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 국어시간. 선생님은 박지원에 대해 설명하는 중이었는데 생각나는 대로 적어보자면 대강 다음과 같았습니다....열하일기를 지금은 훌륭한 책이라고 평가하지만 당시 정조 시대엔 몹쓸 책이라고 단죄되었다, 박지원은 양반들이 쓰는 점잖고 수준높은 글을 쓰는 것이 아니라, 세간의 민중들이 쓰는 속담이라든가 관용구 즉 약간 비속어 같은 것도 집어넣었느니라....정조는 이런 글을 대단히 싫어하여 열하일기를 금서로...그리고 청나라를 통해서 재미있는 소설류 예를 들어 삼국지 수호지 같은 소설이 많이 들어오는 것을 심히 싫어하여 결국 미풍양속을 해치는 것으로 규정하고, 대대적인 단속을 지시했다...그리고 문체까지 간섭했다...유식한 말로 이걸 문체반정이라 하느니라...운운...
수업이 진행되는 도중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국사시간에 배운 정조는 개혁을 실시하여 우리나라 문물이 발달했고 일종의 르네상스를 이룬 명석한 군주라고 배웠는데 국어시간에 배운 정조는 그게 아니라는 건가? 세상에 무슨 놈의 르네상스를 이룬 군주가 문체에까지 간섭한단 말인가? 사람이 살다보면 재미있는 이야기를 듣고 싶은 것은 본능 아닌가? 그런데 소설을 못읽게 하다니...그렇다면 허구한 날, 도덕주의로 가득찬 내용, 예를 들어 아침조회 시간 교장의 훈화 같은 것만 읽으란 말인가? 정말 이상한 군주네...정조는 학문을 좋아했다는데 그런 사람이 이런 말도 안 되는 검열을 지시했단 말인가?
정답 하나만을 요구하는 단답식 교육! 그렇다면 정조는 나쁜 왕인가, 좋은 왕인가? 그래서 고교생인 저는 간단히 생각하기로 했습니다.국어시험에서는 정조는 나쁜 왕으로, 국사시간에서는 좋은 왕이라고 해야 한다고.! 그러고 보니 국사라는 과목은 참 독특하기도 했습니다.사회시간에는 자민족 중심주의가 안 좋다고 배웠습니다.외우기도 힘든 쇼비니즘이니 징고이즘이니 하는 것을 소개 하면서 폐쇄적 국수주의적 사고방식에 대해 낱말풀이를 한 참고서도 있었고...그런데 국사시간에는 우리 것은 다 좋은 것이고 우리 문화는 다 수준높은 것이라고 배웁니다.이게 자민족 중심주의 아닌가? 사회 시간엔 안 좋다고 배워놓고 국사시간엔 그런 걸 가르치는 건 또 뭔가...하여간 요지경일세...
대중들이 역사적인 인물에 대해 얻는 정보는 학생 때 배운 교과서, 그리고 드라마나 영화를 통해서입니다.요 몇 년 간 정조에 대해 대중들이 품고 있는 긍정적인 상은 미남 연기자 이서진이 정조로 나온 드라마 '이산' 덕분이 아닌가 생각합니다.더군다나 정조가 남인들을 주로 중용했고, 남인이라면 왠지 좀 소외된 세력이라서 더 동정심을 얻기도 합니다.이미 1990년대 초에 이인화의 <영원한 제국>이 베스트셀러가 되면서 정조가 독살되었다는 설이 힘을 얻었습니다.그 이후에 정조 살리기에 적극적인 이덕일이 쓴 책이 날개돋힌 듯 팔리니 정조의 성가는 하늘 높은 줄 모릅니다.
강명관이 요 몇 년전 정조는 사상탄압을 한 보수파라는 주장을 했지만 역시 정조에 대해서 좀 냉정한 평가를 하는 사람들이 내세우는 근거가 문체반정입니다.하지만 강명관이 나서기 훨씬 이전에도 문체반정을 다룬 국문학사 관련 연구서를 읽어보면 정조의 사상탄압은 분명히 나와 있습니다.정약용의 문학관 역시 정조와 판박이나 마찬가지입니다.이런 분야에 대한 책을 읽어봤다면 당연히 정조나 정약용에 대한 평가가 호평 일색일 수는 없지요.
고등학교 국어시간에 문체반정에 대해 배우는 분량은 별로 안 됩니다.아마 좀 자세히 가르치는 선생님을 만나면 모를까 대부분은 박지원을 배우면서 패관문학을 요약한 것 정도를 외우다가 끝나게 될 것입니다. 고교 수업 시간에 문체반정이라는 단어라도 들어본 사람은 거의 없지 않을까요.그러니 국사시간에 배운 '정조는 훌륭하다'는 내용만 머리에 남지요.이인화와 이덕일 덕에 정조는 좋은 사람이고 노론은 나쁜 놈이라는 도식에 빠진 사람들도 많을 것입니다.민족주체성 교육이라고 해서 당쟁을 배우지 않으니 박지원이 노론이라는 것을 알면 "어...노론은 정조를 독살한 나쁜 놈들 아닌가?...박지원은 좋은 사람인데 그가 노론이라니..." 하는 등등의 순진무구?한 말을 내뱉게 됩니다.
고등학교 국어시간에 조금만 더 깊이 있게 배웠더라면 정조가 사상탄압을 했다는 사실에 대해 그렇게 놀라거나 하진 않을텐데, 아무래도 우리나라 특유의 쑤셔넣기 교육( 주입식 교육은 물을 흘리듯 집어넣는다는 뜻이니 엄밀히 말하면 우리나라 교육은 주입식이 아닙니다.냅다 쑤셔넣는 교육이지요)은 거기까지 도달하기 힘든 것 같습니다.그러나 진정한 교육은 부모와 선생이 가르쳐 준 거짓말을 버리는 데서 시작한다는 말도 있지 않습니까...그러니 요 몇 년 간 정조에 대해서 좀 비판적으로 재조명한 책을 읽어보는 것도 나쁘진 않을 것 같습니다.
정조에 비판적인 책들
이한우 <정조:조선의 혼이 지다. 보수의 피로 개혁을 갈망한 비운의 군주> (해냄출판사 2007)
강명관 <책벌레들 조선을 만들다> (푸른역사 2007)
신동준 <조선의 왕과 신하, 부국강병을 논하다> (살림 2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