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 과정에서 막 편입해온 새내기를 만나게 되었다. 평양 출신인 김훈金이었다. 1898년생으로 김원봉과 동갑이었는데 민첩한 몸놀림과 열정으로 존재감을 드러냈다. 그는 평안북도 출신으로 숭실대학 재학 중 3·1운동에 앞장서 일본경찰에게 쫓기게 되자 망명해왔다고 했다. 부친이 일본경찰에게 살해당한 터라 일본에 대한 적개심이 크다고 했다.
김원봉도 존재감이 큰 터라 두 사람은 서로 호감을 갖고 만났다. 김원봉은 김훈에게 육탄혈전을 다짜고짜 제안하지는 않았다. 일과가 없는 일요일에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단둘이 이야기했는데 듣던 대로 김훈은 일본에대한 적개심이 강했다. 그는 망명해온 지 얼마 되지 않아 만주와 중국 관내의 사정을 김원봉만큼 잘 알지는 못하지만 제1차 세계대전의 종결과 파리강화회의의 향방, 러시아 시베리아의 내전이 조선 민족에게 어떤 영향을 줄 것인지 예리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김훈은 김원봉이 하고자 하는 일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암살파괴 결사대를 만든다고요? 나는 암살은 싫소이다. 정정당당하게군대로 싸워야지요. 독립군 부대로 가서 초급장교를 하며 경험을 쌓을 생각이외다."
김원봉은 웃으며 대답했다.
"그 생각을 존중하오. 나도 언제고 꼭 군대를 조직할 거요. 우리 독립전쟁 전선에서 동지로 다시 만납시다." - P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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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만 알고 있던 한 사람‘이 숨 쉬는듯 내 옆에 있는것같다.

"나 김원봉은 민족혁명당을 대표해

여러분을 뜨겁게 환영합니다.

조국강토에서 일본 침략자를 몰아내는 건

조선 청년의 사명입니다.

그 사명을 다하려고 여기까지 온 여러분에게

엄숙하게 동지적인 경의를 표합니다.

여러분에 대한 나의 사명은 앞서 육탄전을

감행하고 저세상으로 가신 의열단 동지들의

유지를 실현하는 것입니다.


그분들은 꼭 군대를 만들어달라고 했습니다.

나는 여러분을 중국 무관학교에서

교육받게 하여 장차 민족해방군 지휘관으로

양성하고 우리 부모 형제가 있는 조국 땅으로

진격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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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의 가슴에는 약산 김원봉과 어깨동무하고 있는 조선의 청년들,
그 이름과 혼이 각인되어 있습니다.
황상규·이종암 · 윤세주·박재혁 · 최수봉·김상옥·김익상 · 김지섭 · 나석주 의사 등 의열단원들과
민족해방을 위해 밤하늘의 유성처럼 스러져간
수많은 혁명전사들의 이름을
한 번이라도 더 소리 높여 불러보고 싶습니다.
저자 이원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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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옥은 약산의 뜻을 충분히 이해했다. 이번 한 번의 투쟁으로 끝나지 않고 조국광복의 그날까지 의열단의 투쟁이 계속되기 위해서는 조직의 근간이 철저히 보호돼야 했다.
황옥은 투쟁과정에서 어떠한 고난이 닥쳐오더라도 이번 작전의세부 사항이나 의열단 조직의 기발에 대해선 결코 입을 열지 않겠다고 약산에게 굳게 약속했다.
경성에서 떠나올 때와 달리 묵직한 트렁크를 든 황옥 일행은 7일조선으로 들어가는 첫 관문인 만주 안동에 도착했다.  - P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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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산과 의열단이 그렇게 중국 상해에서 폭탄 제조와 선전 문건 인쇄작업을 하고 있는 동안 경성에서는 총독부와 경찰을 발칵 뒤집어놓은 폭탄투쟁이 발생했다.
1923년 1월 12일 경성 종로경찰서에 누군가 사제폭탄을 투척한것이다. 이 사건의 여파는 엄청났다. 경찰은 경찰 병력을 총동원해
‘폭탄투척 범인‘의 추적에 나섰다. 경성 시내 곳곳에 경찰이 깔렸으며, 만주 국경이나 항만에도 검색이 크게강화됐다.
국내에 미리 잠입해 2차 암살폭탄 투쟁을 준비하던 의열단 단원들도 갑작스런 사태에 신변의 위험을 느껴야 했다. 당연히 폭탄 거사 일정에도 차질이 불가피했다. - P1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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