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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시다 쇼인 시대를 반역하다 - 일본 근현대 정신의 뿌리, 요시다 쇼인과 쇼카손주쿠의 학생들
김세진 지음 / 호밀밭 / 2018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최근 블로그 이웃님이 번역하고 있는 일본 정치 사극을 시청하는데, 그 사극의 이름은 '도쿠가와 요시노부'다. 드라마는 일본의 에도 막부 말기의 쇼군 요시노부를 주인공으로 다루고 있는데, 나는 이 사극을 통해 일본의 근대화가 어떻게 이뤄졌는지에 대한 배경을 가장 중점적으로 염두에 두며 시청하고 있다. 도쿠가와 요시노부라는 제목에서 알 수 있듯, 사극은 철저하게 도쿠가와 가문을 중심으로 풀어가고 있었다. 일반적인 인식으로는 에도 막부 말기 시대의 도쿠가와 체제는 시대에 적응하지 못한 행정과 비리 때문에 낡은 체제로 인식하지만, 이렇게 드라마를 통해 도쿠가와 가문의 시각으로 에도 막부 말기를 들여다보니, 낡았다는 막부 세력도 서구 열강에 대한 대응과 체제 개혁에 신경 쓰고 힘을 기울이고 있었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렇게 에도 막부 말기 시대를 사극으로 시청하다 보니, 일본의 근대화에 대하여 더욱 깊은 관심이 갔다. 그래서 나름 관련 인물들에 대한 저작을 읽고, 에도 막부와 메이지 유신에 대한 책을 조금씩 읽어나갔는데, 메이지 유신을 깊이 있게 추적하던 과정에서 나는 요시다 쇼인을 만나게 됐고, 《요시다 쇼인 시대를 반역하다》라는 책을 통해 그의 인생에 대해서 상세하게 알아볼 수 있었다.
요시다 쇼인은 일본의 서쪽인 조슈 번 출신의 사무라이 출신으로, 그 가문은 대대로 조슈 번의 병법(군사학)을 가르치는 것과 연관된 집안이었다. 조슈 번의 번주는 대대로 모리 가문이 맡았는데, 이 모리 가문은 도쿠가와 에도 막부와 역사적으로 악연이 있는 사이였다. 도쿠가와 막부가 성립되기 이전 천하를 둘로 나눠 싸운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동군의 총대장은 도쿠가와 이에야스였고, 서군의 총대장은 모리 테루모토였다. 흔히 서군의 상징적인 인물을 이시다 미츠나리로 여기긴 하지만, 직급으로 따지자면 서군의 총대장은 모리 가문이 맡고 있었었다. 그런 세키가하라 대전에서 서군은 대패를 하였고, 승기를 탄 이에야스는 에도 즉 지금의 도쿄에 막부를 열고 일본 열도의 실질적인 통치자로 군림했다. 정치적, 군사적으로 도쿠가와에 패배한 모리 가문은 영지를 몰수당하고, 조슈 번으로 쫓겨가 그곳을 영지로 삼아 대대로 다스렸는데, 요시다 쇼인은 그런 조슈의 출신이었기에 기본적으로 막부에 대한 반감이 높을 수밖에 없었다.
19세기 서구 열강이 힘을 앞세워 개항을 하기 시작하면서, 막부의 권위는 땅에 떨어지기 시작했다. 조슈 번을 비롯하여 서쪽의 영주들은 흔들리는 막부의 모습을 보고 목소리에 힘을 주기 시작했는데, 요시다 쇼인은 그런 시기에, 태어나 사상가로 활동한 인물이었다. 어릴 때부터 영명했던 그는 조슈의 번주와 관료들에게 병법을 가르쳤으며, 허가를 받고 남쪽 규슈 지방을 유람하여 견문을 넓혔다. 그 뒤 에도로 가는 번의 행렬에 참가하여 에도에서 견문을 쌓고, 무단으로 동북부 지역을 여행하며 또다시 견문을 쌓아나갔다. 무단 여행 때문에 쇼인은 신분을 박탈당하고 제제가 가해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주변의 사람들을 교육하고 스스로의 학문을 연마하는데 게을리하지 않았다. 이후 쇼인은 쇼카손주쿠라는 학교를 세워, 이토 히로부미를 필두로 일본의 근대화를 이끈 정치인들을 수제자로 두고 교육시켰다. 막부 체제에 대한 반골 기질이 강한 요시다 쇼인은 결국 막부의 실권자 이이 나오스케에게 찍혀 안세이 대옥에 연루되어 30살의 꽃다운 나이로 처형되고 만다. 그는 죽었지만, 그의 사상은 제자들에게 계승되어, 메이지 유신을 토대로 한 근대 일본을 이룩하는데 근간이 됐다.
사상의 힘이란 굉장히 무서운 법이다. 과거 일본의 제국주의를 가만히 뜯어보면, 이는 결국 요시다 쇼인이 주장하던 사상을 그대로 현실화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쇼인은 일본이 강해지려면 다케시마 즉 울릉도 일대를 발판으로 삼아 한반도를 점령해야만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존왕양이(천왕을 받들고 서구를 배격하는 사상)의 대표적인 사상가였다. 존왕 사상은 일본 제국주의와 결합하여, 천황의 신격화를 가져왔고, 식민지의 사람들에게 무분별한 신사 참배를 강요했다. 양이 사상은 문자 그대로 서구를 배척하는 것이 아니라, 서구의 우수한 기술력은 배워서 서구의 압제로부터 벗어나자는 뜻이었다. 즉 우리의 동도서기, 중국의 중체서용과 비슷한 맥락이다. 이런 양이의 사상은 후학들에 의해 비판적으로 계승되어서, 근대 일본을 이룩하는 데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요시다 쇼인의 국수주의적 제국주의적 사상은 근대뿐만이 아니라 오늘날에도 여전히 살아있다. 아베 총리는 공공연하게 쇼인 선생을 존경한다고 밝혔으며, 쇼인의 저작을 읽었다고 한다. 요시다 쇼인이 강조했던 다케시마를 일본은 공공연하게 노리고 있다는 점. 자위대 문제 등으로 인해 주변 국과 마찰을 불러오는 점 등... 여전히 현대 일본에서는 요시다 쇼인의 사상을 바탕으로 한 정책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일본 우경화 사상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요시다 쇼인의 철학은 집권층의 미화와 교육을 통하여 여전히 일본을 움직이고 대표하는 핵심적인 사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최근 2015년, 일본 정부는 요시다 쇼인이 제자들을 가르쳤던 학교 쇼카손주쿠를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하는데 성공했다.
요시다 쇼인은 짧고 굵은 삶을 살다가 갔다. 한창의 나이인 30에 죽었으니 말이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죽음으로써, 일본 사상의 심장이 될 수 있었다. 변변찮은 하급 무사 신분, 그리고 일본 열도의 외곽에서 태어난 점 등등 환경적인 조건으로 봤을 때에는 이토록 거대한 인물로 성장한다는 것이 현실적으로 어려웠지만, 요시다 쇼인은 그런 제약 속에서도 자신의 사상을 굽히지 않았으며, 나라를 위하는 마음에 자신을 불태웠다. 나는 책을 읽으면서 쇼인이 가졌던 학문에 대한 태도, 죽음에 대한 의지, 그리고 죽음을 불사하면서까지 굽히지 않았던 신념 등등은 굉장히 와닿았다. 그리고 하급 무사 지식인들의 사상적인 중추가 되어 사회의 모순, 구체제를 개혁하는데 성공했다는 점도 굉장히 인상적이었다. 한국인이라면 쇼인을 곱게 볼 수 없겠지만, 감정적인 마음을 제외한다면, 그의 짧고 굵은 삶 속에서도 배울 점은 많았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일본이라고 하면 흔히 감정적인 마음만을 앞세운다. 그러나 내가 일본을 가보고 일본 문화를 경험하며 느낀 점은 일본 사람들은 자신보다 뛰어난 점이 있다면 적이더라도 불구하고 감정적인 마음을 버리고, 장점을 배우려고 노력했다. 그렇게 하여 완벽하게 상대의 장점을 습득했을 때에, 비로소 일본의 색깔을 씌우고 그네들의 문화화를 시도하였다. 우리도 좀 더 나은 미래, 그리고 좀 더 나은 문화를 이룩하기 위해서라면, 일본에 대해 감정적인 마음을 버리고, 그네들의 장점은 허심탄회하게 인정하고 수용하여 받아들이는 그런 융통적인 태도를 가져야 하지 않을까?
다만 천왕을 과도하게 숭상한 부분, 그리고 일본 민족을 우위에 둔 선민의식 사상, 군국주의와 제국주의적인 사상, 개인의 자유보다 국가적인 충성에 목적을 둔 극단적인 공리주의 사상 등등은 공감하기가 어려웠다. 요시다 쇼인의 직계 제자들은 메이지 유신 이후 근대 일본의 핵심적인 관료가 되어 우리나라를 비롯한 동아시아를 침략했다. 그런 요시다 쇼인의 직계 제자 중 우리가 가장 잘 알고 있는 사람은 바로 이토 히로부미. 이토는 자신의 스승인 쇼인의 사상을 평생 동안 실천했다. 이런 배경이 있었기에 나는 쇼인의 사상을 전면적으로 수긍하긴 어려웠다.
우리는 흔히 동양사를 이야기할 때, 중국사를 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번역되는 고전이나 역사책도 중국사가 압도적이다. 최근에는 일본에 대한 고전과 역사책도 하나둘씩 번역되고 있지만, 중국과 비교해보면 게임이 되지 않는 수준이다. 근대에 경험했던 식민통치, 그리고 고대사에 대한 시각차 때문에 여전히 일본과 우리는 가까우면서도 먼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물론 중국이 역대 이래로 동아시아의 맹주의 역할을 자임했고, 그렇기에 중국사는 중요하지만 중국사 만큼이나 중요한 것은 일본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는 중국에 대해서는 중요성을 인식하고 있지만 일본에 대해서는 감정적인 태도로 일관하며 중요성을 애써 무시한다. 그러나 우리나라와 일본을 면밀하게 연구해보면 지정학적으로 떼려야 땔 수 없는 관계다. 고대, 중세, 근대, 현재까지 우리는 좋던 싫던 일본과 관계하며 지내왔다. 따라서 역사적인 관점에서 살펴보면, 한반도에서 평화로운 시기가 지속됐던 때에는 일본과의 관계가 좋았던 적이 대부분이다. 반면 우리가 힘들었던 때에는 일본과의 관계가 극에 다다랐던 적이 많았다. 그렇기에 우리는 일본에 대해서 좀 더 알아야 할 필요성이 있다.
요시다 쇼인은 근대와 현대 일본에 있어서 굉장히 중요한 인물이다. 근대 메이지유신의 사상적인 원류, 그리고 현대 일본 정권에서도 여전히 직간접적으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앞에서 언급했듯 쇼인은 우리나라를 힘으로 정벌하자고 주장한 '정한론'의 대표적인 인물이다. 게다가 그는 울릉도와 독도 점거를 주장한 인물이니, 일본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있어서도 중요한 인물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요시다 쇼인에 대한 이해 없이 오늘날의 일본을 이해한다는 것은 사상누각과 다름없다고 본다.
책을 읽으면서 들었던 단편적인 생각을 나열해보자면 쇼인의 고향이라고 할 수 있는 조슈 번 하기의 사람들은 쇼인의 제자가 되어 교육을 받고 근대 일본의 중추적인 정치세력으로 성장하는데 성공한다. 일국의 거물급 대신들이 이렇게 시골 마을에서 우르르 나는 것은 매우 이례적인 사건인데, 이를 읽으며 《사기》에 한나라를 건국한 한 고조 패거리 이야기가 떠올랐다. 한 고조 유방은 시골 패현 출신인데, 한나라를 건국한 중추 관료들도 대부분 모두 패현 출신이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천하의 인재가 패현에서 모두 생겼다고 이야기했는데, 막말 조슈 번의 하기 역시 패현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겠다. 과거 나는 일본 고전인 《언지사록》을 읽은 적이 있는데, 이 책은 쇼인의 전 세대에 활동했던 사토 잇사이라는 유학자가 쓴 잠언록이었다. 쇼인은 사토 잇사이의 제자인 사쿠마 쇼잔에게 교육을 받은 적이 있는데, 이를 통해서 사토 잇사이의 철학 역시 쇼인에게 비판적으로 계승됐다고 볼 수도 있겠다. 사토 잇사이는 당대 일본 유학의 대가였는데, 정통 주자학 뿐만 아니라 양명학 역시 중시했다고 한다. (주자학은 관념적이고 양명학은 실천 중심적인 성격이 강하다.) 쇼인 역시 지성을 강조하며 행동을 강조한 것으로 봐서, 이러한 쇼인의 행동 중심적 철학은 사토 잇사이의 양명학을 중시한 학풍에서 비롯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끝으로 서애 유성룡 선생은 임진,정유전쟁 직후 《징비록》이라는 불굴의 저서를 남겼다. 선생은 저서에서 일본을 알지 못하면 큰 변란이 있을 것이라고 경고하고 피를 토하는 마음으로 한자 한자를 기록하였다. 우리는 역사적으로 이런 서애 선생의 기록을 무시한 결과 일본의 식민지 생활을 경험했다. 그렇기에 오늘날 똑같은 역사를 되풀이하지 않으려면, 정한론을 주장한 요시다 쇼인이라는 인물을 주시하고 알아야 하지 않을까? 책은 작고 아담하지만, 간결한 문체에 알기 쉽게 요시다 쇼인에 대한 정보를 꼼꼼하게 담고 있었다. 그의 생애, 그리고 그의 제자들, 그의 사상, 그가 교육한 쇼카손주쿠까지. 일본 역사에 대한 지식이 없더라도 책을 읽는 데에는 큰 무리가 없을 것 같다. 책을 읽으며 부끄러웠다. 이런 인물을 이제야 알았다는 생각에 얼굴이 부끄러웠고, 우리 사회에서 이런 인물을 아직까지 전문적으로 다루고 있지 않다는 점을 생각해보니 더더욱 부끄러웠다. 그런 척박한 환경에서 요시다 쇼인을 다룬 책이 처음으로 나왔으니, 불행 중 그나마 다행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 책을 필두로, 앞으로 요시다 쇼인에 대한 책, 그리고 일본에 대한 책들이 더욱 많이 발간됐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