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칼 폴라니를 처음 알게 된 것은 부르스 커밍스<한국전쟁의 기원>을 읽을 때입니다.이 책은 우리나라에서 워낙 소모적 이념논쟁을 일으킨 책이라 일제시대의 사회경제를 분석한 제 1장은 사람들이 주목을 안 한 것 같습니다.하지만 우리가 명저를 단순히 지적 사치를 위해서만 소비하는 것이 아니라 바람직한 학문 토착화를 위한다면 폴라니가 <대전환>에서 보여준 식민지 경제에 관한 통찰력을 일제시대 연구에 적용해 보아야 하지 않을까요? <한국전쟁의 기원>은 이미 국역된지 20년이 넘었지만 커밍스가 폴라니를 언급했다는 것은 알려져 있지 않더군요.
< 한국전쟁의 기원> 제1부 제2장 '일제하의 사회경제적 변동' 중 '2 한국 농민과 시장의 출현'이 폴라니의 농업론을 다룬 내용입니다.아마 제목만 보고도 폴라니 냄새를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이 장에서 커밍스가 언급한 내용 일부와 그가 인용한 책을 소개하겠습니다.물론 국내 번역본이 나와 있는 것에 한합니다.
---최근에 농민정치에 나온 훌륭한 연구들은 세계시장체제가 농업관계에 미친 결과들을 다루고 있다.그러나 이런 분석틀이 어느 정도까지 두 명의 사회이론가인 마르크스와 폴라니의 틀에 입각하고 있는지 인식되지 않고 있다....마르크스가 말하는 본원적 축적은 어떤 자본주의 혁명에 있어서도 꼭 필요한 과정이며 본원적 축적이 일어나기 전에는 성숙한 자본주의란 있을 수 없다.폴라니는 유럽과 그 밖에 식민지 나라에서 농민층이 분해되는 과정을 분석하였다...
---폴라니에 의하면 일반적으로 식민지에서 이러한 과정은 세 단계를 거친다.첫째.농업부분의 상업화 둘째,그로 인한 식량생산의 증가 세째,잉여가 중심부로 이전하는 것....이에 대해 좀더 자세히 알려면 베링톤 무어의 저작을 살펴보면 도움이 될 것이다.무어는 시장의 침투와 상업화에 대한 사회의 대응을 검토하면서 그러한 대응 속에서 계급구조가 어떻게 변하며 어떤 정치구조가 나타나는지를 분석하고 있다.그리고 세계시장관계가 한국과 같은 미곡생산을 주로하는 지역에 침입했을 때 나타나는 강하고 폭발적인 충격을 검토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러면서 커밍스는 토지조사사업,산미증산 계획,한국의 지주가 기업가형 지주로 변하지 못한 원인 등을 살피고 있습니다.여하튼 아예 제1부의 제1장 '일제통치하 한국의 국가와 계급'까지 정독하십시오.
커밍스가 인용한 책 중 국내에 번역 또는 해설된 책
1.본원적 축적에 관하여-칼 마르크스<자본>제 1권 7부 모리스 돕 저 이선근 역<자본주의 발전연구>(광민사 1979) 제 5부
2.베링턴 무어 저 진덕규 역<독재와 민주주의의 사회적 기원>(까치 1986) 이 책에 대한 자세한 소개는 한국비교사회연구회 편저<비교사회학 제 2권>(열음사1992) 중 성경륭의 논문을 보라.무어는 전근대적 봉건사회로부터 근대적 산업사회로 이행하는 세 경로,즉 부르주아 혁명,위로부터의 혁명과 파시즘,그리고 공산주의 혁명에서 봉건사회의 중심계급이었던 지주계급과 농민계급이 각각 어떤 역할을 수행했는가를 규명하고 있다.
3.제프리 페이지<농민혁명>은 아직 번역되지 않았다.다행히 한국비교사회 연구회 편저 앞의 책에 유석춘<페이지의 농민혁명 비교연구>라는 논문이 있다.페이지의 이 저작은 미국이 베트남전에서 지면서 미국의 외교정책에 대한 반성의 기운이 높을 때 나왔다.수출농업부문의 경제가 농민운동에 미친 영향을 분석하기 위해 쓰여진 책. 커밍스는 이 책을 통해 일제시대 때 소작쟁의와 해방공간의 농민운동을 연구하는 분석틀을 얻었다.
4.스타벤 하겐 외 편저 김대웅 장영배 역 <농업사회의 구조와 변동>(백산서당 1982) 이 책은 스타벤하겐의 <농업사회와 사회계급> 제1장에서 8장까지를 번역했고, 데오도어 샤닌 편<농민과 농촌사회> 중 몇 몇 논문을 번역했다.예전엔 이런 식으로 해적판 번역이 많았다. 제3세계의 농민을 집중하여 분석했다.
위의 책들은 계급분석이 매우 치밀함.
커밍스가 소개한 책 외에 좀 덜 학술적인 책으로 헤일부르너<세계를 움직인 경제학자들>의 제 1장 '경제혁명'을 권합니다.이 책은 경제학자들을 소개한 부분만 읽는 이들이 많으나 사실은 제1장이 제일 중요합니다.경제사 지식이 없는 이들도 재밌게 읽을 수 있습니다.시장경제의 이윤이라는 개념이 전근대적인 봉건시대 사람들에게 얼마나 생소한 것이었는지 시장경제 정착이 기존사회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매우 흥미롭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폴라니와 비교해서 읽어보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