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구를 국어사전에서 찾아보면 1.유럽과 미국 2.서부 유럽,즉 영국,프랑스,네덜란드 라고 되어 있습니다.하지만 문맥에 따라 어떻게 쓰이는지 결정해야 하고 또 글쓴이가 어떤 뜻으로 썼는지 자체를 알기 힘든 경우도 있습니다.서구 민주주의 운운...하면 이것은 1번의 뜻으로 쓴 것이 확실하지요.사상사에서 독일에 대한 묘사를 보면 독일을 중부유럽이라고 규정하여 영국이나 프랑스와 같은 서구와는 다른 정체성을 지닌 운운...하면 이때의 서구는 2번의 뜻입니다.이 중부유럽이라 함은 유럽사를 다루는 책에서 독일 오스트리아 문화권과 체코 슬로바키아를 포함합니다.하지만 체코 슬로바키아는 공산화가 된 뒤로 동구 공산권이라는 범주로 들어가던 시절이 있었으니 이 또한 동구냐 아니냐 따지기 힘들지요.
서구식 식습관이라는 단어가 많이 쓰이고 있는데 이때 서구가 1번을 가리키는지 2번을 가리키는지 정말 애매합니다.이 식습관은 그저 고기와 인스턴트 식품을 많이 먹는 것을 가리키는 듯합니다.하지만 여기에 해당되는 나라는 미국 뿐인 것 같습니다.특히 미국 같은 나라에서는 프랑스인처럼 먹자는 운동을 하자는 움직임도 있습니다.맛있는 자연산 음식을 마음 놓고 먹자는 운동이지요.그리고 서구식 식습관과 대조적으로 지중해식 식습관이 좋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많은데 이 지중해에는 프랑스 중에서도 남 프랑스가 속해 있지만 파리 중심의 북프랑스는 해당되지 않지요.지중해 하면 우선 이베리아 반도,남 프랑스,이태리,그리고 저 동쪽으로는 발칸반도까지...맑은 날이 많고 해산물이 풍부하며 오렌지,레몬 등 과일도 많이 납니다.이런 자연식을 재료로 먹는 지중해 사람처럼 살자는 주장이 슬로 푸드의 흐름을 타고 있습니다.이런 것을 생각해 본다면 그냥 서구식 식습관과 지중해식 식습관이라고 나누는 것 보다는 인스탄트 식품을 주로 하는 식습관과 자연 그대로의 재료를 먹는 식습관으로 분류하고, 자연 그대로의 재료를 쓰자...이렇게 말하는 게 더 분명한 뜻을 전달할 수 있지요.
문제는 동유럽과 이베리아 반도인데,이들을 과연 서구문화권에 넣어야 하느냐 여부지요.이베리아 반도는 피레네 산맥이라는 자연의 장벽이 있기 때문에 서유럽과는 독특한 문화권을 형성해 왔습니다.특히 이슬람 문화의 흔적이 강하지요.동유럽도 마찬가지입니다.특히 옛공산권이었기 때문에 서방진영-자본주의,동방진영-공산주의로 확실히 나뉘었을 때는 이데올로기도 상이하여 서구문화권과는 다르다고 했지요.
물론 스페인도 프랑코의 장기집권이 끝나고 의회민주주의가 정착함에 따라서 서구에 속한다면 속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동구 및 옛소련권은 의회민주주의가 정착되었다고 하기엔 좀 그렇지만 그래도 냉전 시대와는 다르게 범유럽문화권으로 간주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하지만 우리나라에서도 마찬가지이고 유럽연합에서도 동유럽은 유럽의 2류 정도로 간주되고 있습니다.서유럽이 정통이고 보편적인 흐름을 주도한다는 의식은 이처럼 뿌리가 깊습니다.그런데 서구형 체형이라면 1번의 뜻으로 쓰일까요? 2번의 뜻으로 쓰일까요?
우선 길다란 팔다리,큰 키를 뜻한다면 1번은 아닙니다.왜냐면 유럽 중에서도 지중해 쪽의 이른바 라틴-가톨릭 문화권인 이베리아 반도,남프랑스,이탈리아를 꼽아보면 여기 사람들은 키가 우리나라 평균과 비슷하고 머리카락도 갈색이나 흑백입니다.서구형 미인을 상징하는 장신의 금발미인은 아니지요.당연히 2번도 아닙니다.미국이 빠져 버리니까요.예전의 잡지를 보면 북구형 미인이라는 단어는 있었습니다.스웨덴 출신의 그레타 가르보나 잉그리드 버그만 덕분이지요.아마 현재 쓰이는 서구형 미인에 가까운 뜻인 것 같습니다.
또 우리나라에선 서구 스타일이라면 은근히 세련되고 귀티난다는 의미를 포함하고 있습니다.반면에 동남아 스타일이라면 촌스럽다는 의미를 포함하지요.그래서 밀라노,파리,뉴욕이 유행의 본거지로 나열됩니다.남성이 여성에게 서구형 미인이군요...하면 커다란 찬사가 됩니다.동남아 스타일이네요...하다간 거시기한 반응이 돌아올 거구요.
냉전이 끝나고 독립한 옛 소련권의 주민들 중 우리나라에 모델로 오는 경우가 많습니다.그래서 요즘엔 러시아와 함께 우크라이나가 미인이 많은 곳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우스개 소리로 김태희가 밭에서 일하고 있고 한가인이 가정부를 하는 나라라고 하지요.이 두 나라는 동유럽에 속하는데 서구를 1번으로 쓰자면 서구형 미인에 이들 나라의 미인들이 속할 수도 있겠지요.하지만 옛 소련권 중에서도 우즈베키스탄 같은 곳은 아시아에 속하는데 요즘 이 나라에서도 모델들이 오더군요.그러면 이 나라는 서구가 아닌 것은 분명하지요.여하튼 우리나라에서 요즘 말하는 서구형미인이라는 범주는 참 애매하더라구요.그냥 늘씬한 체형이라고 하면 될 것 같습니다.어찌 보면 미국이나 서유럽 몇몇 나라가 서양의 대표라는 편견이 섞인 것이 아니냐는 생각도 듭니다.
예전에 우리나라에서는 백인들은 무조건 미국사람이라고 하던 사람들이 많았습니다.지금도 나이 많이 드신 분들은 그렇게 말하지요.원어민 회화라는 말이 생기기 전에는 미국인 회화라는 말을 많이 썼습니다.사실 그런 광고를 읽고 학원을 가보면 캐나다 사람이 가르치는 경우가 많았지요.캐나다 사람들은 자신을 미국과 같이 취급하면 굉장히 불쾌해 합니다.은근히 미국과 사이도 안 좋구요. 그런데 광고지에 미국인 회화라고 썼으니...
하기야 아직도 동남아 사람들을 검둥이라고 놀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만 서양인들은 극동이라고 해서 동북아와 동남아를 함께 취급하지요.예전에 영국이 싱가폴을 식민지로 영유하면서 요새를 철옹성처럼 구축했는데 이 요새를 극동의 지브랄탈 요새라고 했습니다.그리고 유전적으로도 동남아 인은 흑인과는 관계가 없습니다.또 아프리카 하면 흑인을 연상합니다만 그것은 사하라 이남이고 북아프리카 나라들은 아랍민족이지요.그리스 로마 시절에는 이 북아프리카와 중동지역을 동양이라고 했습니다.그래서 오리엔트라고 했지요.오리엔탈리즘의 어원입니다.이 곳 동북아는 극동(이 단어도 상당히 기분 나쁜 단어입니다)이라 해서 Far East라고 하지요.하지만 북아프리카를 동양이라고 했다는 사실이 우리나라 사람들에겐 생소할 것입니다.
그냥 무심코 쓰는 서구 스타일이니 서구적이니 하는 단어에 대해서 이것 저것 되는 대로 써보았습니다.그렇게 따질 필요 있는냐 하는 반론도 있겠지만 특정 지역에 대한 우리나라 사람들의 인식이 드러나는 것 같아서요.알라딘의 동무 여러분도 평소에 서구라는 단어를 쓸 때는 무슨 의미로 쓰는지 한 번 생각하는 기회가 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