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금이 "나는 격구하는 일을 반드시 이렇게까지 극언(言)할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하니, 지사간(司神) 고약해가 "신등이 격구를 
폐지하자고 청한 것은 다름 아니라 뒷세상에 폐단이 생길까 두려워하기때문입니다. 바야흐로 성명(明)하신 이때에는 비록 폐단이 있기에이르지 않으나, 뒷세상에 혹시나 어리석은 임금이 나서 오로지 이 일만을 힘쓰는 이가 있다면, 그 폐단이 적지 않을 것입니다." 하고, 이어옛 시 한 구절을 외우니, 임금이 "이 법은 중국 고대의 황제(黃帝) 때에처음 시작하여 한(漢)나라와 당(唐)나라를 거쳐 송(宋)나라 · 원(元)나라시대에 이르기까지 각기 다 있었던 것이니 저들이 어찌 폐단을 알지못하고 하였겠는가. 다만 무예를 익히고자 하였을 뿐이다. 전조의 말기에도 또한 이 일을 시행하였으나, 그들이 나라를 멸망하게 한 것이어찌 격구의 탓이겠는가. 내가 이것을 설치한 것은 유희를 위하여 한것이 아니고 군사로 하여금 무예를 익히게 하고자 한 것이다. 또 격구하는 곳이 성 밖에 있으니 무슨 폐단이 있겠는가." 하다.
의정부, 육조, 사헌부, 사간원의 관원들이 나간 뒤에 임금이 대언(代言)들에게 "내가 잠저(潛)에 있을 때 일찍이 이 일을 시험하여 보았는데참으로 말 타기를 익히는 데에 도움이 되므로 태종 때에 하고자 하였으나, 마침 유고(有故)하여서 실행하지 못하였다." 하다.
- P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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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정현이 "그전에 태종께서 조그만 병환에 걸리셨는데 여러 신하가문안하느라고 진퇴하는 데에 폐가 있을까 염려하여 외인에게 알리지않으셨는데, 나는 불가하였다고 생각하오. 대저 병은 증세가 여러 가지여서 처음엔 작은 듯하다가 갑자기 위독하게도 되는 것이니 반드시증세에 따라 조심스레 다스려야 후환이 없는 것인데, 위독하게 되어서능히 구원할 수 없게 됨에 비하면 마땅히 신하들로 하여금 약을 의논하여 올리도록 해야 할 것이지, 신하들로 하여금 알지 못하게 해서는아니 되오. 또 의원들이 어찌 능히 병 증세를 참으로 알며, 어떤 증세라고 하면서 약을 올리는 것도 또한 믿을 수 없는 것이오. 반드시 대신을 시켜 의원을 거느리고 증세에 따라 약을 올리도록 하는 것이 옳다.
고 나는 생각하오. 지금은 임금의 병환이 조금 나으시나, 후일에는 마땅히 이와 같이 할 것이며, 중궁(中宮)께서 편하지 못하여도 또한 대신이 주장하도록 하여야 하오. 모름지기 이와 같이 아뢰어서 일을 정할것이니 소홀히 해서는 아니 되오" 하였다.
- P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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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번 연구를 하는 동안 세종을 위인화하거나 신격화하려는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한글을 홀로 창제했다고 해서 한글 자체의 우수성이 더 높이 칭송되거나 폄하되는 것도 아니다. 따라서 나는 사실을 확인하는 데 온 힘을 기울였고, 그 결과 ‘한글 창제‘가 세종의 나라와 백성에 대한 지극한 사랑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중국에 대한 사대사상에 빠져 있는 신하들과 외부의 시선에노출되지 않은 채 홀로 긴 세월을 바쳐 만들어 낸 것임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작은 습성을 쌓있다는 정도의 사실까지 세밀히 기록하고있는 실록에 한글 창제와 관련된 기록은 단 한 번도 나오지 않는다.
아니, 딱 한 번, 세종 25년 12월 30일의 기록에 ‘임금께서 훈민정음 스물여덟 글자를 만드셨다.‘라고 나올 뿐이다. 철통같이 비밀을 유지하며 10년 세월 동안 몸과 마음을 다 바쳐 홀로 훈민정음을 만든 그 정신이 얼마나 드높고 숭고한가!
- P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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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엔 분더카머가 궁금했다. 다음엔 다른 누군가의 분더카머가 궁금해질듯.

분더카머를 재해석하는 현대의 몇몇 예술가들에게, 그리고 나에게,
분더카머는 개별자가 세계와 상호작용하며 겪어온 고유한 역사와기억의 진열실이자 마음의 시공간의 상징체다. 기억이란 대부분의경우 그보다 훨씬 거대한 망각의 잔여물에 불과하다. 따라서 우리가각자의 마음속에 지은 분더카머 안에는 결코 미적으로 높이 평가되는예술 작품의 원형이나 고도로 완성된 지적인 사유의 언어가 저장되어있지 않다. 오히려, 언뜻 보면 무가치한, 부서진, 깨진, 닳은, 기원과이름을 모를, 무수한 말과 이미지의 파편들이 혼란스럽게 뒤섞여공존한다. 이 사적인 언어와 이미지의 파편들은 르네상스인의분더카머에 진열된 사물들 같은 객관적 지식의 탐구 대상을 넘어서삶의 매 순간마다 우리의 몸과 마음 안팎에 다양한 감각과 감정을유발하고 우리 또한 그것을 역으로 투사하는 매개체다.
- P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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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나를 괴롭히고 있던 유령은 예전에 그곳에 살았을 사람의 유령도 아니고, 7년 전 애인의 유령도 아니었다.(전 애인과는 그 여행에서 돌아오고 1년 만에 두 사람의 삶이 다른 곳을 향하고있음을 더 이상 부정할 수 없게 되었을 때 헤어졌다.) 그때 나를 괴롭히고 있던 유령은 7년 전에 나였던 여자의 유령이었다. 
리로부터 전 애인의 가족사를 들어서였는지, 전 애인과 함께 찍은 
사진들을 보게 되어서였는지, 그때 나는 과거를 그리워하면서 심한 상실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 서늘한 우울을 떨쳐버리려면 전 애인과 헤어지고 나서 생긴 좋은 일을 하나하나 되뇌어야 했다. 하지만 그 창문 앞에서 갑자기 나는 옛날의 나 자신이 여기 죽어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 여자의 모든 꿈들, 그 여자의모든 실현되지 못한 계획들이 여기 죽어 있다는 것을 느낄 수있었다. 
모든 인체 세포가 7년에 한 번씩 새것으로 바뀐다면,
7년 전에 여기 있었던 그 여자, 지금의 나보다 어리고 소심한 그여자가 물리적인 의미에서 내게 남긴 것은 하나도 없었다. 그 여자와 나를 이어주는 것은 한 장의 여행사진에 매달려야 할 정도로 희미한 기억뿐이었다.
- P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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