대한 배려해 주려고 나름 노력했다. 그래서일까? 대간들은 태종에게 억눌리긴 했지만 자신들의 의견을 꼿꼿하게 주장했다. 사실 태종이 바람직하게 생각한 체제는 이런 것 같다. 사간원과 사헌부 그리고 의정부가 서로 상호 견제를 통하여 견제하는 것, 사간원과 사헌부는 의정부의 집정 대신과 공신들의 비리를 밝히고, 의정부의 정승들은 사간원과 사헌부의 권한이 너무 강하지 않도록 조절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즉 오늘날의 삼권분립처럼 권력 기관 간의 상호 견제를 추구하였던 것 같다. 중요한 점은 그 상호 견제에서 왕은 비교적 자유롭고 초월적인 권위를 지녀야 한다는 것이 태종의 입장이다. 태종은 군주 중심의 막강한 권력을 추구했지만, 그 권력을 최대한 공적으로 사용하려고 노력했다.

 특히 눈길이 갔던 부분은 바로 조운선 34척 침몰 사건이다. 이는 오늘날의 세월호 사건과 비슷하다. 태종은 이 급보를 받자마자 이 모든 것이 자신의 책임이라고 책망했고, 인명피해가 얼마냐고 물었다. 그리고 이에 대한 후속 조치를 논의했는데, 하륜과 사적으로 고민을 나눴으며, 대신들을 불러서 경상도의 세금을 어떻게 운반할 것인지를 깊이 있게 토론했다. 그리고 그런 토의 결과, 경상도의 조운을 폐지하고 육상으로 운송할 것을 명했다. 이 문제를 실질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을 다 한 셈이다. 재위 3년 말에 경상도에서 육상 운송이 힘들다고 조운으로 바꿔달라 주청이 왔는데, 태종은 불허했다. 여전히 태종은 조운선 침몰을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만약 태종이 오늘날 세월호 사건을 봤다면 무슨 생각이 들까? 구할 수 있었던 인명들을 그렇게 보내버린 정부의 조치를 보고 분명 혀를 찼을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이한우의 태종실록 : 재위 2년 - 새로운 해석, 예리한 통찰 이한우의 태종실록 2
이한우 옮김 / 21세기북스 / 2017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재위 2년의 주제는 국방 문제다. 중국 명나라의 상황도 상황이고 후반부에는 조사위의 난이 터졌기 때문에 주기적으로 군사와 군대에 관한 이야기가 주를 이뤘다. 놀랐던 점 하나는 조선 초기 태종의 시대는 국방을 매우 중요시했다는 점이다. 이는 조선 중기 문치주의에 빠진 것과는 매우 대조적이다. 조선 중기 임진전쟁이 일어나기 전 사림들은 당파에 젖어 국방의 일을 논하지 않았다. 쳐들어오니 안 오니를 가지고 싸우고 물어뜯었다. 태종의 시대는 다르다. 명나라가 전쟁을 하고 있지만 혹에 하나라도 문제가 발생할 수 있으니 국방을 철저히 하자는 입장이었다. 태종도 그랬고, 이 시대의 신료들도 그렇게 생각했다. 조선 중기의 신료들처럼 당파싸움에 열을 올려 국가 문제의 본질을 흐리지 않았던 것이다. 상호 견제하던 사간원과 사헌부도 군대 문제에 있어서는 의견을 모아 상소했다. 만약 태종이 조선 중기의 조정을 봤다면 무사 안일주의에 혀를 찼을 것이다. 이는 오늘날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에 따르면 군주는 군대에 관해 빠삭하게 알아야 하며, 국방 문제를 소홀히 하면 안 된다고 주장했다. 상대적인 리더십을 주장한 고전 《장단경》에서도 마지막 부분에 병법의 내용을 다루고 있었다. 태종은 이를 잘 알고 있었다. 태종은 문치를 숭상하는 성리학을 정치의 이념으로 내세웠지만, 국방과 군사 일을 절대 소홀히 하지 않았다. 봉건시대 군주의 권력은 칼끝에서 나왔다. 군사가 있어야, 정부를 유지할 수 있었고, 군사가 있어야 백성을 외세로부터 지킬 수 있다. 두 번의 왕자의 난의 성공, 그리고 조사위난의 제압도 군대가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따라서 군대는 봉건시대에 정권 유지에 필수적인 요소였다. 그럼 오늘날의 군대는 어떤 의미를 지닐까? 오늘날 권력은 칼끝이 아닌 시민들의 민주적인 결정에서 나온다. 그럼 군대는 필요 없는 것일까? 아니다. 군대는 국민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서 필요하고, 우리 국민의 안위를 지키기 위해서라도 필요하다. 진정한 자유와 안위는 튼튼한 안보를 바탕으로 해야 이뤄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예나 지금이나 국방은 늘 중요하다. 

 재위 2년의 핵심은 아버지와 아들의 갈등이다. 이는 '조사위의 난'으로 터져버렸다. 태종과 태상왕의 갈등을 보면서 나는 나와 아버지의 갈등을 떠올렸다. 밝히기 부끄럽지만 나도 거의 10년간 아버지와 반목해왔다. 물론 아버지가 잘못한 점이 명백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태도도 잘 한 것은 없었다. 아버지는 나에게 늘 자랑스러운 분이셨었다. 공부도 잘 하셨고, 당시 대한민국에서 가장 잘 나가는 학교에 학과를 나오셨다. 어려운 환경 속에서 이뤄낸 꽃이라 더더욱 귀감으로 여겼다. 그런데 어떤 일을 계기로 우리 부자는 틀어졌다. 존경한 만큼 실망도 컸다. 나는 아버지를 이해하려고 하지 않았고, 아버지도 그랬다. 부자 간에 평행선을 달렸다. 물론 지금은 아니다. 아버지에게 잘못이 있더라도, 내 태도도 올바르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먼저 아버지께 용서를 구했다. 그러자 아버지도 나에게 용서를 구했다. 기나긴 반목을 끝낸 것이다. 그 결과 우리 부자는 더없이 돈독해졌다.

 태종은 태상왕에게 매번 무시를 당했다. 무시를 당해도 공경을 계속했다. 그러다 태상왕이 조금이라도 인정해주면 날아갈 것 같이 기뻐했다. 조사위의 난이 끝나고 개경으로 온 태상왕에게 태종은 매일같이 문안을 갔다. 공경을 다 하고, 지금까지의 갈등을 풀어보려고 노력한 것이다. 그러한 행위가 가식인 것일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어쩔 수 없는 상황 때문에 부자가 반목했지만, 태종은 늘 노력했다. 아버지의 진노를 풀기 위해 최선을 다 했다. 무시당하더라도 아버지를 생각했다. 따지고 보면 조선 역대 임금 중에서 태종만큼 효도에 힘쓴 왕도 드물 것이다. 실록의 기록은 이를 증명한다. 물론 그도 답답했을 것이다. 세자의 자리는 원래 내 것인데, 왜 아무런 공도 없는 동생이 올라야 하느냐고 따지고 싶었을 것이다. 자신의 행위는 정당하다고 끝까지 강조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본심을 죽이고 아버지와 화해를 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의 이런 눈물겨운 노력을 보면서 나는 나의 오만했던 지난날이 더더욱 부끄러웠다.  

 주말, 책을 다 읽고 아버지께 전화했다. '시장에서 국수 한 그릇 먹어요.' 아버지는 흔쾌히 나왔다. 우리는 국수를 먹으며 좋았던 추억만을 회고했다. 나는 아버지의 큰 손을 조용히 잡았다. 어린 시절 나를 데리고 전국의 명산을 기행 시켜준 아버지, 공부를 가르쳐 준 아버지, 내가 좋아하는 햄버거를 밤늦게라도 나가셔서 사 왔던 아버지... 생각해보니 아버지는 늘 나를 생각하고 계셨다. 아마 이는 나와 대립했던 기간에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세상 대부분의 부모는 자식을 걱정한다. 의가 틀어지고 사이가 안 좋더라도, 자식이 늘 눈에 밟히는 법이다. 공자도 《논어》에서 그러지 않았는가? 부모는 늘 자식의 안위만을 걱정한다고 태상왕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댓글(1)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윌리엄백작 2020-08-23 10: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댓글을 읽고 더많이 배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