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교 새내기 시절, 칠면조(대학 친구 별명이다.)가 갑자기 이런 얘기를 했다.
너 혹시 같은 고등학교 누구 알아? 걔가 넌 이런 저런 애라고 하더라.
이 얘기에 나는 순간 충격을 받았다. 무엇보다 ‘누구’라는 애가 당시 칠면조보다 더 많은 대화를 나눠본 적이 없었다. 도대체 나에 대해서 뭘 그렇게 잘 안다고 나에 대해 아는 척을 했을까? 사실 말하자면 태어난 지 35년이 지난 지금도 나에 대해 내가 어떤 사람인지 정확하게 정의할 수 없다. 그럼에도 ‘누구’양은 어떤 확신에 차서 나에 대해 이야길 한 것인지 15년 지난 지금도 가끔 생각이 난다. 물론 지금 칠면조가 누군가에게 “얘는 이런 애야.”라고 말한다면 이해할 수 있다. 그만큼 내 기준으로 칠면조는 나에 대해 잘 안다.
솔직히 말하지만 ‘마스다 미리’ 첫인상은 내게 별로였다. 감각적인 이야기 조각으로 우리나라 여성 마니아가 많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마음먹고 펼친 첫 책은 ‘미치코씨, 영어를 다시 시작하다.’란 책이다. 실망이었다. 내가 즐겨듣던 팟캐스트에서 똑같은 책을 두 번 소개할 때나, 홍차에 대한 지식을 한 시간 동안 들어도 이 정도로 지루하지 않았다. 영어를 시작하는 이야기가 아니었다. 영어와 일본어 차이를 책 한 권을 통해 반복하고 있었다. 다시 당신 책을 읽지 않으리다. 속았다. 이게 솔직한 내 감상이었다.
이런 생각을 갖고 있다가 ‘마스다 미리’ 책을 다시 펼치게 된 이유는 참으로 속되다. 마스다 미리가 그린 그림과 함께 있는 크리스탈 문진을 갖고 싶었다. 마스다 미리와 나는 여자니까, 여자로서 통하는 점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며 ‘여자라는 생물’이라는 책을 주문했다. 열심히 읽었다. 다 읽고 헛헛했다. 제목에 생략된 것이 있었다. ‘늙은’이란 수식. 이 책은 여자로 `나이 든` 마스다 미리 생각이 들어있었다. 축 쳐지는 느낌. 아, 나랑 마스다 미리는 아닌가봐. 실망하고 슬퍼했다.
구립 도서관에서 방송대 시험공부를 했다. 나이 들어 공부하려니 영 머리에 들어오지 않는다. 일어서서 서가에 꽂힌 책을 봤다. 마스다 미리 책이 보인다. ‘오늘도 화를 내고 말았습니다.’라는 책을 펼치며 ‘내 마음과 똑같네.’라고 풋 웃었다. 그러다 반짝이는 책을 만났다. ‘전진하는 날도 하지 않은 날도’. 다른 책보다 평범한 때 붙은 듯 누런 표지 천진난만한 아이 둘을 바라보는 마스다 미리가 그려진 책. 이 책에 금방 매료됐다. 무엇보다 마스다 미리는 나와 치통 동지였다. 나도 혼자 아픈 이를 끙끙대다 친구에게 전화해 친구 남편 병원에 예약을 한 적이 있다. 끊고 엉엉 울었다. 너무 아파서. 마치 내가 쓴 글인 줄 알았다. 그 때 내 마음이 그대로 있었다. 한마디로 이 책은 어른으로 살아가는 마스다 미리가 가끔 아이로 돌아가고픈 마음을 그린 책이다. 무슨 우연인지 내가 공부하는 과목은 ‘유아교육과’다. 그렇게 발등에 불이 떨어진 시험을 뒤로 하고 난 이 책을 다 읽어버렸다. 책을 덮고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아마 난 이 책을 만나기 전이라면 앞서 얘기한 ‘누구’양처럼 떠들어댔을 것이다.
˝내가 읽어 본 마스다 미리 책. 별로야.˝
˝마스다 미리란 작가를 영영 모를 뻔 했다.˝
이 책을 통해 난 마스다 미리라는 책으로 소통하는 벗을 만들었다는 생각이 든다. 섣부르게 그런 정의를 내리지 않게 한 이 책에 정말 감사하다. 나도 그렇고 작가도 그렇고 아마 대부분 사람이 그렇지 않을까? 인연이 닿는 잠깐이란 시간에 모습으로 쉽게 상대방을 정의 내린다. 얘는 착한 애, 얘는 웃긴 애, 얘는 가벼운 애, 얘는 싸가지 없는 애. 과연 그게 맞는 말일까? 마스다 미리를 다시 만난 의도는 참 불순했다. 그래도 덕분에 마스다 미리와 친해질 수 있었다. 공부가 잘되는 날도 안 되는 날도 있다. 친구가 될 수 있는 날도 원수가 되는 날도 있다. 어쨌든 나는 크리스탈 문진을 갖고 싶다는 욕구 때문에 좋은 작가 한 명을 얻었다. 증쇄를 바라는 욕심 많은 친구, `마스다 미리`가 만든 새로운 책을 기다린다.
완벽하게 행복한 하루가 인생에 몇 번 있을지는 모르지만, 오늘은 그 한 번에 들어가겠구나.(2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