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왜 루크이고 그는 아마드인 것일까? 무엇이 이런 차이를 만들까? 나는 궁금했다. 아마드와 나는 다시 각자의 공전 궤도를 돌 것이다. 
레바논과 한국은 참으로 멀다. 지금 이 순간이 두 공전 궤도가 가장 가깝게 접근한 때일지도 몰랐다. 
문득 나는 깨달았다. 
꽤 오랫동안 ‘인생은 살 만한 가치가 있는가?‘라고 묻지 않았다. 질문에 해답을 얻어서가 아니었다. 
그럴 필요를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집요하게 질문을 던지는 것은 언제나 나 자신이었다. 
그런데 트리폴리에 6개월 동안 머물렀던 것은 내가 아니라 ‘우리 였다. 나는 우리로 살았다.
트리폴리 위험 구역에서는 총격전과 죽음, 슬픔과 분노를 통해 새로운 우리가 만들어지고 있었다.
 이곳 사람들은 공동체를 위해서기꺼이 죽음을 선택하기도 한다. 한곳으로 끌어당기는 힘이 어찌나강한지 개인은 무기력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우리가 만들어진다면 더 넓은 우리도 가능하다. 너무 늦기 전에 그 방법을 찾아야 한다.
- P1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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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후 A B 구역 진료소에 가는 길이었다. 
차가 시내 교차로를 지날 때 운전기사 루디가 턱으로 차창 밖을 
가리켰다.
검게 그을린 모스크 주위에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폭발이 일어난 곳이었다. 
그 모스크는 국경없는의사회 자동차가 늘 다니는 도로에서 
몇 미터도떨어져 있지 않았다. 
모스크 주변에는 돌과 유리 조각, 먼지를 뒤집어쓴 자동차들이 흩어져 있었다. 
어쩌면 폭탄이 터지는 순간에 나와 루디가 탄 차도 그 길을 
지날 수 있었다. 몇 걸음이면 닿을 모스크의 잔해처럼, 트리폴리에서 죽음은 삶과 너무 가까웠다. 
그래서 더욱 현실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언제 어디에서 폭탄이 터지고 총알이 날아올지 모르는 세상. 두려워할 틈도살겠다는 발버둥도 허락하지 않는듯했다. 
안타까운 사연과 감동적인 이야기가 모두 사치처럼 느껴졌다. 
죽음은 그저 시리아 내전으로 이미 목숨을 잃은 사람들 가운데
일부로 건조하게 기록되었다.
- P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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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삶도 있을 수 있구나. 새로운 시각을 가지고 인생을 본것같다.

나는 그가 더 살기를 원했고, 기꺼이 에드가가 되어 9개월 동안 그의 의지대로 살았다. 나는 에드가를 연기하는 배우가 된 것 같았다. 아르메니아가 허락하는 만큼 우리는 삶에 집착했고 살기 위해 발버둥 쳤다. 그와 나는 주어진 운명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사람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의 생은 거기까지였다.
 우리는 악수를 하고 조용히 운명을 받아들였다.
- P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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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이렇게 가슴이 아픈걸까. 또 왜 이렇게 먹먹해지는 건지 모르겠다.

난 여전히 이가 닳을 정도로 앙다물고 참기만 했어.
 하지만 마음의 병은 나를 쉽게 놓아주지 않았지. 
시간은 오고야 만다. 언젠가 나는 길을 걷고 있었다.
 이어폰에서 모차르트의 피아노협주곡23번 2악장이 흘러나왔다.
 누군가는 이 곡이 따뜻한 물이 담긴 욕조에 편안하게 누워 있는
 느낌이라고 하더구나. 그러나 나에게는 너무, 그러니까 지나치게 아름다웠어. 그 음악에 비하면 눈앞에 보이는 모든 것, 그 안을 걷고 있는 나 자신은 견디기 힘들 만큼 추했다. 
아들아, 고백하마. 
그때 나는 생각했다. ‘어떻게 하면죽을 수 있을까? 
나는 자살하는 구체적인 방법들을 떠올렸어. 그리고 번뜩 정신이 들었다. 이제는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아픈 사람이며 치료가 필요했다. 곧바로 병원을 찾아가 우울증진단을 받고 약을 먹기 시작했어. 내가 모든 일을 그만둔 지 어느첫 2년이 훌쩍 지났을 때였다.
다시 2년 뒤, 나는 웃음을 되찾았고 약도 끊었다. 기억하니? 
아직 둘째가 태어나기 전이었던 그 몇 해 동안, 우린 여느 아빠와 아들 부럽지 않게 행복한 시간을 보냈지. 우린 여행도 가고 수영도 즐겼다. 웃을 때면 만화 주인공처럼 초승달 모양이 되던 네 눈꼬리는 지금도 잊히지 않는구나. - P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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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이라는것은 모든것의 실체늘 남김없이 드러내는 힘이 있는것같다.

정상훈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서울대병원 의료관리학교실 전공의로 재직했다. 돈 잘 버는 의사보다 세상을 고치는 의사가 되고자 의료인 단체 ‘행동하는의사회‘를 창립해 남다른 의사의 길을 걸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에게 믿을 수 없는 일이 찾아왔다. 
우울증‘이라는 병이었다. 그는 운명 앞에 좌절했고 세상을 피해 자기 안으로 깊이 침잠했다. 
2년에 걸쳐 우울증에서 회복한 후, 삶의 의미를 되찾기 위해 ‘국경없는의사회‘ 해외구호활동가가 되어 지구 반대편 가난한 나라들로 향했다. 서아시아 빈곤국인 아르메니아에서 에이즈보다 무섭다는 다재내성 결핵 환자들을 치료했고, 내전이 한창이던 레바논에서 
시리아 난민을 위한 진료소에서 근무했다. 그리고 더 멀리 서아프리카 시에라리온에 ‘죽음의 병‘이라 불리며 치사율이 50~90%까지 치솟은 에볼라 바이러스가 창궐하자 또다시 죽음이 만연한 그곳으로 가 긴급구호활동을 펼쳤다. 
이 일로 ‘한국인 최초의 에볼라의사‘라는 이름을 얻었지만 그는 자주 부끄럽다고 말한다. 자신은 시에라리온에 파견된 700번째 의료인일 뿐이라고, 살린 사람보다 살리지 못한 환자가 더 많다고, 이 긴 여정을 마치고 세계의 가장 밑바닥 삶과 죽음을 껴안은 그가 집으로 돌아와 삶의 이유와 존재의 의미를 문자 안에 담았다. 지금은 자신을 필요로 하는 방방곡곡 의료 현장에서 ‘동네 의사‘로 일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 동네의사의 기본소득, (2020)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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