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동준의 조선왕조실록 1 - 강력한 왕권이 살아있던 조선의 전성기 신동준의 조선왕조실록 1
신동준 지음 / 미다스북스 / 2019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최근 역사 분야에서 독보적으로 인기를 끌고 있는 테마는 바로 조선과 《조선왕조실록》이다. 이런 조선 열풍을 불러온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는데 몇몇 가지를 언급해보자면 첫 번째, '역사저널 그날'과 같은 역사 대중매체의 영향, 두 번째 《조선왕조실록》을 재해석하여 출판한 저작물의 유행 등등을 꼽을 수 있다. 특히 최근 들어 《조선왕조실록》에 대한 저작이 무수히 쏟아지고 있는데, 이런 실록 출판물 가운데에서 원조를 굳이 꼽아보자면 박영규가 정리한 《한 권으로 읽는 조선왕조실록》을 꼽을 수 있겠다. 이 책은 《조선왕조실록》을 단권화하여 한 권으로 축약하였으며, 평이한 서술로 조선 정치사를 정리하였는데, 그래서 그런지 출간 즉시 베스트셀러에 올랐고, 지금도 꾸준하게 팔리는 스테디셀러로 활약하고 있다.

 

박영규의 《한 권으로 읽는 조선왕조실록》을 필두로, 실록을 대상으로 한 출판물들이 본격적으로 출간되기 시작했는데, 이들 중 가장 특기할 만한 대중서는 바로 박시백 화백이 만화로 정리한 《조선왕조실록》이다.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은 20권의 전질로 구성됐는데, 글이 아닌 만화로 만들었음에도 불구하고 다루는 깊이와 저자의 주관적인 해석이 돋보였던 수작이었다. 특히 이 책은 성인을 대상으로 만든 책이지만, 만화라는 특성 때문에 청소년들에게도 많은 사랑을 받았던 저작이다. 전문가라 할 수 있는 역사 교사나 사학자들 역시 《조선왕조실록》을 읽을 때 대중들에게 보편적으로 추천하는 책으로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을 으뜸으로 꼽으니, 재미와 깊이를 두루 갖춘 명작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나 역시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전질을 몇 차례 완독했는데 조선사를 다룬 책들 중 군계일학으로 꼽아도 모자람이 없다고 생각한다.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열풍 이후, 베스트셀러에 오른 실록 도서는 《설민석의 조선왕조실록》이다. 나도 이 책을 사서 완독해봤는데, 이 책의 난이도는 매우 낮은 편으로, 조선사에 대한 기초 지식이 없는 사람들이 흐름을 잡기에는 유용한 책이지만, 군데군데 보이는 오류, 그리고 너무 쉽게 쓰인 서술, 얕은 깊이 등등의 단점이 있어서, 실록과 관련된 도서 중 가장 별로였다. 그리고 최근 재야 사학자 이덕일도 10권으로 구성된 《조선왕조실록》을 발간하고 있는데, 전작에 비해 '주관적인 해석'의 강도가 낮은 편이긴 했지만, 그래도 여전히 앞서나간 해석이 군데군데 있어서 사람에 따라 호불호를 크게 가져오는 것 같다. 나도 개인적으로 읽어봤는데, 전작에 비해서는 균형감각이 있는 서술이 돋보였던 시리즈였다.

 

이런 상황 속에서 고전 번역가인 신동준이 자신의 이름을 걸고 《조선왕조실록》을 최근 펴냈다. 조선사와 실록에 크게 관심을 가진 나였기에 《신동준의 조선왕조실록》 역시 구해서 완독을 해 봤는데 기존의 실록 도서와는 확실히 차별점이 느껴졌다. 이 책의 가장 큰 특징은 바로 해석에 있다. 나는 신동준이 번역한 고전들을 대부분 읽어봤고, 그렇기에 그가 가지고 있는 사상이나 권력에 관념이 어떤지 대략은 알고 있었다. 우선 《신동준의 조선왕조실록》의 가장 큰 특징은 복잡한 정치사를 권력의 향방에 따라 단순화하여 해석한다는 점이다. 《신동준의 조선왕조실록》은 총 2권으로 나와 있는데, 그는 조선을 크게 두 가지로 구분하고 있다. 첫 번째 왕권이 우위였던 전반기, 두 번째 신권이 우위였던 후반기. 기존의 주류 사학자들은 조선의 흐름을 구분할 때 기본적으로 조선 초기 훈구의 시대, 조선 중기 사림의 시대, 인조반정 이후 서인의 시대, 숙종 이후 노론의 시대, 정조 이후 세도정치 시대로 틀을 잡는데, 여기서 주목할 점은 시대를 구분하는 데 있어 척도가 되는 것이 '집권하는 신권 세력의 성격'이라는 점이다.

 

반면 《신동준의 조선왕조실록》은 신권을 중심으로 해석한 기존의 조선시대 흐름을 따르지 않고 정치사를 단순화하여, 왕권과 신권 이 두 가지 테마를 가지고 정치사를 설명하고 있다. 저자는 서울대 정치학과를 나왔는데, 그래서 그런지 그가 번역한 고전, 그가 번역한 역사서는 유독 권력에 주목하며, 그런 권력의 향방을 주요 테마로 삼아 해석하는 경향이 크다. 그리고 저자의 기본적인 사상은 왕조 국가가 중심이 된 조선에서는 정치의 주체인 왕의 권한이 강해야 한다는 입장을 가지고 있다. 그렇기에 저자는 조선 초기 왕권이 강한 시기를 긍정적으로 해석하고 있으며, 왕권이 상대적으로 약한 조선 중기와 후기를 비판적으로 해석하고 있다.

 

따라서 《신동준의 조선왕조실록 1》은 왕권이 강한 시기를 다루고 있기에 상대적으로 호평하는 분위기고, 《신동준의 조선왕조실록 2》은 신권이 강한 시기를 다루고 있어서 상대적으로 비판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다. 본 리뷰는 《신동준의 조선왕조실록 1》을 다루려고 한다. 1권에서 가장 논란이 될 만한 부분은 바로 세조와 연산군이다. 조선 전기, 전통적으로 왕권을 강화한 지도자를 꼽으라면 세 명이 떠오르는데 태종과 세조, 그리고 연산군이 그 주인공이다. 과거에는 이 세 인물을 굉장히 비판적으로 인식했다. 동생과 아버지 형과 싸우며 옥좌를 차지한 태종, 그것도 모자라 처남까지 죽이는 철면피 태종, 야욕 때문에 조카를 죽이고 왕위에 오른 세조, 그리고 극단적인 왕권 강화를 시도하다가 몰락을 자초한 연산군... 태종과 세종은 강력한 왕권을 주축으로 하여 반정에 성공했지만, 연산군은 막대한 왕권을 강화하려다 도리어 왕좌에서 내침을 당했다. 이 셋의 집권기는 수많은 피가 흩뿌려졌기에 사람들은 대체로 부정적으로 인식했지만 최근에 들어 태종에 대한 재해석이 일어나고 있다.

 

태종의 재해석은 최근 주류 사학과 재야 사학에서 동시에 일어나고 있는데, 신권을 중심으로 조선을 해석하던 주류 사학과 독재에 대해 극도로 부정적인 재야 사학이 같은 목소리로 태종을 재평가하고 있으니, 이는 그만큼 태종에 대한 시각도 변하고 있다는 것을 상징하는 증거가 아니겠는가 싶다. 《신동준의 조선왕조실록 1》에서도 태종을 명군으로 해석하고 있다. 사실 태종은 세조와 연산군과 세트로 묶여 비난하기에는 급이 다른 인물이다. 태종이 철혈 살인마 이미지를 가지고 있지만, 사실 태종은 처벌에 있어 극도로 신중한 모습을 보였다. 태종은 사람을 아무나 죽이지 않았다. 그는 범범 행위를 저지르는 세력이나 백성들에게 갑질을 시전한 인물들에 한해서 사형을 내렸는데 불행하게도 여기에 처남들이 섞여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태종은 처벌을 할 때, 관련자들을 소시지처럼 엮어서 우르르 죽이지 않고, 주모자만 죽여서 희생을 최소화했다. 이렇다보니 태종의 처벌은 후대의 군왕들이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옥사를 일으키고 대규모 살육을 국문의 이름 하에 자행한 것과 비교가 될 수밖에 없다.

 

《신동준의 조선왕조실록 1》에서는 세조와 태종의 차이점을 이야기하는데, 이는 내가 과거에 썼던 글과 거의 흡사했다. 태종은 강력한 왕권을 구축했지만, 그 왕권을 신료들과 나누지 않고 공정하게 사용했다. 그래서 태종은 아들 세종에게 안정된 조선을 물려줄 수 있었다. 세조 역시 강력한 왕권을 구축했지만 그는 기본적으로 공신들을 우대했고, 공신들의 불법 행위를 대부분 묵인했다. 그랬기에 세조 대에는 왕권이 강했지만 세조 사후에는 비대해진 훈구 세력들이 조정을 장악하였고, 이는 후대의 왕인 예종과 성종의 집권기에 큰 부담으로 다가왔다. 이런 점에서 볼 때에도 태종과 세조는 정치력의 차이가 확연했다.

 

책에서는 세조를 명군으로 인식하는데, 내 생각은 조금 다르다. 책에서는 이 당시 북방의 정세가 혼란하기에 시대는 강력한 지도자를 필요로 한다고 하는데, 이것으로 세조의 집권을 정당화하기엔 무리가 있다. 사실 세조의 조카 단종은 정치에 있어 전면적으로 활약을 한 적이 없었다. 만약 단종이 정치력이 떨어지고 정사를 돌보는 데 있어 방탕한 모습을 보이거나 유약한 모습을 보였다면, 이는 반정의 원인이 될 수 있겠지만, 아직까지 단종은 피지 않은 꽃이었다. 물론 반정의 원인은 실권을 장악한 김종서 등이 수양(세조)을 배제한 것에 있었다. 이때 수양의 시각에서는 군주는 어리고, 실권은 신료들에게 있는데, 실권을 쥔 김종서 일당이 공정하게 정치를 하는 것이 아닌 자기 혈족들과 친족들 위주로 코드인사를 통하여 조정을 장악하고 있으니, 이를 빌미로 권력구도를 바꿔야겠다는 생각을 할 수도 있었다.

 

문제는 그다음이다. 그렇게 김종서 일파를 쳐냈다면, 자신이 주축이 되어 정치를 주관하며, 조카인 단종이 바로 서기까지 정치를 보필하는 선까지만 갔다면, 수양은 치세의 능신으로 남을 수 있었다. 수양이 주장했던 주나라의 주공처럼, 조카가 성장하여 정치의 일선에 나서기까지 공정하게 정치를 운영한다는 모습을 보였다면, 그의 이름은 후대에 충신으로 꼽혔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수양은 여기서 더 나아가 '자신이 아니면 안 된다는 야망'에 충실하여, 결국 조카의 자리를 내쫓고 조카를 죽이고 왕위에 오른다. 물론 왕위에 오른 세조의 정치력은 나쁘지 않았다. 국방정책도 나름 괜찮았고, 행정 제도 정비에도 공적을 남겼으며, 검소했고, 여색을 즐기지 않았다. 정치력 자체는 떨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반정 공신들의 일탈을 눈감아주고, 그들의 세력을 비호하여, 거대한 공신 세력을 만든 점은 그의 정치에 있어서 커다란 결점이다. 즉 세조는 왕위에 '굳이' 스스로 올랐어야만 했냐는 도덕적인 결점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고, 집권기에 국방을 안정하고 행정을 정비한 공은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권 세력의 권신화를 불러온 장본인이니, 정치력에 있어서도 공과가 뚜렷한 인물이다. 이런 인물을 태종이나 세종과 같은 급인 명군으로 두기에는 무리가 아닌가 생각해본다.

 

연산군은 막대한 왕권 강화를 꾀하다 반정으로 인해 왕좌에서 폐위된 지도자다. 신동준은 연산군을 위해 《연산군을 위한 변명》이라는 책을 펴서 연산군을 옹호했는데, 그래서 그런지 이번 《신동준의 조선왕조실록 1》 연산군 챕터에서도 연산군의 왜곡된 해석에 대해 아쉬워하는 대목아 많다. 사실 나 역시 개인적으로 실록의 기록을 모두 신뢰하는 것은 아니다. <연산군 실록>은 반정 세력인 중종과 그 신하들의 입장에서 쓰인 것이기에 자신들의 반정을 정당화하여 기록한 내용이 있을 수밖에 없고 그렇기에 왜곡은 필연적이다. 다만 과연 연산군에게는 죄가 없을까. 조선조에 왕권을 강화한 인물로는 앞에서 살펴본 태종과 세조 그리고 숙종이 있다. 물론 이들 집권기에도 소소한 반역은 있었지만, 연산군 때처럼 대부분의 신료들이 힘을 모아서 반정을 주도한 경우는 없었다. 이로 말미암아 신권을 누르는 과정에서 연산의 행동이 오버한 점도 있었을 것이다. 실제로 실록에서는 연산이 신하들을 누르는 방법들을 구체적으로 언급하고 있지만 저자는 이런 실록의 기록을 믿지 않고 있다. 그러나 나는 실록에서 주장하는 입장 역시 어느 정도는 근거가 있다고 생각한다.

 

역사는 물론 기록하는 이의 주관에 의해 크게 좌우되지만 기본적으로 《조선왕조실록》은 그런 주관으로부터 나름의 기준을 지키려고 노력한 문헌이다. 이런 사관들의 직필 정신이 살아 있었에, 《조선왕조실록》은 우리나라를 넘어 전 세계를 대표하는 역사 문헌으로 손꼽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렇기에 연산군의 기록을 모두 사실로 받아들이기도 조심스럽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들 기록을 모두 불신하는 태도도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기록에 나온 악독한 연산의 행위들을 참고해볼 때, 연산은 왕권 강화를 위해 신권을 너무 일방적으로 탄압한 것은 아닐까 생각해본다. 사실 태종도 왕권을 강화하는 입장이었지만 신권을 대표하는 최고 기구인 의정부를 살려두고, 언론과 숱한 마찰을 빚어냈음에도 불구하고 언관들의 언로를 막을 생각은 하지 않았다. 세조 역시 왕권을 강화했지만, 공신들과 신료들을 불러 술을 함께 마시며 신권을 위무하는데 최선을 다했다. 아마 연산은 이런 융통적인 행동이 부족했던 것은 아닌가 생각이 든다.

 

아무튼 《신동준의 조선왕조실록 1》의 테마인 왕권의 전성기의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태종과 세조, 연산군을 대표적으로 알아봤는데, 책은 태조에서부터 명종 대까지를 다루고 있다. 내용과 해석을 떠나 이 책의 장점을 또 하나 꼽아보자면 바로 가장 최신의 논쟁들을 적극적으로 다루고 있다는 점이다. 얼마 전 세종의 치적에 대해 의문을 표하는 저서 《세종은 과연 성군인가》에 대한 비판적인 의견을 이야기하는 부분도 굉장히 흥미롭게 읽었는데, 《조선왕조실록》 관련 저서 중 따끈한 신간이라서 그런지 최근에 있었던 역사적인 논쟁이나 해석, 최신 학설 등등에 대해서도 꼼꼼하게 수록하고 있었다. 그뿐 아니라 실록을 읽는 데 있어 필요한 지식들도 테마로 정리하고 있으며, 각 왕의 왕릉에 대해서도 챕터 끝에 정리하고 있으니, 분량에 비해 굉장히 알차게 구성된 점도 마음에 들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묵자 (수정증보판) - 겸애와 비공을 통해 이상사회를 추구한 사상가, 국내 최초 완역판
묵자 지음, 신동준 옮김 / 인간사랑 / 2018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동양철학을 접할 때 가장 먼저 접하는 철학은 대부분 유가, 유학 철학이다. 유가 철학은 중원 그리고 중원을 넘어 한반도와 일본 베트남 등등을 직간접적으로 지배하던 철학이었고, 그랬기에 일반적으로 고전을 떠올리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철학이 유학과 관련된 철학이다. 중국을 떠나 우리나라에서도 전통을 떠올리면 가장 대표적으로 떠오르는 것이 유교 사상이니, 그만큼 동아시아 국가에서 유가 그리고 유교 철학은 보편적으로 전통을 상징하는 철학으로 인식됐었다. 그렇기에 나 역시 동양철학을 처음 접할 때 유교 철학의 저서로 입문했었다.

 

그렇게 유교 철학을 읽고 공부하는 과정에서 나는 유교와 유가 철학이 춘추전국시대에는 수많은 사상 중의 하나였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 뒤 제자백가로 알려진 여러 학파들의 저서를 읽으면 다양한 사상의 이론을 접하게 됐다. 다양한 제자백가 사상을 읽으면서 나는 크게 두 가지로 중국의 사상을 분류했는데, 하나는 유가로 대표할 수 있는 이타적인 철학, 또 하나는 법가로 대표할 수 있는 이기주의 철학이다. 물론 이 외에도 다양한 갈래의 철학이 많지만, 난세의 시기에 여러 갈래의 학문이 일어서게 된 근본적인 요인은 나라를 통치하는 방법론을 고민하면서 다양한 사상들이 태어났고, 그런 사상들 중에서 최종적으로 후세에 현실적으로 영향을 막대하게 미친 사상은 유가와 법가였기에, 나는 이 두 사상을 바탕으로 제자백가를 이해하려고 했다.

 

유가의 사상을 집중하여 공부하는 과정에서 묵자의 사상을 발견하고 관심을 가졌다. 사실 유가와 묵가는 성격이 비슷하다. 둘 다 이타주의적인 철학을 대표하며, 둘의 철학은 타인에 대한 배려와 사랑을 근본으로 삼는다는 점에서 유사한 점이 많다. 그렇기에 흥미를 가지고 《묵자》를 읽었는데 확실히 유가 철학보다 훨씬 진보적이고, 급진적인 사상이 많이 보였다. 게다가 《묵자》를 자세히 읽어보면 유가 철학에서 지향하는 개념들을 부분적으로 차용하여 사용하는 경우도 많고 (ex 군자라는 개념), 또 유가 철학에서 경전으로 받드는 《시경》, 《서경》 등등의 경전들을 인용한 흔적도 보인다. 이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일설에 의하면 《묵자》의 저자인 묵적은 유가의 아버지로 불리는 공자의 고향인 노나라 출신이라고 하며 생산 계층인 하층민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유가 학문을 익혔다고 한다. 이로 말미암아 추측해보자면 묵가의 창시자로 불리는 묵적은 이타주의 철학인 유가를 공부했지만, 유가가 가지고 있는 맹점, 즉 허례허식적인 모습, 그리고 이타를 적용하는 데 있어, 친족과 혈족들로 대표되는 가까운 사람들을 먼저 챙기라는 차별적인 이타관을 보고 굉장히 비판적으로 인식했던 것 같다.

 

그렇기에 나는 묵가는 유가의 철학을 바탕으로 하여, 유가 철학이 가지고 있는 모순점을 극복하고자 하는 일환에서 생겨난 사상이 아닌가 생각하며, 유가와 묵가 두 사상은 일란성 쌍둥이라고 생각한다. 유가의 철학은 신분에 대한 위계를 강조하고 있으며, 사상의 수요층은 사대부나 지식인층, 즉 기득권 세력을 염두에 두고 전개하고 있다. 그러나 묵가는 이런 유가의 이타주의적 철학을 확장하여 지배층을 넘어 피지배층을 대상으로 철학을 전개하고 있다. 여러 문헌에 의하면 유가의 세력과 묵가의 세력은 거의 대동소이했다고 한다. 이 말은 묵가의 철학이 성행했을 당시에는 유가의 철학만큼이나 세가 강했다는 뜻이고, 그만큼 피지배층의 지지를 받았다는 뜻이다.

 

《묵자》로 살펴볼 수 있는 묵가의 철학은 유가의 철학보다 이타주의적인 성격을 더욱 확장하고 강화하였으며, 유가가 가지고 있던 맹점, 군사적인 부분에 대한 문제점도 나름 극복하고 있다. 유가에서는 지도자가 군대를 움직이기보다 인심을 얻고 덕을 앞세워 적을 교화하라고 권면하는데, 사실 이는 현실 정치에 있어서 너무 이상적이다. 반면 묵가에서는 침략 전쟁을 하지 않을 것을 권고하는 입장이지만 만약 상대가 야욕을 앞장세워 무력으로 나에게 공격을 할 시에는 적극적으로 방어해야 한다는 점을 주장하며, 《묵자》에서도 공성과 방어에 대한 병법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 즉 전쟁을 지양하는 점은 유가와 비슷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쟁이 터졌을 시에는 무력으로 자국의 안보를 지킬 수 있어야 한다는 점을 《묵자》는 강조하고 있다. 이는 전쟁에 있어서 명분으로 뜬구름을 잡고, 전쟁에 있어서 구체적인 방침을 제시하지 않는 유가의 입장보다 훨씬 현실적이다.

 

묵가의 창시자 묵적은 그 자신이 피지배층이었으며, 하층민 출신이었기에, 당대의 피지배층이 겪는 고통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묵가의 철학은 유가의 철학과 궤를 함께하지만 유가보다 훨씬 진보적이며, 현실적일 수밖에 없다. 그럼 이런 피지배층의 지지를 받았던 묵가의 철학은 왜 사상 경쟁에서 패배한 것일까? 왜 유가 철학은 전통적으로 굳건하게 지지를 받고 발전했지만 묵가의 철학은 전국시대 이후로 사라진 것일까?

 

전국시대에 유가의 싸움닭이라고 할 수 있는 맹자는 자신의 저서 《맹자》에서 이단에 대한 이야기를 거론하는데, 특히 묵가에 대해 적나라한 공격을 펼치고 있다. 왜 맹자는 그토록 묵가를 경계한 것일까? 바로 자신이 신봉하는 유가 철학과 묵가 철학이 매우 비슷했기 때문이다. 이타주의를 근본으로 하는 철학이라는 공통점.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묵가는 유가가 규정하고 제도화한 질서를 무너트리는 입장이었다. 이는 전통적인 질서를 수호하는데 앞장선 유가의 입장에서 용납할 수 없는 사안이었다. 특히나 묵가의 사상은 피지배층을 대상으로 하고 있는 데다 유가와 비슷한 개념인 겸애를 내세우고 있어서, 하층민들의 지지를 받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반면 유가의 사상은 인의를 기본으로 하고 있지만, 군주는 군주답게, 아버지는 아버지답게, 백성은 백성답게를 강조하며 각자의 위치와 본분에 맞게 행동할 것을 권하고 있고, 이런 계급주의적인 발상은 당대의 지도자층에 기호에도 걸맞은 철학이었다. 철학과 사상이 주류로 자리 잡으려면 지도층의 수요도 중요하지만, 결국 핵심은 백성의 민심을 얻는 것이 포인트였다. 그런 점에서 유가 철학은 묵가 철학에 비해 열세였고, 그랬기에 맹자는 그토록 묵가 철학을 경계하며 이단으로 치부했던 것으로 보인다.

 

마찬가지로 진나라가 멸망하고 한나라가 통일이 되었을 때, 한 고조 유방은 유가의 학파를 근본으로 내세우며 국가의 으뜸 학문으로 여겼다. 한 고조는 천하를 통일하였지만, 당시 공신들은 하층민 출신이 대다수라 황제가 있는 궐에서 예의를 모르고 서로 핏대를 높여 싸운 적이 많았다. 이를 걱정하던 한 고조가 숙손통을 통하여 유교 철학을 받아들이고 이를 바탕으로 황실의 권위를 세웠다. 무식하던 공신들은 새로운 유가적 의례를 배우고 따르기 시작했고 예의를 갖추는 신하들을 바라보며 한 고조는 "황제라는 자리가 귀하다는 것을 이제야 알겠다."라며 유학자들을 칭찬한다. 이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유가 철학이 전국시대 사상 경쟁에서 승리했다는 점이다. 유가 철학이 승리했다는 점은 반대로 말하면 유가가 그토록 질시하고 시기하던 묵가 철학의 몰락을 의미하는 것이다. 당대의 독재자인 황제의 입장에서는 지배층의 권위를 내세우지 않고, 피지배층의 입장에 선 묵가 철학보다, 지도층의 권위와 의식을 강조하는 유가 철학이 더 구미에 당기기 마련이었다. 세월이 지나 한나라의 전성기인 무제 시절, 무제가 유가 철학이야말로 나라의 근본 학문이라고 다시금 규정하였는데 이 결정은 2000년의 동아시아 사상을 결정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한나라가 건국된 이래로, 유가와 도가를 제외한 다른 제자백가 철학들은 종적을 감춘다. 물론 묵가 역시 마찬가지였다. 유가의 철학은 여러 저서가 발간되고 훗날 성리학과 양명학 등등으로 발전한다. 그래서 오늘날 유학은 동양고전의 메인을 담당하고 있다. 반면 묵가의 철학은 전국시대에서 사상 경쟁에서 패배한 이후 발전을 멈췄으며, 오늘날 전해지는 문헌이라고는 《묵자》가 전부다. 학자들의 주장에 의하면 전해오는 《묵자》 텍스트도 당대에 온전한 묵가의 사상이기보다, 유가 사상가들의 의견이 덧붙여진 흔적이 보인다고 한다.

 

그래서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애잔한 마음이었다. 《묵자》가 주장한 사상은 무엇보다도 당대의 하층민들의 고충을 가장 많이 반영했으며, 당대 하층민들의 목소리를 가장 잘 이해한 철학이었다. 그런 철학이 사상 경쟁에서 패배하여 이렇게 초라한 모습으로 전해지고 있으니, 책을 읽으면, 읽을수록 측은지심이 깊어졌다. 그러나 한편으로 생각해보면 참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이렇게 오늘날 《묵자》라는 텍스트가 전해지는 것에는, 묵가의 철학을 보존하고 알리기 위해 전국시대 이래로 많은 위인들이 노력을 했을 것이다. 물론 그렇게 전해지는 와중에 텍스트의 일부가 분실되기도 하고 더러는 유학자들의 손에 수정되기도 하였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전하는 《묵자》 텍스트를 통하여, 당대의 묵가 사상을 파악하는 데에 부족함이 없으니 다행스러운 일이 아니겠는가. 만약 《묵자》라는 텍스트가 세월 속에 사라졌다면, 우리는 전국시대에 하층민의 목소리를 대변한 철학이 있었다는 것을 모를 수도 있다. 그렇기에 온전한 텍스트는 아닐지라도 현전하는 《묵자》를 통해 우리는 동양에서 가장 이타적인, 가장 진보적인 철학이 기원전 전국시대에 있었다는 점을 명확하게 확인할 수 있다. "기원전에 하층민을 진정으로 이해하고 초월적인 겸애를 주장하며 하층민의 입장에서 그들을 대변하였던 급진적인 사상 " 이것이야말로 《묵자》가 오늘날 후대인에게 주는 깊은 울림이 아니겠는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욱리자 - 중국판 목민심서
유기 지음, 신동준 옮김 / 인간사랑 / 2014년 1월
평점 :
품절


언제부턴가 우리 사회에서는 스토리텔링을 굉장히 중요시했다. 같은 내용이더라도 이야기를 첨부하거나 하나의 스토리를 만들어 표현한다면 사람들에 공감을 얻어데는 데 있어 효과적이라며 너도 나도, 적극 스토리텔링을 권유하는데 《욱리자》 역시 이런 스토리텔링을 기본으로 한 고전이다. 저자인 유기는 원말명초의 격변기에 활동했던 인물로, 명나라를 개국한 주원장의 핵심 참모로 활동하였다고 한다. 주원장은 유기를 두고 '한나라를 건국한 한 고조에게는 장량이 있고, 촉한의 유비에게는 제갈량이 있는데, 자신에게는 유기가 있다.'라며 굉장히 칭찬했는데, 이는 참모가 받을 수 있는 최고의 찬사였다. 그만큼 유기는 주원장의 통일 정책에 있어서도, 그리고 통일 이후의 명나라의 행정을 정비하는 과정에서도 두각을 드러낸 브레인이었다. 원말명초 시기 유기는 원래 원나라에서 봉급을 받는 공무원이었다. 모든 왕조의 말기가 어지럽듯, 당시 원나라도 망해가는 과정이었으므로, 행정은 엉망이고 인사 배치는 출신을 따지고, 권력자의 코드인사가 일반적이었기에, 이런 상황에서 유기는 분노하며 벼슬을 내던지고, 칩거하며 군사를 기르며 때를 기다렸다. 그런 과정에서 유기는 자신의 울분을 저술로 표현하였는데 그 저서가 바로 《욱리자》였다고 한다.

 

시대를 막론하고 식자 계층은 언제나 당대의 시대를 비판적으로 인식하는데, 유기가 활동했던 시대는 원나라가 망하기 직전이었기에 식자들의 비판의 강도가 높을 수밖에 없었다. 유기는 시대 비판을 넘어 스스로 시대를 개혁하고자 하였는데, 《욱리자》 역시 그런 일환으로 저술된 책이다. 재미있는 점은 그는 《욱리자》를 통해 현실을 노골적, 직설적으로 비판하지 않고, 우화를 통해 우회적으로 비판하고 있는데 왜 이렇게 돌려서 현실을 비판했을까?

 

지식인들이 무엇을 비판할 때에는 크게 두 가지 방법을 사용한다. 첫 번째는 직설적으로 비판하는 방법, 두 번째는 돌려서 비판하는 방법. 첫 번째 방법은 직설적인 만큼 명료하고 깔끔하지만 그만큼 위험 부담도 크다. 너무 직설적인 방법이기에 비판의 대상으로부터 집중적인 반격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두 번째 방법은 다소 간접적이지만, 첫 번째 방법보다는 위험 부담이 없는 편이다. 아마 유기가 우화를 통하여 현실을 비꼰 것은 원나라의 세도가들의 눈을 피하고자 했던 보신책이 아니었을까 생각해본다. 또한 우화 형식은 앞에서도 말했듯 스토리텔링 기법이기에, 문자를 배우지 않고 글을 모르는 백성들이 접하기에도 용이했다.

 

또 생각해 볼 점은 《욱리자》의 우화들은 대체적으로 굉장히 자극적인 내용이 많다. 이를 통해서 생각해보면 유기는 비판의 방법론은 직설적인 비판보다 우화를 통한 간접적인 방법을 선택했지만, 우화의 내용에는 사회를 개선하고자 한 자신의 울분에 찬 감정을 적극적으로 담아 표현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욱리자》의 필법에서 나는 유기의 분노에 찬 감정적인 울분을 읽어낼 수 있었다. 이런 감수성이 가득한 필법으로 작성된 고전을 하나 더 꼽아보자면 사마천의 《사기》가 떠오른다. 사마천은 유기와 마찬가지로 자신이 느꼈던 당대의 모순점, 그리고 인물의 논평을 《사기》에서 가감 없이 감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사실 이런 우화 중심의 고전의 대표적인 작품은 《장자》인데, 《장자》와 《욱리자》는 우화를 사용하여 자신의 철학이나 생각을 전개하고 있다는 점에서 형식적인 공통점이 있지만 내용상의 차이점은 존재한다. 《장자》는 탈 세속적인 성격을 가지는 대표적인 도가 사상을 대표하는 책이다. 따라서 《장자》의 우화는 대체적으로 허무적인 성격을 가지며, 현실의 범주를 초월한다. 그러나 《욱리자》의 우화들은 세속적이며, 현실참여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다. 물론 《욱리자》의 우화들 중에는 현실 초월적인 이야기도 많이 나오지만, 이는 표면상으로 봤을 때의 이야기고 궁극적으로 가리키고 있는 것들은 현실의 부조리함을 꼬집고 있다.

 

아무튼 현실에 대한 불만이 강하며, 사회의 개선에 적극적으로 행동하려 하였던 유기는, 명나라를 개국하는 주원장을 만나 그의 핵심 참모로 등용된다. 주원장은 원나라를 몰아내고 명을 개국하여 중원에 새로운 왕조의 탄생을 알린다. 바야흐로 유기가 욱리자를 통하여 꿈꿨던, 문명의 융성함이 실현되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유기의 생각대로 새 시대는 흘러가지 않았다. 유기가 희망을 걸었던 주원장은 권력을 독점하자, 측근들을 의심하며 대규모의 숙청을 감행하는데, 여기에는 유기 역시 포함되었다. 결국 주원장의 측근에 질투를 받은 유기는 벼슬을 버리고 정계에 은퇴하여 짧은 노년을 보내다 죽었다는데 일설에 의하면 독살됐다는 이야기도 있다. 이때 유기는 어떤 심정이었을까. 《욱리자》를 통해 보건대 유기는 굉장히 감정적인 성격을 지닌 것 같았는데 굉장히 마음고생을 많이 했을 것 같다. 어쩌면 시대의 고질적인 문제점을 알고 있다 하더라도, 특정 개인의 노력만으로는 시대의 문제를 개선하는 것에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는, 지고 불변의 역사의 법칙을 깨닫지 않았을까 싶다. 그가 어떻게 최후를 맞이했건 간에, 우리는 오늘날 《욱리자》라는 문헌을 통해 당대의 혼란했던 시절, 사회를 개선하고자 노력했던 한 지식인의 순수한 열정을 확인할 수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청나라 역대 황제 평전 - 변화와 혁신을 두려워하는 지도자는 도태된다 역대 황제 평전 시리즈
강정만 지음 / 주류성 / 2019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우리는 고조선 이래로 직간접적으로 중국과 관계를 맺어왔고 그렇기에 중국 대륙의 정치구도와 흐름은 한반도에도 커다란 영향을 끼칠 수밖에 없었다. 오늘날 우리나라를 설명할 때 미국을 빼놓고 설명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과거의 한반도를 명확히 파악하려면 중원 대륙의 역사를 빼놓고는 설명할 수 없는 부분이 많다. '주변의 강대국들의 막대한 영향력.' 과거에도 그랬고, 현재에도 여전히 진행 중인데, 이는 어쩌면 지정학적으로 반도에 위치한 우리나라의 숙명일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나는 우리의 과거를 돌아보고 우리의 역사를 배우는 과정에서 중국의 역사에 대한 지식의 필요성을 느꼈고, 그 결과 평생의 독서 숙원 사업 중 하나인 《자치통감》 완독 작업에 들어갔다.

 

그러나 《자치통감》이 어떤 저서인가? 다루는 시기는 전국시대 이래로 송나라 건국 이전까지 무려 1400여 년을 다루고 있으며 방대한 시대를 다루기에 책의 권수도 무려 294권으로 구성됐다. 이는 오늘날 500페이지 기준 번역본으로 31권에 해당하는 분량이니 엄청난 분량을 자랑하는 저서다. 사실 분량이야 많더라도 번역만 되어 있다면 인내심을 가지고 읽으면 그만이다. 그렇기에 나는 방대한 분량이 부담이 되긴 했지만 사실 걱정되진 않았다. 내가 인식한 《자치통감》의 문제점은 바로 송나라 이후부터 내용이 끊어진 점이다. 다행히 《자치통감》을 완역한 권중달 교수는 최근 《자치통감》의 후속작인 《속자치통감》 완역 작업에 나섰는데, 이 작업이 완료되면 《자치통감》에서 다루지 않았던 송, 요, 금, 원나라의 역사까지도 읽을 수 있게 된다. 그러나 문제는 또 남아있다. 원나라 이후의 역사인 명나라와 청나라의 역사서는 대체 어디서 구한단 말인가? 다행히 명나라와 청나라의 정사인 《명사》와 《청사》는 《조선왕조실록》이 번역되어 무료로 공개된 사이트에서 열람할 수 있게 해놨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한글로 번역된 것이 아니라 원문으로만 되어 있어서 일반인들이 접근하기에는 한계가 있다.

 

이렇다 보니 나는 명나라 역사와 청나라 역사를 정리한 책을 찾았고, 그런 과정에서 《명나라 역대 황제 평전》과 이번에 발간된 《청나라 역대 황제 평전》 세트를 알게 됐다. 책은 내가 생각하던 조건을 만족시켰는데, 정사인 《명사》와 《청사》를 기준으로 그 시대를 다룬 각종 사서들을 참고하여 정리했다고 한다. 앞으로 중국의 다른 왕조를 정리한 시리즈가 계속 출간될지는 모르겠지만, 나에게는 명나라와 청나라 역사 파트가 절실하게 필요했는데 이를 만족하고 있으니 나에게 있어 안성맞춤의 책이다. 명나라와 청나라 시기에 우리나라는 조선왕조의 집권기였다. 알다시피 조선은 대한민국이 들어서기 전에 있었던 마지막 봉건왕조 국가이며, 그렇기에 우리 사회에 직간접적으로 많은 영향을 줬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전통적인 가치관과 풍습 예법 등등은 거의 대부분 조선왕조의 유산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래서 나는 조선을 집중적으로 탐구하고 알아가는 과정에서, 조선을 알면 알수록 동시대에 존재했던 중원 대륙의 명나라와 청나라의 존재가 생각 외로 조선에 엄청난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점을 깨달았다.

 

최근 인문학, 고전 열풍이 불면서 동양 철학, 중국 철학과 역사에 대한 지식의 수요가 예전보다 높아졌다. 그러나 개인적으로 이러한 흐름에서 아쉬운 점은 유행하고 있는 동양학은 대체로 춘추전국시대에 국한됐다는 점이다. 제자백가 철학도 춘추 전국시대의 산물이며, 역사서로는 《사기》가 주목을 받고 있는데, 이 역시 춘추전국시대를 다루고 있다. 이렇게 특정 시대만 집중적으로 조망한다면, 중국 역사나 사상의 거대한 흐름을 파악하기가 어려운데, 이는 바꿔 말하면 중국과 밀접하게 영향을 주고받은 우리의 역사도 파편적으로 인식할 수밖에 없다는 뜻이 되지 않겠는가. 특히 조선은 명나라를 아버지처럼 사대하였고, 명이 멸망하고도 명나라의 이념과 가치관을 고수하려고 노력했다. 그래서일까 명나라의 멸망 과정을 보면 조선의 멸망 과정과 매우 유사하다. 청나라는 병자전쟁과 정묘전쟁(매번 내가 역사 서평에서 되풀이하며 밝혔는데 나는 왜란과 호란이라는 말을 좋아하지 않는다. 임진년과 병자년에 일어난 사건은 단순히 오랑캐가 난리를 피운 것을 넘어 국가 대 국가 간에 전면적으로 싸운 '전쟁'이라고 생각한다.)을 통해 우리와 악연을 맺은 것으로 유명하다. 하지만 청나라의 건국 세력인 여진족은 조선의 개국과 깊은 관련을 가지고 있으며, 그 이전 시대에도 발해나 고구려의 유민에 포함되어 우리 민족과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주고받았다. 요즘 도서 출판 시장에는 '조선'을 테마로 한 주제의 책들이 쏟아져 나오고 《조선왕조실록》을 재해석하여 나온 책이 유행하고 있다. 그러나 앞서 주장했듯, 조선을 똑바로 알기 위해서는 명과 청을 알아야 한다. 근데 작금의 출판계는 조선을 강조하면서 명과 청나라의 역사에는 관심이 없다. 그나마 인문학의 열풍이 불어 중국의 춘추전국 시대만을 쫓고 있는데, 이런 상황 속에서 《명나라 역대 황제 평전》과 《청나라 역대 황제 평전》이 발간됐으니, 편파적인 인문학 시장에서 이 두 책의 가치는 남다르다고 할 수 있다.

 

이번 글에서는 최근에 발간된 《청나라 역대 황제 평전》을 집중적으로 다루려고 한다. 책은 청나라의 황제들을 중심으로 청나라의 정치사를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다. 읽어본 바, 청나라의 봉건 황제들은 역대 다른 왕조들의 지도자들에 비해 굉장히 양호한 편이었다. 황제들은 자기 계발에 최선을 다했고, 능력과 자질 면에서도 평균 이하의 모습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청나라가 명을 몰아내고 중원에 주인이 될 수 있었던 가장 큰 원인은 바로 실용주의였다. 명나라 말기에 황제들은 정사에 뜻을 잃고, 사치와 마약, 주지육림에 빠져 정사를 돌보지 않았다. 반면 신흥 세력인 청나라는 실용주의를 바탕으로 제도와 군사조직을 정비하였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몰락한 명을 멸망하고 중원의 새 주인으로 자리 잡았다. 중원에 자리를 잡은 청나라는 강희제, 옹정제, 건륭제 시기를 거치면서 최절정기를 꽃피운다. 영토를 더욱 확장하여 지금의 중국 국경선 지대를 확정한 것도 이 시기에 달성한 위업이다. 그러나 건륭제 이후에는 나라가 서서히 쇠퇴하기 시작하는데, 그런 과정에서도 청의 후반부의 지도자들은 쇠락하는 나라를 되살리기 위해 나름의 최선을 다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청나라는 왜 멸망한 것일까? 무엇이 문제였던 것일까?

 

중국의 정치제도, 막강한 황제를 중심으로 하여 운영되는 제도의 기원은 기원전 전국시대를 통일한 진나라가 구축하였다. 물론 시황제의 진나라는 엄격한 법치 때문에 2대를 넘기지 않고 멸망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나라의 시스템은 역대 중국 왕조의 골격을 형성했다. 진의 뒤를 이은 한나라 그리고 그 이후의 여러 나라들은 하나같이 진나라의 황제 중심적 정치 시스템을 발전시켜나갔고 계승했다. 한편 중국의 의식과 사상은 전통적으로 유학을 기초로 하였는데, 이는 한 고조와 한 무제가 유학을 국학으로 숭상하면서부터 시작됐고 이후 역대 왕조들은 유학을 으뜸으로 여기며 이를 토대로 지적 활동을 전개했다. 이런 사실을 종합해보면 중국의 제도와 의식은 기원전의 제도와 철학을 계승하고 발전시킨 셈인데, 이는 청나라 역시 마찬가지였다.

 

반면 서양에서는 기원전 로마에서 민의를 바탕으로 한 공화정 체제를 수립했다. 이후 로마는 특정 개인이 권력을 독점하는 황제 중심의 제도로 변질됐고, 로마 이후 중세가 열리자 서양에서도 영주를 바탕으로 한 봉건주의 사회에 돌입하게 됐다. 당시 중세에서는 동양과 마찬가지로 특정 개인이나 가문이 권력을 독점하고 세습하는 제도를 따르고 있었으며, 예수로부터 비롯한 종교관이 모든 사상을 규제하고 있었다. 근대사회에 접어들면서 서구에서는 권력을 특정 개인이 독점하는 왕정제를 폐지하기 시작했고, 정치의 전면에 피지배층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이를 통해 시민들은 자신들의 인권을 드높이기 시작했고, 이를 토대로 민주체제를 확립하는데 성공한다. 한편 사상적으로도 많은 혁신이 일어났는데, 기존의 종교 중심의 사상을 타파하고 현실을 바탕으로 한 학술 체계를 성립하는데 성공한다. 이러한 대변혁을 바탕으로 서구 열강은 과열된 유럽 대륙을 벗어나 식민지를 만들기 위해 눈을 돌렸는데, 그런 서구 세력권에 동양 사회는 그야말로 먹기 좋은 떡에 불과했다.

 

즉 청나라는 이런 시대적인 흐름을 읽지 못하고, 기존 전통의 가치관 - 봉건주의적 중국 중심의 천하관인 중화사상- 을 고수하였다. 이렇다 보니 기술적으로, 제도적으로, 사상적으로도 앞선 서양의 우월함을 극복하지 못하고 멸망에 이른다. 약소한 부락 사회에서 시작한 여진족이 청이라는 거대한 나라를 개국할 수 있었던 원인에는 실용주의와 넓은 세계관에 있었다. 청을 개국한 청 태조와 청 태종은 여진족의 주적인 명나라 중원에만 집중하지 않고, 인근 국가인 조선과 몽골 그리고 여러 이민족의 부족들도 포용하려고 노력했다. 또한 원나라의 몰락을 참고하여 출신을 따져 차별적으로 대우하기보다, 능력이 있으면 출신과 상관없이 등용하는 포용적인 모습을 보여줬다. 이런 넓은 시야가 있었기에 여진족은 열세를 극복하고 국제적인 제국인 청을 개국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런 청나라도 결국 시대가 지나면서 보수화되고 한족이 만들어낸 이데올로기 중화사상에 빠져 중국 중심의 세계관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했다. 그 결과 격변하는 시대의 상황을 모르고, 그저 우물 안 개구리처럼 중화사상 이데올로기 안에서 개혁을 외쳤으니, 황제들이 최선을 다해 노력한들 나라가 망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서세동점이 일어난 근본 원인에는 유학에서 비롯한 '중화사상'에 있다고 생각한다. 서구 열강이 개혁을 단행할 무렵 동양에서는 여전히 중화사상이 뿌리 깊게 영향력을 과시하고 있었다. 유학은 동양을 대표할 수 있는 전통 사상이고, 뛰어난 덕목도 많다. 그러나 후대로 가면 갈수록 실질을 경시하고 명분을 중요하는 가치관 때문에 현실성과는 동떨어진 사상으로 변질됐다. 문제는 이런 폐해를 가진 중화사상이 《공산당 선언》에서 '하나의 유령이 유럽을 배회하고 있다.'라고 표현하듯, 유령처럼 동양 사회를 2000년 이래로 계속해서 배회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이런 중화사상 앞에서 청나라의 장점인 실용주의는 점점 가려지기 시작했고, 청의 황제들 역시 중화사상에 예속되기에 이르는데, 이는 결국 중원의 영토는 여진족이 점령했지만, 정신적으로는 한족이 중심이 되어 만든 중화사상에 굴종한 것이나 다름없다. 이런 비극은 청나라뿐만 아니라 우리 조선 역시 마찬가지였다. 유령처럼 배회하는 '변질된 중화사상'을 맹목적으로 고수하다 조선 역시 멸망했으니까 말이다. 이렇듯 하나의 사상, 그 사회를 지탱하고 있는 관념의 힘은 생각보다 엄청난 영향력을 가진다. 미시적으로, 그리고 겉으로 보기에는 별것 아니고 와닿지 않지만, 거시적인 관점으로 해석해볼 때 사상과 관념은 시간적으로도 공간적으로 막대한 영향력을 끼쳤다.

 

청나라의 쇠락 조짐은 언제부터 이뤄졌을까? 책에서 가장 재미있는 대목은 강희제, 옹정제, 건륭제로 이어지는 청나라의 황금기라고 생각한다. 이 시대의 군주들의 행적과 치적을 보면 '한계가 많은 독재 위주의 권력 시스템이 이토록 투명하고 뛰어나게 구현될 수 있구나'라고 할 정도로 깊은 인상을 받았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청의 몰락은 청의 최전성기라고 할 수 있는 건륭제 시기에서부터 시작됐다. 건륭제는 집권기 초반에는 선대의 치적을 이어받아 정사에 매진하는 모습을 보여줬고 정책의 결과도 좋았다. 그러나 말기로 갈수록 축적된 잉여 생산물을 바탕으로 하여 사치하는 모습을 보여줬고, 특정 대신을 총애하였다. 이런 황제의 흔들리는 모습은 지방 행정의 부패로 이어졌는데, 그렇기에 건륭제 집권 후반기에는 겉으로는 태평성대였지만 내부적으로는 부정부패가 싹트기 시작했다고 한다. 이런 부정부패는 후대의 정권에사회 혼란과 민란으로 구체화되었고, 이는 서양의 침략과 함께 청을 망하게 하는 주요한 원인이었다.

 

동양의 철학 도가 사상에 의하면 가장 성할 때에 쇠락한 기운이 싹트니, 이를 경계할 것을 강조하는데, 이러한 이치는 역대 왕조에서 빈번하게 발견된다. 전한 시대의 최전성기를 구현했다는 한 무제 집권기는 한나라를 대표하는 시대지만 한편으로 자세히 들여다보면 쇠락을 예견할 수 있는 싹들을 발견할 수 있다. 그뿐일까 당나라 중흥의 군주로 불리는 당 현종 시대도 마찬가지다. 현종 집권기 초반은 당나라의 국력을 한층 더 드높이는데 일조하여 중흥의 시기로 손꼽힌다. 그러나 이런 성세도 잠시뿐 집권 말기에는 양귀비를 비롯한 주색과 미신에 빠져 정사를 포기하였고, 이로 인해 안녹산의 난이 일어나 당은 쇠락의 길로 빠지게 된다. 청나라 역시 이런 사례와 마찬가지였다. 이를 토대로 우리는 성공 가도를 달릴 때에 교만하지 말고, 더욱더 자신을 돌아봐야 한다는 점을 배울 수 있다.

 

아무튼 책의 교훈을 한 마디로 집약해보자면 '어떤 일을 시작할 때에는 시대적인 흐름과 시류를 읽을 수 있는 능력이 중요하다.'라고 할 수 있다. 청나라가 만약 이런 교훈을 알았더라면, 변하는 시대 흐름에 맞춰 자신을 객관적으로 인식하고 이를 토대로 개혁에 성공했다면, 어쩌면 오늘날에도 중원의 주인은 청나라일지도 모른다. 이러한 교훈은 개인에게도 깊은 울림을 준다. 어떤 사업을 하거나 어떤 분야에 일을 할 때에는 열심히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내가 속한 업종이 어떤 전망이 있는지, 어떤 트렌드가 대세인지, 앞으로 유행하게 될 아이템은 무엇인지에 대해서 끊임없이 연구해야 한다. 성공을 위해 노력을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핵심은 노력의 방향에 있다. 잘못된 방향으로 노력한다면 그것은 노력하지 않는 것보다 더 나빠질 수 있으니, 이러한 노력의 방향을 알기 위해서는 시대적인 흐름을 읽을 수 있는 거시적인 시야가 너무나도 중요하다. 더더군다나 오늘날 사회는 과거보다 훨씬 개방적이고 변화가 빠른 시대를 살고 있다. 그렇기에 이런 거시적인 흐름을 읽는 시각은 과거보다 오늘날 더욱 중요한 덕목이라고 생각한다. 묵직한 청나라 역사가 최종적으로 나에게 준 교훈은 위와 같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에라스무스 교육방법론 - 에라스무스가 권하는 고전공부법
에라스무스 지음, 김성훈 옮김 / 인간사랑 / 2019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최근 도서 출판시장에서 인문학이 유행하고 있다. 과거에 인문학은 전공자나 특별히 관심을 가지는 사람들만 찾았던 분야지만 오늘날 대중적인 관심을 받으면서 예전과는 다르게 남다른 존재감을 과시하고 있다. 그러나 인문학을 처음 접하는 대다수의 사람들은 난해하고 접근하기 어려우며 막막한 인문학 공부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 어려움을 겪는다고 한다. 남들이 대세라고 해서 큰마음을 먹고 인문학과 관련된 책을 구매하여 읽어보려고 노력하지만, 특유의 어려운 진입장벽 때문에 빈번히 포기하는 사람들도 많다고 하며, 인문학에 대해 배움을 시도하고 싶지만 두려움 때문에 시도하지 않는 분들도 많다고 한다. 그래서 나도 종종 인문학에 대한 로드맵이나, 고전과 친해지는 방법에 대한 질문을 종종 받는 편인데, 나도 내 코가 석자인지라 누군가를 가르칠 만한 수준이 아니기에 매번 한발 물러나는 대답을 하거나, 겸손을 빙자한 침묵으로 대응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이 책이 궁금했다. 책의 저자 에라스무스는 인문학이 꽃을 피운 르네상스 시대에 교육철학으로 이름난 인물이다. 보통 에라스무스의 대표작으로 《아동교육론》을 꼽는데, 사실 나는 《아동교육론》보다 《교육방법론》이 더 궁금했다. 인문고전 교육이 보편화된 르네상스 시대에 최고의 석학이 제시하는 인문학 공부법이라니, 고전에 관심이 있고 고전 공부를 어떻게 하면 효율적으로 할 수 있을지 매번 고민하던 나로서는 굉장히 흥미가 가는 주제였기 때문이다. 《교육방법론》은 짧은 책이었고 내용은 간결했다. 책에서 에라스무스는 고전에 해박한 지식을 바탕으로 한 비유와 은유를 섞어서 논의를 전개하고 있는데, 그리스 로마 고전에 대한 지식이 없다면 다소 생소하게 읽히겠지만, 읽어 보건대 배경 지식이 없더라도 저자의 핵심 내용을 파악하는 데에는 전혀 문제가 없을 듯싶다.

 

에라스무스는 책에서 주장한다. 일단 스승을 최고 좋은 사람, 그리고 인품도 좋은 사람을 만나야 한다고. 어찌 보면 매우 당연한 소리로 여기겠지만 책에서 주장하는 스승의 기준은 생각보다 너무 이상적이었다. 에라스무스가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스승의 조건은 특정 인문학 과목을 넘어 다방면적으로 박식하며 깊이 있는 지식을 갖춰야 하고, 언어 구사력이 좋고, 인품이 뛰어나야 한다. 물론 이런 스승을 만나면 행운이겠지만, 사실 이런 조건을 가진 스승은 교육이 보편적으로 활성화된 현대 사회에서도 구하기 힘들므로 기준이 너무 이상적이지 않나 생각한다.

 

어쨌든 에라스무스는 좋은 스승에 가르침 아래에서 지식을 섭렵하기 전에 언어를 꼼꼼하게 공부할 것을 권한다. 이는 굉장히 일리 있는 지적이다. 최근 나는 서점에서 베스트셀러 중 하나인 《공부머리 독서법》이라는 책을 훑어봤다. 그 책의 핵심은 독서력 즉 독해력이야말로 아이의 성적을 좌우한다고 주장하는데, 이런 예를 들어놨다.《공부머리 독서법》의 저자가 학생들을 가르칠 때의 에피소드인데, 저자는 자신이 가르치는 아이들에게 선행 학습에 과정으로, 다음 교과 과정에 배울 내용에 해당하는 교과서 분량을 미리 읽어 오라고 했다. 그러자 한 학생이 이렇게 답을 했다고 한다. '선생님 이 부분은 안 배워서 모르는데요?' 그러자 저자는 이렇게 반문했다. '학습을 하라는 게 아니라 책을 읽어오라는 뜻이야.'라고, 그러나 그런 대답을 받은 아이들의 표정에는 당혹스러운 표정이 가득했다고 한다. 이 에피소드를 통해 저자는 학원에서 주입식으로 선행 학습하는 것을 당연시하게 여기다 보니, 스스로 글을 읽는 능력은 떨어지기 시작했고, 이는 결국 성적 저하로 이어지게 된다는 결론을 내린다.

 

나는 이 에피소드에 대한 저자의 분석이 굉장히 일리 있는 분석이라고 생각한다. 실제로 글을 잘 읽는 아이들은 대체적으로 성적이 좋은 편이다. 우리나라의 시험은 모두 텍스트로 되어있고, 이를 잘 생각해본다면 공부에 있어 가장 기본은 글을 해독하는 능력이라고 정리할 수 있다. 그렇기에 특정 수리영역을 제외한 대부분의 교과목은 엄밀하게 말해서 일차적으로 언어 구사력 그리고 독해력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사회탐구 영역의 문제도 일차적으로는 사료나 자료를 분석하는 것이 선행되어야 하는데 사료나 자료의 대부분은 텍스트로 구성되어 있다. 글을 잘 읽고 소화한다는 것은 특정 정보에서 무엇이 중요하고 무엇이 필요 없는지를 정확하고 빠르게 파악한다는 뜻이다. 그렇기에 잘 훈련된 언어 능력은 언어로 표현된 텍스트 위주의 시험에서 막강한 힘을 발휘할 수밖에 없다. 마찬가지로 에라스무스가 활동하던 중세 시대에 주류 학문인 인문학 역시 일차적으로 텍스트로 표현됐다. 그렇기에 예나 지금이나 학문을 하는 데 있어서 기초 중에 기초는 언어능력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에라스무스는 학습에 있어 언어의 중요성을, 무려 15세기에 일찌감치 깨닫고 주장하고 있었다.

 

또한 에라스무스는 언어의 표현이나 문법 공부만 주장하지 않고, 다양한 언어학, 즉 중세 시절에 상류 계층에서 통용되는 언어인 그리스어와 라틴어를 배울 것을 권한다. 왜냐면 이 당시에 저명한 고전은 모두 그리스어와 라틴어로 서술됐기 때문이다. 유럽의 중세 시대 즉 르네상스 시대에는 그리스어와 라틴어는 지적인 사람들이 특정 지역을 초월하여 사용하던 '세계적인 언어'였다. 마찬가지로 동양에서는 이러한 세계적인 언어가 바로 '한문'이었다. 이를 바탕으로 추측해보자면 오늘날에 에라스무스가 환생한다면 국제적으로 통용 가능한 '영어'나 떠오르는 '중국어' 교육을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했을 것 같다.

 

언어 능력이 궤도에 오르면 본격적으로 고전 공부에 들어가게 된다. 교사는 고전의 배경과 핵심 포인트 등을 상세하게 설명할 것을 권하는데, 당대에는 고전의 자구 하나하나에 얽매여 분석하듯 풀이하여 주입식으로 설명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에라스무스는 쓸데없이 소모적인 당대의 고전 교육에 회의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었다. 교사는 고전의 배경 그리고 고전에 중요한 부분을 위주로 강의해야 하며, 가장 중요한 핵심은 학습자의 참여를 이끌어내서, 함께 생각하고 서술하는 등의 토론 수업을 권장하고 있다. 즉 교육의 핵심은 바로 학생과 교수의 상호적인 교감을 강조한 셈인데, 취지는 좋지만, 규격화된 객관식 시험을 위해 대다수의 학생들을 가르치다 보니 어쩔 수 없이 주입식 교육을 할 수밖에 없는 작금의 대한민국 입시 체제에서는 에라스무스의 학습법이 너무나도 이상적이다.

 

에라스무스는 당대 최고의 인문학자였고, 최고의 교육자이기에 나는 그의 고전 공부 방법론을 주목했지만, 사실 오늘날 그의 교육론을 그대로 적용하기에는 현실적으로 무리가 있다. 다만 그가 주장했듯, 교육의 가장 기본은 언어능력이라는 점만큼은 오늘날에도 유효한 덕목인 것 같다. 아무튼 에라스무스의 고전 교육법을 오늘날 현실에 맞게 적용해본다면, 인문학을 공부할 때, 처음부터 욕심내서 어려운 원전 번역본에서 시작하기보다, 쉬운 말로 잘 풀어진 입문서나 개론서를 차분히 읽는 것에서 시작해야 한다. 좋은 입문서나 개론서를 통하여 고전이라는 텍스트의 주된 표현 기법과 서술 기법, 고사성어, 주요 인물들을 차근차근 익히고, 친숙해진 뒤 소위 기본기가 쌓인 뒤에 비로소 잘 번역된 고전에 도전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 생각한다. 나아가 시간적인 여유가 남는 사람이라면 한문이나, 라틴어 등등을 배워서 고전을 원전으로 읽는 시도를 해도 괜찮겠지만... 바쁜 현대인의 입장에서 그렇게까지 하기에는 무리가 아닐까. 지금 우리에게는 냉정하게 말해서 이전에 통용되던 언어라 할 수 있는 한문이나 라틴어보다 영어나 중국어가 더 실용적이고 중요하다. 그러므로 무리해서 고전에 통용되는 언어를 배우기보다, 원전을 훌륭하게 번역하는 부분은 전문가인 학자들을 의지하고, 좋은 번역본을 통해 인문학을 배우는 것이 여러모로 현실적인 대안이 아닐까 생각한다.

 

《교육방법론》에 포함된 편지에서 가장 재미있던 부분은 바로 생활고를 이야기한 에라스무스의 투정이다. 당시 유럽의 15세기에는 오늘날과 다르게 인문학이 사회를 이끌어가는 주요 학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라스무스는 돈 버는 게 힘들다고 투정하는 내용이 나오는데, 아마 에라스무스가 오늘날 밥벌이가 힘든 순수 인문학 전공자들의 모습을 보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똑같이 배를 굶는 입장이지만 아마 인문학의 전성기 시절인 르네상스 시절에 태어난 것을 오히려 다행으로 여기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아무튼 예나 지금이나, 대우받을 때나 대우받지 않을 때나 경제적인 기반이 없는 상태에서 순수 인문학을 전공하는 사람들은 대체적으로 생활고를 고민했던 것 같다. 끝으로 《교육방법론》은 에라스무스의 대표작인 《아동교육론》과 깊은 연관을 지닌 도서다. 사실 이 두 도서의 핵심은 같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고, 내용상으로 볼 때 《교육방법론》은 《아동교육론》의 후속작 같은 느낌이므로, 가능하다면 두 도서를 함께 읽는 것을 추천하고 싶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