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군서 - 부국강병의 공격경영 전략서
상앙 지음, 신동준 옮김 / 인간사랑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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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치통감》을 읽으면서 전국시대를 종결한 진나라의 천하통일은 진시황제의 노력도 있었지만, 시황제 이전부터 통일의 준비를 차곡차곡 해왔다는 점을 알게 됐다. 이를 통해 커다란 사업이나 정책은 장기간의 기간을 거쳐 역량의 축척을 바탕으로 성사된다는 결론을 도출할 수 있는데, 진나라의 통일 역시 마찬가지다. 시황제 이전 진나라를 부강하게 만든 군주는 대표적으로 두 사람을 꼽을 수 있는데, 첫 번째는 진 목공의 시대였고, 두 번째는 진 효공의 시대였다.

 

목공은 춘추시대에 진나라의 국력을 처음으로 만방에 알린 지도자로, 춘추오패에 거론되는 명군이기도 하다. 물론 춘추오패에 다섯 명의 영걸은 사람에 따라 거론하는 인물이 다른데 대체적으로 제 환공, 진(晉 - 천하통일하는 시황제의 진나라와 다른 나라) 문공, 초 장왕, 오 합려, 월 구천을 꼽는데, 여기에 진 목공과 송 양공, 월 부차가 추가되기도 한다. 아무튼 진 목공은 춘추오패로 거론될 정도로 진나라의 세를 대외적으로 과시한 인물이다. 목공 이후 진나라를 부흥시킨 인물은 진 효공인데, 이 때 진 효공의 개혁 정책에 앞장서서 진나라를 법치주의로 바꾼 인물이 바로 《상군서》의 저자 상앙이다.

 

진 효공은, 진 목공과 같이 대외적으로 진나라를 크게 넓히진 않았지만, 대내적으로 법가에 입각하여 체제를 정비하여, 내부 통치를 안정화시켰다. 《상군서》는 진 효공의 개혁을 추진한 상앙의 법치주의를 담은 고전으로, 책에서는 당시 상앙이 추진했던 법치 정치를 구체적으로 살펴볼 수 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조직이 흥할 때에는 몇 가지 공통점이 나타나는데, 이를 크게 두 가지로 집약해보면 '제도'와 '의식'이라고 할 수 있다. 상앙의 《상군서》는 나라의 제도적인 부분을 뜯어고치는데 중점을 뒀다. 법에 근거한 정치, 그리고 군사 조직의 개편은 결국 진나라의 외형적인 제도를 뜯어고치는 것들이며, 진 효공은 이런 상앙의 변법을 적극적으로 지지하여 수용하였다. 그 결과 진나라는 다른 나라보다 부국강병에 있어서 훨씬 우위에 있게 되었다.

 

이런 의문이 있을 수 있겠다. 그럼 상앙의 《상군서》는 국가의 외면적인 제도에만 집중하는 부국강병만 다루고 있는 것일까? 아니다. 《상군서》는 표면적으로는 엄격한 법치와 군사 시스템을 강조하고 있지만, 그러한 제도의 바탕을 이루는 내면에는 '인간의 이기심'이 있으며 이를 깊이 있게 이해할 것을 강조하고 있다. 상앙은 《상군서》를 통해 말한다. '백성들이여, 법을 지켜라. 그리고 군대에 가서 노력해라. 그러면 너희에게 돈이 떨어질 것이다. 너희가 군공을 세운 만큼 국가는 보상할 것이다. 법을 지키는 자는 떡을 줄 것이요, 법을 어기는 자는 사형에 처할 것이다. 법만 지키면 너희가 바라는 이익을 가져다줄 것이고, 나라에 공을 세우면 그러한 공에 합당하게 신분 상승을 약속할 것이다.' 이는 결국 제도적인 시스템을 움직이는 것은 인간의 이익이며, 백성들을 움직이게 하는 것은 그들의 욕망이라는 점을 노골적으로 인정한 셈이다. 그렇기에 인간의 이기심을 적극 인정하고 이를 바탕으로 국가 정책에 적용한 상앙의 철학은 당대에 모럴리스트들인 유가 학파로부터 엄청난 비판을 받았다.

 

백성들은 이렇게 엄격한 상앙의 변법에 불만이 없었을까? 당시의 기록으로는 백성들이 대체로 상앙의 변법을 반기는 분위기였다고 한다. 왜냐하면 상앙의 변법은 피지배층뿐만 아니라 지배층과 특권 계층인 귀족들에게도 그대로 적용되었고, 귀족들 역시 세습적으로 누리는 특권들을 포기해야만 했기 때문이다. 당시 전국시대 나라는 귀족과 특권 계층은 엄청난 특권이 주어졌고, 커다란 공이 없이도 지위를 세습하며 권력을 누렸었다. 이러한 예를 우리 역사에서 들어보자면 멀리 갈 것도 없이 조선 왕조의 양반 계층을 생각하면 된다. 그들은 문벌에 의지하여 각종 세금으로부터 자유로웠으며, 신분적 특권을 누렸는데, 전국시대의 분위기도 이와 같았다. 아무튼 이런 세습적인 특권이 상앙의 변법 아래에, 제약을 받기 시작했다. 나아가 상앙은 커다란 특권을 누리는 귀족들에게 누진세를 강하게 주장하여 귀족들의 거센 반발을 불러왔다. 진 효공의 입장에서는 상앙의 변법론을 잘만 이용하면 거대 문벌을 이루는 신권 세력을 탄압하고 왕권을 강화하는 계기가 될 수 있으니, 상앙의 개혁론에 전폭적인 지지를 보낼 수밖에 없다. 아무튼 진나라는 상앙의 개혁 아래에서 나라의 하드웨어를 대대적으로 뜯어고쳤다. 그리고 이런 역량을 바탕으로 진시황제 때에 천하통일을 달성한다.

 

《상군서》를 보면서 상앙의 제도의 장점을 정리해보자면 첫 번째로 상벌이 명확하다는 점, 두 번째로는 배경이나 연줄이 아닌 실력 위주의 인사배치를 지향한 점, 세 번째로는 법을 통하여 국정 정책에 기준을 세웠다는 점, 네 번째로 병농일치의 군사력 확대를 꾀했다는 점, 다섯 번째는 인간의 이익을 부정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긍정하며 받아들인다는 점 등이다. 그럼 반대로 단점을 꼽아보자면, 첫 번째로 극단적으로 전제 왕정을 옹호하는 사상, 두 번째는 극단적인 법치주의를 주장하여 사회의 경직성을 조장할 수 있다는 점, 세 번째는 농사를 중시하고 상공업을 멸시하여 상품 경제의 발전을 저해한 점 등을 꼽을 수 있다.

 

《상군서》에는 유가 학파의 철학을 비판하는 대목이 나오는데 요지는 다음과 같다. '유가 학파들은 말만 하면 상고시대의 법과 제도를 계승하고 본받아야 한다고 말하는데, 오늘날의 시세는 상고시대와는 전혀 다르므로, 오늘날에 맞게 현실성 있는 법과 제도를 만들어야 한다.' 그렇기에 상앙은 《상군서》를 통하여 약육강식이 빈번한 전국시대에 맞는 시스템은 법을 중심으로 한 법가 사상이라고 주장한다. 이는 결국 '사회의 진보는 현실성을 바탕으로 한 개혁을 성사시켰을 때 이뤄진다.'라는 논리로 정리할 수 있는데, 이러한 논리는 상고 시대의 복고주의를 주장하는 유가 학파의 사상에 비해 굉장히 융통성 있고 현실을 고려했다는 부분에서 높게 살 만하다.그렇기에 상앙의 논리를 고려하여 나는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렸다.

 

'《상군서》는 뛰어난 고전이다. 중국의 제도는 진나라의 통일을 기반으로 하여, 진의 제도를 계승하고 발전시켜왔는데, 그런 시발점이 바로 상앙의 변법에서 시작됐으니, 어찌 보면 중국의 왕조국가들의 틀은 상앙으로부터 시작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21세기의 오늘은 상앙이 살던 왕조 중심의 국가와는 다르다. 제도도 다르고 시민들의 위치와 권리 역시도 상앙의 시절과는 상이하다. 그러므로 상앙이 주장했던 《상군서》를 오늘날 그대로 적용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 오늘날 시류에 비교해볼 때 현실적이지 못한 부분이 많으니까. 그러므로 상앙의 철학은 중국 제도사에 있어서 역사적인 의의가 있지만, 오늘날 이를 무비판적으로 수용하여 적용하려는 것은 무리가 있다. 다만 상앙이 법치주의를 통해 주장하고자 했던 내용 중에서, 조직을 개선하기 위해서는 상벌이 명확하고, 법에 만인이 평등해야 하며, 능력을 우선하여 인재를 선발해야 한다는 제도의 필요성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고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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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비우스 로마사 2 - 끝나지 않는 전쟁 리비우스 로마사 2
티투스 리비우스 지음, 이종인 옮김 / 현대지성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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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번역본 《리비우스 로마사 2》 권은 원전의 6,7,8,9,10권으로 구성됐는데 주요 내용은 삼니움 전쟁이다. 갈리아 내전을 통해 한차례 호되게 털린 로마는 기존의 잘못을 반성하고 분골쇄신하여 국가 재건에 앞서는데, 리비우스는 그런 로마의 행동을 디테일하게 묘사하고 있다. 《리비우스 로마사》의 출간 이래로, 이 책의 핵심 부분은 초기 공화정 로마가 어떤 제도와 정신을 가졌기에 그토록 위대해질 수 있는가를 디테일하게 다룬 1 ~ 10권 부분이라고 하는데, 이번에 번역본 《리비우스 로마사 2》 권이 발매되면서 《리비우스 로마사》의 가장 핵심 노른자를 모두 번역한 셈이다. 《군주론》의 마키아벨리도 방대한 《리비우스 로마사》 중 초반부 1 ~ 10권을 읽고 《로마사 논고》라는 해설서를 펴냈다.

 

지금까지 번역된 《리비우스 로마사》를 읽으면서 나는 작은 로마가 어떻게 그토록 위대해질 수 있었는지, 그에 대한 해답을 찾으려고 노력했다. 그리고 번역본 2권을 완독한 결과 나름대로 로마가 위대해질 수밖에 없는 이유를 주관적으로 정리할 수 있었다. 책의 해체에는 역자가 매우 디테일하고 심도 있게 로마의 성공 요인을 분석했지만 이 분석을 참고하여 내 의견을 첨가하여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모든 조직이 발전하기 위해서는 크게 두 가지 조건을 충족시켜야 하는데, 첫 번째는 제도적인 부분이고 두 번째는 구성원의 의식적인 부분이다. 초기 로마 공화정 역시 이 두 가지 요소를 200% 충족시키고 있는데 먼저 제도적인 측면을 살펴보자.

 

우선 로마의 제도는 주변국에 비해 굉장히 진보된 시스템을 가지고 있다. 공화정이 들어선 뒤로 로마는 한 사람의 집권자가 독점적으로 만년 독재를 하는 정치 시스템이 아니라, 집정관, 귀족의 원로원, 평민들의 민회, 그리고 상황에 따라서 독재관 등등의 여러 구성원이 상호 조율하여 국가를 이끌어나갔다. 물론 이런 시스템은 일당 독재 체제에 비해 내부적인 갈등 요소가 많지만, 한편으로 보자면 특정 가문이나 세력의 장기 집권을 배제하고 있어서, 소위 고인 물이 썩는 사태는 발생하지 않았다. 정치 시스템뿐만 아니라 로마를 강대국으로 만든 데에 가장 중요한 공헌을 한 군사 제도 역시 주변 국들에 비해 탁월했다. 로마군의 전술을 어찌 보면 정형화된 포진법을 사용하여 권모 위주의 동양 병법에 비해 단순한 느낌이 들었지만, 힘과 힘이 격돌하는 백병전에서는 최적화된 조직화로 인해 백전백승을 자랑했다. 백병전을 담당하는 강력한 보병, 그리고 양익에서 적들을 혼란에 빠트리는 기병 부대의 융통적인 활약, 거기다 뛰어난 연설로 제장들의 자부심과 명예욕을 고취시키는 지도자의 웅변까지, 이런 최적화된 군 시스템 덕분에 로마는 주변 이탈리아 부족들 간의 싸움에서 매번 승리를 점할 수 있었다.

 

또 하나, 로마의 제도에서 가장 뛰어난 점은 바로 상벌이 공정한 성과제 시스템이다. 이런 성과제 시스템은 시대가 지날수록, 평민들의 군사적 정치적 참여권을 확장시키는 계기로 작용했으며, 귀족들 역시 문벌 가문에 의존하기보다 평민들과 동등한 입장에서 실력을 바탕으로 자신의 정치력과 군사적 업적을 경쟁할 수밖에 없었다. 평민들 역시 마찬가지로, 자신의 능력을 통하여 공직에 임용될 수 있었고, 집정관, 나아가 독재관에 임명되어 군공을 세우면 로마 장군들이 꿈에 그리는 개선식을 개최할 수 있었다. 전쟁에 나서는 사병들 역시 공정하게 전리품을 배정받을 수 있다는 믿음이 있었고, 지휘관들은 병사들의 그런 노고를 잊지 않고 치하하였기에, 여타 다른 부족들의 군대에 비해 로마의 군대는 사기가 높을 수밖에 없었다. 마지막으로 거론할 제도는 탁월한 식민지 정책이다. 역자가 해설에서 잘 설명하듯 로마의 식민지 정책은 무조건적으로 무력을 앞세우지 않고, 정복할 식민지와 동등한 조건으로 우후죽순 연합하여 세를 불리는데 급급하지 않았다. 로마는 외교를 통해 동맹정책을 앞세워, 로마의 우위를 기점으로 하여 세를 불렸고 이를 군사력으로 고착화하였다. 즉 겉으로는 부담 없이 친하게 다가갔지만 복종하지 않을 시에는 온갖 명분을 같다 붙인 뒤, 군사력을 앞세워 해당 도시를 토벌했다. 엄밀히 따지고 보면 이런 식민 정책이 성공할 수 있는 가장 큰 원인은 강력한 군사력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여기까지가 내가 확인하고 정리한 로마의 제도적 위대함이다.

 

그러나 아무리 제도가 뛰어나더라도, 이를 행하는 사람의 의식이 따라오지 않는다면 한계가 있다. 사실 세상에 통용되는 모든 제도는 나름의 공과가 있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약삭빠르거나 약은 사람들은 아무리 뛰어난 제도라 하더라도, 그런 제도의 틈을 노려 자신의 이익을 극대화하거나, 공적인 이익에 반하는 행동을 하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뛰어난 제도가 제대로 수행되기 위해서는 집단의 의식 역시 뛰어나야 하는데, 공교롭게도 《리비우스 로마사 2》권에 나오는 로마인들의 의식 역시 그들의 뛰어난 제도에 비해 부족함이 없었다.

 

그럼 로마인들의 의식은 어떤 점에서 특별한 것일까. 첫 번째로 꼽을 수 있는 점은 바로 '비르투스' 라는 개념이다. 서양 역사서에서는 운명과 인간의 역량을 두고 매우 대조적인 시각으로 개념화하여 해석했는데, 이에 대표적인 개념인 바로 운명을 상징하는 '포르투나' 그리고 포르투나와 대조적으로 인간의 역량을 상징하는 '비르투스'가 있다. 비르투스라고 하면 《군주론》의 저자로 유명한 마키아벨리가 주장한 비르투가 떠오르는데, 엄밀하게 말해서 마키아벨리가 주장한 비르투의 개념은 비르투스에서 변형시켜 독자적인 해석을 부여한 마키아벨리만의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리비우스 로마사》와 《플루타르코스 영웅전》 등의 로마 고전에 나오는 '비르투스' 개념은 마키아벨리의 '비르투'와 뜻과 느낌에서 차이가 있다.

 

비르투스는 운명을 뜻하는 포르투나와 대조적인 개념으로, 인간의 역량, 그리고 인간이 주도적으로 행할 수 있는 능력 내지 도덕적인 품성 등등을 포괄하는 개념이다. 마키아벨리가 강조하는 비르투는 비르투스보다 좀 더 강하고 남성적인 느낌을 강조하고 있으며, 인품과 덕성에 대한 부분보다는 정략적이고 현실적인 판단력을 추진할 수 있는 역량 쪽에 중점을 두고 개념화한 단어다. 그런 면에서 비르투스는 비르투가 강조하는 남성적인 힘과 역량, 현실적인 판단력을 포함하고 도덕적인 품성과 부드러운 인품에 대한 부분도 포괄하고 있는 덕목이니 어떻게 해석해보면 비르투보다 훨씬 광범위한 범위를 다루고 있는 개념이다. 《리비우스 로마사》 외에도 비르투스를 다루고 있는 로마 고전은 유명한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이다. 《영웅전》에서 나온 비르투스 역시, 《리비우스 로마사》에 나온 비르투스와 비슷한 뉘앙스인데, 대체적으로 도덕적인 품성 쪽으로 치우친 개념 같았다.

 

아무튼 《리비우스 로마사 2》에서는 위기의 순간마다 여러 인물들이 나와서 각자 개성 있는 비르투스를 보여주며 로마라는 조직의 위기를 극복하는데 공헌한다. 로마를 다시 재건한 카밀루스의 진취적인 비르투스, 갈리아족과 싸울 때 1:1의 일기토를 통하여 남성적이고 마초적인 비르투스를 과시한 만리우스와 발레리우스. 독재관으로 임명된 뒤 군법을 어긴 아들을 참수하며, 조직의 기강을 세운 만리우스의 강직한 비르투스, 땅에 떨어진 군대의 사기를 위해 2대에 걸쳐 목숨을 봉헌하여 희생한 데키우스 부자의 살신성인 비르투스, 독재관 파피리우스와 사마관 파비우스는 앙숙이었지만 어려운 전쟁 앞에서 사적인 감정을 죽이며 공의를 앞세웠는데 이 역시 하나의 비르투스로 볼 수 있으며, 삼니운 군의 계략에 빠져, 포위되었을 때 결사항전을 고집하기보다, 로마의 미래를 위해 훗날을 기약하며 치욕을 감내한 스푸리우스 포스투미우스의 결단도 어떻게 보자면 비르투스의 일종이다. 이렇듯 로마인들은 그들만의 비르투스를 가지고 있었으며, 이런 각자의 개성 있는 비르투스를 통하여, 로마의 운명을 개척하고 개선해나가는 데 앞장섰다. 이런 로마인의 비르투스 정신은 그들의 선공후사 정신, 그리고 공리주의 정신과 결합되어 로마를 지탱하는 강한 정신적인 유산으로 남게 된다.

 

비르투스 외에도 또 다른 정신적인 유산을 거론하자면 바로 '독재에 대한 거부감, 공화정 시스템에 대한 애정'이다. 이 시기의 로마에 살았던 사람들은 귀족과 평민을 가리지 않고 독재를 경멸했다. 그렇기에 국가에 위급한 상황이 일어나 막강한 권력을 일시적으로 휘두를 수 있는 독재관이 임명된다 하더라도, 독재관은 자신의 임무를 마치는 순간 주어진 권력을 이어가기보다 재빠르게 사임하였다. 공화정의 로마 시민들은 특정 세력의 고착화, 특정 세력의 권력 남용 등등을 가장 경멸했다. 이는 기득권인 귀족들 역시 마찬가지였으며, 그랬기에 귀족들은 자신들의 권력을 강화하고 영원토록 누리려고 하기보다, 상호화 견제가 활발하게 이뤄지는 공화정 시스템을 수호하는데 앞장섰다. 평민들 역시 자신들의 정치 권한을 확대하기 위해 노력하였고, 점차적으로 공직의 주요 요직에 오를 수 있게 되었다. 그랬기에 로마는 특정 세력이 독점하여 부패로 이어지는 왕조 국가의 시스템과는 다르게, 권력의 상호 견제를 통하여, 건설적이고 역동적으로 나라를 발전시킬 수 있었다. 리비우스가 살았던 시기는 아우구스투스가 왕정을 시작한 시기였는데, 《리비우스 로마사》를 통해 리비우스는 우회적, 직설적으로 공화주의 정신의 상실을 아쉬워하고 있다.

 

이렇듯 로마는 제도적으로도, 의식적으로도 다른 국가에 비해 월등하게 뛰어났다. 이런 역량을 바탕으로 로마는 삼니움 전쟁을 승리로 이끌며 이탈리아반도의 패권을 차지했고, 나아가 포에니 전쟁을 통해 국제적인 세력으로 성장한다. 앞으로 발간될 《리비우스 로마사 3》 권에서는 2차 포에니 전쟁을 다룬다고 하니 매우 기대 중이다.

 

책의 해설에서는 《리비우스 로마사》와 사마천의 《사기》를 비교 대조하고 있었는데, 동양 역사서를 주로 읽었던 나로서는 매우 흥미로운 화제였다. 전체적으로 역자의 해설은 타당한 분석이라 생각했지만 개인적으로 사견을 덧붙여보자면, 《리비우스 로마사》와 《사기》는 서술 방식에 있어서도 공통점이 발견되는 고전이다. 《사기》를 읽어본 사람은 알다시피 사마천은 《사기》를 만들기 위해 대륙을 주유하고, 사료를 모았다고 한다. 그러는 과정에서 사마천은 민간의 이야기를 부분적으로 차용하여 스스로의 뛰어난 필력을 바탕으로 문학적인 묘를 살려 《사기》를 완성한다. 그렇기에 냉정하게 독서하다 보면 《사기》에는 사마천이 자의적으로 포함한 이야기, 의도적으로 사실을 비틀어 서술한 대목을 찾을 수 있다. 《리비우스 로마사》 역시 마찬가지다. 《리비우스 로마사》도 기본적으로는 진실을 바탕으로 전개하지만 리비우스는 독자들을 위해 약간의 허구를 포함시켰는데, 대표적인 부분이 바로 영웅들의 연설이다. 《리비우스 로마사》에 나오는 연설은 역사적 사실과 상황을 토대로 리비우스가 자신의 뛰어난 수사술을 동원하여 재구성한 부분이라고 할 수 있으며, 이런 연설 대목이야말로 리비우스라는 저자의 웅변과 수사법이 얼마나 뛰어난지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다. 즉 두 역사서 모두 원저자에 의도에 따라 자의적인 허구가 들어 있다는 공통점이 있다.

 

게다가 두 역사가의 서술 방식도 문학적인 색깔을 가졌다는 점에서도 공통점을 가진다. 사마천의 《사기》는 역사서로 분류되기도 하지만, 엄밀하게 말해서 소설 장르의 탄생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친 책이다. 《사기》가 오늘날까지 그토록 유명한 이유를 꼽으라면 딱딱하고 무미건조한 역사 서술법과 다르게 생동감 있고, 마치 소설을 연상시키는 필력을 가졌다는 점을 꼽을 수 있다. 그렇기에 몇몇 학자들은 《사기》를 두고 역사서의 탈을 쓴 소설이라고 평하기도 한다. 《리비우스 로마사》 역시 마찬가지다. 리비우스의 필력 역시 사마천에 못지않은 문학적인 표현과 수사법이 나오는데, 특히 전쟁의 모습을 디테일하게 묘사하는 부분이나 정치적인 갈등을 설명하는 과정, 특정 인물의 개성적인 포인트를 묘사하는 부분에서 생동감 있는 서술 기법을 보여주고 있다. 그렇기에 문학적인 표현이 가득한 역사서라는 점에서 두 책은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겠다.

 

최근 나는 《자치통감》 완역본을 정주행하고 있는데, 마침 내가 읽은 부분이 전한, 서한 시대의 몰락까지인데, 시대적으로 《리비우스 로마사 2》 권의 시대와 겹친다. 상이한 문명의 역사를 두루 읽다 보니 동양과 서양 문화의 이질적인 부분과 이질적인 사고 관념이 새삼 느껴졌다. 고등학교 재학 시절 사회문화 시간에 사회를 바라보는 두 가지 관점을 배웠는데, 기능론과 갈등론이다. 거친 비유일 수 있겠지만 동양의 역사를 쭉 살펴보면 기능론이 떠오른다. 동양의 역사는 절대 권력을 지닌 최고지도자가 권력을 통해 사회 안정을 가져오는 것을 최고의 목표로 두고 있다. 반면 《리비우스 로마사》로 바라본 로마의 역사는 갈등론에 가깝다. 공화정이 중심인 로마 역사는 절대 군주가 독재적으로 정치를 운영하는 동양의 정치와는 전혀 달랐다. 절대 권력자가 없는 로마의 공화정은 늘 갈등의 연속이었다. 시민 계급과 기득권인 귀족 계급은 시도 때도 없이 치고받고 싸웠으며, 밖으로는 이민족들과 정복 전쟁을 계속했다. 신기한 점은 우리가 생각할 때 일반적으로 갈등이 심화되면 사회 발전에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할 법 한데 로마는 아니었다.

 

어찌 보면 로마가 큰 제국으로 발전할 수 있었던 원동력에는 '갈등'이라는 요소가 가장 원인이 아니었을까 싶다. 물론 갈등이 극도로 심화되고 타협될 여지가 없이 흘러간다면 이는 사회 발전을 저해하는 요소로 작용하겠지만, 다행히도 공화정 시기의 귀족과 평민들은 극단적으로 너 죽고 나 죽자는 식의 갈등은 지양했다. 그들은 서로 싸우다가도 힘을 합쳐야 할 때가 오면 때로는 귀족이 양보하기도 하고 때로는 평민이 양보하며, 그렇게 힘을 합쳐 국난을 극복했다. 그런 갈등 속에서 점진적으로 평민들의 권한이 높아졌으니, 하층민의 인권과 복지도 발전하고 있었던 셈이다. 이런 점은 그저 동양의 왕조 국가에서 상류층에 복종과 수탈을 당연한 의무로 알았던 백성들에 비해 훨씬 능동적이고 역동적이다. 그리고 이런 전통이 있었기에, '인권 운동과 신분제 해방 운동이 서양에서 시작된 것이구나.'라는 생각도 들었다. 아무튼 결과론적으로 볼 때 로마의 발전은 '적절한 갈등'에서 찾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나 생각해본다.

 

이번 책은 《리비우스 로마사 1》이 나온 지 무려 1년 만에 발간됐다. 사실 《리비우스 로마사 1》권을 너무 재미있게 읽어서, 후속작을 목이 빠지도록 기다렸는데 이렇게 발간되니 오랜 지기 벗을 만난 것처럼 매우 기쁘다. 이번 번역도 매우 깔끔했고, 술술 읽혔으며, 특히 해설에서도 역자의 해박한 분석도 좋았다. 다음 책의 테마는 포에니 전쟁이라고 하는데, 저 유명한 한니발과 스키피오의 대결을 읽을 수 있을 테니 매우 기대가 크다. 얼른 발간이 되었으면 좋겠고, 개인적인 바람을 하나 더 이야기하자면, 《리비우스 로마사》를 축약한 고전 텍스트를 한 권 더 번역해서 완역본 4권, 그리고 축약본 1권 해서 5권 구성으로 《리비우스 로마사》를 마무리하는 건 어떨까 싶다. 오래간만에 지적인 희열과 가슴 벅찬 감동을 듬뿍 느끼며 읽었던 저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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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치통감 : 천년의 이치를 담아낸 제왕의 책
장궈강 지음, 오수현 옮김, 권중달 해제 / 추수밭(청림출판)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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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고전, 그리고 중국사에 관심이 있는 사람치고 《자치통감》을 완독하는 것을 꿈꾸는 사람들이 많을 텐데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평생 독서에 있어서 목표한 것 중 하나가 바로 《자치통감》 완독이었다. 그러나 그 목표는 실천하는 것은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무엇보다 《자치통감》의 방대한 분량 때문인데, 《자치통감》이 다루고 있는 시대는 1362년, 어림잡아 1400년인데, 이런 방대한 시기를 294권 한자로 300만 자 분량으로 정리했기에 읽는 것만 해도 심히 부담이 되며, 설상가상으로 동양고전에 흥미가 없거나 중국사에 대한 지식이 없다면, 더더욱 접근하기가 어렵다.

 

누군가는 나에게 물었다. 방대한 분량의 《자치통감》을 왜 읽고 싶냐고 말이다. 우리나라 역사도 아니고, 중국의 역사책인데다 1400년이나 다룬 저작인데, 굳이 이 책을 읽을 필요가 있나, 문명이 발전한 오늘날 중국을 다룬 역사서가 차고 넘치는데도 불구하고 왜 굳이 이 책을 읽고 싶어 하는지 궁금했던 모양이다. 확실히 오늘날의 기준으로 본다면 《자치통감》은 엄청나게 많은 분량을 자랑한다. 최근 완역된 《자치통감》의 한글 번역본은 500~600페이지 양장본 책이 31권으로 구성된 거대한 전집인데, 보통 사람들의 경우에는 책을 읽기도 전에 분량에 압도될 법 하다. 굳이 이런 막대한 분량을 읽을 필요가 오늘날에 있을까?

 

《자치통감》은 그냥 대충 정리한 역사서가 아니다. 근대 이전 동양에서는 역사라는 과목이 그저 교양을 위한 과목이 아니라, 지도자들의 정치 공부의 핵심을 담당하고 있었다. 왕조국가에서 지도자는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앞서 세워지고 흥망 했던 왕조들의 발자취를 돌아보며 귀감을 삼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기에 역사는 지도자의 정치 교육 함양에 있어 가장 중요한 과목이었다. 《자치통감》 역시 여느 다른 역사서와 마찬가지로 지도자의 올바른 치국, 그리고 올바른 정치를 역사적으로 정리한 저술이다. 그럼 왜 중국의 숱한 역사 고전들 중에서 《자치통감》을 으뜸으로 꼽는 것일까?

 

《자치통감》은 북송대 사마광이 주도하여 편찬한 저서인데, 당시 송나라 황제였던 영종과 신종의 정치를 돕기 위해 역대 역사서들 가운데 최고지도자가 참고할 만한 사항만을 기록한 책이다. 당시 송나라의 황제 영종은 나라 내외의 문제를 역사 공부를 통해 극복하고자 했지만, 문제는 기존에 편찬된 사서가 너무 방대했다. 중국에서는 원래 하나의 왕조가 무너지고 새로운 왕조가 생기면 새로 세운 왕조가 전 왕조의 역사를 정리해왔다. 그렇다 보니 송나라까지 내려왔을 때 공식적으로 내려오는 역사서가 《사기》를 필두로 하여 포함하여 17개나 있었고, 이를 권수로 환산하자면 1600권 정도라고 한다. 이런 막대한 분량은 직업이 없는 선비가 읽는다고 해도 꼬박 50년이 걸린다고 하니, 나라를 다스려야 하는 황제의 입장에서는 언감생심 읽을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랬기에 영종은 사마광에게 부탁해서, 지도자의 정치에 도움이 될 만한 책, 그리고 쉽게 읽을 수 있는 역사책을 요구하였고, 이 부탁을 받은 사마광은 19년 동안 성실한 작업을 통하여 《자치통감》이란 저서를 완성했다. 책이 완성됐을 당시, 영종은 이미 죽었고, 영종의 뒤를 이은 신종이 이 책을 받았다.

 

그렇기에 294권 300만 자 분량은 오늘날의 기준에서 볼 때에는 엄청나게 방대한 분량이지만, 1600권의 역사서와 비교해본다면 엄청나게 줄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재미있는 점은 기존의 사서들을 압축하여 저술하는 과정에서도 역사에 있어 핵심과 필요한 부분은 모두 기록하고, 하나의 사건을 두고 의견이 분분한 사안들은 나름의 근거를 들어서 깔끔하게 정리했으니, 후대의 역사가들은 《자치통감》의 기준에 따라 정사와 야사를 구분하기 시작했다.

 

세간에서는 《자치통감》과 《사기》를 비교하며 어느 역사서가 좋은가를 논하기도 하는데, 《사기》와 《자치통감》은 같은 역사서이긴 하지만 역사를 기술한 방식은 전혀 다르다. 《사기》는 역사를 '기전체'라는 체제로 정리했는데, 쉽게 말해서 인물을 중심으로 하여 정리한 역사서이다. 쉬운 예를 들어보자면 위인전 전집 혹은 인물 사전과 같은 구성이라고 할 수 있다. 이에 반해 《자치통감》은 역사를 시간의 흐름대로 서술하고 있는데, 이런 기술 방식을 '편년체'라고 한다. 즉 《사기》는 기전체를 대표하는 역사서고, 《자치통감》은 편년체를 대표하는 역사서다. 내용적으로 비교해보자면 《사기》에는 정사와 야사가 섞여있다. 《사기》를 지은 사마천은 역사가이기도 하지만 뛰어난 문필가였고, 역사적인 인물들의 자료를 수집하는 과정에서 민가에 떠도는 야사나 이야기들을 적극적으로 차용하여 《사기》를 문학적으로 표현한다. 그렇기에 《사기》를 두고 어떤 사람들을 역사를 문학적으로 표현한 작품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반면 《자치통감》은 허무맹랑한 야사나 민담 등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지 않고, 오로지 신뢰할 수 있는 사실을 담아내고자 했다. 그렇기에 《사기》처럼 흥미롭고 재미있는 이야기는 드물지만, 반대로 《사기》보다 훨씬 현실적이며, 역사적 사건에 대한 인과관계가 굉장히 뚜렷하게 밝혀져 있다.

 

그렇기에 《자치통감》은 중국 역사를 현실적으로 고찰하여 정리한 핵심 요약서이자, 국가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위기 대처 매뉴얼의 결정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중국 역사에 대한 교양과 더불어 실제적인 정치의 올바름까지 제시한 역작이었기에, 중국에서는 이 책이 출간되고 나서 많은 지도자들이 애독했으며, 우리나라의 성군 세종대왕 역시 이 책을 구하고 완독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럼 이런 의문을 제기할 수도 있겠다. '《자치통감》은 왕조 국가의 흥망을 정리한 책인데 과연 오늘날에도 통용될 수 있는 지혜인가?'

 

사회제도와 국가의 형태, 신민과 시민의 역할 등등 왕조 시대와 오늘날의 시대는 많은 차이점이 있다. 그러나 그런 차이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조직사회의 처세법이나, 삶의 지혜에 대한 부분은 왕조 시대나 오늘날이나 크게 변한 부분이 없다. 우리가 잘 아는 정치 철학자 《군주론》의 저자인 마키아벨리는 당시 사분오열된 이탈리아반도의 운명을 고민했고 그에 대한 해답을 찾기 위해 《리비우스 로마사》라는 책을 몰두해서 읽었다. 《리비우스 로마사》의 저자 리비우스는 기원전 59년에 태어나 기원후 17년에 죽었다고 한다. 그러니 《리비우스 로마사》는 마키아벨리가 활동했던 시대인 15 ~ 16세기로부터 약 1400년 전에 저술된 방대한 로마사 전집이다. 이렇듯 이름난 현자들은 어려움에 봉착했을 때, 무엇보다도 이전 시대를 기록했던 역사 기록에서 해답을 찾으려고 노력했다. 마찬가지로 《자치통감》 역시 지금으로부터 약 1000년 전에 저술된 저작이지만 천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온전하게 전집이 보관되어 내려오는 데에는 그만큼 값진 무언가가 있다는 것을 반증한다.

 

다만 《자치통감》 294권 300만 자를 일반인이 읽기에는 부담이 된다. 그렇기에 《자치통감》을 개괄적으로 정리한 책의 도움을 받으면 훨씬 수월하게 다가갈 수 있는데, 그런 일환으로 최근에 나온 책이 바로 《자치통감 : 천년의 이치를 담아난 제왕의 책》이다. 이 책은 방대한 《자치통감》의 분량을 770쪽 양장본으로 줄인 《자치통감》의 친절한 안내서다. 이 책의 저자인 장궈강 교수는 《자치통감》을 가지고 온라인, 오프라인 강의를 했으며, 이를 바탕으로 하여 《자치통감 : 천년의 이치를 담아난 제왕의 책》을 저술했다고 한다. 읽어본 결과 확실히 책은 어려운 원전을 풀어서 잘 설명하고 있었다.

 

물론 방대한 분량의 《자치통감》을 이 책 하나에 담았기에, 《자치통감》에 나오는 2만 개가 넘는 에피소드를 모두 담을 순 없지만, 시대별로 가장 핵심적인 사건과 흐름을 놓치지 않고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또한 그저 고전을 풀어내고 설명하는 것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중국과 서양의 정치 제도 비교, 그리고 원전에 나온 제도 등이 오늘날에 중국에 끼친 영향에 대해서도 상세하게 고찰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방대한 분량의 《자치통감》을 읽기에 부담스러운 분들이나, 《자치통감》에 입문하고 싶은데 어떻게 할지 고민되는 사람, 그리고 《자치통감》을 완독하고 정리하고 싶은 사람이라면 이 책의 도움을 크게 받을 수 있을 것 같다. 나 역시도 올 한 해의 목표가 바로 《자치통감》 완독인데, 그런 목표를 시작하기에 앞서 《자치통감》을 개괄하여 읽는다는 마음으로 이 책을 읽었는데 완역본 완독에 많은 도움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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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들어진 진실 - 우리는 어떻게 팩트를 편집하고 소비하는가
헥터 맥도널드 지음, 이지연 옮김 / 흐름출판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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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라인 도서 사이트에서 신간 목록을 보다가 흥미 있는 제목의 책을 발견하고 클릭했는데 목차부터 굉장히 관심을 끌었다. 만들어진 진실이라니... 책은 정보화 시대에서 필수적인 덕목이라고 할 수 있는 사실 - 팩트에 대한 불편한 진실을 깊이 있게 고찰하고 있었다. 과거, 옛날에는 정보는 희귀했고, 그랬기에 권력을 가진 집권층만이 정보를 향유할 수 있었다. 그랬기에 우리는 위로부터 내려져오는 제한된 정보를 받을 수밖에 없었다. 정보의 독점은 정보를 향유하는 집권층의 기호에 의해 조작되고 편집되어 내보내졌고, 대다수의 사람들은 그런 제약적이고 편집된 정보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요즘은 세상이 달라졌다. 인터넷이 발전하고, 각종 미디어들이 발전으로 인해 독점된 정보는 개방됐고, 하나의 정보를 여러 시각으로 해석하는 의견들도 다양하게 나오기 시작했다. 그러므로 과거에는 정보의 제약적인 공개가 문제 됐다면 오늘날에는 차고 넘치는 정보의 분별이 더욱 중요해졌다고 볼 수 있다.

이런 상황 속에서 《만들어진 진실》은 오늘날 매우 중요한 덕목을 다룬다. 만연하는 정보 속에서 과연 팩트를 어떻게 구별할 것인가에 대해서, 21세기 정보화 시대에서 우리는 팩트를 어떻게 편집하고 소비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구체적인 예시를 통해 풀어내고 있다. 오늘날 개개인은 마음만 먹으면 자신이 원하는 정보를 손쉽게 찾을 수 있다. 그러나 과연 우리가 손쉽게 찾을 수 있는 정보 속에서 사실적인 팩트는 과연 얼마나 있을까? 책은 이런 의문으로부터 시작된다. 과거에는 특정 계층의 시각으로 정보가 쉽게 조작되고 편집되었다면, 개방화된 오늘날에도 과연 여전히 팩트는 편집되어서 공개되는 것일까? 단순하게 생각해보면 정보의 개방은 팩트를 확보하는데 매우 큰 도움이 될 것처럼 여겨지지만, 오늘날 사회를 깊이 있게 관찰해보면 그렇지만도 않다. 어쩌면 과거보다 오늘날이 팩트의 편집이 더더욱 빈번하게 이뤄지는 시대일지도 모른다.

소비자들에게 하나라도 물건을 팔기 위하여 상품의 단점은 언급하지 않고 장점만을 부각하는 미디어 광고. 당선을 위하여 공약용 거짓을 빈번하게 일삼는 정치인. 중립적인 관점의 저널리즘을 표방하는 듯하면서도 결국은 특정 집단의 이념을 은연중에 드러낸 언론. 입사를 위하여 자신의 인생을 스토리텔링으로 멋들어지게 꾸며서 발표하는 취준생. 나의 지갑을 매력적인 떡밥을 동원해서 노리려고 하는 마케터 등등 사회 곳곳에는 여전히 사실적 팩트보다는 가공된 팩트, 편집된 팩트가 만연하고 있다. 정보의 대중화는 많은 사람들이 정보를 향유하고 생산할 수 있는 기회를 가져다준 것은 사실이지만, 반대로 대다수의 사람들이 다양화된 집단의 가공화된 정보에 더욱 쉽게 노출됐다. 이러한 팩트의 공공연한 편집 사례를 대표적으로 언급해보자면, 바로 스토리텔링이다. 최근 스토리텔링이 유행했다. 그냥 날것의 팩트로는 감동을 주지 못하므로, 무미건조한 팩트에 조금의 조미료를 가미하여 이야기를 만들어 사람들에게 공감을 사야 한다고 많은 지성인들이 강조했다. 그러나 불편한 진실은 어떤 팩트를 스토리텔링하여 편집하는 과정에는 날조와 과장, 그리고 특정 부분의 축소와 확대 등등이 필연적으로 개입할 가능성이 높다는 점이다.

그럼 이런 이미지화된 사회에서 우리는 어떻게 현명하게 살아야 할까? 가장 중요한 것은 정보 안에서 어디까지가 팩트이고 어디까지가 편집인지를 구별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는 것이다. 이런 능력을 갖추기 위해서는 우선 우리 사회에서 만연하는 팩트의 편집 유형을 알아둘 필요가 있다. 책에서는 그런 팩트의 편집 사례를 유형별로 나눈 뒤 각 사례에 대한 예시를 들어 분석하고 있다. 책을 읽으면서 느꼈던 점은 확실히 서양 저자가 저술한 책이라서 그런지 팩트의 편집 사례에 대해 분절적으로 나눠서 깔끔하게 정리한 부분이 인상적이었다. 어떻게 보면 이런 분절적인 전개는 딱딱하고 기계적인 느낌을 줄 수 있지만, 반대로 설명하는 개념에 대해 깔끔하게 전달한다는 장점도 있다. 장르는 다르지만 저자가 깔끔하게 분류해놓은 예시를 보니 특정 개념을 분절적으로 쪼개고 쪼개서 설명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 저서가 떠올랐다. (서양의 자기계발서, 철학서들은 아리스토텔레스 이후 도식화, 분절화하여 논제를 설명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책에서 다양하게 분석한 팩트의 가공 사례를 다 언급하기는 지면상 무리지만, 어쨌든 이 책을 통하여, 나는 이미지화된 현실에 있어 본질에 대하여, 그리고 본질은 오늘날 어떤 의미가 있을까라는 생각을 했다. 물론 팩트를 판매하는 입장에서는 가공과 편집의 극대화를 하기 위해 팩트를 잘 알아야 하고, 팩트를 소비하는 경우에는 편집과 가공 떡밥에 속지 않기 위해 팩트 구분법을 알아야겠지만, 그럼 과연 날것의 팩트, 그 자체는 현실 속에서 어떤 힘을 가지고 있는 걸까. 가만 생각해보면 날것의 팩트는 가공과 편집으로부터 벗어날 수가 없다. 날것의 팩트를 분별하는 데에도, 날것의 팩트를 구분하는 데에도 결국은 가공과 편집에 대한 이해는 필수적으로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날것의 팩트는 이미지화된 가공의 팩트가 만연하는 작금의 시대에 그 자체로는 힘을 발휘하진 못하지만, 이렇듯 편집과 가공과의 역학관계 속에서는 가치를 빛낼 수 있는 덕목인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책은 굉장히 재미있었다. 예시 위주로 풀어나가는 전개라서 부담도 없었고, 사례들의 분석도 매우 흥미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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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시다 쇼인 시대를 반역하다 - 일본 근현대 정신의 뿌리, 요시다 쇼인과 쇼카손주쿠의 학생들
김세진 지음 / 호밀밭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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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블로그 이웃님이 번역하고 있는 일본 정치 사극을 시청하는데, 그 사극의 이름은 '도쿠가와 요시노부'다. 드라마는 일본의 에도 막부 말기의 쇼군 요시노부를 주인공으로 다루고 있는데, 나는 이 사극을 통해 일본의 근대화가 어떻게 이뤄졌는지에 대한 배경을 가장 중점적으로 염두에 두며 시청하고 있다. 도쿠가와 요시노부라는 제목에서 알 수 있듯, 사극은 철저하게 도쿠가와 가문을 중심으로 풀어가고 있었다. 일반적인 인식으로는 에도 막부 말기 시대의 도쿠가와 체제는 시대에 적응하지 못한 행정과 비리 때문에 낡은 체제로 인식하지만, 이렇게 드라마를 통해 도쿠가와 가문의 시각으로 에도 막부 말기를 들여다보니, 낡았다는 막부 세력도 서구 열강에 대한 대응과 체제 개혁에 신경 쓰고 힘을 기울이고 있었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렇게 에도 막부 말기 시대를 사극으로 시청하다 보니, 일본의 근대화에 대하여 더욱 깊은 관심이 갔다. 그래서 나름 관련 인물들에 대한 저작을 읽고, 에도 막부와 메이지 유신에 대한 책을 조금씩 읽어나갔는데, 메이지 유신을 깊이 있게 추적하던 과정에서 나는 요시다 쇼인을 만나게 됐고, 《요시다 쇼인 시대를 반역하다》라는 책을 통해 그의 인생에 대해서 상세하게 알아볼 수 있었다.

  요시다 쇼인은 일본의 서쪽인 조슈 번 출신의 사무라이 출신으로, 그 가문은 대대로 조슈 번의 병법(군사학)을 가르치는 것과 연관된 집안이었다. 조슈 번의 번주는 대대로 모리 가문이 맡았는데, 이 모리 가문은 도쿠가와 에도 막부와 역사적으로 악연이 있는 사이였다. 도쿠가와 막부가 성립되기 이전 천하를 둘로 나눠 싸운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동군의 총대장은 도쿠가와 이에야스였고, 서군의 총대장은 모리 테루모토였다. 흔히 서군의 상징적인 인물을 이시다 미츠나리로 여기긴 하지만, 직급으로 따지자면 서군의 총대장은 모리 가문이 맡고 있었었다. 그런 세키가하라 대전에서 서군은 대패를 하였고, 승기를 탄 이에야스는 에도 즉 지금의 도쿄에 막부를 열고 일본 열도의 실질적인 통치자로 군림했다. 정치적, 군사적으로 도쿠가와에 패배한 모리 가문은 영지를 몰수당하고, 조슈 번으로 쫓겨가 그곳을 영지로 삼아 대대로 다스렸는데, 요시다 쇼인은 그런 조슈의 출신이었기에 기본적으로 막부에 대한 반감이 높을 수밖에 없었다.

  19세기 서구 열강이 힘을 앞세워 개항을 하기 시작하면서, 막부의 권위는 땅에 떨어지기 시작했다. 조슈 번을 비롯하여 서쪽의 영주들은 흔들리는 막부의 모습을 보고 목소리에 힘을 주기 시작했는데, 요시다 쇼인은 그런 시기에, 태어나 사상가로 활동한 인물이었다. 어릴 때부터 영명했던 그는 조슈의 번주와 관료들에게 병법을 가르쳤으며, 허가를 받고 남쪽 규슈 지방을 유람하여 견문을 넓혔다. 그 뒤 에도로 가는 번의 행렬에 참가하여 에도에서 견문을 쌓고, 무단으로 동북부 지역을 여행하며 또다시 견문을 쌓아나갔다. 무단 여행 때문에 쇼인은 신분을 박탈당하고 제제가 가해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주변의 사람들을 교육하고 스스로의 학문을 연마하는데 게을리하지 않았다. 이후 쇼인은 쇼카손주쿠라는 학교를 세워, 이토 히로부미를 필두로 일본의 근대화를 이끈 정치인들을 수제자로 두고 교육시켰다. 막부 체제에 대한 반골 기질이 강한 요시다 쇼인은 결국 막부의 실권자 이이 나오스케에게 찍혀 안세이 대옥에 연루되어 30살의 꽃다운 나이로 처형되고 만다. 그는 죽었지만, 그의 사상은 제자들에게 계승되어, 메이지 유신을 토대로 한 근대 일본을 이룩하는데 근간이 됐다.

  사상의 힘이란 굉장히 무서운 법이다. 과거 일본의 제국주의를 가만히 뜯어보면, 이는 결국 요시다 쇼인이 주장하던 사상을 그대로 현실화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쇼인은 일본이 강해지려면 다케시마 즉 울릉도 일대를 발판으로 삼아 한반도를 점령해야만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존왕양이(천왕을 받들고 서구를 배격하는 사상)의 대표적인 사상가였다. 존왕 사상은 일본 제국주의와 결합하여, 천황의 신격화를 가져왔고, 식민지의 사람들에게 무분별한 신사 참배를 강요했다. 양이 사상은 문자 그대로 서구를 배척하는 것이 아니라, 서구의 우수한 기술력은 배워서 서구의 압제로부터 벗어나자는 뜻이었다. 즉 우리의 동도서기, 중국의 중체서용과 비슷한 맥락이다. 이런 양이의 사상은 후학들에 의해 비판적으로 계승되어서, 근대 일본을 이룩하는 데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요시다 쇼인의 국수주의적 제국주의적 사상은 근대뿐만이 아니라 오늘날에도 여전히 살아있다. 아베 총리는 공공연하게 쇼인 선생을 존경한다고 밝혔으며, 쇼인의 저작을 읽었다고 한다. 요시다 쇼인이 강조했던 다케시마를 일본은 공공연하게 노리고 있다는 점. 자위대 문제 등으로 인해 주변 국과 마찰을 불러오는 점 등... 여전히 현대 일본에서는 요시다 쇼인의 사상을 바탕으로 한 정책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일본 우경화 사상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요시다 쇼인의 철학은 집권층의 미화와 교육을 통하여 여전히 일본을 움직이고 대표하는 핵심적인 사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최근 2015년, 일본 정부는 요시다 쇼인이 제자들을 가르쳤던 학교 쇼카손주쿠를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하는데 성공했다.

  요시다 쇼인은 짧고 굵은 삶을 살다가 갔다. 한창의 나이인 30에 죽었으니 말이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죽음으로써, 일본 사상의 심장이 될 수 있었다. 변변찮은 하급 무사 신분, 그리고 일본 열도의 외곽에서 태어난 점 등등 환경적인 조건으로 봤을 때에는 이토록 거대한 인물로 성장한다는 것이 현실적으로 어려웠지만, 요시다 쇼인은 그런 제약 속에서도 자신의 사상을 굽히지 않았으며, 나라를 위하는 마음에 자신을 불태웠다. 나는 책을 읽으면서 쇼인이 가졌던 학문에 대한 태도, 죽음에 대한 의지, 그리고 죽음을 불사하면서까지 굽히지 않았던 신념 등등은 굉장히 와닿았다. 그리고 하급 무사 지식인들의 사상적인 중추가 되어 사회의 모순, 구체제를 개혁하는데 성공했다는 점도 굉장히 인상적이었다. 한국인이라면 쇼인을 곱게 볼 수 없겠지만, 감정적인 마음을 제외한다면, 그의 짧고 굵은 삶 속에서도 배울 점은 많았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일본이라고 하면 흔히 감정적인 마음만을 앞세운다. 그러나 내가 일본을 가보고 일본 문화를 경험하며 느낀 점은 일본 사람들은 자신보다 뛰어난 점이 있다면 적이더라도 불구하고 감정적인 마음을 버리고, 장점을 배우려고 노력했다. 그렇게 하여 완벽하게 상대의 장점을 습득했을 때에, 비로소 일본의 색깔을 씌우고 그네들의 문화화를 시도하였다. 우리도 좀 더 나은 미래, 그리고 좀 더 나은 문화를 이룩하기 위해서라면, 일본에 대해 감정적인 마음을 버리고, 그네들의 장점은 허심탄회하게 인정하고 수용하여 받아들이는 그런 융통적인 태도를 가져야 하지 않을까?

  다만 천왕을 과도하게 숭상한 부분, 그리고 일본 민족을 우위에 둔 선민의식 사상, 군국주의와 제국주의적인 사상, 개인의 자유보다 국가적인 충성에 목적을 둔 극단적인 공리주의 사상 등등은 공감하기가 어려웠다. 요시다 쇼인의 직계 제자들은 메이지 유신 이후 근대 일본의 핵심적인 관료가 되어 우리나라를 비롯한 동아시아를 침략했다. 그런 요시다 쇼인의 직계 제자 중 우리가 가장 잘 알고 있는 사람은 바로 이토 히로부미. 이토는 자신의 스승인 쇼인의 사상을 평생 동안 실천했다. 이런 배경이 있었기에 나는 쇼인의 사상을 전면적으로 수긍하긴 어려웠다.

 우리는 흔히 동양사를 이야기할 때, 중국사를 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번역되는 고전이나 역사책도 중국사가 압도적이다. 최근에는 일본에 대한 고전과 역사책도 하나둘씩 번역되고 있지만, 중국과 비교해보면 게임이 되지 않는 수준이다. 근대에 경험했던 식민통치, 그리고 고대사에 대한 시각차 때문에 여전히 일본과 우리는 가까우면서도 먼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물론 중국이 역대 이래로 동아시아의 맹주의 역할을 자임했고, 그렇기에 중국사는 중요하지만 중국사 만큼이나 중요한 것은 일본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는 중국에 대해서는 중요성을 인식하고 있지만 일본에 대해서는 감정적인 태도로 일관하며 중요성을 애써 무시한다. 그러나 우리나라와 일본을 면밀하게 연구해보면 지정학적으로 떼려야 땔 수 없는 관계다. 고대, 중세, 근대, 현재까지 우리는 좋던 싫던 일본과 관계하며 지내왔다. 따라서 역사적인 관점에서 살펴보면, 한반도에서 평화로운 시기가 지속됐던 때에는 일본과의 관계가 좋았던 적이 대부분이다. 반면 우리가 힘들었던 때에는 일본과의 관계가 극에 다다랐던 적이 많았다. 그렇기에 우리는 일본에 대해서 좀 더 알아야 할 필요성이 있다.

 요시다 쇼인은 근대와 현대 일본에 있어서 굉장히 중요한 인물이다. 근대 메이지유신의 사상적인 원류, 그리고 현대 일본 정권에서도 여전히 직간접적으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앞에서 언급했듯 쇼인은 우리나라를 힘으로 정벌하자고 주장한 '정한론'의 대표적인 인물이다. 게다가 그는 울릉도와 독도 점거를 주장한 인물이니, 일본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있어서도 중요한 인물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요시다 쇼인에 대한 이해 없이 오늘날의 일본을 이해한다는 것은 사상누각과 다름없다고 본다.

  책을 읽으면서 들었던 단편적인 생각을 나열해보자면 쇼인의 고향이라고 할 수 있는 조슈 번 하기의 사람들은 쇼인의 제자가 되어 교육을 받고 근대 일본의 중추적인 정치세력으로 성장하는데 성공한다. 일국의 거물급 대신들이 이렇게 시골 마을에서 우르르 나는 것은 매우 이례적인 사건인데, 이를 읽으며 《사기》에 한나라를 건국한 한 고조 패거리 이야기가 떠올랐다. 한 고조 유방은 시골 패현 출신인데, 한나라를 건국한 중추 관료들도 대부분 모두 패현 출신이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천하의 인재가 패현에서 모두 생겼다고 이야기했는데, 막말 조슈 번의 하기 역시 패현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겠다. 과거 나는 일본 고전인 《언지사록》을 읽은 적이 있는데, 이 책은 쇼인의 전 세대에 활동했던 사토 잇사이라는 유학자가 쓴 잠언록이었다. 쇼인은 사토 잇사이의 제자인 사쿠마 쇼잔에게 교육을 받은 적이 있는데, 이를 통해서 사토 잇사이의 철학 역시 쇼인에게 비판적으로 계승됐다고 볼 수도 있겠다. 사토 잇사이는 당대 일본 유학의 대가였는데, 정통 주자학 뿐만 아니라 양명학 역시 중시했다고 한다. (주자학은 관념적이고 양명학은 실천 중심적인 성격이 강하다.) 쇼인 역시 지성을 강조하며 행동을 강조한 것으로 봐서, 이러한 쇼인의 행동 중심적 철학은 사토 잇사이의 양명학을 중시한 학풍에서 비롯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끝으로 서애 유성룡 선생은 임진,정유전쟁 직후 《징비록》이라는 불굴의 저서를 남겼다. 선생은 저서에서 일본을 알지 못하면 큰 변란이 있을 것이라고 경고하고 피를 토하는 마음으로 한자 한자를 기록하였다. 우리는 역사적으로 이런 서애 선생의 기록을 무시한 결과 일본의 식민지 생활을 경험했다. 그렇기에 오늘날 똑같은 역사를 되풀이하지 않으려면, 정한론을 주장한 요시다 쇼인이라는 인물을 주시하고 알아야 하지 않을까? 책은 작고 아담하지만, 간결한 문체에 알기 쉽게 요시다 쇼인에 대한 정보를 꼼꼼하게 담고 있었다. 그의 생애, 그리고 그의 제자들, 그의 사상, 그가 교육한 쇼카손주쿠까지. 일본 역사에 대한 지식이 없더라도 책을 읽는 데에는 큰 무리가 없을 것 같다. 책을 읽으며 부끄러웠다. 이런 인물을 이제야 알았다는 생각에 얼굴이 부끄러웠고, 우리 사회에서 이런 인물을 아직까지 전문적으로 다루고 있지 않다는 점을 생각해보니 더더욱 부끄러웠다. 그런 척박한 환경에서 요시다 쇼인을 다룬 책이 처음으로 나왔으니, 불행 중 그나마 다행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 책을 필두로, 앞으로 요시다 쇼인에 대한 책, 그리고 일본에 대한 책들이 더욱 많이 발간됐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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