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소설에서도 얼마든지 얻을 수 있는 지식이 있습니다.물론 그것은 관심범위를 무엇으로 잡느냐에 따라 다르지만요,최근 읽은 세 개 작품 모두가 미국의 지방검사가 나오는데 이 직책이 특이하더군요.우리나라는 일본 쪽 영향을 받아서인지 대륙법 계열이라 영어권 법조계는 아무래도 생소합니다.특히 영화나 드라마에서 배심원 제도를 보면 참 다르구나 하는 느낌을 받습니다만 조금만 더 관심있는 독자라면 지방검사라는 직책 역시 우리와 다른 제도임을 알 수 있습니다.
뉴욕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추리소설인 반 다인<그린 살인 사건>과 엘러리 퀸<Y의 비극>은 둘 다 가족들이 하나 하나 살해된다는 끔찍한 설정에다가 전혀 예기치 못한 범인이 밝혀진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그러나 제가 이 두 소설에서 특이하게 생각한 것은 지방검사입니다. 선거로 뽑힌다는 것이죠.그러니까 당연히 자기가 속한 정당의 눈치를 봐야 합니다.이 직책은 얼핏 이 소설들을 읽을 때 그냥 스쳐 지나갈 수도 있습니다만 제가 관심을 갖게 된 우연한 계기가 있습니다.
2006년 말 공지영의 장편소설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이 영화로 나왔습니다.저도 이 영화를 보았지요.이때는 이 영화에서 사형수를 동정적으로 그린 데다가 공지영의 원작에도 사형제도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을 던져서인지 사형폐지 움직임이 꽤 여론을 형성하고 있었습니다.물론 당시 참여정부는 국민의 정부와 함께 사형집행을 하지 않은 터라 국제사면위원회에서도 우리나라를 잠정적 사형폐지국으로 지정하기도 했던 분위기도 있었지요.그걸 자랑스러워하기도 하구요.그때 우연히도 디오도어 드라이저<아메리카의 비극>을 읽고 있었습니다.을유문화사 번역본인데 엄청난 두께이면서도 꽤 흥미롭게 읽었습니다.특히 20세기 전반 미국 사회를 마치 기록영화를 보듯 세세하게 묘사했기에 더 박진감이 넘쳤습니다.게다가 사형제도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제기를 하고 있는 소설이라서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과 비슷한 문제의식이 겹치기도 했지요.
저는 대중예술과 순수예술 경계 나누기를 좋아하지 않습니다.굳이 따지자면 미국 문학사에서도 드라이저는 빠지지 않으니 순수예술에 속하는 작가라 할 수 있겠지요.하지만 디킨즈 소설이 영문학사에서 반드시 나오면서도 추리물로도 괜찮은 것처럼 <아메리카의 비극>도 마찬가지입니다.살인혐의로 붙잡힌 청년을 둘러싼 법정의 치열한 공방전은 마치 법정 추리물을 읽는 듯한 착각마저 들 정도로 짜릿한 감을 줍니다.특히 여기서 지방검사는 용의자를 차츰 차츰 벼랑으로 몰고 가지요.이 소설을 영화화한 <젊은이의 양지>에는 용의자로 나온 몽고메리 클리프트를 향해 지방검사로 나온 배우가 "그 불쌍한 여인을 이렇게 죽인 거야!"하고 외치는 명장면이 있습니다.
<그린살인 사건>과 <Y의 비극>은 몇 번 읽은 적이 있는데 이번에 지방검사라는 직책이 유독 눈에 들어오더군요.추리소설을 몇년에 한번씩 반복해 읽는 제 독서습관에 대해 이상한 취향이라고 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릅니다.하지만 무슨 책이든 두번 세번 반복할 때 예전엔 안 들어오던 내용이 새로 들어오고 그러면서 새로운 지식이 생기는 소득이 있으니 그렇게 저평가 받을 독서습관은 아니라고 봅니다.다음 달엔 3년만에 <아메리카의 비극>을 또 읽어볼까 생각중입니다.지방검사라는 직책이 지닌 애매함-검사와 정치가의 이중지위_을 아는 데 이보다 더 좋은 작품이 없으니까요.
엊그제 독파한 대중소설은 산드라 브라운<화요일은 가고>였습니다.브라운은 로맨스 소설의 여왕으로 우리나라에도 꽤 많은 팬이 있지요.이 소설은 로맨스 소설이라기 보다는 형사액션물이라고 봐야겠지요.마약밀매단에게 동료를 잃은 형사가 직접 그 밀매단과 연결된 루이지애나의 지역토호에게 복수하는 소설입니다.우리나라처럼 드릴러물이 고사상태인 나라에서는 형사액션물을 여자가 쓴다는 데 대해서 이상하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가까운 일본만 해도 여성이 군사물이나 범죄물을 써서 인기작가가 되는 경우가 꽤 있습니다.이 소설에서는 새로 부임해온 지방검사가 지역의 기득권 세력들에게 견제당해 용의자를 결국 무죄방면하는 것을 멀뚱멀뚱 지켜봐야만 하는 장면이 처음에 나오지요.
<화요일은 가고>는 1996년작.그런데 이 소설에는 형사가 복수를 결심하고 나서다가 악당두목(놀랍게도 변호사!)의 아내와 사랑에 빠지는 줄거리가 있습니다.읽다 보니 이거 어디서 많이 들어본 이야기군... 하다가 "아하...이거 리처드 기어와 킴 베이싱어 주연<노 머시>와 비슷하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물론 표절은 아닙니다.이런 설정은 범죄물에는 꽤 나오며 작가의 역량에 따라서 얼마든지 새롭고 흥미로운 소설로 탈바꿈시킬 수 있지요.막판에는 마약밀매단에게 정보를 넘겨주는 주 경찰국 내부 간부가 밝혀지고 악당두목도 총탄을 맞고 쓰러진다는 결말입니다.
결벽증이 있는 사람이라면 "어떻게 디오도어 드라이저를 싸구려 로맨스 작가인 산드라 브라운과 함께 다루느냐"고 노발대발할지도 모르겠지만 그런 과민반응 보일 거야 없지요(싸구려라니!).<그린살인 사건>이나 <Y의 비극>은 뉴욕에 대해,<화요일은 가고>는 루이지애나에 대해 여러가지 재미있는 읽을 거리를 제공해 줍니다.읽는 사람의 자세에 따라서는 이런 대중물에서도 문학사에서 언급하는 소설 못지 않게 여러가지를 얻을 수 있습니다.그래서 저는 당분간 미국의 대중물을 몇 권 더 읽을 겁니다.지금은 어윈 쇼<태양의 계절>을 읽고 있는데 이 소설은 정계,연예계,노동조합에 대해 상당히 재미있는 읽을 거리가 많이 나옵니다.어윈 쇼의 인기소설인 <야망의 계절>의 속편 격인데 국내에선 희귀본이기도 하구요.그런데 어윈 쇼는 대중소설가인가요,순수소설가인가요? 애매하긴 하지만 저는 그런 건 상관 안 합니다.은방울 자매,펄 시스터즈.핑클,소녀시대,원더걸스,애프터 스쿨 안 가리고 다 좋아하듯 소설도 이것 저것 구분한다거나, 고급예술 대중예술 가린다거나 하지 않고 식성 좋게 다 읽어치울 작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