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코 패스> 1기에서 분명 코가미 신야가 정신분석자 겸 범죄심리학자인 사이가 죠지의 대화를 하는 모습에서 코가미 신야는 가상의 마키시마 쇼코를 자신의 내면으로서 대화를 나눈다. 

그의 대화에서 자아를 가진 코가미 신야와 자신의 가상적인 존재로 등장하는 마키시마 쇼코에서 서로 다른 관점을 가진 변증법적인 논리로서 대화를 이어간다. 제레미 벤담의 공리주의부터 시작한 파놉티콘, 사실 이것은 이미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이고, 흔히 겪는 일이다. 하지만 그것을 인지하고 이해하기란 어렵다.


 

인간은 평소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을 대부분 모든 사람이 알고 있는 경우가 많다. 즉 인간은 보통 사람이 알고 있는 지식에서 어느 일정 틀을 부족하면 사회적 비적응자로 판단하고, 그 이상으로 되면 비정상적인 인간으로 취급한다. 인간의 능력이 과소하면 문제지만, 그 이상으로 되는 경우 배타적인 대상으로 된다. 인간의 재능이 때로는 남들에게 차별을 받는 존재가 되는 경우가 있으며, 그런 점에서 니체는 평범한 인간들의 도덕의 정의를 지루하게 느꼈을지도 모른다. 토크빌이 주장한 것처럼 "민주주의는 가장 전체주의가 되기 쉬운 정치제"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일반적인 보편적인 인간은 과연 판단력의 한계성이 어디까지인가? 분명 밝힐 점은 루소의 <사회계약론>에서 언급한 의지에 대한 설명에서 자신이 아닌 타인과 공공의 이익을 위해 판단하여 모은 의지를 일반의지라고 한다. 이에 반해 개인적인 이익을 대중들이 하나의 연결성으로 이어질 경우 바로 그것은 전체의지다. 그래서 일반의지를 추구해야 하는 것이 민주주의 정체제도의 목적이나, 대부분 민주주의는 일반의지보단 전체의지에 의존하고, 그런 이유는 민주주의에서 가장 난해한 경제적 이익이란 점이다.

 

자유에 대한 정의와 철학에서 분명히 말하는 것은 자유라는 것은 정치, 사상, 철학 등에 대한 인간의 정신적 가치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나, 사실 대부분 신자유주의국가에서는 자유주의라는 것은 인간의 판단력을 중시하는 게 아니라 인간의 판단력을 크게 좌우할 이익에 목적을 두는 것이다. 결국 경제력이 바탕이 되어 누군가에게 어떤 이익이 돌아가는가? 라는 것이 제일 중요한 관심사항이다. 가령 한국경제가 어렵다고 하여, 물가가 상승하여 서민경제는 어렵고, 임금을 제대로 오르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파트 내지 부동산의 거품은 계속 올라간다.

 

계속되는 부동산의 투기열풍으로 인플레이션이 가중되고, 그 토지 내지 건물에 임대받는 자들은 부동산 거래가격 상승에 따라 지대나 임대료가 올라가고, 그에 따라 다시 상품이나 인건비 모두 상승한다. 이런 연쇄적인 반응에서 본다면 제레미 벤담이 말하는 공리주의 이상은 현대의 자유주의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벤담이 영국인이란 점에서 영국의 마지막 고전경제학자인 존 스튜어트 밀로 넘어가면서 그는 벤담의 공리주의와 다른 길을 찾아간다.

 

벤담의 공리주의는 모든 utility 즉 공공성을 가질 이익을 공평하게 분할하는 것이고, 존 스튜어트 밀은 상대방의 차이에 주안점을 두었다. 양적인 공리주의와 질적인 공리주의란 바로 여기서부터 다른 길을 가는 것이다. 사실 전자의 경우 다소 사회주의적인 요소가 반영되어 있으면서도 한편으로 전체주의적인 요소가 반영되어 있다. 같은 조건을 주는 것이라고 하더라도 인간의 육체적, 정신적 조건은 분명히 다르기 때문이다. 인간의 차이점을 인정함으로서 불평등을 해결하는 것이다. 처음부터 불평등은 없다는 것에 의해 불평등이 심각하게 만들어지는 것이다.

 


모든 것에 대해 공평하게 주어진 것이지, 누구에 대해 그 공정함은 이루어지지 않은 점이다. <사이코 패스>에서 지적하는 바로 이런 공리주의 이상이 시빌라 시스템으로 이루어지려고 하나, 문제는 시발라 시스템은 인간이 가진 잠재적인 요소를 하나의 데이터 통계로 나타내 그들을 계속 사회의 일원으로 활동하게 하는 것인지 아니라면 잠재범죄자로 격리할 것인지, 더 나아가 처벌로 통해 사회에서 사라지게 할 것인지를 판단하게 된다. 인간이 인간에 대해 서로 사회적 관계를 맺는 것이 아니라 결국 시스템에 의해 관계를 맺어지게 되는 점이고, 인간의 관계성이 서로 외면되는 순간, 인간은 자기의 의지가 아니라 시빌라의 의지로서 의존하게 되고, 자신의 판단력은 사회의 일원으로서 활동하는 의지가 아니라 시빌라의 말이 맞는지 아닌지는 선택하는 수준으로 떨어지는 것이다.

 

그렇게 시빌라의 침식아래 인간의 선택점은 계속 수동적인 인간으로 되게금 하고, 더 나아가 인간은 자신이 만든 세계가 아니라 만들어진 세계인 즉 스펙타클에 의해 모든 것을 움직이게 된다. 그런 점에서 왜 파놉티콘이 중요한가? 파놉티콘은 거대한 원형탑에서 소수의 감시자가 360도로 모든 사람을 감시할 수 있다. 단지 조금 다른 점은 감시당하는 자는 자신이 현재 감시자로부터 통제받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한다. 대부분의 평범한 사람들은 그런 파놉티콘의 시스템에 의해 자신의 존재가 감시당하는 것조차 생각하지 못하고, 오히려 그런 감시의 체제가 하나의 편리함으로 대체된다.

 

<사이코 패스>2기 8화에서 카무에 대한 추적에서 조금 흥미로운 점이 발견되었는데, 그것은 시빌라 시스템이 파놉티콘 시스템과 무슨 관계가 있다는 점이고, 파놉티콘은 경제와 교통을 통제하는 것이다. 생각해보자? 18세기 전 자본주의 사회에서 부르주아계급은 이미 상승하고 있었고, 프랑스대혁명부터 시작하여 19세기 혁명의 시대는 왕정시대에서 의회민주주의로 이전하게 되었다. 그리고 20세기 1차 및 2차 대전으로 통해 과학기술의 발전과 더불어 인간의 존재는 계몽으로서 자각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계몽에서 멀어진 존재로 보았다.

 

근대 이후 탈산업 시대에 도래에 따라 인간은 점점 물질적 문명에 길들여져 가는 것에서 자신들의 삶을 감시와 처벌로서 이어가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왜 경제와 교통인가? 인간에게 주어진 존재는 2가지로 볼 수 있다. 하나는 사회적 인간이고, 다른 하나는 육체적 인간이다. 교통이란 것은 물리적으로 인간이 직접적으로 이동을 해야 하는 것이기에 개인이 어느 곳에 가든지 그 목적지를 알고, 실시간으로 그가 어디에 무엇을 하는지 알 수 있다면 완벽한 감시가 되는 점이다. 또한 경제라는 것은 자본주의에서 모든 인간은 자신이 생산하여 소비할 수 없다.

 

자신이 생산하여 소비하는 시대는 위에서 언급한 18세기로 끝이 났다. 농경산업시대에는 자신이 곡물을 생산하고, 가축을 사육하여 가족 스스로 의식주를 해결할 수 있었다. 물론 유럽에서는 페스트나 십자군 원정으로 인해 노동인구의 감소 및 농경지의 황폐화에서 식량을 수입하는 시장구조를 가지게 되었으나, 그래도 역시 중상주의 이전에 중농주의이란 점이고, 농업이 중심이 되는 것은 결국 노동력을 생산하기 위해 자녀들을 계속 출산해야 하는 점이고, 그런 방식으로 재생산이 가능한 사회구조였다.

 

하지만 19세기 자본주의 시장구조가 발달되고, 20세기에 기계의 발달로 대부분 산업구조는 1차인 농업에서 2차인 공업, 더 나아가 3차인 서비스로 변경되었다. 결국 자신이 생산한 식량과 재화로 소비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타인의 노동에 의해 생산된 생산품에 의해 생계를 유지해 나가는 것이다. 그렇다면 <사이코 패스>에서 그 사회의 토대가 되는 식량을 생각하자. 인간이 없는 무인시스템이 자동으로 곡식을 키우고, 그 곡식이 사회의 운영에서 토대가 된다. 제 아무리 3차 서비스 산업이 90% 넘더라도 기본적으로 식량산업이 운영되지 않으면 버틸 수가 없고, 그 식량을 가공할 수 있는 2차 산업이 중간에 움직이지 않는다면 역시 그 사회는 버틸 수가 없다.

 

따라서 인간은 1차와 2차 산업에 대한 점유율이 상대적으로 감소함에 따라 경제적인 방식으로 생계를 유지해 나간다. 생계의 유지는 곧 소비를 의미하는 것이고, 그 소비는 결국 경제적 활동이 되는 것이다. 경제활동이 사회생활이 되는 것이고, 경제의 흐름에서 소비자가 무엇을 사고, 무엇을 파는지 확인함으로서 그의 식생활과 취미, 생활패턴까지 읽을 수 있다. 감시라는 것이 인간의 평범한 일상생활에 파고들어 감시가 더 이상 부자연스러운 게 아니라, 그런 사회적 시스템이 제대로 돌아가지 않은 것이 더 불편한 일이 되는 것이다. 왜 시모츠키 미카는 츠네모리 아카네를 의심하고, 그녀와 관련된 것을 찾으면서 시빌라 시스템이 꾸미고 있는 하나의 계획에 다가가게 된다.

 

그것은 분명히 카무이와 관련된 어떤 상관지점이 있고, 또한 그것은 정치적인 권력으로 통해 어떤 이익을 노린 것이다. 그 이익이란 바로 법 위에 군림하는 자 Nomos라는 점이다. 모든 인간은 평등한 이유가 바로 법이란 제도적인 체계가 있어서이다. 하지만 법이란 것은 스스로 움직이지 않고, 인간의 활동에 의해 비로소 그 체계가 반영되는 것이다. 법 위에 군림하는 자는 우리 일상생활에 쉽게 볼 수 있다. 길거리만 지나가도 보이는 경찰, 관공서의 공무원, 대통령과 국회의원은 더 말할 것도 없을 것이다. 그들은 헌법을 비롯한 다양한 법에 의해 활동하나, 그들이 법의 규정에 따라 움직이기 위해서는 법 위에 군림해야 하는 셈이다.

 

시빌라 시스템은 모든 인간들의 생활을 윤택하기 위해 만들어진 정치, 사회, 공안, 보건 행정이 복잡하게 섞인 것이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권력의 연속화, 즉 인간이던 자들이 인간의 조건이 되는 육체라는 껍데기를 버리고, 오직 뇌로서 활동하면서 인간 아닌 인간 이상의 존재로 되고자 했다. 시빌라 시스템에 의한 면죄체질은 바로 시빌라 시스템이 가할 수 있는 처벌을 초월한 존재이다. 즉 사회통제시스템을 초월한 존재이기 때문에 시빌라 시스템으로서 받아들일 수 있는 점이다. 이들은 공리주의라는 이념으로 활동하나, 그 이념 뒤에는 자신들의 우월성을 보통 인간에게 은폐하여 하나의 신화로서 작용한다.

 

시빌라 시스템은 완벽한 체계가 아니라, 완벽한 체계로 되도록 해야 하는 점이다. 그래서 강제적인 처리방식이 보이고, 그런 방식에 허점과 오류가 있다는 점이다. 그렇지만 그런 허점과 오류를 인정하는 순간 시빌라 시스템이 군중들에게 아주 우수하고 문제없는 체계라는 사실을 부정해야 하게 되는 것이고, 그 자체가 시빌라 시스템의 존재성을 부정하는 아이러니가 된다. 그런 점에서 <사이코 패스>를 프랑스8대학에서 언론정보 및 사회학자로 활동 중인 아르망 마틀라르의 <감시의 시대>를 보면 상당히 적용하기 좋은 말이 나온다. 기본적으로 제레미 벤담의 <파놉티콘>을 시작하여 미셀 푸코의 <감시와 처벌>로 이어지면 더 좋은 이 책에서 인용한 문구를 생각해봐야 한다.

 

① 법치주의와의 갈등은 민주주의의 야만화라는 가치 퇴행을 동반한다. "악"이란 규범에서 벗어난 의심의 논리는 공포에 대한 즉각적인 대응을 피하고 지속적으로 자신이 가한 처벌의 흔적이 지극히 정상이며 상식적임을 강조한다. 기능적인 의미와 국가이성에 반하는 모든 이는 가장 어둡고 의심스러운 부분을 연구하는 천재적인 능력을 지닌 비평가처럼 행동한다. 그들은 반복적으로 자신들의 행위를 되풀이하며, 이를 통해 형성된 역사적 시각은 최근에 벌어지고 있는 일들을 다른 각도에서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이례적으로 위급한 상황과 연결된 복잡한 관계에 대해 언급할 때 다른 방식을 찾는 것은 위기와 사회통제의 관계를 설명할 때 다른 방식을 찾는 것과 같다. 가장 먼저 여론에 대응하는 방식을 모색해야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례적인 상황은 설득, 억압, 캠페인, 프로파간다와 함께 움직이기 때문이다. 심리전 전문가가 규정한 '정신적인 전사'라는 용어로 설명한다면 신체의 통제를 함축한다.(페이지 6)

 

기본적으로 <사이코 패스>에선 집행관이 집행하는 과정에서 죄 없는 시민들이 테러리스트들에 의해 범죄수치가 급격히 증가한 점에서 원인자 문제에 대해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 단지 범죄수치가 높다는 이유로 무조건 살인을 합리화 하는 과정이 보인다. 그런 모습에 대해 일절 의구심을 가지지 않은 이들조차 국가의 정당성만 찾을 뿐이다. 이런 억압과 프로파간다적인 방법은 감시의 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다. 시빌라 시스템은 바로 민주주의 정치체계가 아니라 단지 공리주의 체계로 추구할 뿐이었다.

 

② 법률적 공리주의의 창설자이자 다수의 형벌제도 개혁안을 완성했던 영국의 철학자 벤담은 처벌법으로서의 형법에 대한 실용적인 이론의 연장선에서 파놉티콘 개념을 공식화했다. '파놉티콘'은 건축양식 중 하나로 원형 감옥을 말한다. 원형 감옥의 구조는 감방이 벌집처럼 들어차 있고 중앙에 감시탑이 있어 감시인이 한눈에 죄수들의 움직임을 완벽하게 감시할 수 있다. 반대로 감시를 당하는 이들은 타인과 분리된 채 개인 감방에 격리되어 자신을 감시하는 이들을 볼 수 없다. 이 같은 공간의 조직화 방식은 사회구조 전반에 관한 계획과 연결되어 일종의 유토피아를 건설하는 토대가 되었다. 벤담은 파놉티콘과 같은 이상적인 모델을 "일정 수의 사람을 감시하는" 기능을 지닌 기관이라면 그 어떤 예외도 없이 적용할 수 있다고 확신했다. 이는 수감 시설만이 아니라 학교, 고아원, 공장, 보호시설, 병원, 군대와 같은 감금 시설에도 응용할 수 있다는 말이다.(페이지 16~17)

 

감시의 대상은 학교, 공장, 병원, 군대, 감금시설이든 모두 마찬가지다. 시빌라 시스템에 의해 낙인이 찍힌 자들은 모두 격리수용시설에 갇히고, 그들에게 주어진 운명은 거기서 계속 썩을 때까지 살아갈 것인지 아니라면 감시관 감시 아래 집행관으로서 더러운 일을 하는 사냥개로 남는 것에 대한 차이다. 길가에 언제나 시빌라 시스템의 눈이 작동하고 있으며, 실시간으로 감시하여 사회적 비적응자를 배제하고 제거한다. 그것이 바로 <사이코 패스>에서 보여주는 안정된 세계다.

 

사회학자 노르베르트 엘라이스가 <서양의 문명사회와 관습>을 증명한 것처럼 ③ "내부적인 통제와 외부적인 통제의 왕래"는 점진적으로 "감정적인 삶의 제한과 규제, 즉 일종의 '자기통제' 혹은 '자기규제'에 의해 해석되는 예속화와 의존성의 강화"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그는 '합리화'란 "인간의 모든 심리적 체계를 일괄하는 변형의 다양한 측면 중 하나에 불과하며 자아와 초자아의 통제에 비해 결코 뒤떨어지지 않는 충동의 통제"라고 기술했다. 이런 심리적 자기통제를 변형시킬 수 있는 동력을 제공하는 것은 "상호 의존성, 인간 상호 관계의 집합 그리고 사회조직의 통합으로 이는 언제나 한정된 의미에서 행해지는 변화일 뿐이다."(페이지 17)

 

감시라는 것은 당연히 시빌라 시스템에 의해 통제되는 것이 아니라 통제와 감시는 그 사회의 전반적인 당위성이 되어 하나의 도덕과 정의로서 활용된다. 따라서 일반적인 사람들조차 모두 서로를 감시하고 통제하게 되는 눈이 된다. 뭔가 누군가 다르면 이상하게 여기고, 그 이상의 시선은 의심으로 변해버리며, 의심은 하나의 잠재범죄자로 보게 된다. 감시와 처벌은 단순히 감시자에 의해 움직이는 체계가 아니라 감시당하는 자까지 서로 감시해서 모두를 믿지 못하고 의심하게 만드는 정치공학적 방법이기도 하다. 타인의 눈에 의해 인간은 자신을 통제하고 스스로를 거기에 억지로 끼워 맞춘다. 문제는 이런 점은 법적인 제도에 의해 맞춰 가는 게 아니라 문화적인 흐름까지 인용되는 것이다.

 

생리학자 프란츠 요제프 갈은 인간과 기능과 성향은 모두 인간 내부인 두뇌에서 찾을 수 있다고 했는데, 그는 두개관찰법으로 통해 두개골 두피표면을 조사했다. 그가 조사한 인간들의 두뇌는 감옥, 보호소, 구제원, 고아원, 군대 같이 시체를 손쉽게 구하고 실험할 수 있는 장소였다. 그가 두개골을 관찰하여 두뇌의 소유자의 성격을 파악할 수 있다는 골상학을 정립하였다 ④ 같은 두개골 관찰로 통해 인간에게 27가지의 기능 혹은 27개의 핵심적인 기관이 존재하며 이들의 위치를 파악할 수 있다고 추론했다. 여기에는 결혼에 대한 성향, 살인에 대한 성향, 소유에 대한 성향, 비축하고 저장하려는 성향, 절도 성향, 형이상학적 정신과 영혼의 깊이와 관련된 기관, 정의와 비리의 감정, 선과 시정을 관할하는 융기부, 헌신의 기능 혹은 새로운 현상을 수용할 수 있는 타고난 능력, 확고부동함과 관련된 기능, 참을성의 기능, 인내심의 기능, 완강함의 기능 등이 있다. 갈은 그가 완성한 새로운 규칙은 단순히 인간 자체에만 그치지 않고 의학적 연구, 도덕, 교육 그리고 입법에 대한 이해를 구하는 것과 관련이 있다고 확신했다. 그리하여 그의 규칙은 훗날 형법 개혁에 일조하게 된다.(페이지 21~22)

 

<사이코 패스>에서 처음 인간의 심리를 체크할 수 있는 기계를 만들어내는 시점은 어디일까? 분명히 작품에서 언제 어디서부터 라기 보단 단지 과거 베테랑 형사 마사오카 젊은 시절에 없었던 시빌라 시스템이란 점에서 감시체계가 사회적으로 적용된 시기는 작품 내에서 20년 내외라고 보면 될 것이다. 그런 점에서 초반에 어떻게 하면 인간의 심리를 확인할 수 있는가? 도미네이터의 눈으로 본다면, 인간의 범죄수치를 찾아낸다는 것은 상당히 초과학적인 기술력이 필요하다. 인간의 내면이 얼마나 불안하고, 그의 심리적인 요소에서 무의식적인 요소까지 들어가야 하기 때문이다.

 

동공과 맥박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이라면 모르지만, 뭔가 불순한 생각이거나 불안하다면 뇌에서 분비되는 호르몬 내지 뇌의 활동범위가 스캐너의 검사대상에 해당되는 것은 분명할 것이다. 그렇지만 그런다고 해도 인간이 침착한 상황에서 범죄를 계획하는 것이라면 상당히 난해한 부분이다. 시빌라 시스템에서 인간의 통제를 할 수 있는 것은 결국 이미 인간의 유형별 데이터가 모집된 점이고, 그런 데이터에 의해 적용되거나 판단될 수 없는 자들이 이레귤러이고, 그들은 시빌라 시스템에서 처리가 불가능하기에 시빌라 시스템의 일원으로 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들이 선택점은 바로 골상학의 시작지점처럼 통계수치화 되지 않은 인간이므로 시빌라 시스템은 바로 골상학이 시작한 통계에서 시작된 것이라 볼 수 있다.

 

⑤ 범죄수사를 목적으로 생체측정기술이 최초로 적용되면서 이 같은 생각은 집단에게까지 확대 적용되었다. 1885년 로마에서 열린 국제교정학회에서 프랑스 법무부 소속 교정 시설장은 "개인등록증"처럼 개개인의 인체 측정 정보가 담긴 "신분증명서" 발급을 옹호했다.(페이지 23) 7년이 흐른 뒤, 브뤼셀에서 열린 국제범죄인류학회 참석자들은 "단지 재범자의 신분 식별을 위해서만이 아니라 개인의 신분을 빠르고 정확하게 검증할 수 있게 만든다는 점에서 전 세계 모든 국가에서 인체 수치 측정 수치 시스템을 도입하고 보편화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바람을 드러냈다.(페이지 23)



문제는 이런 감시체계가 반드시 <사이코 패스>에만 적용된 게 아니라 이미 19세기부터 인간의 감시를 위해 체계적으로 이용되었다는 점이다. <사이코 패스>만 인간을 스캔한다고 해서 현실적으로 기술이 부족해도 그에 버금가는 사회적 구조는 분명히 존재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결국 이런 것을 해서 누가 이익을 보는 것인가? 경제적으로 자본주의와 정치적으로 관료주의와 만날 경우 공동적인 카르텔을 형성하게 된다. 관료들은 기술로서 국민을 통제하고, 기업은 그 통제로 통해 상품을 판매하거나 특혜를 가지며, 그 이익을 관료들과 분배하는 것이다.

 

가령 지리학적으로 길가의 도로가 계속 정비되고, 구획이 일정하게 되는 것은 그만큼 길가의 시민들의 통제가 쉽고, 교통의 통제가 쉽다는 것이다. 복잡한 길이라면 교통의 통제범위에서 벌어지고, 감시대상자들도 쉽게 놓칠 수 있다. 그리고 거리가 구획이 되면서 기존 살던 사람들은 퇴거된 후에 새로운 건축물이 올라가고, 도로가 확장된다. 거리는 차를 가진 자들이 편안하게 다니고, 백화점과 상가에는 좋은 상품이 많이 올라온다. 골목안의 가난한 자들은 집을 잃고, 재래시장의 소멸로 생계를 위해 계속 변두리로 이동하게 된다. 그리고 변두리에 거대한 건물인 아파트 안에서 집단으로 거주하게 되어 같이 옆에 있어도 서로 분리된 존재로 각인한다.

 

감시와 통제는 최종 목표는 모든 것을 감시자로부터 감시할 수 있는 기술과 체계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감시당하는 자들이 서로 감시하여 사회적 구조를 계속 유지할 수 있게 만드는 것이다. 영화 <이퀄리브리엄>에서 보이는 세계관은 마치 조지 오웰의 <1984>와 유사해 보인다. 서로를 감시하고, 어떤 감정이나 특이한 행동을 하지 못하도록 하며, 만약 한다면 내부고발로 통해 그 사회에서 제거된다. 속전속결로 제거되는 감시사회에서 가장 좋은 감시체계는 내부의 감시다. 사생활의 영역은 감시의 한도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개인적 경제활동과 교통상황을 알 수 있는 것이란 내부의 감시를 더 초월한 감시를 할 수 있는 것이다.

 

내 옆에 있는 사람이 평소 무엇을 하는지 우리는 심각하게 관찰하지 않는다. 만약 그것을 관찰하여 확인할 수 있다면? <감시의 시대>에서 테러리스트 검거에서 수만 가구의 세금납부 현황을 통해 찾을 수 있다고 한다. 카드로 결재하거나 또는 계좌이체 하는 사람 이외 누가 현금으로 결재했는가? 그리고 그 결재대상자는 얼마나 자신의 집에서 거주했는지, 금액은 어느 정도까지도 생각할 수 있다. 정상적인 직장인이라면 같은 규격의 집에 거주하는 사람과 지불하는 금액이 유사할 것이나, 특이하게 높거나 낮다면 의심이 강하다. 다행히 검거대상자는 테러리스트이겠지만, 하다못해 독재자나 군부정치가 심한 곳이라면 분명 암울한 사회가 되지 않을까 하다. 감시대상자가 특정 범죄자가 아니라 불투수 대다수의 인간이라면 그것만큼 위험한 사회가 없을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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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의 공주와 잊지 못한 상처 - 요희전기 3, Novel Engine
크레파스 지음, Mx2J 그림 / 영상출판미디어(주)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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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희전기 3번째인 <물의 공주와 잊지 못한 상처>를 보며 1권과 2권이 달과 불의 공주인 점에서 다시 공주라는 인물이 메인 표지 일러스트로 등장했다. 그 인물은 수향의 이사장 외동딸인 수희, 전형적인 자본력의 토대가 되는 화폐의 운영으로 움직이는 나라다. 이곳은 왕은 대주주이며, 모든 자본가보다 더 많은 나라의 주주를 가지고 있다. 단지 일반적인 부르주아와 다른 점은 <불의 공주와 반성하는 용병>에서 보여준 것처럼 수향의 이사장은 다른 곳에 망명하면서 치사하게 혼자만 몸은 보전하려고 한 게 아니라 가난과 고통 안에서 사라져간 것이다.

 

그렇다면 그는 한 나라의 군주로서 충분한 책임감을 느끼고, 화선으로부터 침공당한 수향을 위해 스스로 힘든 길을 선택했다. 그리고 그의 딸인 수희는 아버지의 유지를 받아 수향을 위해 월린과 유하와 손을 잡게 되었다. 동맹을 임시를 맺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역시 동맹 이후에 진행되어야 할 상황 전개다. 지나칠 만큼 강한 화선의 공격 아래 무력한 월하의 게릴라전은 이미 의미 없는 것처럼 되었다. 화선의 왕자이며 유하의 라이벌인 태화는 마음만 먹는다면 충분히 월린과 월하를 멸망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고, 자신의 행동들에 대해 자신이 살아남기 위한 행동이라 한다. 일부러 모조리 죽이지 않고, 자기 진영에 빈틈을 만들어 서로 대치하려는 이유는 무엇인가? 작가의 스토리설정에서 숨은 복선과 플롯은 드러나지 않겠지만, 전반적으로 화선이란 국가를 보면 내부적으로 권력다툼이 매우 심한 곳이란 점이다. 요희전기 2권 별권부록에 나온 꽃의 나라에 온 황비와 그녀의 아이가 무참하게 살해당하는 장면이 나온 것이다. 둘 다 아무런 힘도 없었고, 그저 가만히 인형처럼 살아가는 존재였다.

 

그녀들의 죽음은 화선이란 국가가 얼마나 많은 권력이 뒤에서 움직이고 있는지 알 수 있다. 단순히 황제와 황제의 자제인 황녀와 황자만의 다툼만이 아니다. 그 뒤에서 움직이는 세력들 스스로가 알아서 권력다툼에 참가하여 원하지도 않은 죽음을 만들어낸다. 그런 세계에 있으려면 보통 사람의 정신으로 견딜 수 없다. 그 잔혹한 타성이 길들여져 같이 파멸 속으로 달려가거나 또는 거기서 나올 수밖에 없다. 아니라면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면서 자신의 현재 위치를 지키며 어둠의 타성에 빠지지 않게 살 수밖에 없다.

 

화선의 황자인 태화는 그런 존재인 것 같았다. 아무런 표정 변화 없이 냉정한 그의 군사작전은 천재소녀인 유하 이상으로 능력을 보여준다. 월린이 있는 월하국가와 대립으로 그가 얻는 것이 살아가는 것이라니, 살아가기 위해 싸운다는 말은 결국 그에게 어떤 운명적인 흐름에 몸을 담아가는 셈이다. 그래서 월하에 최고의 전사인 산신의 반응은 재미있다. 산신이란 자신의 의지가 아니라 주변에 위치한 기의 흐름에 따라 움직이는 존재다. 바로 흐름에 따라 움직이고, 그 흐름에 따라 상황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문제는 그 흐름을 누가 만들어내는 것이다. 자신의 국가일 수 있고, 타국의 존재일 수 있다. 화선의 황자 태화는 바로 자신들이야말로 화신이고, 화신은 산신처럼 흐름을 따라가는 게 아니라 흐름을 만들어내는 것이라 한다. 흐름을 만들어내는 것은 결국 정체된 상태에서 멈추어진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유동하기 위해 만들어내는 것이다. 그 흐름을 만들어내는 것은 기존에 멈추어진 큰 벽이 있다는 뜻이다. 화선의 황자는 남들이 모르게 큰 계획을 꾸미는 것이다. 억지로 월린과 유하를 곤경에 빠뜨리고, 그러면서도 바로 죽이지 않고 그냥 내버려 두기도 한다.

 

단지 그의 계획에는 흑록과 큰 관계가 있다. 또한 유하가 왜 그렇게도 흑록에게 집착하는 이유도 뭔가 숨어 있다. 흑록은 분명 월하에서 태어난 사람이나, 월하가 망하면서 그의 고국을 등졌다. 그렇지만 그가 등진 것은 사실 국가만 아니라 또 하나가 있었다. 바로 동생의 존재였다. 태화는 흑록에게 흑록의 동생 흑비가 자신의 옆에 있고, 그녀는 완벽한 화신이라고 한다. 화신의 존재에서 흑비는 과연 무엇을 위해 이 전란의 중심에 위치하게 되었는가? 단순히 3권은 그런 새로운 상황만 암시해주고 막을 내린다.

 

이런 상황을 정리하면 전체적인 흐름 화선으로부터 수향의 권력을 되찾기 위해 주주총회를 열고, 주주총회 과정에서 시량의 방해, 그리고 계속되는 대립, 그 와중에서 주주총회의 패배, 그렇지만 단순히 태화가 노리는 것은 월하를 이기려는 것이 아니라 월하가 화선과 비등하게 싸우게 만드는 것이다. 문제는 국가적 차원, 정치적 상황에서 간단해 보이는 공식이 성립되나 그 상황에 놓여있는 인간에게 간단하지 못한 것이다. 국가라는 것은 눈앞에 당장 보이는 게 아니라, 그 국가조차도 인간에 의해 움직이는 것이다. 인간의 활동에서 국가 그 자체가 관념적 존재에서 하나의 생명력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전쟁에서 국가의 생명력을 유지하기 위해서 그 국가의 사람들은 희생될 수밖에 없다. 많은 군인들은 전투 중에 무참하게 사라져 가버린다. 그래서 잊지 못할 상처란, 흑록만 그런 것만이 아니라 월하에서 활동하는 전장지휘관 휘 역시 마찬가지다. 그는 매우 힘든 전투상황에서 군사 반 이상을 탈환하여 무사히 퇴각했다. 퇴각에서 그는 많은 병사를 살릴 수 있었지만, 그는 양심의 가책에 시달린다. 그의 선택은 결코 남을 살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이 살아남기 위해서였다.

 

지시하는 과정에서 실제 그곳이 함정인 줄 알면서도 부하에게 가라고 명령하거나, 또는 그 과정에서 위험한 것임을 알면서도 거짓말을 하여 상황을 타파해 나갔다. 자신과 많은 군인들은 살아왔지만, 대신 누군가를 희생하게 만든 셈이다. 전쟁에서 누군가의 희생은 피할 수 없는 숙명이다. 그러나 그 레퀴엠을 울리게 만들 상황에서 지휘관으로서 휘는 자신의 모습을 좋아할 수 없는 것이었다.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자족감, 즉 자신에게 대한 만족하는 것이다. 그 만족감은 타인으로부터 인정받기 위해서는 어떤 성과로 나타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휘는 그런 성과를 내면서도 자신의 기만적 행위에 스스로 만족하지 못했다.

 

휘의 죽음으로 살아난 흑록은 그런 기분을 알고 있었다. 살아남는 것은 중요하나, 그런 삶이란 행복과 동시에 허무함과 후회로 가득하여 복잡한 심정이 되게 마련이다. 흑록이 가진 그런 허무함과 순간적인 위기에 놓인 생존본능, 인간은 자신의 무력한 현실 앞에 지루함을 느끼고, 그것을 타파하기 위해 죽음의 경계로 간다. 죽음의 공간이 펼쳐지기에 인간은 자신이 살아있음을 느끼는 경우가 있다.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역시 자신에 대한 삶의 의지가 없다는 점과 그 의지가 없다는 점은 자신이 좋아하는 것이 없다는 것이다.

 

지루한 일상이 되어버린 이유는 자신에게 한가한 평온함이 상실된 셈이다. 요희전기 2권에서 유하와 사이가 서먹했던 흑록의 모습은 자신이 언제나 혼자라는 생각에 빠져 있어서이다. 휘의 죽음에서 자신만 살려던 휘의 과거에서 휘는 후회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후회가 상처가 되었고, 타인과의 관계를 더 나아갈 수 없는 벽이 된 것이다. 전쟁이란 인간을 극한의 상황과 위기를 주며, 극단적 인간을 보여준다.

 

거기서 망가지거나 망가지지 않거나, 망가지더라도 단지 어떻게 망가져 가서 최후가 어떻게 되는 것일까 라는 것이다. 전쟁이란 많은 인간들을 비참하게 만들어내는 재앙 중에 재앙이다. 그런 재앙에서 인간은 본연의 모습이 드러나게 된다. 그런데도 전쟁을 계속 원하는 자는 있고, 그 전쟁을 계속 유지하여 상황을 자신에게 유리하게 만들어 내는 자도 있다. 그 안에서 흐름을 따라가는 산신이나, 그 흐름을 만드는 화신이나, 또는 거기에 사라지는 인간들의 운명은 결국 불행이란 것을 알면서 그 속에 빠져드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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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석 교수의 <서사철학>이라는 도서가 있다. 인간의 존재에서 철학은 인간에게 본연을 묻기 위한 하나의 과정이며 방법이다. 그래도 철학이란 것은 있어도 살 수 있지만, 없으면 살아가는 게 조금 어려워진다. 인간의 세상이 아무 생각 없이 그저 동물화되어 살아가게 될 경우 어느 순간 자신의 존재감이 하나의 타인으로 되어 버린다. 결국 인간은 자아라는 자신의 인격과 개념에서 탈피하여 자신이란 존재를 하나의 군중 내지 집단에 파묻혀서 더 이상 자신의 존재로서 자신을 드러내지 못하는 것이다.

 

철학이란 것은 자신의 본질적 관계와 더불어 세상의 관계까지 사유하게 된다. 19세기 사회경제학자 카를 마르크스와 프리드리히 엥겔스는 철학은 세상에 대해 원리를 밝혀내질언정 세상을 바꾸지 못하는 것에 대해 지적했다. 철학이란 것은 보편적인 인간의 법칙을 찾아내는 점에서 탁월한 학문이다. 그러나 철학 그 자체가 세상은 바꾸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그래도 세상을 움직이기 위해서는 먼저 세상에 대한 법칙을 알아야 하는 것이 우선이다.

 

프랑스혁명에서 장 자크 루소의 <에밀>, <사회계약론>, <인간불평등기원론>이 기본 베이스가 되었듯이, 그 책 자체가 하나의 혁명을 하자는 의미가 들어있기보다 혁명을 하는 원인에 대한 해답을 찾기 위한 하나의 답변서인 것이다. 물론 루소의 서적들은 18세기에 완성되었으나 아직까지 21세기에서 통용될만큼 매우 탁월한 도서이다. 그런 점에서 <용사가 되지 못한 나는 마지못해 취직을 결의했습니다>는 장 자크 루소의 <인간불평등기원론>에서 제시하는 불평등의 2가지가 모두 나타난다.

 

작품 자체에 큰 철학적 요소나 탐구에 대한 정신은 없다. 그저 그 작품에서 보편적으로 보이는 모습에서 불평등 요소란 바로 마왕의 딸인 피노와 영웅지망생인 라울의 관계부터다. 마족의 정점인 마왕 후보생과 인간의 정점인 용사 후보생이란 이분법적인 요소에서 <인간불평등기원론>에서 제시하는 태생적인 문제인 인종, 성, 나이 등과 같은 불평등이 발견된다. 그리고 2번째 불평등은 사회적인 위치에서이다. 마왕의 패배와 더불어 마족인 피노는 하나의 은신자가 되어 인간세계에 온다.

 

마족으로서 활동하기 보다는 인간세계에서 하나의 인간으로서 활동하는 피노는 마왕의 패배와 더불어 모든 지위나 조건이 박탈된다. 결국 피노는 하나의 실직자 내지 사회부적응자로 된 것이다. 시작은 인종적 부분에서 시작된 것이나, 종착지는 업체에 소속된 직원으로 되었다. 물론 작품 중간에 마왕의 몰락으로 인해 실업자가 되어버린 용사 내지 용사에 대한 상품을 제조하는 사람들은 실직 내지 많은 이익을 잃게 된다. 그래도 피노와 라울의 입장에서 보면 매직 상점에서 일하는 직원이란 점이고, 그들의 경쟁사는 아이리가 근무하는 아마다 상점과 경쟁구도로 가게 된다.

 

여기서부터 국부론과 자본론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제일 처음 나온 것은 자본론이다. 마법상점에 비해 아마다 상점의 상품은 생각보다 가격이 매우 저렴하다는 점이다. 가격의 저렴함이 어디서부터 나오는 것인지 생각하면 작품 중간에 아마다 상점의 상품을 공급하는 공장에서 알 수 있다. 마족과의 전투 이후 패배한 마족 중에 하위 몬스터들은 공장에서 근무하게 하는 것이다. 상품의 가격에서 제일 중요한 3가지 가격요소는 원자재, 생산설비, 그리고 노동력이다. 추가로 더하자면 운영경비(물, 전기, 세금 기타 경비 및 잡비) 및 운송수단이겠으나, 최초로 제품이 생산되는 과정으로 보면 제일 중요한 것은 역시 원자재, 생산설비, 노동력이다.

 

아마다 상점에 공급하는 공장에서 터문 없는 가격으로 원제품을 생산하는 바람에서 아마다 상점에서 판매하는 상품들의 가격이 모두 저렴하게 판매되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 가격의 요건을 다룰 수 있는 부분은 무엇일까? 가령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가전제품에 들어가는 재료를 생각하면 유리, 플라스틱, 나무, 철, 구리, 알루미늄 등과 재료를 사용한다. 어떻게든 기술이 좋아지나 나쁘게 되더라도 기본적인 틀 안에서 같은 사양을 시판할 경우 재료의 선택차이점은 별로 바뀌지 않는다는 점이다.

 

여기에 생산설비에서 공장에서 운영하는 제조시스템을 1번 교체하는데 필요한 예산과 기간은 막대하다. 그러므로 1번 생산설비를 갖추게 되면 시스템의 물리적 내지 프로그램 수명이 유효할 경우 끝까지 사용할 가능성이 높다. 공장에서 가장 높은 비용을 차지하는 것은 기본적으로 건축물을 세우기 위해 필요한 토지, 그 토지 위에 올리는 건축구조물 및 설비, 그리고 공장 안의 제조시스템이다. 하지만 제조시스템의 경우 그 역시 하나의 생산품 이전에 사업자에게 큰 자본지출 사항이다.

 

그렇다면 원재료와 생산설비의 구비에서 더 이상 사업자의 주머니에서 지출을 절감할 수 있는 방법은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면 남은 것은 오로지 노동력이다. 아마다 상가에 상품을 공급하는 공장에서 노동하는 존재를 보면 기존에 분명 사람이나 혹은 지능이 높은 마족일 가능성이 높을 것이다. 하지만 어느 순간 단순작업에 얼마든지 투입이 가능한 하급몬스터였다. 이들은 단순한 지능에서 반복적인 노동에서 임금지불이 아주 저가이거나 혹은 지불하지 않을 정도로 노동을 착취한다.

 

반복적인 장시간 노동으로 하급몬스터들은 견디지 못하여 쓰러지는 모습이 나오는데, 전형적인 장시간 노동으로 인한 육체적 과로로 인한 생리적 현상으로 볼 수 있다. 하급몬스터의 노동착취 모습에서 분명하게 카를 마르크스의 <자본>에서 밝히는 생산수단이 나온다. 가격의 조정이 가능한 것은 바로 노동력의 착취라는 점이다. 하급몬스터라는 정신수준 이하의 생물을 착취한 만큼 당시 19세기 유럽에서는 어린아이들이 많은 노동에 시달렸다. 아침 8시부터 저녁 8시까지 12시간은 기본이고, 심지어 새벽까지 넘을 때도 있다. 연속 20시간도 있었으며, 중간에 밥조차 제대로 먹을 시간도 없다.

 

이와 반대로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적인 요소는 피노가 월급을 타고 나서이다. 피노가 자신이 일하면서 다른 사람들에게 이익을 주고, 행복을 줄 수 있으므로 일을 하는 것, 즉 노동하는 게 좋은 일이라고 한다. 나는 분명 나의 이익을 위해 혹은 가게의 이익을 위해 일을 했으나, 그 결과 다른 사람에게 이익이 가는 것은 결국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에서 나온 말이다. 내가 빵을 만들어 파는 것은 나를 위한 것이지만, 타인에게 이익을 주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런 경제적 활동에 따라 빵을 사고 파는 자에게 이익이 가고, 국가적으로 상업적으로 활발하여 부가 축적되는 것을 설명한다.

 

문제는 자유경제주의자들의 원전인 <국부론>은 그 경제적활동이 서로간의 도덕적인 조건과 더불어 공정한 거래가 성립되어야 한다고 했다. 가끔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조차 읽지 않은 자칭 시장자유경제주의자들의 비논리적인 상식이란 바로 공정한 거래와 도덕적 관계의 성립이란 점이다. 물론 <용사가 되지 못한 나는 마지못해 취직을 결의했습니다>에서 그런 철학적 관계를 다루지 않을 것이란 점은 분명하다. 라울이란 용사 옆에 마왕의 딸 피노 외 다수의 미소녀가 얽히는 하렘구조에서 그런 심도있는 내용은 깊이 전개할 리가 없다. 하지만 그런 소재가 에피소드에 나온 만큼 "국부론이냐? 자본론이냐?"이란 담론은 성립할 수 있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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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에 <한가함과 지루함의 윤리학>이란 책을 보았다. 지금 나는 한가하지 못하고, 일을 해야 하는 막중한 압력감에 오히려 지루함으로 가득하다. 지루함으로 가득한 이 세계에서는 인간의 자유란 존재하지 않는다. 하루 일과 시간조차, 그리고 잠자는 시간조차 그 하루일과를 위해 우리는 맞추어야 한다. 물론 인간은 동물적인 요소로서 낮에 활동하고, 밤에 수면을 취하는 게 정신적, 육체적으로 좋은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우리는 잠을 자는 시간이든 아니든 집에 가면 언제나  TV 앞에 멍하니 보고 있을 경우가 많다.

 

TV를 보는 이유는 단지 그 TV에서 어느 방송프로그램이 방영되고, 그것을 우리는 보는 것이 당연하기 때문이다. 여가생활조차 하나의 정당화된 획일화된 양식, 취미나 취향 따위는 가장 진부한 이야기 거리 중에 하나다. 개인적으로 나는 이런 부류들의 고상한 척이 가장 싫다.

 

우리는 상대방의 직업과 연봉을 묻는 것은 속물적인 유형으로 분별된다. 그저 뭐하는지 것으로 직업적 현재만 아는 것으로 단순히 이 사람의 사회적 위치만 알 뿐이다. 그렇다면 남은 소재는 문화적인 자본, 즉 취향과 취미다. 내가 가장 싫어하는 말이 나는 음악을 좋아하는데, 영화를 좋아하는데 거기서 마치 고상한 것처럼 무슨 수준있는 것처럼 행동하는 것이다.

 

가장 싫어하는 인간들은 최신에 나온 영화와 대중가요를 찾아다니면서 부지런히 자기 생활을 투자하는 부류다. 요새는 뭐가 좋고 전에는 이래서 그렇고, 평론가적인 지식과 교양은 눈꼽만큼 없으면서 마치 있는 것처럼 말하는 부류, 이 글을 보는 당신은 그런 사람들을 보면서 뭐 그리 아냐고 하겠지만, 이 글을 보는 당신들이라고 피하기는 어렵다.

 

그리고 취향과 취미로 수준높기보단 비판적인 독설로서 공격적인 글을 적는 나라고 하여 비판의 대상에서 피하기란 어려운 것은 안다.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드는 이유는 보고 듣는 것은 다르지만, 결국 그 안에서 돌고 도는 지루함이 보이기 때문이다. 영화를 예를 들어보자. 영화 좋아하는 것에 대해 나쁘지도 않고, 그것에 취미를 두는 것은 나름 자기 생활의 에너지다. 문제는 그것을 보고 대단하거나 놀라운 것에 대해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 작품이 그래 대단하고 잘나서 보는 것에 대해 왈가불가할 게 못 된다. 단지 그것을 보고 자신이 마치 문화인양 착각하는 것이 짜증날 뿐이다. 최근 한국에서 <명량>이 흥행했을 때 나는 보지 않았다. 안 봐도 비디오, 국가위기와 국민통합이란 전형적인 이데올로그만 담론되어 있는 작품은 예술로서의 영화가 아니라 그저 미디어로서 경제적, 정치적 이익만 뭉친 잡동사니다.

 

최근 <인터스텔라>가 흥행하면서 어느 신문기사에서 놀란 감독이 놀란 하는 글귀를 보았다. 이 작품에 대해 옆에 계신 분들에게 들어서 나름 흥미롭고 과학적인 요소를 많이 반영하여 SF영화로서 완성도 있는 것은 분명하다. 단지 걱정인 것은 영화의 흥행이 그 나라의 문화수준인 것처럼 혼자서들 자위하는 인간들이 넘칠 게 분명할 것이란 나의 부정적인 사고방식이다. 

 

수준 높은 영화를 즐겨 찾아라는 슬로건에 왜 수준이 높은지에 대해 제대로 밝힐 인간은 없다. 단지 보았고, 계속 다른 신작들만 찾아 떠나는 부류는 결코 수준이 높은 게 아니라 자신의 시간을 거기에 보낼 뿐이고, 남들이 보니깐 볼 것 같으니깐 거기서 떨어지기 싫어서 계속 핑계 아닌 핑계를 대고 있다.

 

다르게 생각하면 영화흥행은 그래 높으면서 왜 우리 영화는 외국에서 흥행이 되지 않은걸까? 국내에서 성공하지 않은 작품들이 프랑스나 유럽에서 상을 받고 다닌다. 이게 바로 대중문화 현실 속에서 보이는 문화의 수준인 것이다. 유향의 시대에 소비만을 추구하는 부류는 대다수고, 대다수의 가치는 하나의 도덕이 된다. 니체가 그런 인간들에 대해 일침을 가한 이유는 다수의 인간들의 가진 판단된 옳든 그릇되어 버리든 그들 자체에게 중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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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언제부터 지루해했을까? - 한가함과 지루함의 윤리학
고쿠분 고이치로 지음, 최재혁 옮김 / 한권의책 / 2014년 10월
평점 :
절판


우리 삶에서 가장 아이러니하면서 단순명료한 것이 인생이란 것이다. 내가 그 누구에게 물어본다. 당신은 무엇을 위해 살아가고, 무엇을 위해 지금 그 어떤 것을 하고 있는가? 구체적인 활동으로 본다면 학생이라면 공부를, 직장인이라면 일을, 백수라면 직장인이 되기 위해 애를 쓰고 있을 것이다. 이렇듯이 우리는 항시 무엇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위치에 놓여 있고, 그 위치에 있으면 다시 새로운 목표가 드러나는 것처럼 보이나, 그 목표의 굴레 안에서 계속 회전하고 만다. 우리의 인생은 빌딩 건물 안에 들어갈 때 자동문으로 들어갈 수 없거나 혹은 손잡이가 있는 문을 열고 들어가기 어렵다.

 

360도로 회전하는 회전문 안에서 투명유리로 너머 보이는 출입구 안만 보다가 다시 계속 돌고 돈다. 왜 우리는 이렇게 살아가는 것일까? 그래서 위에서 삶이란 무엇인지 생각하면, 결국 인생은 어떤 것인가라는 철학적인 요소로 가게 된다. 하지만 대부분 사람들은 자신만의 정의를 내리기 쉬워도 그 정의에 대한 과정과 흐름을 이야기하기 힘들다. 즉 결과로서 보여주는 것을 생각해도 그 결과 안에서 진행된 프로세스나 구조적인 부분을 생각하지 않는다. 가령 최근 내 친구와 통화하면서 있은 일이다. 내 친구는 자영업자이고, 나는 월급쟁이다. 내 친구는 요새 경기가 어려워 장사가 되지 않는다고 하고, 나는 그 원인을 두고 과소소비에 대하여, 물가의 증가에 대한 인플레이션, 그 원인은 화폐의 유통이 지나치고, 특히 부동산이 근본적으로 심하다고 했다.

 

지대가 오르면 물가가 오르고, 세를 들어가는 사람들은 지대의 상승만큼 이익을 내야하며, 그 이익이 결국 소비자로부터 나오나, 지금 경기가 좋지 못함이 연쇄적으로 나온다고 했다. 그런 나의 분석에 너무 그런 쪽으로 가지 않고, 복합적이지 않느냐에 물론 그것을 염두하다고 있다고 했으나, 적어도 내가 주장하는 논리는 너무 협소하고, 너무 어렵다는 것이다. 복합적으로 다양한데, 그것을 어떻게 명료하게 나올지에 대해 혹은 그런 거시적인 요소에 눈을 두는 것보다 미시적인 게 옳지 않느냐고 이야기 들었다. 거기에 대하여 내 친구도 알겠지만, 개인이 사회를 바꾸지 못하나, 사회는 개인의 영역을 침범하여 바꿀 수 있다고 이야기했다.

 

이런저런 이야기하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이런 문제에 대한 근본에 대해 보통 사람들은 생각하지 않는 점과 이렇게 구조적인 분석을 들어가면 이해하기 어렵고, 제대로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는 점이다. 물론 그런 조건을 생각하면 사실이고, 한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개인의 이익을 위한 전체의지가 하나의 당위성을 만들어내지만, 사회적인 재화와 화폐에 대한 수요자로서 찾아가는 사람은 결국 한정적으로 될 뿐이다. 국가의 운영에서 세금의 부족에 따른 세수의 증가, 소비세 증가에 따른 부가가치세 증가, 그로 인해 이득을 보는 기업들, 과연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현실을 보고 판단해야 하는가?

 

우리는 생산자가 아니라 소비자로서 요약하여 말하자면 소비의 사회에서 살아가는 인간이다. 우리가 소비하며 살아가는 이유는 바로 우리가 바라는 만족을 위해서다. 그 만족감에서 누군가 이런 곳에 가고, 이런 상품을 사고, 이런 것을 보지만, 이에 달리 다른 자는 그렇지 못한다면 그로 인한 소외감을 느낄 것이다. 그리고 계속되는 새로운 상품과 기호의 소비는 언젠가는 자신의 경제력과 시간조차 갉아먹는 해충이 되어버릴 것이다. 이게 바로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때까지 경제학적인 고찰과 사회구조적인 요소, 더 나아가 친구와 있었던 일과 개인에 대한 생활과 삶에 대한 인생고민, 전혀 고리가 이어지지 않을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문제는 이어져있으며, 충분히 우리는 조금 더 심각하게 고민할 필요가 있다. 위에서 학생이 공부하는데 왜 공부하는지 물어보면, “좋은 대학교 가려고요”, 좋은 대학가면 무엇이 좋은데 물어보면, “좋은 기업에 취업해서 돈을 많이 벌 수 있으니까요”, 그러면 그 돈을 벌면 무엇을 할 것인가? 라고 묻는다면, “그 돈으로 친구와 재밌게 놀거나 여행하거나 사고 싶은 것을 사려고요.”라고 할 것이다.

 

물론 그 중에 결혼이나 가족을 위한 여러 가지 목적들이 있을 것이나, 결국 우리는 즐거움 인생을 위해 일을 하고 공부하고 살아가는 것이다. 살아가는 것은 곧 죽어가는 것이다. 살아가는 시간만큼 우리는 죽어가고 있는 것이며, 그 죽음이 없다면 살아있다고 말할 수 없다. 그 종언의 종착점이 있기에 우리는 시작점이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그 과정의 연속에서 우리 시간은 매일 24시간이란 물리적으로 공통된 조건이 부여된다. 그런다고 모든 사람이 그 24시간이 같게 살아가는 것은 아니다.

 

아침 일찍 우유배달과 신문배달을 하는 사람과 밤늦게까지 커피숍에 일하는 사람, 심지어 술집아가씨조차도 다 24시간을 주어져도 전부 다른 24시간을 살아간다. 우리에게 부여된 시간 각각 다르기에 우리는 다른 인생을 살아가고, 거기에 따른 자신의 삶을 꾸며가는 것이다. 문제는 우리의 삶에 대해 만족하고 있는지? 아니라면 만족하지 않고 불행한지 물어본다면 과연 어떨까? 나는 기본적으로 회의적인 자연주의자에 가까운 인간이라 지금의 삶이 행복하냐고 물어본다면 행복하지 않다고 할 것이다.

 

이에 대해 밥을 굶는 사람, 전쟁에 고통 받는 사람에 대해 나와 비교하면 참 어리석을 것이다. 사람의 행복의 기준을 그렇게 극단적인 요소에 비교하는 것 자체가 자신의 극단적 요소를 보여주는 것이고, 비교한다면 대기업 총수 2세 내지 3세 역시 비교한다면 그럴 말을 하는 사람도 기가 찰 것이다. 누구나 자시만의 논리가 있지만, 과학적이고 객관적인 논리로서 다가가면 납득을 하기란 어려운 법이다. 내가 한국 경제문제, 그리고 해외 정치현황을 논해도 사람들에겐 그렇게 피부로 와 닿지 않는다. 단지 자기 입맛에 맞는 이야기다. 물론 나도 그럴 것이나, 적어도 그 입맛 맞는 이야기에 대한 근본을 찾아가기 않는다.

 

그래서 강신준 교수는 한국은 포스트모던이란 시대를 살아가더라도 그 과정이 되어야할 모던의 시대는 제대로 거치지 않았다고 한다. 모던적인 요소, 즉 계몽주의에 대한 한국의 접촉 기회는 없다. 계몽주의 정신은 지식인으로 한정되고, 그 지식이 뿌리 내려 퍼지기 전에 이미 모든 주관이 객관이 되는 포스트모던이 되었다. 극우성향이 비윤리적 사이트조차 자신의 목소리를 높여 하나의 당위성을 외치는 이유 없이 그런 점이라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런 문제가 생기는 것에서 우리는 어떤 영향을 받는가? 인간은 자신의 삶을 행복하게 살아가고 싶어 한다. 긍정적인 마인드를 지닌 소유자나, 혹은 나처럼 다소 부정적이고 불만의 눈을 가진 사람도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일까? 우리 인간은 언제나 자신의 삶에 항상 휘둘리며 살아간다. 학생은 정해진 시간 안에 교실에서 억지로 의자에 앉아 있어야 하고, 공장노동자는 딱딱한 자세로 계속 동일한 작업을 계속 해야 한다. 같은 자세로 같은 일을 계속 하면 인간은 기계를 이용하는 존재가 아니라 기계에 의해 조작되는 인간이 된다. 시간관념이 무척이나 지루해지고, 더 심해지면 시간관념조차 없어져 버린다. 어째보면 공장노동자가 아니지만 아침에 컴퓨터 앞에 앉아 보고서를 작성하다 점심시간과 퇴근시간을 맞이하는 나 역시 지루한 인생을 살아가고 있다.

 

하이데거가 말한 제1의 지루함, 즉 우리는 우리가 원하지 않은 상황에서 우리의 시간을 그저 소모해야 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인간은 시간적 존재이기에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 그 자체가 자신의 존재성에서 하나의 상황을 부여한다. 지루함이 느끼는 인간은 소외의식은 정신적인 스트레스를 넘어 육체적으로 부담이 온다. 지루한 작업을 하는 이들에게 가장 많이 오는 증세는 신경쇠약증세 내지 노이로제다. 게다가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대부분 술과 담배에 깊이 빠져든다. 자신의 무력함을 순간적 자극으로 그 간극을 채우려는 것이다.

 

인간은 사고하고 생각하는 것에서 이성의 존재로 되겠지만, 이들에게 이성이란 그저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이 제대로 하는지 안 하는지 정도만 볼 것이다. 감성이 메말라져 가기에 늘 머릿속은 흥분상태이며, 다른 누군가와 충돌이 일어나면 과격한 행동을 보여준다. 스트레스가 풀리지 않았기에 잠재적인 공격성향을 가지게 된다. 인간은 지나친 피로와 무기력감은 죽음에 대한 충동을 일으키기도 한다. 그것은 루소가 말하는 인간이 가져야 할 자연성을 상실하게 되는 것이다. 인간은 문명의 사회에 살게 되면서 자연적 조건을 상실했다. 루소가 인간에게 자연적 존재로 되길 바라나, 그것이 가능하지 않은 것을 알고 있다.

 

<사회계약론>의 저술동기도 그렇고, <에밀>에서 에밀조차 자신의 판단력으로 사물을 판단하나 사회 안에서의 인간을 포기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 사회 안에서 자신의 삶은 자기 스스로의 자연에게 맡기는 것이었다. 인간이 자연에 의지하고자 하는 이유는 왜 필요한가? 더 나아가 카를 마르크스의 <자본>을 통해 생각해보자, 마르크스는 노동 그 자체를 없애는 것이 아니라 노동의 그 자체의 지나친 시간을 줄일 것을 요구했다. 어차피 물질로 가득한 문명사회에서 기술의 유지와 혜택이 없다면 인간은 1분 1초로 제대로 생활하기 어려울 것이다.

 

단지 그 노동시간을 줄여 자기만의 삶을 살자는 것이다. 그것은 미술가만 그림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평론가가 영화에 대한 글을 적는 것이라, 누구나 그것이 하고 싶다면 하는 것이다. 바로 여가시간의 활용이고, 그 여가시간으로 통해 인간이 즐기고 싶은 취미와 취향, 그리고 더 나아가 자신의 본질을 찾아가는 것이다. 인간과 동물의 차이점은 먹고 자고 더 나아가 성욕을 지나, 여가시간을 활용하는 점이다. 동물적 본능으로 살아가는 게 아니라 그 본능 이외의 그 무엇을 할 수 있는 것으로 인간의 문화여가생활을 향유하는 것이 가능하다.

 

그런 여가시간을 할애할 수 없다면, 바로 인간은 지루함을 느낄 수밖에 없다. 가령 당신이 집안 내지 회사일로 장거리 출장을 가는데, 그 시간은 출장으로서 일을 하고 있으나, 그 시간 동안 상당히 지루할 것이다. 운전대만 붙잡고 몇 시간 동안 운전하는 것은 인간에게 매우 큰 스트레스로 다가온다. 그러면 이 상황을 모면할 수 있는 것은 옆 자라에 대화상대를 나두거나 혹은 음악을 듣거나 전화통화를 하는 것이다. 자신의 눈은 운전에 집중하더라도 그 지루함은 이길 수 없다. 귀로 통해 전달되는 신호가 결국 지루함으로부터 해방할 수 있는 셈이다.

 

그렇지만 그 음악도 계속 듣고, 이야기하는 것도 한계가 있고, 결국 다시 지루해진다. 인간은 본능적인 생존조건과 싸우는 시간을 지나 이제 지루함이란 시간을 싸우는 것이다. 반복하여 강조하나, 그 투쟁이 되는 지루함이란 시간은 매일 24시간이 주어지기 때문에 승자와 패자도 없이 계속 싸워야 한다. 그 종지부는 인간의 죽음 외에는 없다. 인간의 죽음은 무엇이든지 굴레를 해방할 수 있을 것이라 개인은 여기나, 안타깝게도 그 개인의 주변은 계속 이어갈 뿐이다. 그렇지만 지루함을 느끼지 못하는 것은 우리에게 유일한 것은 죽음이고, 죽음과 같은 취침 역시 한계가 있다.

 

취침시간이 길어지면 그 역시 지루함의 연속으로 되돌아온다. 따라서 우리는 늘 새로운 것을 추구하고 살아갈 필요가 있다. 그런데 그 조건이 되는 것은 작가의 마지막에 나오는 것처럼 “우리는 빵만이 아니라 장미도 바라자! 삶은 장미로 꾸미지 않으면 안 된다!”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빵이란 것은 인간의 생존을 위한 도구이고, 장미는 생존이 아니더라도 인간의 즐거움이 되는 대상이다. 인간은 더 이상 삶에서 즐거움을 빼고 살 수 없는 것이다. 처음에 언급한 것처럼 처음부터 어느 가난하고 비참한 사람들을 비교하여 행복을 논하기가 비논리적인 이유는 행복은 잘 먹고 안전도 중요하지만, 그것을 넘어 자신의 삶을 다른 방식으로 향유할 수 있는 길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반드시 자기에게 그게 아니더라도 생존할 수 있는데도, 우리는 늘 그 이상의 무엇인가를 원한다. 단지 자기가 원하는 것은 정말 자신이 원하는 것인지 아니면 타인에 의해 만들어진 것인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타인의 욕망을 욕망하기를 바라는 세상에서 우리는 사회적으로 인정받기 위해 늘 새로운 기호만 소비할 뿐이다. 우리들 스스로가 바라는 삶에 대해 깊이 들어가지를 못하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이 책의 작가는 소비가 아니라 낭비를 하는 삶이 되라고 한다. 소비는 계속 소모하지만, 낭비는 어느 일정 순간이 되면 더 이상 소모하지 못한다.

 

우리 앞에 천해진미가 산처럼 쌓여 있다고 해도 결국 접시 몇 개 안에 질리고 만다. 그러나 소비의 사회에서는 다양한 것을 계속 찾아가고 구매한다. 어느 방송에 나온 구경거리에 우리는 우리의 삶에서 소원해진다. 기 드보르가 말한 <스펙타클의 사회>에서 생각할 수 있는 것처럼 열렬하게 소비의 사회에 추종하는 이야 말로 가장 소외된 존재다. 그것은 자신이 그것이 아니고선 그 어떤 것이라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자신에게 찾아가는 여정을 주어지지 않은 세상에서 우리 사회는 인간을 계속 기계처럼 예속화하고, 지루함을 선사한다.

 

문명의 발달은 우리에게 시간적 절약을 선사해도, 시간적 만족을 빼앗아 버렸다. 아프리카 원주민 부시맨은 하루 몇 시간 일하고 일주일동안 일도 하지 않고 자기 여가시간에 즐긴다고 한다. 그런데 우리는 하루 반나절 일하고도 가난에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들을 여기저기 본다. 그들이 즐기고 싶은 여가생활에선 시간도 없고 돈도 없다. 도대체 이들에게 주어지는 것은 무엇이란 말인가? 그저 지루함과 피곤함만 넘쳐 얼굴에 깊은 주름만 새겨져 갈 것이다. 이 책에서 흥미로운 사실은 나와 조금 비슷한 생각을 하던 자가 있었다. 지금에 와서 혁명을 일으키자고 한다면 분명 국가에 의해 체포되겠지만, 그 혁명에 대한 생각이 있다면 이런 부분은 중요하다.

 

프랑스혁명과 러시아혁명이 18세기와 20세기를 흔들고 오늘 우리 현대사회를 만들었다. 그런데 혁명 그 자체를 성사해도, 혁명은 언제나 실패로 끝나고 만다. 왜 그럴까? 답은 단순하다. 현재 상황을 바꾸는 것이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점은 현재 상황을 바꾸고 난 후 무엇을 할 것인가이다. 결국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철학적 주제가 다시 수면 위로 떠오르고, 그것에 대한 답으로서 인간은 고민이란 것을 다시 찾지 않을 수가 없다. 하지만 인간은 고민하는 삶을 살기보단 쉬운 답을 찾고, 간단히 지나가는 지름길을 찾기를 바란다.

 

그러다보니 항상 우리는 같은 굴레에 빠져 회전문 유리너머로 보이는 출입구 안을 계속 들여다볼 뿐이다. 때로는 회전문에 의해 안이 보이고, 밖이 보일 것이다. 유리문 너머의 밖이 우리 현실인데, 우리는 안으로 들어가려 한다. 그래서 계속 돌고 도는 매일 24시간의 지옥에 살아간다. 인간에게 24시간은 평등하게 주어지겠지만, 그런다고 그 24시간이 주어지는 횟수는 균등하지 않다. 그렇기에 인간의 삶은 지금에 와서 행복하게 살아가야 하나, 언제나 우리는 지루함에 의해 무기력한 모습을 보여준다.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는 인간은 과연 몇 %인가? 그 일조차 하는 사람도 그 일에 의해 지루함을 느끼는 법이다. 그래서 인간은 늘 새로운 것을 추구하기 마련이다. 지금의 상태에 계속 몸을 맡기는 매너리즘으로 무장하기보단 더 깊이 자신의 세계를 파고들거나 그 옆으로 퍼져가는 것이 즐거운 인생이 될 것이라 여긴다. 그렇다면 빵을 먹은 후에 장미로 가득해질 인생이 될 것이고, 그 장미가 잘 자라면 자신에게 새로운 빵이 될 수 있을 정도로 새로운 길 역시 열어줄 수 있지 않을까란 생각에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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