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한에선 '조선왕조실록'이라고 하고 북한에선 '리조실록'이라고 합니다.언제부터인지 확실하지 않지만 남한에서는 90~91년부터 이조라는 단어는 일제의 잔재라고 하는 주장이 늘기 시작했습니다.그러다가 2000년이 넘어서부터는 이조라는 단어를 쓰면 친일파라도 되는 분위기가 정착했습니다.누가 이런 운동을 주도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이렇게 되니 북한도 친일국가가 되어버렸습니다.'리조'라는 단어를 쓰고 있으니까요.
책꽂이의 헌책들을 뒤져 봅니다.한국사 관련 서적이 많으나 유명한 책들만 몇 권 예를 들지요.70년대 지식대중들의 관심을 모은 역사책 중에서 <해방전후사의 인식>(한길사 1979)이 나오기 직전, 강만길<분단시대의 역사인식>(창작과 비평사 1978)이 있었습니다.강만길 씨는 한국근대사 중에서 경제사를 전공했고 박사학위 논문은 조선시대의 상공업을 다루었습니다.<분단시대의 역사인식>의 목록을 보면 3장 '역사와 민중'에 '이조후기 상업구조의 변화'라는 논문이 있습니다.물론 이조라는 단어를 썼다고 강만길을 친일파라고 할 수는 없지요.이조와 조선을 함께 써도 아무렇지도 않은 시절이었으니까요.그의 저서 중에는 <조선후기 상업자본의 발달>도 있고, <이조의 상인>도 있습니다.
80년대 중반을 넘길 때까지도 이조와 조선을 함께 썼습니다.심지어 반일주의자로 이름높은 박경리 씨도 그랬지요.대하장편 <토지>가 아직 집필 중이던 1986년. 신동아 3월호에 당시 막 원고를 끝낸 토지 제4부의 일부가 실렸습니다.소설 일부를 월간지에 공개한다는 것은 대단히 이례적인 일입니다.하지만 당시 박경리 씨는 흔쾌히 허락했습니다.그 내용은 박 씨가 평소 가지고 있던 일본론을 유감없이 보여주는 내용이었기에 대중들이 많이 읽어주었으면 하는 소망이 있었던 모양입니다.역시 이조와 조선이 함께 쓰입니다.여기서 인실이 하는 이야기가 저자가 평소 주장하고 있는 일본론입니다.상대는 일본남성 오가다.
인실은 '이조오백년'이라고 했다가 또 '조선역사' '조선미술'이라는 용어도 씁니다.문맥을 보면 이조라는 단어는 이씨왕조를 뜻하고 조선이라는 용어를 사용할 때는 조선이라는 나라를 나타냅니다.외국의 왕조를 칭할 때도 오스트리아 제국 왕실은 합스부르크 왕조, 영국은 하노버 왕조 하듯이.
평론가들에 따라서는 토지 4부에 상당히 길게 나오는 오가다와 인실의 지식논쟁은 박경리 씨가 작중인물을 빌려 자신의 일본론을 너무 절제하지 않고 많이 쏟아놓았다는 평을 하기도 합니다.하지만 박경리의 반일론을 가감없이 읽을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기도 합니다.<토지>하면 평사리의 목가적인 풍경을 떠올리는 사람들이 많지만 박경리 특유의 일본론을 알아보기 위해서라도 상당한 분량의 이 대화는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도올 김용옥 씨의 책 어딘가에는 강의 도중 도올이 이조시대라는 용어를 계속 사용하자 학생 중 한 명이 '그건 일제잔재적 표현'이라고 지적하는 장면이 있습니다.이때 도올은 발끈하면서 '이씨 조선이면 어떻고, 좃대가리 조선이면 어떠냐 운운' 하면서 육두문자를 날립니다(도올은 책에도 육두문자를 씀).그런데 어느 책인지 찾을 수가 없군요.내가 찾아낸 것은 김용옥<여자란 무엇인가> (통나무1990)의 275쪽에 '이조실록'이라고 쓴 대목입니다.이때까지도 이조와 조선을 함께 사용했던 시기인 것 같습니다. 물론 김용옥 씨가 워낙 비타협적인 인물이라, 그 당시 이미 이조라는 단어를 써서는 안된다는 이들이 많아지고 있더라도, 그냥 이조실록이라고 써버렸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역사책을 읽을 때는 저자를 알아보는 것도 중요하지만 출판년도를 알아보는 것도 중요합니다.요즘은 이조라는 단어를 쓰면 거의 친일파가 되는 분위기라서 강만길 씨나 박경리 씨가 이조라는 단어를 쓴 사실을 알고 발끈하는 사람들이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40대 중반 이상들은 이조라는 단어가 꽤 익숙하겠지만),이런 사정을 알고 나면 이해되는 측면이 있을 것입니다.물론 북한에서 리조실록이라고 한다는 말을 듣고 빨갱이들은 친일파로구나 하고 단정하는 사고방식도 이상한 것은 더 말할 필요가 없지요.
그런데 언제부터 누가 이조를 쓰면 안 된다고 했는지 알아보려고 해도 잘 모르겠습니다.1990년 전후부터 그런 말이 나온 것 같기도 한데...또 실제로 이조라는 용어가 일제가 조선을 비하하기 위해서 만든 것인지도 확실히 모르겠습니다.계속 한 번 뒤적거려 보는 수밖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