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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버스토리
리처드 파워스 지음, 김지원 옮김 / 은행나무 / 2019년 2월
평점 :
이 모든 나무가 어디서 나온 거라고 생각하니? - p.167
난 길을 걸을 때 주로 시선을 나무에 둔다. 집을 나서면 제일 먼저 마주하는 전나무, 아파트 진입로의 단풍나무, 자주 가던 카페 앞의 벚나무, 건물 높이만큼 기다란 메타세콰이어. 그리고 우리 집 베란다 해피트리와 컬러 벤저민 등.
이처럼 사계절을 지나는 나무들의 변화를 지켜본 이라면 나무가 주는 위안의 고마움을 잘 알 것이다.
최근 나무와 숲이 그리워 산이나 식물원을 자주 찾고 나무에 관련된 책도 즐긴다. 예전에 읽은 [나무의 언어]와 [숨은 골짜기의 단풍나무 한 그루]도 정말 재미있게 보았었지만 이 책은 내가 읽은 책 중에 단연코 최고라고 말할 수 있겠다. 많은 이야기 중 자연이 주가 되는 소재는 그 어떤 이야기보다 깨닫는 바가 많다. 늘 주위에 있어서 무신경했던 나무와 풀들이 그들만의 언어로 소통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인다면 공기 한 줌의 소중함까지도 떠올리게 된다. 더불어 지금처럼 신선해야 할 공기가 미세먼지로 가득 찬 것에 미안한 마음도 가져야 한다.
나무들은 오랫동안 우리에게 닿으려고 했다.
하지만 그들은 사람들이 듣기에는 너무 낮은 주파수로 말을 한다. - p.597
‘오버스토리’의 사전적 의미는 숲 상층부의 전체적인 생김새를 뜻하는 단어이다. 작가는 거대한 삼나무를 보며 영감을 떠올렸으며 '아무도 숲과 나무를 보지 않는 시대'에 경종을 울리고 싶었다고 한다. 내가 이전에 본 책들도 모두 그런 메시지를 담고 있긴 하나 인간이 직접적으로 숲을 살리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내용은 아니었기에 이 책은 현실적으로 더 와닿았다. 그러면서도 책에서 어떤 대안을 제시하고 있지 않을까라는 희망을 가져보았으나 많은 이들이 이 책을 보며 자연의 소중함을 깨달아 가는 것만이 희망이 아닐까 한다.
이야기는 뿌리에서부터 시작하고 있다. 뿌리라는 타이틀 속에 등장하는 아홉 남녀의 이야기를 읽을 때만 해도 이야기의 유기성을 연관 짓지 못했다. 그러나 나이테가 늘어나듯 그들의 이야기는 거대해지고 치밀해진다. 가족의 역사를 품은 수백 장의 나무 사진을 지닌 남자와 태어남과 동시에 자신의 나무를 가졌던 남자, 그리고 운명의 나무 반지를 지니게 된 여자도 있다. 나무들의 삶에 자신의 생을 바친 여인도 있으며 나무의 삶과 자신의 삶을 바꾼 여자도 있다. 또한 애초에 나무 따윈 관심 없던 남녀와 인간 외에 모든 생명을 사랑한 남자도 있다. 그리고 나무로 인해 새로운 삶을 시작하거나 삶의 방향이 바뀐 이들도 있다. 이처럼 각자의 삶 속에 나름의 이유로 존재하는 나무였으나 그들은 하나둘 이어지며 또 다른 이야기를 만들어간다. 게다가 1200년 된 왕유의 시가 누군가에겐 절망으로 또 다른 누군가에겐 위안이 되는 이중적인 순간도 이해가 된다.
나무의 가치를 알던 시절, 그들은 밤나무가 내어준 밤의 향기에도 취해 청혼도 하고 나무를 기점으로 가족을 이룬다. 호엘가에 밤나무가 두꺼워지는 동안 가족의 삶은 필름처럼 돌아간다. 산자와 죽은 자에게 똑같이 관대한 그늘을 내어주던 밤나무. 그들은 밤나무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기 시작한다. 그 작업은 대를 이어 진행되고 엄청난 양의 사진이 남는다. 비록 프레임안은 밤나무만 덩그러니 차지하고 있지만 그곳에는 호엘가의 세월이 고스란히 담겨있었다. 한 대가 지나고 또 다른 대가 이어지는 동안 그들을 기억하게 해 준 밤나무. 더 이상의 농장은 없지만 세월의 변화를 느끼고 있자니 울컥함이 밀려온다. 잘 익은 군밤 하나 입에 넣으며 위안을 얻고 싶어졌다.
나무에 관한 전설은 미신이 되고 곧 믿음이 되어 운명과 함께하기도 한다. 중국 이민자의 딸 미미는 아버지가 소중히 여긴 나무 반지와 두루마리를 물려받는다. 그녀의 아버지 삶에 운명과도 같았던 뽕나무와 그녀의 손가락에 운명처럼 끼워진 반지. 그런 과거를 지닌 그녀에게 어느 날 시청 앞 광장이 휑해진 모습에 분노를 느끼게 된다. 그리고 그곳에서 더글러스를 만난다.
교도소 실험에 참가했다가 도중에 나와 자원입대하여 전쟁터로 간 더글러스는 비행기 폭격으로 가까스로 나무에 걸려 목숨을 건지게 된다. 그의 생명을 구한 나무가 마구잡이로 벌목되는 현장을 목격하고는 분노한다. 세상을 눈을 피해 조용히 벌목이 진행되고 있는 모습에 가증스러움을 느낀다. 국유림의 목적은 싸게 잘라내는 거예요. 그걸 산 사람을 위해서. - p.127
세상의 잘못된 계산 앞에 할 수 있는 거라곤 심는 것뿐이다. 심고 또 심고 그리고 주문을 건다. 끝까지 살아남으라고. 그리고 시청 앞 광장에서 만난 미미와 뜻을 같이 하기로 한다.
엉망인 삶을 살다 감전사후 다시 살아난 올리비아는 그 뒤 숲의 소리를 듣게 된다. 그렇게 소리를 따라 도착한 곳에서 호엘가의 닉을 만나게 되고 파수꾼과 메이든헤어라는 별칭으로 평화 시위대에 합류하게 된다. 그러다 미마스를 지키기 위해 나무 위에서 시위를 이어가지만 공권력과 거대 자본가들 앞에서 무너지고 만다. 그들의 분노가 좋은 시너지를 만들었으나 결국 충돌로 희생과 좌절만 남게 된다.
오래된 나무들은 우리의 부모이고, 어쩌면 우리의 부모의 부모일 것이다.
자연의 비밀을 배우려 한다면 더 많은 인류애를 키워야 할 것이다. ······ p.15
작가의 생각과 신념을 가장 많이 드러내고 있는 인물이라면 패티가 아닐까 한다. 어린 시절 청각장애를 가지고 태어났지만 그녀는 인간의 소리보다 나무 세상을 이해하는 촉이 더 발달한다.
확실한 사실이라는 것은 없다. 유일하게 의지할 수 있는 것은 겸손함과 관찰뿐이다. - p.167
자연을 이해하는 데 있어 정확한 데이터가 불가능할 수도 있다. 그녀는 끊임없는 관찰의 결과로 나무들이 사회적 생물이라는 데 확신감을 갖지만 그녀의 의견은 학계로부터 비난과 무시를 당한다. 그러나 과거의 일들이 미래에 더 명확해지듯 시간이 지나 서서히 그녀의 이론이 인정받는 과정을 보여주면서 우리의 좁은 식견을 비판하고 있다. 더불어 미국의 잘못된 산림산업과 무분별한 목재산업에 경종을 울린다. 무엇보다 인간이 자연에 대해 잘못 알고 있는 지식을 바로잡으며 생태계의 흐름을 이해시킨다. 죽은 나무도, 늙은 나무도 각자 존재의 이유가 있으며 생명체에서 불필요한 요소 따위는 없음을 강조한다. 인간과 나무와의 관계에서 인간은 절대 상위계층이 아니다. 상호보완하는 관계임을 깨달아 지구 생태계를 보존하는데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여기서 멈추지 않으면 더 이상 멋지고 환상적인 오버스토리를 보지 못할 뿐 아니라 인류는 엄청난 대가를 치러야 될지도 모른다.
그들의 삶을 따라가면 밤나무, 뽕나무, 단풍나무, 참나무, 린덴 나무, 무화과나무, 반얀나무, 전나무, 삼나무, 사시나무...... 등의 이름을 만나게 된다. 그러다 식물원에서 놓친듯한 나무들을 찾아보느라 잠시 지체하기도 했다.
반얀나무는 태양을 공유하려고 싸우는 백여 개의 서로 분리된 몸통들 때문에 숲 전체처럼 풍성하다. - p.139
반얀나무의 묘사를 보며 찾아보지 않을 수 없었다. 어떻게 보면 괴기스럽고 어떻게 보면 신비스러운 그 모습이 놀랍기만 했다. 인도에서 꽤 신성시되고 있는 나무로 많은 이들이 소원을 빌기도 한다는데 맹골 보리수 나무 또는 아바타 나무라고도 한단다. 국내에서 볼 수 없지만 식물원에서라도 볼 수 있어서 반가울 따름이다. 또한 자연을 묘사한 멋진 문장들도 그냥 지나칠 수가 없다.
나무가 햇살을 조각조각 부순다. 신의 손가락. 그녀와 동생들은 그 비스듬히 들어오는 햇살을 그렇게 부르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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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덕은 건강함의 바늘꽂이처럼 보인다. - p.338
인류는 지구가 주는 혜택을 누리고 살고 있지만 그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는 이들이 많지 않다. 어떤 이는 너무나 당연하게 생각하고 또 어떤 이는 전혀 관심을 두지 않으며 또 다른 이들은 환경에 대해 무지함을 드러낸다. 나무의 성장 기간뿐 아니라 나무들이 숲을 이루기까지 얼마나 오랜 시간이 필요한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게다가 그들은 환경운동가들을 급진적이라고 몰아붙이며 비난하기도 한다. 어쩌면 이러한 싸움은 끝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끝나지 않기에 우리는 지켜나갈 수 있을 것이다.
지구는 이미 많은 생명체를 잃었고 죽어가고 있다. 환경학자들 중 몇몇은 이미 지구가 회생 불가능의 단계에 이르렀다고 고백한 기사를 본적도 있다. 그렇기에 하루빨리 나무의 세계에 발을 들여 나무를 이해하고 숲은 지켜나가야 한다.
네 마음이 조금만 푸르렀어도 우리가 너를 의미로 가득 채울 수 있었을 텐데.- p.14
겨울은 나무의 영혼을 보는 계절이라고 한다. 겨울나무를 보며 이 말을 전하니 남편은 영혼이 아닌 알몸을 보는 계절이 맞는다며 우긴다. 겨우내 내린 눈이 땅속 양분이 되고 겨울을 이겨낸 나무는 그만큼 더 단단하고 강해진다고 한다. 그 단단함을 뚫고 새잎들이 반짝이며 돋아날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설렌다.
R로 시작하는 여섯 글자. 위로가 되는 싹의 귀환. 새잎 (releaf) - p.527
문득 어피치가의 모습을 보니 이런 생각이 든다. 아이들의 탄생을 기념하기 위해 한 그루의 나무를 심게 한다면 어떨까. 나무의 소중함을 느끼는 이들의 수가 9명에서 90명으로 90명에서 900명으로 점점 더 늘어나지 않을까.
마지막으로 패티가 나무에게 드러난 고마움을 나도 대신 속삭여본다.
우리가 미안해. 우린 네가 다시 자라는 게 얼마나 힘든지 몰랐어. -p.19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