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Book] 메리골드 마음 세탁소
윤정은 지음 / 북로망스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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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정은의 소설 󰡔메리골드의 마음 세탁소󰡕는 마음을 통째로 꺼내서 박박 빤 다음에 다시 집어넣고 싶다.”라는 기발하면서도 많은 사람이 공감할 수 있는 생각을 비현실적인 이야기로 전개하는 판타지 소설이다. “아픈 날의 기억을 다 지워버리면 행복해질까?”라는 질문은 소설 전체를 가로지른다. 마음에 관한 독특한 상상력이 돋보인다. 마음이란 뭘까? 기쁨, 슬픔이란 감정이 머무는 장소일까? 대개의 질문이 답하는 몫을 읽는 이에게 돌리듯, 소설에 그 답은 명쾌하게 서술되어 있지 않다. 애매하지 않은 대상에 질문은 더 이상 의미가 없으니까.

소설 속 문장들이 맥락 없이 툭툭 던져지는 느낌이다. “삶은 놀라운 비밀의 연속이다.” 이 문장은 사진을 찍은 후 사진이 포토 프린터에서 나오는 장면 바로 뒤에 이어진다. 그 뒤로는 파란 꽃잎이 바다 갤러리를 채운다. ‘꿈꾸는 일을 현실로 만드는 능력이 마법 없이도 모두의 삶에서 가능하다는 점을 말하려고 그런 문장을 넣었을까? 소설의 모든 내용이 논리적으로 해석이 가능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더욱이 판타지 소설은 그런 이해(理解)를 초월한 이야기를 담고 있어서 판타지 소설을 읽는 내가 갖춰야 할 적절한 자세가 아닐 테다. 그럼에도 거슬린다.

나는, 나도 󰡔메리골드의 마음 세탁소󰡕에서 나오는 달콤한 말이 내 마음에 착 안기게 하고 싶다. 사탕을 입에 물고 조금씩 단맛을 음미하며, 저절로 콧노래가 나올 만한 삶을 누리고 싶다. “어떤 아픈 기억은 지워져야만 살 수 있기도 하고, 어떤 기억은 아프지만 그 불행을 이겨내는 힘으로 살기도 하지. 슬픔이 때론 살아가는 힘이 되기도 해.” 지워져야만 살 수 있게 하는 기억은 무엇일까. 어떤 슬픔이길래 활력이 될 수 있지? “누가 나를 싫어하고 미워한다면 그 마음을 받아서 상처로 만들지 마시고 돌려주세요. 상처는 내 것이 아니고 상대의 것입니다.” 내 마음에 만들어진 상처가 상대에게 돌려주지 못한 나로 인해 생겼나? “신은 인간에게 최고의 선물을 시련이라는 포장지로 싸서 준대. 오늘 힘든 일이 있다면 그건 선물 받을 준비를 하고 있는 거야. 엄청난 선물의 포장지를 벗기는 중일 수도 있다는 거지.” 시련을 겪고 있는 당사자에게 신의 선물운운이 위로가 될까? 조언인가? 다음과 같은 말은 자기기만, 합리화, 정당화를 권유하고 있다. “원칙은 깨라고 있는 것 아닌가. 원칙이 깨지면 원칙을 또 만들면 되지.” 변칙, 꼼수 등을 정당화하는 말이다. 원칙이란 지키라고 있는 것이지 결코 깨기를 전제하지 않는다. 문제 해결이 어려워지고 마음이 복잡해지면 원칙을 되새기면서 나와 내 일이 원칙에서 얼마나 멀어졌는지 확인해야 한다. 원칙은 기본이기 때문이다.

소설을 소설로만 읽자고, 즐기자고 말할지 모른다. 그런데 단지 즐기기만 하기에는 현실이 너무 가혹하다. 세월호, 오송 지하차도, 이태원, 화성 아리셀 배터리 제조업체에서 일어난 참사로 고통받고 있는 사람은 소설 󰡔메리골드의 마음 세탁소󰡕를 어떻게 읽을까. 보이스 피싱 피해자, 전세 사기 피해자는? 그에게 현실의 마음 세탁소는 무엇이고 어디에 있을까? “과거를 후회하느라, 살아갈 미래에 눈이 멀어 미처 오늘을 보지 못한마음 세탁소 주인 지은은 사랑하는 가족을 잃은 과거의 슬픔과 후회를 안고 살아가느라’, 오늘 현재의 행복을 부정하며 살고 있다. 지은을 향해, 마음 세탁소가 있는 건물 1층에 사는 우리 분식 사장은 이렇게 말한다. “걱정 말어. 모든 건 잠시뿐이고 그마저도 전부 흘러가는 겨. <중략> 끝의 끝까지 가보고 두려움의 얼굴을 마주 볼 때 새로운 시작도 할 수 있는 겨.” 내가 비평가쯤도 안 되니, 어색한 사투리가 소설의 작품성을 떨어뜨린다고 비난할 수는 없겠다. 그러나 우리 분식 사장이 어떤 삶을 어떻게 살았는지에 관한 이야기도 없이 나오는 그 말은 헛돈다. 상처 입은 마음을 또 후벼 파는 느낌이 든다.

사람, 장소, 때에 따라 어떤 조언과 충고, 위로와 격려는 흉기가 될 수 있다. 좌절과 절망의 무게를 더 무겁게 하고, 자존감을 더 떨어뜨릴 수도 있다. “아무리 후회해도 어제는 이미 지나가 버렸고 내일은 아직 오지 않은 먼 미래이니 오늘을 살아야 한다. 우리 모두가 공평하게 받은 마법 같은 선물이 바로 오늘 하루다.”, “내가 가고 있는 이 길이 맞는 길이고, 내 선택이 옳은 것이라, 잘될 것이라 믿는다면 결국 그렇게 될 거야. 말하는 대로, 믿는 대로, 마음이 시키는 대로 살아가는 능력이 이미 네 안에 있어. 그냥 의심하지 말고 자신을 믿어봐. 충분히 해낼 수 있다고 믿어 봐.” 이와 대조가 되는 말이 있다. 심윤경이 쓴 책 󰡔나의 아름다운 할머니󰡕에는 할머니가 건넨 다섯 가지 사랑의 말이 나온다. ‘그려(그래)’안뒤여(안돼)’는 자기 확신, ‘뒤얐어(됐어)’는 인정과 위로, ‘몰러(몰라)’는 틈, ‘워쩌(어떡해)’는 공감과 이해를 품고 있다. 앞의 긴 문장보다 뒤의 추임새 같은 짧은 단어가 더 큰 힘을 발휘할 수 있다.

소설 󰡔메리골드의 마음 세탁소󰡕에는 서사가 없다. 있다면 가십 또는 에피소드 정도의 이야기다. 마음에 위안을 주고 휴식을 주는 이야기 대신, 교훈을 담은 문장, 듣기에는 좋지만, 휘발성 높은 말의 잔치를 벌이고 있다. 잔치에 나오는 말들은 공허, 말 그대로 비어 있다. 물론, 이 말들이 무가치한 것은 아니다. 행복, 믿음, 기억의 순화, 망각 등은 오늘과 내일의 삶을 평화롭게 하는 데 이바지한다. 하지만 그 평화가 온전히 개인만의 노력으로 이룬 결실이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럴 수도 없다. 사회의 한 구성원으로서, 독자성, 독립성, 자주성을 지닌 개인은 사회를 떠나 그런 특성을 강조할 수 없다. 그러니 평화를 얻지 못하는 개인에게만 책임을 물을 수 없다. 현실 사회에 실제로 있고, 있어야만 하는 마음 세탁소와 같은 것은 비현실적인 세계를 살아가는 초능력자가 만드는 기계가 아니다. 시민이 논의하고 합의하는 정치로 제정되는 법과 제도이어야 한다.

30만 부 이상이 우리나라에서 팔리고 해외 여러 국가에 판권이 수출된 데 축하한다. 많은 사람이 이 소설을 읽고 가벼워진 마음으로 자신이 이루고자 하는 바를 찾고 나아가길 바란다. 특히 10, 20대 청소년과 젊은이처럼 현실의 어려움을 딛고 일어설 가능성이 상대적으로 큰 사람이 지은의 마음 세탁소에서 얼룩을 지우고 햇볕에 잘 말린 후 다리미로 구김을 잘 다려입고 새출발 하길 바란다. 이 세상에 그런 마음 세탁소가 많이 생기길 바란다. 인권, 인간다움을 소중히 지켜주고 빛나게 하는 법과 제도가 그런 세탁소이다. 이것을 더욱 성숙하게 만드는 민주적인 공동체가 또 그런 세탁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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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켜야 할 세계 - 제13회 혼불문학상 수상작
문경민 지음 / 다산책방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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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마 밑에, 벌판에, 산 위에 있는 한 아이는 각각 소설 지켜야 할 세계의 주인공 정윤옥의 10, 20~40, 50~60살의 모습인 것 같다. 20247, 대학로 학전대표 고 김민기 님의 운구차가 학전앞마당을 떠날 즈음, 색소폰 연주자가 그가 만든 노래아름다운 사람을 연주했다. 가사를 눈으로 읽으며 음악을 들었다. 한 묶음 한 묶음이 정윤옥 삶의 초반과 중반, 끝을 고스란히 담고 있더라.

 

어두운 비 내려오면 / 처마 밑에 한 아이 울고 서 있네 / 그 맑은 두 눈에 빗물 고이면 / 아름다운 그이는 사람이어라

어린 정윤옥은 뇌병변장애를 안고 태어난 동생 지호를 8년간 돌보면서 미워하기도 했다. 어느날 지호는 교회 목사가 운영하는 장애인 시설로 간다. 윤옥의 엄마가 표현한 대로 어린 지호는 버려진다. 학업에 전념하면서도 동생에 대한 죄책감과 그리움을 안고 살았던 윤옥에게 지호는 지키지 못한 세계이다. 대학생이 된 윤옥은 지호를 찾으러 하성호 목사의 거주지로 갔지만, 지호의 생사조차 확인할 수 없어 절망한다.

 

세찬 바람 불어오면 / 벌판에 한 아이 달려가네 / 그 더운 가슴에 바람 안으면 / 아름다운 그이는 사람이어라

교사 3년 차 정윤옥은 2학년 담임인데, 기부금 모금을 거부하면서 학년주임, 교감 등 여러 교사와 갈등한다. 3학년 학생 수연을 만나면서 민들레 야학꽁치김치찌개라는 수연의 세계를 접한다. 담임을 맡았던 영숙이 자살을 한다. 교직원노동조합에 가입했다가 파면당한다. 정훈이 수연을 성폭행하는 장면을 목격한다. 이 시기에 윤옥은 비탈진 모래 언덕에 서 있는 기분으로 쌓아둔 모든 것이 모래처럼 허물어져 갔다.” 정훈 사이에서 태어나 네 살이 된 상현을 맡기러 온 수연은 윤옥에게금이 간 유리창같아 보였다. ‘선물처럼 찾아온상현을 맡은 지 3년이 되던 겨울, 수연이 상현을 보러 왔다가 돌아가던 날, 윤옥은 수연이가 영숙처럼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뒤쫓아가 자기가 잘 키우겠다고 말한다. 주먹으로 가슴을 두드리며 수연이가 내던 소리는 지호를 떠나보낼 때 윤옥의 엄마가 흘렸던 소리였다.

 

새하얀 눈 내려오면 / 산 위에 한 아이 우뚝 서 있네 / 그 고운 마음에 노래 울리면 / 아름다운 그이는 사람이어라

정윤옥 선생님은 봄방학 전 2주 정도 기간에도 수업을 진행한다. 그에게 수업은 밥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기대하지 않았던 성찬과 같은 수업이 있는 날, 그는 온종일 행복했다. 눈치 없이 고집만 부리는 선배로 비칠까 염려하고, 몸 편하고 마음 편한 일을 맡아 정년퇴직하는 날까지 있는 듯 없는 듯 지내고 싶은 마음도 드는 사람이다. 그러나 지호와 같은 장애가 있는 시영이의 담임을 맡고 자신의 교육관에 따른 수업을 위해 2학년 문과반 담임교사를 지켜낸다.

 

소설 󰡔지켜야 할 세계󰡕를 읽는 내내 지키다라는 동사를 붙잡고 있었다. 사전을 찾아보니 지키는 행위는 무언가를 침해당하지 않도록 보호하고 감시하고 막는 행동이다. 무언가가 함부로 지나지 않도록 길목이나 통과 지점 따위에서 주의를 기울여 살핀다. 규정, 법규 등을 어기지 않고, 지조, 절개, 정조 등을 굳게 지니는 모습이다. 지켜야 하는 대상이 있다는 것은 곧 그것을 지키지 못할 수도 있는 것, 빼앗길 수도 있음을 전제한다. 지켜야 한다는 데에는 무언가가 다른 무언가를 빼앗을 수 있다는 의미가 들어있다. 왜 빼앗으려고 하는지, 빼앗아서 무엇을 하려고 하는지, 왜 뺏기지 않고 지켜야 하는지, 지키지 않으면 내게 어떤 불이익이 있는지, 지켜야 할 세계가 있는데 지키지 못하거나 지키지 않은 이유는 무엇인지, 답하기 어려운 물음이 일어났다.

다른 물음이 이어진다. 내가 지켜야 할 세계가 무엇인가, 나에게 지켜야 할 세계는 무엇인가. 앞의 물음의 방점은 에 있고, 뒤의 물음에는 나보다지켜야 할 세계에 있다. 내가 과거에 지켰던 세계는 무엇이고 현재 지키고 있는 세계는 무엇인가. ‘지켜야 할이란 문구는 시점으로는 미래를 품고 있고, 의미로는 당위를 안고 있다. 과거와 현재를 견주어 보고 앞으로 계속 주욱 지켜 나가야 할 세계가 무엇이겠나 하는 물음과 사실에 머물지 않고 반드시 지켜야 하는 세계가 무엇이냐는 물음이다. 그동안 그 무엇을 지켜야 할대상으로 여기지 못한 탓인지, 쉽게 답을 하지 못한다. 그저 주어졌으니 머물러 있고, 그냥 원한 것을 갖게 되었으니 여전히 가지고 있는 것일 뿐, 그 무엇으로부터, 그 무엇에게 빼앗기지 않고 지켜야 하는 것으로 여기지는 못했다.

동생 지호가 살아있는지 사주점을 봐서라도 알고 싶었을까. 윤옥은 사주를 보는 레스토랑에 간다. 주인이자 셰프는 굴라시 스튜라는 동유럽 음식을 요리했다. 윤옥에게 그 식당 주인은 이 공간의 주인이라는 걸 보여주듯 당당한 모습이다. ‘주인’, ‘당당하다라는 두 단어에 눈길이 갔다. 당당하다의 은 한자어로 이다. , 사랑채, 마루 등을 뜻하는 단어로, 옛날에는 내세울 만한 주택을 지을 때 방 앞에 대청 또는 대청마루로서 당()을 만들었다. 조선 시대에는 오늘날 장·차관급의 관리를 당상관(堂上官), 그 아래의 관리를 당하관(堂下官)으로 나눠 불렀다. 무언가를 지키고 있는 주체는 말 그대로 주인이다. 그 모습과 태도는 떳떳(당당)하다. 지키는 모습은 당당하고 당당해야만 한다.

윤옥이 지켜야 할 세계는 엄마, 지호, 수연, 상현, 영숙, 시영, 그리고 학교, 수업 등이다. 지호는 지키지 못했다. 속죄였을까. 그 외의 사람과 대상을 지키려고 윤옥은 최선을 다했다. 그중에는 날을 세우지 않고는 지킬 수 없는 세계도 있었다. 이런 윤옥과 대비되는 인물은 정훈이다. 그는 민중들의 문해교육, 억압받는 민중들의 인간화를 위한 해방 교육을 주창한 프레이리의 교육 사상을 지키지 못했다. 그 반대의 길에서 교육감이라는 권력을 탐하고 부정과 부패를 저질렀다. 자신의 탐욕이 자신이 지켜야 할 세계를 빼앗은 셈이다.

한편, 지키는 행위가 개개인의 몫인 것만은 아닐 것 같다. 꼭 지켜야 할 가치는 여럿이 함께 지켜야 한다. 윤옥이 동생 지호를 지키지 못한 것은 우리 사회가 돌봄 체계를 제대로 갖추지 못했기 때문이다. 영 케어러(Young Carer, 가족 돌봄 청년)의 가혹한 상황을 서술한 󰡔새파란 돌봄󰡕이란 책에서 저자 조기현은 돌봄을 사회적 차원에서 이뤄내야 한다고 주장한다.

 

단박에 읽었다. 작년 가을 어느날, 오후에 책을 받아 들고 표지 사진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단발머리 여자가 경계석 위에 앉아 먼 곳을 바라보는 모습이다. 밤이 깊어 갈 무렵 다 읽었다. 잠깐 저녁을 먹으러 식탁에 가느라 손에 놓았을 뿐이다. 내내 천천히, 하지만 쉬지 않고 읽었다. 울컥하기도 했고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지호가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윤옥과 시선을 맞추고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다는 듯이, 다 이해한다는 듯이고개를 천천히 저으며 누나, 안녕이란 대목에서, 해직당하는 윤옥에게 전별금을 건네는 교감의 눈에 눈물이 고이는 장면에서, “열아홉이었을 때 만난 수연이 쉰이 넘었는데도 여전히 윤옥에게 수연은 우리 반 그 아이 같았다. 안타까웠고 아까웠다.”라는 문장에서 그랬다.

딱 한 글자 의 무거움과 경건함독후감을 막 쓰기 시작할 때 적었던 제목이었다. 신달자 시인이 여든 살에 펴낸 묵상집 󰡔미치고 흐느끼고 견디고󰡕에서 읽었던 삶은 딱 한 자인데 이것처럼 무겁고 복잡한 것이 없습니다.”라는 문장에서 가져왔다.

한라산이 한눈에 들어오는 수림상회에서 윤옥과 윤옥의 엄마가 노후를 보내고, 상현이는 임용이 되어 낳아 준 엄마 수연과 길러준 엄마 윤옥과 정을 나누는 결말은, 상상만 해도 마음을 울리는 감동을 준다. 그러나 작가는 정윤옥의 시신을 실은 운구차는 그녀가 1년 전까지 일했던 고등학교 정문 앞에 멈춰 섰다.”라는 문장을 첫 문장으로 윤옥의 죽음을 알린다. 삶의 허망함과 윤옥을 향한 애잔함을 극대화하려 했을까. 애잔함(가엽고 불쌍하여 마음이 슬퍼짐)에 독후감 쓰기를 멈추고 있다가 고 김민기 님의 부음을 들었다. 그의 노래 아름다운 사람을 듣고서야 애잔함은 아름다움으로 바뀌었다. 소설 󰡔지켜야 할 세계󰡕의 정윤옥 선생님은 아름다운 사람이다. 그는 맑은 두 눈과 더운 가슴과 고운 마음을 가진 아름다운 사람이다. 무겁고 허망한 마음이 애잔함으로, 다시 아름다움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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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빛을 따라서
권여름 지음 / 자이언트북스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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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내 삶을 짓누르고 있는 것은 가계빚이다. 내 집 마련하느라 얻게 된 빚은 아니다. 처남 두 명의 공동소유로 된 집에서 무주택자로서 20년 가까이 살고 있다. 많은 빚은 소득보다 지출이 많은 결과이다. 변명을 하자면, 형에게 수천만 원을 빌려주고 떼인 탓이기도 하다. “나중에 어떻게 되겠지.”하는 대책 없는 낙관주의도 큰 몫을 했다. 정년퇴직 수당으로 이 빚을 다 갚을 수는 있을지, 퇴직이 가까워질수록 빚은 줄어들 수 있을지 모르겠다. 월급날, 마이너스 대출 통장 계좌에서 돈을 꺼내 여기저기에 메꿔 넣은 후에는 안도감보다 훨씬 큰 불안감이 들어온다. 자식들에게는 대학교 다니는 비용만을 댈 테니, 그 이후는 너희 손으로 해결하라고 말했지만, 자식 결혼할 때 내게 들어온 축의금 정도만 건네주는 부모가 될 것 같아 벌써부터 미안하다. 권여름의 소설 󰡔작은 빛을 따라서󰡕의 주무대인 필성슈퍼와 그 집 식구들은 현재의 우리집, 그리고 나, 나의 식구와 비슷하다. 어찌 우리집만 그러겠는가.

소설은 크게 세 부분으로 이야기를 전개한다. ‘필성슈퍼가 영업 위기를 겨우겨우 이겨내고 넘어서는 과정, 주인공 화자인 은동이 가족 누구에게도 들키고 싶지 않은 배우 꿈 도전기, 할머니 황서은이 문맹에서 벗어나고 문해력을 키우는 과정 등이다. 이 세 이야기가 오밀조밀 모이고 얽히면서 만들어지는 자잘한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작지만, 큰 파동을 띤 빛을 보는 것 같다. 가만히 들여다보아도 눈부시지 않고 마음을 가라앉게 하면서 입가에 살짝 힘이 들어갈 정도의 웃음을 주는, 그런 빛을 안겨준다. 무엇일까.

동네 주변에, 출퇴근 길에 새로 문 연 가게가 보이면, 혼자서 소리내어 잘 되어 번창하소서.”라고 말한다. 금세 문 닫는 가게를 흔히 보았기 때문이다. 집에서 서른 걸음쯤이면 닿는 오래된 슈퍼가 나들가게로 새 단장을 했어도, 컵라면 하나 사는데 큰 길가에 있는 편의점으로 간다. ‘나들가게에서 물건을 사면 유통 일자 마감이 임박해 있거나 지나 있다. 오가는 사람이 별로 없어서 상품 회전이 잘 안된 탓이다. 한창 술을 즐겨 마실 때는 그래도 일주일에 서너 번은 막걸리에 소주, 맥주를 사느라 들렀지만, 술 끊은 뒤로는 안 간 지 2년이 다 된다. 소설의 주무대인 필성슈퍼는 아파트 상가에 흔하게 있는 동네 잡화점이다. 우리집 근처에 15년 전에 들어선 평수 넓고 비싼 아파트 상가에는 처음부터 마트 대신 작은 편의점이 있었다. 그것조차 작년에 폐점했다. 직선거리로 100m도 안 된 데에 대형마트와 대형 식자재마트가 생겼기 때문이다.

필성슈퍼는 근처에 대형마트가 개업하자 두부 한 모도 배달하기 시작한다. 김장배추를 절여서 판다. 외국계 대형마트 입점을 저지했지만, 그 업체가 샘골마트로 허가를 받고, 쌤마트로 문을 연 후, ‘필성슈퍼는 매출이 확 준다. 배달 강화, 담배 매출, 여름 한철 물놀이 손님, 트럭에 물건을 싣고 위도로 건너가 팔기, 위도 반건조 갑오징어와 간장소스로 길거리 맥주 판매 등, ‘필성슈퍼식구들은 고군분투, 악전고투를 한다. 1997IMF 이후 한국 경제의 부침과 일반 사람의 간당간당한 삶의 모습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그래도 한 번도 망한 적 없는 필성슈퍼는 오늘 우리의 모습이다.

은동은 용돈을 모으고 할머니에게 한글을 가르치며 받은 돈을 꼬박꼬박 모아 조금 큰 도시에 있는 배우 아카데미 학원에 다니려고 한다. ‘개나 소나연기를 하려고 한다는 학원 관계자의 말에 치욕감을 느끼고 포기한다. “꿈을 잃은 자는 이토록 차가워질 수 있다.”라는 은동의 독백에 나는 순간 전율을 느꼈다. 은동이 연기자 꿈을 품으면서 했던 말, “꿈은 부러운 것이 없게 만든다.”에 감동이 컸기 때문이다. 은동의 마음에 절망감과 함께 들어선 모멸, 모욕의 정도를 가늠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폐허그냥이었던 오은동이 쌤마트 앞에서 1인 시위를 하는 할머니와 함께 하면서 뻔뻔하고 당당한 폐허’, ‘의기양양한오은동으로 바뀐다. 한편, 할머니와 삼 주일 넘게 벌인 시위는 은동에게 연기에 도전하는 무대였다. 삶 자체가 연기고 연기가 곧 삶이라는 어떤 유명 배우의 말을 은동은 마트 앞에서 몸소 실현한 셈이다. ‘한 번도 망한 적 없는 은동의 삶을 확인한다.

황서은 할머니는 한글을 깨친 후에야 자신의 이름이 서운이 아니라 서은임을 안다. 자신의 이름을 서운이라 지은 부모를 평생 서운하게생각했던 그였다. 고창 오빠네 집에 갔다 돌아오는 길에서, 샘골여성 문예대회에서 금상을 수상한 시에서 할머니는 한글을 알게 된 마음을 보여준다. 마음이 시원해지면서 구름 위를 걷는 기분이 되고, ‘가슴에 뭔가 들어차 부풀어오르고 가슴속에서 무언가가 우르르 무너져버리는 기분. 한글을 가르친 손녀 은동은 할머니의 시를 읽고서야 비로소 알아야 면장이라도 혀.”에서 면장面長이 아니고 面墻임을 안다. ‘할머니가 담()을 넘으려는 순간, 눈앞의 벽이 허물어지는 상상을 하는 은동이고운 가루로, 빛으로 부서져 흩날리는 것들을 무엇이라고 말해야 할지 묻는다. 분명한 것은 한 번도 망한 적 없는 할머니의 삶이다.

글자를 못 읽으셨던 우리 어머니 생각이 소설을 읽는 내내, 그 후에도 여러 번 났다. 일흔여섯에 뇌졸중으로 훌쩍 떠나셨다. 반신불수의 상태로 병원에 계실 때 한글 읽기라도 알려드릴 걸 그랬나. 더 오래 건강히 사셨으면 내가 알려드렸을까. 소용없는 생각이고 후회다. 물건 사러 오는 사람 하나 없는 밤을 보내다 귀가하는 길에서 은동은 할머니에게 금반지 하나를 받는다. 그리고 듣는다. ‘위태로운 시간을 버티고 살아내는 사람들의 머리에서 울리는 종소리같은 간당간당소리. 모양이 소리로 변했다. 작은 것이 대롱대롱 간신히 매달려 있거나 가득 차 있어야 할 것이 거의 닳아져 곧 사라져 버릴 것 같은 모습이 은동이에게는 세상을 향해 용감하게 양팔을 벌린 것처럼’ ‘필성슈퍼의 문도 열릴 것이라는 기대와 희망의 종소리로 변한다.

인구 감소로 소도시와 농어촌 지역의 중고교는 소멸의 위기에 있다. 사립학교라면 교직원의 생계를 위협한다. 명문 사학이냐 여부는 맨 꼭대기에 있는 대학에 몇 명이 입학했느냐가 가른다. 한국의 많은 청소년은 아주 오래전부터 사춘기를 간당간당보내고 있다. 차별과 불평등에 익숙해지고 관대해진다. 협력은 선택이고 경쟁은 필수다. 성적 순위로 특별반(우월반)을 운영하는 야만적인 관례는 이제 불법이지만, 은동이 겪었던 경쟁은 더욱 격렬해지고 수도권 집중 현상은 심해졌다.

소설 󰡔작은 빛을 따라서󰡕의 이야기가 시작하는 1996년에서 28년이 지난 2024, ‘필성슈퍼와 그 식구들은 현재 어찌 되었을까. 그동안 한 번도 망한 적 없었지만, 2000년을 넘어서면서 아마도 여러 번 망하지 않았을까. ‘손님이 찾아오지 않아도 문을 여는 마음은 마음뿐, 이미 폐업했을 것이다. 대기업 편의점이 필성슈퍼공간의 반절쯤을 차지하고 24시간 불을 밝히고 문을 열어 놓고 있을지 모른다. 내가 매주 로또 복권을 1, 1,000원씩 인터넷으로 구매한 지 2년 정도 되었다. 오늘 당장 빚에 눌리지 않기 위해서다. 빚이 불안감으로 내 마음에 들어오려 할 때 복권은 요긴하게 쓰인다. 빚과 빛은 점 하나 차이다. 그 점 하나가 빛이 될 것 같다. 복권 말고 내 꿈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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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부신 안부
백수린 지음 / 문학동네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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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눈부신 안부󰡕 1쪽을 넘기면서 나는 잊고 지냈던 **이가 생각났다. 화자인 해미가 사진 전시회장에서 십여 년 전 자기를 들뜨게도 갈급하게도 하던 사람인 우재의 뒷모습을 발견하는 장면에서 사십여 년 전 그해 가을과 겨울, 나를 들뜨고 갈급하게 만들었던 동아리 동기였던 그가 떠올랐다. 같은 학과 여자 동기에게 무례하게 고백했다가 된통 차인 내 이야기를 그는 어머! 걔 진짜 재수 없다.”라며 나를 두둔했다. 갑자기 친해졌다. ‘재수 없어!’를 입에 달고 살았던 그는 가끔 내 말과 행동에 밉지 않게 눈을 흘기며 감탄사도 아닌 그 말을 내게도 했다.

그가 늘 탔던 139번 시내버스를 같이 타고 가면 나는 청량리역에서 먼저 내려 새 버스로 갈아타고 서너 정거장을 더 가야 했지만, 그와 잡은 손을 내 호주머니에 넣고 도란도란 키득키득하는 일은 행복했다. ‘학원자주화투쟁하느라 총장실과 학생처 사무실을 점거하고 철야 농성을 하던 여러 날, 연애를 금기시하는 운동권 분위기에다 정파까지 극과 극으로 달랐던 우리는 선배와 동료들 눈을 피해 늦은 시각 동아리방에서 만나, 지금은 하나도 기억나지 않은 이야기를 밤새 나누었다.

새 학년이 시작된 지 열흘쯤, 그의 생일, 내 마음을 전하려 했던 날 늦은 오후, 가두 투쟁에 나섰다가 하필 막다른 골목으로 도망친 바람에 전투경찰에 잡혀 구속되었다. 지갑에는 생일 선물을 사려고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던 학교 식당 지배인에게 가불한 돈이 들어 있었다. 3개월 정도 감옥에 있다가 나온 후에 여름을 고향집에서 지내다 가을 학기를 맞아 학교에 왔다. 이런저런 환영 모임 술자리마다 그의 소식을 전해 들을 수 있을까 생각하며 귀를 쫑긋 세우던 어느날, 술집 복도에서 그와 해후했다. 술의 힘을 빌어 그 앞에 무릎을 꿇은 채로, 보고 싶었다, 다시 만나자고 말했다. 아무 말도 없이 고개를 저으며 돌아서 간 모습이 그에 대한 마지막 기억이다. 그의 까맣고 맑고 깊은 눈에 물기가 맴돌았던 것도 같다.

소설 󰡔눈부신 안부󰡕에는 현재를 살아가는 화자인 해미와 우재 이야기를 비롯해 해미를 둘러싼 여러 이야기가 버무려져 있다. 해미가 초등학생일 때 중학생이었던 언니가 가스 폭발 사고로 죽은 일과 해미의 자책, 엄마와 아빠의 다툼, 독일 유학, 파독 간호사와 광부의 삶, 해미 이모 오행자와 레나 엄마 최말숙 마리아 이모와 교류, 한수 이모 말자가 벌인 파독 간호사 강제 송환 반대와 광주 시민 학살 항의를 위한 시위 등이 윤슬처럼 빛나는 잔물결을 일으키고, 그 중심에 한수 엄마인 임선자의 첫사랑 K·H 찾기가 뻔한 결말로 나아간다. K·H가 이미 죽었거나 군사 독재 정권의 만행으로 불우한 삶을 살고 있거나 납북당했거나 아니면 그냥 못 만나고 소설이 끝나도 충분히 재미있는 독서였을 테다.

~, 나의 상상력은 빈약의 끝판왕이다. 내 안에 있는 굳건한 성별 고정관념을 확인하면서 나는 충격에 빠졌다. 거짓 편지 쓰기가 드러난 해미가 느꼈을 자괴감과 참담함에 공감할 겨를도 없이 나는 천근호가 이해미에게 쓴 편지를 읽었다. 전율, 울음이 곧 터질 것만 같은 감정, 격정이 넓은 사무실에 두어 명의 동료만 있는 상황에서 내게 밀려왔다. 혹시라도 울음이 터질까, 책을 들고 옥상으로 올라갔다. 따가운 해를 피해 그늘에 섰지만, 무더운 바람이 불었다.

천근호가 해미에게 쓴 이메일만 따로 여러 번 읽었다. 천근호는 죽기 전에 선자가 자기에 쓴 편지와 선자가 평생 쓴 일기를 해가 질 때까지 창가에 앉아 읽었단다. 나는 얼마 전 내 일기장에 옮겨적어 둔 문정자 시인의 내가 입술을 가진 이래시의 한 구절을 읽었다. ‘내가 입술을 가진 이래/ 사랑한다는 말을 한 적이 있다면/ 해가 질 때였을 것이다/ 숨죽여 홀로 운 것도 그때였을 것이다해가 질 때, 그 무렵은 낮이 밤으로 이동하는 그 사이, 찰나의 시간이다. 근호는 그때까지 선자를 읽었고, 시인 문정자는 사랑한다고 입술을 열고 소리냈다. 묵직하고 먹먹한 느낌은 지금은 많이 가셨다.

󰡔눈부신 안부󰡕를 빌려보려고 집 근처 도서관을 검색하니 있더라. 퇴근길에 들러 서가에 갔더니 없다. 누군가 막 대출했다. 공공도서관 10여 군데를 인터넷으로 검색했다. 딱 한 군데에 있는데, 자전거로 가려면 차도와 인도를 번갈아 가야 해서 위험했지만, 퇴근길에 지도 앱을 따라 달려갔다. 퇴근 직전에 도서관에 있는지도 확인했다. 낯선 도서관에 자전거 안전모를 쓴 채로 들어갔는데, 없다. 방금 누군가의 손에 들어갔다. 대출을 접고 서점에 문의해 보니, 있단다. 곧장 달려가서 책꽂이에서 꺼냈다. 여느 때라면 눈으로 찜해두기만 하고 다른 책 구경을 한창 했을 테다. 이번엔 손에 꼭 쥐고 다녔다. 어떤 이가 자꾸 근처를 왔다 갔다 하면서 고개를 갸우뚱거린다. 급기야 점원이 오더니 데이터에는 재고 1권이 있다고 나온다면서 󰡔눈부신 안부󰡕가 꽂혀 있던 서가를 뒤진다. 내 손에 있는 󰡔눈부신 안부󰡕를 번쩍 들어 올리면서 두 사람을 향해 물음보다는 내가 선점했소!’에 가까운 의미가 담긴 말, “이 책인가요?”를 무표정하게 전했다. 고단했지만 󰡔눈부신 안부󰡕와 눈부시게 만났다.

나는 선자 이모를 애도하고 추모하는 마음으로 그가 읽었던 루이제 린저의 󰡔생의 한가운데에서󰡕, 이 책을 1961년에 한국에서 처음 번역했던 전혜린의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사뮈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를 다음에 읽을 도서 목록에 적었다. 세상에 혼자 감당해야 하는 슬픔 같은 건 없다, 소용없는 줄 알면서도 뭔가를 하려는 바보 같은 마음이 생기는 이유는 간절하기 때문이다, 항상 생각만 하던 말을 입 밖으로 내뱉고 나면 그것이 사실처럼 느껴진다, 사람을 사랑하는 일에는 지극한 정성과 수고가 필요하다는 문장은 오래 담아 두고 싶다. 독후감을 쓰는 일이란 나를 정리하는 일이다. 소설 속 이야기와 등장인물에 빠져 흐느적거리는 내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히는 일이다. **이를 향한 마음도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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훌훌 - 제12회 문학동네청소년문학상 대상 수상작 문학동네 청소년 57
문경민 지음 / 문학동네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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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무심한 듯 조심하는 마음

너 그거 아냐? 너 다리 밑에서 주서(주워) 왔디야!!!”삼촌이나 고모, 또는 나이 차 크게 나는 형이나 누나가 어린애를 흔하게 놀리는 말이다. 내 막내 딸아이를 곧잘 그런 말로 놀린 적이 몇 번 있다. 두세 번은 얼굴을 실룩거리며 굳히더니, 언젠가 아빠! 새아빠래. , 친아빠 찾으러 갈래.”라고 대꾸한 뒤에는 그런 말을 더는 하지 않았다. 재미가 없어졌으니까. 그런데 문경민의 소설 󰡔훌훌󰡕을 읽고, 그런 놀림은 입양에 대해 부당하고 부적절한 차별 의식을 담고 있는 나쁜 언행임을 알았다.

어린 시절, 거짓말인 줄 알면서도 혹시 내가 주워 온 아이는 아닌지 하는 생각과 함께 들어오는 아득함, 아찔함 그리고 설움은 본능으로서 자연적인 감정일까? 소설 󰡔훌훌󰡕의 화자인 유리는 자신이 입양된 아이라는 사실이 들켜버린나머지, 당혹감과 수치심에 휩싸인다. 어린 시절부터 입양 사실을 설명해야 하는 순간에 유리는 자신의 처지에 대한 원망과 함께 분노, 배신감도 느꼈다. 분명해 보이는 것은 가슴으로 낳은 자식으로 여기려는 마음이 동물적 본능에 반하는, 지극히 인간적인 마음이란 점이다.

인간다움에는 비정한 자연에서 비켜선, 동물이면서 동물이 아닌 인간만의 모습이 있다. 󰡔훌훌󰡕의 병규와 진성 같은 현실 속 사람들이 품는 입양에 대한 고정관념(친자식만큼 잘 대하지 않을 것 같다, 입양아는 길러준 부모에 대해 친자식보다 더 말을 잘 들어야 하고 효도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못된 친자식보다 더 못된 자식이다 등), 혐오(머리 검은 짐승은 거두는 것이 아니라는 둥, 외모 품평 등), 그리고 부당한 차별(선 긋기, 따돌림 등) 등은 지극히 동물적(야수적)인 것들이다.

고향숙 선생님 수업 시간에 보여준 일부 학생들의 수업 방해 사례(틀딱, ‘음탕이 무슨 뜻인지 묻고, ‘불륜이란 단어를 언급하는 등)는 단순 무례를 넘어 여성, 노인 등에 대한 혐오를 보여준다. 나이 많은 여자 교사를 젊은 남자 교사와 다르게 대하는 차별적 태도는 여성·노인 혐오를 동반한다.

일상에서 거리낌 없는 조롱과 놀림으로 표현되는 언행은 부당한 혐오와 차별을 불러오는 데 그치지 않고, 죄의식을 갖지 않게 만든다. 이번 주말에 있을 고교 친구 모임에 이혼하고 혼자 사는 친구, 결혼했지만 아이가 없는 친구가 참석한다. 친한 사이라 해도 화제로 올릴 주제에 대해 나는 신중해야 한다. 무심한 듯 조심하는 마음이 내게 필요하다.

 

2. 겪어보지 않으면 알 수 없는 마음

󰡔훌훌󰡕을 이틀 만에 읽은 날 다음, 주말 아침 늦잠을 즐기며 잠자리에 누워 있다가 문득 유리의 엄마 서정희가 떠올랐다. 유리 할아버지의 표현대로 유리가 갓난아이였을 때 그냥 벌어진 일이었던 교통사고로 유리의 부모가 죽고, 서정희의 남편과 딸 수빈이 죽었다. 살아남은 서정희는 수빈 자리에 유리를 입양한다. 그러나 유리를 키우지 못하고 아버지에게 떠맡기고 집을 나가 재혼했다. 연우를 낳기 전에 다시 이혼했고 알코올 중독에 빠진 채 혼자 연우를 키우며 학대했다. 어느날 서정희는 나쁜 짓을 한 초등학교 4학년인 연우를 술에 취한 채로 혼내다 다리 난간에 서서 연우를 향해 밀어 버려라고 소리를 지른다. 엄마 말을 듣고 정말로 밀기 위해 다가오는 연우를 정희가 걷어차려다 균형을 잃고 다리 아래로 떨어져 죽었다. 서정희의 아버지, 곧 유리 할아버지는 현재 복막암 진단을 받고 항암 치료 중이었다. 사위와 친손주인 수빈을 잃고, 이에 상심한 채로 방황하는 딸마저 먼저 저세상으로 떠났다. 부모보다 먼저 죽은 자식을 둔 부모의 마음은 헤아릴 수 없다.

유리의 엄마 서정희의 삶이 꼬이게 된, 그를 망가지게 한 날, 사건 또는 일은 무엇일까. 교통사고로 남편과 딸은 죽고 자신만 살아남게 된 날? 사고 유발 운전자와 아내가 죽고 살아남은 그들의 딸을 입양해서 키우게 된 일? 재혼과 이혼? 그 어떤 일, 사건, 사람 중 일부거나 전부일 수 있다. 그런데 왜 정희는 그 꼬인 매듭을 풀지 못했을까? 망가진 삶을 복구하려고 애를 썼겠지만, 허망하게 죽고 말았다.

나는 내 삶의 어떤 지점에서 꼬인 적이 있었을까? 망가져 본 적은 있었는지. 그랬던 몇 가지 사건과 장면이 떠올랐다. 시인 안도현은담배를 끊고 술을 끊고 애욕에서 벗어나려고 하지만 눈 감으면 선명해지는 것들이 많아지는 나이를 오십 대라고 적었다. 내게 그 사건, 장면 들은 그래서 더 선명한가.

훌훌털어 버리다라는 동사 앞에 붙은 부사로 익숙하다. 인터넷 사전을 보니, 날짐승이나 눈·종이·털 따위가 가볍게 움직이는 모양이라고 한다. 󰡔훌훌󰡕에서 훌훌은 딱 한 번 나온다. “(서유리)는 고등학교 과정을 마치고 이 집을 훌훌 떠나면 됐다.”(172) 유리는 너무 힘들었다. 유리가 연우처럼, 아니 그 이상으로 망가지고 형편없는 청소년기를 보낼 수도 있다. 초등학교 3학년 학생이 밥상을 차리고 집안 살림을 꾸려 나가는 일은 상상하기 어렵다. 고교 2학년 유리에게 훌훌은 참으로 간절한 부사어다. ‘죽을 만큼 힘들었던 일을 겪은 고향숙 선생님은 너무 힘들 때는 웃으려고 애써 봐.”라고 유리에게 권한다. 그것이 웃음으로 고통으로 포장하는 것일 수도 있고, 훌훌 떨치고 움직이고 나아가게 하는 힘을 주는 것일 수도 있겠다. 앞이 서정희와 유리의 웃음이라면, 뒤는 고향숙 선생님의 웃음일까.

 

3. 새살이 돋는 마음

문경민의 소설 󰡔훌훌󰡕은 흥미진진하고 재미있다. 짜임새 있는 이야기가 독자를 적당히 궁금하게 만들면서 답을 부드럽게 내놓는다. 자동차 지붕에 떨어지는 빗방울을 , 이란 의성어와 함께 끊어지는듯한 소리라고 적었다. 툭툭 떨어지는 비와 툭툭 끊어지는 비는 느낌이 다르다. 세윤이 유리의 어깨를 두드려 주니 유리는 마음에 새살이 돋는 느낌이 들었단다. 읽기 속도를 빠르게 하고 손에 쥐게 하는 시간을 길게 만든 󰡔훌훌󰡕은 내 삶에 있는 여러 상처에 연하고 부드러운 새살을 채워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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