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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식주의자
한강 지음 / 창비 / 2007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묵은지 같은 소설이 상을 받다.
'채식주의자'는 책이 되어 나온 지 10년이 다 되어 간다.
엄밀히 말하면 이 세 개 중편이 세상에 빛을 본지 10년이 지난 책이다.
그 책이 갑자기 맨 부커상을 받았다.
십 년 전에 이 책은 뜨거웠을까?
어느 감독이 이 책을 읽고 깨닫는다.
적은 돈으로 관객을 끌 수 있는 소재다.
그래서 찍는다.
사실 이 책을 제대로 이해한 배우는 김여진이란 인혜를 연기한 배우뿐.
그저 눈길을 끄는 충격적 이야기 소재로 관심만 끄는 안타까운 영화가 되어버렸다.
이 책이 국제 상을 받은 이유
1. 서구와 다른 이국적 색채.
서양 사람은 오리엔탈리즘에 관심이 많다. 이국적인, 자신은 모르는 세상.
상을 주는 심사위원에게도 눈길을 끄는 소재다.
한국이라는 동양이란 나라에서 일어난 일.
이 안에 남자는 다 제정신이 아니다.
극히 왜곡된 남성이 나오고 그 안에 버티는 두 유형 여인이 나온다.
영혜는 '여자는 자고로 가만히 있어라.'라는 요구에 충실한다.
결국에는 가만히 있는 식물이 되고자 한다.
그래서 고기를 먹지 않고 햇빛만으로 살기 위해 가지와 뼈대만 갖고 있는 나무로 변한다.
인혜는 고분고분 남자가 갑인 세상에서 섞여 살아간다.
또 그 다른 남자인 아들을 품으며 그렇게 버틴다.
이런 강한 남성 아래서 핍박받는 현실은 마치 아프가니스탄 실상을 그린 할레드 호세이니를 떠오르게 한다.
'곰곰이 생각하는 발'(패루애)님이 이 부분에 대해 '채식주의자'를 강하게 비판했다.
나 또한 그 비판에 공감한다.
편파성이 없지 않아 있는 작품임에는 부정할 수 없다.(일부러 문장을 꼬았다.)
2. 서양인에게 관심 있는 주제: 개인 주체에 대한 고찰
로맨틱 코미디 주인공을 보자.
예쁘긴 하지만 너무 예쁘면 안 된다.
그렇다면 남 이야기가 되어 버린다. 남 일에는 큰 관심을 가질 수 없다.
내 이야기일 수 있는 가능성이 있어야 관심을 갖고 읽는다.
이국적인 세상 이야기라도 공감할 수 없는 이야기는 버림받는다.
그 대표적인 소설이 '엄마를 부탁해'이다.
이국적인 한국 사회를 보여주는 소설이라고 해서 많은 영어권 사람이 읽었다.
그렇지만 외국 감상은 그렇다.
"왜 네 엄마가 아픈데 너도 마음 아프다고 난리냐?"
인기는 많다고 외신 보도는 됐다. 그뿐이었다. 그냥 깜짝 관심.
그게 끝이었다. 상으로 이어질 수 없었다. 그렇지만 '채식주의자'는 다르다.
이 책은 퓰리처상을 차지한 줌파 라히리의 '축복받은 집'과 많이 닮아있다.
오리엔탈적 생각이 섞여있지만 '나'에 대한 실존이 들어가 있다.
사회에서 '나'는 과연 누구일까.
세 중편 모두 '영혜'가 주인공이다. 그렇지만 세 편 모두 화자는 다르다.
처음 '채식주의자' 화자는 사회적 요구에 맞추어 적당한 여자라고 생각한 영혜와 결혼한 남편.
두 번째 '몽고반점'은 영혜를 가장 이해한 형부. 그렇지만 형부는 결국 예술은 완성됐으나 사회적으로 비판받아야 할 선택을 한다. 가장 많은 논란이 생기는 소설이다.
세 번째 '나무 불꽃'은 끝까지 동생을 지키며 이해하게 되는 인혜가 화자다.
세 명이 보는 영혜를 통해 피동적 인간이었던 영혜를 이해한다.
이는 모든 사람에게 '나'라는 사람이 어떤 위치를 선점하는가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다.
'엄마를 부탁해'처럼 엄마와 자식이 일체가 되어 서로를 이해한다는 그 특수한 감성이 굳이 필요 없는 부분이다.
3. 작품을 얕게 이해하고 쓴 번역가
이 책 상은 정말 우연하게 받았다.
만약 저명한 번역가가 이 책을 번역했다면 어땠을까?
나름 배운 번역가라면 한국 안에 있는 정서와 한강이 얘기하고자 하는 글을 다 표현하고 싶다는 욕심이 생길 수밖에 없다. 학술적으로 성공한 훌륭한 번역서가 될 수도 있겠다.
그런데 그 글이 과연 한국을 모르는 심사위원 마음을 잡을 수 있을까?
다시 한 번 이야기하지만 상을 주기로 결정한 사람도 '사람'이다.
올림픽도 체조 같은 경우 사람이 채점을 하긴 한다. 하지만 '문학상'이란 것은 심사위원을 이해시켜야 상을 받을 수 있는 것 아닌가?
데보라 스미스는 한국어를 잘 모른다. 영어로 한국어를 직독직해했다. 왜냐하면 한국어로 읽었을 때 재미있었다고 한다. 그녀는 그랬다. 자신이 재미있는 부분을 그대로 번역에 담았다.
전문 번역가는 그럴 것이다. 이것은 절대 번역이 아니다. 그저 단어를 옮겨다 붙였다.
그렇지만 심사위원도 영국인이다. 그게 작용했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미국에서도 인기 있는 일본 작가다.
그가 쓴 책(직업으로서의 소설가)을 읽고 놀랐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소설을 쓸 때 절대 현학적인 일본어로 구사하려고 하지 않는단다.
나름 와세다대 나온 남자인데, 아주 쉽게 쓰기 위해 이런 방법을 썼단다.
먼저 자신 소설을 영어로 쓴다. 자신이 원래 쓰는 단어가 아니기에 영어로 쓴 문장은 어휘에 제재가 아주 크다. 그럼에도 그렇게 영어로 쓴 다음 번역한다는 마음으로 일본어로 고쳐 썼단다. 그렇게 한 편 소설을 끝내고 그 마음으로 글을 쓴다고 한다. 놀라웠다. 그래서 그가 쓴 글이 역시 미국에서 먹힐 수 있었다.
그렇다. 상을 주는 사람 입장에서, 읽는 사람 입장에서 쓴 글이 중요하다.
다음에 또 써야겠다.-_-
열심히 쓰다가 내 정신 배터리가 나갔다.
아무래도 그래서 내가 이 '채식주의자'를 읽었지만 서평을 차일피일 미룬 게 아닌가 싶다.
그래도 이번 동대문 도서관에서 같이 이야기를 나누면서 정리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아무래도 이 책을 읽고 떠올렸던 생각이 많은 모양이다.
각 세 편 소설에 대해서도 다시 한 번 글을 써 봐야겠다.
오늘은 여기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