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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대로 - 기획 29주년 기념 특별 한정판 ㅣ 버지니아 울프 전집 1
버지니아 울프 지음, 박희진 옮김 / 솔출판사 / 2019년 4월
평점 :
![](https://image.aladin.co.kr/Community/paper/2019/0515/pimg_7804801562195375.jpg)
그리고 인생이 이기려고 기를 쓰듯이 그녀도 항상 인생을 이겨보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하지만 대체적으로 이상하게도 그녀가 인생이라고 부르는 것이 끔찍하고, 적대적이고, 기회만 생기면 잽싸게 습격할 성격이 것이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영원히 풀리지 않는 문제들이 있었다. 예컨대 고통, 죽음, 가난과 같은 것들이 그런 것들이다. -p.87
버지니아 울프. 그녀의 책은 처음이다. 고전을 읽겠다고 다짐은 해놓고 차일피일 미루기만 했는데 [등대로]를 읽을 기회가 주어졌다. 역시 소문대로 한 번에 되는 책이 아니었다. 다시 읽고 있으니 웃어야 할 부분에서 제대로 웃게 되고 세세한 묘사는 시간의 흔적을 풍부하게 해 주었으며 세월의 연민도 잔뜩 밀려왔다.
특별한 사건 전개가 없이 작가의 의식 하나만 의존해야 하는 글들은 온 마음으로 읽지 않으면 분위기를 놓치기 십상이다. 그래서 이런 글들이 어렵다고 생각되는 이유는 우리가 평소 이렇게 깊이 생각할 여유가 없어서다. 도시의 소음과 함께 사라져가는 것들이 많은데 사색도 그중의 하나가 아닐까 한다. 제아무리 심플 라이프가 유행이라지만 생각만큼은 좀 더 깊고 풍부해져야 한다고 본다. 그래서 울프의 소설이 요즘 같은 세상에 더 필요한 것이 아닐까.
이 소설은 그녀의 자전적 이야기가 가장 많이 투영되어 있다. 암울하고 힘겨웠던 성장기를 지나 가부장적이고 남성우월주의가 만연한 세상에서 여성이라는 이유로 차별받았던 지난 시간들을 소설 속에서 쏟아낸다. 즉 울프는 소설 속 인물을 통해 한풀이를 했다고 여겨진다. 권위적인 아버지에 대해, 일찍 돌아가신 어머니에 대해, 그리고 자신의 가치관을 써 내려갔다. 램지 부인이나 릴리라는 여인의 사고에 투영된 그녀의 가치관이 때로는 혼돈스럽고 때로는 강한 언어로 투영되지만 세월이 지난 시점에서는 조금 누그러지는 양상도 보인다.
삶이 우리가 하나씩 살아가는 작고 분리된 사건들로 구성된 것에서 하나의 파도처럼 곡선을 이루고 온전한 전체가되는 양상을 목격했다.
이 파도는 우리를 그것과 더불어 붕 떠오르게 했다가 단숨에 저기 해안으로 던져버리는 것이었다. -p.70
이야기는 램지 씨네 여름 별장으로 손님들이 하나둘 모여들고 시작은 등대를 보러 가자는 여섯 살 아들의 요구에 긍정의 뉘앙스로 대답하는 램지 부인의 대답으로 시작된다. 그러나 잠시 뒤 아버지는 그런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는다. 그런 남편이 못마땅한 건 아내만이 아니다. 자식들도 그런 아버지를 싫어하는 눈치다. 게다 눈치 없게 남편의 손님들도 거든다. 램지 부인에게는 정말 짜증 나는 순간들이다.
이 첫 장면은 재독을 하면서 혼자 피식 웃고 말았는데 요즘 버전으로 하면 욕 한 바가지 쏟아 낼 장면들이다. 남성우월주의, 가부장적 사회에서 남편과 아내의 의견 대립은 늘 남편쪽 의견이 우위에 선다. 아내는 글 그런 식의 대화에 익숙해져야만 했을 것이다. 일방적 이해와 관용에 자식들도 몸서리치긴 마찬가지다.
아들들은 그런 아버지를 피하고만 싶고 그는 아버지가 흥분해서 내는 소리들을 미워했다. 이 소리들은 그들 주위에서 진동하여 어머니와 그의 관계의 완벽한 소박성과 양식을 교란시켰다.- p.56
딸들은 엄마처럼 시도 때도 없이 특정한 남자를 돌보는 삶 -p.16을 살지 않겠다고 다짐한다.
![](https://image.aladin.co.kr/Community/paper/2019/0515/pimg_7804801562195376.jpg)
1부 [창]에서는 그런 인물들의 심리묘사가 주를 이룬다. 램지 부인은 남편보다도 더 똑똑하고 아름다운 여자지만 남편의 권위를 세워주고 여덟이나 되는 자식들을 잘 케어하면서 주변인들의 인생까지 고민해주고 조언을 하는 등 그 시대의 전형적인 여성상으로 그리고 있다.
모범적인 낙농업 그리고 이곳의 병원을 짓는 일 - 이 두가 제가 그녀가 진실로 하고 싶었던 일이었다.- p.84
반면 램지는 남성으로써 사회적 지위를 다 가지지 못한 열등감이 있다. 게다가 여자를 무시하며 그녀가 하는 말의 이상한 비합리성, 여인들의 낮은 수준의 지력이 그의 화를 북돋았다.- p.49 그 앞에서 권위를 내세우려 한다. 반면 가정을 부담스러워하면서 아내에게 애정을 원하는 모순적 행동 패턴도 보인다. 마치 자신에게만 모든 것들이 집중되길 원하는 이기적인 인간의 전형이랄까.
사실은 그는 가정 생활을 즐기지 못했다. 바로 이런 상태에서 인생의 목적은 무엇인가? 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도대체 왜 인류를 존속시키기 위하여 이 고생을 하는가? 이렇게 하는 것이 대단히 바람직한 일인가? -p.126
램지네 이웃이자 화가인 릴리는 중국 여자처럼 조그만 눈을 가진 노처녀이다. 남성주의인 사회적 분위기에 저항하는 인물로 그려지긴 하지만 오랜 시간 지켜봐온 램지 부인을 동경하기도 하고 질투하기도 한다. 붓을 들고도 남성의 시선을 의식하며 (여자는 그림을 그릴 수 없어, 글을 쓸 수 없어. -p.222) 주저하고 망설이는 장면에서 당대 여성들의 억압된 자유를 느낄 수 있었다. 마지막 그녀의 힘찬 붓놀림에 속이 뻥 뚫린 느낌을 받았으니 말이다.
2부 [시간이 흐르다]에서는 거의 폐가가 돼버린 별장의 모습이 묘사되면서 죽음과 다시, 삶을 전한다. 전쟁이란 암울한 상황과 죽음이 한 문장으로 끝나버려서 더 허무한 느낌이다. 인생이란 무엇일까. 사람이 떠나버린 집과 남겨진 물건들을 보며 세월의 흔적 속에 떠나버린 자들의 온기를 떠올렸다.
3부 [등대로]는 제임스가 아버지를 모시고 등대로 가고 릴리는 못다 한 그림을 완성한다. 그녀가 붓질을 하는 동안 과거의 사건과 각 인물들의 내면이 더 두드러진다. 또한 릴리는 램지 씨와의 묘한 감정으로 인해 램지 부인을 한없이 질투하지만 그녀의 허무한 죽음을 떠올리며 눈물을 흘리는 등 감정의 변화를 경험한다. 결국 세월이 지나 남겨진 거라곤 연민과 화해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가져보았다. 램지 부인이 함께 등대로 가진 못했다는 사실에 슬퍼하다 램지 씨의 변하지 않는 인성에 짜증이 일기도 한다.
삶은 등대와 같다는 제임스의 말을 계속 되뇌어보았다. 우리는 자연 속에서 삶의 이치를 깨닫게 된다. 등대로 이르는 삶의 여정은 늘 갈등과 불안의 연속이다. 그것은 삶과 죽음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군가는 나아갈 것이고 누군가는 하염없이 바라만 볼 것이다. 어느 쪽이 옳다고 확신할 수도 없다. '우리는 각자 홀로 죽는다'라는 말처럼 인생도 각자 본인의 의지로 살아가는 것일 뿐이다. 릴리의 마지막 붓질은 경쾌했지만 그렇게 살지 못한 울프의 마지막이 떠올라 서글퍼지기도 했다. 나이가 더 들면 다시한번 펼쳐보아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