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력 - 권기태 장편소설
권기태 지음 / 다산책방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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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이야기는 실화를 바탕으로 한 최초 우주인 선발과정을 다루고 있다. 2008년 4월, 대한민국은 최초의 우주인 이소연씨에 대한 기사를 쏟아내고 있었고 그걸 지켜보는 나도 뿌듯한 마음을 지녔던 기억이 남아있다. 그러나 그 사건은 '260억 원짜리 이벤트성 항공 우주 사업'이라는 타이틀의 제목과 함께 엄청난 비난을 불러왔다. 그 당시 자세한 내막을 모르는 대중들은 무능한 정부의 혈세 낭비에 화를 풀 수밖에 없었으리라.

 

저자는 한때 우주인 선발 과정을 지켜보았고 어느 탈락자의 퇴장에서 사람들의 살아가는 과정을 그려낼 힘을 얻게 된다. 패배의 눈물에 마음이 쓰이듯 저자는 소설을 통해 삶에 숨을 불어넣고자 했다.

 

생태보호 연구원으로 근무하던 이진우는 우연히 우리나라 최초의 우주인 선발 공고를 발견한다. 그가 늘 동경하던 우주, 그리고 우주에서 해 볼 실험 리스트는 그가 반드시 우주인이 되어야 할 이유였다. 그렇게 지원하고 여러 테스트 과정을 넘나들며 최종 후보에 들게 된다. 러시아에서 본격적으로 최종 일인이 될 자를 선발하는 과정은 더 처절하다. 이진우 외 다른 세 명의 후보자들은 저마다의 꿈을 이루기 위해 이 자리까지 왔고 그렇게 꿈에 더 가까이 다가서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열정의 최고치를 갱신하고자 하는 이들은 오직 한 번뿐인 기회들을 두고 때론 동지로, 때론 경쟁자로 돌변하면서 한 단계씩 뚫고 나간다. 그러나 마지막 관문에서 큰 위기에 봉착하고 만다. 이진우의 갈등과 고뇌의 무게를 같이 떠안고 있자니 이런 경쟁 따위는 벗어던지고 싶단 생각이 들기도 했다.

 

소설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던 결과보다 선발과정에 초점을 두고 있다. 수많은 경쟁자들을 뚫고 올라선 그들이 진정한 우주인이 되기 위해 거쳐야 되는 관문이 너무나 험난해 보인다. 테스트하는 장면이 너무나 생생해서 작가가 진짜 해 보신 게 아닐까 하는 의문도 들었으니 말이다. 네 명의 후보들은 타지에서 의지하고 믿음도 드러내며 동료애를 만들어 가다가도 어느 순간 예민해지며 경쟁심으로 인한 불안감과 질투로 인해 무력감과 씁쓸함에 빠지기도 한다. 각자가 지닌 능력만큼이나 꿈의 이유도 간절해 보여 과연 누가 될지 예측할 수 없다. 들었다 놨다 하는 상황에 승자보다 나머지 탈락자들의 아픔이 더 신경 쓰였다. 연민이 발동하자 승자보다 승자의 됨됨이를 지닌 우주 같은 마음 씀씀이에 울컥한다. 그렇듯 작가는 결과보다 과정에 더 큰 의미를 두어 살아가는 이야기를 하고자 했다.

 

끊임없이 경쟁해야 하고 일인자들의 삶만 부각되는 세상에서 살아가려면 그만큼 이기적이 될 수밖에 없지만 그런 순간일지라도 넘치는 자만심을 밀어두고 뒤도 돌아볼 줄 알아야 한다.

 

끌어안거나 품어주는 힘이요. 중력 같은 힘 말이에요. 늘 그런 건 아니었어요. 하지만 차츰차츰 강해졌어요. 우리는 그런 힘이 너무 없는 곳에서 살고 있잖아요.······ 밀치는 힘, 내쫓는 힘, 책임지지 않는 힘 ······ 그런 게 많잖아요.

 

우리는 한때 대단한 것처럼 주목받을 수는 있지만 비범한 듯이 오래 남을 수는 없어요. 때가 되면 평범으로 돌아와야 해요.······ 그러려면 연민을 지녀야 해요. 간발의 차이로 저의 뒤에 서야 했던 사람들에게 ······ 그들은 더 헌신적이어서, 그리고 어쩌면 운이 없어서 뒤에 섰을 수도 있으니까요. -p.424~425

그리고 어쩌면 소설은 우주인이 되고 싶다는 소망 하나만 바라보고 달려온 그들의 꿈을 애도하고 논란의 중심에 선 그녀도 위로하며 무능한 정부와 무지한 권력자들에 대한 비판을 하고자 한 것으로 비쳤다. 무능한 정부가 보이는 타이틀에 의존해 강대국에 놀아난 느낌이라는 인상을 지울 수가 없었다.

솔직히 자네들은 화물은 아니지만······이라며 쉽게 떠벌리는 강대국의 태도에 분노가 일었다.

 

자연의 변화와 모든 생명체의 존재도 늘 신비롭다고 느꼈는데 중력의 대단함과 원자부터 우주까지 존재하는 힘의 균형이 놀라워서 지구에 더 빠져들 것 같다. 읽으려고 사두었던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와 [지구의 속삭임]을 재미나게 읽을 수 있을 것 같다.

 

하늘에 구름이 피어난다는 것은 얼마나 큰 기적인가. -p.305

 

어찌 되었든 중력이란 소설은 내게 있어 이 우주와 하늘과 별과 달과 태양과 공기와 그리고 중력 같은 관계를 이어온 주변 사람들까지도 소중하게 느끼게 해 준 작품이다. 그 어떤 소설보다도 도덕적 삶의 진정한 가치, 무엇보다 사람이 먼저임을, 알게 해준 따뜻한 작품이었다.

 

그나저나 우주산업이고 뭐고 지금은 지구환경을 걱정해야 할 때가 아닐까.

 

아아 아름답구나.

뭐라고 말할 수도 없구나.

이것은 살아 있는 생명이구나.-p.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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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고 짧은 건 대 봐야 아는 법 - 고대 그리스부터 현대 대한민국까지, 재판으로 보는 세계사 청소년을 위한 인문학 콜라보 3
권재원 지음 / 서유재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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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사의 큰 사건들을 들여다보며 그러한 사건이 역사적으로 어떤 의의를 지니는지 짚어보는 것도 흐름을 익히는 데 도움이 된다. 아이들에게 보여주기에도 좋을 것 같고 자꾸 퇴화하는 기억을 살리는데도 한몫해서 좋다.

 

이 책은 고대 그리스부터 현대 대한민국까지 굵직한 재판을 들여다보며 사회질서가 어떻게 지켜져 왔는지 살펴보고 있다. 판결을 계기로 어떤 변화가 일어났는지 또는 세계 흐름에 어떤 영향을 미치게 되었는지 유추해보며 역사의 흐름을 들여다볼 수 있다. 하지만 재판이라 하기에 모호한 사건도 있으며 권력자들의 자리다툼으로 그 의의를 상실한 사건도 있다. 무엇보다도 시대가 변하고 시민의식이 커져감에 따라 법의 진정한 의미를 되새겨볼 수 있어 좋을 것 같다.

 

법은 사회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있고 개인의 인권을 보장받기 위해 존재한다. 그래서 법 앞에 만인은 평등하다는 전제조건은 필수다. 하지만 때론 법은 권력자들을 위해 존재하거나 악법도 지켜야만 하는 억울한 순간도 있고 잘못된 판결에 목숨을 잃는 이도 있다. 책에 소개된 여러 재판은 그러한 재판뿐 아니라 법이 법으로써의 역할을 충실히 한 경우도 소개하고 있다.


 

 

 

고대 그리스의 소크라테스 재판은 많은 이들이 알고 있듯이 억울한 재판이었다. 그 당시의 재판 절차는 주로 배심원단의 판단 결과를 따랐다. 소크라테스의 재판 과정을 보면서 이런 배심원 제도의 허점을 볼 수 있다. 그가 철학자로서의 심지를 내려놓고 자신을 변론했더라면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을는지도 모를 일이겠지만 그렇지 않았기에 악법의 결말을 볼 수 있었다.

 

탄핵이라는 큰 시건을 접한 우리에게 고대 아테네의 탄핵제도도 흥미롭다. 고대 그리스의 도편추방이 그 비슷한 예로 지금보다 더 강력했다. 이는 독재자의 권력남용을 막기에 좋았지만 경쟁자들의 대결구도에 이용되기도 한다. 하지만 시민들의 목소리가 정치적으로 영향력을 발휘하던 시대였기에 제아무리 독재자라고 해도 권력을 쥐고 흔들 수는 없었다. 무지한 시민보다 정치에 눈을 떼지 않은 시민들 덕에 질서를 유지할 수 있었다.

 

제아무리 권력자라도 법은 반드시 지켜져야 한다. 그러한 예로 브루투스의 재판은 그 과정이 참혹하고 눈물겹다. 그러한 확고함 때문에 반역을 괸 두 아들을 자신의 눈앞에서 보내야 했던 아버지의 심정이 어떠했을지 느껴볼 수 있었다. 후대에 선례를 남기지 않으려던 올곧은 권력자의 모습에 고개를 저을 수밖에 없었지만 공화정에 대한 신념을 세우는데 이바지했다고 보았다.

 

중국도 약 3000년 전에 왕을 탄핵시킨 사건이 있었다. 그러나 3년 동안만 통치를 못하게 해 완전한 탄핵은 아니었으나 왕도 잘못하면 물러날 수 있다는 의의를 남겼다고 한다. 물론 그 뒤 일어난 탄핵은 내치고 갈아치우는 권력싸움에 불과했지만 말이다.

 

이릉을 변호하다 궁형을 당한 사마천의 이야기도 잘 알 것이다. 어떻게든 살아남아 사기를 완성해야 했기에 치욕스러운 궁형을 택한 것도 안타깝지만 그런 고통스러운 일생 동안 사기 완성에 온 힘을 쏟은 그가 대단하다는 생각뿐이다.

 

조선시대 재판 중 노비 다물사리의 민사재판을 보며 새로운 사실도 알게 되었다. 다물사리가 거짓을 꾸민 정황을 보면서 그 당시 양인과 노비의 차가 없었을 뿐 아니라 심지어 노비의 재산이 더 많은 경우도 있었다는 사실은 흥미로웠다.

 

 

 

근대의 전환점이 된 여러 사건 중 소개된 갈릴레오 재판을 제대로 읽어볼 수 있어 좋았다. 과학과 종교의 싸움이었던 만큼 그 의의가 크다. 비록 갈릴레오가 꼬리를 내리긴 하였지만 교회의 위상도 떨어지는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비운의 여인 스코틀랜드의 여왕 메리]를 읽었을 땐 그녀의 생이 참 안타까워 그녀의 처형에 역사적 의의 따윈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그러나 왕도 잘못을 하면 시민의 힘으로 처벌할 수 있다는 선례를 남긴 사건이라니...

 

어떠한 시대든 잘못된 판결 결과에 싸우는 이들이 있었는데 드레퓌스 사건과 사코와 반제티의 재판 경우 에밀 졸라와 같은 지식인이나 정의를 부르짖는 대중들의 노력이 없었다면 법이 이만큼 정의에 가까이 다가서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격변의 시기를 지나는 동안 억울한 사건들은 비일비재했다. 간첩조작 사건이나 박정희 정권의 사법 살인들을 보며 조선시대 고문과 자백이라는 몹쓸 과정이 그대로 재현되고 있었음에 분통이 터졌다. 이러한 억울한 일은 역사 속으로 사라져야 하며 더 이상 반복되는 일은 없어야 하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위 국민을 대변한다는 자들이 역사를 부정하고 헛소리를 남발하는 꼴을 보면 너무나 한심하다. 과연 저들에게서 논리라는 걸 기대할 수 있을까 싶은데 그런 자들을 옹호하는 이들에게라도 올바른 역사교육이 절실히 필요하겠다. 제발 현대사 부분이라도 제대로 들여다보았으면. 갈등과 투쟁의 역사가 어떻게 변화되어 왔는지 살펴보면서 현재를 제대로 바라보는 자세가 필요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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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기억 못하겠지만 아르테 미스터리 1
후지마루 지음, 김은모 옮김 / arte(아르테)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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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 처음 오는 곳인데 온 것 같고, 지금이 꼭 이전에 존재했던 순간 같고, 분명 처음 본 사람임에도 낯익은 것 같은 경험. 누구에게나 그런 일들이 있을 것이다. 마치 꿈에서 본 듯이 아니면 전생의 어디쯤인 듯, 잡힐 듯 잡히지 않는 모호한 순간 말이다. 이 이야기를 읽고 나니 나도 사신 아르바이트를 한건 아닐까라는 엉뚱한 생각에 빠지고 말았다.

 

이 소설은 최근 일본 문학에서 라이트노벨이라고 칭하며 젊은 층에게 인기를 얻고 있는 분야의 작품 중 하나다. 소설과 애니 중간의 경계쯤 되는 느낌이랄까. 주인공들은 당연히 감성 풍부하고 어디로 튈지 모르는 십 대들이다. 그래서 조금 유치하고 가벼워 보이지만 독특한 설정으로 독자를 사로잡는다. 환상의 세계와 현실 공간을 삶과 죽음이라는 코드로 매끄럽게 연결 지으며 그럴싸하게 납득시킨다. 그 누구도 모르는 죽음 너머의 세계에 두려움을 느끼기보다는 이승의 시간에 충실하자라는 취지의 교훈을 들고 우리의 감성을 자극하는 것이다. 초반의 유치하단 생각들이 흐름에 익숙해지자 이런 시간 영역 대가 있다면 참 좋겠다는 생각으로 바뀌어갔다. 왜냐하면 인간 본성의 선함을 믿고 싶었기 때문에.

 

언제 떠날지 모를 삶이지만 급작스러운 죽음으로 이승에 미련이 남는다면 얼마나 답답할까.

허나 소설 속에서는 이런 안타까운 영혼들이 한을 풀고 떠날 수 있는 시간대를 부여한다. 물론 그들은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도와줄 사신들과 함께 할 수 있다. 사자들에게는 미련을 짐작할 수 있는 초능력이 주어지긴 하지만 사신이 없으면 저승으로 가는 길이 쉽지 않다. 그런 미련도 욕심인 걸까. 그런 시간조차도 솔직하지 못하기에 쉬이 떠나지 못한다.

 

 

 

사쿠라는 외적으로나 내적으로나 지금이 힘든 친구다. 그런 그에게 동급생 하나모리는 사신 역할을 제안한다. 일명 사신 알바. 시급은 더럽게 박하고 사신알바가 끝나면 기억도 사라져버리지만 6개월의 할당 시간을 채우면 어떤 소원이든 하나를 들어준다는 말에 일단 시작하고 본다. 램프의 지니처럼 소원을 들어준다는데 그깟 짠 내 나는 시급 정도야 어떠하리.

하지만 그의 첫 알바 대상은 사쿠라의 첫사랑이었다. 아마 그녀못지않게 사쿠라에게도 그녀와 풀어낼 이야기가 남아 있었던것이었기에 이루어진 만남이 아니었을까.

 

그렇듯 시작부터 혼란스런 만남이었고 그 뒤로 만나는 사자들도 쉬운 상대가 아니다. 그나마 산소 같은 하나모리가 함께 해주었기에 하루 시급을 채워 나갈 수 있었지만 아동학대를 당하고 죽은 유라는 사자를 만나면서 또 다른 진실을 마주하게 된다.

 

비록 사쿠라가 300엔의 시급에 불만을 품고 시작한 알바지만 그는 돈으로 살 수 없는 인생의 가치를 배워나간다. 허영과 오만으로 포장한 삶과 거짓으로 자신을 가두어 버린 삶과 학대와 고통 속에서도 목말라있는 사랑에 대한 아이러니를 통해 인간의 다양한 이면을 보고 느끼게 된 것이다. 게다가 초반에 사쿠라는 어차피 사라질 기억이라는 이유로 시간만 때우려 한다. 그러나 점점 오히려 사라질 기억이기 때문에 더 소중히 여겨야 한다는 점도 깨달아간다. 어차피 사라질 기억이라고 해서 대충 살 근거는 어디에도 없다. 더 살고 싶어도 살 수 없는 이들을 보며 살아있는 순간이 얼마나 소중한지, 사랑하는 이들과 함께 할 수 있다는 순간이 얼마나 행복한 것인지를 알아가게 된다.

 

인간이기에 뒤늦은 후회와 깨달음이라는 인생 공식이 일상이지만 의지만 있다면 얼마든지 더 나은 방향으로 살아갈 수 있다. 물론 타인의 삶에 영향을 받는 아이들이라면 그들의 불행한 환경이 더욱 안타까울 수밖에 없긴하지만 말이다. 라이트노블이라고 방심하다 무거운 소재에 기분이 착잡하기도 했다. 서로가 인간의 도리만 하고 살아도 미련이 남은 채 떠나는 이들이 줄어들 텐데.

 

사쿠라의 6개월 알바인생을 보면서 느끼는 바가 많았다. 사쿠라는 나 자신을 사랑하며 희망을 향해 나아갈 것이다. 사쿠라가 어떤 소원을 빌었는지는 대략 짐작하고도 남겠지만 그래도 읽어보길 바란다.

그나저나 이런 아르바이트 자리가 있다면 아마도 일자리가 넘쳐나지 않을까. 세상에 미련이 남은 영혼들이 넘쳐날 테니까.~^^

 

"들어줘, 사쿠라. 내가 태어나고 죽은 이야기를." -p.285

이 문장이 왜 이리 가슴에 콕 박히는지...

누군가에게 내 이야기를 털어놓는다는 건 그만큼 내 인생의 무게를 반으로 나눌 수 있기 때문에 그런가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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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링 인 폴
백수린 지음 / 문학동네 / 201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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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는 못 볼 수도 있을 것 같아서 고백을 포기한 적이 있다. 그리고 나도 그런 고백을 받은 적이 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생각해보니 나에겐 절실함이 없었던 것 같다. 그 사람이 없으면 도저히 못 살 것 같다는.

난 자존심이 센 여자였고 다치고 싶지도 않았다. 적당히 방어막을 치고 선도 빨리 긋고 정리도 빨리했다.

다른 이는 어떨는지 몰라도 적어도 나는 그랬다. 그래서 내겐 아픈 사랑의 기억이 없다.

 

사랑에 조금 건조해서일까. 어찌 되었든 난 처음에 이 글을 읽고는 별 느낌이 없었다.

그냥 한 여자의 추억 속에 존재하는 폴의 이야기.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just의 느낌이었다.

선생과 학생 사이. 자주 만나 그냥 정든 사이.

그래서 무얼 써야 할는지도 전혀 감이 오지 않았다.

그러나 두 번 세 번 읽다 보니 그녀가 덤덤히 말을 하고 있지만 얼마나 아팠을지 느낄 수 있었다.

 

그렇지, 넌 미국을 선택하지 않았지. 나를 선택하지도 않았고.

무슨 이야기를 들어도 생각은 자꾸만 한쪽으로 흘렀다.

무엇보다, 내 마음을 들켰다가는 두 번 다시 폴을 볼 수 없을지 모른다는 사실이 두려웠다. -p.74

 

그녀의 말처럼 누군가에게 절실한 사연을 나는 진부하게 듣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의 마음이 그렇게 어디에도 속하지 못했던 폴의 연민에서 시작되었고

한국인들의 정서인 '정'이 든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아니면 모성애까지 발동한 것인지도.

 

폴의 아버지도 폴도 유리꼬도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사람들만이 느낄 수 있는 연민.

그들 사이에 결코 끼어들 수 없음을 알았을 그녀.

누나라는 호칭으로 남아서 여전히 폴을 보고자 했던 그녀의 짝사랑에 가슴이 찌릿했다.

순간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폴의 하루]라는 단편이 떠올라 그런 생각까지 미친 건지도 모르겠다.

 

그녀의 사랑 이야기보다

성공해서 돌아오고팠을 한국 땅 위에서

"그만 모든 게 참 달라졌구나"라는 말을 듣고 있자니 울컥했고

"미쓰 유리꼬. 유 러브 마이 썬?" 이란 물음에 또 울컥했다.

아마도 폴에 대한 미련을 폴이 들려준 아버지의 일화로 털어낼 수 있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지금 내가 느끼는 감정들처럼.

 

이젠 짝사랑이든 사랑이든 그러한 감정들이 빛을 잃어가서일까. 나는 여전히 추측만 할 뿐이다.

완벽한 발음만큼 완벽하게 아시아를 이해할 수 있으리라 기대한 폴은 그녀를 의지했을 뿐이었고

결국 그녀에게 남은 건 폴의 어눌한 한국식 이름뿐이다.

 

그나저나 나도 요즘 빠지긴 했다.

나는 도대체 어쩌다가 BTS에 빠져버린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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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와 당신들 베어타운 3부작 2
프레드릭 배크만 지음, 이은선 옮김 / 다산책방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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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는 게 전부가 아니야. 유일한 거지! -p.286

 

처음으로 블로그에 리뷰라는 걸 써본 책이 [할머니가 미안하다고 전해달랬어요]다. 그런 인연 때문일까, 그 뒤로 쭉 그의 책을 챙겨보게 되었다. 최근작에 가까워질수록 인물들은 점점 더 촘촘해지고 섬세해진다. 그래서 그의 책이 갈수록 두꺼워지는 걸까라는 생각도 해본다. 스토리라인보다는 각 캐릭터의 심리 구도가 더 볼만해졌다고나 할까.

 

 

 

후속작을 받아들고 난 베어타운의 리뷰를 다시 보았다.

/ 개인적으론 오베보다 할미전이 좋았는데 베어 타운의 감동이 더 오래 남을 듯하다. 왜냐하면 난 엄마이고 딸도 있다. 나도 미라처럼 내 아이들을 모두 덮을 정도의 담요를 가진 상태는 아니지만 꾸준히 담요 사이즈를 넓혀보아야겠다. 마지막으로 배크만이 던져놓은 다음 이야기의 힌트를 곱씹으며 그가 돌아오길 기다리겠다./

리뷰 말미에도 언급했듯이 후속작 소식에 조금 들떠 있었다. 시원하게 해결되지 않은 베어타운이 어떻게 되살아날지 궁금했기 때문이다.

 

살아보니 세상은 권선징악이 안 들어 먹힐 때가 많고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진 자의 파워는 진실도 가릴 수 있음을 알았다. 또한 오늘의 친구가 내일의 적이 되는 상황에 익숙해져야 한다. 어긋나는 사회에 맘은 무너지지만 이야기만이라도 우리를 배신하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기에. 그래서 이번 후속작에서 전작보다는 더 밝은 희망을 보고 싶었다.

 

베어타운에서 일어난 사건은 성폭행 사건을 넘어 한마을의 운명을 뒤흔든 사건이었다. 결국 가해자는 떠났다. 하지만 남겨진 피해자는 또 다른 방향에서 날아오는 화살을 고스란히 맞아야 했다. 그녀의 가족과 그녀의 편에 서 있었던 이들까지도. 그래서 마야는 자신을 피해자가 아닌 생존자라고 말한다.

 

마을은 그 뒤로 청소년 하키팀이 해체되는 위기에 처한다. 그러나 한 정치가는 이 모든 상황을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다지기 위한 도구로 이용하려 한다. 그러한 상황을 알면서도 하키가 인생의 전부였던 단장 페테르는 그와 손을 잡는다. 베어타운과 적대적 관계인 헤드팀과의 신경전은 그 끝이 보이지 않고 마야네 가족은 등을 돌린 사람들로 인해 위기에 봉착한다. 마야의 동생 레오는 폭력이 일상이 되고 페테르와 미라 사이의 균열은 더 벌어져만 간다. 게다가 벤이의 성 정체성이 탄로 나면서 하키단은 더욱 위기를 맞는다. 그런 와중에도 스스로 일어서고 있는 마야가 기특해서 울컥할 정도다. 그리고 사람들은 스스로 인정하지 않았던 잘못을 깨달아가는듯해서 다행스러웠다.

 

하키는 단순하고 난폭한 스포츠다. 그 난폭함은 어린 선수들의 폭력성에서도 드러난다. 부모들은 모르는 그들만의 세계를 오가는 주먹다툼에 또 다른 희생자가 생길까 조마조마하다. 그러나 배크만은 영리했다. 그런 세계의 질서를 잡아나가는데 여성을 앞세운 것이다. 베어타운의 한복판에서 중심을 잡고 있는 필센 술집의 라모나의 투박한 스타일과 새로 부임한 엘리자베스 사켈 코치의 시크하고 도도하며 무심한듯한 스타일에 답답했던 마음이 해소되었다.

 

마을 사람들의 대모 같은 역할을 하는 라모나가 벤이에게 던진 위로의 말은 그 어떤 말보다 시원하다. 배크만의 이러한 장치는 여성 독자에게 위안을 준다.

"내가 남자랑 자고 싶어 한다는 걸 안타깝게 여기는 이유가 딱 하나 있다면 남자하고는 행복하게 지낼 수가 없다고 이 자리에서 딱 잘라서 말할 수 있기 때문이야. 남자들은 골치 아픈 일만 안겨다 주거든!" - p.464

 

단순한 스포츠에 길들여진 마을. 이기고 지는 것의 이분법적 사고는 우리와 당신들이라는 대결구도를 만들어 내고 있지만 그 우리 안에 너와 내가 만들어 내는 다각도의 시선들로 인해 균열이 일어난다. 왜냐하면 우리는 누구에겐 좋은 사람일 수도, 또 다른 누군가에겐 나쁜 사람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을 둘러싼 문제가 복잡해지는 이유도 우리가 대부분 좋은 사람인 동시에 나쁜 사람일 수 있기 때문이다. - p.521

 

아쉬운 점이라면 이해관계에서 인간관계를 더 중시하기까지 더 큰 한방이 필요했다는 점이다. 변화에 속도를 내기 위해서는 말이다. 마치 큰 희생 뒤에 혁명이 성공하듯이. 베어타운도 누군가의 희생으로 더 이상 경기장에서 상대를 비방하는 구호가 들리지 않게 된다.

 

진정 스포츠를 스포츠로만 즐길 수 있는 사회는 힘들 것이다. 정치와 돈의 힘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순수한 정신을 지켜내기란 너무나 어려운 일이라는 걸 보았다. 더군다나 하키에 목숨을 걸고 있는 베어타운 같은 곳에서는 더더욱.

 

우리의 삶은 타인에 영향을 받으며 살 수밖에 없다. 비록 상처를 더 많이 받긴 하지만 결국 이해와 용서를 통해 관계를 성장한다. 아나의 복수심에 누구나 실수는 할 수 있다는 말로 용서하는 벤이를 보면서 말이다.

 

그러나 여전히 관계는 끝나지 않을 것이다.

너와 나,

우리와 당신들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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