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일,서울 분향소에서 큰절을 했던 외국인 교수 마크 셀던.내가 그 이름을 알게 된 것은 부르스 커밍스의 <한국전쟁의 기원>에서였습니다.중국 근현대사 전공으로 중국공산당의 연안시절을 다룬 책이 인용되어 있었습니다.그 정도로만 알았는데 김대중 전대톨령 영정 앞에서 큰 절을 할 정도인줄은 몰랐습니다.셀던 옆에서 고개를 숙이고 서있던 일본인은 도쿄 대학교 명예교수 와다 하루키.러시아사를 연구하다가 한국현대사까지 연구하게 된 일본 진보파의 거두.와다에게 올해는 슬픈 해의 연속이었을 것입니다.제자인 서동만을 보내더니 이젠 김대중까지...
햇볕정책을 이론적으로 뒷받침한 투톱 이종석과 서동만.서동만은 노무현 전 대통령이 저세상으로 간 직후 병상에서 숨을 거둡니다.50대 초반으로 학자로선 한창 나이였는데...노무현의 외교안보 브레인으로 대선 캠프에서 활약했고 참여정부 때는 국정원 차장까지 지냈지만 관료기구의 미로를 뚫지는 못했던 사나이.2003년 참여정부가 등장하고 국정원장에 고영구,국정원 차장에 서동만이 내정되었을 때 인사청문회에서 한나라당이 얼마나 사상공세를 펼치면서 서동만을 공격했던지....그 이유 중의 하나가 서동만의 도쿄 대 유학시절 논문 지도교수인 와다 하루키가 친북인사라는 것이었지요.
한나라당의 태도를 보면서 참으로 답답한 마음을 금할 길 없었습니다.와다 하루키는 일본의 침략전쟁을 반성하는 인물중 한 명인데 남북화해를 권하고 군사독재정권 시절에는 한국의 민주화를 도왔다는 이유로 친북인사라는 딱지를 붙여버린 것입니다.아니 그렇다면 한나라당은 일본에서 반공정신에 투철하고 북한에 대해 강경하게 나와야 된다고 주장하는 우익이면 괜찮다는 말인지...서동만이 와다 하루키의 제자이니 안된다는 주장에 참으로 할 말이 없더군요.서동만을 구해준 이는 중앙일보 논설위원 권영빈.그는 당시 번역되지 않은 서동만의 도쿄대 박사논문<북한 사회주의 체제 성립사>를 읽고 나서 "이 논문은 친북성향이 아니다"고 결론을 내렸습니다.결국 국정원장 고영구,차장 서동만이 탄생되었지요.
서동만 이종석은 일본 우익에서도 친북좌파라고 욕을 많이 얻어 먹었습니다.와다 하루키도 마찬가지구요.한일 우익의 이런 묘한 친근감은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어차피 한국의 반일주의는 반공체체의 장식물 역할 밖에 못하니까요.그렇듯 일본은 반성하라고 해놓고 정작 와다 하루키 같은 인물은 친북인사라고 규탄하는 게 이 나라의 해괴한 반일주의입니다.
에드워드 베이커도 조문하러 왔더군요.그는 평화봉사단으로 왔다가 한국을 연구하게 된 미국인 중 한명입니다.평화봉사단 출신의 한국연구자가 꽤 있지요.지금의 주한 미국대사도 그렇구요.특히 베이커는 열혈한이었는지 삼선개헌 반대운동에 직접 나서기도 했습니다.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그가 군사정권 시절의 민주화 운동을 지지하던 시절의 회고담에서 언론운동하던 이부영을 자주 언급한다는 것입니다.김대중과 이부영은 그에게는 한국 민주화 운동의 상징이었던 것 같습니다.하지만 김대중이 집권하던 시절 이부영은 한나라당 의원으로 별명이 DJ저격수였습니다.조금 미묘한 질문인 것 같지만 베이커를 만난다면 이런 질문을 하고 싶었습니다."김대중 정부 때의 이부영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문민정부 말기인 1997년에 이부영,제정구가 한나라당(당시는 당명이 신한국당에서 막 한나라당으로 변경되었을 것입니다)에 입당했을 때 경악을 금치 못한 이들이 많았을 것입니다.나 역시 귀를 의심했습니다.빈민운동했던 제정구,언론자유운동하던 이부영이 정말로? 더군다나 이부영은 1994년 7월 김일성 사망 당시 북에 조문단을 보내야 한다고 주장하다 조선일보와 박홍신부에게 얼마나 사상공세를 많이 받았는데? 불과 3년 사이에 변신? 1997년과 2002년 대선기간 이부영은 이회창 캠프에서 열심히 활동했습니다.1998~2002년 내내 이부영은 김대중에 대해 험구를 쏟으면서 정형근과 함께 저격수 노릇을 톡톡히 해냈지요.세상에 정형근과 이부영이 한나라당에서 한솥밥을 먹을 줄 그 전에 누가 상상이나 했겠습니까... 더군다나 저격수라는 별명까지 함께 얻으면서...
사람은 오래 살아야 합니다.이부영은 2003년 한나라당을 탈당하여 열린우리당에 입당하지만 제정구는 1999년 초 한나라당 의원인 채 세상을 떴습니다.조금만 더 참았다면 한나라당 당원으로 눈을 감지는 않았을 것입니다.그 당시 이부영은 "제정구는 김대중 때문에 속상해서 죽었다"고 험한 말을 했습니다.이른바 'DJ암'이라는 것이었지요.이부영은 한나라당 시절의 전력을 인생에서 지워버리고 싶을 것입니다.하지만 그게 맘대로 되나요.그는 2007년 대선 기간 동안 열린우리당과 민주당이 합당했을 때 한나라당 시절의 과오를 사과하는 절차를 밟아야만 했습니다.결국은 정계에서도 그다지 큰 뜻을 펴보지 못하고 현재에 이르고 있지요.
조문온 외국의 명사들을 보면서 제임스 팔레와 오다 마코토를 생각했습니다.군사정권의 폭압을 규탄하던 그들...하지만 그들은 이미 고인이 되었습니다.살아 있었다면 조문하러 달려왔겠지요.와다 하루키가 올해 초 제안한 평화선언은 드디어 8월 20일 '한미일 지식인 평화선언'으로 결실을 맺었습니다.110명이 서명했더군요.미국측에선 놈 촘스키,임마누엘 왈러스틴도 참여했습니다.일본에서는 이런 일에 늘 앞장서는 오에 겐자부로,다카하시 데쓰야,우쓰미 에이코 등이 참여했구요.국적을 초월한 연대로 남북한의 평화를 바라는 공동선언에 참여한 이들에게 경의를 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