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연의 : 리더십을 말하다 - 상 서울대학교 행정대학원 국가리더십연구센터 국가리더십연구총서 3
진덕수 지음, 정재훈 외 옮김, 김병섭 편집 /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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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연의》와 유교 철학이 꿈꾸고 있는 이상 국가의 중심은 인간이다. 백성 개개인이 행복지수가 높으며, 도덕과 예가 있는 국가. 내적으로 충만한 국가. 이런 이상 국가를 이룩하기 위해서는 대표적으로 두 가지 측면을 고려해야 하는데, 바로 제도적인 역할과 인간의 역할이다. 유교 철학에서는  두 가지 측면을 모두 중요하게 생각하지만 집중적으로 주목하는 부분은 바로 인간의 역할이다. 한편 《한비자》를 비롯한 법가의 철학도 이상 국가를 꿈꾸고 있는데, 이들이 꿈꾸는 이상 국가의 중심은 바로 부강이다. 힘과 패권이 강력한 나라, 엄격한 법으로 사회를 단속하며, 끝없는 외적 팽창을 추구하는 국가. 이런 이상 국가를 이룩하기 위해 법가의 철학자들은 제도적인 시스템을 주로 강조한다. 법가가 고찰하는 인간의 역할은 인간 중심의 휴머니즘을 바탕으로 둔 것이 아니라, 통치의 제도적인 시스템을 강력하게 구현하는 군주의 역할에만 한정하고 있다.

양자의 철학은 매우 극단적이며 상이했다. 그래서 서로가 서로를 극단적으로 증오했으며, 이런 시각을 《대학연의》 상권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그럼 어느 쪽이 추구하는 이상 국가가 더 좋은 국가일까? 내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두 사상 모두 한계가 있다. 《대학연의》로 대표되는 유학의 치국은 개개인의 행복과 복지가 보장된다는 장점은 있겠지만, 《한비자》가 추구하는 나라보다 객관적으로 국력이 약할 것이다. 반대로 《한비자》로 대표되는 법가의 치국은 국가의 부강과 외적인 팽창은 유학이 추구하는 나라보다 훨씬 뛰어나겠지만, 백성 개개인의 행복지수는 유학이 추구하는 이상 국가보다 떨어질 가능성이 높다. 법가가 추구하는 국가는 극단적인 국가주의 법률이 지배하는 사회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바람직한 국가는 외적인 팽창과 발전도 추구하면서 백성 개개인의 내적인 행복도 추구하는 국가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양자의 국가관은 단독으로 추구하기보다 상호 보완적으로 사용해야지 의미가 있다.

하지만 만약, 나에게 양자의 이상 국가 중에 하나만을 택일하라고 하면, 당연 《대학연의》가 추구하는 이상 국가를 선택할 것이다. 《대학연의》의 이상 국가는 외적인 팽창, 그리고 전쟁을 통한 부강 등등을 권장하지 않기에, 아마 현실에서는 약한 나라일지 몰라도, 인간 중심의 휴머니즘 사회를 추구하기에, 개인의 입장에서 행복을 지향하기에는 법가의 이상 국가보다 훨씬 좋은 조건을 가졌다. 오늘날 냉정하게 바라볼 때, 고루하고 현실에 맞지 않으며 보수적인 냄새를 풍기는 유학이 동아시아 대륙을 전근대까지 지배했던 근본적인 이유는 이런 따뜻한 휴머니즘을 품고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그래서 나는 유학과 관련된 책을 읽을 때마다 인간적인 냄새를 물씬 느낀다. 반대로 이런 인간적인 따스함을 법가의 책을 통해서는 느낄 수가 없었다.

흔히 유학을 전해 내려오는 전통적인 사상만을 쫓는 보수주의적 수구주의적 철학으로 간주하며, 법가 철학을 진보주의적 관점으로 바라본다. 물론 유학은 대체적으로 보수적인 관점이 주를 이루고 있다. 원래 유학은 과거 까마득한 상고시대의 모범적인 군왕들의 정치와 행적을 본받고자 하는 취지에서 태어난 학문이므로, 근본적으로는 보수주의와 맥을 함께한다. 반면 법가의 철학은 기존에 내려오는 전통보다 오늘날 현실의 시세에 따를 것을 종용하므로, 전통을 이으려는 유가의 기본 입장과 비교해볼 때 진보적인 색깔이 뚜렷하다. 그러나 과연 이러한 단편적인 일반론으로 보수와 진보의 개념을 유학과 법가의 철학에 각각 대입 수 있을까. 《대학연의》가 추구하는 이상 국가는 백성 개개인의 복지를 강조하고 있다. 복지를 강조하는 입장은 오늘날 진보를 대변하는 입장이다. 반면 《한비자》가 추구하는 이상 국가는 백성 개개인의 행복이나 복지보다, 국가주의적인 태도를 우선한다. 이렇게 놓고 봤을 때 어느 쪽이 더 진보의 이념과 가까운가? 나는 유학이 추구하는 인간 중심의 철학이 국가주의를 추구하는 법가의 시각보다 훨씬 진보적이라고 생각한다. 이렇듯 일반적으로 따분하고 지루하게 생각하는 유학의 이면에는 보수적인 성격뿐만이 아니라 진보주의적인 성향도 내재되어 있다.  

일제 강점 이후 우리가 줄곧 추구하던 국가철학은 법가의 철학과 닮았다. 외적인 성장을 국가의 목표로 하였고, 그러한 국가주의적 목표 아래 개인의 인권은 처참하게 무시당하는 목적전치현상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났다. 그 결과 오늘날 우리는 한강의 기적을 바탕으로, 국제 사회에서도 어느 정도 인정받는 국가가 됐지만, 화려한 겉과는 다르게 속은 썩어들어가고 있었다. 국민의 행복지수는 시간이 갈수록 낮아지고 있으며, 자살률, 도덕적 해이, 갑질 논란, 빈익빈 부익부 등등 내부 문제점이 더욱 커지고 있었다. 우리가 이룩한 물질문명의 척도에 비해 정신문화는 엄청 뒤떨어졌다. 이러한 내부적 모순이 정점에 달해 폭발한 사건이 바로, 박근혜 대통령의 국정 농단 사건이었다.

  묻고 싶다. 박근혜 대통령의 국정 농단의 원인을 국가의 행정이나 제도의 구조적인 측면에서 찾아야 할지, 아니면 박근혜 대통령과 주변의 사람들 개인의 사욕에서 찾아야 할지. 아마 일부 극우주의에 함몰된 극소수의 사람들을 제외하고, 상식이 있는 대부분의 국민들은 열이면 열 박근혜 대통령과 그 측근 사람들의 사욕이 근본 이유라고 꼽을 것이다. 왜 이렇게 도덕적으로 하차가 있는 인물이 국가지도자가 된 것일까. 우리는 왜 개인의 사욕을 노골적으로 추구한 지도자를 맞이하게 된 것일까. 《대학연의》를 읽으며 생각해본바, 이러한 지도자의 탄생 배경에는 법가가 추구하던 외적 성장 중심의 철학만을 무비판적으로 고수한 결과가 아닌가 싶다.

  법가의 국가관이 나쁜 것은 아니다. 행복한 나라는 자강할 수 있는 힘이 있어야 하며, 어느 정도는 외적인 토대가 구축되어야 국민 개개인이 행복을 추구할 여지가 생긴다. 그러나 법가의 국가관을 무조건적으로, 전적으로 추구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법가의 가장 큰 문제점은 바로 사회의 경직성이다. 법가는 국가를 부강하게 만든다는 목적을 이루기 위해 끊임없는 발전과 외적인 팽창만을 추구한다. 국가적 목표 앞에서 개인의 행복은 뒷전이다. 이런 극단적인 성장은 단기간에 폭발적인 성과를 보여줄 수 있을진 몰라도 장기적으로는 무너질 가능성이 높다. 특유의 경직성 때문에 민심의 지지를 받지 못하기 때문이다. 설사 민심의 이반이 일어나지 않더라도, 팽창만을 위해 간과하며 지나쳤던 내부의 모순들은 언젠가 터지기 마련이다. 법가를 맹목적으로 추종한 진시황의 진나라는 2대를 이어가지 못하고 멸망했다. 우리나라 역시 마찬가지다. 한강의 기적을 시작으로 끝없는 물적 성장만을 추구했던 결과가 바로, 정치의 타락으로 이어졌다.

시민들의 가득한 촛불 아래에서 나는 격노한 시민들의 뜨거운 열망을 읽을 수 있었는데 그 열망은 바로 '인간답게' 살고, '인간다운' 나라에서 살고 싶다는 바람이었다. 《대학연의》 상권에 나오는 인간 중심의 이상 국가 철학을 읽으며, 차가웠던 한겨울에 들어서 더욱 뜨겁게 느껴졌던 촛불의 외침이 떠올랐다. 비정상적인 정부가 사라진 지금,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정부를 얻게 됐는가? 국민의 심판은 그저 일회성 이벤트로 끝나는 것인가? 과연 지금의 정부는 '인간 중심'의 가치를 충분히 느낄 수 있는 정부인가? 아닐 것이다. 아직도 많이 부족할 것이고, 아직도 우리나라에는 개선해야 할 부분이 많을 것이다. 그렇기에 끝이 아닌 지금부터가 시작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시작의 단초는 앞으로 들어서게 될 우리나라 정부의 방향에 대해 끊임없이 숙고하고 고민하는 것에서 찾아야만 한다. 우리 정치가 성장만 하느라 어떤 가치를 잊어버리고 외면했는지 깊이 있게 돌아볼 필요가 있다. 이렇게 정치적으로 성숙한 시민들이 많아진다면, 우리를 괴롭혔던 정치적 타락과 부패는 더 이상 우리 정부에 자리 잡지 못할 것이다. 

모든 고전은 시대적 한계를 가지고 있기 마련이다. 그리고 그러한 시대적 한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시대를 초월하여 보편적으로 통용될 수 있는 값진 교훈을 전해주기에 우리는 그런 책을 고전이라고 부르고 존중했다. 《대학연의》 상권에 나온 유학 철학을 전적으로 동의하는 것은 아니다. 《대학연의》는 지금으로부터 약 천년 전에 만들어진 책이라 오늘날 그대로 수용하기란 한계가 있다. 유학과 《대학연의》가 인문학적 뇌피셜로 추측하고(?) 형이상학적으로 정리한 인간의 본성론은 현대 과학이 발전한 오늘날의 기준으로 살펴볼 때 결점과 맹점이 많은게 사실이다. 그러나 《대학연의》가 지향한 '인간 중심의 이상 국가관'은 오늘날 외적인 팽창을 추구했던 우리 사회에, 그리고 작금의 시대를 초월한 보편적인 인류의 시간 앞에 깊은 울림을 줄 수 있는 교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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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 2 : 정종·태종 - 피와 눈물로 세운 나라의 기틀 조선왕조실록 2
이덕일 지음 / 다산초당(다산북스)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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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정종 - 무욕에 충실한 인품 있는 군주

《조선왕조실록 2 정종 태종》편의 주인공은 정종과 태종이다. 사람들은 흔히 정종을 태종이 세웠던 허수아비 호구로 생각한다. 물론 맞는 말이다. 정종은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왕좌에 올랐고, 동생 이방원의 눈치로 인해 왕위를 물려줬다. 아버지인 태조가 막내를 세자로 책봉했을 때에도 화는 났지만, 효심이 깊었기에 감히 아버지의 뜻을 거스르려고 하진 않았다. 그는 숱한 전장에서 아버지와 함께 생사를 넘나들었다. 그는 순박했고, 우애가 깊었으며 효성이 깊은 지극히 소탈한 인물이었다. 정종은 동생 이방원이 일으킨 쿠데타 덕분에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조정의 노른자는 이방원의 심복들이 차지하고 있었고, 그랬기에 왕의 권한을 마음대로 휘두를 수도 없었다. 그래서 우리는 정종을 그저 태종의 앵무새쯤으로 생각하고 있다.

저자는 이런 정종을 색다른 시각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물론 정종이 태종의 꼭두각시였던 것은 맞지만, 왕위를 계승했을 때, 정종의 힘을 강화하려는 움직임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고 꼬집는다. 권력 다툼에 패배한 태조 이성계는 반정을 주도했던 이방원이 왕위에 오르는 것만큼은 막아야 했다. 그렇기에 태조는 착한 아들인 정종의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알게 모르게 노력했다. 그뿐 아니라, 측근 대신들 중에서도 이방원과 정종의 사이를 왔다 갔다 하며 간을 본 사람들도 생기기 시작했다. 사서에 나온 정종은 격구를 즐기고 정치를 멀리하려고 노력하는 것 같은 이미지지만, 의외로 민생을 챙기고 좋은 제도를 확립하는 것에는 꽤나 열정적이었다. 정종 시기 확립된 제도 중 가장 손에 꼽을만한 것이 바로 임금의 좌우에 사관을 두는 것을 법제화한 것이다. 게다가 정종은 죽은 명나라의 황제 주원장의 잔혹성을 노골적으로 비판하기도 했는데, 사대를 주요 외교정책으로 삼은 조선의 국왕 입장에서는 이런 발언은 굉장히 파격적이다. 아무튼 권력욕이 없는 정종이지만 왕좌에 있는 동안은 성실하게 집무에 매진한 것으로 보인다.

이방원은 형인 정종에 의해 세자로 하루빨리 추대되길 원했지만 의외로 정종은 세자 책봉을 서두르지 않는다. 그러나 이런 묘한 줄다리기는 2차 왕자의 난으로 끝나게 된다. 혁혁한 군공을 세우는 이방원의 칼날에 두려움을 느낀 정종은 2차 왕자의 난이 끝나자마자 이방원을 세자로 임명하고 군권까지 내준다. 즉 자신은 자리에 아무런 미련이 없다는 뜻이었다. 이방원은 세자가 된 뒤 사병을 혁파하기 시작했는데, 군권을 빼앗는 과정에서 일부 공신들은 정종을 복위시키려는 모종의 밀담을 나누기도 한다. 이렇듯 두 형제는 서로를 배려하였지만 형제의 사이에는 커다란 권력이 있었기에, 권력 때문에 불러오는 오해를 모두 종식시킬 순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종은 끝까지 자신을 낮췄고, 왕위에 오른 태종 이방원은 끝까지 형을 지키려고 노력했다.

정종은 자기 자신을 잘 알았다. 어디까지가 자신의 역할인지,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물론 집권 초기에는 권력의 맛을 느껴서인지 세자 자리를 이방원에게 선뜻 내주지 않았다. 그러나 2차 왕자의 난 이후에는 자리에 대한 욕심은 금물이라는 것을 재빨리 깨달았다. 그래서 그는 천수를 누릴 수 있었다. 정통성이 취약한 태종이 그래도 구색을 갖춰 왕위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은 이런 형의 배려가 있었기 때문이다. 만약 정종이 욕심을 부려서 자리를 지키려고 했다면, 이방원은 다시 칼을 들  수밖에 없었는데, 이는 스스로에게도 굉장히 부담이 되는 일이었을 것이다. 이렇게 양보를 했던 정종이지만 그의 사후, 그가 받았던 대우는 그의 배려에 비해 너무나도 볼품이 없었다. 그는 후대 왕들에게 그저 태종에 기생한 왕으로 취급당했다. 저자는 세종 이후 벌어진 권력 다툼의 원인은 어쩌면 정종의 무욕을 깊이 있게 이해하지 못한 결과가 아니겠냐고 반문한다. 굉장히 일리가 있는 분석이다. 만약 세종이 정종의 무욕을 깊이 깨닫고 수양에게 무욕의 철학을 가르쳤다면, 계유정난은 일어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역사를 통틀어 정종과 같은 임금은 찾아보기 힘들다.


2. 태종 - 피와 눈물로 이룩한 조선의 기틀

사람은 누구나 주인공이 되기를 원한다. 특히 야심이 강하고 지도력이 있는 사람일수록, 자신의 업적이 길이길이 빛나기를, 그렇게 역사의 주역이 되기를 희망한다. 태종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주역이 될 수 없음을 잘 알고 있었다. 왕좌를 차지했지만, 그러는 과정에서 많은 가치를 잃어버렸다. 유교적 가치인, 충과 효를 중시하는 신생국 조선의 이데올로기 앞에 자신의 행위는 변명과 합리화를 하더라도 오점으로 남을 수밖에 없었다. 가장 모범이 되어야 할 군왕이, 모범적이지 않은 길을 걸어왔기에 그는 조선의 문화를 꽃피우는 성군 - 주인공이 될 자격이 없었다.

태종이 상대했던 정적들은 그냥 그런 상대가 아니라 모두 거물급이었다. 정몽주, 정도전, 이방석, 이방간, 그리고 태조 이성계. 하나같이 다들 자신보다 강력했으며, 하나같이 자신과 매우 가까운 인물들이었다. 만약 태종이 왕가와 관련이 없었다면, 이들과 반목할 일도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태종은 늘 부르짖었다. '내가 가까웠던 인물들과 척을 진 것은 내 사욕 때문이 아니라 하늘의 뜻, 즉 군왕의 길을 따르기 위해서였다.'라고, 그러나 권력의 속성을 모르는 사람들, 그리고 당하는 입장에서는 궁색한 변명처럼 들렸다. 고대 이래로 군왕의 허무한 하늘 타령은, 역설적으로 하늘 외에는 변명할 거리가 없다는 것을 의미했다. 하늘 타령을 하는 태종의 본심은 이럴 것이다. '권력이란 것이 원래 그런 거야. 피도 눈물도 없어. 내가 안 죽였다면 내가 죽임을 당했을 거야. 너희들은 나를 잔혹하다고 탓하지만, 너희들이 내 입장이 되어보라고.'

왕위에 오르기 전까지 우여곡절이 많은 태종이었고, 잔인한 모습을 보여줬던 태종이었다. 그래서 의심이 갔다. '저 성질머리 있는 놈이 왕이 되어서 백성들을 더욱 수탈하는데 열을 올리는 것이 아닐까. 준비된 군왕이 맞긴 맞는가?' 놀랍게도 태종은 준비된 군왕이었다. 태종은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손에 피를 묻혀서 왕이 됐다는 오명을 씻을 수 없다면, 그런 강한 이미지를 적극 활용하여, 신생국 조선의 기틀을 잡는 것. 이것이야말로 그가 해야할 일이었다. 그는 신생국 조선에 남은 고려의 행정체계를 조선화하였으며, 부국강병을 위해 노력했다. 걸림돌이 될 만한 신하들을 모두 자신의 손으로 처리했다. 그 안에는 혁명 동지들도 있었으며, 거병할 때 앞장섰던 처남들도 있었다.

  냉혹한 숙청이 있었다지만, 태종은 아무나 죽이진 않았다. 처남과 혁명 동지들이 죽었던 가장 큰 이유는 권력 앞에서 절제를 몰라서였다. 그들은 무한한 권력 앞에서 조심하지 않았고, 땅콩회항과 같은 갑질로 백성을 괴롭혔다. 태종은 이런 부분을 결코 놓치지 않았다. 그의 정권에서 처음과 끝까지 영화를 누렸던 사람은 하륜이 대표적이다. 하륜도 개인적으로 탐욕을 추구하긴 했지만, 태종이 설정해놓은 선 밖으로는 절대 나가지 않았다. 이렇듯, 자신과 함께한 가장 가까운 사람들과도 태종은 일정한 거리를 유지했다. 

유교 경전 《대학》에는 선비와, 지도자의 모범적인 로드맵이 있다. 수신제가치국평천하. 태종을 대입해보자면 제가가 걸린다. 아버지, 형제들과 싸우고, 아내의 가문을 박살 냈으며, 큰아들 양녕과도 신경전이 있었다. 그는 성공적인 제가를 했다고 할 순 없는 인물이다. 태종은 유학에 밝았지만 고지식하지 않았다. 유교적 이념에 맹목적으로 충실한 사람은 제가를 이루고 치국에 힘써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태종은 제가가 치국의 필요충분조건이 아님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무너진 제가에 집중하기보다, 치국평천하에 힘썼다. 어쨌든 최종 목표는 평천하니까, 어떻게든 평천하로 가기만 하면 된다는 생각이었다. 왕위에 오르면서 인간이 겪을 수 있는 개인적인 고통은 모두 겪은 태종이었다. 가족과 척을 지고, 함께했던 동지들을 떠나보냈다. 부강한 조선의 아침이라는 신념이 없었다면, 보통 인간으로는 버티기 힘들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는 마지막 가는 순간까지 이런 신념을 견지했다. 강력한 그의 신념 덕분에 시대는 난세에서 치세로 흘러가기 시작했고, 태종이 흘렸던 피와 눈물 덕분에 조선의 아침은 밝아지기 시작했다.

저자는 태종의 가장 큰 공적을 종부법에 두고 있다. 사실 태종의 업적을 이야기할 때 종부법은 흔히 거론되지 않았다. 종부법은 자식이 아버지의 신분을 이어받는 제도다. 종전까지는 종모법이 일반적이었고, 그랬기에 사대부는 본처 외에도 다른 여자와 관계를 이어갈 수 있었으며,  집 밖에서 자식이 태어나도 책임으로부터 비교적 자유로울 수 있었다. 그러나 태종의 종부법은 첩이나 기생의 몸에서 난 자식이더라도 아버지가 양반이면 아비의 신분을 따르도록 하였다. 태종은 이 제도를 통해 양인을 늘리려고 노력했으며, 양반 계층을 견제했다. 아쉬운 점은 이런 좋은 제도를 아들인 세종이 종모법으로 복원시켰다는 점이다. 종부법 외에도 명과의 외교활동을 통해 북쪽 영토를 넓혔다는 부분도 눈길을 끌었다. 

책에서 아쉬운 점은 태종의 행적을 정치적인 부분에만 집중해서 고찰한 점이다. 재미있게도 태종 시기에 뛰어난 건축물이 많이 들어서는데 대표적인 예로 경회루를 꼽을 수 있겠다. 경회루 외에도 종묘의 월랑을 추가한 부분, 그리고 청계천을 만들어 백성들에게 물을 공급한 점 등, 태종 시기에 건립된 건축물은 실용성과 심미성을 모두 만족한다는 특징이 있다. 이런 부분에서 태종은 건축에 대한 안목과 문화적 식견 역시도 뛰어난 군주였던 것 같다. 지금 유네스코에 지정된 조선왕조 건축물은 종묘와 창덕궁인데, 재미있게도 둘 다 태종과 관련이 있다는 공통점이 있다.

저자는 태종을 권력 앞에서 구도자와 같은 길을 걸었던 제왕, 그래서 한국사에서 보기 드문 지도자라고 칭송한다. 일리가 있다. 다만 태종이 권력 앞에서 구도자와 같은 마음을 가지진 않았을 것이다. 실록 중간중간에는 그가 권력에 심취하거나, 탐욕을 부렸던 대목이 있었으니까 말이다. 다만 다른 전제군주들과 비교해볼 때 태종은 권력 앞에서의 절제가 비교적 뛰어난 편이었다. 전근대 왕조국가의 강력한 왕이라는 점을 고려해볼 때, 권력에 대한 자제력은 그 자체만으로도 특별함을 가진다. 만약 그가 사욕에 심취하여 권력을 휘둘렀다면, 후대의 백성들이 그를 폭군으로만 여겼을 것이다. 태종이 죽은 뒤, 태종의 기일이 다가오면 비가 내리기 시작했는데, 백성들은 이 비를 태종우라고 말하고 칭송했다. 신라의 문무왕은 죽어서라도 왜구를 막는 수호신이 되겠다며 바다에 묻혔다. 마찬가지로 태종은 죽으면서도 백성들을 향한 애민의 감정을 숨기지 않았다. 그렇기에 후세의 백성들은 그런 태종의 애민정신을 잊지 않았다. 피로 시작하여 권력을 쟁취하였고 왕이 됐지만 끝내 역사의 주인공이 되지 못했던 태종. 외로운 권력의 길을 홀로 걸어갔던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사적인 성군, 주인공이 되지 못했던 태종에게 백성들의 태종우 설화는 커다란 위안이었을 것이다.

다음 권은 태종이 그토록 걷고자 했던 성군의 길을 걸어간 세종이 나온다. 조선의 주인공이자 우리나라 역사의 주인공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세종. 그런 세종과 문종, 단종으로 이어지는 시대를 다룬다고 한다. 학계, 그리고 일반인들에게 세종은 결점이 없는 완벽한 지도자로 통한다. 과연 저자가 완벽하다는 세종을 어떤 시각으로 비판할지 기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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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 1 : 태조 - 혁명의 대업을 이루다 조선왕조실록 1
이덕일 지음 / 다산초당(다산북스)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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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조선이라는 콘텐츠

고등학교 때 국사 선생님이 조선사를 들어가면서 이렇게 말했다. '선사 ~ 중세까지는 설렁설렁 공부해도 괜찮지만, 조선부터는 수업에 집중하고 절대 졸지 말아야 한다.' 수능 시험문제나 모의고사 시험문제를 살펴보면, 조선사의 비중이 다른 왕조보다 높은 편이다. 많이 나올 때에는 전체 시험의 40%가 조선사의 문제로 나온 경우도 있었다. TV에서 방영하는 사극의 70%는 조선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그뿐만 아니라, 역사 교양서나 도서의 배경도 조선을 다루는 경우가 많다. 왜 신라나 고구려, 백제, 가야, 고려가 아닌 조선이 역사 대중 콘텐츠의 핵심으로 꼽히는 것일까? 왜 다른 시대보다 조선 시대가 시험 범위로 많이 나오고 전공하는 사람도 많은 것일까?

해답은 전해오는 유물들이 다른 왕조보다 훨씬 풍부하기 때문이다. 조선의 유적이나 유물은 다른 왕조에 비해 훨씬 정교하게 내려온다. 한양의 5대 법궁을 비롯하여, 조선왕릉 등등은 비교적 온전하게 내려오고 있다. 그뿐만 아니라, 조선을 다룬 기록도 다른 시대에 비해 압도적으로 풍부하다. 이런 조선의 풍부한 기록 문헌 중 가장 대표적으로 꼽을 수 있는 것이 바로 《조선왕조실록》이다. 이 방대한 역사 거작 덕분에 우리는 당시의 조선시대를 디테일하고 풍부하게 살펴볼 수 있다.

《조선왕조실록》은 엄청 방대한 저작이며, 역사에 관심이 많지 않다면 완독하기란 매우 어려운 책이다. 조선에 대한 생동감 있는 정보를 담은 책이지만 전문가들조차도 완독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조선사를 전공하는 역사학자들도 《조선왕조실록》을 완독하는 사람은 흔하지 않다고 할 정도니 말이다. 그래서인지 역사 교양 분야에서는 《조선왕조실록》을 일반인에게 이해하기 쉽게 풀이하여 만든 책이 다수 존재하는데, 대표적으로 《한 권으로 읽는 조선왕조실록》,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설민석의 조선왕조실록》 등등이 있다.

《한 권으로 읽는 조선왕조실록》은 《조선왕조실록》을 메인 테마로 내세운 역사 교양서의 원조라고 할 수 있는 책이다. 방대한 《조선왕조실록》을 한 권의 분량으로 압축시킨 이 책은 출간 이후 지금까지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다. 《조선왕조실록》의 성공 이후 저자는 《고려왕조실록》, 《고구려왕조실록》, 《백제왕조실록》, 《신라왕조실록》 등등의 '한 권으로 읽는' 시리즈의 후속작을 썼지만 《조선왕조실록》만큼 인기를 얻진 못했다.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의 특징은 바로 만화라는 점이다. 만화를 통해 《조선왕조실록》의 정치 분야를 집중적으로 표현했는데, 저자의 적극적인 해석이 매우 신선했다는 평이 있었다. 20권으로 구성된 방대한 전집이지만 많은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받았으며, 역사교사들이 추천하는 조선사 교양만화로 꼽히기도 했다. 가장 최근에 나온 《조선왕조실록》 교양서는 《설민석의 조선왕조실록》이다. 대세 스타 강사라고 할 수 있는 설민석은 《조선왕조실록》을 대중의 눈높이에 맞춰 쉽게 해설했는데, 너무 기본적이고, 쉬운 내용이라 개인적으로는 아쉬운 책이었다. 물론 나의 이런 아쉬움과는 다르게, 책은 한동안 베스트셀러에 올랐다.

  《조선왕조실록》을 테마로 한 도서가 이토록 넘치는데도, 최근 《조선왕조실록》을 메인 콘텐츠로 내세운 시리즈 도서가 또 발간됐다. 재야 역사학자로 이름난 이덕일이 저술한 《조선왕조실록》 전 10권 시리즈다. 만화 시리즈물로 《조선왕조실록》이 나온 경우는 있었지만 텍스트 시리즈물로 《조선왕조실록》이 나오는 경우는 드물다. 보통 텍스트 중심의 《조선왕조실록》은 한 권으로 끝나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이덕일의 《조선왕조실록》은 총 10권 분량의 장편으로 기획됐다. 그리고 최근 《조선왕조실록 1 태조》와 《조선왕조실록 2 정종 태종》편이 발간됐다.


2. 태조 - 뚝심의 양면성

1권의 주인공은 태조다. 책의 뒷날개를 살펴보니, 한 권에 3명의 군주를 평균적으로 다루는 것 같은데 1권은 태조 한 사람을 다루고 있다는 점이 이색적이다. 책은 태조에 집중하고 있지만 태조 이전의 시대, 고려 말기의 혼탁한 배경에 대해서도 디테일하게 서술하고 있었다. 공민왕의 개혁정치의 좌절, 그리고 권문세족의 갑질, 토지 제도의 문란, 왜구와 홍건적의 침입 등등 망하기 전 고려 말기에는 많은 사건들이 일어났다.

태조의 성품은 매우 겸손하고 차분하다. 전형적인 무인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정치에 있어서 신중하게 행동했고, 자신의 감정을 쉽게 표현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보다 훨씬 나이가 어린 정도전을 스승으로 예우했으며, 몰락하는 고려의 충신들에게도 최대한 머리를 굽혀 예우했다. 이런 성격을 가진 태조였지만, 뚝심을 발휘할 때에는 누구보다 강경하게 밀어붙이기도 했다. 개혁 세력의 집중, 고려왕의 택군(擇君), 그리고 나라의 건국, 수도 이전, 명나라와의 일전 불사, 군권 장악, 막내 세자 책봉 등등은 태조의 뚝심 있는 성격을 잘 보여주는 사건이다.

태조는 자신이 전면적으로 나서 모든 일을 관장하지 않았다. 자신보다 뛰어난 전문가가 있을 시에는 욕심을 부리지 않고 전문가를 밀어주며 전문가의 견해를 적극적으로 수용했다. 이런 태조의 리더십은 《삼국지연의》의 유비와 비슷하다. 나관중의 소설에서 유비는 제갈량이라는 전문가에 국가 정책을 일임하고 따르는 수동적인 리더의 모습을 보여주는데, 태조의 모습도 이와 흡사하다. 토지 전문가인 조준에게 토지 개혁을 맡기고, 행정 전문가인 정도전에게 나라의 시스템과 행정을 전적으로 일임했다. 군왕인 태조의 역할은 이런 전문가들이 힘 있는 공신들로부터 방해받지 못하도록 지켜주는 것이었다. 이런 태조의 수동적 리더십은 아들 태종의 적극적인 리더십과는 무척 대조되는 모습이다.

그러나 태조가 무조건적으로 수동적인 모습만을 보이진 않았다. 수도 이전과 세자 책봉, 그리고 명나라와의 전쟁 불사 등등은 수동적인 모습이 아니라 태조의 적극적인 모습을 상징한다. 성품이 온화한 사람일수록 화가 나면 더 무섭다고 하듯, 태조 역시도 마찬가지다. 온화하고 차분한 성품이지만 한 번 밀어붙일 때에는 뚝심 있게 밀어붙이는 강단이 있었다. 태조의 뚝심이 긍정적으로 구현된 것은 대표적으로 한양 천도다. 자신의 충복이라 할 수 있는 정도전과 조준까지도 수도 이전을 반대했는데, 태조는 이러한 전문가들의 의견을 가볍게 무시하고 우직하게 한양 천도를 밀어붙였다. 강력한 리더십의 상징인 태종이라도 모든 신료가 반대하는 상황에서 과연 이렇게 뚝심 있게 수도 이전을 밀어붙일 수 있었을까. 아마 태종이라도 이런 선택을 하기란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불도저 같은 태조의 뚝심은 치명적인 결점으로 작용하기도 하였는데 대표적인 경우가 바로 태자 책봉이다. 한양 천도를 신속하게 감행하고 군권을 회수하는 과정에서 태조는 스스로의 힘을 과도하게 자만했다. 이러한 태조의 자만심은 무리한 태자 책봉으로 이어졌다. 창업이라는 특수한 상황을 고려하지 않고, 아무런 공적이 없는 풋내기 막내를 태자로 세운 것이다. 이런 자만감을 무리하게 밀어붙인 태조는 결국 아들 이방원에 의해 모든 것을 잃게 된다. 이런 태조의 몰락은 아까 비유했던 《삼국지연의》의 유비와 흡사하다. 소설에서 유비는 관우의 죽음에 감정적으로 반응했고, 제갈량을 비롯한 수많은 신료들이 반대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손권을 정벌하는데 앞장섰다. 그러나 무리한 고집으로 감행된 원정은 실패로 돌아갔고, 유비는 백제성에서 비명 속에 죽음을 맞이했다. 만약 태조와 유비가 결정적인 순간에 자신의 특기라고 할 수 있는 신중함과 경청의 마음을 견지했더라면 어땠을까. 아마 이렇게 허무하게 무너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렇기에 태조를 무너트린 것은 표면적으로는 이방원의 세력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더 근본적으로 생각해보자면, 절제하지 못했던 태조의 자만심과 그 자만심을 밀어붙인 뚝심이라고 할 수 있다. 결국 태조는 뚝심 덕분에 조선을 건국했지만, 뚝심 덕분에 권력을 잃기도 했다.  


3. 저자에 대하여

이덕일은 논란이 많은 사학자다. 주류 사학에서는 그를 두고, 지나치게 주관적이며, 국수주의적인 자신의 생각을 뒷받침하기 위하여, 역사적 사실을 왜곡하며, 문헌을 오독한다고 주장한다. 이에 이덕일은 주류 사학은 노론 - 친일의 시각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며, 그들이야말로 무비판적인 왜곡을 그대로 수용한다며 날을 세워 반목한다. 그래서 이덕일은 한편으로는 굉장한 비판을 받으며, 한편으로는 굉장한 호평을 받는다. 개인적으로 이덕일의 가장 큰 공적은 바로 세조의 해석이라고 생각한다. 전작 《김종서와 조선의 눈물》에서 저자는 세조와 그에 편에 섰던 공신들이 반정의 승리로 얻었던 것들에 대해, 구체적으로 자료를 제시하며 날 선 비판을 하였는데 굉장히 공감하며 읽었다. 그 외에도 사도세자와 송시열, 그리고 윤휴에 대한 책을 읽었는데, 비판적인 견해에는 공감이 갔지만, 너무 비약적으로 확대해석하고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이번 책에서도 그는 자료 해석을 최대한 자주적인 관점으로 하고 있는데, 가령 태조 이성계가 중원의 황제를 꿈꿨다는 대목이 대표적이다. 과연 이성계가 황제를 꿈꿨을까? 내 생각은 다르다. 태조 이성계가 북벌을 감행하려는 가장 큰 목적은 바로, 주원장의 갑질 때문이었다. 애초에 조선의 건국 콘셉트는 사대주의였고, 이성계 역시 이런 태도에 적극적이었다. 나라 이름을 명나라에 묻기도 하며, 자발적으로 명에 세력권에 적극적으로 복종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이렇게 노력한 태조인데 명나라의 주원장은 이런 태조의 러브콜에 갑질로 응수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태조는 홧김에 북쪽 대륙을 정벌하려고 하였으며, 정도전 역시 자신의 정치적 위기를 북벌로 뚫으려고 노력했다. 즉 태조와 정도전이 북벌을 한 목적은 정권의 안정과 권력 기반을 더욱 확고하게 다지기 위해서였지, 중원 대륙을 호령하는 황제를 꿈꾼 것과는 거리가 있다. 설사 칭제를 언급했다 하더라도, 이는 명분을 위한 정치적 수사일 다름이지 현실적 목표는 아니었을 것이다. 마치 조선 중기 효종과 송시열이 말로만 북벌을 하겠다며 과장 액션을 취하던 것과 비슷하다. 요동 반도를 점령하는 것과 칭제를 한다는 것은 전혀 별개의 문제인데, 저자는 이 둘을 자연스럽게 연결하여 해석했다. 이 부분을 제외하고는, 전체적으로 여말선초의 시대를 잘 정리한 역사서인 것 같다.

  나는 작년부터 《조선왕조실록 - 태종실록》의 원전 번역본을 차근차근 읽어가고 있다. 내 생각으로는 우리나라의 역대 군왕들 중 태종과 같은 인물은 없다고 생각하기에, 그를 깊이 알아보는 과정에서 《태종실록》을 천천히 완독하고 있는 중이다. 태종을 알기 위해서는 《태종실록》 뿐만 아니라 그의 아버지라 할 수 있는 태조와, 그의 형인 정종, 그리고 그의 아들인 세종까지 살펴야만 한다. 그러나 읽으려는 《조선왕조실록》의 범위를 태조와 정종, 세종까지 넓히면 분량이 너무 방대하기에, 《태종실록》은 모두 읽되 태조와 정종, 세종의 행적은 《조선왕조실록》을 잘 정리한 개론서의 도움을 받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이런 이유로 나는 이번에 기획된 이덕일의 《조선왕조실록》에 많은 관심이 있었다. 또한 방대한 《조선왕조실록》의 정리를 떠나서, 여말선초 격동의 인물들을 이덕일은 어떻게 해석하고 있는지 그의 관점도 궁금했다. 다음 권은 정종과 태종을 다룬다. 태종 이방원. 태조와의 권력 다툼에서 승리하고, 조선의 실질적인 하드웨어를 완성한 인물. 그런 그를 저자는 어떻게 해석하고 있을지 기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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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전소화 - 삼시 세끼, 무병장수 식사법
류은경 지음 / 다산라이프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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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온갖 건강정보가 넘쳐난다. 이것도 좋고 저것도 좋다고 한다. 몇몇 사람들은 좋다는 음식을 넘어 영양제 알약을 필수적으로 챙겨 먹는다. 건강에 좋다는 것들을 덕지덕지 먹는데도 불구하고, 병원은 항상 만원이다. 몸에 좋다는 것을 그렇게 섭취하는데도 불구하고, 왜 아픈 사람들은 많은 것일까. 왜 병원은 항상 만원이고, 과거에는 흔하지 않던 아토피, 고지혈증, 비만 등등이 만연하는 것일까. 가족 중 한 분 때문에 나는 서울대병원 암센터를 간 적이 있었는데, 정말 충격을 받았었다. 전국의 암 환자가 모두 몰렸는지, 평일임에도 불구하고, 항암 치료를 받는데 엄청 기다려야 했다. 그분 말씀에 의하면 주말 평일을 가리지 않고 매번 올 때마다 이렇게 기다려서 치료를 받아야 한다고 한다. 건강에 좋다는 음식, 건강에 좋다는 약이 만연하는 세상인데, 왜 이렇게 아픈 사람이 많은 것일까. 정말 우리가 의심 없이 믿고 있는 건강 정보는 우리를 '진짜' 건강하게 만들어주는 지식인 것일까? 

암병동을 다녀온 뒤, 암이라는 질환이 남의 질환처럼 느껴지지 않기에, 암에 관한 책을 몇 권 구매해서 정독했다. 그리고 몇 가지 불편한 진실을 알게 됐다. 현재 암의 치료법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첫 번째가 바로 현대의학의 치료법이다. 두 번째는 바로 대체의학의 치료법이다. 여기서 권위를 가지는 것은 현대의학의 치료법이다. 그러나 현대의학이 지향하는 치료법은 몸에 들어있는 암세포를 죽이는 것에만 집중하고 있지, 근본적으로 암의 발병을 막는 것에는 집중하지 않는다. 즉 원인은 놔두고, 그저 일어난 결과만 해결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현대의학의 입장이다. 대체의학의 포인트는 암의 원인에 집중한다. 환자들의 식습관, 그리고 생활 활동 들을 면밀하게 분석하여 원인을 파악한 뒤, 암의 원인을 해소하여서 궁극적으로 몸의 자가 치유력을 통해 암을 극복하도록 유도한다.

왜 현대의학은 병의 원인보다, 약물을 통한 세포 죽이기에만 집중하는 것일까? 바로 제약회사와의 경제적 결속 때문이다. 제약회사는 의료계에 막대한 자금을 로비한다. 그리고 의료계는 그런 자금을 바탕으로 연구를 하고 있다. 의료계에서는 제약회사가 만든 신약을 사용하여, 제약회사의 수익에 공조한다. 이렇게 돌고 돌면서, 의료계와 제약회사는 서로 공생하며 이익을 챙긴다. 이런 배경이 있기에 오늘날 현대의학의 암 치료 핵심은 약물이며, 이런 약물을 중심으로 한 치료는 암의 원인을 잡는 데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제약회사와 현대 의료계의 관계를 보면 군수업자와 미국이 떠오른다. 미국이 초강대국이 된 배경에는 무기산업에 있다. 군수업자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챙기기 위해 정부에 엄청난 로비를 하였고, 미국은 넘쳐나는 군수무기를 소비하기 위해 전쟁을 벌였다. 전쟁이 터지자 군수업자들은 무기 판매로 인해 전 세계의 전선으로부터 떼돈을 끌어모을 수 있었고, 미국 역시도 초강대국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암뿐만이 아니다. 현대의학이 병에 접근하는 시각은 원인보단 결과에 중점을 둔다. 물론 현대의학 덕분에 인류의 평균수명이 늘었고, 과거에는 치료하지 못했던 질병을 알아내고 치료할 수 있게 됐지만, 우리는 필요 이상으로 병원을 의지하고 병원에 기댄다. 굳이 약을 빌리지 않더라도, 자가 치유법으로도 회복될 수 있는 작은 질환에도 우리는 병원을 찾아 인위적인 약을 섭취하며 안도한다. 내가 건강 서적을 뒤지면서 가장 크게 와닿았던 사실은 우리 몸은 생각 외로 자가 치유력이 강하다는 점이다. 정상적인 사람의 몸에 이상이 생기면, 우리 몸은 알아서 이상이 생긴 부분을 치유하려고 노력한다. 그렇기에 건강한 사람은 가벼운 질병을 앓더라도 굳이 약의 힘을 빌리지 않더라도 회복이 가능하다. 모든 생물은 어느 정도의 자가 회복력을 가지고 있다. 그럼 이런 자가 회복력의 핵심은 무엇일까.

바로 '먹는 것'이다. 자가 회복력이 뛰어나다는 말을 다르게 표현하자면 건강하다는 뜻인데, 건강의 가장 필수 조건은 바로 먹는 것에서 찾아야 한다. 다이어트와 건강을 체크할 때 가장 핵심적으로 돌아봐야 할 것이 바로 식생활이다. 과거 헬스를 같이 한 친구가 나에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몸은 정직하다. 몸은 거짓말하지 않는다. 그러니 성실하게 운동하면 근육이 생긴다.'라고, 마찬가지다. 그래 몸은 정직하다. 우리가 무엇을 먹느냐에 따라서 몸은 정직하게 반응한다. 그럼 잘못된 식습관 때문에 발생하는 가장 흔한 몸의 반응은 무엇일까. 바로 소화 불량이다.

《완전 소화》라는 제목답게 저자는 건강을 위한 해결책을 원활한 소화에서 찾고 있다. 원활한 소화는 식생활 개선과 직결된다. 저자는 육식과 가공식품, 유제품 등등을 줄이고 채식 위주의 밥상을 권하고 있다. 여기까지는 다른 채식주의 건강서와 비슷한데, 유독 눈에 들어오는 것은 과일이다. 저자는 제철 과일을 아침 대용으로 섭취할 것을 강조하고, 식전 과일 섭취를 강하게 주장한다. 책의 중요 챕터는 소화기관인 위와 간, 그리고 장을 다루고 있는데, 공통되는 핵심 내용은 바로 과일과 녹색 채소 중심의 식사다. 원활한 소화를 위해서는 채식 위주의 밥상이 이상적이며, 이런 식단은 궁극적으로 건강과 장수에 직결된다고 한다. 고기로 얻을 수 있는 영양분은 생선이나 채식에도 있으니 굳이 소화가 어려운 고기를 통해 섭취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한다. 과거 인체를 다룬 다큐 프로에서도, 인간을 비롯한 생물들의 이빨을 잘 관찰하면, 그 생물이 주로 무엇을 먹어야 하는지를 알 수 있다고 했다. 육식동물은 육류를 잘 뜯을 수 있도록 이빨이 날카롭게 발달한 데 비해, 채식을 주로 하는 동물들은 이빨이 날카롭지 않고 뭉특하다고 한다. 인류의 이빨도 잘 살펴보면 육류를 먹는 것보다 채식을 하는데 최적화된 이빨이다. 

책을 읽으며 육식의 위험성을 새삼 느낄 수 있었다. 지금 우리가 섭취하는 고기는 인위적인 사육과 도살로 얻어지는 고기다. 고기의 맛과 양을 더욱 좋게 하기 위해 과도한 사료와 항생제를 섭취한 가축의 살이 우리가 맛있다고 먹는 고기의 실체였다. 오늘날 우리는 물질의 풍요로움으로 인해 과거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한 먹거리를 누릴 수 있지만, 한편으로 생각해보면 그러한 먹거리를 만들어내기 위해, 인위적인 가공과 약품의 도움을 받아야만 했다. 우리는 과거에 비해 맛 좋은 고기를 먹을 수 있게 됐지만, 한편으로는 과거보다 훨씬 건강에 나쁜 고기를 먹고 있다. 자본주의, 물질 만능주의의 풍요로움이 마냥 인간에게 유토피아적인 혜택을 가져다 주진 않는다는 것을 책에서 다시금 깨달을 수 있었다. 그래서 나는 2주에 한 번 정도로 고기 섭취를 제한해야겠다고 결심했다. 또한 기름지고 마블링이 좋은 고기를 선호하기보다, 건강한 환경에서 약품과 가공이 없이 자란 고기를 섭취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고기를 너무 좋아하기에, 끊을 순 없겠지만 줄여서 먹고 좋은 환경에서 자란 고기를 섭취한다면 그나마 육식의 피해를 최소화하지 않을는지.

책을 읽으며 온갖 영양제나 비타민제, 그리고 습관적으로 복용하는 건강 약품들을 끊고, 균형 있는 식습관을 통해 영양을 섭취하는 것이 소화와 건강에 도움이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과학과 문명이 아무리 발전한다 하더라도, 가장 자연적인 것을 따라오진 못 한다. 인간은 과학의 일부가 아니라 자연의 일부라는 것을 절대 잊어서는 안 된다. 건강 보조식품이나 약품 따위를 장기적으로 복용하기보다, 자연에서 건강하게 자란 채식으로 양분을 섭취하는 쪽이 건강을 지키는 길이라고 저자는 강조했다. 

책을 덮으면서 그럼 채식은 유전자 변형이나, 항생제로부터 자유로운가라는 의문이 든다. 책에서 언급하듯, 고기에는 항생제와 약품이 들어 있어서 해롭다고 하는데, 이는 채소와 과일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과일이나 채소를 재배할 때, 썩지 않기 위해, 벌레들을 퇴치하기 위해 농가에서는 필요 이상의 과도한 농약을 뿌리고, 여러 약품을 뿌린다고 하던데, 이렇게 자란 채소와 과일은 우리 몸에 아무 문제가 없을까. 책에서는 영양 때문에 과일 껍질까지도 남기지 않고 먹어야 한다고 주장하는데, 농약과 약품이 스며있는 과일 껍질을 먹기에는 아무래도 부담스럽다. 채식이 육식보다 좋은 것은 알겠는데, 문제는 채식 역시도 각종 유전자 변형, 항생제, 약품 등등으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그럼 결국 건강하게 재배한 유기농 채식으로 식단을 대체해야 하는 것일까. 먹거리는 넘쳐나는 시대인데 정작 인간에게 좋은 먹거리는 구하기가 더 어려워졌다. 가히 풍요 속의 빈곤이라고 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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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사랑한 백제 - 백제의 옛 절터에서 잃어버린 고대 왕국의 숨결을 느끼다
이병호 지음 / 다산초당(다산북스)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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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전라도와 경상도, 백제와 신라

내가 백제에 대해 큰 관심을 가진 계기는 20대 중반, 전라도를 여행하면서 택시기사가 잠깐 언급한 말 때문이었다. 택시기사는 경상도와 전라도의 고질적 대립관계는 삼국시대 전쟁에서 기원을 찾을 수 있다고 주장했는데, 경상도는 신라, 전라도는 백제의 권역으로 오늘날의 동서 갈등의 뿌리는 이 시대의 두 나라의 전쟁으로부터 비롯한다고 하였다. 걸쭉한 전라도 사투리를 능숙하게 구사하며 역사적 지식을 구수하게 담아내는 택시기사의 언변에 나는 아무런 대답을 못 했고, '백제에 대해 알아보겠다.'라는 짧은 대답으로 민감한 주제를 피할 수 있었다. 

여행을 마친 뒤, 나는 백제에 관한 자료를 찾았고, 백제를 다룬 책을 읽었다. 그러나 생각보다 소략했고, 확실하게 연구된 부분도 드물었다. 파면 팔 수록 백제라는 나라는 신비한 나라였다. 근초고왕 이래로 한반도 남부의 패권을 장악했고 주도적으로 움직였던 나라, 일본의 고대, 아스카 문화와 깊은 관련이 있는 나라, 해양 진출 활동이 매우 적극적이었던 나라, 그리고 문화적으로도 매우 융성했던 나라... 등등 백제는 매력적인 요소가 다분했다. 그러나 이런 백제는 일반인들에게 신라나 고구려에 비해 크게 알려지지 않았다. 신라는 어쨌든 삼국을 통일했다는 점을 내세우며 주목을 받고 있었고, 고구려는 북방 대륙을 경영했던 맹주였기에 한반도의 자존을 상징했다. 이 둘에 비해서 백제는 크게 내세울 것이 없어 보인다. 전해지는 유물도 파편적이며, 삼국 중 가장 먼저 몰락한 왕국이라는 이미지 때문에 사람들은 백제를 고구려나 신라만큼 크게 인식하지 않는다.

그런 백제가 유독 나의 관심을 끈 부분은 뛰어난 문화를 가졌다는 것이다. 백제의 유물은 파편적으로 전해지지만 그 파편 만으로도 우리는 많은 부분을 짐작할 수 있다. 파편만으로 전해지는 백제의 유물들은 대체로 뛰어나고 정교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이런 매력이 있기에, 특히 문화를 사랑하는 지식인들은 백제를 매우 애정 하는 경향이 있다. 나는 뛰어난 문화적 식견을 가지지도 않았고, 나 스스로가 지식인이라고 생각해 본 적도 없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해오는 백제의 수준 높은 잔상은 무지한 나에게조차 깊은 영감을 선사하기에 충분했다.


2. 백제에 대한 첫인상

오늘날 백제를 만날 수 있는 방법은 크게 세 가지다. 첫 번째 백제의 역사를 읽는 것, 두 번째 백제의 유물을 탐구하는 것, 세 번째 융성했던 백제의 터에서 백제의 숨결을 느끼는 것. 이 중 가장 편하게 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첫 번째다. 나는 시중에서 백제를 다룬 역사서 두 권을 통해 백제를 배웠는데 《살아있는 백제사 - 이도학》와 《백제왕조실록 - 박영규》다. 《살아있는 백제사》는 백제 연구를 전문적으로 했던 사학자의 역작인데, 백제의 전반적인 모습을 배울 수 있었다. 다만 논란이 많은 고대사이다 보니 저자의 주관적인 견해에 대해 부분적으로 이견이 있지만 그런 아쉬운 부분이 있다 하더라도 한 권으로 백제의 역사를 정리하기에는 가장 좋은 책이라고 개인적으로 생각한다. 《백제왕조실록》은 스테디셀러 작가가 정리한 백제 역사인데, 앞의 책보다 대중성은 뛰어나지만, 책의 내용이 국수주의적인 관점으로 너무 쏠려있기에 《살아있는 백제사》보다 좋은 책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아무튼 두 책을 통해 백제의 역사를 살펴봤으며, 백제의 흔적이 가장 많이 남아 있다는 '공주'와 '부여'를 찾아가 보기도 했다.

법정 스님의 대표 저작인 《무소유》에서 스님은 경주를 두고 이렇게 말한다.

'어디나 옛 도읍지에 가면 느끼게 되듯이 경주도 어딘지 텅 빈 것 같은, 뭔가 덜 채워져 아쉬운, 그래서 배 떠난 나루와 같은 그런 분위기가 마음을 끈다.'

나도 그랬다. 경주의 모습은 으리으리한 왕궁이 살아있는 한양 서울과 비교했을 때 더욱 적막한 느낌이었다. 그런 나에게 공주와 부여, 오늘날 전해오는 백제의 민낯은 그야말로 처참하기 이를 데가 없었다. 경주는 그나마 양반이었다. 경주가 적막했다면, 부여와 공주는 황량했다. 적막이라는 단어는 운치 있는 서정감을 더할 수 있는 나름의 여지가 있다면, 황량이라는 단어는 부정적인 느낌이 지배적이다. 마찬가지로 공주와 부여에 위치한 국립박물관과 경주의 국립박물관의 인상도 달랐다. 경주 박물관은 그나마 화려한 인상이라면, 공주와 부여의 파편들은 어딘가 아쉬움이 가득했다. 백제에 대한 호기심에 사로잡혀 떠났던 나에게 다가왔던 백제의 첫인상은 이렇듯 충격 그 자체였다. 


3. 고고학과 역사학의 상관관계

파편만 가득한 백제의 잔상에서 나는 어떻게 백제를 느껴야 하는가. 어떻게 백제의 모습을 복원해야 하는가. 이런 어려움을 해소하는데 도와주는 곳이 바로 박물관이다. 박물관의 도록이나 큐레이터는 백제의 파편을 정밀하게 분석하고 연구한 뒤 일반인에게 축척된 지식을 공유한다. 그러나 둘 다 한계가 있다. 도록은 가격이 굉장히 비싼 편이라 쉽게 구매할 수 없고, 큐레이터의 설명 역시도 관심 있는 여러 사람들을 만족시키기에는 물리적으로 한계가 있다. 시간적 여유가 많지 않은 여행자 입장에서 하루 종일 박물관에 머물며 여유 있게 유물을 관조만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이러나저러나 유물을 통해 백제를 느끼는 것은 전문가가 아닌 일반인에게는 어려운 방법일 수밖에 없다.

그럼 유물을 통하지 않고 백제를 느끼면 될 것 아니냐고 이야기할 수도 있는데, 그럴 수도 없는 것이, 사료가 적은 고대의 역사는 근본적으로 고고학과 깊은 관련을 가질 수밖에 없다. 전해 내려오는 텍스트가 제한적이기에 우리는 내려오는 파편을 통해 당대의 사회를  재구성하여 이해할 수밖에 없다. 엄밀하게 따지고 보면 역사학의 발전 역시도 고고학의 발견과 연구의 토대에서 이뤄지는 것이다. 특히 전해지는 사료가 적은 한국 고대사 연구는 고고학에 크게 의존할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백제 탐구의 근본적인 핵심은 전해오는 유물에 있다고 개인적으로 생각한다.

문제는  고고학적 연구 성과나, 고고학의 흐름은 일반 대중에게 흔히 공개되지 않는다. 왜냐면 풀어내 이야기하기엔 너무나도 전문적이기 때문이다. 그렇다 보니 백제에 대한 고고학적 동향이나 연구 방법 등등은 웬만큼 관심을 가지지 않고서야 알기 어렵다. 백제에 대한 무지, 백제에 대한 무관심 역시 근본적으로 이런 부분에서 기인한다고 생각한다. 이런 상황에서 백제에 대한 고고학을 다룬 대중서가 나왔다. 책은 국립박물관 큐레이터가 애정으로 쓴 백제 이야기였으며, 책이 다루는 백제의 모습은 역사적인 관점보다, 고고학적 관점에  더욱 치중하고 있다. 나와 같이 백제에 대한 애정이 가득하고, 백제에 대해 좀 더 깊이 있는 고고학적 지식을 갈구하는 일반인에게 적합한 교양 인문서였다.


4. 백제 덕후의 애정 어린 백제 이야기

저자는 독특한 이력을 가졌다. 평범한 관점으로 보자면 박물관 큐레이터라는 직업에 종사하고 있지만 조금 더 들어가보면 그의 관심은 오로지 백제만을 향하고 있기에 굉장히 독특하다. 오늘날의 용어로 저자를 표현하자면, 백제 덕후라고 할 만하다. 저자는 박물관 큐레이터란 직업을 가지면서부터 지금까지 한결같이 백제에 대한 고문학적 연구를 꾸준하게 진행하고 있으며, 백제를 대상으로 한 논문 활동을 꾸준하게 이어가고 있다. 자처해서 시골이라 할 수 있는 부여로 내려갔으며 지금은 익산 미륵사지에 전시관에서 일하고 있다고 한다. 그의 인생, 그리고 그의 이야기의 중심은 늘 백제였다.

인생에 있어서 몰두할 수 있는 대상이 있다는 것은 매우 축복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이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몰두해야 하는지를 알지 못하고, 주어진 현실에 만족하며 살아간다. 그러나 저자는 평생을 걸쳐 몰두할 수 있는 대상을 찾았으며 거기에 인생을 몰두했다. 그래서 열정 어린 저자의 삶이 한편으로는 부럽기도 했다. 그런 저자였기에 그의 책을 지배하는 주된 감정은 '열정'이다. 그의 글, 그의 치밀한 연구, 글에서 느껴지는 그의 감정 하나하나에는 백제에 대한 열정이 서려 있었다. 그래서 나는 내용을 떠나 책이 참 마음에 들었다. 책을 읽을 때마다 그런 감정이 들었다. 마치 하나의 대상에 몰두하여 빚어낸 장인의 작품을 마주하는 느낌.

책을 통해 전반적인 백제 연구의 동향을 읽을 수 있었으며, 백제에 대한 일본의 움직임도 확인할 수 있었다. 백제 탐구 여행 때 무심코 지나쳤던 장소들의 사연과 연구동향을 읽을 때마다, 부여로 떠나고 싶은 나의 마음을 억누르느라 애를 먹었다. 가장 애정 하는 유물이라 할 수 있는 금동대향로 발굴 에피소드를 읽으며, 박물관에서 느꼈던 향로의 아름다움을 다시 한 번 느끼고 싶었다.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일본편2 아스카 나라》를 읽고, 백제와 관련된 아스카 지역을 언젠가 떠나봐야겠다고 다짐했는데, 일본과 백제에 관련된 내용을 읽으니 가 본적 없는 아스카 지역에 대한 동경이 더욱 커졌다. 저자의 열정 어린 이야기는 그렇게 내 안에 백제에 대한 애정을 자극했고, 향수를 자극했다. 글의 문장은 평이했지만, 다루고 있는 분야가 워낙 전문적인 영역이다 보니, 평이한 문장이더라도 일반인이 읽기에는 부담으로 느낄 수 있을듯싶다.

책을 꼭 읽었으면 하는 부류는 세 부류다. 첫 번째, 백제에 관심이 많은 사람, 두 번째 박물관이나 고고학에 뜻을 두거나 관심이 많은 사람, 세 번째 백제 문화권으로 여행을 가는 사람. 특히 큐레이터가 되고 싶은 사람들은 저자의 열정 어린 태도를 보면서 많은 부분을 배울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개인적으로 여행의 깊이와 감동은 지식에 비례한다고 생각한다. 똑같은 것을 보더라도 조금 더 알고 보는 것과 그냥 보는 것은 큰 차이가 있다. 관광 도시는 도시마다 내세우고 있는 테마가 있는데 부여와 공주 일대는 바로 백제 문화가 주요 테마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역사도시를 탐방하는데, 배경 지식을 조금이나마 가지고 간다면 여행을 좀 더 풍성하게 느낄 수 있다. 그렇기에 백제 문화권 여행을 앞두고, 사전 예비지식을 쌓는 과정에서 이 책은 큰 도움을 줄 것이라고 생각한다.


5. 지식 생산자와 지식 소매상, 그리고 지식 도매상

요즘 독서 시장에 유행하는 인문학 작가들은 지식 소매상들이다. 유시민, 채사장 등등의 지식 소매상은 전문성을 지닌 지식들을 일반인이 먹기 좋게 가공하고 압축하여 선보인다. 이런 지식 소매상들과 비교해서 저자는 전문성이 뚜렷하다. 저자는 대중에게 글을 쓰기보다 전문적인 영역에서 글을 쓴 적이 많다. 그래서 저자는 지식 소매상이 아니라 지식 생산자에 가깝다. 그런 전문가가 자신의 생산물을 가공하여 대중에게 다가왔다. 그래서 저자는 책 말미에 자신을 비롯한 큐레이터들을 이렇게 칭한다. 지식 생산자와 지식 소매상의 성격을 둘 다 가진다고. 다른 큐레이터는 모르겠다만 적어도 저자의 경우는 지식 소매상이 아닌 지식 도매상에 가깝지 않을까. 소매는 2차, 3차적인 유통을 거쳐서 판매하는 것인데, 도매는 유통과정을 최소화하여 판매하는 것이니까, 저자가 쓴 책 내용의 대부분은 저자의 활동에 기인한 것이기에 소매라는 단어를 붙이기보단 도매라는 단어가 적절하다고 생각했다.

저자는 이번 책을 계기로 기회가 된다면 백제에 대한 최신 연구 결과나 활동을 정리하여 독자를 다시 찾아오겠다고 기약 없는 약속을 했다. 나는 저자의 기약 없는 약속이 기다려진다. 책을 덮으며 저자의 식지 않는 뜨거운 열정을 다시 느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기에, 저자의 열정 어린 백제 연구를 백제를 사랑하는 한 시민의 입장에서 굉장히 응원하고 싶다.

이런 좋은 양서와 만날 수 있었던 것도 따지고 보면 전라도의 이름 모를 택시기사 아저씨 덕분이다. 그 아저씨를 다시 보게 된다면 두 가지를 말씀드리고 싶다. 첫 번째. 오늘날 경상도와 전라도의 동서 갈등은 백제와 신라에서 비롯한 것이 아니라, 현대 정치인들의 편가르기에서 기인한 것이라고, 물론 삼국 시대에 백제와 신라의 갈등이 깊었지만, 그러한 갈등은 통일 이후로 희미해졌고, 고려, 조선시대에 와서는 전라도와 경상도 사이에서 특별히 감정적인 갈등이 있었다는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따라서 오늘날 동서 갈등의 원인은 현대의 정치적 시각차에서 비롯한 것이 아닐까 싶다. 나는 이를 알기 위해 아저씨가 언급한 백제를 나름 성실하게 공부했다고 말씀드리고 싶다. 두 번째는 감사하다는 인사다. 내가 지금 가지고 있는 백제에 대한 애정은 어찌 되었던 아저씨로부터 비롯한 것이기에, 이런 멋진 신비의 왕국을 소개해 줘서 진심으로 감사하다고 말씀드리고 싶다. 

푹푹 찌는 날씨가 지나가고 선선한 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백제의 숨결이 있는, 공주와 부여를 다시 한 번 방문하고 싶다. 아마 첫 방문과는 다르게, 이제는 황량한 느낌을 받지 않을 것만 같다. 파편밖에 안 남은 흔적의 도시지만, 현실의 황량함을 넘어서 온전한 백제의 미소를 마주할 수 있을 것만 같은 기대감이 마구 샘솟는다. 이 근거 없는 믿음이 확실한지 아닌지 확인해보기 위해서라도, 올 가을 즈음에 다시 한 번 백제의 고도를 방문하려고 한다. 아마 그때 나의 한 쪽 손에는 이 책이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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