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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슴도치의 우아함
뮈리엘 바르베리 지음, 류재화 옮김 / 문학동네 / 2015년 10월
평점 :
인간사 궁극의 목적은 더불어 잘 살아가는 것이다. 마냥 철학적이고 심오함이 곳곳에 덧칠해진 이 책에서 얻은 교훈이라면 그것인 것 같다.
처음에는 쉰네 살의 르네와 열두 살 사춘기 소녀 팔로마를 보며 그들의 지성이 오히려 세상과 타인을 향해 잘못된 잣대를 들이대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도 했었다. 부자들이 죄다 허울뿐인 삶을 살고 있지는 않을 텐데 르네는 사회가 낳은 부의 계급에 상당히 부정적이다. 안나 카레니나의 첫 구절인 행복한 가정은 고만고만하지만 불행한 가정은 나름의 이유로 불행을 떠안고 산다라는 말처럼 각자가 느끼는 행복과 불행의 잣대를 내 기준으로 비난할 권리는 없다고 본다. 그들 나름의 삶의 만족도를 속속들이 알 수는 없지 않겠는가.
팔로마는 또 어떤가, 세상의 부조리함이 꼴보기 싫다며 자살을 계획하고 있는 당돌함에 심히 당황스럽다. 소설은 작가의 철학적 견해가 넘쳐나서 문장을 음미하느라 소설의 전반은 흐름을 놓아버리기 일쑤였다. 그래서 소설의 중반부에 이르러서야 르네와 주변 인물들 간의 그림이 그려지기 시작했다.
아파트 수위로 문학과 예술에 탁월한 지식을 장착하고 있는 그녀는 삶의 트라우마를 떠안은 채 수위실의 자기만의 공간 속으로 숨어버린다. 조금이라도 그녀의 지성이 탄로 날까 걱정을 하면서 은근한 자부심도 지니고 있다. 그렇게 벌어진 타인과의 간극은 아파트 입주민과 수위라는 계급으로 또 한번 벌어진다.
그녀는 고슴도치처럼 날을 세우고 있지만 우아함을 잃지 않는다. 그녀의 지성은 그녀의 마지막 자존심이었다. 하지만 그런 그녀의 지성을 단번에 알아차린 새로운 입주민의 등장에 서서히 따뜻한 공기가 흐른다.
부유한 일본인인 가쿠로의 등장은 유럽이라는 사회에 동양적 질서를 내세우고 있는 듯하다. 단아하고 절제된 미지만 고급스러움이 묻어나고 드러내지 않아도 빛나는 양식 등이 가쿠로의 살림살이와 행동 등에서 드러난다. 그러다 왜 일본인이었을까를 잠시 고민하다 일본어를 전공한 작가의 취향이라 여겼다. 그래서 일본을 향한 신비감과 선망이 있는 듯한 느낌을 곳곳에서 느낄 수 있다. 아무튼 가쿠로는 그녀의 닫힌 문을 열어젖히는 열쇠가 되었고 또 르네와 팔로마를 이어주는 다리도 된다.
하지만 왜? 왜!라는 결말에 이르러서는 답을 찾지 못하고 책표지만 바라보았다. 동백꽃의 화려함과 질 때의 순간에 관한 이미지와 그녀가 그토록 사랑하던 작품 속 여인 안나 카레니나의 끝을 대조해보면서 작가가 말하고자 했던 궁극의 이유를 찾고 싶었다. 결국 이제서야 삶의 빛을 보았는데 더는 그 빛과 함께 할 수 없었던 르네를 통해서, 그리고 그런 감정을 똑같이 느꼈을 팔로마를 통해서, 살아가는 이유를 말하고자 했나 보다라며 결론을 지었다.
우린 늙을 것이고, 그건 아름답지도 않고, 좋지도 않고, 유쾌하지도 않을 것이라는 확인을 갖고 살아야 한다. 중요한 것은 지금이다. 지금, 무엇이든 건설해야 한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온 힘을 다해. 매일 자신을 초월하고, 하루하루를 불멸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양로원을 늘 염두에 두고 있어야 한다. 자기만의 에베레스트산에 한 발씩 오르면, 그 한 발 한 발이 조금은 영원한 것이 된다,
미래는 살아 있는 자들의 진정한 계획들로 현재를 건설하는데 쓰이는 것이다. -p.179
그녀와 가장 짧은 거리를 유지한 친구 마뉘엘라의 따스함과 그녀의 동반자가 될 수도 있었던 가쿠로, 그리고 사춘기 소녀 팔로마를 통해 사람과의 관계의 중요성을 깨우치기도 했다. 소통을 멈추면 결국 외로움에 영혼은 무미건조해질 것이다. 상처받은 누군가를 보듬어 줄 누군가가 있기에 세상은 아직도 살만한 거라는 생각에 무게를 더했다. 르네처럼 고독한 삶을 소통으로 녹여내고 있는 것이다.
난 어느새 그녀의 내재된 아니 장착된 지성이 부러웠고 그로 인해 자본이 낳은 위계질서 앞에서 고독한 당당함도 마음에 들었다. 나도 나 자신을 드러내는 실수를 할 수 있다면. 그리고 그런 나를 알아보는 영혼의 친구를 사귈 수 있다면 삶의 무게가 덜어질 것 같다.
"지성은 신성한 재능이 아니라 영장류의 유일한 무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