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완전하게 만든 MOOMIN 가장 완전하게 다시 만든
토베 얀손 원작, 필립 아다.프랭크 코트렐 보이스 지음, 김옥수 옮김 / 사파리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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핀란드 태생인 무민은 핀란드의 청정자연과 휘게 정신을 잘 반영하듯 한국에서도 이미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캐릭터이다. 각종 팬시용품을 수놓은 무민이(요즘 나는 무민을 무민이라고 부른다.)는 어른 아이 상관없이 친숙하게 다가온다. 하지만 나는 그런 무민이를 알고 지낸지는 얼마 되지 않는다.

시작은 무민 파파의 회고록이 먼저였다. 그러다 위험한 여름을 읽게 되었고 지난달에 무민의 겨울을 읽었을 뿐이다. 그러나 이 세 권을 거쳐가는 동안 무민의 골짜기가 친근해졌고 무민 가족뿐 아니라 하나둘씩 등장하는 새로운 친구들은 나를 무민의 세계로 빠져들게 했다.

20대에는 스누피를 엄청 아꼈고 최근에는 보노보노도 알게 되었지만 무민 세상은 내가 생각하는 그 이상의 매력을 가져서일까. 더 알고 싶은 마음이 커져갔다. 무민을 제외하고 아는 인물이 없기에 무민 파파의 회고록을 읽기 전 폭풍 검색을 했다. 하지만 일일이 검색을 하고 찾아보아도 답답함은 여전했다. 그러던 중 사파리 신간 목록에서 무민 책을 보았을 때 얼마나 반가웠는지 더 공들여 설명하지 않아도 알 것이다. 이 책의 전체적인 사이즈와 두께, 그리고 전반적 스타일이 소장하고 있는 엘리스 책과 딱 맞아떨어져서 내겐 더할 나위 없이 완벽했다.

 

 

 

이 책은 토베 얀숀 원작을 바탕으로 새롭게 구상한 책이다. 무민 백과사전이라고 해도 손색없을 만큼 알차고 볼거리가 풍성하다. 나처럼 무민 시리즈를 일부 접한 독자라면 더욱 흥미롭게 읽을 수 있다.

물론 무민이를 처음 알게 된 독자라면 미리 무민 골짜기 친구들을 만나봄으로써 즐거움이 배가 될 것이다. 큰 화면 가득 채운 무민 가족과 친구들을 보니 절로 미소가 지어진다. 각각의 캐릭터들을 짚어보며 얽힌 이야기를 하나하나 떠올려 보았다. 여전히 낯선 친구들이 더 많지만 찬찬히 그들을 살펴보았다.

머리말에도 소개하듯이 무민과 친구들은 인간의 세계와는 전혀 다르다. 각각의 개성은 존중되고 서로의 마음을 이해한다. 작고 보잘것없는 존재란 존재하지 않는다. 토베 얀숀이 왜 이런 성격의 캐릭터를 구상하게 되었는지는 시대적 배경을 읽어보면 알 수 있다. 전쟁이 만연하던 1940년대 핀란드도 강대국들의 간섭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그리고 현실을 떠나 판타지의 세계에 빠져들고 그녀만의 상상의 나래가 펼쳐지게 된 것이다.
처음 무민이 등장한 것이 정치풍자 삽화였다는 얘기에 무민이가 꽤 씩씩한 친구였음에 놀랐다.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무민의 느낌과는 많이 다른 면이지 않은가. 그녀가 전쟁과 정치에도 굴하지 않고 예술을 통해 목소리를 높인 점이 대단하게 느껴졌다.

 

예술은 부당한 현실에 맞서 자신의 목소리를 당당하게 내는 수단이에요! - p.263

 

 

또한 무민 시리즈를 읽다 보면 동화답지 않은 어둡고 가라앉은 분위기를 심심찮게 접할 수 있다. 캐릭터들도 무기력해 보이거나 우울해 보이는 친구들이 있는데 토베 얀숀의 성장 배경을 읽고 나니 이해가 되었다.
전쟁으로 참혹한 시기를 지나던 토베에게 전쟁의 기억은 오래 자리 잡았고 그때 만들어진 이야기들의 전반적 분위기가 그러했다. 그러나 전쟁 이후 쓰인 이야기들은 밝게 묘사되어 수많은 애독자가 생겨났다고 한다. 그 후 무민이 핀란드의 대표 캐릭터로 자리 잡기까지 토베의 노력이 극진했음을 알 수 있었다.

 

 

 

 

 

시작은 당연히 무민에 대한 모든 것부터 시작한다.
나처럼 무민이 하마에서 기인한 것인 줄 아는 이들이 많을 텐데 실은 핀란드에서 자주 언급되는 트롤에서 힌트를 얻은 것이라고 한다.
겨울 편을 읽을 때 무민의 꾀죄죄한 조상을 만난 적이 있지만 조상과 현재 무민의 겉모습이 달라도 너무 달라 의아하긴 했다. 지금 우리네 인간의 진화 과정이 떠올라 웃음이 나기도 했다. 마치 구석기 시대의 모습이랄까.

 

 

 

본격적으로 무민의 생김새를 뜯어보고 그들이 사는 장소와 주로 그들을 볼 수 있는 시간대를 알려준다. 왜냐하면 무민은 겨울잠을 자기 때문이다. 즉 겨울엔 볼 수 없단 얘기다. 그리고 전반적인 성격이나 습관, 먹는 음식 등을 살펴보면 이미 무민에 대해서 반은 공부했다고 할 수 있다.  무민도 커피와 팬케이크를 즐긴다는 사실이 무진장 반갑다.

 

 

 

 

이제부터는 각 캐릭터별로 한 명씩 만날 차례다. 무민 파파가 손수 지은 무민네 집은 찾아오는 손님들이 많아지고 머무르는 친구들도 있다 보니 이층집은 삼층집이 된다. 이것은 무민 가족이 친구들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베란다는 여럿이 모여 커피를 마시기에 좋고 무민 마마의 정원은 온갖 꽃들로 가득하다. 상상만으로도 충분히 힐링 된다.

무민파파, 무민마마, 무민을 시작으로 스노크 메이든, 스너프 킨 등의 친구들을 만나볼 수 있는데 등장인물이 이렇게 많은 줄 몰랐다.
궁금했던 캐릭터의 이미지와 특징 그리고 이야기 속에서 어떻게 등장하고 있는지 기술되어 있다. 등장인물마다 독특한 철학과 개성이 있는데 토베의 다채로운 상상력이 놀라울 따름이다. 다행히 무민 시리즈를 읽어서 친구들이 조금 친숙하게 다가와서 다행스럽다.

 

 

 

무민은 모험을 즐기고 환경 변화에 빠르게 적응한다. 스노크메이든은 무민의 여자친구이지만 무민이 가장 좋아하는 친구는 스너프킨이다. 스너프킨은 그 생김새가 자연친화적이며 방랑벽이 있다. 진정한 자유 애호가라고 할까.

무민 시리즈에서 톡톡 튀는 꼬마 미이는 보면 볼 수록 귀여운 친구다. 심술쟁이 같지만 솔직함이 넘쳐나고 거침없고 당당하다. 그래서 이야기는 미이 덕에 더 에너지가 넘친다. 토베가 미이를 통해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하고 있는 듯 하다. 그리고 반전 유머도 빼놓지 않았다. 그 외 친구들은 머릿속에 드문드문 자리 잡고 있을 뿐이지만 관계도가 첨부되어 있으니 미리 봐두는 것도 도움이 되겠다.

 

 

 

....................

 

 

 

 

무민 골짜기에는 다양한 이웃들이 살고 있다. 무민의 겨울을 읽을 당시 꽤나 많은 이웃들을 만날 수 있었다. 싱크대밑의 아이, 보이지 않는 작은 뒤쥐와 으스스한 해티 파트너, 그로크, 섬 유령, 얼음 여인 등 많은 등장인물에 집중해서 읽어야 했던 기억이 났다. 특히 꼬리가 멋진 다람쥐가 얼음 여인을 만나 죽었다 깨어난 장면은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무민의 세계에선 마법도 통한다. 이 부분은 미처 읽지 못한 시리즈를 읽어야겠다.

 

 

 

무민의 세계에도 사계절이 뚜렷하다. 계절을 맞이하고 즐기는 모습에서 진정한 자유가 느껴진다. 봄맞이 대청소와 모닥불 잔치 등은 계절의 낭만을 즐기지 못하고 지나치는 우리에게 자연의 소중함을 일깨우는 듯하다.
그러나 자연이 주는 재앙도 빠지지 않는다. 하지만 언제나 긍정적으로 위기를 지난다. 홍수가 나서 물바다가 되어도, 토네이도가 휩쓸어도 실망하거나 절망하지 않는다.

 

 

이처럼 자연과 함께 하는 삶에는 나름의 철학과 어록들이 생겨나기 마련이다. 다양한 어록을 읽으며 역시 삶의 지혜는 불변하지 않는 것임을 느끼게 된다. 특히 내게 있어 무민마마의 긍정 코드는 참으로 배울점이 많았다.

 

엄마 무민은 스스로 다짐하곤 해요.
"세상에는 이해할 수 없는 게 많아.
하지만 모든 게 내 생각과 같아야 하는 건 아니잖아?"
- 무민 골짜기의 여름 중에서

 

 

 

 

 

....................

 

 

마지막으로 무민을 탄생시킨 토베 얀숀에 대한 내용을 만나볼 수 있다. 무민의 탄생기는 삼촌이 들려준 트롤 이야기에서 시작하였다고 한다. 그런 삼촌의 트롤 이야기가 없었다면 지금의 무민이 있었을까?
그녀의 나라 핀란드와 토베 얀손의 모든 것이 잘 정리되어 있다.

 

 

 

토베는 부모님의 예술적 기질을 물려받아 어린 시절부터 두각을 나타냈다. 어린 시절부터 잡지와 동화책을 즐겨 만들었으며 지금은 전 세계가 사랑하는 무민의 작가가 되었다. 그녀는 무엇보다 다양한 곳에서 무민을 만날 수 있게 했다. 즉 예술은 우리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있어야 더 나은 세상이 열린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토베는 핀란드를 대표하는 예술가로 한평생을 살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님을 확인할 수 있다. 암울한 시기를 잊고자 판타지를 쓰기 시작했지만 그녀의 삶과 무민의 이야기가 늘 함께 했음을 무민 시리즈를 통해 만나 볼 수 있다.

 

 

 

 

무민마마의 긍정 코드는 역시 그녀가 존경했던 어머니에게서 영향을 얻은 듯했다. 그녀의 두 동생들도 예술적 재능을 이어받아 사진작가와 만화가가 되었다고 하니 정말 예술가 집안임을 실감했다.
토베는 작가 외에 그림에도 뛰어난 실력을 보여왔는데 헬싱키 벽화 속 자신의 모습과 무민을 보며 미소가 절로 지어졌다. 그 외 입체파나 추상화 작품에도 두각을 나타내며 다양한 분야에서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무민 골짜기는 핀란드의 자연 풍경을 고스란히 담았다고 한다. 그녀가 자란 핀란드 곳곳을 보면서 자연이 주는 다채로운 영감이 놀랍게 느껴진다. 자연환경까지도 무민 시리즈에 녹아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무민으로 인해 핀란드를 다시 보게 되었고 무민으로 인해 토베 얀손에 대해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
정말 가장 완전하게 만든 책이라고 자랑할만한 책이다. 그 외에도 더 다양한 이야기들이 가득하니 무민을 사랑하고 무민이 궁금하다면 이 한 권으로 무민 골짜기로 들어가 보는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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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이 걸어도 나 혼자
데라치 하루나 지음, 이소담 옮김 / 다산북스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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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어!
유미코가 걷듯이 나도 걷고 난 후의 편안함을 안다.
작년 겨울부터 시작된 걷기는 나만의 스트레스 해소법이 되었다.
, 혼자 걸어야 한다. 걷고 걸어 제자리로 돌아갈 때쯤이면 한결 마음이 가벼워짐을 느낀다.
그래서 유미코의 걸음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안다.

소설은 두 여성의 삶과 우정을 그려나가고 있다. 저자는 여성들도 우정이 가능함을 이야기하고 싶었다고 한다.
그러고 보니 저자가 어려서부터 자주 들어왔다던 '여성에게 진정한 우정은 성립하지 않는다'라는 말을 여러 번 들어온 것 같다. 사회 통념 속에 갇힌 약자로 억압받고 무시당해온 것도 모자라 시기와 질투라는 감정은 여성에게 더 치우쳐져 있다. 그래서 이런 말도 나온 게 아닐까.

소설 속에서는 각자 다른 삶을 살다 이웃으로 만난 두 여성이 등장한다. 결혼했지만 남편이 사라져버린 유미코와 독신으로 자유분방한 연애관을 지녔으나 일하던 상사에게 스토킹을 받고 있는 카에데가 중심인물이다. 지나치게 절제하던 삶을 살던 유미코와 지나치게 쿨한 삶에 진정한 사랑마저 떠나보낸 카에데이지만 그녀들에게 공통점이라면 혼자이고 나이도 한 살 터울로 비슷하고 그리고 이제 직장이 없다는 점이다.
카에데가 먼저 살던 낡은 아파트에 유미코가 이사를 오게 되면서 둘은 서로 식탁을 공유하는 사이로 발전한다. 유미코의 카레 냄새에 이끌린 카에데는 그녀의 배고픔만큼이나 누군가가 그리웠고 낯선 이에게 문을 열지 않을 것 같던 유미코도 마음의 빈자리가 아팠기 때문이다.

언제든 갈 수 있다고 믿었다. 언제든, 어디든 갈 수 있다고 믿었다.
동시에 어디로도 갈 수 없다는 생각도 들었다.

무엇이든 될 수 있다고 자만하면서 그 무엇도 될 수 없다고 두려워했다. -p.96

그렇게 엮인 두 사람은 여행을 떠나기로 한다. 늘 두려움에 갇혀 선뜻 나설 수 없던 삶에 이제는 움직일 이유가 생긴 것이다. 사라져버린 유미코의 남편의 생사를 확인하는 일이 우선이긴 했지만 두 사람에게는 변화가 필요한 시기였다.
여행을 떠나보면 서로를 더 깊이 볼 수 있다. 조금은 가리고 덧씌워질 수밖에 없는 SNS의 일상처럼 가려진 면들이 여행지에서만큼은 허울을 벗는다. 그러나 섬 여행의 낭만은 유미코의 남편에 얽힌 인물들이 등장하면서 깨진다. 애초부터 성향이 달랐던 두 사람은 결국 각자의 여행이 되고 말지만 그만큼 각자에게 가져온 변화는 진정한 우정의 토대가 된다.

일본 특유의 담담함을 유지하고 있지만 일본의 사회상과 그 속에서 비치는 여성상을 엿볼 수 있다. 사회통념상 보통과 평범의 경계를 중요시하는 사람들에게 있어 그녀들의 모습은 자유롭지 못하다. 하지만 그녀들은 이해하고 받아들인다. 그것은 둘이라서 가능했다. 삶 자체에 무엇이 정상적이고 더 나은지 따져 묻는 일은 무의미함을 알지만 사회통념과 관습이 부드러워지기까지 여전히 갈 길이 멀어 보인다.
무엇보다 유미코의 성장기에 가슴을 쓸어내렸고 유미코와 시어머니와의 독특한 관계는 참 인상적이었다. 우정은 여기저기 존재할 수 있음을 간헐적으로 보여주는 장치 같은 느낌이랄까.

인생의 반을 살았어도 여전히 사회 가장자리를 맴돌고 있는 이들이 많다.
쉽게 누구에게 맘을 내주는 일이 서툴고 불안한 현대인지만 우리는 누군가의 위로가 필요한 인간이다.
인간을 굳이 사회적 동물로 정의 내리는 이유도 여기에 있겠다.

원제는 [길동무가 있어도, 나 혼자]라고 한다. [같이 걸어도 나 혼자]로 수정함으로써 쓸쓸함이 덜어진 것 같다.
같이 걸어도 혼자인 인생이지만 함께 걸을 누군가로 인해 인생도 나아갈 수 있지 않겠는가.
지금의 나와 그녀들의 나이가 비슷해서일까. 주변인들을 돌아보게 되었던 소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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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시원 기담
전건우 지음 / CABINET(캐비넷)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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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푼 꿈을 안고 모여드는 곳, 대도시!
한평 남짓한 공간에서 꿈을 꾸는 청춘들이 잠시 머물다 가는 곳쯤으로 여겨지던 곳. 물론 언급한 이미지는 예전 고시원의 모습이다. 고시원이란 공간이 공포물의 소재로도 전혀 손색이 없어진 데는 우리 사회가 그만큼 희망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작가처럼 고시원 생활은 경험이 없다. 그러나 매체를 통해 지금 그곳으로 모여드는 이들의 모습이 확실히 달라진 건 안다. 고시생보다 이 사회와 어울리지 못한 이들이 하나둘 모여들어 조용히 숨죽이며 사는 곳. 그곳을 벗어나기까지 그날을 기약하지 못한 채 하루하루를 버텨내야 하는 곳쯤으로 여기고 있다.

원래 공포물을 잘 못 본다. 특히 하루 일과를 마무리하고 주로 심야 독서를 즐기는 편인데 등골 오싹한 책은 체질상 오래 잡고 있지 못한다. 이 책은 꼭 읽어야 할 이유가 있었기에 맘 다잡고 펼쳤다. 그러나 역시 한 챕터를 끝내고 덮었다. 그날은 태풍 솔릭의 영향으로 지나치게 창문은 흔들리고 있었고 바람길 코너에 자리한 3층 집은 바람소리가 마치 귀신 울음처럼 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주말 낮에 다시 책을 펼쳐 들 수밖에 없었다. 원래 이야기는 음산한 분위기를 몰고 가는 초반이 무서운 법이라 뒤로 갈수록 무서움보다는 아픔이 더 느껴졌다.

이곳 고문 고시원에도 방호수로 불리며 살아가는 이들이 있다.
공동주거공간이지만 철저히 외롭게 살아가는 이들은 저마다 각자의 사연으로 이곳에 떠밀려 왔다.
공시생, 외국인 이주노동자, 벌써 이력서만 백 번째인 남자, 사업 실패로 이미 호적이 지워진 남자, 죽어 마땅한 이들을 죽이는 킬러 여고생 등 그들은 숨소리마저 죽인 채 서로의 동선을 달리하며 지나친다.

처음부터 고시원 터는 화가 끊이지 않았고 소문은 소문을 덧입는다. 재개발을 앞두고 건물은 거의 버려지다시피 하다보니 음산한 기운이 절정이지만 귀신보다 미래가 더 두려운 이들에겐 그곳마저도 절실한 공간이 된다.

이야기는 각 방주인들의 사연을 들려주며 엮어가고 있다. 시작은 303호에 사는 공시생 홍이 옆방 남자와 우연히 몇 마디 주고받는 것부터 시작한다. 이쯤 되니 옆방은 비어있는 방이고 그녀는 귀신과 대화를 주고받았다는 촉이 온다. 나 같으면 무서워서 다시 방문을 닫고 살았겠지만 홍은 닫힌 문들을 열어 재낀다. 왜냐하면 홍은 304호 남자가 좋아진 것이다. 그의 정체가 궁금해서 시작된 탐정놀이에 점점 오싹함이 밀려온다. 그러다 홍이 사라진다. 그녀인지 귀신인지 모를 비명소리만 고시원을 가끔 채운채.

가끔 서로의 뒷모습이나 곁눈질하던 이들이 짧게 인사말을 건네기 시작한 것도 고시원에서 유독 두드러지게 나쁜 기운을 뿜어내는 310호 남자 때문이다. 혼자였지만 함께 해야 한다는 걸 몸으로 느끼기 시작하자 그들에게 다시 희망이 보이기 시작한다.

이야기는 다양한 요소들로 욕구 충족이 잘 되어있다. 분노를 초능력으로 해결하고, 무협소설의 고수 같은 능력자도 등장하며, 죽어 마땅한 이들을 한방에 처리하며 약자가 느끼는 삶의 무게를 덜어준다. 사는 게 기가 막히고 말로 설명되지 않는 일 투성인데 초능력 좀 넣었다고, 말을 하는 고양이를 등장시켰다고 무리수를 두었다고 여길 필요가 있겠는가.
그러나 스트레스 해소방에서는 걱정이 앞섰다. 아무리 요즘이 대리사회로 가고 있다지만 분노의 대상마저 대리라니. 섬뜩하다. 돈이면 뭐든지 다되는 세상에 자신의 분노를 타인을 통해 푸는 행위는 결국 더 큰 분노를 야기한다.

환경은 사람을 지배한다. 더구나 현대사회는 더욱 그러한 양상이 짙다. 우리네 삶이 고문 고시원의 한평 공간에 갇힌 건 아닌지 살펴야 한다. 고립은 더 무서운 공포다. 공문에서 떨어져 나간 ㅇ자처럼 인생도 살다 보면 중요한 무언가가 떨어져 나가거나 빼앗길 때가 있다. 공문과 고문이 주는 전혀 다른 이미지처럼 원치 않는 인생사에 놓일 때 놓치지 말아야 할 것들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한 평짜리 공간에서 더 나아갈 준비를 하는 이들도, 제 한 몸 누일 공간이 절실한 이들에게도 각자의 공간에서 편했으면 좋겠다. 그러고 보니 3.2평의 독방도 좁다고 인권침해가 어쩌고저쩌고 떠들며 유엔 인권위원회에 보고서를 제출한다던 이가 떠올라 피식 웃고 말았다.

아직 여름이 가지 않았다. 여름의 끝자락에서 공포스럽고 음산하지만 사람 냄새 묻어나는 고문 고시원의 사연에 빠져보길 추천한다. 전건우 작가의 [밤의 이야기꾼들]과 [소용돌이]도 괜찮게 읽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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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의 집
디디에 반 코뵐라르트 지음, 성귀수 옮김 / 문학동네 /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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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과 밤이 공존하는 시간만큼 멍 때리기 좋은 순간은 없을 듯하다. 변화하는 색감을 따라 자연이 만들어 내는 실루엣은 인간의 감성을 적시고도 남는다. 그런 느낌이 충만한 그림 한 점을 소재로 한 작품을 만났다. 밝은 빛을 등지고 서 있는 집 한 채에서 은은하게 뿜어져 나오는 빛에 시선을 놓아둔 채 머릿속을 메운 생각은 오로지 하나였다. 정말 실사 같은데...
그 뒤 나는 서툰 검색질로 르네 마그리트를 찾아보았다.

이야기는 [빛의 제국]과 마주 선 한 남자의 신비한 체험기를 그리고 있다. 실연의 아픔으로 길을 잃은 청년 제레미는 연인 캉디스가 사랑한 그림 앞에 마주 선다. 마치 그림이 그의 아픔을 알고 있었던 것 마냥 그를 끌어당긴다. 그러나 폐점 시간을 알리던 순간, 그림 속 창가의 불이 꺼진다. 마치 그림이 그에게 말을 걸고 있는 듯 신기한 일이 벌어진 것이다. 무언가에 홀린 듯 다시 찾은 그림 앞에서 그는 그만 현실의 필름이 잠깐 끊어진다. 그리고 마치 꿈처럼 한 여인이 그를 빛의 제국으로 초대한다.

그는 그렇게 그림 속 빛의 제국 안으로 들어갔다. 그를 부른 낯선 여인은 르네의 누드모델인 마르타라는 여인으로 제레미를 잘 알고 있는 듯 대한다. 꿈 속이라고 여기자 이 환상의 세계는 그의 잠재의식이 이끄는 대로 장면이 전환되고 캉디스를 불러낸다. 그녀와 열렬했던 순간이 재현되자 그는 마력에 빠진 듯 환상에 취한다. 사분 삼십 초의 시간이 지난 뒤 깨어난 그는 행복한 꿈이 누군가에 의해 방해받은 것처럼 찌증스럽다. 어떻게든 다시 같은 꿈을 꾸기 위해 용쓰는 철부지처럼 온갖 방법을 동원하여 그림 속으로 들어가길 간절히 원한다. 그 모습이 으찌나 어처구니없어 뵈는지 저건 순정이 아니라 집착이라는 생각뿐이다. 현실 속 캉디스와의 관계를 개선하기보다 환상 속 그녀와 사랑에 빠진듯한 모습이 애처로울 지경이다.

빛의 집으로 들어가기 위한 욕망이 간절해질수록 허황된 방법을 찾게 된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별의별 방법에 몸을 맡기자 신기하게도 뜻이 있는 곳에 창문은 열렸으니 무려 세 번이나 들락날락한다. 점점 그를 다그치는 마르타에 대한 호기심에 이끌려 지금의 빛의 집 또한 어떤 모습일는지 궁금해진다.
당신 스스로 아무것도 주문하지 않고서, 누가 챙겨줄 거라 기대하지 말란 말입니다. -p. 141

이 흥미로운 모든 사실을 캉디스에게 털어놓아 보지만 오히려 그들 관계에 선만 정확해질 뿐이다. 사랑하는 감정이 정으로 남게 될 때, 서로에게 필요한 건 신선한 자극이다.  순정이 아닌 집착 같은 사랑이 지겨워진 여자는 그를 밀어낸다. 그러나 그러한 사실조차 제대로 인지하지 못한 못난 남자는 환상 체험 덕분에 집착적 욕망으로부터 서서히 깨어난다.
그가 마르타의 말을 이해하고 그랬을까는 모르겠지만 결정적 한방은 질투였다.
“누드화를 그릴 때 가끔 모델이 되어주곤 했지요.

하지만 단 한 번도 내 얼굴은 그려 넣지 않더군요. 부인이 질투를 했거든요.” - p.67

그리고 마지막, 캉디스는 그에게 이런 말을 던지고 그를 자빠뜨린다.
"당신, 미스 뱅센에게 고마워해야 해 ......”- p.214

이 책은 뭐랄까. 마치 그림이 부리는 마법에 심취해 있다 사랑학 개론으로 마무리된듯하다. 그러나 [빛의 제국]이 주는 느낌이 강렬해서였을까. 아직 혼을 빼놓는 작품을 만나지는 못했지만 예술작품이 살아 숨 쉬며 우리의 정신세계를 들었다 놓았다 한다는 점에 동의한다. 그런 점에서 제레미는 그녀와의 관계 개선에 [빛의 제국]을 잘 활용한 셈이다.
산산조각난 존재, 덧없기 짝이 없는 운명에게 비상탈출구를 열어주고

또다른 세계를 제시하는 것이야말로 예술가들의 역할이 아닌가. -p.210

그러나 조금 섬뜩했던 장면도 있었다. 그림 속에서 오류로 남아 있다던 한 남자는 깨어났을까.

"나는 상상의 자유를 사랑한다. 하지만 동시에, 작고 구체적인 디테일들까지 누구도 반박할 수 없도록 쓰고 싶다”던 작가의 말을 곱씹으며 노란 불빛이 감싸고 있는 현관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그림 한 편을 보며 이런 이야기를 쓸 수 있단 사실이 놀라울 따름이다.

르네 마그리트는 확실히 재능이 넘치는 자다. 괴짜 천재 예술가의 작품을 보고 있자니 시대를 앞선듯하다.
그의 작품세계는 책 속에서 마르타가 잘 요약해 놓았다.
그는 결코 사물을 직접적으로 바라보는 법이 없죠.
언제나 한 박자 늦춰 사물이 머릿속에 떠오르면 자신의 기억과 상상을 굳이 구별하지 않고 그 공백을 채워 나간답니다.
그게 바로 그의 스타일이죠.- p.66

그가 21세기에 태어났다면 더 기발한 작품들이 넘쳐나지 않았을까. 조금 더 찾아보니 그의 작품은 꽤 많은 현대 예술가들에게 영감을 낳게 했다. 특히 눈에 들어온 그림이 있었으니 [피레네의 성]이란 작품은 [하울의 움직이는 성]을 떠올리게 했다. 나와는 띠와 별자리까지 같단 동질감으로 미야자키 하야오의 열혈팬이 되기도 하였지만 하울의 움직이는 성은 기분 꿀꿀할 때면 DVD에 꽂게 되는 애니다. 미야자키 하야오도 영감을 받은 르네의 작품들을 함께 찾아보게 되어 유익한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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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민의 겨울 토베 얀손 무민 연작소설 5
토베 얀손 지음, 따루 살미넨 옮김 / 작가정신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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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풍의 기운이 더운 열기를 밀어내고 선선한 바람이 일렁이는 때, 무민 이야기가 돌아왔다. 계절을 한 단계 앞선 겨울이야기를 가지고서 말이다. 그래서일까. 가을을 금방 뛰어넘어 차가운 시베리아 공기가 불어닥칠 듯한 기분이다. 겨울 공기가 볼살을 후벼파는 기분이 들 때면 인간도 잠깐이나마 동면을 했으면 좋겠다고 우스갯소리를 한 적이 있다.
그런데 부럽게도 무민 가족은 겨울잠을 잔다. 11월부터 4월까지! 추운 겨울을 힘들게 보내지 않아 좋긴 하겠지만 한편으론 겨울의 묘미를 모르고 지나친다는 점은 정말 아쉬운 일이다. 그러나 [무민의 겨울]에서 우리의 무민은 이 겨울이란 계절과 맞닥뜨리게 된다. 생전 처음 보는 풍경에 무민은 적잖게 당황한다. 그러나 겨울이 끝나고 가족들이 깨어나자 겨울에 대해 자랑을 늘어놓기 시작한다. 그리고 자연을 통해 깨달은 새로운 가르침 덕에 무민은 조금 성장한다.

이제 나는 다 가졌어. 한 해를 온전히 가졌다고. 겨울까지 몽땅 다. 나는 한 해를 모두 겪어 낸 첫 번째 무민이야. -p.154

모든 일은 직접 겪어 봐야지. 그리고 혼자 헤쳐 나가야 하고. -p.159

 

 

 

무민의 골짜기에도 겨울이 찾아왔다. 온통 눈으로 뒤덮여 있는 골짜기에 무민의 집은 눈 뭉치로 변하기 일보 직전이다. 무민 가족은 긴긴 겨울을 나기 전 전나무 잎으로 배를 채운다. 요즘 잡념이 늘어서일까. 전나무 잎은 참 먹기 힘들 것 같다는 쓸데없는 생각을 하고 있다. 아무튼 단단히 준비를 하고 잠이 들었건만 그만 무민이 깨어나고 만 것이다. 무민마마를 깨워도 기척이 없고 다시 잠을 청할 수 없자 무민은 홀로 남겨진 겨울이 낯설기 그지없다.

무민에게 겨울은 쓸쓸하고 고요하다. 매서운 추위와 눈보라 그리고 얼음 여왕의 존재도 두려움이다. 무작정 남쪽으로 발걸음을 옮긴 무민은 겨울잠을 자지 않는 친구들을 만난다. 양초 불을 두고 투티키와 마주 앉아 바라본 오로라와 연통에서 나오는 따스한 기운에 조금의 두려움을 접는다. 그러나 태양은 좀처럼 나타날 기미가 없고 외로움이 가득 찰 무렵 눈앞에 낯익은 존재가 나타난다. 바로 은쟁반을 타고 눈 위를 미끄러져 내려온 미이가 등장한 것이다. 역시 미이는 무민 이야기에서 약방의 감초다.

 

 

 

 

미이의 등장에 쓸쓸한 겨울이 조금 활력을 찾은 듯하다. 시큰둥 새침데기 미이는 겨울 따위 아랑곳하지 않는다.
얼음 여왕이 지나간 자리에 다람쥐가 쓰러졌음에도 그 무신경함이란.
쓰러진 다람쥐 그림을 보며 어머! 죽은 거야?라고 중얼거리다 아래 주석(만약 울기 시작한 독자가 있다면 빨리 167쪽을 보길 바란다.-지은이)을 보고서는 피식 웃었다.

 

 

무민의 골짜기에서 자신만의 방식으로 겨울을 보내는 투티키와 크리프, 싱크대 밑의 아이, 벽장 속 트롤은 자신을 드러내지 않은 채 조용히 살아간다. 무민의 집을 찾아온 낯선 손님들에 등장인물이 늘어나서 그런지 겨울이 분주해진다. 추위를 피해 온 손님에게 잼을 거의 내어 주고 말았지만(얄밉게도 잼이 있다는 사실도 미이가 폭로한다) 진정한 우정도 느끼게 된다. 눈도 굴리고 스키도 타보며 겨울을 알아가다 내리는 눈에 홀딱 마음을 뺏기고 만 무민은 겨울이 좋아진다. 쌓여 있는 눈을 보며 눈이 땅에서 자라는 줄로만 알았다고 말하는 무민이 정말 귀엽지 않은가.

 

 

 

 

토베 얀손이 창조한 이 작고 귀여운 캐릭터 무민이 익숙해지려면 상상의 세상과 친숙해져야 한다. 그리고 무민이 사는 골짜기와 낯선 캐릭터들을 적극 탐구해야 한다. 더불어 핀란드를 좀 더 연구하면 일석이조의 즐거움을 누릴 수 있다. 나는 개인적으로 무민마마의 긍정 코드가 제일 좋다. 이 책에도 겨울잠에서 깨어난 무민마마의 긍정 멘트에 마음이 포근해진다.

[무민의 겨울]은 무민 시리즈의 다섯 번째 이야기다. 겨울이라는 계절이 주는 느낌처럼 차갑고 외로운 분위기에서 시작하지만 새로운 만남 속에서 온기를 찾아가는 이야기이다. 낯선 캐릭터들은 각양각색의 특징을 지니고 있으며 별것 아닌 대사 속에서도 일상의 철학이 느껴진다. 한 권 한 권 찾아 읽다 보니 나도 어느새 무민의 팬이 되어가고 있다. 오늘 무민을 다 보여줄 [가장 완전하게 만든 무민] 책이 도착했다. 이 백과사전 같은 책 한 권에 태풍 소식을 뒤로하고 들떠 있었다. 이제 본격적으로 무민 가족과 친해져 보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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