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 오랜만에 모바일 교보 도서관에서 놀다가 빌려본 책이다.
그런데 정말 눈을 뗄 수가 없어서 졸지에 스마트폰 중독자가 되었다.ㅜㅜ억울하오.
정말 티브이만 틀면 김미경 강사가 나오는 시절이 있었더랬다.
나는 하은맘과 김미경 강사.. 꼭 욕하면서 그들이 낸 책은 다 읽어보는 이상하고 괴상한 성향의 나.
나보다 연세 많으신 강사님에게 정말 해서는 안 될 말이지만 말을 듣고 있거나 어떤 부분 책을 읽고 있으면 분노가 치솟아 올랐다.
90%는 그녀의 말이 힘이 있어서 내 생각을 바꾸고 행동으로 옮길 힘을 주는 것은 정말 좋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가끔 오버하면서 나오는 말들..
가령
˝집에서 우르르 몰려다니면서 수다나 떠는 전업주부들˝을 특정 호수에 모이는 엄마들로 묶어서 폄하하는 것.
나는 자기 계발서를 안 읽고 인문학 책을 읽고 고전을 읽는다는 사람에게 ˝웃기고 있네.˝라고 얘기한 점.(당시 독설로 유명할 때라..)
나도 이렇게 성공했는데 왜 넌 도대체 못하니?라는 억양을 조금 기분 나쁘게 내비친 점.
어떤 선배의 회의적인 말 한마디에 그것 때문에 망할 줄 알았다며 모욕적인 글을 적은 점.
그리고 마지막 논물 표절 문제 때 보통 나처럼 바쁜 사람들은 그렇게 많이 한다면서 은근슬쩍 책임을 넘기려는 말을 한 점.
참.. 누가 A형 아니랄까 봐 이렇게 사소한 것을 다 기억하고 ˝이 사람 별로야~˝라고 글을 써대면서 또 꾸역꾸역 책을 읽었네.
이 책을 다시 집은 것은 우연히 읽은 여성 잡지와의 인터뷰를 읽으면서 예전과 다름을 알게 됐기 때문이다.
진짜 대단한 사람과 약한 사람은 위기에서 알게 되나 보다.
이 사람은 대단한 사람이었다.
내가 욕하면서도 계속 읽은 것은...정말 나는 사람 보는 눈이 있던 것이었다면서 자화자찬.
이제 더 이상 그녀는 꿈 팔이를 하지 않는다.
더 나아가 그는 꿈밖의 운명이란 굴레까지 확장해서 인생의 길을 가르쳐준다.
옳다. 옳다. 맞다. 맞다. 정말 구구절절 옳은 글을 현대사회를 지내면서 왜 지쳤는지 몰랐던 내 내면을 꺼내어 구체적으로 설명해주고
답을 이야기해 준다.
가슴 깊이 ˝나 왜 이렇게 화나지?˝ ,˝나 왜 이러지?˝하는 일들이 그녀의 예시 한방에 이해가 간다.
또 이 책은 육아서이기도 하다.
내가 어떻게 아이를 키우는지 그리고 엄마로서 내가 어떻게 행복함을 느끼는지도 이야기한다.
하지만 그녀는 감히 이 책에서 이렇게 키우라 저렇게 키우라고 강요하지 않는다.
다만 자기 첫째 딸이 대학에 들어갔는데 바로 자퇴하고 삼수하다가 다시 처음 합격했던 대학에 들어간 얘기
3개월 만에 연습해서 피아노로 예고에 들어간 아들이 학교에 적응을 못해 고등학교를 자퇴한 이야기를 한다.
셋 다 서울대 간 박혜란 작가 정도 되어야 육아서라는 캐치프레이즈를 내밀지.. 지금은 참 아웃풋이 불안불안하다.
그래도 난 이 분의 육아 방식이 옳다고 생각했다.
비록 흔들려도 이 흔들림에 같이 반응해주는 엄마.
정말 요즘 보기 드문 사람이다.
제발.. 제발 세 남매가 10년 후에 우리나라에서 영향력 있는 인물로 자라나길 기도해 본다.
바닥을 치고 다시 올라오는 그녀의 절망 탄력성을 보니..
정말 이제야 ˝선생님˝이란 칭호를 그냥 얻는 게 아니구나.. 싶다.
지천명의 50세의 김미경 강사에게 더욱 많은 기회와 도전이 함께 했으면 좋겠다.
그리고..감히 올해 읽은 책 중 가장 좋은 책이었다고 평해본다.
생각해보면 나 역시 꿈만으로 살았던 것은 아니다. 때론 생각지도 못한 늪에 빠져 흙투성이로 뒹굴었고, 한동안 외부의 충격으로 진공상태가 되기도 하고, 가족을 비롯한 주변 사람들과 수업이 다투며 때로는 상처를 주기도 했다. 나도 매일매일 인생을 연습하며 경 살아가는 불안하고 약한 인간이었을 뿐이다. 그때마다 나를 돌아보고 다스리지 않았다면 진작 꿈길에서 벗어나 차가운 마음의 감옥에 갇혔을지도 모른다.(3%)
원래 사람은 사소한 것조차 자기 문제가 되면 순간적으로 짓눌린다는 것을. 돌멩이만 한 무게에도 생각하는 힘을 잃어버린다는 것을. 왜냐하면 `그것`과 나의 거리는 너무 가까우니까.(5%)
인생에서는 반드시 카드를 넘기는 순간이 온다. 앞면에서 뒷면으로, 다시 뒷면에서 앞면으로, 불행의 카드 뒤에는 고통이 크기만큼 행운과 축복이 숨겨져 있고, 마찬가지로 행운의 카드 뒷면에는 그만큼의 불행과 위기가 도사리고 있게 마련이다.
운명을 재해석한다는 것은 그 숨겨진 카드의 뒷면을 보는 일이다. 카드의 앞면에만 속지 않으며 뒷면이 있다는 것을 믿고 찾으려 애쓰는 것이다. 심오한 해석이 아니어도 좋다. 그저 자신이 볼 수 있는 만큼 보면 된다. 자신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고 스스로를 설득할 수 있는 재해석이면 충분하다. 중요한 것은 카드의 앞면만 보고 판단하지 않을 지혜와 여유 그리고 그 카들ㄹ 뒤집을 수 있는 용기 아닐까.(12%)
인간은 각자 자신의 존재만으로도 이미 충분하고, 자신의 꿈만으로 세상을 살아갈 수 있도록 세팅되어 태어났다. 우린 각자의 인생을 살고 각자의 꿈을 꾸고 각자의 색깔을 지니며 성장한다. 서로가 세상에 하나뿐인 소중한 존재임을 인정하고 사랑해주고 믿어 주는 것, 그리고 곁에서 서로가 무르익어가는 것을 기다려주는 것, 사실상 이것이 부모가 할 수 있는 전부가 아닐까.(23%)
너무 좋아할 일도, 너무 슬퍼할 일도 없다. 그래서 삶에 도가 튼 이들은 오히려 잘 나갈 때 마음을 낮추려 애쓴다. 늘 내가 후의 어디쯤에 와 있는가를 살피고 속도를 조절하는 것이다. 생각 있는 부자들은 돈을 많이 벌면 기꺼이 사회에 환원한다. 너무 많이 벌면 벌지 말아야 할 돈까지 들어와 추가 세게 움직인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 돈을 덜어내면서 끊임없이 추의 균형을 잡는다.
운명의 추는 살아 있는 내내 끊임없이 움직인다. 우리의 심장이 뛰는 한 추가 움직이는 것을 막을 도리는 없다. 그러나 이때 정말 잊지 말아야 할 중요한 것이 있다. 나의 `상황`만 좌우로 움직일 뿐 `나`는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32%)
우리도 그렇게 모두 흔들리는 중이다. 이 땅에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단 말인가 그러니 `왜 나만, 왜 우리 집만 이런가`라는 생각은 이제 놓아버려도 된다. 어차피 올라갔다 내려갔다를 반복하는 인생, 굳이 비교급 불행까지 만들며 스스로 끌어내릴 필욘ㄴ 없다. 나만 그런 게 아니니까. 살아 있는 우리는 모두 그렇게 또 살아가는 중이다.(41%)
때로 말도 안 되는 허술한 논리로 야단을 쳐도 부모니까 무시하지 않고 들어준 것이구나. 억지를 부려 남들 앞에서 창피할 때도 있지만 부모니까 눈 질끈 감고 감싸 주었구나. 부모 자식 간의 관계는 자식이 부모를 용서하기 때문에 가능한 거로구나.
이 세상에 완벽한 부모는 없다. 완벽하기는커녕 실수투성이에 단점 투성이들이다. 나의 부모님 역시 단점이 많은 사람들이다. 왜 자식에게 잘못한 것이 없고 부족한 것이 없었을까. 하지만 난 철이 들면서 내 부모님의 단점과 문제들을 깨끗이 덮기로 했다. 자식이 부모에게 할 수 있는 도리이며 최고의 효도는 별다른 게 없다. 그저 부모의 단점은 다 덮고 장점 세 개씩만 추려 사랑하고 존경하면 된다.(43%)
부모 건 자식이건 간에 사람은 누구나 존귀하고 사랑받아 마땅한 존재다. 그러려면 행복하게 살 수 있도록 스스로를 책임질 수 있어야 한다. 어떤 조건에서도 자신을 버리지 않고 사랑하면서 데리고 살아갈 의무를 갖고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이다. 부모 때문에 자신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부모의 상처로부터 자신을 지키는 것이 이 땅에 탄생한 자의 의무이다. 부모 때문에 이렇게 됐다는 것은 `나는 부모의 복제품`이라는 것을 스스로 인정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인생을 이해하고 나 스스로 주인공이 됐을 때, 그때가 바로 진정한 `탄생`의 시작이다.(45%)
불행과 상처는 `극복`하는 것이 아니다. 그저 지나가도록 놓아두는 것이다. 그 모든 감정들이 하나하나 내 몸을 빠져나갈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다. 어떤 운명도 시간을 이길 수는 없다. 그러니 흘러가게 두면 된다. 방구석에 틀어박혀 숨만 쉬어도 된ㄷ. 중요한 건 한꺼번에 내려놓으려는 욕심을 부리지 않는 것이다. 왜 이까짓 일도 못 이겨내느냐고 스스로를 다그치지 않는 것이다. 억지로 웃거나 씩씩한 척하지 않아도 된다. 박노해 시인은 말했다.
`정직한 절망이 희망의 시작이다.`(52%)
두 아이의 엄마가 대체 얼마나 힘들었으면 죽고 싶다는 말까지 할까. 사연을 들어보니 그녀는 우울증에 빠져 있었다. 첫아이를 낳기 전까지 직장에서 열심히 일했던 그년는 첫애가 어느 정도 크면 다시 나가서 일을 하려고 했는데 덜컥 둘째를 갖게 됐다. 카워줄 사람도 업슨 처지에 집에서 아이 둘을 돌보려니 감당이 되질 않았고 끝내 우울증으로 번졌다. 심지어는 아이들이 자신의 발목을 잡는 것 같아서 쳐다보기도 싫다며 울먹였다.
˝감옥에 갇힌 기분이구나.˝
그녀가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그녀가 어떤 마음으로 하루를 살고 있는지 알 것 같았다. 요즘 여자들 중에는 자아가 강하고 꿈에 대한 열망이 센 사람들이 많다. 그런 경우 집에서 육아에만 전념했다가는 자칫 우울증에 시달릴 수 있다. 나쁘고 못된 엄마라서가 아니다. 엄마이기 이전에 30년간 한 개인이자 여자로 살다가 갑자기 엄마 노릇을 하려니 거부반응이 일어나는 것뿐이다. 아이들이 밥도 잘 먹고 잘 크고 있는데도 우울한 이유는 자신의 성장이 멈췄기 때문이다. 자신이 성장하는 것을 보는 것만큼 엔도르핀이 나오는 일이 세상에 또 있을까. 그걸 어떤 마음의 준비도 없이 갑자기 멈추니 우울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럴 때 내가 꼭 해주는 얘기가 있다.
˝잘 됐네. 인생 35년 만에 제대로 공부할 기회를 얻었잖아. 공부하기에 제일 좋은 데가 어딘지 알아? 감옥이야.˝
그녀가 눈만 깜빡였다. (86%)
단언컨대 아무거나 해도 된다. 집에 있는 책을 펼치든 도서관에 가서 순서대로 읽든 상관없다. 글자를 읽기 싫으면 역사 지도라도 펴놓고 봐도 된다. 공부의 재로가 없는 상태에서는 뭘 공부해야 할지 모르는 게 정상이다. 서점에서 원하는 책을 한 번에 골라내는 것은 공부의 도가 높은 사람만이 할 수 있다. 그렇게 `아무거나`로 시작하다 보면 점차 공부가 진화하기 시작한다. 공부를 하면 할수록 뭘 공부해야 하는지 알게 되는 것이다.
배우면서 성장하는 이치는 똑같다. 어린 시절에는 꿈이 뭔지도 몰랐다. 그저 한글을 배우고 숫자를 읽는 것부터 시작했다. 그런데 배우다 보니까 공부가 꿈의 재로가 되고, 그 꿈으로 다시 공부를 하게 되는 순환이 일어난다.(8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