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한자에 꽤 익숙한 편입니다.학창시절엔 친구들이 과제물의 표지에 한자로 제목을 써달라고 내게 부탁하기도 했지요.서예를 배운 건 아니지만 펜글씨로 한자를 쓰는 것 정도야 괜찮게 한 편이라 그런 부탁 쯤은 들어주었습니다.하지만 한문을 안다고 우쭐대거나 하지는 않았는데 그건 내가 특별히 겸손하거나 한 사람이었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한문을 잘 안다는 이유로 전통이 어쩌구 저쩌구 하면서 남에게 훈계나 늘어놓는 사람들이 싫어서였기 때문입니다. 

  아마 시골에서 살아본 사람들은  몰락한 양반입네 하면서 동네에서 거들먹거리던  몇 몇 나이든 한량들을 기억할 겁니다.이들의 특징은 가족부양능력이 없는 주제에 콧대는 높아서 걸핏하면 가문의 영광 운운 하면서 잔소리를 늘어놓는 것입니다.가끔 멋드러진 붓글씨 솜씨를 자랑하면서 한시를 쓰기도 하고 좀 더 나아가 난을 치기도 합니다.그러다가 "요즘 것들은 서양 것에만 마음을 빼앗겨 우리 것을 소홀히 한다" 는 둥..."한문을 모르니 우리 전통을 모른다"는 둥 우국지사 같은 말도 합니다.하지만 동네에선 그냥 그러려니 하고 참아줍니다.처자식을 먹여살리지도 못하면서 자존심만 남은 그 처지에 동정하는 사람도 있고...

   어린 시절이긴 했지만 같은 남자로써 그런 영감님들이 맘에 들지 않았습니다.이상하게 그런 이들이 한학을 배웠다는 이유로 한문 실력은 좋았지요.내놓을 것은 왕년에 뼈대 있는 가문이었다는 것과 가끔 한학실력을 과시하는 것 뿐...그래서 한문실력을 과시하면서 낡은 인습적 도덕을 장광설처럼 늘어놓은 이들이 싫었습니다.나는 한문을 공부해도 저런 좁쌀영감은 되지 말아야겠다고 어렸을 때부터 굳게 맹세했지요.그래서 한자나 한문 외에도 오래전 60년대의 번역본을 구해 읽으면서 아직은 꼬부랑말이나 번역투 문체가 많지 않던 시절의 우리말을 익히기도 했습니다.

  때로는 몰락한 양반가문의 자존심이 큰 화를 불러오기도 합니다.출판사 후마니타스 대표인 박상훈 씨가 겪은 집안의 비극이 그 예입니다.박 씨는 6형제의 막내인데, 제일 큰 형은 아버지가 첫 결혼으로 맞은 여인의 아들이었습니다.배다른 형이었지요.박 씨의 할아버지는 경제적으론 무능했고 내세울 수 있는 것은 양반가문의 혈통이란 것과, 전통적인 한학교육을 받아 한문에 능하다는 것 뿐이었습니다.무능한 남편을 만나 시집온 할머니도 역시 양반가문에 시집왔다는 것 말고는 내세울 것이 없었다고 합니다.그래서 그 두 분은 자신들의 초라한 삶에 대한 보상을 과거시대에나 어울리는 위신과 혈통에 매달려 찾으려 했지요. 

  그런데 그 배다른 큰 형은 떡방앗간을 운영하면서 가정경제를 책임졌던 박상훈 씨의 친어머니(그 형에겐 새엄마)를 돕기 위해  식모로 들어왔던 한 여성을 좋아해 그녀와 결혼하기로 결심했다고 합니다.하지만 뼈대있는 가문임을 강조한 조부모는 식모와 결혼하다니 말도 안된다며 결사반대했고, 이에 비관한 그 큰 형은 농약을 마시고 자살하고 말았습니다.박상훈 씨는 그 큰 형의 비극적인 죽음을 생각할 때마다 시대에 맞지 않는 낡은 생각이 얼마나  큰 상처를 줄 수 있는지 생각하면서 스스로를 되돌아 보게 된다고 했습니다. 

  한문교육을 강조하면서 인습적인 도덕교육과 연결하려는 사람들이 꽤 많습니다.어린이나 청소년들을 길들이기 위한 굴레로 활용하려는 속셈을 가진 이들도 있습니다.나는 그런 덫에 빠지지 않으려고 중국이나 우리나라의 사상을 공부하면서도 새로운 사회과학적인 분석틀을 사용한 저서들을 읽으면서 최신학설을 익히는 데도 힘을 기울였습니다.덕분에 대륙이나 일본 사회주의 계열, 혹은 구미의 학자들의 저서까지 읽게 되었지요.하지만 무엇보다도  한문을 안다는 이유로, 또 다른 사람보다는 동양의 역사나 사상을 안다는 이유로, 낡은 인습적 도덕을 강조하거나, 오만한 모습을 보이는 사람이 되지 않은 것이  다행입니다.자부심은 좋지만 그것이 지나쳐서 남에게 오만하게 대하거나 상처를 주거나 할 권리는 그 누구도 없는 것입니다.그가 양반가문의 후예이건, 한학실력이 좋은 사람이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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쟈니 2010-10-09 15: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즘은 한문 공부를 해서 옛 고전들을 직접 읽어보고 싶은 욕심이 듭니다. 고전번역원에서 학생도 모집하던데, 직장인이 가기는 어렵고 해서, 좀 더 나이가 들면 해볼까 생각중입니다. 한문을 안다는 것으로 낡은 인습을 강요하는 사람들은 결국 그 한문에 해를 끼치는 사람들이겠죠.

노이에자이트 2010-10-09 15:53   좋아요 0 | URL
요즘은 좋은 책이 많이 나와서 독학해도 될 겁니다.

그렇습니다.한문에 해를 끼치는 사람은 되지 말아야죠.

2010-10-09 17:51   URL
비밀 댓글입니다.

노이에자이트 2010-10-10 14:19   좋아요 0 | URL
하하하...한문 잘한다는 자랑도 그렇게 한다면 애교가 있겠네요.모쪼록 좋은 성과 거두십시오.말로만 듣던 경주 최씨 가문 출신을 만나게 되어 반갑습니다.

반딧불이 2010-10-09 20: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문은 커녕 한자도 제대로 아는 것이 없는 저는 논어 맹자를 줄줄 읽으면서 해석하시는 분들이 너무 부럽습니다.

노이에자이트 2010-10-10 14:20   좋아요 0 | URL
처음부터 아는 사람이 있겠습니까.논어 맹자는 분량이 좀 있으니 대학이나 중용 같은 적당한 분량의 고전부터 공부하면 부담이 덜 될 것입니다.

ChinPei 2010-10-09 22: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리 집안 어르신들께서도 가끔 가문에 대해서 이야기하시지요. 양반 집안이었다고요.
그러나 이 시대에, 게다가 일본에 있으면서 과거의 영화(榮華)가 무슨 상관이겠습니까?
저속한 말이지만 "과거의 영화가 밥을 먹여 주지는 않다."

"우리는 세종 대왕 시기에 영의정 되신 분의 후손이다." 이런 말을 하시는 분은 한국에 수두룩히 계실 것이지요.
그러나 일본이란 이국에서 민족심을 견지하려면 가끔 그런 공허한 과거의 "빛나는 업적"이 필요할 경우도 있어요.
저의 아들도 가끔 나에게 물어 봅니다.
"우리 집 조상님중에 훌륭하신 분은 없으세요?"
그래서 할 수 없이 말하지요.
"우리나라 글을 창시하신 대왕님 시대에 총리대신(總理大臣)을 하신 분이 계셨단다."
그럴 때 어린 것이 집안 = 민족에 자부심을 느끼기도 하지요. ^^




노이에자이트 2010-10-10 14:22   좋아요 0 | URL
영의정을 총리대신으로 알려주었군요.하기야 의원내각제에 해당하는 직책 중 영의정에 해당하는 직책이 딱히 떠오르지는 않겠군요.적당한 자부심은 필요하다고 봅니다.

카스피 2010-10-09 23: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존심만 남은 뼈대있는 가문도 문제가 있지만 더 문제는 요즘 문제가 되는 이른바 고위 공무원 가문이 아닐까요? 아버지가 고위 공무원이나 공기업 임원이라고 자식들도 여러 편법을 동원해 들어가는것도 참 문제지요 ㅜ.ㅜ

노이에자이트 2010-10-10 14:23   좋아요 0 | URL
그런 가문도 몰락한 후엔 자존심만 남은 뼈대있는 가문이 될 가능성이 높겠지요.

흑해 2010-10-11 16: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조선왕조가 혁명을 통해서 무너지지 않았기 때문에 그런 것은 아닐까요? 자칭 민주주의자들이 세습에 대한 태도는 왜 그런 건지? "대권"이라는 봉건적 용어는 왜 아직까지 쓰고 있는 건지? 또 역사학자 이태진 같은 분은 고종의 증손자나 고손자쯤 되는 게 아닌가 의심스럽지요.하긴 민주주의를 거론하면 등장하는 일이 잦은 영국의 명칭이 United Kingdom이니 세상은 요지경이지요.

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 스스로 독자적인 생각을 지닌 민주주의자라는 것에 자부심을 느끼는 새로운 "人間"의 출현은 꿈같은 일인 걸까요?

제가 이해하는 天上天下唯我獨尊은 개인의 고유성 또는 독자성을 가리키는 말인데 "자존심만 남은 뼈대있는 가문"의 사람들은 다르게 이해할지도 모르겠네요.

위의 글들을 읽다보니 몇 년 전에 세상을 뜬 巴金의 작품, <家>가 머리 속에 떠오르네요.

노이에자이트 2010-10-11 20:24   좋아요 0 | URL
이태진 씨야 이 세상 모든 기준을 고종을 존경하느냐 여부로 가리는 분이라서요...

뭐...그냥 저 잘난 맛에 사는 거지요.독선으로 무장하고...

요즘은 바진의 작품도 거의 안 읽히죠.

파고세운닥나무 2010-10-12 13:42   좋아요 0 | URL
대학 때 유학을 전공한 한 교수님은 '주자'라고 해서는 안된다고 하셨어요. '주자님'이라 불러야 마땅하다구요. 내가 저 분처럼 '주자'로 밥 먹고 사는 사람도 아닌데, 뭘 그리 존경해야 하는지는 의문이었구요.
한학에 정통하셨지만 누구보다 평등한 세상을 바라고 실천하셨던-그래서 일평생 고생하셨던-노촌 이구영 선생 같은 분도 계시죠. 심산 김창숙 선생 같은 분도 계시구요.
빠진은 중국문학 전공하는 사람들도 높이 평가하는 작가는 아니에요. 특히 <家>는 졸작이죠.

노이에자이트 2010-10-12 15:09   좋아요 0 | URL
주자님이라...그런 교수가 실제로 있었군요...

노촌이나 심산같은 분은 정치적인 박해도 받았으니 고루하기만한 인습주의자들과는 달랐겠죠.

그래도 한때 노벨상을 중국인이 받는다면 빠진이 받을 거라는 말도 있었죠.요즘은 아무래도 좀 옛날사람 같다는 느낌이구요...

파고세운닥나무 2010-10-12 15:50   좋아요 0 | URL
올해 노벨평화상을 류사오보가 받으면서 중국 당국은 연이어 노벨상과 악연을 맺게 되었네요. 2000년에 가오싱젠이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는데 이 사람은 프랑스에 망명한 작가지요. 전형적인 반체제 작가인데 그의 수상에 중국 당국은 아무런 논평도 하지 않구요.
빠진은 노벨문학상 후보로도 올랐는데, 실은 중국에선 그의 수상을 바랐을 거예요. 어쨌거나 체제 안에 있는 작가니까요. 그가 죽었으니 그 바람이 왕멍에게 가고 있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왕멍은 후보로도 오른 작가인데 빠진에 비할 때 작품성도 있구요. 물론 그를 친체제 작가라고 할 수는 없죠. 그저 체제 안에 있을 따름이구요. 텐안면 사태 때 그는 책임을 지고 문화부장을 그만 두기도 했으니까요.
미국에 체류하는 반체제 시인인 베이다오가 있어요. 그도 후보로 종종 올랐는데 그가 노벨상을 받는다면 중국의 입장이 꽤 흥미로울 듯 합니다.

흑해 2010-10-13 16:41   좋아요 0 | 수정 | 삭제 | URL
巴金 얘기에 관심이 많으시네요. 저에게 그런 권한이 있다면 巴金만 아니라 파고세운닥나무 님이 높이 평가하는 작가들까지 포함해서 중국 출신의 작가, 그 누구에게도 노벨문학상을 하나도 주지 않을 겁니다. 줄 사람이 더 이상 없다면 모를까 보르헤스도 못 받은 상을 왜 중국 작가들에게 줍니까?

이런 태도를 지닌 사람에게 그런 권한을 주지도 않겠지만 저는 그런 식의 "기계적 평등"은 거부하고 싶습니다.

그 대신에 라틴 아메리카 출신의 작가들에게 좀 더 많은 상을 줄 겁니다. 19세기였다면 러시아 출신들에게 노벨문학상을 몰아줬겠죠. 왜 이렇게 특정 지역에 노벨문학상을 몰아주느냐고 비난을 받으면 당연히 받을 사람들에게 주는 거라고 말하고 싶군요. 이번에 노벨문학상을 받은 사람은 미국의 이라크 침공을 공개적으로 지지한 거시기한 작가이기는 합니다만...(<백년 동안의 고독>을 쓴 마르케스를 반대로 뒤집어 놓은 것 같은 사람이죠.)

공자, 주자할 때 "子" 자체가 이미 높임말 아닌가요? 전 그런 거 보면 인간은 스스로 숭배의 대상을 만들어 놓고 거기에 굴종하는 어리석은 존재라는 누군가의 말이 떠오르네요.

독서에 대한 제 태도를 밝히자면

저는 오히려 고전을 읽지 마라, 만일 고전을 읽더라도 인습적인 시선이 아니라 새로운 시선으로 읽어라,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가 읽는 베스트셀러를 절대 읽지 마라, 오히려 잘 알려지지 않은 새로운 책들을 읽으라고 권하고 싶습니다.

한마디 더 하자면 졸작도 읽어봐야 합니다. 졸작을 읽으면서 책들을 가려내는 눈을 키워야 하지 않을까요? 그리고 문학작품을 읽으면서도 그 작품의 생산`유통`소비 및 이데올로기적 효과까지 염두에 두며 읽는 게 바람직하겠죠. 노벨문학상이라고 이데올로기적 효과를 발휘하지 않는 건 아니거든요.



파고세운닥나무 2010-10-14 12:17   좋아요 0 | URL
너무 많은 얘기를 하셔서요. 저는 중국문학만 좀 거들게요.
저는 중국현대문학을 공부하는 학생인데, 제 입장이 객관적일 수 있는지 자신은 없어요. 하지만 중국현대문학을 싸잡아 무시하는 '흑해'님의 말씀은 수용하기가 힘드네요.
보르헤스가 상을 받지 못했대서 왜 중국작가들이 받을 자격이 없는 겁니까? 그게 서로 무슨 관련이 있는지 알지 못하겠네요.
가오싱젠에게 상이 돌아간 게 정치적 이유도 있을테죠. 하지만 제가 읽어내기로 그의 작품들이 그동안 노벨상을 받았던 여타의 작가들에 뒤지지 않는다는 생각이에요. 후보군에 올라있는 왕멍이나 베이다오 같은 작가도 마찬가지라는 생각이구요.
졸작도 읽어야지요. 왕멍이나 베이다오가 졸작이더라도 읽어야지요. 저는 열심히 읽고 있어요.

흑해 2010-10-14 14:39   좋아요 0 | 수정 | 삭제 | URL
(반론이 아니라 해명입니다. 상당히 긴 글인 것은 양해해 주시길 바랍니다.)

파고세운닥나무 님에게

기분을 상하게 했다면 죄송합니다.

그러나 노벨문학상을 누군가에게 준다는 것은 누군가에게 상을 주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누군가를 선택한다는 것은 동시에 누군가를 배제하는 행위입니다. 선택과 배제는 실제로는 같은 행위죠.

100년 넘게 노벨문학상을 중국 작가에게 주지 않고 있는(또는 주지 않은) 사람들은 제가 아니지요. 그리고 어느 나라 출신이 노벨문학상을 받느냐에 집중한다는 것은 이미 민족주의적이고 국가주의적인 시선으로 그것들을 바라 보는 겁니다.

근대가 만들어낸 "어느 네이션의 문학"이라는 인식의 울타리 안에서 그것을 바라보는 행위이기도 합니다.


흑해 2010-10-14 14:47   좋아요 0 | 수정 | 삭제 | URL
또 단서를 붙인 걸로 아는데요. 저한테 그런 권한이 있다면 라틴 아메리카 출신의 작가들에게 상을 몰아주겠다고 말했습니다. 얼핏 생각하면 그쪽 출신들이 충분하게 상을 받은 것 같아 보이겠지만 유럽 작가들 때문에 손해 본 것은 중국이나 일본이 아니라 라틴 아메리카 출신들입니다. 물론 아프리카가 가장 무시되어 왔다는 건 부인할 수 없겠지요.

아마 파고세운닥나무 님은 이렇게 말하는 제가 중국 문학에 대해 알면 얼마나 알겠냐고 생각하실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저도 반문할 수 있지요. 중국 외의 다른 지역의 문학에 대해 얼만큼 알고 계시냐고 질문할 수 있을 겁니다. 어차피 문학이라는 게 계량화하거나 수학화해서 평가할 수 있는 게 아니기 때문에 모든 사람들이 흔쾌히 동의할 수 있는 기준은 제시할 수 없겠죠. 그래서 저는 저에게 그런 권한이 있다면이라는 단서를 붙인 겁니다. 제가 정한 기준에 이의제기나 비판을 인정하지 않겠다는 생각은 전혀 없습니다. 공개되지는 않겠지만 노벨상을 정할 때 어떤 식의 토론이 오고 가는지 가끔은 궁금합니다.

제가 보기에 시인 네루다의 시나 마르케스의 작품들, 그리고 왜 노벨문학상을 못 받은 건지 알 수 없는 보르헤스의 작품들(그 외 기타 등등)은 노벨상을 한 번만 주는 게 부당하다고 여겨집니다.

저는 지역별 안배에 매몰되지 말고 노벨문학상을 받을 사람이 없다면 주지 말아야 한다고 보며 라틴아메리카 출신 중에 노벨문학상을 못 받은 (언제 죽어도 이상할 게 없는 "고령의") 작가들이 많다고 보고 있습니다.

한마디 더 하자면 자신이 어떤 것을 전공한다는 이유로 자기가 어떤 조직에 몸담고 있다는 이유로 <자신이 그 안에 소속되어 있다는 이유>로 그것들을 절대화하거나 가장 중요한 것으로 여기는 태도들이 만연되어 있다고 봅니다.

가령 중고등학교에서 어떤 과목을 없앨 때 그런 태도를 쉽게 볼 수 있죠. 역사학을 없애려고 시도하면 (전공하는 사람들이)역사학이 중요하다고 말하고 지리학을 없애려고 하면 (담당교사들이) 지리가 얼마나 중요하냐고 말하지요.

그런 식으로 따지면 중요하지 않은 게 어디 있겠습니까? 자기 정체성을 스스로의 전공과 일치시키며 그것들을 절대화시켜서는 안 된다고 봅니다. 거기에 매몰되면 그 전공학문이나 자신이 소속된 조직의 이데올로기를 볼 수조차 없게 될 겁니다.

불가피하게 전공이나 그 조직에 머물면서 그것의 "한계지점"에서 그것들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새로운 지평을 열거나 최소한 이데올로기에 매몰되지 않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속한 전공이여 영원하라를 외치지 말자는 뜻입니다.

파고세운닥나무 2010-10-14 17:27   좋아요 0 | URL
전혀 기분이 상하지 않았습니다.
제가 소속된 분야를 절대화하지 않습니다. 절대화 할만한 시간도, 애정도 아직 가지지 않았구요. 시간이 지나면 절대화가 될지 알수도 없구요. 저는 한국 문학을 전공했는데, 더불어 중문학과 일문학을 공부하고 있습니다. 이 세 나라의 문학이 제가 가장 잘 아는 분야겠지요.
'흑해'님이 라틴아메리카 문학의 어떤 부분을 높게 평가하시는지는 모르겠지만 저역시 라틴아메리카 문학을 높이 평가합니다. 개인적으론 노벨문학상의 주류가 되는 영불독의 문학보단 다른 언어권과 생활권의 문학을 좋아하구요. 지금이야 말의 의미가 퇴색된 '제3세계 문학'을 찾아보며 공부한 적도 있구요.
지금 하는 공부가 본래 제 것이 아니기에 절대화할 마음이 전혀 없습니다. 열심히 할 따름이지요. 전 그게 외국문학도의 솔직한 고백이라고 생각합니다.

oren 2010-10-12 17: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글을 읽어보니 문득 제 아내가 추석이 끝난 직후(귀성하느라 법석을 떨고 시골에 벌초하고 돌아오느라 녹초가 된 이후) '당신도 한번 읽어보라'며 내밀던 글이 떠오르네요.

[송호근 칼럼] 조상숭배의 나라 ☞
http://article.joins.com/article/article.asp?total_id=4478311&ctg=20

저도 어릴땐 동네 어르신으로부터 회초리 맞아가며 '천자문'과 '동몽선습'을 배운 경험이 있고, 아직도 고향에 갈라치면 동네 어르신들께 '출필곡, 반필면'을 의식할 정도여서 님의 글에 일정부분 공감을 느끼게 되는군요.

나름대로 '뼈대있는 집안' 출신인 제 고교동기 한 녀석은 학부 때부터 '한문 공부'를 정말 엄청시리 하더니만, 마침내 작년 가을학기부터 그 친구가 내심 목표로 하던 국내 최고라는 국립S대의 정식교수로 전근을 가게 되더군요. 그 친구를 보더라도 '과거로부터 물려받은 굴레'가 무슨 갑옷처럼 단단하게 느껴질 때가 있답니다. ㅎㅎ

노이에자이트 2010-10-14 15:35   좋아요 0 | URL
아...그 칼럼 신문으로 읽었습니다.제사를 정식으로 안 치르는 사람들도 가족 간에 불화가 있다면 명절을 계기로 폭발하는 경우가 많지요.

저는 어려서 옛날 한문교육을 받은 적은 없습니다.그냥 옥편 찾아가며 혼자 공부했지요.하지만 가끔 그런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 부러울 때가 있습니다.

열심히 한문공부해서 좋은 연구성과를 낸다면야 좋은 일이겠지요.
 

   사랑하는 여인의 요구라면서 어머니의 심장을 도려낸 사나이 이야기가 있지요.대체로 이 이야기는 그 심장을 적출해서 애인에게 뛰어가던 사나이가 돌에 걸려 넘어지려니까 그 심장이 "얘야. 조심해라..." 하고 염려하더라...그런 내용인데...모성애를 꼭 그런 식으로 표현해야만 했는지 개운하지는 않은 이야기입니다.그런데 또다른 이야기가 두 개 있는데 개운치 않은 정도가 아니라 섬뜩합니다. 

  그중 하나는 위의 이야기와 다 같은데 사나이가 어머니를 밧줄로 묶어 칼로 심장을 도려내려는 찰나 그 어머니란 사람이 온갖 저주와 악담을 퍼붓다가 결국 체념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어쩜 네 아버지와 똑같니..."

   또 하나는 윤회복수 설화 같은 것인데... 사나이가 아직 펄떡펄떡 뛰고 있는 어머니의 심장을 애인에게 가져오자 애인은 야릇하게 웃으면서 심장을 받더니 갑자기 할머니로 변해버렸습니다.사나이가 깜짝 놀라자 그 할머니로 변한 애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내가 바로 네 할머니다.네 어머니가 아버지를 시켜 내 심장을 도려내게 했지...나는 똑같이 복수를 해주기 위해 네 애인으로 변신한 것이다..."

   우리나라 공포영화 중 특이한 소재 중 하나가 시어머니 귀신입니다.일본에도 이런 장르는 없다고 합니다.최지우가 신인시절 나온 '올가미'도 이 장르에 속한다고 봐도 되지요.위의 이야기에도 고부갈등이 밑바탕에 깔려 있고 그 중간에 끼인 남자의 당혹함도 보이는데 공포영화로 만들면 어떨까 생각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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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고양이 2010-10-07 18: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누가 제일 바보같고 사악한걸까요?
시킨 사람일까요 행한 사람일까요? 여하간 공포 영화감 딱 이네요. 아유 싫어요.

노이에자이트 2010-10-07 22:57   좋아요 0 | URL
누구 시점에서 이야기를 듣느냐에 따라 다르겠지요...

cyrus 2010-10-07 19: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오늘 제 서재에 올린 천일야와 리뷰 댓글 보고
노이에자이트님 서재에도 들립니다^^
나온지 오래된 책의 댓글을 달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알고 보니깐 페이퍼의 달인이셨군요ㅎㅎ
서재 자주 들릴께요. 글 잘 읽었습니다^^ㅋ

노이에자이트 2010-10-07 22:58   좋아요 0 | URL
어서 오십시오.이왕 이렇게 만났으니 좋은 글을 서로 주고 받기로 해요.

blanca 2010-10-07 21: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갑자기 올가미 내용이 생각 나서 오싹해요. 그러게요. 속담도 그렇고. 우리나라는 고부 간의 갈등 문화를 이해하지 못하면 이해 못할 것들 수두룩이지요. 심장에 관련된 얘기를 모아놓고 보니 괴괴합니다.^^;;

노이에자이트 2010-10-07 23:00   좋아요 0 | URL
아들에 대한 집착이 잔인한 폭력으로 변하는 이야기가 외국에도 있는데 한국의 고부간 갈등은 또 다른 독특함과 섬뜩함이 있지요.

가넷 2010-10-10 21: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섬뜩하네요;;;;

노이에자이트 2010-10-11 20:24   좋아요 0 | URL
그렇지요...
 

   어렵고 난해한 글이나 말로 사람들을 괴롭히는 이들이 있습니다.말과 글이 누군가와 소통하려는 도구가 아닌, 자기 지식을 과시하기 위해 사용될 때가 있습니다.그런 사람들이 싫고 그런 사람들이 쓴 번들번들한 글이 점점 싫어집니다.그냥 평범한 사람들이 다 알아먹을 수 있는 쉬운 말이 더 그립습니다. 

   꽤 오래전, 어떤 늙수구레한 아저씨들끼리 하는 이야기 중 지금도 기억하는 말이 있어요." 사람이란 어릴 땐 어른한테서 배우고, 나이를 먹으면 어린 사람한테 배우면서 사는 거여..." 전혀 어려운 말도 없고 지극히 옳은 말이지요. 그러면서 일생은 배우면서 사는 거라고...하지만 상당수 사람들은 어려선 어른 말을 안 듣고, 늙어선 젊은이 말을 안 들으면서 제 고집대로만 살다가 죽는 경우를 많이 보았습니다. 

  <모리와 함께 한 일요일>의 저자 미치 앨봄은 아이티에 구호활동하러 가서 만난 한 이이티 소년의 일화를 들려줍니다.재난을 당했는데도 소년은 늘 환한 얼굴이라서 앨봄이 왜 그리 행복해 하느냐고 물었습니다.그 소년 왈, "그래도 나는 살아있으니 고맙죠..." 앨봄은 그 소년이 자기에겐 스승과 같은 가르침을 주었다고 말했습니다. 

  어찌 보면 그런 어린 소년에게 배울 수 있는 마음을 가진 앨봄도 행복한 사람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누구에게도 배우려고 하지 않는 사람이 가장 불행한 사람이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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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0-10-03 00: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누구에게서든 배울 것이 있는 사람은...정말 행복한 사람이네요?!^^

노이에자이트 2010-10-03 21:00   좋아요 0 | URL
그렇겠지요.

카스피 2010-10-03 23: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노이에자이트님의 어려선 어른 말을 안 듣고, 늙어선 젊은이 말을 안 들으면서 제 고집대로만 살다가 죽는 경우를 많이 보았습니다라는 말이 가슴에 콕 와닿는 것 같네요.저 역시 그러 사람중의 하나더군요 ㅜ.ㅜ

노이에자이트 2010-10-04 13:04   좋아요 0 | URL
아이고 설마요...

쟈니 2010-10-05 11: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잘 아는 사람들은 쉽게 이야기하죠... 저도 그런 사람들이 부럽고, 그렇게 글을 쓰려고 노력합니다.. 누구에게서나 배울 수 있는 사람은 누구에게도 가르침을 줄 수 있을 거라 생각듭니다.

노이에자이트 2010-10-05 16:20   좋아요 0 | URL
그렇습니다.늘 남을 가르치려드는 사람일수록 자신은 남에게 배우려고 안 하는 법이죠.

순오기 2010-10-07 18: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수님도 누구나 알아듣는 쉬운 말로 복음을 전하셨는데, 우리나라 교회에선 너무 어려운 말로 전하지요.
어릴땐 어른의 말을 듣고 나이 먹어선 아이들의 말을 듣고... 새겨둡니다.

노이에자이트 2010-10-07 16:34   좋아요 0 | URL
아무래도 쉬우면서도 깊이 있는 전달을 한다는 게 쉽지가 않아서요...

흑해 2010-10-06 17: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저는 그 소년의 일화를 듣고서 당황했는데 다른 분들은 반응이 좋으시네요. 오히려 아이티에 재난이 없는 상황에서 소년이 행복함을 느꼈다면 모를까 소년 본인을 포함해서 수많은 아이티 사람들이 고통을 당하는 상황에서 저런 말을 하는 것을 과연 저자처럼 받아들여야 하는 건지?

저자의 의도는 그런 극한 상황에서도 삶의 긍정적인 면을 찾아내는 소년에게 감동받았다는 얘기이지만 저자와 소년 둘 다 사회적인 맥락보다 개인적인 맥락을 더 강조한 것은 아닐까요? 그것도 소년이 다른 사람의 죽음 또는 불행을 보면서 그렇게 말했다는 것까지 감안하면 전 마냥 좋게만 받아들일 수는 없더군요. 제가 너무 예민하게 반응했나요? 그런 상황이 아니었으면 저자의 말에 박수를 쳤을텐데 안타깝습니다.

흑해 2010-10-07 14:44   좋아요 0 | 수정 | 삭제 | URL
노이에자이트 님이 말씀하시는 핵심적인 얘기는 그게 아닌데 그냥 사례를 든 것을 가지고 꼬투리를 잡는 형국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저자가 말하는 대로 어떤 것을 이해해야 하는 건 아니니까 이런 식으로도 생각해 볼 수 있다고 봅니다.

다른 얘기지만 올해 노벨상은 시인 아도니스가 받았으면 하는 게 개인적인 바람입니다.

이름 2010-10-07 08: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소년이 살아났다는 사실에 행복한 심리적 반응을 보이는 것은 자연스럽다고 봅니다. 그렇지만 그런 소년에게서 무엇을 배웠다는 저자는 이상해요. 무엇을 배웠다는 겁니까?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고 우연에 의해서 살아났다는 사실이 행복하다는 것, 마찬가지의 우연으로 저자가 미국에서 태어나 재앙을 피해 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어 행복하다는 것? 이런 것은 배움의 대상이 아니지요. 나는 운이 좋구나 하는 사실을 깨닫게 해주는 것이 배움이라니요. 마찬가지로 세대간 배운다는 것은 서로 존중하고 인격체로 대우하고 상호관계하는 가운데 죽는 날까지 서로 배우고 가르치고 가는 거가 맞겠지요. 나이든 사람이 엉텅이면 그들에게서 배우는 아이들이 엉터리가 되고 젊은이들이 엉터리면 나이든 사람들이 그들의 말을 들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비유는 맥락이 없으면 이처럼 논리를 벗어나기 때문에 항상 주의를 해야겠지요.

노이에자이트 2010-10-07 17: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미치 앨봄에게 소년이 한 이야기는 그게 아닌데...흑해 님과 이름 님이 오해하는 것 같군요.소년은 지진에서 살아나서 다행이라는 이야기가 아닙니다.아이티에 앨봄이 갔던 것은 지진이 난 뒤 한참 지나서고,그곳 어린이들이 절대빈곤 하에서 재난까지 당했는데도 늘 밝은 얼굴이라서 그 이유를 물어본 거예요.그러니 대답하기를 살아있다는 것 자체가 행복하다 그겁니다.지진으로 죽은 사람도 많은데 나는 살아서 다행이라는 이야기가 아니라는 거죠.가난한 나라 사람들이 행복하다고 말하는 비율이 높다는 일화와 비슷한 거라고 생각하면 됩니다.살아있다는 것 자체가 얼마나 즐거우냐 그 이야기입니다.
 

  적을 막기 위해 울타리를 세워준다는 사람에게 고마워 했더니 알고 보니 나를 가두려고 감옥담장을 세웠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더 무서운 것은 남이 아닌 내가 나를 지키기 위해 울타리를 쳤는데 사실은 그게 남과의 모든 관계를 차단하는 감옥이 되기도 한다는 겁니다.내가 지금 설치하고 있는 것이 울타리인지 감옥인지...설치하는 동안에는 모르니까 더 문제지요.이게 나를 보호하고 있는지 나를 가두고 있는지 어떻게 알 수 있단 말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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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고양이 2010-09-29 11: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확실하게 가슴에 와닿는 글귀입니다.
노이에님, 좋은 하루되시기 바랍니다~

노이에자이트 2010-09-29 15:37   좋아요 0 | URL
마녀고양이님도 즐겁게 지내세요!

ChinPei 2010-09-29 11: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철학이네요.
비슷한 것.
무사가 몸을 지키기 위해 무쇠 갑옷을 입어, 그 무거움 땜에 꼼짝 못해서 적에 붙잡혀 칼에 맞아 죽는다.

노이에자이트 2010-09-29 15:38   좋아요 0 | URL
아...그렇기도 하겠군요...

흑해 2010-09-29 16: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흥미로운 얘기군요. 이 이야기가 어떤 책에 실려 있는지 혹시 알고 계십니까? 안다면 알려 주셨으면 좋겠군요.

어디에서 읽었는지는 모르겠는데 맨발로 잘 다니던 원숭이에게 토끼가 신발을 선물로 줬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그 신발에 길들여진 원숭이는 이제 신발 없이 맨발로 다닐 수 없게 되었습니다. 결국 원숭이는 신발을 공급하는 토끼에게 애원하고 굴종하는 존재가 됩니다. 더 이상 대등한 존재가 아니고 토끼를 업고 개울을 건너기도 하면서 토끼에게 신발을 구걸하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이 얘기가 어디 나오는지 아시는 분은 알려 주시기 바랍니다. 노이에자이트 님 얘기와 합쳐서 둘 다 알려 주시면 더 좋고요.

노이에자이트 님이 말씀하시는 얘기를 읽고 다양한 해석을 할 수 있겠지만 그 "울타리와 감옥"은 혹시 "국가"를 암시하는 얘기가 아닌가 싶습니다. 국가는 울타리일까요? 아니면 감옥일까요?

제가 말한 "원숭이와 신발"에서 "신발"은 "문명"을 암시하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더 유치하게 얘기하면 한국인들이 애지중지하는 "휴대폰"과 등치시킬 수도 있을 겁니다.

휴대폰이 없던 시절에 살던 우리가 일상 속에서 휴대폰이 없다고 "불편함"을 느꼈나요? 오히려 "휴대폰"이 생긴 다음에 비로소 과거가 "불편"하게 느껴진 것은 아닐까요?

저는 과거의 "불편함"이라는 것도 현재에 의해 "생산"되는 게 아닌가 의심스럽습니다. 그런 생각 자체가 현재 이 사회를 지배하는 문명이 만들어 낸 것일지도 모릅니다.

노이에자이트 2010-09-29 17:42   좋아요 0 | URL
아..이거 어디서 보고 쓴 게 아니고...비슷한 이야기는 있지요. 남 해코지하려고 함정을 파는데 깊이 팔 생각만 하다가 자기도 못나오게 너무 깊이 파버렸다는 이야기. 우화라든가 경구 만드는 데 조금 소질이 있어서, 가끔 이런 글을 쓰지요.늘 메모지 가지고 다니면서, 머리에 떠오르면 끄적끄적...

너무 깊이 들어가진 마십시오 하하하...

2010-09-29 23:5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9-30 17: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lo초우ve 2010-09-30 10: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슴에 와 닿기 보다는
무섭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가끔은 내 자신도 못믿는데 어찌 다른사람들을 믿고 살리오.
아~! 이글 정말 무섭네요.
인생이 정말 이 글과도 같다는 생각이 새삼 느껴지네요

노이에자이트 2010-09-30 17:07   좋아요 0 | URL
착잡하기도 하고...좀 그렇지요?

파고세운닥나무 2010-09-30 19: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울타리가 사물일 수도 있지만, 사람일 수도 있겠지요. 사물이라면 용기백배해 버릴 수도 있겠지만 사람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지겠지요. 물론 사람도 버리겠다고 호기 부리는 이들도 있지만요. 전 그런 용기는 없는 듯 하구요.
오늘 누가 가족이 어떤 존재냐고 묻길래 울타리라고 답했어요. 이 글을 보니 그 질문과 답이 다시 생각나서요.

노이에자이트 2010-09-30 23:08   좋아요 0 | URL
가족이 나를 지켜주는 울타리가 될 수도 있지만 어떤 이에겐 감옥담장이 될 수도 있겠지요.
 

   한국전쟁을 경험하지 못한 전후세대들도 이제 나이가 들어가고 있습니다.이미 60대 초반만 해도 모르지요.하지만 전쟁을 비교적 생생하게 경험한 세대들은 그 전쟁을 얼마나 알고 있을까요.지난 일요일에 도전 골든벨이란 퀴즈프로그램에서 남미에 있는 나라 중 한국전쟁 때 파병해준 나라를 꼽는데 학생이 맞히지 못하더군요.정답은 콜롬비아.하지만 이 학생이 고교생이라고 해서 "요즘 애들은..." 하고 탓할 수는 없을 겁니다.과연 16개 파병국 중 아시아 아프리카 중남미 쪽 나라들을 꼽을 수 있는 노인들은 얼마나 될까요.필리핀이나 남아공이 파병한 것에 대해서 알고 있는 사람이 전세대를 통털어 몇 퍼센트나 될지...그렇다고 그걸 모른다는 사람에게 정색하면서 "반공태세가 문제있다"고 눈을 부릅뜨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도 이상하구요.가스통 들고 데모하는 분들 중에서도 잘 모를 것 같은데... 

  우리 역사, 특히 일제시대부터는 학교에서도 잘 안 가르치니 문제가 있다고 하는 말을 많이 합니다.그런데 우리는 역사교과서에 어떤 것을 더 넣어야 하나요? 이것도 넣고 저것도 넣어서 교과서가 엄청나게 두툼해져야 합니까? 그럴 수는 없는 노릇이지요.흔히들 국사교과서에 이러이러한 것이 안 들어가 있다고 목청을 높이는 사람들이 있지만 그런 것 하나하나 다 들어주다가는 교과서 부피가 백과사전 정도가 되어야 할 것 같습니다.

  일본의 역사교과서 (일본에서는 자국역사를 일본사라고 하지 국사라고 하지 않음 중국도 마찬가지) 왜곡이 동아시아 전체에서 문제가 된 계기가 된 시기는 1982년. 그 당시 한국의 일부 인사들이 일본의 역사교과서에 위안부(성노예가 맞지만 관행상 위안부라고 쓰겠음)에 대해서 안 나온다는 문제제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자라나는 세대들이 배워야 하는데 그러면 쓰겠느냐는 쓴소리가 뒤이어 나왔지요.그런데 우리나라 역사교과서에도 그 당시에 위안부에 대한 언급은 없었습니다.90년대에야 등장하지요.정대협이란 단체도 그리 오래전에 생긴 게 아닙니다. 

  작년부터 신문에 간간이 근로정신대 관련기사가 나오더군요.근로정신대에서 고생한 여성(왜 굳이 할머니라는 단어를 쓰는지...나는 그냥 여성이라고 하겠음)들의 체험담도 나오고 있습니다.그런데 그 분들이 하는 이야기가 "내가 근로정신대 출신이라고 하니 많은 이들은 위안부인줄 알더라"는 겁니다.사실 우리나라에선 근로정신대라는 게 있었는지 모르는 사람들이 많습니다.그런 상황이니 무조건 정신대=위안부라고 여기고 있지요.얼마전 근로정신대에서 겪은 고생담을 들으러 온 일본 학생들이 "학교에선 배우지 않았다.놀랍다"고 말했다지만, 근로정신대에 대해서 학교에서 배우지 않은 것은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입니다.근로정신대 관련기사 밑의 댓글을 보면 거의 대부분 근로정신대를 위안부로 알고 있더군요.우리가 일본 역사교과서 걱정할 때가 아닌 것 같습니다. 

   이런 것을 생각해보면 교과서에 무슨 내용이 들어가야 하느냐 하는 문제가 매우 어려운 것이라는 게 드러납니다.한국전쟁에 파병한 나라를 잘 모르는 것을 보면 아무래도 파병국이라면 미국을 우선 떠올리는 정서때문인 것 같고...근로정신대를 모르는 것을 보면 워낙 위안부 문제가 부각되다 보니 그런 것 같기도 하고...여하튼 처음부터 아는 사람은 없으니 차근차근 알아나가면 되겠지요.그리고 모르는 사람을 너무 야단치지도 말아야죠.처음부터 다 아는 사람은 없으니까요.이런 문제를 다루면 아무래도 결론이 좀 애매하게 되는 경우가 많은데 이 글도 그렇게 되어버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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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넷 2010-09-25 18: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 잘 읽었습니다.

툭하면 역사교육을 강화해야 된다고 말은 하는데, 이런 문제는 별로 생각해 본적이 없군요.

저도 근로정신대 하면 무조건 =위안부... 라는 등식으로 생각하고 있었는데, 몇 년전에 읽었던 역사용어 바로쓰기라는 책을 보고 그건 아니라는 걸 알았었던 기억이 나네요.

노이에자이트 2010-09-25 18:45   좋아요 0 | URL
역사교육 강화가 자국중심주의의 애국심 교육으로 이어져야 한다는 주장도 꺼림칙합니다.

일본인 학자가 '한국인들은 정신대 중에는 근로정신대도 있었다는 것을 모른다'고 말하던 것이 생각납니다.

세실 2010-09-26 00: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머 저도 정신대=위안부로 알았는데 아니군요. 이런 무식함이라니.....
우리나라 역사교과서도 아직 고칠 부분이 많겠죠.
역사는 참 중요하게 다루어야 해요.

노이에자이트 2010-09-26 14:52   좋아요 0 | URL
이제부터 알았으니 된 거죠.반갑습니다.앞으로 종종 들르세요.

이름 2010-09-26 00: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콜롬비아를 안다거나 근로 정신대와 위안부가 같은 개념인가 아닌가하는 사실 자체를 역사를 공부하는 것의 기준으로 삼기엔 너무 세세하단 느낌도 있네요. 프랑스에선 라디오 방송에서
늘상 역사 토론 프로그램이 돌아갑니다. 프랑스 문화라는 정부 라디오 방송인데 문학과 예술, 정치 일반 사회 프로그램도 많지만 이차대전, 레지스탕스, 비시 정부, 드골 정치, 알제리 식민지화와 일제리 독립전쟁, 1968년 혁명, 미테랑시대 정치, 프랑스 혁명은 물론
역사는 영원히 토론에 토론을 더해가는 가장 가까운 내용이에요. 그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최근 일본의 극우계열의 사카이 재단에서 프랑스 일본학 학계에 압력을 가해서 일본을 비판하는 한 프랑스 역사학자를 고소해서 스켄달이된 사건에 대해서 오랫동안 토론하는 것을 듣고 알게 되었어요. 진행중이라 결론이 어떻게 난지는 모르겠지만 자국의 학자들이 공격받는데 충격받아 모두 연대해서 자국 학자를 돕는데 이견이 없어 보이긴 했지만 사실 프랑스 일본학 학계에 일본의 후원과 자금의 도움을 받는 학자들이 아주 많기 때문에 이들이 과연 얼마나 독립적인 연구를 맘껏 할 수 있을까 이런 것들에 대해서 토론하더군요. 이런 이야기는 우리가 더욱 관련되어 많이 해볼 수 있는 이야기겠지요. 뉴라이트 재단과 사카이 재단, 한국 대학들에 들어가는 후원등, 이런 이야기는 모두 역사에 관계되는 것들이지요. 학교에서 역사교육도 중요하지만 사회 전반적으로 역사에 대해서 항상 토론하고 관심을 갖고 있는 것이 더 중요한거지요.

노이에자이트 2010-09-26 15:02   좋아요 0 | URL
우리나라에서 그런 토론 프로그램을 보내기엔 좀 멈칫거릴 것 같네요.방송국은 아무래도 시청률을 의식해야 하는데 그런 프로그램이 과연 시청률이 나올까요...

사카이 재단은 요트경주로 유명하여 영어권에서 많이 읽히는 야쿠자 연구서에도 비중있게 나오더군요.

마녀고양이 2010-09-26 16: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근로정신대 라는 자체를 잘 몰라서, 지금 인터넷 뒤져보았습니다.
아.. 미쓰비시 중공업에 끌려가 강제 노동을 한 여성분들이군요.

일본의 점령은 우리나라 문화를 단절시키고,
많은 사람을 슬픔에 빠지게 하고, 나라까지 반토막낸 시발점이지요.
참.. 속상한 일입니다.

제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고등학교에서 근대 및 현대사라는 과목을 따로 만들어야 하지 않을까 합니다만,
이 부분이 권력자에 의해 얼마나 왜곡될 여지가 많은가를 생각한다면 참 어렵습니다...

노이에자이트 2010-09-26 17:32   좋아요 0 | URL
친일파 청산을 반대하는 사람들도 격한 반일을 외치는 이들이 많습니다.반일정서에 안이하게 기대는 것으로 수구세력을 제압할 수 있다고 여기는 이들이 많아서 걱정스럽습니다.반일정서까지도 철저히 반공이념 틀 속에서 관리되고 있지요.

지금도 근현대사는 독립과목입니다.국사는 공통이고 근현대사는 선택과목이지요.워낙 따분하고 우리민족은 다 잘했다는 식의 서술때문에 인기없기로 유명합니다.

그리고 저는 역사교육 강화엔 거리를 둡니다.세계사와 우리 역사의 연관성을 좀더 강조하고 사회과목과의 연관성도 강조한다면 찬성입니다.

2010-09-27 13: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맑고 밝은 느낌을 주는 님의 방에 처음 들렀네요. 쓰신 글 잘 읽었습니다. 저도 역사관련서들을 분야별로 계속 구해놓고,목록을 짜놓고 있는데, 겨울쯤에 집중해서 읽으려고 합니다. 한국근현대사 공부가 너무 부족하여, 같은 시기 중국과 일본의 역사를 다룬 책들과 함게 읽어보려고 합니다. 이미 읽으셨겠지만 일전에 강유원 선생이 서중석 교수의 {그림과 사진으로 보는 한국현대사}를 강추하여 구해두고 읽고 있었습니다. 한국현대사가 제대로 가르쳐지지 않는 까닭을 생각해보면 답답하기만 합니다. 이영희교수 대화록 {대화}를 읽고난후, 최근 나온 강만길 교수의 자서전을 읽고싶어지더군요.

노이에자이트 2010-09-27 16:34   좋아요 0 | URL
반갑습니다.강유원 씨가 서중석 씨 책도 추천했군요.리영희 씨나 강만길 씨 책도 꼼꼼이 읽으시고 좀 여유가 있다면 미야지마 히로시가 쓴 한국경제사에 대한 책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앞으로도 종종 들러주십시오.

흑해 2010-09-27 18: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저는 학교에서 가르치는 역사교육을 강조해야 하는 건지 의문입니다. 왜냐하면 어차피 그 역사 교육은 근대 국가라는 틀 안에서만 생각하라고 강요 또는 강조하는 것이 되기 쉽상이기 때문입니다. 프랑스의 경우는 교사들이 자기 입맛에 맞는 교과서 또는 교재를 채택해서 가르친다고 알고 있습니다만 그렇다고 해서 이런 문제들이 해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프랑스가 집시나 무슬림에게 어떤 짓을 하고 있는지 보면 알 수 있는 일이죠.

오히려 外교과서를 강조해야 할 듯 합니다. 인터넷이나 소설 및 영화, 애니메이션(맨발의 겐이나 반딧불의 묘 같은)에 표현되어 있는 과거에 대한 담론(=역사학 또는 역사담론)에도 좀 더 주목할 필요가 있고요. 여기에 글을 달고 계신 분들도 기본적으로 국가를 중심으로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역사를 얘기하고 있지요.

정신대나 위안부 및 징용자들에 관한 주제들도 한국(또는 조선)과 일본이라는 양국의 관계에서 그것을 바라보지 보편적인 인권의 차원에서 그 문제를 다루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것조차도 민족주의나 국가라는 틀 안에서 얘기됩니다. 인권은 증발하고 민족이나 국민만 강조되며 더 강한 국가를 만들어야 한다는 결론에서 잘 헤어나오지 못한다고 봅니다.

서중석이나 강만길 같은 사람들도 읽어 보면 결국에는 민족주의를 사람들에게 주입시키고 국가 안에서 그것들을 얘기합니다. 뉴라이트 등과 정치적으로는 대립하지만 인식론적인 측면에서는 동일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흑해 2010-09-27 18: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저는 역사학자들이 사실들과 불평등한 관계를 맺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중립적이고 객관적이며 평등한 위치에 있는 것처럼 어떻게 위장하는지? 위장을 하면서 어떻게 권력으로서의 지식을 생산하는지? 이런 것들을 따져 보고 살펴 보고 분석하는 게 역사학의 중요한 과제라고 봅니다. 그저 과거의 사실들을 발굴하는 것만이 중요한 것은 아니며 이러한 이데올로기적 성격을 띠고 있는 분과학문이 역사학이다. 모든 분과학문의 피할 수 없는 속성이 권력으로서의 지식을 생산한다는 것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뉴라이트만이 아니라 강유원, 서중석, 강만길 씨까지 포함해서 그 사람들은 왜 자신의 정체를 진리라고 주장하는가? 그 사람들은 어떤 생각을 하면서 그런 주장을 하는가? 그런 주장을 할 때 이 사회에 미치는 정치·경제·문화적인 효과는 무엇인가? 이런 질문들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여기서 다른 이야기. 저의 경우에는 정신대와 위안부를 구분 못한 적은 없었습니다. 정신대가 더 넓은 범주죠. 위안부는 "일본군 성노예"라는 말로 쓰기도 합니다.

저는 위에 "이름" 님의 말에 이의를 제기하고 싶습니다. 오히려 그런 "개념"에 대한 사유가 더 중요합니다. 인습적인 개념에 대한 사유를 따지는 것은 작은 문제가 아닙니다. 개념의 사유에 따라서 다른 결론이 나오며 개념 자체가 인식이나 생각의 기본적인 구성요소입니다.

저는 오히려 사실의 바다 속에서만 헤엄치거나 그런 프랑스식의 토론만 하는 것이 시간낭비에 불과할 수 있다고 주장하고 싶습니다. 1년 내내 개념에 대한 사유만 해도 되는 게 역사학이라고 생각합니다.




흑해 2010-09-27 18: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마지막으로 가벼운 이야기. "반공이념" 보다는 "반공 이데올로기"라고 표현하는 게 더 낫다고 생각합니다.

가령 건학이념이라는 말은 가능하지만 건학 이데올로기라는 말은 어색하지 않나요. 理念이라는 것은 어떤 신념을 가진 사상이나 정치적 입장을 나타내는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데올로기"와는 다르다고 봅니다. 이데올로기라는 표현은 이념보다 광범위하고 저차원적인 것까지 포괄한다고 판단할 수 있습니다.


사족 하나. 노이에자이트 님이 생각하시기에 "중국의 정당한 영토"는 어디에서 어디까지라고 생각하십니까?

또 "일본의 정당한 영토"는 어디에서 어디까지일까요?

혹시 이런 질문의 전제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닐까요?

여기에 글을 다신 분들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노이에자이트 2010-09-28 16:51   좋아요 0 | URL
내재적 발전론이 남북한 학자 모두에게 주류학설로 수용되고 있다는 사실이 많은 것을 시사한다고 봅니다.

영토에 관해서 최근 변경이론에 관심이 있습니다.임지현 씨가 자주 이야기하지요.다민족 국가의 영토...중국의 영토개념에 관해서는 김한규 씨의 요동사 개념에 주목하고 있습니다.

이름 2010-09-28 01: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역사를 학문으로 하는 분들이라면 개념에 대해서 많은 논의를 하고 보다 명확한 개념을 가려서 써야겠지요. 위에서 제가 언급한 사실은 일반 시민들의 입장에서 한 말입니다. 우리가 역사를 왜 많이 늘 논의하여야 하는가 하는 것은 한가지 역사의 입장을 주입시키기 위한 것 때문이 아닙니다. 다른 여러가지 관점과 시각을 들어보고 훑어보고 돌려보고 비춰보고 생각해 보는 기회를 갖기 때문입니다. 훅해님 말씀대로 혹자는 강만길씨나 서중석씨의 역사관을 좋은 역사지침으로 여길 수 있지만 그 분들의 역사관점의 문제를 흑해님과 같이 지적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런 과정은 이들의 역사책을 읽고 토론하는 프로그램을 들을 수 있는 택시 기사분이나 재봉틀을 돌리면 일을 보고 계시는 분들이나 책을 읽을 기회가 없는 분들이라도 라디오 방송을 통해서 여러가지 관점의 이야기를 들어볼 수 있다는 이야기를 한 것입니다. 여기 주인장은 시청율 문제 때문에 어렵겠다고 하셨는데 그렇기 때문에 공영 방송이 필요하다는
점을 말씀드리는 거지요. 모든 것이 사영화하면 시장논리에 메이게 되지만 공영방송은 커뮤니티의 공익에 도움이 되면 이윤에 관계없이 프로그램을 설정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흑해님 말씀처럼 프랑스에선 롬이라 불리는 동유럽에서 이주온 짚시들이 쳐놓은 텐트를 철거하고 그들의 나라인 루마니아로 추방한 정책을 써서 전 유럽의회로부터 고발당하고 있습니다. 현 사르코지 정권의 결정이지요. 바로 이런 문제에 관해 신문과 라디오에선 몇 달째 롬의 역사와 이주 관계, 이들의 문제와 유럽의 역사, 유태인 홀로코스트와 짚시의 홀로코스트, 심지어 짚시가 유럽문화에 끼친 엄청난 문화유산등, 그들의 세계에 걸쳐있는 이주현황, 데모그라피, 엄청난 토론이 전개됩니다. 그리고 물론 현 정권이 롬을 추방해서 얻게 되는 것은 프랑스내 극우파의 표를 우파인 현정권에서 다음 대선때 자신들의 표로 모으려는, 즉 그들을 유혹하는 제스처라는 것도 토론에서 다 전개됩니다. 이런 토론들이 없다면 일반 시민들은 쉽게 정부측의 보도를 별 생각없이 받아들이기 쉬울 것입니다. 충분히 했다고 여겨지는 토론도 털어보면 검증해보지 못한 점도 많습니다. 토론을 하면 할수록 도움이 되는거지요. 그리고 열심히 듣고 생각해보는 습관은 매우 중요한 시민의 권리이자 의무이고 하고요.

노이에자이트 2010-09-28 16:52   좋아요 0 | URL
그런 깊이있는 토론을 진지하게 듣고 제 견해를 피력해 보고 싶군요.일방적으로 자기 고집만 내세우지 않고 예의도 지키면서 말이죠.

흑해 2010-09-29 16: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이름 님에게 말씀드립니다.

저는 어디까지나 역사를 소비하는 사람들의 입장에서 쓴 겁니댜. "역사 = 국가"라는 등식을 만들어낸 게 누구인가요? 역사에서 인과관계를 만들어내는 것도 역사를 필연적인 과정으로 서술 또는 구성 및 생산하는 것도 결국은 역사학자라는 말일 뿐입니다. 궁극적으로는 근대 사회가 만들어내는 이데올로기와 연관을 맺을 수밖에 없다고 할지라도 말입니다.

그런 권력-지식 생산자들에게 끌려 들어가지 않으려면 그 지식들의 핵심 요소인 개념들에 대해 따져 봐야 한다고 말했을 뿐입니다. 그건 역사학자들이 할 일이다라고 생각하면서 그저 토론하거나 사실을 찾아내는 것은 무의미하다는 얘기지요.

사람들에게 개념들을 새로 만들어내라고 요구한 게 아닙니다. 그 개념들에 대해서 의심해 보라고, 그 사람들이 진리라고 외치는 주장들이 사회에 미치는 효과들을 생각해 봐야 한다는 뜻으로 얘기한 겁니다.

프랑스의 토론에 비하면 한국의 토론이라는 것은 사실 토론도 아닙니다. (또 노이에자이트 님 말씀대로 그렇게 된다면 좋겠지만 저는 프랑스 인들이 고집이 센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리고 그다지 예의를 잘 지키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습니다.)

이름 님 말씀은 잘 알았습니다. 토론 자체에 대해서 이의를 제기한 건 아니니까요. 그걸 방송에 맡겨야 하는지는 다소 의문이지만 취지는 이해했습니다.

다만 제가 한국의 토론 방송들을 별로 안 좋아하는 이유는 어떤 문제의 기본 전제나 개념 같은 것들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경우가 너무 많다는 거죠. 다양한 의견을 인정하겠다. 크림빵을 먹어도 좋고 단팥빵을 먹어도 좋다. 그러나 어쨌든 우리 모두가 빵을 먹어야 한다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제가 보기에는 이런 식입니다.

하지만 이름 님이 말씀하시는 사회적 쟁점들을 부각시키는 토론을 통해 사람들의 주의를 환기하자는 의견에는 공감합니다. 좋은 말씀 잘 들었습니다.


흑해 2010-10-06 17:18   좋아요 0 | 수정 | 삭제 | URL
제가 쓰는 "이데올로기"와 "역사"를 이름 님은 다른 방식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제가 제 나름의 방식으로 어떤 말을 쉽게 쓰건 어렵게 쓰건 그 말 자체가 사회에서 통용되는 방식대로 이름 님은 그것을 이해하고 그것에 의해 인식을 제한받는 거죠. 심지어 그 말 자체를 이름 님 나름의 방식으로 제가 쓰는 것과 다르게 사용하고요.

제가 쓰는 이데올로기는 알튀세르가 쓰는 "리얼한 것에 대한 실제적 상상'이라는 뜻으로 사용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데올로기에서 벗어난 사람이 없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모든 지식은 권력의 속성이 있다는 의미죠.(과거에 대한 인식이 제한된다) 과거는 현재의 언어에 의해 구성되는 담론이라는 겁니다. 가령 "현재의 언어에 의해 구성된 조선왕조"가 이데올로기적이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이데올로기적 효과를 발휘하지 않는 지식은 없습니다. 지식은 사회 속에서 "진리로서" 생산되고 유통되며 소비됩니다. 이데올로기 바깥은 없다는 거죠.

이름 님! 생각이라는 것 자체가 "선입관"과 분리될 수 없다는 것이 제 얘기의 핵심적인 부분입니다. 그래서 누구의 말이든 따져 봐야 한다는 뜻인데 제 얘기가 전달이 잘 안되는 군요.

저는 저 자신이 선입관이 없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의제기는 얼마든지 인정합니다. 그렇지만 의아스럽군요. 그러면 한국인들은 성질이 급하다고 생각하면 안 되겠군요. 모든 한국인들을 만나볼 때까지, 아무리 많은 한국인들이 인터넷 속도가 느리다고 분통을 터뜨려도 그런 결론을 내려서는 안 된다는 의미로군요. 1억 2천만이 넘는 일본인들을 다 만나 보기 전에는 일본인들이 "친절하다"는 얘기도 불가능하군요. 그러면 귀납법을 쓰지 말아야 하는 것 아닐까요? 어쩐지 제가 일종의 오리엔탈리스트가 된 거 같군요.

한마디 더 하자면 이름 님은 이데올로기와 분리해서 어떤 일을 진행시키거나 이해할 수 있다고 보시는 게 아닌지요?

사회경제노동사를 쓰고 일상의 삶을 다루면 이데올로기에서 벗어나는 건가요? 잘해봐야 다른 형태의 이데올로기일 뿐이죠. 이데올로기(리얼하다고 본인들이 상상한 것)는 광범위한 것입니다. 이데올로기에서 벗어난 "역사학"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데올로기는 무수히 많습니다. 계급, 젠더 , 연령, 지역, 종교, 에스니시티 등등.

이름 님! 누가 주체인가가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는 누구나 주체로서 이미 주어져 있습니다. 주체라는 범주나 개념이 무엇이며 그것이 누구에 의해 어떻게 주어지는가? 그것이 현실에서 어떻게 작동하는가 하는게 문제인 거죠.

주체라는 범주 혹은 개념 자체가 이미 이데올로기적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름 님은 제가 보기에 이데올로기적인 것을 "이데올로기에서 벗어난 어떤 것"으로 이해하고 계십니다.

그게 제가 보기에는 바로 사회적으로 만들어지는 "선입관"이자 이데올로기입니다. 모든 역사학은 이데올로기라는 주장은 성급한 것이 아닙니다.

이런 문제들을 문제삼으면서 위안부나 근대, 식민주의, 역사학에 접근해야 하기 때문에 이데올로기와 개념이 중요하다는 겁니다. 그런데 자꾸 이 문제를 축소시키는 군요. 인습적인 개념에서 벗어나지 않으면 되는 일이 없습니다.

제가 보기에 이름 님은 행정적인 차원에서 아니면 실용적인 차원에서 이런 문제에 접근해야 한다는 "이데올로기"에 빠져 있습니다.

이름 님의 견해를 들어 보니 결국에는 이데올로기(역사학이라는 담론)에 대해 따지지 말자는 주장이시군요. 그런 이름 님의 생각이 바로 이데올로기입니다.

이름 님의 주장은 결국에는 "근대"라는 보다 거대한 이데올로기에 통합되는 견해라고 생각합니다. 명백해 보이는 인식과 지식들이 사회적으로 생산된다는 것을 상기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름 2010-09-30 02: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흑해님, 한번 생각해보세요. 역사학자들중엔 여러가지 입장을 가진 분들이 계십니다. 왕국이나 국가 중심의 역사를 기술하시는 분들도 있지만 여러가지 직종의 기술을 갖고 일했던 사람들의 매매일의 삶을 중심으로 각기 다른 시대를 이해하려는 역사를 쓰는 분들도 계십니다. 심지어는 소금, 와인, 설탕, 커피등 한 생산품을 중심으로 사회경제노동사를 쓰는 분들도 많지요. 역사는 매우 방대한 분야입니다. 학자부터 어린 아이들까지 항상 끊임없이 지식의 대상이나 이데올로기의 생산이 아닌 생활과 삶의 이해와 관련해서 항상 이야기되어야 할 것 같다는 것이 제 뜻이었습니다. 저는 위안부란 개념과 근로정신대의 개념의 차이를 학생들이 명확히 아는가 라는 역사적 사실도 중요할 수 있겠지만 학생들이 어떤 사회 상황에서 어떤 사람들이 그런 극심한 희생의 입장에 놓이게 되었는지, 생존하고 귀향한 분들의 삶은 어떻게 된 거였는지, 그분들이 겪은 고통은 어떤 보상으로도 메울 수 없겠지만 고통의 책임을 지는 주체가 윤리적인 책임을 지고 진심어린 사과와 법적인 책임하에 어떤 물리적 보상을 해왔는지 그런 상황이 벌어지지 못했다면 어떻게 그런 상황이 생기지 못하는 것인지, 그분들이 속한
국가와 사회는 사과 요구와 보상투쟁에 어떤 행동을 보여줬는지 이런 실제 내용들에 대한 생각과 이야기를 해봐야한다는 거였어요. 이와 관련되어 끊임 없는 얘기가 또 가능해지겠지요. 아시아 여러나라, 네델란드에서 위안부로 희생되었던 여성들의 증언, 행동의 연대, 그리고 유태인 홀로코스트와 관련되어 그들이 전후 어떤 식으로 폭력의 주체들을 불러세우고 정의를 세우려는 투쟁을 전개했는지, 한가지 주제지만 우리는 수많은 시간을 이야기해야 한다는 겁니다. 매달, 매년, 한 세대가 가고 다른 세대가 오면 또 반복해서 계속 이야기해야 하고요, 역사는 국가적 관점에서 쓰여지는 거다, 이데올로기일 뿐이다 이런 식의 생각은 너무 성급한 입장이고요. 마찬가지로 프랑스 사람들은 고집이 센 것 같다, 예의가 없는 것 같다 이런 식의 선입관도 본인은 갖을 수 있지만 공공의 공간에 발표가 되어버리면 책임을 지어야 한다고 봐요. 이를테면 어는 일본사람이 흑해님과 같이 공적인 인터넷 공간에 한국사람들을 보면 우기기 좋아하고 흥분을 잘한다라고 쓴다면 우리는 당장 이렇게 생각을 피력한 일본 사람에 대해서 많은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기 때문이지요. 첫째는 본인이 다른 사회나 사람들에 대해서 어떤 인상을 갖게 되었다면 어떻게 그렇게 되었을까에 대해서 생각해보는 과정이 중요하다고 봐요. 그리고 그런 느낌을 주는 상대는 꼭 그 프랑스 사람이 아니더라도 우리나라 사람 가운데도 어느 나라 사람가운데도 생활속에 마주친다면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할 수 있게 될지도 모릅니다. 모든 지역엔 아주 댜양한 사람들이 살고 있습니다. 우리가 짧게 경험하고 판단하는 다른 사람들에 대한 생각이란게 실상 허상에 불과한 경우도 많고요. 물론 많은 삶의 경험과 시간이 이런 것들을 더욱 이해하게 해주는 것은 사실이겠지만 젊어서 가져야 할 도움이 되는 자세는 끊임없이 자신이 습득한 지식과 감정, 판단 등을 계속 의심하면서 검토해야 한다는 거지요. 경계해야 할 것은 자신의 생각과 비슷하다면 검증의 태도가 무뎌지고 다른 생각을 하는 사람들에게 대해서 선입견이 더해지는 감정과 같은 걸 겁니다. 다른 사람들과 토론하게 되는 환경이 부족하다면 내부에서 스스로 자신 내분에 다른 입장을 옹호하면서 주체를 설정해서 토론해볼 수 있도 있계지만 한국에 계신분들이 그렇게 고립되고
외롭지는 않으실 것 같습니다.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