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적을 만들다 - 특별한 기회에 쓴 글들
움베르토 에코 지음, 김희정 옮김 / 열린책들 / 2014년 9월
평점 :
움베르토 에코의 책은 우선 믿음이 간다. 결코 쉬운 책이란 생각은 한 번도 해보지 못했다. 항상 묵직함이 느껴지는 이야기라 어렵게만 느껴지는 면이 더 많다. 그럼에도 움베르토 에코의 책이 나오면 나도 모르게 손이 간다. 저자에 대한 남다른 애정이 있기 때문이기도 하고 선택한 책이 실망스럽지 않기 때문이다.
"사람들을 통제하고 싶다면 적을 만들어 주어라. 그리고 거기에 두려움과 증오의 색깔을 입혀라." 이 얼마나 강렬한 문구인가? 대부분 아니 나 같이 소심한 사람은 살면서 될 수 있으면 적을 만들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나의 마음이 안 그래도 좋은 게 좋은 거란 생각에 굳이 따지고 파헤치며 상대와 어긋난 관계를 만들고 싶지 않다. 헌데 움베르토 에코는 오히려 적을 만들라고 한다. 그것도 아주 전투적으로 있는 힘껏 상대에게 두려움을 안겨줄 무기를 사용해서...
'적을 만들다'는 움베르토 에코가 오랜 시간을 걸쳐서 다양한 곳에서 발표한 글을 모아 낸 책이다. 하필이면 왜 적이란 단어를 사용했을지 궁금했는데 첫 번째 이야기에서 그 해답을 찾을 수 있다. 뉴욕에서 탄 택시에서 파키스탄 기사는 움베르토 에코의 고향을 물었고 그 나라의 적은 누구인지에 대해서 묻는 질문에 조국 이탈리아의 역사를 돌아보게 된다. 이탈리아의 불행은 지난 60년간 적을 만들지 않는데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적이란 존재를 통해서 자신의 가치, 정체성이 더욱 견고해지고 단단해질 수 있다.
초등학교때 소풍을 가면 보물찾기 놀이를 했던 기억이 있다. 특별할 거 없는 보물찾기였지만 이상하게 나는 운이 없어서 선물을 받은 기억이 없다. 시간이 흘러 나에게 보물같이 느껴지는 것이 두세 개 있는데 그 중에 하나가 여행이다. 해마다 신년이 되면 소망하는 계획이 해외여행이다. 에코의 보물찾기도 여행 속 장소가 가진 보물찾기놀이다. 매번 동유럽 여행을 계획하지만 언제 실행에 옮길지 미지수다. 프라하에 있는 성 비투스 대성당은 성인들의 유골이 안치되어 있어 꼭 들려야 할 곳이라고 한다. 이외에도 너무나 유명한 장소들이 가진 아름다운 금은보석은 물론이고 현지인들도 미처 알지 못하는 보물들도 있다고 한다. 중세 시대 문화의 가치를 느낄 수 있는 보물찾기는 가톨릭을 중심으로 하고 있지만 가장 유명한 유물로는 시대를 통틀어 성배라고 한다. 성배 찾기는 2,000년의 시간으로도 부족함을 경험으로 증명 되었기에 섣불리 도전하지 말라고 경고한다.
며칠 전에 연달아 두 권의 빅토르 위고의 작품을 읽었다. 그래서인지 책에 쓰인 위고에 대한 저자의 애정이 얼마나 깊고 뜨거운지 알 수 있다. 빅토르 위고를 이야기할 때 당연스럽게 앙드레 지드의 인용문이 사용되는데 장 콕토의 말을 통해 빅토르 위고는 자신이 빅토르 위고라고 믿었던 미치광이였다고... 허나 이 말은 틀리며 위고는 스스로 신이라 믿었거나 신의 공식적인 통역관이라고 믿었다고 한다. 위고의 작품에 나오는 인물들은 투박하고 차가운 인물들이 많다. 인물이 가진 특징만을 돋보이게 만들고 상징적인 가치에 더 관심을 두며 글을 쓴 때문이기에.. 그의 이런 방식은 신의 관점에서 인간의 역사를 움직이는 신의 계획된 운명의 힘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위고의 작품을 이렇게 날카롭게 바라볼 수 있어 바로 앞에서 읽은 위고의 작품 속 인물들을 떠올려 보게 된다. 읽을 때는 몰랐는데 에코의 글을 통해 다시 작품 속 인물을 들여다 볼 수 있었다는 것이 흥미롭다.
위키리크스는 호주 출신 저널리스트 줄리언 어샌지가 후원자들의 도움으로 만든 내부고발 인터넷 언론매체다. 미국의 기밀문서 유출사건과 관련하여 폭로의 피해자들에게 피상적으로밖에 영향이 미치지 못한 것은 이미 몇 달 전에 다 알려진 사실들을 다르게 확인시키는 것에서 그쳤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럼에도 그는 성폭행 혐의를 받고 있는 상태에서 미국으로부터 죽음의 위협을 느끼고 있다며 에콰도르 대사관으로 피신, 정치적 망명을 신청한 상태다. 에코는 힘 있는 집단이 가진 권력이 사람들을 통제하고 감시하는 현실에서 이를 발표한 위키리크스의 행동은 단순히 스캔들을 넘어 새로운 역사의 장을 열었다고 평가하고 있다. 우리나라 역시 카톡을 비롯하여 나라에서 규제하지 말아야 할 언론, 개인의 사생활에 대해 많은 부분 침범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카톡을 떠나 해외에 사이트를 둔 곳으로 옮기지만 아직은 익숙한 카톡을 즐겨 사용하는 나 같은 사람은 정부와 마주칠 일이 없지만 그럼에도 나도 모르게 내 정보를 수집할 수 있다는 생각에 유쾌하지 못한 기분을 느끼고 있다.
소설, 철학, 평론, 기호학, 언어학, 미학 등의 다양한 분야에 걸친 에코의 심오한 이야기는 그의 깊은 성찰과 예리한 지적 호기심을 충분히 느낄 수 있다. 다양한 장르와 주제를 아우르는 에코만의 글쓰기... 마라톤을 완주한 듯 버겁고 힘들지만 그 만큼 즐거움을 안겨주는 책이다.
한 마디로 규정 지울 수 없을 정도로 생각의 깊이가 느껴지는 전혀 친절하지 않은 투박하고 거친 느낌의 글이지만 이것이 곧 움베르토 에코의 글이란 것 알 수 있어 흥미롭게 여겨지며 읽게 된다. 한 번으로 끝낼 수 없는 책이라 여겨진다. 움베르토 에코만이 가진 재미와 매력을 온전히 느낄 수 있는 책으로 그의 글을 좋아하는 독자라면 틀림없이 만족할 거라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